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성필이 숙소로 도착할 때까지, 리카는 톡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정말 몸살이라 잠이 깊게 든 것일까?
현대인은 아무리 피곤하고 깊게 잠들었더라도, 자신의 핸드폰 발신음을 들으면 번쩍 깨어나곤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는 상태라면…….
‘보통 아픈 게 아니야.’
멤버들이 숙소로 들어가는 시각은 밤이다.
그때까지 리카는 홀로 외로움에 떨며 고통을 씹고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 자취를 해온 성필은, 아플 때 누군가 곁에 없단 게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알았다.
‘최소한 얼굴이라도 비춰야지.’
일단 숙소 문을 노크했다. 세 번 정도 반복해도 반응이 없었다.
성필은 옆의 화분 아래에서 여분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리카, 나야.”
답이 없다.
성필은 약국에서 약을 거의 쓸어 담아오다시피 했다. 또한 리카가 기운을 차릴 만한 음식을 잔뜩 사 왔다.
그것이 든 봉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안쪽으로 향했다.
“리카.”
동생 라인의 방 문을 노크해도 반응이 없었다.
혹시 리카가 개방적인 복장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성필은 다시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쪽에서 소리가 나.’
전화벨 소리는 명백하게 퍼지고 있다.
그럼 리카가 저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상황이란 건데…….
“들어갈게.”
성필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 위에 올려진 리카의 핸드폰만이 처량하게 벨소리를 흘려보낼 뿐이었다.
‘어디 갔나?’
성필은 복도를 지나며 거실로 향했다.
그러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듯한 소리가 귓가로 유유히 들어왔다.
‘텔레비전 보는 건가?’
핸드폰은 방에 두고 텔레비전을 보느라 연락을 못 받은 것이다.
성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많이 아픈 건 아니구나. 티비 볼 기력 있으면 밥은 먹을 수 있겠다.’
반가운 마음을 담아 문을 벌컥 열었다.
“리카, 나 왔…….”
텔레비전에서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의 우측 위, 노란 바탕의 원에 ’19‘라는 숫자가 선명히 쓰인 게 보였다.
리카는 텔레비전에 눈을 거의 박을 듯하다가, 성필의 목소리가 들리자.
“에에엑?!”
비명을 지르며 몸을 크게 떨었다.
리카는 편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황급히 바꾸며 바닥을 미친 듯이 더듬었다.
리모콘을 찾는 듯했다.
“도, 도코(어디), 도코니(어디에)…….”
“네 뒤에 있어.”
“아.”
리카는 리모콘을 잡자마자 전원을 눌렀다.
삑, 텔레비전이 꺼졌다.
이제 남은 건 침묵이었다. 둘은 눈을 맞추고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치 싸우기 전 서로의 역량을 파악하는 육식동물 같았다.
“오해예요.”
“……응.”
성필이 사 온 약과 음식을 정리하러 식탁으로 다가갔다.
“오해라니까요오! 이상한 영화가 아니라 예술 영화에요!”
“알아.”
“모르잖아요! 보세요! 켜서 보세요!”
안 부끄러우면 왜 전원을 껐는지, 성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카가 품은 부끄러움만은 알았다.
성필도 겪었던 시기니까.
“부끄러워하지 마. 리카 이제 20살이잖아. 그럴 수 있지.”
“아니라니까요 제발 믿어주세요오……!”
성필이 사 온 물건을 정리할 동안, 리카는 그의 뒤에 붙어서 서럽게 변명했다.
제발 유선 채널을 끊지 말아 달라고…….
* * *
놀랍게도, 리카가 보던 건 정말 예술 영화였다. 19세 이용가인 건 선정적인 장면이 조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사님도 이거 보셨어요?”
“어. 극장에서 봤어.”
“엣찌(음란)!”
“아닌 거 알잖아. 영화는 왜 끈 거야.”
“그러게요…….”
부모님이 방에 들어오면 컴퓨터 전원을 급히 끄는 사춘기 학생이라도 됐던 것일까.
리카는 성필을 보자마자 텔레비전을 꺼야 한다는 생각부터 났었다.
“이제 성인이니까 부끄러워할 필요 없잖아.”
“그런가요?”
“그래, 자신감을 가져.”
“자신감!”
“이제 어른들 눈치 보는 시절은 지나갔어.”
“이제 아타시(저)도 어른이네요!”
“음…….”
“왜 고민하나요?!”
“밥은 먹었어?”
“아니요. 해먹을 힘이 없어요…….”
“티비 볼 힘은 있고?”
리카가 눈을 반짝이며 성필을 응시했다. 성필은 능청스레 웃었다.
“뭐야. 나한테 밥 해달라는 거야? 회사 이사님한테?”
“아야야, 아파요오…….”
원래 해주려고 하긴 했지만, 성필은 어쩔 수 없단 티를 팍팍 내며 죽을 요리했다.
사 온 것을 데우면 끝이라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성필이 죽을 내놓자마자 리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불평했다.
“고기 먹고 싶어요!”
“그거 다 먹으면 줄게.”
“정말인가요!”
리카는 죽을 빠르게 해치웠다.
“이제 고기 주세요!”
“이제 코오 자자.”
“우소츠키(거짓말쟁이)……!”
리카에게 약을 챙겨 먹인 뒤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아까까지 생기가 팔팔하더니, 침대에 눕자마자 피곤한 듯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왔다.
“이제 가셔도 돼요.”
“거짓말이지? 나 이제 다 알아. 진짜 가란 뜻 아니잖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타시(제)가 속이 배배 꼬인 인간 같잖아요! 예전에 제가 해드렸던 인간의 마음 강의는 잊어버리세요!”
리카는 당장이라도 떠나란 듯 목소리를 높여놓고서, 그 끝에 소심히 덧붙였다.
“박 이사님 일도 있으시잖아요…….”
“있긴 한데, 요즘은 딱히 바쁘지는 않아.”
“월급 도둑!”
성필은 메인 프로듀서로서 부하들의 업무를 감독하고 전체적인 방향을 잡는 역할이다.
즉, 앨범 제작 초기에 들어간 지금은 그다지 일이 없단 것이다. 프로듀서로서 확고한 결정을 내려야 할 일 자체가 적으니까.
‘게다가 리카가 아프니까.’
적어도 리카가 잠들 때까지는 곁에 있어 주고 싶다.
“사장님의 급료에 보답해주세요!”
“난 항상 남들보다 1.5배는 더 일하지.”
“사축(社畜)은 슬프네요…….”
“사축이 뭐야? 욕 같은데.”
“회사의 가축이요.”
“진짜 욕하면 어떡해!”
성필을 사축이라고 부르면 홍규헌은 뭐가 되는가. 축산업 관리자인가?
“이사님은 자본에 굴복하신 거예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아요! 자기 인생을 찾고 자아를 발견하는 거야말로 행복이에요!”
성필의 자아는 아이돌에 있다.
자아실현을 위한 직장생활 그 자체다.
“자본주의적 사상을 버리고 진정한 자신 앞에 서서 인간성을 되찾으세요! 모든 게 자본으로 환원된다는 생각은 너무 올드해요!”
“……한 이사님한테 들은 얘기야?”
“이에(아뇨). 저는 들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단계에서 벗어났어요. 저만의 철학이 있다구요!”
공산주의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뭐 있는데?”
성필은 순전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아마 사랑이나 우정 같은 낭만 넘치는 대답이 나오겠지.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권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살 수 있으면 민주주의가 아니고, 파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에요!”
“……음.”
“어떻게든 반박하려고 고민하는 모습이 서글프네요. 이사님은 이미 황금만능주의에 세뇌됐어요!”
“……그래, 인정할게. 투표권은 돈으로 못 사지.”
대기업 회장이더라도, ’저는 1표가 아니라 2표 갖고 싶어요’라고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정말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었다.
“돈은 전부가 아니니까요!”
“그래, 리카 똑똑해.”
“에헤헤, 더 칭찬해주세요!”
“음, 그럼 리카는 네 인생을 찾았어?”
“아이돌이 제 인생이에요!”
“그래서 계속 힘들게 연습하는 거야?”
“그럼요! 언젠가 최고의 아이돌이…….”
“몸살에 걸릴 만큼?”
“…….”
백설하가 말했었다. 리카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근래에 훨씬 더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이다.
단순하게 댄스나 보컬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최근에 연습하기 시작한 랩과 남자 아이돌의 퍼포먼스를 포함해서, 그녀는 자꾸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왔다.
성필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네가 돋보이는 부분을 만들고 싶은 거지?”
리카는 다른 멤버들보다 확연히 뛰어난 부분이 없다.
포지션도 리드 보컬, 리드 댄서다.
매우 중요한 포지션이지만, 리카는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옛날에 하양이가 랩을 배우기 전에, 리카가 랩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었지.’
리카는 메인 래퍼 자리를 바랐었다.
랩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메인’이라는 호칭을 바랐기 때문이다.
조아라보다 못한 춤.
백설하보다 못한 노래.
그 때문에, 자신만의 강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모, 몸살은 제가…….”
“리카,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는 마.”
“…….”
리카가 처음 가로 엔터로 들어왔을 때, 성필을 포함한 모두가 깜짝 놀랐었다.
노래, 춤, 그리고 그것을 합친 퍼포먼스 모두 현역 아이돌과 다를 바 없이 대단했다. 그녀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백설하와 조아라의 등장으로, 리카도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게 밝혀졌다.
그녀의 옆에 보컬과 춤으로 비교될 수밖에 없는 둘이 생겨났으니까.
“네가 노력해주는 건 기쁘지만, 모든 곳에서 완벽하진 않아도 돼.”
리카는 점점 느끼게 됐다.
성필이 칭찬해주는 빈도가 줄어간다는 것을 말이다. 성필의 관심은 백설하의 보컬로, 조아라의 댄스로 쏠려버렸다.
그 중간에 끼인 리카는 어중간한 포지션의 무언가였다.
당시에 위기감을 느낀 리카는 울면서 성필에게 자신을 소중히 여겨달라며 호소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런 생각은 안 하길 바랐는데.’
자기 자신을 격하시키고, 성필의 관심이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는 대신. 그 열등감을 자기 계발을 위한 재료로 삼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 보니, 리카는 불안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듯하다.
“그러면, 완벽할 수 없으면, 최고의 아이돌이 아니잖아요……. 저만의 강점도 없고…….”
“리카. 리드 보컬이랑 리드 댄서도 중요한 포지션이야.”
리드 포지션은 팀의 허리다.
백설하의 부족한 춤을, 조아라의 부족한 보컬을 리카가 받아주고 있다.
리카가 있기에 곡이 완성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메인 댄서나 메인 보컬만큼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모두를 지탱하는 허리로서 너만의 자리가 있는 거야.”
“하지만…….”
“그리고 리카 너 예뻐.”
“소, 손나(그런)……! 거짓, 거짓말이에요! 이사님 매일 저보고 귀엽다고 하잖아요!”
“귀엽기도 하고.”
“또 놀린 건가요…….”
“귀엽다는 말이 싫어? 그, 네가 장난스럽게 귀엽다고 하지 말라곤 하잖아. 진심인지 모르겠어서.”
리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갈등하듯 표정을 이리저리 바꾸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이사님이 귀엽다고 해주시는데, 싫을 리가 없잖아요…….”
“그거 알아? 내가 밖에 다녀보면 너희 얘기 많이 하거든. 그럼 사람들이 비주얼 멤버로 너를 되게 자주 뽑아.”
성필의 눈에만 마냥 귀엽게 보일 뿐이지만 말이다.
물론 한구인이 리카의 외모와 말투를 동시에 볼 때마다 인지부조화가 오는 데서도 알 수 있듯, 객관적으로 리카는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리카는 얼굴의 선이 확실하여, 일부러 메이크업도 옅게 해달라고 주문하는 편이다.
굳이 메이크업을 짙게 하지 않아도 자기주장이 확실한 외모이니 말이다.
“……혼또(진짜)?”
“혼또.”
성필이 일본어를 쓰자 리카의 입꼬리가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결핍은 집착을 부른다. 리카의 결핍은 성장을 향한 집착을 낳았다. 고통을 참고서도 연습에 몰두하여, 결국엔 병에 걸릴 만큼 커다란 집착을.
해결법은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니, 성필은 리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어야만 한다.
그녀가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과 비교할 바 없이 대단하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리카 넌 예쁘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는 만능 아이돌인 거지. 심지어 작곡도 해? 자체 프로듀싱도 가능해? 이게 진짜 아티스트지.”
리카는 성필의 칭찬에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감기 때문에 몽롱한 건지, 칭찬을 받아서 황홀한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데모(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는 에리카보다는…….”
아직도 리카가 케이어스를 신경 쓰고 있다니, 성필은 속이 쓰렸다.
이 정도면 라이벌이 아니라, 케이어스를 소녀연맹보다 우월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뜻 아닌가.
“리카, 내가 전에 말했지. 네가 에리카보다…… 어떻다고?”
“앗!”
자신이 에리카보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다!
“리카 네가 소녀연맹의 허리야.”
“허리!”
“소녀연맹의 중심이야.”
“중심!”
“내가 제일 처음 데려온 소녀연맹 멤버는?”
“아타시(저)요!”
“오케이?”
“와캇타(알겠다)!”
이제야 리카도 기운을 차린 듯했다.
성필은 그녀가 자격지심을 없애고 즐겁게 아이돌로 활동할 수 있길 기도했다.
“시간 많이 지났네. 너랑 그 영화 보는 게 아니었는데.”
“뭔가요, 저랑 영화 본 게 손해였단 것 같은 말투는. 상처받겠어요.”
“재밌긴 했는데 너무 오래 있었어. 나 이만 가볼게.”
성필이 손을 흔들며 나가려 할 때, 리카가 그의 팔을 잡았다.
“이사님.”
아까 고민을 드러냈을 때와는 또 다른 진지함으로, 리카가 말했다.
불안함을 담아서.
“이거, 처음 말하는 건데요.”
“응, 뭔데?”
“저는요, 사실은,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해도요. 이사님은 아티스트가 되라고 했지만요. 저는 그냥,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게 좋아요.”
무대에서 사람들이 보내는 뜨거운 함성이.
길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자신의 노래를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는 게.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게.
“저는 그게 좋아요.”
그뿐이다.
성필의 거창한 목표인 최고의 아이돌. 물론 되고 싶다. 그러면 좋겠다.
하지만 아티스트라는 건,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꼭 아티스트여야 하는 건가도 알 수 없었다.
“저는요, 그러니까요, 이사님이 바라는 아이돌이랑은…….”
“괜찮아.”
최종적으로 소녀연맹을 아티스트로 만드는 게 가로 엔터의 목적이긴 하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 건 멤버들이야.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자신이고.’
‘아니’ 때 장하양이 안무에 연기를 넣어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것처럼. 자신이 만들었기에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는 분명히 존재한다.
아티스트로서의 소녀연맹이 직접 프로듀싱한 곡은, 훨씬 더 호소력이 높고 설득력이 강할 게 확실하다.
하지만 그건 가로 엔터의 목적일 뿐이고, 성필의 욕심이다.
“너인 대로 있어도 돼.”
그래, 소녀연맹이 아티스트가 되길 바라는 건 성필의 욕심이다.
하지만 성필에게는 확신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소녀연맹은 자체 프로듀싱에 대한 열망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돌이 그랬으니까.’
아이돌도 아티스트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실연자(實演子)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악보를 연주할 뿐인 클래식 연주자가 아티스트라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연주자의 퍼포먼스와 마찬가지로, 아이돌의 퍼포먼스에도 개성이 실린다.
‘그 개성과 감각을 더 정련해서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거야.’
이 업계에 있다 보면 음악이란 게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째서 성공하는지 알게 된다.
나이가 들면 자신만의 신념이 새겨지고, 그 신념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어진다.
‘흔히 기획사에서는 아이돌들 대가리가 굵어졌다, 그렇게 표현하는 거긴 한데.’
성필의 생각은 다르다.
10대부터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하여 연습생 생활을 하고, 타인의 의견에 따라서만 살아가던 아이돌이.
마침내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진실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즉 리카는 아티스트, 어른으로 나아가는 계단 위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모든 건 연습이야.’
멤버들이 후일 프로듀싱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다졌을 때, 스스로의 뜻을 충분히 펼치기 위한 연습이다.
그때까지는 고민하고 만족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심지어 생각이 없어도 괜찮다.
그 모든 경험이 아티스트의 길을 올라가는 과정이니까.
“그게 내 생각…….”
KS 엔터의 정호환 이사에게도 말했었던, 성필의 ‘아이돌리즘‘이다.
“나는 리카가 직접 프로듀싱 안 해도, 아티스트가 안 되어도 좋아.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됐어.”
리카가, 멤버들이 의무감에 아이돌을 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한 번뿐인 청춘을 불살라 아이돌로 살아가는 것 아닌가.
“나중에 오늘날을 추억할 때, 아이돌 생활이 돈을 벌기 위한 과정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리카, 네가 행복해지는 걸 먼저 생각해줘. 알겠지?”
리카가 감동한 듯 입술을 떨었다.
“이사니임…….”
“그리고 리카는 뇌 빼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괜찮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귀여우니까.”
“저 놀리려고 빌드업 쌓은 거였나요?! 괜히 감동했어요! 제 감동 돌려줘요!”
둘은 한동안 투닥거리면서 장난쳤다.
그러면서, 리카의 가슴을 채우고 있던 해묵은 때도 벗겨져 나갔다.
리카는 아픈데도 목소리를 높이느라 지쳤는지,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눈에 띄게 힘들어했다.
성필은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 가볼게. 앞으로 몇 시간만 기다리면 멤버들도 올 거야. 그때까지 잘 쉬고 있어.”
“……이사님.”
“왜?”
“아까 안 바쁘시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럼, 저, 제가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돼요?”
성필은 능청스레 웃으며, 언제 가려고 했냐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리카 아직 애네. 외로움도 타고.”
“아타시(저)는 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라구요!”
“알겠어, 그럼 갈게?”
“저는 애예요!”
성필은 리카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고국을 등지고 홀로 타국에서 살아간다는 게, 때로는 얼마나 뼈에 사무치도록 고독하겠는가.
심지어 몸까지 아프니, 쓸쓸함이 더할 것이다.
‘리카의 부모님께도 약속드렸으니까.’
리카를 잘 돌봐주겠다고.
그러니, 리카가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같이 있어 줄 수 있다.
* * *
몸살이 나은 리카는 이전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어 깨끗해진 비늘을 자랑하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소파에 누워 자신의 샤워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등, 행복하단 티를 온몸으로 냈다.
“리카 너 몸 나으니까 살판났네. 시도 때도 없이 콧노래나 부르고.”
“아타시(나)는 진화했어! 어른이 됐다구!”
“……어른?”
신아름이 께름칙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응, 성장한 거야!”
얼마 전, 성필이 홀로 숙소에 있는 리카를 간호하러 회사를 뛰쳐나갔던 적이 있다.
그 일과 함께 리카의 언행을 생각하니 찝찝함만 몰려왔다.
…….
‘……내가 미쳤나?’
뭐 이런 상상을 하고 있지.
그럴 리가 없는데.
리카는 일본인이라 한국어 구사력이 떨어지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때.
“에엑?!”
리카가 비명을 질렀다.
신아름이 깜짝 놀라서 리카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어디 발 찧기라도 했어?”
“코레(이거)!”
[일본 귀화 관련 정보]
“한국은 다중국적을 인정 안 한대! 그, 그럼 박 이사님이 일본으로 오면 한국인이 아니게 되는 거야? 한국에도 마음대로 못 오는 거야?!”
“…….”
리카는 가끔 장난스레 성필에게 일본 귀화를 권유하곤 한다.
그냥 장난이라고만 여겼는데.
‘얘 진심이야?’
어이가 없네.
“팀장님이 일본 같은 곳에 귀화할 리 없잖아.”
“이, 일본 같은 곳은 뭐야! 무슨 뜻이야!”
“……음, 팀장님이 섬나라에 가실 리가 없잖아.”
“섬나라라서 안 되는 거야?! 한국도 섬이랑 똑같잖아!”
신아름은 한동안 귀화 정보를 검색하며 끙끙대는 리카를 바라보기만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리카가 진심인 것만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