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93화 (193/760)

193화

“작년이 거의 기적의 해였잖아. 눈에 띄는 걸그룹이 네 개나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어. 그때도 전쟁이니 뭐니 했었는데, 이번에 다 모아서 그림 좀 그려보자는 거지.”

“케이어스는 누가 봐도 인정이긴 한데요.”

“뭐 어때? 기획 의도 들으면 누구도 뭐라고 못할걸?”

보통 특별 무대에 포함되는 아이돌은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둔 메이저 그룹의 신예, 경력과 실력을 쌓은 중견 그룹의 멤버 정도다.

케이어스는 누구도 태클 걸지 못하겠으나, 남은 세 그룹은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신인을 모아서 무대를 만든다는 건 참신한 생각이긴 하네요.”

“왜 안 기뻐 보여. 싫어?”

“아뇨, 좋은데…….”

성필은 장하양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과연 그녀가 대외 활동을 할 만한 멘탈을 유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정규 앨범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지만, 괜히 밖으로 나다녔다가 스트레스만 받는 건 아닐까.

‘라희는 착하니까 괜찮고.’

포유의 효민은 데뷔 때 신아름과 은근한 기 싸움을 펼치기도 했었다.

이제는 소녀연맹에 대한 적개심을 떨쳤으면 좋으련만.

‘하양이가 그런 걸 신경 쓰진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케이어스의 진소유.

자타공인 SNS 불통왕이다. 그녀는 SNS에 글을 올리지 않기로 유명했다.

팬들은 그것마저도 매력이라고 하지만, 성필은 그 점이 항상 아쉬웠었다.

‘전생에서도 소유는 연예계에서 소문이 좋진 않았지.’

밖으로 퍼지지는 않지만, 업계인들은 연예인을 흔히 평가하곤 한다. 그 평가는 한두 다리 건너서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연예인의 인성이 중요하다는 말은 좁은 업계의 폐쇄성에 기인한다.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나는 짓을 했다간, 어느새 주변 전부가 알게 되니까.

‘그런데 소유가 성격이 안 좋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맞춰주는 걸 못 하는 타입이겠지.’

성질이 더럽다거나, 갑질 논란 같은 건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에이 씨. 괜히 신경 써줬네. 소녀연맹 자리는 비워?”

“지금 결정해야 해요?”

“그건 아닌데. 난 네가 해줬으면 좋겠다.”

“제가 아니라 소녀연맹이 하는 거긴 하지만요. 일단 회사로 돌아가서 알아볼게요.”

“그래. 웬만하면 빨리 연락 줘. 너 빼고는 다 확답 줬거든.”

“……저한테 제일 마지막으로 연락하신 거예요?”

“어. 너랑은 얼굴 보고 말하려고 했지. 밥 먹으러 가자. 네가 사는 거지?”

“네?”

“이런 기회까지 줬는데 밥도 안 사주게?”

“아니, 지금 아침이잖아요. 방금 출근하신…….”

“괜찮아. 밥 먹으러 가자.”

성필은 헛웃음을 지으며 구상준의 뒤를 따랐다. 이게 그 나름의 호의란 것을 알았기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 *

물류창고의 반장은 새 알바들을 태운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은 새벽 1시이니, 안전 교육을 더 빨리 끝내야 할 듯했다. 지금도 꽤 늦어버렸다.

알바들이 대기실로 왔단 연락을 받은 반장은 그곳으로 향했다.

대기실로 들어서자마자 괴상한 여자가 보인다.

‘밤인데 왜 마스크랑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자기가 연예인이라도 되나.

아니면 머리가 살짝 이상한 사람인가.

반장은 안전 교육을 하면서도 그녀의 기묘한 아우라에 자꾸만 흘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 뭐야?”

“몰라요. 픽업할 때부터 저 차림이던데요.”

그 여자는 ‘분류’ 업무로 갔다.

소형 박스가 중앙으로 모이면 사람들이 지역별로 분류한다.

그 택배들이 지역별 마대 자루에 차곡차곡 절반쯤 쌓이면, 자루를 빼서 옮긴 뒤 새로운 자루를 걸어야 한다.

이것이 그 여자가 맡은 임무였다.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잘 관찰해.”

“네.”

반장은 물류창고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작업을 감독했다.

‘의외로 일을 잘하네?’

그 여자는 초보자라는 뜻의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와 함께 있던 작업자들이 꽤 있었으나, 업무 미숙으로 인해 다른 자리로 배치되었다.

남은 건 그 여자와 소수 인원뿐이었다.

‘이 일을 예전에도 해봤나?’

자루가 절반쯤 찼을 때 빼면, 그 무게는 대략 15kg을 넘는다.

그것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하니, 여자에게는 힘든 일이다. 이상한 여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벌써부터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처음이랑 작업 속도도 별로 차이 안 나네.’

반장은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4시간이 지나고 햇빛이 하늘 너머로 비쳐올 때쯤, 모든 작업자가 일을 마쳤다.

이제 새로운 사람들이 도착할 것이다.

“저기요.”

반장은 이상한 여자를 불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반장 쪽을 보았으나,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 잘하던데. 다음에도 올래요? 일당 조금 더 쳐줄게요.”

여자는 목청을 다듬고는, 고의로 만들어낸 듯한 하이톤의 목소리를 냈다.

“네에. 금요일이랑 토요일마다 올 수 있을까요?”

다음 날이 휴일인 날들이다.

아마 평일에도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는 듯했다. 반장은 선선히 승낙하고 그녀에게서 연락처를 얻어냈다.

여자는 팀 차량으로 들어가 서울로 향했다.

“반장님. 그 이상한 사람 일 잘하던데요?”

“안 그래도 정기적으로 나와달라고 했어.”

“온대요?”

“어.”

어쩌면, 도망가는 게 예사인 이 물류창고에 새로운 에이스가 나타날 수도 있겠다.

* * *

새벽과 아침의 경계.

장하양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가만히 있어도 무릎과 손이 덜덜 떨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직도 숙소는 조용했다.

장하양은 모두가 깨어나기 전에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세상모르고 주무시네.’

장하양은 침대에 누워 짧은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베개를 열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몇 년 동안 가로 엔터로부터 받아온 생활비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에다가 앞으로 몇 주만 아르바이트 더 하자. 그리고…….’

어머니의 계좌로 부쳐주는 것이다.

얼마 전 아버지가 회사로 찾아왔었다. 장하양이 집을 나갈 때만 해도 집을 경매에 내놓은 뒤였으니, 이제는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

회사로 온 것도 돈을 달라는 이유였고.

‘이번만, 진짜 이번만이야.’

천륜은 끊을 수 없다고 하던가.

장하양도 부모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도저히 부모님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이게 부모와 관련되는 마지막 일일 것이다.

장하양은 깊이 다짐하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하양아, 일어나. 해 떴어.”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겨우 잠에 들었던 장하양은 눈을 떴다.

백설하가 보였다.

“일어나서 씻고 밥 먹자.”

“……네, 언니.”

이미 두 시간 전에 씻었지만, 다시 씻은 뒤 밥상에 자리했다.

병든 닭처럼 밥을 깨작이고 있으니 신아름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언니 어디 아파요?”

장하양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잠 설쳐서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름아.”

다음 날 새벽에도 장하양은 물류 센터로 향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나마 일요일은 푹 쉬었으나, 안 쓰던 근육을 계속 써서 그런지 근육통이 심했다.

‘계속하다 보면 나아질 거야.’

월요일, 장하양은 지친 몸을 이끌고 회사로 출근했다. 그랬더니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양아, 연말 특별 무대 서볼래?”

“연말 특별 무대요?”

여러 걸그룹의 멤버가 한 명씩 모여서 유닛을 만들고, 이벤트성의 곡을 보여준다고 한다.

장하양도 그게 어떤 것인지 안다.

데뷔 시점이 연말과 맞물렸었기에, 특이한 컨셉으로 무대를 준비했던 아이돌을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무대에 설 수 있는 건…….

“유명하신 분들 아닌가요? 거기 나오시는 분들이요. 저는…….”

“소녀연맹도 유명해.”

거기까지는 이해가 됐다.

“그런데 왜 저예요? 설하 언니나 아라가 나가는 게…….”

백설하는 보컬로 독보적이며, 조아라는 댄스에서 그러하다.

장하양 자신보다 훨씬 멋진 무대를 보여줄 게 분명하다.

“PD님이 너를 콕 집으셨어. 하양이 네가 눈에 띄었나 봐. 연말까지는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주마다 다 같이 모여서 연습하고 그럴 거야. 대충하면 안 되겠지만, 앨범 준비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야.”

“…….”

장하양은 자신의 어깨를 짚고 꾹꾹 눌렀다. 근육통 때문에 저릿한 고통이 몸 전체로 퍼졌다.

그 고통을 온전히 느끼려고 노력하며, 장하양은 성필을 관찰했다.

명백하게 이전보다 따뜻한 분위기였다.

‘내 가정사를 들은 이후부터…….’

성필은 장하양에게 훨씬 더 다정해졌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의 다정함이 동정심으로부터 나왔단 걸 알기에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어깨로부터 시작된 통증은 어느 순간부터 심장까지도 파고들어 왔다.

“네, 할게요.”

장하양은 승낙했다.

그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진 않았다. 옛날보다 훨씬 더 그런 마음이 강해졌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니까.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냐. 네가 잘나서 그런 거지.”

그의 칭찬에 장하양은 기쁜 미소를 지었다.

이 소식에 다른 멤버들도 기뻐했다.

“케이어스랑 같은 무대요?”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 건 역시 신아름이었다.

“누구요? 김민주?”

“아니. 소유 님.”

“소유? 리카, 너 소유 알아?”

“알아. 근데 안 친했었어.”

“왜?”

“소유 언니는 다른 연습생이랑도 안 친했어. 나, 나한테만 쌀쌀맞게 군 거 아니야!”

“누가 뭐래. 근데 옛날에 에리카 영통 왔을 땐 다 친해 보이던데?”

“같은 그룹이니까 친해져야겠지.”

“와, 진짜 계산적이다. 혹시 리카 너도?”

“들켰군.”

신아름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리카 너도 그랬어? 사실 나도 그랬거든. 너랑 친한 척하느라 귀찮아 죽을 뻔했는데, 이제 각자 갈 길 가자. 친한 모습은 팬들 앞에서만 비즈니스적으로 하고. 알겠지?”

“히, 히도이(너무해)!”

“에이, 리카. 숙소에서는 친한 척할 필요 없다니까?”

“아냐! 아타시(나)는 아름이 좋아!”

“비즈니스가 삶이 돼버렸네.”

“아니라구!”

장하양은 기뻐하는 동생들을 보니 자신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동생들도 좋아하고, 박 이사님도 나한테 권해주셨으니까, 하자. 게다가 연습도 주에 한 번뿐이라잖아. 하는 게 좋은 거야.’

점심 식사를 마친 장하양은 산책이라도 할 겸 회사 밖으로 나갔다.

“……더워.”

여름 특유의 습함이 그대로 몸에 달라붙었다.

장하양은 더 불쾌해지기 전에 재빨리 회사로 돌아왔다.

* * *

석세스 엔터는 가로 엔터보다 먼저 특별 무대 제안을 받았다.

다른 점은, 구상준 PD가 특정 멤버를 짚어주지 않았단 것이다.

윤상열은 글로브를 자신의 작업실로 불러 모은 후, 그녀들을 쭉 훑어보았다.

“참나, 복도 많지.”

윤상열의 의미 모를 말에, 방금까지도 군인처럼 각진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글로브는 허리에 힘을 더 주었다.

그에게 책잡힐 만한 행동을 해선 안 되기에, 자세부터가 완벽해야 한다.

저번에는 등 좀 굽히고 있었다고 ‘기가 빠졌네’라며 갈굼을 당했었다.

“너네 연차에 특별 무대 제안도 받고.”

겉모습만으론 윤상열이 기쁜 건지 속이 뒤틀린 건지 알 수 없었다.

혀를 차는 것을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기도 했고, 목소리가 높은 것을 들으면 기쁜 듯하기도 했다.

“포유. 케이어스. 그리고 소녀연맹인지 지랄인지 하는 거랑 같이 무대 뛴대. 연말에 특별 무대들은 다 같이 본 적 있지? 콜라보 곡이라거나, 무대 바꿔하기나, 동물 잠옷 같은 거 입고 춤추는 거.”

“저, 저기, 가요대제전 같은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너 뭐 들었어. 뮤직 스테이지 연말 무대라니까. 내 말 안 듣냐?”

“죄, 죄송합니다…….”

윤상열은 혀를 차곤 무심하게 물었다.

“여기 나가고 싶은 사람?”

글로브는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먼저 나섰다가 윤상열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애초에 왜 그가 직접 불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평소대로 혼자서 찍으면 될 것을.

“저, 저어, 요…….”

다들 미루기만 하고 있을 때, 양소민이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저, 나가고, 싶어요…….”

양소민은 일생일대의 용기를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윤상열이 가장 싫어하는 글로브 멤버였기에, 그만큼 그에게 자주 혼났다.

그녀가 의욕을 내는 것도, 구석에 짜져 있는 것도, 전부 윤상열의 심기를 거슬렀다.

이유는 자명했다.

“하, 설마설마했는데.”

윤상열의 기분 상한 어조에 양소민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양소민. 넌 뭐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이런 무대는 나가고 싶어?”

“아, 으…….”

안다, 자신이 글로브에서 가장 떨어지는 것쯤은. 그래도 특별 무대를 하고 싶었다.

그곳에는 소녀연맹이 있으니까.

혹시나 단체로 연습하러 모이면, 소녀연맹 멤버와 성필이 같이 올 수도 있다. 그러면 한두 번 정도는 그와 만날 가능성이 있다.

물론 무대도 성심성의껏 하겠지만, 성필을 만나고 싶어서 용기 내어 손들었는데…….

“네 분수를 아세요 제발. 소민 님 제발요, 네?”

돌아오는 건 인격모독이었다.

“소민 님이 나가시면요. 글로브 전체로 욕먹을 거거든요? 자기 수준을 좀 알고…….”

“저요, 저 할래요.”

라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신아름이 내쫓겼을 때, 그녀 대신 데뷔조로 들어왔던 아이였다.

“프로듀서님 말씀대로 소민이는 실력이 부족하잖아요. 제가 할게요.”

라희는 자신이 신아름의 자리를 차지한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신아름에 비해 부족하기만 했으니까.

그 죄책감 때문에 더욱 노력하게 됐다. 거저 얻은 자리란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라희의 실력은 글로브 내에서도 상위권에 있게 됐다.

그런 라희가, 양소민을 흘겨보았다.

“소민이는 못 미더워요.”

양소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윤상열은 라희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고였다.

“다른 애들은? 하고 싶은 사람 없어?”

없는 듯했다.

“그래, 그럼 라희 네가 해라.”

“감사합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윤상열의 작업실을 나오고 나서, 라희는 양소민을 와락 껴안았다.

“소민아 미안해. 그런 말 해서 미안.”

“아, 아녜요 언니. 저 도와주려고 그러셨잖아요…….”

“그래도 미안. 속상했지?”

“아녜요, 아니, 저는, 아니…….”

기어코, 양소민은 라희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 * *

장하양은 민경섭과 함께 방송국에서 잡아준 연습실로 향했다.

앞으로는 주마다 한 번씩, 콜라보팀 전체가 이곳에 모여 특별 무대를 준비하게 된다.

“안녕하세요.”

장하양은 연습실로 들어가자마자 활기찬 인사를 건넸다.

안에 있는 건 아직 한 명, 글로브의 라희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라희는 활기차게 답하더니, 장하양의 뒤에 있는 민경섭을 보곤 깜짝 놀랐다.

“매니저니이이임!”

라희는 돌고래 같은 고음을 내지르며 민경섭에게 달려갔다.

민경섭도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잘 지냈어?”

“네네! 너어무 오랜만에 봬요! 이야, 거기서 잘 지내시나 보네요? 살이 더 찌셨네!”

“……응.”

비즈니스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아닌 듯했다.

라희는 진심으로 민경섭을 반가워하는 것이다.

‘살이 쪘네’, ‘얼굴에 화색이 도네’, ‘더 복스러워지셨네’ 등등, 그녀의 팩트 폭력은 다른 인원이 오고서야 끝났다.

포유의 효민이었다.

“안녕하세요…….”

효민은 굉장히 지친 얼굴이었다. 실제로도 지쳐 있었다.

포유는 두 번째 앨범이 성공에 오른 이후, 멤버들이 간신히 버틸 만큼 많은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것은 이번 컴백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랐다.

김명운의 매니지먼트 능력에 힘입어 대박을 쳤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활동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3개월에 한 번씩 컴백하느라 죽을 맛인데, 특별 무대까지 잡힌 것이다.

“음료 좀 드실래요?”

장하양이 에너지 드링크를 내밀자, 효민은 일순 몸을 떨었다.

장하양의 비현실적인 외모 때문도 있지만, 그녀가 소녀연맹이기 때문이었다.

효민은 요즘도 소녀연맹에 대한 경쟁심과 질투를 태우는 중이었다.

“기운이 날 거예요.”

하지만 장하양의 인자한 미소를 보니, 효민의 경계심도 사르르 녹아버렸다.

신아름과는 달리, 장하양은 외모부터 아우라까지 무해한 솜사탕 같았다.

“아, 아, 감사합니다.”

셋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마지막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케이어스의 진소유.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연습실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듯했다.

다들 안무 연습을 고려해서 간편한 복장으로 왔으나, 진소유는 화보 촬영이라도 가는 듯 치렁치렁한 복장을 쭉 빼입었다.

진소유는 연습실의 면면을 돌아보더니 깊은 미소를 보였다.

“라희 씨, 안녕하세요.”

라희는 그녀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황송하다는 듯 무의식적으로 허리까지 살짝 굽혔다.

“효민 씨, 안녕하세요.”

효민은 멍한 눈빛으로 진소유의 얼굴을 응시했다. 진소유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아우라가 있었다.

이어서 마지막 차례.

“안녕하세요.”

진소유는 장하양과 악수했다.

장하양은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전혀 주눅 들지 않는 태도로, 그녀와 같은 시선에서 눈빛을 주고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진소유와 장하양의 악수는 다른 이들보다 확연히 길었다. 무언가 통했다, 라기보다는 진소유가 오랫동안 장하양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은 먹잇감을 탐색하는 뱀처럼 장하양의 몸을 핥았다.

그 종착지는 얼굴이었다.

“아…….”

진소유는 뱀이 혓바닥을 내밀 듯 날카롭게 숨을 뱉었다.

“예쁘시네요.”

장하양은 구름이 모습을 바꾸듯 어렴풋이 입꼬리만 올렸다.

“소유 님도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선 광경은 조명조차 없음에도 화보의 한 페이지 같았다.

그 둘을 지켜보던 라희와 효민은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왠지 모르지만, 라희와 효민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허탈하게 웃었다.

* * *

가로 엔터 매니저팀 회의.

평소에는 스케줄만 확인하는 정도였지만, 오랜만에 새로운 안건이 올라왔다.

민경섭은 걱정이 가득 서린 목소리였다.

“하양이가 이상하게 핸드폰을 자주 만져.”

“저희 심각한 주제는 대부분 애들 연애 관련된 거네요.”

“심각하지 그럼. 핸드폰을 자주 만지는 건 1차 경고 사인이야!”

김수희와 안이상도 장하양의 변화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픽업해줄 때마다 장하양은 특유의 분위기를 마음껏 발산했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고, 대화하는 상대에 맞춰서 주제를 골라서 운전이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매니저팀 사이에서도 장하양의 친절함은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선 차에 타고도 핸드폰만 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매니저팀이 장하양의 이상행동에 대해 토론을 나누던 도중, 잠자코 있던 성필이 물었다.

“최근 일주일 내에 벌어진 일이지?”

“네. 남친을 만났다면 근래예요. 아, 혹시 SNS 메신저 같은 걸로 먼저 연락 온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일주일 내에 하양이한테 뭔가 특별한 일은 없었어?”

“요즘 계속 앨범 작업이랑 트레이닝만 하고 있잖아요. 뭔가 특별한 일이랄 게…… 아!”

저번 주, 장하양은 특별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다른 걸그룹의 멤버들과 만났었다.

“아, 그렇네. 특별 무대 준비 시작했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성필의 얼굴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양이가 친구들을 사귀었구나! 드디어!”

“연애가 아니었네요.”

포유의 효민, 글로브의 라희, 케이어스의 진소유와 친구가 된 게 틀림없다.

“단톡방에서 얘기만 해도 즐거울 때잖아.”

그 시각, 장하양은 성필이 말한 ‘친구들’과의 톡방을 보고 있었다.

[진소유: 효민이 빨리 안무 연습 영상 올려(오후 3:46)]

[진소유: 대답 안 해?(오후 3:47)]

[우효민: 죄송합니다 언니. 행사 방금 끝나서 답장이 느렸습니다. 회사 돌아가면 찍어서 올리겠습니다.(오후 4:02)]

[진소유: 벌써 올리기로 한 시간 지났잖아. 제대로 안 해?(오후 4:02)]

[우효민: 죄송합니다…(오후 4:03)

[진소유: 됐다. 라희 피드백 먼저 시작할게.(오후 4:03)

[사진 +30]

[진소유: 이거 봐 라희야. 네 춤 각이 얼마나 안 사는지. 이거 찍고 확인하면서 이상하단 생각 안 들었어?(오후 4:04)

[진소유: 대답 안 해?(오후 4:05)

[라희: 다음엔 더 잘하겠습니다…(오후 4:06)]

[진소유: 내가 붉은 이펙트 준 부분 중점적으로 고쳐서 다시 찍어.(오후 4:06)]

장하양의 표정은.

“하아.”

근심으로 가득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