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82화 (182/760)

182화

손혜빈은 엘릭을 이끌고 정지음의 작업실로 향했다.

엘릭을 보게 된 정지음은.

“뭐, 앉으세요. 적당히.”

어째선지 조금 싸가지가 없어 보였다.

손혜빈은 어이가 없어지려고 했다.

‘얘 지금 엘릭 견제하는 건가?’

이제 같이 일하게 됐다고?

의외로 외부 인사에 민감한 성격이었다.

“어, 그래요.”

하지만 엘릭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의자를 소리 나게 뺀 다음, 다짜고짜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품평하는 듯 정지음을 훑었다.

‘이 사람이 아니랑 롱 포를 작곡했어?’

생각보다 별거 없, 지는 않다. 키가 190cm이니, 보기만 해도 압도되는 듯했다.

‘그래, 네가 얼마나 잘난 지 봐줄게.’

엘릭은 예술가적인 호승심을 불태웠다.

그건 정지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로 엔터에 처음 방문할 때만 해도 엘릭을 작곡가로서 존경했고, 그보다 자신이 못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두 번이나 성공하다 보니,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하늘을 뚫고 솟아날 지경이었다.

특히 엘릭 앞에서는!

‘가로 엔터 음악 프로듀서는 나야. 제멋대로 프로듀싱 과정을 통제하려고 하면 가만 안 있어. ……근데 그러면 어떡하지?’

울면서 성필에게 달려가 일러바쳐야 하나?

‘아무튼 가만 안 있을 거야!’

두 작곡가의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손혜빈이 그런 둘의 사이로 쏙 들어갔다.

“협업하기로 하신 분들끼리 왜 이렇게 어색해? 오래 일할 거 같은데 악수나 해.”

둘 다 우물쭈물할 뿐, 누구도 먼저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다.

손혜빈은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의 손목을 잡아 손을 맞대게 해주었다. 그러고도 둘이 시큰둥하여, 직접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해야 했다.

“네네, 악수까지 했으니 둘은 친구예요. 서로 친하게 지냅시다.”

앞으로 적잖이 피곤할 듯하다.

“일단 곡을 하나 들고 왔는데.”

엘릭이 칼이라도 되는 듯 USB를 주머니에서 뽑았다.

그것을 본 정지음의 표정에서 긴장이 나타났다. 마치 상대가 무기를 뽑자 온 힘을 다해 집중하는 기사처럼.

“가로 엔터 스타일이 멤버들한테 의견 듣고 그러는 거라면서?”

“어, 맞아. 근데 나 보고 말하지 말고 지음이 보고 말하면 안 돼?”

“……가로 엔터 스타일이 멤버들한테 의견 듣는 거라면서요?”

“네, 뭐, 그렇죠 뭐.”

“지음이 넌 말에 왜 자꾸 ‘뭐’를 섞어. 미국 불량아야? 으웨, 워썹, 무어.”

“……멤버들의 의견을 듣고 곡을 만드는 편이에요. 기본적인 방향은 메인 프로듀서인 박 이사님이 잡으시고요.”

엘릭은 정지음에게 USB를 넘겼다.

“멤버들 의견은 안 듣고 만든 거긴 한데, 소녀연맹 생각하면서 만든 거예요.”

“아, 그래요. 그런데 어쩌나. 이게 소녀연맹한테 어울릴지 모르겠네요. 소녀연맹 컬러만이 아니라 앨범의 방향성에도 맞아야 해서요.”

“……네, 제가 오늘까진 프로듀싱 관련해서 아무런 말도 못 들었거든요? 그래서 방향성은 모르는 게 당연하겠죠? 그냥 들어보라고 만들었으니까 빨리 틀기나 하시죠?”

진짜 유치하게 기 싸움 하네.

손혜빈은 더 보고 있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가로 엔터의 뮤직 프로듀서와 10년 넘게 보아온 친구가 이 정도 인성밖에 없다니.

창피해서 죽고 싶다.

“워낙 대중적인 느낌을 잘 뽑으시는 분이라 걱정은 안 되는데, 소녀연맹이 그런 쪽을 추구하진 않아서…….”

“정지음. 조용하고 곡이나 틀어봐.”

“넵, 누나.”

엘릭이 준비해온 곡, 가제(假題) ‘러브’가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보컬 라인은 엘릭이 직접 녹음한 듯한 ‘라라라’와 같은 의미 없는 단어들로 채워졌다.

‘이건, 무슨…….’

엘릭의 스타일이 아니다.

일단 한국의 ‘가요적’인 느낌이 하나도 없다. 케이팝 씬에서는 볼 수 없는 절제되고 유려한 알앤비다.

차별점을 주고 싶었던 건가?

아니,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곡이 너무도 듣기 좋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고, 계속해서 듣고 싶은 그루브가 곡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정지음은 비판점을 찾으려던 것도 잊고 홀린 듯 곡만 들었다. 그의 기색을 살피고 엘릭이 기세등등해졌다.

곡이 끝나자, 엘릭이 자랑하려는 듯 입을 열었.

“팝(POP), 이라는 정의에 알맞네요. 흑인 음악의 계열인 알앤비를 기본으로 삼으면서도 중독적이고 단순한 그루브를 놓치지 않았어요.”

“아 씨 깜짝이야 뭐야!”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엘릭이 기겁했다.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이재호가 나타났다.

“뭐, 뭐야 이 사람!”

“재호 씨. 우리 A&R팀 직원이야.”

귀신인가? 작업실에 돌아올 때만 해도 기척조차 없었는데?

“앞으로 A&R 회의 때는 재호 씨가 항상 함께일 거야. 레벨업 버닝 타임 기간이거든. 그래서, 재호 씨 설명 이어가 주세요.”

이재호는 손혜빈의 말을 듣고, 충직한 견공처럼 수첩에 기록한 것들을 줄줄 읊었다.

“단순하며 중독적인 멜로디. 팝의 기본적인 요건입니다. 하지만 그게 단조로움을 의미하진 않네요. 어떻게 반복적인 구조로도 변화를 끌어내느냐, 바로 비트를 간단하게 틀어버리는 겁니다. 그 간단한 비틂이 곡 전체에 흐르는 관능적인 유혹과 사랑을 절제미로 거듭나게 합니다. 그 절제로부터, 여타 곡처럼 감정 과잉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보컬과 랩의 조화가 기대되는 곡입니다. 비주얼로는 걸크러시에 고혹미를 첨가하는 게 괜찮다고 생각되네요.”

이재호가 칭찬을 바라는 눈길을 손헤빈에게 주었다. 손혜빈은 그의 바람에 충실히 응했다.

“어이구, 우리 재호 씨 공부 많이 했네.”

“흐헤, 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정지음은 두려워졌다.

‘재호 씨 처음 들어왔을 때는 안 저러셨는데?’

매일 한중일, 미국, 유럽 음악 차트를 확인하며 대중음악 평론을 찾아보더니 안목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게다가 저 태도는 또 뭐야.’

손혜빈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필사적인 듯 보이기도 했다.

조교라도 당한 건가?

“……뭐 대중음악 평론가세요?”

엘릭의 말은 비꼬는 듯 들렸으나, 실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곡을 저토록 정제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랩이랑 보컬, 제가 생각했던 것도 그거였어요. 붙인 건 보컬 라인밖에 없지만요. 힙합, 알앤비. 현대 흑인 음악의 양대 줄기잖아요. 설하랑 하양이의 유닛곡으로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뮤직 프로듀서님 생각은 어떠신가 궁금하네?”

“…….”

항상 대중적인 곡을 뽑아내는 엘릭이다. 그건 곧 작곡가로서의 상업적 자질이 뛰어나단 뜻이고, 또한 비슷한 곡들만 뽑아낸단 뜻이다.

하지만 이 곡으로써, 엘릭은 본인에게 주어진 철창을 뚫고 나왔다.

‘할 수 없어서 비슷한 스타일의 곡만 쓰던 게 아니었구나.’

정지음은 인정해야만 했다.

“좋은 곡이에요. 대단하시네요.”

엘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어렵사리 칭찬을 돌려주었다.

“뭐, 그쪽도 나쁘진 않아요. 앞으로의 협업이 적당히 기대되네요.”

서로를 인정함으로써 둘 사이엔 기묘한 우정이 생겨났다.

손혜빈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이재호를 보았다.

“얘들 되게 단순하다. 그쵸?”

“네, 팀장님!”

이재호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프로펠러처럼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완벽히 손혜빈에게 굴종했다.

* * *

회의실에 A&R팀 전체가 모였다.

손혜빈, 정지음, 이재호, 그리고 협력 프로듀서로 정규 1집 작업을 맡게 된 엘릭.

그들의 앞에 성필이 섰다.

“예상하는 정규 앨범의 분량은 15곡입니다. 개중에는 멤버들의 솔로곡이 하나씩 들어가고, 서로의 케미를 고려해서 유닛곡도 적당히 들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댄스 라인 신아름과 조아라.

보컬 라인 백설하와 리카.

랩과 보컬의 조화 백설하와 장하양.

이런 식으로 수십 가지의 조합이 나올 수 있는데, A&R팀은 이 중에서 가장 어울리는 조합과 곡들을 뽑아내야 한다.

“정규 1집 타이틀곡은 신나는 분위기이기를 바라지만, 앨범 전체가 그러란 의미는 아닙니다.”

정규 1집의 볼륨을 15곡으로 올린 건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콘서트 세트리스트로 편성될 걸 고려하고 곡을 짜주세요.”

콘서트에선 여러 고려 사항이 필요하다.

아무리 숙달된 댄스 가수라도 격렬한 곡을 하나 추면 몸에 힘이 전부 빠지게 된다.

그 상태로 이어나가도 최대 2개 정도 더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앨범도 세트리스트의 구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신나는 곡 뒤에는 잔잔한 발라드를 놓고, 다시 댄스곡을 등장시키는 등.

콘서트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다양한 스펙트럼의 곡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팝스타들도 음원 시장용 곡으로 인지도를 얻으면, 다음 앨범에서는 콘서트용 곡에 집중하곤 한다.

아메리카 투어라는 금싸라기 땅을 취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소녀연맹도 팝스타의 전략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알앤비, 댄스, 클럽튠, 밴드 사운드, 뭄바톤, 드림팝, 제이팝, 장르는 가리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곡이 대중적 코드에 맞지 않아도 됩니다. 실험적이어도 됩니다. 소녀연맹의 색만 보여줄 수 있다면요.”

그 요구에 엘릭이 미소를 지었다.

항상 팔리던 곡만 쓰던 터라 손이 뻐근해질 참이었는데, 때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성필도 그의 기색을 읽었다.

“그게 케이팝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A&R팀 여러분, 도전을 미덕으로 삼읍시다.”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며 도전적인 시도를 많이 하는 건, 부정의 여지 없이 아이돌이다.

이미 한국 대중음악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아이돌의 앨범에는 매우 다양한 최신 트렌드가 적나라하게 반영된다.

‘외국 작곡가들이 케이팝 아이돌들과 협업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지.’

케이팝 아이돌은 팬덤이라는 상업적인 방파제가 있기에, 대중성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외국 작곡가들 입장에서는 한국의 아이돌계가 도전과 성공의 장이나 마찬가지다.

‘그 도전이 지금까지 케이팝의 성공을 이끌어왔다.’

이제는 소녀연맹이 선배들의 노력을 이어받아 도전을 시작할 때였다.

“확실하게 정하겠습니다. 저희 A&R팀의 목표는.”

성필이 화이트보드에 거친 글자를 적어나갔다. 마치 성필의 감정과 꿈을 담은 듯, 그 글자에서는 야성적인 날 것의 느낌이 뚝뚝 떨어졌다.

[올해의 앨범상]

“상품과 작품, 그 사이를 만듭시다.”

회의실에 모인 인원들은 당연하단 듯이 박수로 화답하였다.

모두의 눈에서는 열망이 들끓었다.

스스로 꿈을 창조해낸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가로 엔터 파이팅! 이기자! 이기자! 야호오오우우아아!”

이재호는 너무 심하게 흥분한 듯했으나,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가만히 두었다.

“우와아아아악!”

“…….”

그런데 도저히 참기가 힘들 정도로 열정이 넘쳐서, 성필은 손을 들어 이재호의 포효를 멈춰야만 했다.

성필은 설명을 이었다.

“남은 기간은 6개월입니다.”

그 설명에 도전 정신이 넘치던 엘릭의 얼굴이 싸악 굳었다.

6개월.

정규 앨범을 준비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다.

‘가로 엔터도 미니 앨범이 시작됐을 때부터 정규 앨범을 준비하긴 했겠지.’

그렇다면 정규 앨범 작업은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기획사가 해봤자 얼마나 했겠어.’

즉, 6개월간은 피를 말리는 레이스가 될 터였다. 특히 가로 엔터의 규모와 능력을 고려한다면, 아예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가 될 수도 있다.

엘릭의 기색을 읽은 성필은 미소를 띠었다.

“다들 불안하신가 보네요.”

이재호는 아닌 것 같으나, 외부 인사인 엘릭은 위기감마저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 말 아시죠. 작업물은 돈을 넣으면 넣을수록 빨라진다는 거요.”

안다.

음악이건 뮤직비디오건 비주얼 디렉팅이건, 많은 인력과 자본을 쏟을수록 기간이 단축된다.

하지만 가로 엔터에 그만한 인력이 있는가? 없다. 그만한 돈이 있는가? 없을 터다.

엘릭은 성필이 이런 말을 꺼내는 진의가 궁금했다.

‘돈은 없어도 열정은 있다, 뭐 이런 말 하려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만 커져 갈 때, 엘릭은 성필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에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네?”

“억을 써도 된다고 했습니다. 톱라인, 트랙, 샘플, 아니면 곡 전체. 무엇이든 얼마나 돈을 쓰든 마음껏 사서 쓰셔도 됩니다. 뮤직 퍼블리셔마다 곡을 몇 개, 아니, 수십 개씩 받으셔도 괜찮습니다.”

돈을 쓰면 쓸수록 작업 시간은 획기적으로 단축될 수 있다.

엘릭의 불안은 자신과 정지음만이 뮤직 프로듀싱을 담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나왔다.

단 두 명이 15곡 분량의 정규 앨범을 채워야 한다는 데서 나온 압박감.

방대하며 체계화된 A&R이 없는 가로 엔터에선, 기한을 맞추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혹은 기한을 맞추더라도 퀄리티를 희생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돈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면 가능할까요, 엘릭 씨. 앨범 프로듀싱 경험도 있으시잖습니까.”

엘릭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뭐라고 하기 없깁니다.”

성필도 미소를 지었다.

“예.”

출혈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아니, 이건 출혈이 아니다.

투자다.

정규 앨범에는 가로 엔터의 명운을 걸었다. 그러니, 가로 엔터가 비축하고 있는 자본은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

‘내 투자금과 웨벡스로부터 받은 1억 엔, 그리고 사장님이 계속해서 수혈해주고 있는 자금.’

그거면, 단순히 기한을 단축시키는 게 아니라 대형 기획사와 맞먹는 퀄리티까지 보장할 수 있다.

그저 돈이 많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돈을 부어도 퀄리티가 낮은 경우는 허다하니까.

그 돈을 맡는 사람이 정지음과 엘릭이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것이다.

“A&R팀, 앞으로 잘해봅시다.”

다시 한번, 박수가 작업실을 휩쓸었다.

* * *

소녀연맹은 본격적으로 정규 앨범 작업에 들어가게 됐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타이틀곡이다.

“일단 이전 회의로 결정된 사항은 ‘신나는 노래’거든요.”

이번 타이틀곡에 담을 메시지를 정하기 위해, 엘릭을 포함해서 토론을 펼쳤다.

회의 초반, 엘릭은 이야기에 끼어들기보다 이전의 회의록을 읽는 데 집중했다.

‘백설하는 본인의 보컬 기교를 살리길 바라는 쪽이네. 저 능력을 안 쓰고 묵혀두는 것도 아까운 일이긴 하지.’

엘릭은 안무에 관한 지식은 없기 때문에, 조아라가 소심하게 주장했었던 ‘보컬에 중점을 두면 댄스의 난도를 낮춰야 한다……’라는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안무란 곡이 있고 난 뒤에 붙는다. 그렇기에 엘릭은 회의록에 적힌 안무에 관한 아이디어는 전부 스킵했다.

‘소녀연맹 세계관. 아니랑 롱 포 마지막에 드러났던 그림자……. 음, 소녀연맹은 계속해서 투쟁과 저항, 자유를 키워드로 삼으면서 앨범을 만들었지.’

이번 정규 앨범도 그 세계관을 부드럽게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서프레스는 뭐지?’

조정훈 감독이란 사람이 낸 의견이라는데,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옆에 앉은 손혜빈에게 이전 회의록을 보여주며 물었다.

“야, 서프레스가 뭐야?”

“아, 이거. 전에 가로 엔터에 있던 보이그룹.”

“걔네가 뮤비에 왜 나와야 하는데?”

“그건 조 감독님 생각이야. 소녀연맹 뮤비 만들 때 서프레스를 악당으로 생각하고 만들었대.”

“확정은 아니지?”

“현실적으로 힘들지.”

대충 정리가 됐다.

‘박 이사님이 키워드로 잡고 싶었던 건 화해. 거기서 신나는 노래라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확정된 건 이거뿐이구나.’

신나는 노래.

그게 정규 앨범 타이틀곡의 키워드다.

엘릭은 이전 회의록을 접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박 이사님. 신난다, 라는 건 정확히 어떤 분위기죠? 장르나 참고삼을 다른 곡이 따로 있어요?”

“이제 그걸 정해야 해요.”

“……아, 진짜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구나.”

엘릭까지 참여한 A&R팀 회의는 아쉽게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단 멤버별로 표현하고픈 게 전부 다 달랐다.

‘신난다’란 말을 듣고 떠올리는 느낌이 제각각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필은 의견을 주고받는 멤버들을 보면서 뿌듯함과 동시에 피로를 느꼈다.

‘정규 앨범 타이틀을 논하는 거니까, 회의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어. 다들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고 싶을 테니까.’

신나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음악적 장르로만 따져도 EDM, 록, 힙합, 가스펠, 팝 등 수십 개로 나뉠 수 있다.

또한 가사로 표현하고픈 메시지나 보컬, 댄스와 같은 퍼포먼스에도 의견이 갈린다.

‘특히.’

성필은 아까부터 소극적으로 의견을 어필하고 있는 조아라를 눈에 담았다.

지금까지 소녀연맹의 퍼포먼스는 각각 분야에서 뛰어난 멤버들에게 양보를 구하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조아라는 이번에야말로 화려한 댄스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싶으리라.

‘역사적인 정규 타이틀이야. 아라의 특기인 댄스를 강조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건 백설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도 자신의 특기인 보컬 기교를 듬뿍 담고 싶을 게 틀림없다.

보컬, 댄스 두 가지 동시에 무게를 두고도 퍼포먼스를 소화하는 건 무척이나 힘들다.

결국 어느 한쪽의 양보가 필요하다.

‘이전 회의에서 보컬과 댄스를 적절히 조화시키는 데는 둘 다 동의하긴 했지만, 분위기는 좀 그렇네.’

백설하와 조아라가 의도적으로 그와 관련된 주제를 피하는 게 느껴진다.

엘릭이 앨범 프로듀서로 참여한 뒤의 첫 회의다. 즉, 오늘부터 본격적인 정규 앨범 프로듀싱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으리라.

‘본격적으로 주장하기엔, 서로의 심기가 상할까 걱정된단 걸까.’

둘이 빠르게 합의점에 도달하길 바란다.

백설하는 리더로서의 역할에 능수능란하니, 충분히 조아라와 의견을 맞출 수 있으리라.

‘일단 설하랑 아라가 대립점에 서 있고. 다음은.’

신아름과 리카다.

“이번에도 밴드 사운드가 좋을 거 같아요! ‘롱 포’로 성공했잖아요!”

리카는 밴드에 진심이다.

단순히 브레멘 음악대에 진심이란 뜻이 아니라, 밴드 사운드 자체를 좋아한다.

물론 정지음에게 배운 터라 EDM에도 일가견이 있으나, ‘롱 포’ 자체가 그녀의 음악적 취향에 너무나 들어맞았었다.

그 성공에 취해 이번에도 밴드를 미는 것이다.

“저번에 밴드 했으니까 이번엔 다른 거 해야지. 계속 들으면 물리잖아.”

반면 신아름은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선호했다.

이건 한국과 일본의 음악적 취향 차이에서 비롯된 대립인 듯했다.

한국에서 밴드 사운드는 그다지 인기가 없으니 말이다. 밴드 문화 자체도 홍대를 중심으로 근근이 맥을 유지할 뿐이다.

반면 일본은 차트의 상당수가 밴드 사운드로 이루어지며, 인디 밴드만이 아닌 메이저 밴드도 세계적으로 강세를 보인다.

“지음 씨, 뭐라고 메모했어요?”

엘릭이 정지음의 태블릿을 흘끔 보았다.

[세계관

마침내 드러난 악의 조직. 그건 사실 소녀연맹?!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억압자와 싸우는 자는 억압적으로 변한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는 자신도 심연이 되어버리듯이……. 과연 소녀연맹도 자신의 정의에 삼켜진 것일까?!]

“…….”

“뭐요.”

“……아뇨.”

멤버들의 대화를 듣는 정지음과 엘릭의 표정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자꾸 상반되는 의견만 나오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타이틀곡 회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로 해야겠다. 매일 해봤자 대립각만 세우겠어.’

성필은 수첩에 필기하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지금껏 별말 없이 앉아 있던 장하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장하양도 성필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보이자, 성필도 미소를 돌려주었다.

‘하양이는 아직도 의견을 내는 데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마 본인의 특기인 랩을 살리고 싶지 않을까, 성필이 조심스레 추측했다.

약 1시간이 지나고.

“오케이. 됐어요.”

성필이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며 회의의 끝을 선언했다.

“얘들아. 타이틀 회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할 거야. 다들 본인의 생각이 확고한 건 좋아. 하지만 본인의 생각과 다르다고 다른 멤버들을 배척하거나…….”

“저희를 뭘로 보시는 건가요! 소녀연맹은 일심동체라구요!”

“……트러블이 있다고 서먹해지지는 말고.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눠봐. 서로 레퍼런스 공유도 하고. 지음이랑 엘릭 씨도 멤버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해주세요.”

자, 그럼.

“회의 끝.”

이후, 성필은 엘릭과 정지음을 따로 불렀다.

“멤버들과 최대한 교감해주세요. 엘릭 씨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노력해주시길 바라요.”

보통 엘릭이 곡 의뢰를 맡을 때는 기획사로부터 대략적인 스케치만을 받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곡이 기획사와의 협의를 통해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가로 엔터는 달랐다.

“멤버들의 이야기를, 생각을 담아주세요. 가끔 애들이 레퍼런스라면서 책이나 영화 같은 걸 말하기도 하거든요. 그것도 봐주시고요.”

“아, 네.”

성필의 말마따나 당황스러운 작업 방식이다.

그래서 오히려 엘릭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송 캠프 같네.’

송 캠프.

다수의 작곡가가 모여 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 같이 지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멜로디나 트랙 등을 공유하며, 송 캠프의 목적에 맞는 곡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로 엔터의 프로듀싱 시스템은 그 자체가 송 캠프를 닮아 있었다.

‘아이돌의 의견을 듣는단 점에서 일반적인 송 캠프와 다르긴 하지. 특이해.’

가로 엔터가 소녀연맹을 아티스트로 대한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비록 소녀연맹이 진정한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많은 계단이 남았지만, 그게 그녀들을 무시해야 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알겠어요. 그럼 저랑 지음 씨가 자주자주 멤버들이랑 작업하면 되는 거죠?”

엘릭은 오랜만에 열정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가수의 앨범이 발매됐다는 소식을 듣고 사러 가는 기분이었다.

* * *

엘릭이 가로 엔터에서 살다시피 한 게 벌써 며칠이 지났다.

멤버들과도 말을 텄고, 무엇보다도 정지음과 형 동생 하는 사이도 됐다.

“제가 곡을 찍어왔어요!”

그런 도중 리카가 작곡을 해 온 것이다.

“신나는 곡이에요!”

“오, 그래?”

리카가 작곡을 한다더니, 그냥 취미로 즐기는 수준은 아닌 듯했다.

엘릭은 리카에게서 음원 파일을 넘겨받으며 이유 모를 긴장을 느꼈다.

아니, 엘릭은 억지로 긴장의 이유를 무시하고 있었다.

‘리카는 지음이한테 작곡을 배웠어.’

인정해주는 건 자존심이 조금 상하지만, 정지음은 훌륭한 작곡가다.

정지음은 세련미나 정교함이 부족하다. 홀로 작곡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단점을 상쇄하는 야성적이고 강렬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엘릭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실험적인 시도와 특이한 사운드가 곡 전반을 가득 채운다.

‘그런 지음이한테서 작곡을 배운 리카라면…….’

어쩌면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엘릭은 사운드 엔지니어링과 작곡을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배웠음에도, 정지음보다 못한 부분이 있단 게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리카마저 엘릭의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이라면, 그는 열등감을 숨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 틀게.”

곡이 진행되는 동안, 엘릭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가요!”

자신만만하게 되물어오는 리카를 보고, 엘릭은 역시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분명 시작은 퓨처 베이스였는데.

특징적으로 넣은 일렉 기타 사운드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신나지 않나요!”

엘릭은 이 음악의 장르는 몰랐으나, 그 특징만은 귀신처럼 파악했다.

‘애니메 제이팝이랑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짬뽕처럼 섞고 혀 짧은 일본어 보컬을 넣은 거야? 진짜 오타쿠 같다…….’

엘릭은 신나서 곡에 대해 설명하는 리카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멤버들이 귀여운 옷을 입고 귀여운 춤을 추는 거예요!’라고 했던 거 같은데, 듣자마자 잊어버렸다.

엘릭이 조용히 정지음에게 물었다.

“얘 뭐라고 하는 거야……?”

입 다물고 듣기만 하라는 듯, 정지음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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