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80화 (180/760)

180화

리카는 매뉴얼을 읽자마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글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지만, 무서운 것을 상상할 여지가 너무도 많았다.

이런 게 가로 엔터 근무자 매뉴얼이라고?

“앗!”

그렇구나.

성필이 장난을 치는 것이다!

“이사님 너무해요! 또 저 놀리시는 거죠!”

“이상하긴 하지? 나도 처음 받고는 뭐 이런 게 다 있냐 싶더라. 한 이사님이 주신 건데, 사람 놀리려고 만든 거겠지?”

“당연하죠!”

역시 놀리는 용도로 만들어진 거구나.

리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딱히 안 지켜도 별일은 없을 거야. 리카 너도 그냥 무시해.”

“원래부터 지킬 생각은 없었다구요! 누가 봐도 거짓말이니까요!”

리카는 밝게 답했다.

그 순간, 매뉴얼의 6번 규칙이 눈에 들어왔다.

[6. ‘근무 수칙을 지킬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근무 수칙은 즉각 폐기하십시오. 그리고 매니저 대기실의 선반에서 정식 근무 수칙을 찾으십시오.]

“…….”

“리카. 나는 일할 테니까 적당히 놀고 있어.”

“아, 이, 이에(아뇨). 오늘은 이사님의 야근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리카는 말을 끌다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타시(저)도 목이 말라졌어요. 음료수 가지고 올게요.”

“그냥 나랑 건강즙 나눠마시자.”

“아녜요! 이사님이 입 댄 음료수는 먹고 싶지 않아요!”

“……그러냐.”

리카는 자연스럽게 사무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벽에 등을 기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뭐야 저 매뉴얼은!’

진짜로 있는 건가? 아니면 성필이나 한구인이 직원들을 놀리기 위해 만든 걸까?

그런데, 성필이 방금 만들었다기엔 너무도 공적인 문서처럼 보였다. 소중한 것인 듯 파일에 끼워져 있기도 했고.

“잇타이(대체)…….”

리카는 홀린 듯이 매니저 대기실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민경섭과 로드 매니저들이 있는 곳이다.

[매니저 대기실의 선반에서 정식 근무 수칙을 찾으십시오.]

“…….”

정말일까?

정말로 정식 근무 수칙이 있는 걸까?

성필이 ’빡빡하게 수칙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근무 수칙이 얼토당토않아서?

아니면, 설마, 혹시, 성필이…….

“으, 우…….”

가로 엔터의 건물 내부는 어두웠다.

1층의 불은 꺼져 있고, 성필이 일하는 사무실 근처의 형광등만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리카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매니저 대기실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싸한 느낌에 천장도 보려고 한 순간.

[밤 12시 02분, 06분, 12분, 12시의 3의 배수 분각에 해당하는 시각에는 절대 천장을 보지 마십시오. 고개를 위로 올려선 안 됩니다.]

아직 12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리카는 겁이 나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이제 대기실까지는 곧…….

“히엑?!”

위이잉, 위이잉, 위이잉.

아무도 없을 회의실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 인쇄되는 소리, 팩스다.

[2. 회의실에서 팩스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면 절대 문을 열어선 안 됩니다. 소리가 들리는 즉시 귀를 막고…….]

그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뒤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리카는 허겁지겁 근무 수칙을 찾아 해당 항목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사무실에 두고 온 듯했다.

리카는 귀를 막고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낭떠러지에라도 선 듯,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아무것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들려.’

어둠과 정적 속,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의 내면이었다.

인간은 공포를 느끼도록 진화했다.

어둠, 희귀한 현상, 징조 등,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것들에 자연적으로 공포를 느낀다.

그런 공포는 어둠 속의 포식자나 자연재해로부터 생존률을 올려주었다. 허나, 동시에 귀신 같은 비합리적인 공포를 느끼게도 해주었다.

“이, 이사니임…….”

리카는 조상들로부터 차근차근 전달된 공포를 한껏 느끼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달한 스트레스 수치로 인해, 그녀의 생존 본능은 재빨리 안전을 되찾으라고 소리치는 중이었다.

리카가 팔을 뻗어 벽을 더듬었다.

손잡이가 잡힌다. 곧바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떴다.

“흐읏……!”

어둠.

매니저 대기실에는 어둠뿐이었다.

옆의 벽면을 더듬어 간신히 불을 켰다.

리카는 정면의 책장으로 다가가 선반을 더듬었다. 어딘가에 정식 근무 수칙이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서.

똑똑.

대기실에 들어온 지 10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리카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똑똑.

“이사님……?”

대답이 없었다.

“이, 이사님, 장난치지 마세요! 재미, 없다구요…….”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4.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누군가 노크할 때, 손잡이를 꽉 잡고 안쪽으로 당기십시오. 절대 문을 열어선 안 됩니다.]

똑똑.

“아, 이, 이사님, 이사, 님…….”

똑똑.

“왜, 왜애, 대답, 안 하시는, 거예요오……?”

똑똑.

리카는 바들바들 떨면서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잡이를 쥐고 안쪽으로 당겼다.

“이사님이시면 대답…….”

쾅쾅!

철컥철컥!

누군가가, 성필이 아닌 무언가가, 문을 부서질 듯 두드리며 열려고 한다.

리카는 혼이 빠져선 손잡이를 꽉 쥐었다. 절대 문이 열리지 않도록.

쾅! 쾅! 쾅! 쾅!

리카는 너무나 놀라고 두려워서 당장에라도 울고 싶었으나, 극도에 달한 공포는 눈물마저도 목구멍 안쪽으로 삼키게 만들었다.

그녀는 간헐적으로 ‘아……’라는 소리만 내며,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된 듯 도리질만 쳤다.

쾅!

노크 소리가 멎어갔다.

대신, 리카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문이 바깥으로 당겨진다. 리카도 지지 않고 문을 당겼으나.

“리카.”

결국은 열려버린 문틈 사이로, 표정이 없는 성필이 나타났다.

“열어.”

“…….”

한계에 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뇌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더는 이 고통과 공포를 겪지 않기 위해, 리카는 기절했다.

* * *

눈물을 그친 지는 한참 됐지만, 아직도 리카는 꺽꺽대며 성필을 탓했다.

“이사님은 아타시(저)를 싫어하시는 건가요오……! 흐끅, 그, 그래서어, 매일 저를 괴롭히는 건가요……!”

“아니라니까 그러네. 장난친 거였어. 네가 이렇게 무서워할 줄은 몰랐지…….”

“친구 계약서에서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오……! 장난도 거짓말이에요! 저랑, 저랑 친구로 있고 싶지 않은 건가요!”

“그래서 벌금 냈잖아. 네 말대로 친구니까 이런 장난도 친 거지. 내가 널 왜 싫어해.”

리카의 앞에 놓인 구운 치킨이 그것을 증명한다. 리카는 닭 다리를 야무지게 씹어먹으면서도 삐친 기색을 떨쳐놓지 못했다.

“그, 미안해. 정말…….”

설마 성필도 리카가 기절까지 할 줄은 몰랐다.

리카를 안고 휴게실에 눕힌 다음 119를 부르려 했다가, 다행히 그녀가 먼저 일어났었다.

‘끼에에에에엑!’

그리 비명을 지르며 성필에게서 도망가려고 해서 문제였지, 리카는 멀쩡했다.

성필이 오랜 시간 둥가둥가 리카를 달랬고, 친구 계약서에 근거해서 치킨까지 사줬지만, 리카는 여전히 저기압이었다.

“……정말인가요?”

“그래. 내가 진짜 너 싫어했으면 이런 장난으로 끝냈겠어? 그러니까 이제 좀 용서해주라. 네가 자꾸 나 싫어하니까 마음이 아파. 응? 용서해주면 안 돼? 응?”

리카는 물티슈로 손의 기름기를 닦곤 허리에 손을 올렸다.

“어쩔 수 없네요! 이번만이에요!”

“고맙다.”

“그런데 이사님은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하시나요?”

“싫어하는 사람?”

성필은 윤상열을 떠올렸다.

‘아니, 그건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지.’

“일반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냥 무시하지.”

“무섭네요. 이사님한테 무시당하다니.”

“…….”

“이사님?”

“…….”

“왜 그러시나요?”

“…….”

“에……?”

리카가 당황하자, 그녀가 없는 듯 행동하던 성필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이지.”

“이사님 나빠! 왜 자꾸 아타시(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나빠! 히도이(너무해)!”

“귀여워서 그래.”

“안 귀엽다니까요! 저는 귀여움은 졸업했어요!”

“그래. 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테니까 다 먹으면 올라와.”

“더 안 먹을 거예요.”

“아직 많이 남았잖아.”

“체중 관리해야죠.”

“오늘쯤은 그냥 먹어.”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세요!”

리카는 성필을 따라 사무실로 올라왔다.

“이사님은 놀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오늘도 벌써 12시가 넘어가게 생겼어요.”

“난 너희만 올바르게 자라주면 행복해.”

“이사님의 삶을 사세요! 남는 시간에는 일본 귀화 시험 공부도 하시구요!”

“뭐, 노력해볼게.”

“그런데 무슨 일 하시는 건가요?”

“너희 일본 데뷔 관련해서.”

마침 리카도 있으니 물어봐야겠다.

“우리가 일본 기획사에 너희 활동을 위탁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그쪽에서 팅글을 타이틀로 해달래. 그래서 그거 의논하러 조만간 일본에 갈 거거든.”

“앗! 가시면 관광 많이 해주세요! 그리고 일본을 좋아해 주세요!”

“관광은…… 잘 모르겠고. 팅글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해? 타이틀로 두는 거.”

“일본 타이틀? 리드곡 말씀하시는 건가요?”

‘타이틀곡’이라는 말은 한국에만 있다.

일본 같은 경우는 미니, 정규 앨범 중 미디어와 음악 활동에 사용하는 곡을 ‘리드곡’이라고 부른다.

“응. 그쪽에서 좀 막무가내거든. 팅글밖에 없다니, 그런 식으로. 그런데 팅글을 일본 앨범 타이틀로 두자는 건 소녀연맹의 정체성을 해치는 거 아닌가 싶어.”

“그런가요?”

의외로 리카에서는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보통 성필이 이런 말을 하면 리카는 무슨 말인지 몰라도 동의해주는 쪽이었는데도 말이다.

“아타시(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어? 정말로?”

“하이(네).”

“그럼, 소녀연맹의 컨셉이나 정체성이 무너질 수도 있잖아.”

“이사님, 어떤 것의 정체성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거예요! 모두 하나여야 한단 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거라구요! 전체주의에요!”

전체주의라는 건 잘 모르겠다만, 다름을 인정해야 한단 말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러네……. 팝스타들도 우리나라에 앨범을 등록할 때 타이틀을 본국의 리드곡이랑 다르게 두는 경우도 있으니까.’

현지화 전략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리고 팅글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느낌이긴 해요.”

“우리나라?”

“……내 나라였네요! 내 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느낌이에요!”

“그래?”

“하이(네)! 아, 그런데 박 이사님이 일본에 귀화하시면 우리나라라고 불러도 되겠네요! 어? 그, 그럼 한국은 뭐라고 불러야 하죠? 옛날 우리나라?”

그 뒤로도 리카는 ‘내 나라’와 ‘우리나라’라는 단어에 대해 고민하는 말을 쏟아냈다.

성필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업무에 집중했다. 가끔 ‘음, 정말 그렇네’ 같은 맞장구만 섞어가면서.

* * *

아침, 성필이 휴게실로 들어오니 홍규헌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서 커피를 탔다.

“사장님이 직접 커피도 타시네요.”

“한 이사가 오늘은 늦게 출근하네.”

“그러게요. 평소에는 한 이사님이 타 주시니까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나도 그거에 익숙해진 거 같아. 앞으론 혼자 타서 먹어야겠, 잠깐.”

성필이 빈 커피 스틱으로 종이컵을 저으려던 것을 홍규헌이 막았다.

“그거 비닐로 커피 저으면 환경 호르몬 나와서 몸에 안 좋대. 여기 스푼 있는데 왜 굳이 그걸로 해.”

“전 별로 신경 안 써서요.”

홍규헌은 자신의 컵에 놓여 있던 스푼으로 성필의 커피를 저어주었다.

“어제 리카랑 같이 야근했다면서?”

“네. 제가 야근하는 게 불쌍하게 보였나 봐요.”

“뭔 일은 없었고?”

리카가 기절했었다.

성필이 몰래 치킨도 시켜주었고.

“없었어요.”

“진짜 없었…….”

“귀요미 이사님!”

리카가 휴게실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어, 귀여운 리카도 좋은 아침.”

“흥! 사장님도 안녕하세요!”

“……어.”

리카는 인사만 하고 사라졌다.

“박 이사.”

“네.”

“너 리카랑 사귀어?”

성필이 커피를 뿜었다.

“뭐, 뭔, 그게 뭔 소리세요…….”

“방금 그거 애칭 아니야? 세상에 어떤 아이돌이 회사 이사를 귀요미라고 불러.”

“아, 그게…….”

내막을 얘기해줘도 홍규헌은 믿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박 이사가 ‘귀엽다’고 안 할 때까지 호칭에 귀요미를 붙인다고?”

“귀엽지 않아요?”

“너무 끼 부리는 거 같아서 기분 나쁜데…….”

“리카가 끼 부리다뇨?! 대체 리카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박 이사는 리카를 뭐라고 생각하는데.”

“친구요.”

“……건전한 우정 키워가라.”

홍규헌은 사장실로, 성필은 사무실로 향했다.

아직 출근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환기를 시키고 창틀을 닦고 있자니 한구인이 출근했다.

“박 이사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출근 시각까지 1시간 남았는데 뭐가 죄송해요.”

“어? 아, 그렇군요. 박 이사님이 와 계셔서 시간이 꽤 지난 줄 알았습니다.”

“오늘은 왜 늦으셨어요?”

“어제 책을 읽다가 늦게 잠들었습니다.”

한구인이 본인의 책상에 앉으며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연예 비즈니스 경영론.

성필이 공동 저자로 들어가 있는, 한구인이 성필을 찾게 된 계기가 된 책이었다.

“저희가 일본에 가지 않습니까. 이 책에 일본 매니지먼트 관련 내용이 있던 게 기억나서, 어제 다시 정독했습니다.”

“그거 옛날에 쓴 거라서 요즘이랑은 많이 다를 텐데요.”

한구인이 시무룩해졌다. 성필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형태는 같죠. 잘하셨어요. 그거 알고 계시면 훨씬 더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회사의 인원들이 모두 출근하고, 각 팀이 아침 회의를 열었다.

이후 성필, 한구인, 손혜빈이 모여 다시금 홍규헌에게 변동 사항을 보고했다.

“오케이, 이제 나가서 각자 일 봐.”

세 사람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으나, 자리에 앉는 건 손혜빈뿐이었다.

“좋겠다, 일본. 나도 가고 싶다아.”

“잘 있어 누나. 가로 엔터를 부탁해.”

“매정한 놈.”

성필과 한구인은 짐을 챙겨 회사를 나섰다.

“가볼까요.”

“예.”

일본으로.

* * *

서울에서 도쿄까지 비행기로 2시간 30분.

서울과 부산 사이의 자동차 이동 시간보다 짧다. 새삼스레 세계화 시대라는 말이 와닿는다.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네요.”

“외모로 그게 보이십니까?”

“선입견이지만, 뭔가 느낌이 있지 않나요.”

도쿄 국제 공항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사람이 파도처럼 서로 부딪치고 비산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성필과 한구인은 겨우 인파를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8km만 가면 리카 씨의 고향인 가와사키입니다.”

“진짜요?”

리카가 자주 ‘가와사키와 도쿄는 일심동체라구요!’라고 하는데, 단순히 수도권 사람의 자부심 같은 거라고 생각해왔다.

“도쿄 공항이랑 8km밖에 안 떨어져 있으면 진짜 가까운 거였네요. 리카가 그렇게 말했던 게 이해가 돼요.”

돌아가면 신아름에게 가와사키 출신이라며 리카를 놀리지 말라고 당부해야겠다.

거리로 본다면, 리카는 도쿄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한구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웨벡스 사무소의 안내인을 찾는 동안, 성필은 수첩에 메모된 웨벡스 사무소의 정보를 상기했다.

‘소속 보이그룹은 메이저로 취급되는 편. 단, 1군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다.’

웨벡스 사무소는 보이그룹 프로듀싱에 일가견이 있다.

일본 아이돌의 본격적인 부흥기인 90년대부터 보이그룹에 매진했으나, 한 번도 1티어 그룹을 만든 적은 없다.

항상 피눈물을 흘리며 1.5군에서 멈춰서야 했었다.

‘걸그룹은 항상 성적이 안 좋았고. 한류 그룹 매니지먼트 위탁 사업에 들어선 건 최근인가.’

케이팝 그룹의 매니지먼트를 맡은 경험은 두 번이다.

한국에서의 인기를 반영하는 수준의 성공을 거두었을 뿐, 그 이상의 매니지먼트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파트너라 할 수 있으리라.

‘오히려 웨벡스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신기하지.’

한국으로 따진다면, 웨벡스 사무소는 가로 엔터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기업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들이 지닌 보이그룹은 일본 내수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돈만 해도, 해외에까지 인지도가 있는 케이팝 그룹들을 능가한다.

‘일본 시장이 진짜 크긴 하구나. 내수로도 이렇게나 벌어들이고.’

“박 이사님, 사무소 쪽 인물을 찾았습니다.”

“아, 그래요.”

성필은 수첩을 덮고 한구인과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

* * *

“한국 그룹을 들인다구요?!”

히무라는 앞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에 더 열이 뻗친 듯 웨벡스 사무소 걸그룹 에스타스의 리더, 유미가 이를 갈았다.

“저희는요! 저희 에스타스는 1년 동안 앨범 소식도 없잖아요! 저희는 어떡하고 또 한국 그룹을……!”

대체 또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걸까.

히무라는 회사의 보안체계에 불신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기다려, 유미. 우린 너흴 버리지 않아. 너희는 연습만 하면 돼.”

“언제까지요! 1년이나, 1년이나 연습만 하고 있잖아요!”

“불편한 점이라도 있어? 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기다리라는 말이 그렇게 싫어?”

일본의 기획사, 즉 사무소들은 연예인에게도 월급제를 적용한다.

성과에 따른 보합제도 있으나, 수익 분배 비율이 크지는 않다.

이는 인기가 높아져도 예상 수익이 비례하지 않는 부작용도 있으나, 역으로 아무리 인기가 없고 성과가 적어도 돈을 받는단 장점이 있다.

“돈도 꼬박꼬박 나오잖아. 너희는 내가 시키는 대로, 때를 기다리고 연습만 하면 돼.”

그에 따라 아무런 수익도 창출하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수천만 엔의 빚만 있는 에스타스에게도 매달 월급이 나오고 있었다.

일본의 종신 고용 문화에 영향을 받은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덕분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앨범을 내고 싶다구요!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이번에는 꼭…….”

“기다려, 라고 했어.”

히무라의 낮은 일갈에 유미는 움찔하더니, 곧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히무라는 귀신 같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미안하다, 유미.’

제 식구인 에스타스에게 신경 쓰긴커녕, 또 한국 그룹을 맡겠다니.

에스타스가 반발할 만도 하다.

[실장님, 가로 엔터의 박 이사님과 한 이사님이 오셨습니다.]

“내 방으로 안내해드려.”

내선 전화를 끊고, 히무라는 자신의 얼굴을 마구 비볐다.

사업 상대에게 사적인 감정이 남은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서가 응접용 테이블에 차와 다과를 두고 얼마 뒤, 성필과 한구인이 들어왔다.

히무라는 벌떡 일어나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 이사님, 박 이사님! 먼 길을 오셨습니다!”

히무라는 두 사람과 인사를 하며 과하지 않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웨벡스 사무소의 ‘아이돌 관리 2실 실장’이 보일 태도로는 과한 느낌이 있었다. 웨벡스보다 매출이 수십 배는 적은 회사에 보일 예의로는 말이다.

“앉으시죠!”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전화로 통화할 때도 느꼈지만, 이 한구인이라는 사람은 일본어가 굉장히 깔끔하다.

일본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바쁜 두 분을 일본까지 부른 데는 죄송한 마음밖에 없습니다. 무리한 부탁임에도 들어주신 점, 감사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직접 뵙자고 해주시니 저희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히무라와 한구인의 예의적인 인사가 오가고, 히무라가 본론을 꺼내려 했다.

‘한국인은 협의 자리에서도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그렇게 똑바로 말한다지.’

그렇다면 일본에서의 영업으로 쌓은 지겹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의도 파악, 간파, 회유, 설득 과정은 필요 없을 터였다.

가로 엔터도 일본 영업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나가야겠다.

“미리 말씀드렸듯이, 일본 활동곡은 ‘팅글’로 부탁드립니다. 이게 저희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한구인이 성필에게 통역해주었다.

성필도 한구인에게 한국어로 무어라 했다.

대화를 끝내고, 한구인은 미소를 띠었다.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배려심 가득한 미소 안에서, 옅게 배어 나오는 불쾌감이 있었다.

“소녀연맹의 정체성을 바꾸라는 겁니까?”

“정체성을 바꾸라는 게 아닙니다. 정체성의 다른 부분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히무라가 판단하기로, 소녀연맹의 곡 중에서 가장 일본에서 먹힐 것은 팅글이다.

‘아니’나 ‘롱 포’는 물론 좋은 곡이지만, 일본 팬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팅글은 꿈에 젖었으면서도 귀여운 분위기니까, 훨씬 잘 먹히겠지. 코드 진행도 익숙해.’

먹히는 것을 넘어 히트칠 게 분명했다.

히무라는 팅글을 듣자마자 그런 확신이 생겼다.

‘일본의 아이돌 팬들은 강한 곡 컨셉에 익숙하지 않아.’

애초에 서양의 보이밴드와 걸그룹을 수입해서 귀여움과 일상적인 이미지를 부여한 게 일본이다.

거기에 섹스 어필을 살짝 첨가해서, 아시아적인 아이돌을 탄생시킨 것이다. 한국도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일본의 아이돌을 베끼다시피 하여 성공을 이룩하지 않았던가.

일본은 30년가량 그러한 이미지를 주류로 소비했으니, 팅글이 가장 잘 먹혀들어 갈 게 분명했다.

“팅글을 활동곡으로 정한다면, 소녀연맹은 규모에 비해 일본 데뷔에서 가장 성공한 걸그룹이 될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리드곡을 변경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일단 거절은 조건을 모두 들어보고 해주시겠습니까.”

아직 두 번째 조건은 내밀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가로 엔터는 부정적인 기색을 띠었다.

히무라는 의도적으로 기세를 키웠다.

“제가 바라는 두 번째는, 소녀연맹의 음악 프로듀서로부터 곡을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한구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성필에게 통역해주었다. 통역을 듣는 성필의 표정도 의문으로 가득했다.

히무라는 둘의 반응을 보자 속이 쓰렸다.

‘우리 웨벡스 사무소는 계속해서 걸그룹 프로듀싱에 실패했어. 지금까지처럼은 안 돼. 다른 아이돌보다 비교우위가 필요하다.’

히무라가 생각하는 비교우위란, 케이팝의 퍼포먼스였다.

‘가로 엔터가 내는 케이팝은 회사 규모에 비해 월등히 질이 좋아. 또한 규모가 작은 만큼, 적은 대가로 곡을 얻어올 수도 있을 거야.’

웨벡스는 케이팝의 퍼포먼스를 일정량 흡수하여 에스타스에 주입할 것이다.

에스타스의 컴백은 웨벡스 사무소가 소녀연맹을 매니지먼트한 뒤. 즉, 케이팝 그룹의 노하우를 습득한 뒤이다.

“자, 여기까지가 저희가 가로 엔터에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에 대한 대가는…….”

* * *

이치오쿠.

성필은 그 단어를 또렷하게 들었다.

리카가 자꾸만 일본에 귀화하라니 뭐니 해서, 성필도 그 말에 맞춰주려고 일본어를 조금씩 공부해왔다.

그랬기에 ‘이치오쿠’라는 단어를 알 수 있었다.

‘일억…… 이라고 한 거지?’

그 뒤에 붙은 단위는 무려 ‘엔’이었다.

일억 엔.

10억 원.

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돈의 규모만으로도 성필이 손에 땀을 쥐기엔 충분했다.

일본어라 맥락을 알 수는 없었지만, 한구인이 흥분한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좋아서가 아닌, 화가 나서.

* * *

한구인이 낮게 외쳤다.

“소녀연맹을 돈으로 사려는 겁니까!”

“소녀연맹을 단순히 매니지먼트 위탁 대상이 아닌, 웨벡스 사무소의 소속 연예인으로 대우하겠습니다. 그에 걸맞은 프로모션과 마케팅을 약속하겠습니다. 소녀연맹을 일본 소속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대우하겠다, 그런 제안입니다.”

파격적이기 그지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단, 저희에게 보장해주셔야 할 건 1년의 1/4. 3년 동안 매년 3개월의 일본 활동. 그리고 멤버들의 일본어 숙달. 또한 일본에서의 프로듀싱과 매니지먼트에서, 웨벡스 사무소에게 가로 엔터와 동등한 의결 권리를 주시는 겁니다.”

그래야만, 소녀연맹의 일본 활동을 최대한 서포트할 수 있다.

또한 가로 엔터는 일본에서의 마케팅과 프로모션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때때로 웨벡스의 전략에 의구심을 품고 반발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사양이다.

“소녀연맹은 온전히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돈을 벌어드리겠습니다. 스타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소녀연맹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얼마나 자신 있느냐면.

“아까 제시했던 대로, 계약금 1억 엔을 드리겠습니다.”

히무라는 소녀연맹을 일본에서 활동시켜, 3년 이내에 순익 10억 원 이상을 달성할 자신이 있었다.

순익이 10억 원이라면, 매출은 수십억을 넘어선단 뜻이 된다.

그리고 매출 수십억의 아이돌이 하나만 있어도, 그 회사의 가치는 수백억으로 판단된다.

즉, 히무라의 제안은.

“소녀연맹을 일본 아이돌계의 정상으로, 아니,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정상까지는 무리더라도.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아는 수준까지 올려놓겠습니다.”

히무라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소녀연맹을 돈으로 사려는 거냐, 고 하셨습니다만.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돈을 벌 자신이 있습니다. 만약 계약에 응해주신다면, 3년 후의 재계약 시즌에 제 말의 진실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

한구인은 성필에게 무어라 말했다.

“잠시.”

둘은 잠시 밖으로 나갔다.

30분 정도가 지나, 둘이 다시 들어왔다.

한구인이 히무라의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절하기엔 너무도 큰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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