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92화 (192/760)

192화

정규 앨범 타이틀곡 1번, ‘아라베스크’는 보컬 라인이 붙자마자 안무를 받았다.

가로 엔터는 정규 앨범에 사활을 걸었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수의 안무팀에게 ‘아라베스크’를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로 엔터가 받은 안무 시안의 수도 늘어났다.

“지금까지는 백민정 안무가가 안무를 거의 다 맡았었잖아요. 이번엔 다르게 합시다.”

백민정이 들으면 서운해할 테지만, 정규 앨범에서는 만전을 기해야 한다.

“저희가 받은 여러 개의 시안을 짜깁기해서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짜는 거예요.”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여러 시안을 검토하고 편집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의 안무가가 필요하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소녀연맹과 고락을 함께해 온 조아라의 스승, 백민정이었다.

아무래도 쌓아 온 인연이 있는 데다가, 멤버들과도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니 작업에 속도가 붙으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이 사람으로 하면 안 돼요?”

조아라가 어느 시안에 꽂혀버렸다.

안무가, 서학준.

조아라는 자나 깨나 서학준의 시안만 돌려 보았다.

“이 사람이 저희 안무 편집해줬으면 좋겠어요.”

서학준은 남자이기에, 안무 자체는 그가 만들고 시안 영상은 여제자들이 찍게 했다.

다섯 명의 여자 댄서들의 뒤로 서학준이 근엄하게 앉아 있고, 그 주위를 십수 명의 댄서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 고압적인 분위기에서 펼쳐진 시안은 조아라의 마음을 그대로 빼앗았다.

“아라야, 괜찮겠어? 민정이는…….”

“백 쌤도 이해하겠죠.”

냉혹한 아이돌의 세계에서는 스승이고 뭐고 없다.

조아라에게 필요한 건 인연이 아니라, 진정으로 뛰어난 안무가였다.

* * *

백민정도 조아라가 어느 시안에 홀려버렸단 소식을 들었다.

‘아라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쩌다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아이로 자라난 거니!

물론 조아라도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백민정도 안무가로서, 다른 안무가에게 밀린 건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다.

다만, 직접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쌤, 이 사람이 만든 거 진짜 대박이에요”

흥, 그래. 얼마나 대단한지 봐줄게.

어차피 이 업계는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라, 조아라가 이토록 좋아하는 안무가도 백민정과 면식이 있을 터였다.

‘나랑 친한 애이기만 해 봐라…….’

술자리에 불러내서 왜 자신의 제자를 꼬셨냐며 잔뜩 화낼 것이다.

하지만 시안을 보고, 백민정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까까지 삐쳤던 기색은 조금도 없이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또 누구라고. 서 쌤이었네.”

“쌤이요?”

“어, 내 선생님.”

“쌤도 쌤이 있어요?”

조아라가 놀라서 묻자, 백민정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엄마도 엄마가 있어요?’라고 묻는 듯했다.

“그럼. 나도 쌤이 있지.”

“……그러게요.”

생각해보면, 백민정에게도 선생님이 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백민정이 홀로 춤을 터득했을 리는 없잖은가.

“이 서학준이란 분……. 나는 그분 뭐라고 불러요? 쌤쌤?”

“서 쌤이라고 불러.”

“쌤쌤이 더 입에 붙는데.”

“그럼 그렇게 불러.”

“쌤쌤은 아직도 현역이에요?”

“현역이니까 너희 안무를 맡았지.”

조아라는 서학준의 안무에 반했다.

넘치는 힘과 에너지! 보기만 해도 따라 추고 싶다는 기분이 팍팍 들었다.

그런 안무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도 쌤쌤한테 배울래요.”

“……나 버리고?”

“이제 쌤한테는 배울 거 다 배운 거 같아요.”

“아, 아니야! 너 아직 배울 거 얼마나 많은데!”

백민정은 아직 조아라가 배우지 못한 춤의 장르를 나열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밥줄, 아니, 원생을 계속 붙잡아두려 했다.

하지만 조아라의 눈에 서린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 쌤 바빠. 너희 안무도 왜 맡아주셨는지 모르겠어. 성필 오빠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려서 애원이라도 했나?”

“뭔…… 듣는 사람마다 아저씨 이미지가 다 비슷하네요.”

“그런 오빠니까.”

옛날에 백민정이 성필에게 서학준을 소개해주긴 했으나, 두 사람이 친한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서학준은 여러모로 바빴으니까.

“왜 바빠요?”

“댄스 대회 준비하시느라고.”

“댄스 대회! 어디요? 무슨 세계 대회 같은 거예요?”

“댄스 스포츠 대회.”

“……댄스 스포츠?”

조아라는 자신이 생각하는 댄스 스포츠를 떠올려보았다.

부담스럽게 달라붙는 옷을 입고, 남녀 댄서가 몸을 뒤섞으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어디서 생긴 고정관념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로 나이가 든 사람이 추는 춤이란 이미지였다.

“모던 댄스, 라고 부르기도 해. 여러 장르가 있어. 댄스사(史)적인 모던 댄스랑은 조금 구별되려나. 왈츠, 탱고, 퀵스텝 기타 등등……, 아라야 너 관심 없구나?”

댄스 스포츠라는 단어를 들은 이후, 조아라의 얼굴을 채우고 있던 흥미는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댄스 스포츠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닌 거죠?”

그런 춤을 추는 사람이 아이돌 댄스를 창작할 수 있을 리 없다.

조아라가 생각하기에, 서학준은 다른 전문 분야가 있을 터였다.

“댄스 스포츠 전문이야. 그러다가 곁다리로 스트릿 댄스랑 어반 스타일을 배우신 거고.”

“……곁다리로 스트릿 댄스요?”

조아라가 거의 10년 동안 배워온 게 스트릿 댄스였다. 그런데 그것을 곁다리로 배웠으면서,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만들어냈다고?

그렇게 멋진 안무를?

“내가 왈츠 한 번 보여줄까?”

백민정은 조아라가 은근히 댄스 스포츠를 무시하는 것을 눈치챘다.

생각이야 자유지만, 잘 알지도 못하고 선입견을 가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제자라면 더욱더.

백민정은 의자를 밀고 자세를 잡았다.

“아.”

조아라가 놀랐다.

백민정이 몸을 곧게 폈다. 날개를 펼치듯이 팔꿈치를 좌우로 쫙 펴고, 오른손은 오른쪽 가슴 옆에, 왼손은 펼쳐서 머리 옆에 두었다.

‘백조 같아.’

백민정은 오랜 시간 스트릿 댄스를 배웠고, 그 장르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몸을 굽히는 형태의 춤을 많이 춰왔다.

그래서 기본자세 자체가 어깨와 등이 살짝 굽은 형태였다. 숙련된 댄서로서의 증명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조아라도 가로 엔터로 들어와 자세를 교정하기 전에는 백민정과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의 백민정은 날개를 펼친 백조처럼 우아하고 고고한 모습이었다.

“자, 이게 기본적인 자세고.”

백민정이 왈츠의 복스 스텝을 밟았다.

마치 사각형 안에서만 발을 디디듯, 백민정은 일정 범위를 절대 넘어가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한없이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동시에 고아하며 아름다운 스텝이다.

단순한 걸음만으로도 방 안이 화사해지는 듯했다.

백민정은 몇 번 더 스텝을 밟다가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나도 심심풀이로 쌤한테 배웠던 거거든. 어때, 느낌이 색다르지? 파트너가 있으면 더 멋지다?”

조아라는 지금까지 댄스 스포츠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을 전부 지워야만 했다.

“이런 춤을 배운 사람이…….”

‘아라베스크’ 같은 격한 안무를 만든 건가?

매치가 잘 되지 않는다. 안무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강점을 안무에 넣는 법인데, ‘아라베스크’의 안무는 왈츠와는 전혀 달랐다.

“만류귀종이라고 하잖아. 어떤 것에 정진하려면 그 반대를 배워보는 것도 도움이 돼. 강직함을 표현하려면 부드러움도 알아야 하는 거지.”

“와, 쌤이 생각한 말이에요?”

조아라가 존경을 가득 담아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어…… 그렇지?”

사실, 아니었다.

백민정도 스승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하지만 제자의 존경하는 눈빛을 보는 게 썩 기분 좋았던 터라, 스승이란 위치에 걸맞지 않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조아라는 시간이 나면 댄스 스포츠도 배우기로 결심했다.

“아, 음, 그래…….”

백민정은 원생을 빼앗길 수도 있단 생각에 탐탁지 않은 듯했으나, 나중에 결심이 서면 서학준을 소개해주기로 약속했다.

조아라는 새로운 영감을 품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입구에 서니 무언가 밟혔다.

“소금?”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성필이 보였다.

“아저씨. 밖에 소금 떨어져 있어요. 청소해야겠는데.”

“어, 나중에 청소할게.”

조아라는 바로 연습실로 향하려다가 성필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냈다.

무언가 고민이 있을 때의 얼굴이다.

“아저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아니, 그렇진 않고.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래.”

성필은 방금 장하양과의 상담을 마쳤다. 그녀의 가정사를 들은 뒤, 도저히 평정한 상태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게 조아라의 눈에 보였다.

‘아저씨 또 고생하고 있나 보네.’

성필의 속내까지 알 수 없는 조아라의 입장에서는, 또 성필이 소녀연맹 관련 업무를 하느라 지쳤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힘내요.”

“어?”

“일하는 것도 좋은데, 가끔은 쉬면서 해요.”

성필은 당황했다. 그러나 곧 감동한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 아라가 점점 더 어른스러워지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걍 아저씨 힘들어 보여서 한 말이에요.”

“머리 빗겨달라고 일부러 기특한 말 한 거야?”

“나 아저씨가 빗질하는 거 안 좋아하거든요?! 저번에 한 번 좋아했다고 자꾸 써먹지 마요!”

‘내가 뭐 개인 줄 알아’라며, 조아라는 씩씩대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성필의 얼굴에는 다시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양이를 어떡하지.’

자신의 가정사를 이야기하던 장하양은, 이제껏 성필이 보아왔던 그녀와 달랐다.

힘든 말 하나 없이 꿋꿋하게 자신의 일을 해 오던 장하양이었으나, 상담 때는 그렇게 우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성필이 장하양을 연습생으로 들어오길 설득했을 때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계속해서 어필하며 ‘연습생은 될 수 없다’고 했던 장하양과…….

‘부모를 못 만나게 하는 게 최선이겠지.’

홍규헌도 다시 장하양의 아버지가 찾아오면 경찰부터 부를 거라 했으니, 앞으로도 장하양이 아버지를 대면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아.’

장하양은 성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

학대를 당해 마음에 상처를 품은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상처가 곪아간다. 부모와의 관계 해결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죽을 때까지도 상처를 치료할 수가 없다.

‘자그마치 20년이야.’

인간이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란 자식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인물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단 말은, 단순히 외모나 성격이 유전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식은 좋든 싫든 부모의 삶을 모방하게 되어 있다.

장하양도 후일 깨닫게 될 것이다.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과 자신이 닮아있다는 거…….’

자식이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면 할수록, 부모는 더더욱 용서 불가능한 원수가 되어버린다.

부모가 자신에게 어떤 짓을 행했는지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깨닫게 된다면.

자식은 죽을 때까지 부모에 대한 증오를 씹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양이가 당했던 일은 정상이 아니야.’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필도 정신이 엇나가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타인도 그럴진대 본인은 어떻겠는가.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품고 자신도 뒤틀리게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성필도 그녀의 사정을 모를 때는 부모와 화해하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화해와 용서만이 유일한 해독제니까.

‘그런데 하양이 집안 사정을 보면…… 불가능하잖아.’

장하양이 아무리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사랑받는다고 해도, 그녀의 가슴속에 새겨진 20년의 뒤틀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방법이 없다.

성필 자신이 장하양의 부모나 가족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해줄 도리가 없다.

그나마…….

‘지금부터라도, 좋은 추억을 훨씬 더 많이 만들어줘야지.’

때때로 괴로운 기억이 장하양의 표면을 찢고 나오겠지만, 그런 일은 최소한이 되도록 좋은 기억으로 덧칠해줘야만 한다.

‘하양이는 행복해져야 해.’

장하양을 처음 데려왔을 때처럼, 성필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 * *

매니저 김수희는 숙소 검사와 관리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처음에는 아이돌 멤버들이 신인 매니저라며 괴롭히거나 텃세를 부리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난 괜찮…….”

“아라쨩, 밥 한 공기 더 퍼줘!”

“괜찮으시다잖아.”

“이런 거 다 내숭인 거야!”

텃세는커녕 너무 친근하게 대해줘서 문제였다.

덕분에 김수희는 금요일에 숙소 점검을 갈 때마다 멤버들이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동기 매니저인 안이상에게 말해주니 굉장히 부러워했었다. 그는 남자여서 숙소 검사는 할 수 없으니, 평생 이 맛을 모르고 살아가리라.

‘내가 소녀연맹이 해준 밥을 먹다니.’

나중에 소녀연맹이 유명해지면 무용담처럼 풀어도 될 것이다.

오늘도 숙소 검사를 왔다.

먼저 동생 라인의 방부터였다. 그녀들은 서랍을 열어두고 김수희의 검사를 기다렸다.

‘처음 봤을 땐 너무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개인 소지품을 검사한다니.’

손혜빈은 옷장이나 서랍은 뒤져보지 말고 쌓인 옷을 꾹꾹 누르기만 하라 했었다.

담배나 술 등을 감춰두었다면 촉감으로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대부분의 숨겨야 할 물건들은 고체이니까, 만지면 안다.

“어서 보세요!”

리카는 항상 자기 서랍을 가장 먼저 확인하라고 한다.

양말, 속옷, 상의와 하의가 구역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정리 방식이었다.

“아, 아름아. 이거 다 빤 거 맞지? 안 빤 거 막 구겨 넣은 거 아니지?”

“다 깨끗한 거예요.”

그에 비해 신아름은 서랍 안에 옷을 전부 구겨 넣는다. 그나마 옷장은 잘 정리된 편이다.

“어지러워 보여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다 알아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다짐하건대 신아름은 이 안에서 원하는 것을 찾기 힘들 게 분명하다.

마지막은 조아라였다. 그녀는 옷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냥 탑처럼 차곡차곡 쌓아둔다.

옷 찾을 때 불편할 거 같다.

“어디 보…….”

조아라의 서랍을 보던 김수희의 말문이 막혔다.

조아라는 옷을 갠 뒤 순서를 가리지 않고 서랍 안에 쌓아버린다. 그래서 확인할 때마다 가장 위에 있는 옷의 종류가 달랐는데, 이번에는 속옷이었다.

“왜요? 뭐 있어요?”

“어, 어? 아, 니, 아니야.”

김수희는 손을 미세하게 떨면서 서랍을 닫았다. 언니 라인의 방, 화장실, 주방, 거실 등을 검사하면서도 조아라의 속옷이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나도 저런 거 사본 적 없는데…….’

대체 조아라는 뭐지?

저런 팬티를 왜 가지고 있는 거지?

어디에 쓰려고?!

단순히 조아라의 취향일까? 아니, 그렇다기엔 의도가 너무 다분하게 보이는데…….

‘그래,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김수희는 프로 정신을 발휘했다.

이건 개인의 취향이나 숨겨야 할 일 따위가 아니었다. 매니지먼트 팀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실체를 밝혀내야만 한다.

‘난 냉혹한 매니저야.’

숙소 검사는 금요일이었기에, 김수희는 다음 주 월요일에 즉시 보고를 올렸다.

아침의 매니저팀 회의.

김수희의 보고를 들은 민경섭이 반문했다.

“뭐?”

“티팬티라니까요!”

“뭐?”

“들으셨잖아요! 아라가 티팬티를 가지고 있다구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예요!”

“뭐?”

민경섭은 얼이 나갔다.

티팬티라니, 본 적도 없다.

“……혹시.”

정신을 되찾은 민경섭이 냉철한 추측을 제기했다.

“여자들은 하나둘씩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안 가지고 있거든요?!”

“김 매니저가 특이 케이스고…….”

“팀장님 그거 성희롱이 될 소지가 다분해요!”

“이상아.”

얼굴만 붉히고 있던 남자 매니저, 안이상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매니저, 안이상!”

“손 안 들어도 된다니까.”

“아, 예.”

“넌 어떻게 생각해.”

안이상은 시선을 피하며 땀만 뽈뽈 흘렸다. 그러다가 모기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가지고…… 있는 애를…… 두 명 정도 보기는…… 했어요……. 전 여자친구들…….”

안이상의 대답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뒤, 민경섭이 김수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통은 없다니까요?! 이상이 여친들은 과감한 애들이라 있다 쳐요. 근데 아라는 왜 가지고 있는데요?”

“……그러게?!”

민경섭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이건 팀장이 어떻게 해볼 사태가 아니었다.

“매니지먼트 관리 감독 이사님을 불러!”

성필은 정지음의 작업실에 있다가 급히 매니저 대기실로 불려왔다.

“왜 그래?”

“형, 큰일이에요!”

민경섭은 세계가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급박한 투로 설명했다.

“……뭐라고?”

“티팬티를 가지고 있대요 아라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요! 이게 말이 돼요? 내 머릿속의 아이돌은 안 그런다고요!”

“…….”

“티팬티라는 건 미적 목적이 다분한 의류잖아요! 본인이 만족하려고 입는 게 아니잖아요! 편해서 입는 사람이 있다 쳐도 보통은 아니잖아요! 티팬티 입는 아이돌이라니 본 적도 없, 아니, 들은 적도 없어요!”

성필은 자신을 바라보는 다급한 시선들을 느꼈다. 그들은 성필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음, 누구 종이랑 펜 좀.”

성필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희 씨. 그 팬티란 게 이렇게 생겼어요?”

“아, 네! 맞아요! 딱 이래요!”

“이거 스포츠 티팬티예요.”

“네?”

“그, 아라가 춤을 자주 추잖아요. 타이트한 하의를 많이 입고요. 이거 자국…… 팬티…… 그, 라인 안 드러나게 하려고 입는 거예요. 먹지도 않아서 편하고…….”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민경섭이었다.

“형, 고생하셨어요.”

“어, 응, 나 가봐도 돼?”

“네. 갑자기 모셔서 죄송합니다.”

“아냐. 회의 잘해.”

성필이 매니저 대기실을 나갔다.

“좋아, 다음 의제로 넘어가자.”

가로 엔터의 평화는 우리가 지킨다.

매니저팀, 오늘도 무사히 문제 해결!

* * *

뮤직 스테이지의 구상준 PD가 성필을 방송국까지 불렀다.

방송국 PD가 오라면 가야지.

성필은 아침 일찍 방송국으로 향했다.

“어, 별 건 아니고.”

구상준은 그리 말했으나, 그의 입가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심심해서 불렀어.”

“아, 그래요? 그럼 같이 당구장이라도 갈까요? 사구로 진 사람이 자장면이랑 탕수육 사죠.”

“끌리네…….”

구상준은 서류를 하나 내밀며 운을 뗐다.

“곧 연말이잖아.”

“아직 4, 5개월 넘게 남았는데요.”

“슬슬 연말 무대도 생각해야 할 때란 말이지.”

구상준이 어서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성필은 그가 준 서류를 보자마자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거 진짜예요?”

“그래.”

“와, 이런 기획이 통과돼요? 보통 연말 특별 무대는 연차 좀 쌓인 애들한테 돌아오는 거잖아요.”

“내가 또 이 바닥의 혁신가 아니겠냐.”

구상준의 계획은 확실히 혁신이라 불릴 만했다.

“아직 데뷔한 지 1년도 안 된 애들만 모아뒀네요. 이거 발표되면 기성 아이돌 그룹 팬들한테 오체분시 당하겠어요.”

“그때까지 소녀연맹 팬덤이 커져서 날 지켜줘야지.”

뮤직 스테이지 연말 특별 무대.

총 네 걸그룹의 멤버들을 한 명씩 빼 와서 유닛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팀을 위해 만들어진 곡으로 무대를 선보이는 것이다.

“내가 힘 좀 썼어.”

소녀연맹 하양.

글로브 라희.

포유 효민.

그리고.

“케이어스 소유.”

진소유도 이번 특별 무대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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