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한구인은 A&R팀이 올린 지출계획서를 보고 커피를 뿜을 뻔했다.
“한 이사님 괜찮으세요?”
경리 권아인이 티슈를 뽑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한구인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커피를 꼼꼼히 닦아낸 후, 거의 달리듯이 정지음의 작업실로 향했다.
때마침 성필과 정지음, 엘릭이 있었다.
“손 이사님은…….”
자세히 보니 작업실 구석에 손혜빈과 이재호도 있었다.
“재호 씨, 이제 아시겠어요? 하면 다 된다니까요?”
“맞습니다. 이사님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잘할 수 있으시죠?”
“가로 엔터에 뼈를 묻겠습니다…….”
한구인은 그쪽은 무시하고 성필에게 말했다.
“대체 뭘 하시기에 하루에만 500만 원이나 필요하신 겁니까. 적혀 있어도 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스플라이서? 트랙? 멜로디?
“이런 걸 산다는 겁니까? 멜로디를 산다는 게 대체…….”
“말 그대로 멜로디를 사는 거예요.”
작곡가들이 온전한 하나의 곡만 팔지는 않는다.
멜로디나 트랙, 샘플 등만 올려서 팔기도 한다.
A&R팀의 업무 중 하나는 음악 시장에 나온 사운드 등을 수집하여, 회사 내부 작곡가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있었다.
“지음아, 우리가 사기로 한 멜로디 하나만 틀어봐.”
받쳐주는 악기 하나 없이 쌩 멜로디 하나만 처량하게 울려왔다.
한구인이 듣기엔, 피아노에 익숙하지 않은 초등학생이 멜로디만 뚱땅뚱땅 치는 것 같았다.
“느낌 확 안 오세요?”
“……그 멜로디는 얼마입니까?”
“10만 원이요.”
한구인이 뒷목을 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들을 돈을 주고 수십 개나 산 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나는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건 아니니까…….’
A&R팀에서 사기로 했다면, 최종적으로는 성필과 손혜빈이 동의한 것일 터다.
그래도 이 질문은 해야 하겠다.
“반드시 필요한 겁니까?”
성필이 정지음을 보았다.
정지음은 당황하며 엘릭을 보았다.
엘릭은 말꼬리를 흐렸다.
“반드시…… 라고 하시면 뭐, 반드시는 아니지만요. 그래도 나중에 쓸지도 모르고…….”
“엘릭 씨. 이걸 산대도 엘릭 씨가 쓰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가로 엔터가 소유한 거니까요.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냥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담는 감성으로 샀어요.”
한구인이 엄정한 판단을 내렸다.
지출계획을 절반으로 줄이란 것이었다.
그가 나간 후, 정지음은 울먹거리면서 장바구니에서 물건들을 하나씩 빼듯 사운드들을 골라냈다.
“버리고 싶지 않아…….”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다 사 줄게 얘들아…….
정지음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아침 회의와 한구인의 갑작스런 방문이 끝나고, 정지음과 엘릭이 완성시킨 타이틀곡1이 모두의 앞에서 첫선을 보일 준비를 끝냈다.
“자, 그럼 ‘아라베스크’ 들어볼까요.”
‘아라베스크’란 발레의 동작 중 하나이며, 타이틀곡1에 붙은 가제(假題)였다.
한 다리로 몸 전체를 지탱하고 다른 다리를 뒤로 쭉 뻗는 동작을 뜻하는데, 어째서 이런 이름이 붙었느냐 묻는다면.
‘아라가 낸 아이디어 덕분인데, 들을수록 괜찮아.’
얼마 전, 조아라가 타이틀곡1의 뮤비 아이디어를 냈었다.
아직은 논의가 더 필요하지만, 멤버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자, 틀겠습니다.”
엘릭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기색으로 ‘아라베스크’를 재생시켰다.
동시에 성필은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대중들은 음악을 흘려듣지만, 프로듀서는 그래선 안 된다.
음악에 숨어 있는 모든 장치와 기교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그게 어떤 형식으로 표현될지 알아야만 한다.
‘단순한 느낌 이상의 무언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해.’
그리고 성필은, ‘아라베스크’의 첫 음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고가의 스피커에서 뿜어지는 거대한 브라스(금관 악기)의 소리는 심장마저 울리게 했다.
감정적으로 울림을 받았단 게 아니라, 정말 거대한 음파가 성필을 덮친 것이다.
“어우, 강하다.”
“그러게.”
손혜빈의 말대로, ‘아라베스크’는 첫 음부터 청자를 사로잡으려는 의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두말할 것 없이, 첫 타부터 사운드로 두들겨버리겠단 생각이 강렬히 뻗쳐온다.
거기에 따라오는 리듬은.
“808드럼이다.”
“트랩 EDM인가?”
EDM을 베이스로 곡을 만들겠다더니, 아예 장르 하나를 완전히 가져오기로 한 것인가?
808드럼은 트랩 비트의 상징과 같은 악기니까. 거기에 따른 빠른 박자도 한몫한다.
하지만 음악을 계속 들으면서, 성필은 이게 단순한 트랩과는 다르단 사실을 알아챘다.
‘박자가 엄청 많아…….’
보통 사람들이 쉽게 들을 수 있는 큰 리듬 악기 아래로, 무수하게 많은 리듬 악기가 깔려 있다.
자세히 들으면 수많은 박자를 가진 드럼 사운드가 제각기 달려 나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귀신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수천 개의 부품으로 이뤄지는 태엽시계가 돌아가는 장면이 저절로 상상된다.
‘이건 아라의 의견으로 들어간 걸 거야.’
저 수많은 박자 중, 조아라가 춤의 흐름에 따라 표현하고픈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오직 댄서만이 인식할 수 있으면서도, 곡을 듣는 사람에게는 풍부한 사운드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기교였다.
벌스1이 끝나고 짧은 프리코러스가 이어졌다.
하이라이트에 진입하겠단 것을 온몸으로 알리면서, 뻔하게 늘어지지 않고 짧고 담백하게 끊어진다.
“퓨처 하우스야.”
맑은 소리가 하늘로 높이 뻗어나가는 듯하다.
‘이건 리카 아이디어 같고.’
그리고 이어지는 하이라이트는 다시 트랩 EDM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브라스가 강렬하게 터져 나온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하이라이트란 이름에 걸맞지만, 거기에 또 다른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누나 뭐더라. 스패니시 사운드 쪽으로…….”
“뭄바톤.”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던 굵은 베이스가 점점 수면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하이라이트가 절반에 이르렀을 즈음, 모든 사운드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그제야 성필이 여태껏 가지고 있던 의문이 풀렸다.
‘여기다.’
대체 백설하가 어디서 보컬 퍼포먼스를 발휘할까 했었다.
지금까지의 사운드에는 청명하고 강한 보컬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여기다.
모든 사운드가 브레이크가 걸린 순간.
하이라이트가 절반에 이르렀을 무렵.
여기서, 트랩 EDM을 대신해서 굵은 베이스와 극적인 사운드와 함께, ‘아라베스크’의 하이라이트는 완전히 다른 느낌, 뭄바톤으로 변한다.
“딱 여기네.”
“어, 메인 보컬 자리야.”
거대한 강처럼 우직하게 흐르는 베이스의 위로, 백설하의 보컬이 쾌속선과 같이 뻗어나갈 것이다.
벌스2까지 지나가고 최후의 하이라이트로 향하는 브릿지에 이르렀다.
성필을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꽉 쥐었다. 마치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긴장감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답이라도 하듯, 지금까지 선보였던 모든 장르를 합친 사운드가 쏟아져나온다.
트랩 EDM, 뭄바톤, 퓨처 하우스.
이 세 가지 장르의 사운드가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하나의 음악이 되어 하이라이트란 이름에 걸맞은 폭발을 창조해냈다.
‘오버 프로듀싱.’
케이팝의 미덕.
수많은 작곡가, 수많은 편곡가, 수많은 믹싱과 마스터링의 전문가들.
거기에 더해 곡에 아이디어를 내놓은 수많은 A&R팀원들.
하나의 곡에 몰리기엔 과도하다 싶을 인원이 만들어내는 케이팝이라는 이름의 음악.
체계적이고 방대한 A&R 시스템을 가진 회사만이 구현할 수 있는 음악을, 오버 프로듀싱을, 엘릭과 정지음 둘만으로 실현시켰다.
“자, 어떠세요?”
‘아라베스크’가 끝나자마자 엘릭이 자부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늘만큼은 그의 다크 서클이 훈장처럼 보였다.
“누나.”
“어.”
“나 먼저 말해도 돼?”
“그래라.”
성필은 벌떡 일어나 정지음에게 다가갔다.
“지음아, 진짜 고생 많았다.”
“하잇(넵)!”
성필은 위로와 격려를 담아 정지음을 뜨겁게 안아주었다.
이어서 엘릭에게 다가갔는데, 그는 거북한 태도로 도망가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성필의 열띤 포옹을 받고서야 풀려났다.
“엘릭 씨 수고 많았어요. 진짜, 진짜 대단해요.”
“나야 항상 그렇…….”
“구성이 대단해!”
손혜빈이 성필과 마찬가지로 엘릭을 힘껏 안았다. 그는 꺼지라며 소리쳤으나, 결국 손혜빈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골방에 틀어박혀서 작곡만 하는 인간이, 매일 헬스장에서 체력단련 하는 인간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지음이도!”
“저는 괜찮은…….”
“뭐래, 빨리 와.”
정지음은 말로는 싫다 했으나, 왕년의 탑스타에게 안기니 감개가 무량했다.
‘가로 엔터에 오길 잘했어…….’
업무 만족도 100%!
“내가 진짜 놀란 건, 이게 케이팝 특징이긴 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곡이 하나로 완전히 융합됐다는 거야. 이질감이 없어. 성필아, 이거 바로 가도 되겠지?”
“그럼.”
마지막으로 멤버들의 의견을 받은 뒤.
“곧바로 임원 회의까지 올릴 거야.”
실제로, ‘아라베스크’는 그날 임원회의로 올라갔다.
홍규헌은 듣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강렬한 곡으로 한다기에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정지음만 있었다면 ‘강렬함’에 꽂혀서 폭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엘릭이 서 있다.
누구보다 대중의 감각에 민감한 작곡가가 든든히 뒤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엘릭, 진짜 돈값 하네. 이거 괜찮다.”
홍규헌의 말에, 성필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성필이 느꼈던 흥분은 자신만의 망상이 아니었다.
‘이건 통해.’
모두가 좋아할 곡이다.
* * *
조정훈은 성필이 가져온 ‘아라베스크’의 뮤비 아이디어를 찬찬히 읽었다.
“박 이사님, 이거 옛날부터 생각해두신 거예요?”
“아니요. 아라가 얼마 전에 낸 거거든요. 어디 안 좋은 부분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최근에 생각한 거라기엔 아이디어들이 되게 괜찮아서요.”
조정훈의 칭찬에 성필의 표정이 펴졌다.
조아라가 ‘아라베스크’의 프로토타입(시제품)을 듣고 낸 뮤비 아이디어는 최근에 나온 거긴 하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한 이사님 강의가 여기서도 또 빛을 발했어.’
조아라가 아이디어를 얻은 곳은, 한구인이 추천해주었던 ‘역사 속의 무용’이라는 책에서였다.
“약간 클리셰를 뒤튼 느낌이에요. 마지막에 표현하는 게…….”
‘소녀연맹’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벌였던 일들의 피해자라니.
사라졌던 다섯 개의 혁명을, 소녀연맹은 다시금 일으켰었다.
그게 ‘아니’의 스토리다.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되찾은 소녀연맹은 정의라는 오만에 빠져, 자신들의 생각을 세계에 강요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그 오만의 벽을 깨고, 자신들이 쌓은 성을 향해 도전한다.
그게 ‘롱 포’의 스토리다.
“마지막에, 소녀연맹은 혁명의 피해자를 돕는 거잖아요. 신기한 주제 의식이네요.”
혁명은 좋은 의도로 행해지지만, 그 결과와 과정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 메시지를 표현하는 뮤비의 배경은 발레 극장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전제군주정의 후원을 받던 봉건제도의 잔재인 발레단은 핍박을 당하게 된다.
러시아 문화의 정수가 뿌리뽑힐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것을 소녀연맹이 막는다.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과 ‘문화는 죽지 않는다’는 키워드. 진짜 좋아요. 그런데 이걸 뮤비로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괜찮으세요? 타이틀곡이 하나 더 생길 수도 있다면서요.”
“정규 앨범이니까요.”
가로 엔터는 외국 팬들을 위한 서비스를 계속해서 확대하고 있다.
아이튜브에 올라가는 영상들에 영어 자막을 다는 것은 당연한 수준이다. 거기에 웨벡스 사무소의 도움으로 일본어 자막도 착실히 추가 중이다.
해외로 정식 유통되는 앨범들도 정성 들여 기획하고 있다.
‘멤버별 손편지나 응모권 같은 문자 매체도 번역해야지.’
구성품 자체를 번역하지는 않는다.
그 번역본을 볼 수 있는 곳을 QR코드로 표시하고, 앨범 고유 번호를 입력하면 각 나라에 맞는 번역본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면 외국의 인민이들도 소녀연맹을 덕질하기 더 편해지겠지.’
또한 멤버들도 영어와 일본어를 배운 만큼, 가끔은 영어와 일본어로 SNS를 게시글도 작성하곤 했다.
그때마다 영어 댓글과 일본어 댓글이 눈에 띄게 많이 달리는데, 팬들이 기뻐하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나 같아도 영미권 팝스타가 한국어로 글 써주면 더 좋아하겠지.’
이 모든 팬 인프라는 정규 앨범의 폭발력을 확대시키기 위함이다.
정규 1집은 소녀연맹의 가능성과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될 것이다.
그러니 1집의 타이틀인 ‘아라베스크’에 돈을 아낄 수는 없다.
“항상 컨셉을 받고 제가 디테일을 기획하기만 했지, 디테일을 바로 전달받는 건 처음이네요.”
“아쉬우세요?”
“아뇨. 저야 받은 일을 할 뿐이죠.”
성필은 그의 대답에서 살짝 섭섭함을 느꼈다.
소녀연맹에 꽤 정이 들었을 줄 알았는데, 조정훈은 사무적이기만 했다.
“물론 우리 소련이들 일은 더 열심히 해야죠. 덕분에 저희 회사 평판도 많이 올랐어요. 그거 외에도 제 사심도 있고요.”
“아…….”
조정훈은 사비를 들여 ‘롱 포’의 백설하 뮤비 티저까지 다시 찍어주었었다.
확실히, 그건 팬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앨범도 많이 사 주시고요.”
“팬싸 앨범 컷 몇 장인가요 보통?”
“말 못 해드리죠 그건. 사인 가지고 싶으시면 그냥 달라고 하시면 되지 않나요?”
“직접 받고 싶죠, 아무래도…….”
그렇지.
팬 사인회에서 직접 아이돌을 응원하며 사인을 받는 건, 단순히 사인을 입수하는 것보다 훨씬 보람차고 뜻깊다.
“그런데 이사님. 항상 뮤비에 돈을 엄청나게 쓰시잖아요. 의상이나 안무 같은 데서도 그러시죠?”
“그렇죠.”
“애들 정산은 언제 받아요?”
제작비는 가로 엔터와 멤버들이 5:5로 분할 한다.
성필은 곰곰이 생각한 뒤 하하 웃었다.
“그러게요?”
소녀연맹은 언제 정산을 받을까.
그 해답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앨범마다 제작비가 억이니까.
절반으로 나눈다 해도, 그 빚은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근데 우리 애들도 동의했어요. 소녀연맹이 선택한 길이니, 아이들도 기쁠 거예요.”
“리카가 매일 일할 때마다 ‘빚 빨리 까야 해요!’라고 하던데요.”
“하하, 걔 말버릇이에요.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리카, 넌 아티스트야.
그러니까 제작비가 많이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지? 아티스트는 본인의 작품에 돈을 아끼지 않는 법이니까…….
“리카도 즐기고 있어요.”
그리고 아마도, 자신에게 달린 빚을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바닥에 엎드려 통곡할지도…….
* * *
성필은 조정훈과의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다. 차를 대고 입구로 다가가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입구가 훤히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도 들려왔다.
“이번에는 내가 그냥 가는데! 이거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당신네들 싹 다 고소할 거야! 우리 애 납치한 것도 아니고, 쯧!”
초췌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는 성필을 흘끗 보더니 여러 번 혀를 차곤 건물 멀리 사라졌다.
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 가는 동안에도 자꾸만 고함을 내질렀다.
‘술 냄새.’
그가 지나간 자리에 강한 술 냄새도 풍겼다.
성필을 코를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 형.”
민경섭이 왼손에 소금을 품고 있었다.
“방금 그 사람 뭐야?”
“하양이 아버지래요.”
“뭐? 아버지가 왜 오셨는데?”
“그게…….”
자초지종을 들은 성필은 정신이 하늘 밖으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돈 내놓으라고……?”
“티비에도 나오고 유명하면 돈 많이 벌었을 테니까 내놓으라고요. 하양이 부모인 자기들한테 당연히 돈 들어와야 된다고 난리를 쳤어요. 에휴.”
민경섭은 입구에 소금을 마구잡이로 뿌렸다.
그의 반응을 보니, 가로 엔터도 그를 호의적으로 대하진 않은 모양이다.
“하양이는? 하양이랑 얘기했어?”
“아니요. 하양이는 그분 보자마자 연습실로 들어갔어요.”
장하양 나름 도망치기라도 한 걸까?
“저랑 한 이사님이 어떻게든 2층으로 못 올라오게 막았고요. 사장님이 하양이랑 얘기 나누고 내려와서, 그 사람한테 안 나가면 경찰 부를 거라고 했어요. 수십 분 동안 말싸움하다가 이제 겨우 간 거고요.”
부모가 연예인에게 과도하게 간섭하는 사례는 많았다.
특히 배우나 솔로 가수 쪽에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어릴 적부터 연예인이 된 이들은 세상 물정에 어둡고, 부모가 매니저 역할까지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연예인이 눈이 뜨여서 부모를 밀어내면, 소속사나 연예인에게 찾아와서 돈을 내놓으라며 발광하는 것이다.
‘하양이는 아직 정산도 못 받았는데.’
아니, 그게 중요하지는 않고.
‘하양이는 부모님 허락받고 온 게 아닌가?’
집안 사정 때문에 회사에서 살고 싶단 소원까지 빌었던 장하양이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리란 생각은 했지만, 설마 말도 안 하고 집에서 도망친 건가?
‘그걸 부모는 2년 넘게 찾지도 않았고?’
그러다가 장하양이 텔레비전에 나온 것을 보고 찾아왔나?
“미친 새끼가…….”
성필이 욕하는 것을 보고도 민경섭은 이해한단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경섭아, 소금 더 뿌려.”
“네.”
성필은 2층의 연습실로 향했다.
장하양을 뺀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하양이는?”
“사장실이요.”
사장실로 가니, 이미 장하양은 없었다.
“응접실에서 좀 쉬라고 했어.”
“하양이가 무슨 얘기 했어요?”
“별거 없어. 집 사정이 워낙 거지 같아서 도망쳐 나왔던 거래.”
그나마 장하양이 성인이라서 다행이다. 미성년자였다면 일이 복잡하게 흘러갔을 테니까.
“다시 오면 지체없이 경찰 불러.”
“예. 그, 하양이 상태는 어때요?”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데, 그럴 린 없겠지.”
“그렇겠죠.”
“박 이사 특기 좀 발휘해봐.”
안 그래도 성필은 이미 사장실을 나서고 있었다.
‘박 이사 엄청 흥분했네.’
평소였다면 인사라도 하고 나섰을 텐데, 홍규헌에게 말도 없이 사장실을 나갔으니 말이다.
성필은 응접실 문을 노크했다.
“하양아, 나야.”
들어오란 말에, 성필은 응접실에 발을 들였다.
장하양은 아무 일도 없단 듯 소파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필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깐 시간 있어?”
“이사님한테 드릴 시간은 항상 있어요.”
“고맙다. 음, 갑작스럽다. 그치?”
“네.”
“너 집에서 도망친 거였구나. 가출 소녀네.”
“아하하, 이제 소녀는 아니지만요. 이사님 처음 만났을 때도 소녀는 아니었구요.”
“그랬지.”
성필은 무릎 위에 손깍지를 올려두었다. 그는 계속 손가락을 엇갈려 맞물렸다.
지금부터, 성필은 그녀가 듣기 싫은 말을 해야만 했다.
“부모님이랑은 사이가 안 좋아?”
“그런 편인 거 같아요.”
“화해가 안 될 정도로?”
장하양은 대답을 회피하듯 미소를 더욱 짙게 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너를 계속 찾아올 수도 있어. 우리가 최대한 막아주겠지만, 쭉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
“네.”
“나도 네 부모님 같은 사람들 여러 번 봤어. 말이 통하기 힘들지. 그래도…….”
성필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부모님이니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라앉으면 차분히 얘기라도 해보는 게 어떨까?”
“얘기요…….”
“화해라거나.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씩이나마.”
장하양은 고민하는 듯했다.
“아하하.”
그리고 웃었다.
“하하…….”
그 순간 성필은 거의 소스라치다시피 놀랐다.
장하양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미소나 무표정이 아닌 그녀의 얼굴을 본 건 몇 년 만이다.
자칫하면 울기라도 할 것 같았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는 게 보여서, 그녀의 표정은 더욱 기괴했다.
* * *
장하양은 집안 이야기를 회피해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한 아이로 보이기 싫었다. 타인이 동정은 줄지언정, 그 이상의 관심은 없을 것이니까.
오히려 귀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마음을 쓰고 돌봐줘야 하는 애로 생각되는 건 절대 피하고 싶다.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자신의 상처는 자신이 핥아야만 한다.
따뜻한 호의는 공짜가 아니다.
관계의 깊이로 사야 하는 물건이다.
장하양이 성필의 호의에 대한 값으로 지불할 만한 물건은 노력뿐이다.
그 노력과 성과조차 너무도 싸기에, 계속해서 성필의 호의를 얻어내려다간 금방 바닥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동정심으로 관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장하양은 의지를 다잡고 미소를 유지했다.
“나도 네 부모님 같은 사람들 여러 번 봤어. 말이 통하기 힘들지.”
오늘도, 성필은 장하양이 값을 지불하지 않았는데도 따뜻한 공감과 호의를 넘겨준다.
그의 위로는 장하양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행복한 애야.’
과거와 비교하면 이곳은 천국이다.
감히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굳이 과거의 자신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장하양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못난 부모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장하양이 모를 뿐이지 발에 챌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러니 불행을 티 내서는 안 된다.
‘나는 행복하니까.’
자신의 마음속에는 시들지 않는 보라색 튤립이 자라고 있으니까.
그 튤립이 꺾이지 않을 힘을 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부모님이니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라앉으면 차분히 얘기라도 해보는 게 어떨까?”
장하양의 모든 다짐은, 성필의 그 말로 무너져내렸다.
너무도 무너지기 쉬운 발판 위에 세워진 다짐이었다.
“얘기요…….”
장하양은 무너지는 발판에 매달려 미소를 만들어냈다.
“헤헤.”
웃음으로 다시금 밝아지려 했다.
“헤…….”
불가능했다.
장하양은 자신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굳이 느끼지 않더라도, 성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사님…….”
장하양은 결단을 내렸다.
2년 넘도록 소중하게 모아온 성필과 자신의 관계. 프로듀서와 아이돌이라는 비즈니스적인 관계. 은인과 동료라는 인간적인 관계.
그것을 팔아 성필의 동정과 공감, 위로를 사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더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저는, 저는요…….”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가 없다.
아버지의 등장은 그 정도로 장하양의 정신을 흔들어놓았다.
“제 부모님은요…….”
성필에게 공감을 강요하지 않고는, 앞으로 맨정신인 채로 살아가기 힘들 듯했다.
이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동정하는 자와 동정받는 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