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83화 (183/760)

183화

아침 회의를 끝내고 나온 성필은 소파에 앉은 리카를 발견했다.

무릎에 노트북을 두고 이어폰을 꽂고 있는데, 아마 작곡을 하는 듯했다.

‘리카가 기분이 안 좋나?’

리카는 무표정이었으나,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가 보이지 않았다.

성필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리카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이미 습관이 된 자상한 말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리카, 안 좋은 일 있어?”

“이에(아뇨).”

“있는 거 같은데?”

“없어요…….”

“있잖아. 말해주면 안 돼?”

단 세 번의 말만으로 리카는 무장해제당했다. 그녀는 이어폰을 빼고 어제 있던 일을 말했다.

요약하자면, 엘릭에게 팩트 폭행을 당했단 것이다.

‘카와이 퓨처 베이스라고? 이거 장르 자체가 사운드 정교성이 너무 떨어져.’

‘사운드 포그에 인디 작곡가들이 올리는 거 같은 곡이야.’

‘이건 퍼포먼스도 못 짤걸? 이걸 앨범에 올리고 싶다고?’

정지음이 최대한 변론해주었다는 모양이지만, 리카가 상처받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나도 들려줘.”

잔뜩 기대하는 표정의 리카를 보며, 성필은 그녀가 작곡한 카와이 퓨처 베이스를 들었다.

‘이건 확실히, 리카가 너무 나갔네.’

이전에 미니 앨범에 넣었던 카와이 퓨처 베이스는 어느 정도 절제된 느낌이 있었다.

한창 정지음에게 작곡 강의를 듣고 있을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리카는 케이팝의 작법을 사용해서 카와이 퓨처 베이스를 만들었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장르에 충실해 버렸다.

‘엘릭 씨가 들으면 어이가 없을 만도 하지.’

홍규헌도 처음 리카가 작곡한 카와이 퓨처 베이스를 듣고 기절할 뻔했었다.

작곡가인 엘릭이 받았을 충격은 더했으리라.

“일렉 기타도 일부러 넣었고 케이팝처럼 중간에 랩도 넣었어요! 그리고…….”

리카는 머뭇거리며 소심하게 말했다.

“아름이가, 밴드는 싫다고 해서, EDM 기반으로 만들었어요…….”

“이걸 타이틀곡으로 쓰고 싶었어?”

“아니요! 아니, 이걸 타이틀로 못 쓰는 건 저도 알아요. 그래도…….”

이 곡은 리카가 생각하는 ‘신나는 노래’의 느낌을 모두 담아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타이틀곡의 대주제를 듣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이 곡을 만들었다.

그러니 이 곡이 받아들여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정지음과 엘릭에게 영감을 주길 바랐다.

‘설하처럼.’

미니 앨범 타이틀인 ‘롱 포’는 백설하가 무심코 친 멜로디로부터 탄생했다.

그녀가 기타로 연주했던 즉흥곡이 미니 앨범의 성공을 이끌었던 것이다.

리카도 자신의 곡이 그런 역할을 하길 바랐던 것일 테지.

“리카가 생각하는 ‘신난다’라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맞지?”

“에, 아, 맞아요! 여기 여기! 하이라이트에는 후렴구 말고 드랍(Drop)을 넣었어요!”

“노래보다 춤으로 표현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네 네네!”

리카의 얼굴이 언제 우울했냐는 듯 금세 밝아졌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단 게 기뻐서였다.

“그럼 이 곡은 뼈대 같은 거네?”

“하이(네)!”

“그건 말했어?”

“…….”

말 못 했다.

곡을 들려주자마자 방언처럼 터져 나오는 엘릭의 반박 때문에, 리카는 벌 받는 아이처럼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었다.

‘엘릭 씨도 잘못했네.’

멤버들의 의견을 최대한 들어달라고 한 건, 그저 듣고 피드백만 해달란 뜻이 아니었다.

경청하고, 그 안에서 멤버들의 생각을 읽어달란 뜻이었다.

하지만 리카가 서툴렀던 부분도 존재했다.

“리카, 아티스트는 음악으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해. 하지만 자신의 의도를 동료들에게 알리는 것도 필요해.”

리카는 너무나 포용적인 환경에서 창작을 해왔다.

일단 그녀가 무언가 만들었다고 하면, 성필을 시작으로 가로 엔터 임원들이 달려온다.

그리고 어떻게든 리카의 창작물에서 좋은 부분을 뽑아내어 칭찬해주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야. 네 생각을 정확히 말해야지.”

“아,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위로해주리라 여겼던 성필이 갑자기 훈계하자, 리카는 허둥지둥 사과부터 내뱉었다.

리카는 잔뜩 쭈그러들어 성필의 눈치만 살폈다. 성필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해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카도 엉겁결에 그를 따라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얘기하러 가자.”

“이사님이 같이 가주시는 건가요……?”

“응. 이번만이야. 다음부터는 리카가 혼자 해야 해. 알겠지?”

“네!”

리카는 이미 엘릭의 발을 문에 찧어버리고 스스럼없이 말을 걸 수 있는 사이가 됐지만, 음악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성필이 함께라면 리카도 두려울 게 없다.

둘은 함께 작업실로 갔다.

“어, 박 이사님. 웬일…….”

엘릭이 성필에게 인사하던 순간.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성필이 소리쳤다.

잠시 후, 리카는 엘릭에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보다 성필을 말리느라고 힘을 더 써야 했다.

“제가 애들 의견 잘 들어달라고 했잖아요.”

“아타시(저)는 괜찮아요!”

“안 괜찮아. 엘릭 씨, 피드백이나 비판은 결과물이 나오고 해도 안 늦어요. 일단은 존중해주세요. ‘아니’랑 ‘롱 포’도 그렇게 탄생했어요.”

“이사님! 저, 저, 이제 괜찮다니까요!”

리카는 부부싸움을 말리는 자식처럼 성필에게 착 달라붙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타이틀곡으로 반대했었지만, 수정을 거치고 구체화하면서 진가가 드러나는 경우도……!”

“아, 그거, 제가 성급하게 판단했던 거 맞아요.”

“……예?”

엘릭은 정지음과 함께 보고 있던 노트북을 반대로 돌렸다.

화면에 떠 있는 건 작곡 프로그램이었는데, 성필은 뭐가 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운드나 컨셉은……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요. 이거 구조가 괜찮아요. 뻔한 프리코러스 없이 벌스 다음 바로 하이라이트가 나오잖아요. 만약 댄스 퍼포먼스에 중점을 둔 곡이면 쓸만한 폼(Form)이라고 생각해서요. 심지어 이거 멤버들 파트 배분까지 고려해둔 거 같아요. 보컬 라인에 호흡을 신경 쓴 티가 나요.”

엘릭의 말은, 가죽과 살을 전부 다 떼어내고 뼈만 쓰겠단 것이었다.

일종의 모욕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리카는 아마추어 작곡가일 뿐이다.

그 아마추어 작곡가가 설계한 구조를, 몸값이 탑급에 위치한 엘릭이 괜찮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엘릭은 멋쩍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리카를 향해 고개를 살짝, 아주 살짝 숙였다.

“지음이랑 계속 그 얘기 하고 있었어. 이 폼으로 새로 곡 써보는 거 괜찮겠다고. 뭐, 좋더라. 전에는 나쁜 말만 해서 미안.”

“…….”

리카는 감동한 듯 입술을 숨기며 도리질 쳤다.

“우리가 이 구조 빌려서 작곡해도 괜찮아?”

“하이(네), 괜찮아요!”

“나중에 어느 정도 결과물 나오면 들어줘. 아니면 지금부터 같이 만들어도 좋고.”

아버지에게 ‘놀러 가도 돼요?’라고 묻는 딸처럼, 리카가 열망을 담아서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괜찮다는 뜻으로 리카의 등을 살짝 밀어주었다. 그녀는 엘릭과 정지음의 앞으로 다가가 귀엽게 팔짱을 꼈다.

“아타시(제)가 도와드릴게요!”

카와이 퓨처 베이스의 신, 리카가!

“리카 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방금까지 엘릭에게 날을 세웠던 성필은 온데간데없고, 인자한 메인 프로듀서 성필만이 남았다.

“앞으로는 애들이 의견을 내도…… 그야 부족한 점이 많을 거예요. 그래도 아이디어를 원천차단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네, 그럴게요.”

엘릭과 정지음은 작업실을 나서는 성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필이 나가자마자 리카가 기세등등한 태도로 말했다.

“앞으로는 아타시(저)한테 더 친절하게 대해주셔야 해요! 저번처럼 또 그러시면 박 이사님한테 이를 거니까요!”

더는 엘릭에게 팩트 폭행을 당하고 쭈그러졌던 리카가 아니다.

그녀는 뒤에 부모님을 둔 어린아이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 내가 미안했어. 이르지는 마라.”

엘릭은 흐뭇하게 웃으며 리카에게 맞춰주었다.

항상 인터넷의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리카였는데, 직접 보니 정말 격이 다르다.

20살에 저 외모로 이런 말투라니…….

‘귀엽다.’

그렇게 세 명의 작곡가가 협업을 시작했다.

웃고 떠들며, 도저히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시간이었다.

모두 리카 덕분이었다. 그녀는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엘릭에게도 벽을 세우지 않고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리카는 윤활유와 같았다.

가로 엔터의 분위기가 따스한 것도 리카의 역할이 클 것이다.

‘지음이가 여긴 가족 같은 분위기라더니, 진짜네.’

물론 가로 엔터가 따스한 건 온전히 리카만의 공이 아니었다. 성필의 성격 탓도 있었다.

리카를 바라보던 성필은 마치 딸을 대하는 것 같았다.

이제껏 보았던 정지음을 향한 친근한 태도도 그렇고, 성필은 진심으로 회사 사람들을 가족처럼 대하려 노력하는 듯했다.

“형 왜 웃어요?”

“아니, 네가 한 말 맞는 거 같아서. 여기 진짜 가족 같네.”

“아아, 박 이사님 때문에요?”

리카를 데려와선 왜 기를 죽이냐며 따지던 성필은, 확실히 학부모 같은 느낌이 있었다.

“맞아요, 박 이사님이 애들 많이 아끼긴 하죠.”

“에, 박 이사님이 뭐 하셨나요?”

“그런 거 같네.”

“왜 아타시(저) 무시하나요?!”

항상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았는데, 어쩌면 회사에 소속되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엘릭이 앨범 프로듀서로 참가할 것을 수락한 이유도 소녀연맹 때문이니까.

계속 소녀연맹을 프로듀싱할 수 있다면, 여기 남는 것도 썩 괜찮지 않을까.

엘릭은 그런 의도를 담아 물었다.

“너 월급은 얼마 받아?”

“저요?”

대답을 들은 후.

“제 주제에 너무 많이 받는 거 같긴 한데…….”

“…….”

정지음 얘 진짜 가족 취급받네?

‘지음이 같은 작곡가가 그 돈을 받고 일을 해? 아, 수익 분배 비율은 나보다 훨씬 높으니까 좋은 건가? 아니, 그래도…… 얘가 프리랜서면 곡 받으려는 사람이 줄을 설 텐데…….’

하긴, 능력이 있어도 증명을 못 하면 어쩔 수 없지.

정지음은 아직 신출내기 작곡가일 뿐이니까.

이 정도만 줘도, 정지음의 말마따나 과분한 대우인 것이다.

‘가로 엔터에 들어오는 건 지음이 연봉이 더 올라가면 고려해보자…….’

정지음이 가로 엔터에서 받는 대우는 절대 빈약하지 않았다.

다만, 엘릭이 정지음을 너무도 고평가하여 그가 받는 대우를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콩깍지가 씌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저는 회사에 고마운 마음뿐이죠. 이렇게 작곡가로 살 수 있게 된 것도…….”

자신의 행복함을 설명하는 정지음을 보면서도, 엘릭은 안쓰러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지음아, 꼭 성공해라. 넌 더 나은 대우 받을 자격이 있어. 근데…….’

성공해도 나보다는 성공하지 말고.

그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일 테니까…….

* * *

소녀연맹 멤버들은 A&R팀과의 회의에서 개인곡, 유닛곡에 관한 의견을 마음껏 펼쳤다.

다섯 명이 모두 조화되어야 하는 타이틀곡보다는 훨씬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쉬웠다.

그렇게, 이제는 일상처럼 되어버린 A&R팀의 아이디어 회의가 무사히 끝났다.

“앗!”

리카는 회의실을 나가자마자 성필을 발견했다.

그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는 중이었는데, 리카가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일부러 어깨를 부딪쳤다.

“앗, 미안 성필쿤. 다치진 않았어?”

리카의 반말에 회의실에서 나오던 멤버들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진짜 놀라움은 다음부터였다.

“헉! 대한민국 최고의 귀여운 미녀, 가로 고등학교의 아이돌(진짜 아이돌이다) 리카쨩! 어떻게 리카쨩이 내 이름을……?”

“집에 가는 길이야?”

“으, 으응.”

“아타시(내) 집도 이쪽이야! 같이 하교할까?”

“에엣?! 나 같은 애랑 리카쨩이……!”

“왜 멍하니 있어. 빨리 가자!”

“아타시(나), 오늘 운수가 좋을지도?”

순식간에 꽁트가 한 편 다 완성됐다.

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기어코 참지 못한 리카가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꽁트가 끝났다.

“‘아타시’가 뭐예요! 남자는 그런 말 안 쓴다구요! ‘오레사마(이 몸)’라고 해주세요!”

“그런 거야? 오레사마(이 몸)…… 오케이. 외웠어.”

“푸흨, 그, 그리고 이사님이랑 제가 학생인 설정인 것도 이상해요.”

“재밌지 않았어?”

“이사님 얼굴론 무리잖아요!”

“……어.”

“에, 삐치셨나요?”

“아니.”

“애교 보여드릴까요?”

“됐어.”

성필과 리카가 저러던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점점 더 정도가 심해지는 듯했다.

‘박 이사님이 리카를 친구처럼 생각하신다더니, 정말이구나.’

백설하는 그 말이 리카를 기쁘게 해주려고 으레 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요즘 보면 두 사람은 정말 친구인 듯했다.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우정이라니…….

백설하는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둘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경 쓰는 건 백설하만이 아니었다.

“야, 리카. 아까 아저씨랑 뭔데?”

“나니가(뭐가)?”

“너한테 한 거.”

“나니오(뭐를)?”

“괴상한 대화 주고받았잖아.”

“에에, 괴상하다니. 그냥 얘기한 거잖아. 아라쨩이랑 하는 것처럼.”

“너랑 내가? 아까 그런 것처럼?”

“걍 팀장님이 리카랑 놀아준 거지. 어린애랑 말하는 것처럼.”

“손나(그런)!”

조아라는 떨떠름했다.

성필이 그냥 리카와 놀아준 거라고? 노는 것처럼 보이긴 했는데, 성필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저씨가 리카랑 죽이 잘 맞나?’

생각해보니까, 안 맞았던 적이 없다.

아마 둘의 정신연령은 비슷하지 않을까.

“뭘 그 정도로 이상하게 보냐. 팀장님 원래 저런 성격이셔.”

“뭐가 원래야. 아저씨는…….”

‘우리 아라 최고다! 세상 사람들이 다 보게 해야 해! 진짜 Born to be 아이돌, Born to be 댄서! 천년만년 아이돌 해줘 제발…….’

“……원래 그런가?”

“너한테는 안 그랬겠지.”

신아름이 리카를 향해 묘한 경쟁심을 불태웠다.

식사를 마친 뒤, 신아름은 ‘직접 보여주겠다’며 조아라가 보는 앞에서 성필을 찾아갔다.

성필은 1층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신아름이 곁에 앉았으나 눈길도 주지 않았다.

“팀장님.”

“어.”

“오늘 저 예쁘죠?”

“응.”

“어, 네, 예쁘죠. 그, 팀장님도 오늘 잘생겼네요.”

“그치.”

성필은 장난을 받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뭐 봐요?”

화면에는 춤을 추는 리카가 보였다.

얼마 전, 리카가 조아라의 추천에 따라 배우기 시작한 남자 아이돌의 춤이었다.

“지금 리카 보느라고 저한테 대답 대충하는 거예요?!”

“……어? 뭐가?”

“내 얘기도 안 들었어요?!”

신아름은 한동안 성필을 갈구다가 화가 잔뜩 나서 자리를 떴다.

그녀가 돌아오자 조아라가 비웃음을 날렸다.

“아저씨가 원래 그러긴 개뿔이. 걍 리카한테…….”

“닥쳐.”

조아라가 닥쳤다.

* * *

성필은 한구인이 새로 개발한 건강즙을 가지고 정지음의 작업실을 찾았다.

리카에게 줄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작업실에 없었다.

“리카 안 왔어?”

“네. 아, 목말랐는데.”

정지음은 성필의 손에 든 건강즙을 받아 갔다.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너무 자연스럽게 가져가서 성필도 뭐라고 할 새도 없었다.

“욱…….”

건강즙을 마신 정지음이 헛구역질을 했다.

“커헉, 크흡, 어, 리카는, 쿨럭, 요즘 자주는 안 와요. 커흑, 그게, 요즘은 춤 연습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아, 컥…….”

대체 건강즙에 뭘 넣은 거지?

어찌나 맛이 없으면, 정지음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리카한테 안 주길 잘했다.

“연습실에 가보세요…….”

정지음의 등을 두드려주는 엘릭을 뒤로하고, 성필은 연습실로 찾아갔다.

리카는 연습실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엡실론 노래네?’

꽤 옛날에 나왔던, 본격적으로 힙합으로 컨셉을 잡아 선보였던 곡이다.

안무가 힘든 건 물론이고 중간에 들어간 랩도 타이트해서, 엡실론이 고생 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필은 석세스 엔터 때의 추억에 잠겨 한동안 리카의 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났을 때 연습실 문을 열었다.

“앗, 이사님!”

리카는 성필을 발견하자마자 땀도 닦지 않고 후다닥 다가왔다.

“리카 왜…….”

엡실론 퍼포먼스를 연습하고 있어? 라고 질문하려던 성필은 리카의 옷에 눈이 갔다.

“그거 설하 옷 아니야?”

“맞아요!”

백설하가 자주 입었던 박시한 티셔츠다.

밑단이 길어 리카의 허벅지 중간에 걸칠 정도라, 하의실종 패션 같았다.

리카가 옷의 가슴께를 잡고 펄럭였다. 백설하보다 품이 많이 남는 가슴 부근이 인상적이다.

“힙합이에요!”

“품이 넓은 옷만 입는다고 힙합은 아니야.”

“힙합은 제 마음속에 있어요!”

“오…….”

꽤 그럴듯한 대답이다.

“엡실론 곡은 왜 연습하고 있어?”

“아라쨩이 추천해줬어요! 춤이 멋져서요!”

역시나, 엡실론의 ‘인형’ 같은 곡을 추천해줄 만한 사람은 조아라밖에 없을 것이다.

리카는 가로 엔터 입사 테스트를 받을 때 엡실론의 ‘내꺼 해라’를 선보였었다. 하지만 ‘내꺼 해라’는 분위기가 ‘인형’과 많이 다르다.

그건 각 잡고 남자친구 컨셉으로 기획했던 곡이다. ‘인형’과는 달리, 산뜻하고 싱그러운 분위기가 강점이었다.

“가사도 다 외워서 부르는 거야?”

“그래야 연습이 되니까요.”

“랩 잘하던데.”

방금 리카가 소화했던 엡실론의 ‘인형’은 타이트한 랩이 좋은 호응을 얻었었다.

랩을 배우지 않고 퍼포먼스를 소화하기엔 많이 힘들 테지만, 리카는 그것마저도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랐다.

“하양이한테 배웠어?”

“조금요! 헤헤, 대부분은 제가 혼자 연습한 거예요!”

리카가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대단하네, 리카.”

“맞아요! 저는 대단해요! 계속 연습해서 완벽해질 거예요!”

굳이?

퍼포먼스를 연습할 것이라면 걸그룹을 참고하는 편이 낫다.

남자 아이돌의 퍼포먼스를 걸그룹이 완벽히 소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남녀의 신체 구조를 고려하여 각각의 안무와 곡을 짜기 때문이다.

게다가 엡실론의 ‘인형’은 랩이 주이다.

“리카 넌 래퍼 포지션도 아니잖아.”

혼자 랩을 연습한다 해도 얼마나 도움이 될까.

괜히 시간 낭비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하고 싶어요. 저는…….”

리카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뭐든 잘하고 싶어요.”

성필은 그녀의 의도를 단숨에 파악했다.

‘잘하고 싶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리카는 본인의 강점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백설하와 같은 보컬도, 조아라와 같은 댄스도, 장하양과 같은 비주얼과 랩도, 신아름과 같은 천재성도 없으니까.

‘소녀연맹 리드 보컬, 리드 댄서.’

그게 리카의 위치였다.

메인 보컬, 메인 댄서보다 아래.

춤과 보컬 실력은 대단하지만, 결국은 어느 멤버보다는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계속 어중간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랩도 연습하고 있던 것인가.

강점은 없지만, 장점은 많을 수 있으니까.

백설하나 조아라와 같은 거대한 벽이 있으니, 아예 정점에 닿지 못할 것이라면 여러 분야를 얕게 파려는 것이다.

‘리카가 작곡에 매달리는 건 재밌어서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영역이 필요하기 때문일 거야.’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는 본인만의 공간.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어딘가가, 리카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소녀연맹에게 도움이 되고 싶을 테니까.

“내가 귀엽다고 하는 것도 그래서 싫어해? 귀엽단 건 외모가 어중간하단 의미도 있으니까?”

“제 외모가 어중간한가요?! 그런 뜻으로 말했던 건가요?!”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하냐는…….”

리카는 정말 상처받은 얼굴로 성필의 등을 토닥토닥 공격했다.

“아타시(저)는 귀여운 게 아니라 예쁜 거라니까요! 박 이사님의 선입견으로 저를 한계에 가두지 마세요!”

리카는 우울한 이야기는 다 지나갔다는 듯 자신의 양 볼을 짝짝 두드렸다.

“아타시(저)는 최고의 아이돌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분야에서 완벽해야 해요! 연습해야 하니까 이만 나가주세요!”

매몰찬 축객령이었다.

성필은 리카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한 대견하기도 했다.

‘열등감은 능력 향상을 위한 좋은 재료니까.’

리카는 다른 멤버와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가질 것이다.

그건 리카에게 스트레스를 주겠지만, 동시에 더 노력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본인이 이렇게나 노력하는데 말리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어쩌면 성필이 리카의 성장을 막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 방해해서 미안.”

“진짜 가시는 건가요?!”

“진짜 가라는 거 아니었어?”

“공감 능력이 없으시네요.”

“…….”

“제가 특별히 여자의 마…… 사람의 마음을 강의해드릴게요! 이제 박 이사님도 소시오패스 탈출이에요!”

리카는 홀로 연습하느라 외로웠다. 그래서 오랜만에 나타난 손님인 성필을 붙잡아두려 했다.

“먼저…….”

성필은 리카의 휴식에 잠시 어울려주었다.

하지만.

“리카, 방금 그 말은 진짜 소시오패스분들한테 실례잖아. 그분들도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의 성격을 좋아할 수도 있어.”

“아, 고,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너부터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할 거 같은데?”

“하이(네)! 아타시(저), 배울게요! 가르쳐주세요!”

약 30분에 걸친 수다는, 리카가 시계를 보곤 깜짝 놀라는 것으로 끝났다.

“너무 많이 놀았어요! 이제 진짜 연습해야 하니까 나가세요!”

“음, 나가지 말란 뜻이지?”

“에?”

“에이, 안 속아.”

“지, 진짜 나가란 뜻이에요!”

“계속 있을게.”

“가셔도 된다니까요?!”

“나도 이제 여심 마스터야. 너한테 안 속아.”

“손나(그런)…… 제가 괴물을 만들었네요……. 저는 한 이사님처럼 가르치는 재능이 없나 봐요…….”

성필은 리카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해준 뒤, 연습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문에 난 창을 통해 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성필이 나가자마자 다시 춤을 추었다.

‘리카, 힘내.’

언젠가 그 열등감마저 뛰어넘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어줘.

* * *

리카가 몸살에 걸렸다.

“리카가 최근 너무 무리한 거 같아요.”

백설하는 미리 리카를 말리지 못했단 데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여러모로 많이 배우려고 했거든요. 박 이사님도 아시겠지만, 랩이나 남돌 댄스도 막 연습하고. 브레멘 음악대에서도 키보드 포지션인데, 저한테 일렉 기타도 배우려고 했어요.”

외에도 신아름에게선 패션을 배우고, 장하양에게서는 연기를 배웠다는 모양이다.

리카의 스케줄은 모두 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홀로 시간표를 짜고 스스로를 혹독하게 다뤄온 것이다.

“리카는 매일 자기 전에도 책 읽으면서 공부하고…… 계속 그랬어요.”

마치 옛날의 장하양을 보는 듯하다, 라고 백설하가 평했다.

그 얘기까지 들으니 성필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카가 랩과 댄스를 따로 연습하는 것을 보았던 날, 그녀에게 위로를 건네주었다면…….

“리카는 많이 아파?”

“약 먹으니까 괜찮다고 하긴 하는데요…….”

회사도 못 나올 정도면 괜찮을 리가 없다.

성필은 백설하와의 면담을 마치고 나서도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얼이 나간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서류만 훑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조아라와 신아름을 찾았다.

“얘들아, 나 리카 병문안 가도 돼?”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요?”

조아라는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너희 허락 안 받고 방에 들어가면 또 나중에 뭐라고 놀릴 거잖아.”

“뭐, 난 별로 상관없어요. 안 그래도 리카 혼자 두고 온 거 좀 그랬거든요.”

“팀장님 뭘 병문안까지 가요. 일도 있잖아요. 리카가 진짜 아프면 설하 쌤한테 먼저 연락하고 그러겠죠.”

“그럴까…….”

하긴, 업무 시간에 리카의 병문안을 가는 건 너무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필은 아쉬움을 삼키고, 톡으로나마 리카를 위로해주기로 했다.

[성필: 리카 많이 아파?(오전 09:11)]

[리카: 일이나 하세요!(오전 09:11)]

[성필: ㅇㅇ…(오전 09:11)]

[성필: 많이 아프지? 오늘내일 푹 쉬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사 갈게.(오후 01:34)]

1초, 2초, 1분, 5분.

“리카가 대답이 없어!”

성필이 비명을 질렀다.

“겨우 5분 없잖아요. 팀장님 과민반응…….”

“얘 내 톡은 무음으로 안 해둔단 말야! 보낼 때마다 무조건 1분 내에 답하고 그랬어! 근데 읽지도 않잖아! 기절했어, 리카가 기절한 거야!”

“자는 거…….”

신아름의 합리적인 말을 듣기도 전, 성필은 이미 회사를 뛰쳐나가고 있었다.

조아라와 신아름은 창밖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성필을 바라보았다.

둘은 질린 표정이었다.

“진짜 저거 병이야.”

“걍 핑계 대고 리카 보러 가는 거 아니야?”

“조아라 너 팀장님을 뭘로 보는 거야! 팀장님이 이런 허접한 핑계 대고 리카 얼굴 보러 업무도 내팽개치고 갈 사람이야?!”

“…….”

맞다, 신아름 얘도 병 있지.

잠시 후, 조아라는 이재호를 끌고 다니는 손혜빈과 마주쳤다.

그는 손혜빈이 하는 말마다 고개를 주억이면서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A&R이란 그런 거예요. 아시겠죠?”

“예, 이사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무지몽매했던 저의 시야가 널리 트이는 기분입니다.”

“저 멕이는 거예요?”

“아뇨 절대 아닙니다!”

“어, 아라야.”

손혜빈은 조아라에게 다가와 엄청 재밌는 거라는 듯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이거 봐라? 성필이가 리카 상태 보러 간다면서 나한테 톡했어. 걔 어디 숨어있어?”

“숨어요?”

“몰카 같은 거 아니야? 아까 내가 뭐라고 해서 걔가 좀 삐쳤거든.”

“진짜 갔는데요.”

“어?”

“진짜 리카한테 갔어요.”

“……지금?”

“방금요.”

“리카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할 텐데 뭘 직접…….”

“언니도 이해 안 되죠?”

“아…… 음…… 생각해보니까 그럴 수도 있구나. 원래 그런 애니까. 옛날에도 이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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