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지음이 넌 이 가사 마음에 들어?”
“좀 수정은 해야 될 거 같긴 해요.”
걸그룹 앨범에 ‘존나’나 ‘시발’을 넣을 수는 없으니까.
개인적인 작업물을 모아 발표하는 믹스 테이프면 몰라도 말이다.
“근데 그건 수정하면 되는 일이고요. 감성이 좋지 않아요? 일단 가녹음한 거 있거든요. 그거 들어보세요.”
확실히 곡과 함께 들으니 가사를 보았을 때의 충격이 조금이나마 가셨다.
감성적인 분위기의 사랑 노래다.
만약 음원 사이트에 올라온다면 성필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둘 정도로 좋은 곡이다.
중간에 욕설만 없다면 말이다.
“형 왜 이렇게 욕에 신경 쓰세요? 요즘 랩씬에서 이런 거 별것도 아니에요.”
“하양이는 래퍼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근데 하양이 화난 상태에서 녹음했어? 욕하는 발성이 보통이 아닌데.”
“곡에 감정 이입한 거겠죠.”
“그래……. 누나는 뭐라고 했어?”
“손 이사님도 좋으시대요. 앨범 구성에 추가하는 건 더 고려해보더라도, 일단 어느 정도 형태 갖춰서 세이브는 해두자고 하셨어요.”
곡 자체가 좋은 건 사실이다.
이런 사운드의 곡이 있으면 앨범이 표현할 수 있는 음악적 범위도 넓어질 게 틀림없다.
‘그래도…….’
성필은 어째선지 착잡한 심정으로 장하양의 가사를 다시 읽어보았다.
“하양이 요즘 연애라도 하나?”
“네? 어…… 글쎄요. 그건 경섭이 형이, 아니, 민 팀장님이 더 잘 알지 않을까요?”
매니지먼트 팀은 멤버들과 가장 가까우니, 만약 낌새가 있다면 누구보다 가장 먼저 눈치챌 게 틀림없다.
“이거 아무리 봐도 그냥 지어낼 수는 없는 가사인데.”
“뭐, 옛날 경험이겠죠.”
“역시 그럴까?”
는 무슨.
성필은 바로 민경섭에게 달려갔다.
“하양이가 연애하냐고요?”
“너도 ‘도미노’ 가사 봤지? 그거 직접 경험이 없으면 절대 못 나올 감성이야.”
“알죠. 근데 하양이 요즘 딱히 달라진 것도 없어요. 애들 말 들어보면 휴일에도 따로 밖에는 안 나간대요.”
“핸드폰은 자주 만지나?”
“형, 걱정 마요.”
민경섭이 성필을 안심시켜주었다.
“저랑 형이 아이돌 애들 하루 이틀 봤어요? 석세스 엔터에서도 연애하는 애들은 바로 티가 났잖아요.”
핸드폰을 목숨줄처럼 가지고 다니면서, 왠지 모르게 톡이나 문자를 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무엇보다 행복함이 얼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연애하는 사람은 티를 내지 않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나 20대 초반의 풋풋함을 간직한 채라면 더더욱.
“하양이 연애 안 해요.”
“……네가 그렇다면야.”
“형 그건 들으셨어요? 애들 밴드 악기 연습하고 있는 거요.”
“갑자기?”
“창고에서 밴드 악기들 발견했거든요. 그랬더니 리카가 악기들 다 씻어서 멤버들이랑 같이 연습 시작했어요. 뭔 밴드 이름도 정했던데.”
“창고…… 거기에 악기도 있었구나.”
“권 경리가 비품 체크할 때 같이 가서 찾았대요. 옛날에 서프레스가 썼던 거고요.”
가로 엔터의 창고에는 별의별 물건이 가득하다. 주로 홍규헌의 흑역사들이다.
고가의 카메라나 트레이닝 기구 등, 투자금이 넘쳐났을 때의 홍규헌이 서프레스를 위해 사두었던 것들이다.
“애들 연주는 좀 잘해?”
“배우지도 않았는데 잘할 리가 없죠. 애들끼리 뚱땅뚱땅거리는 수준이에요. 근데 형 나중에 소녀연맹 애들한테 악기 연주도 가르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참에 레슨 붙이는 거 어때요?”
“아직 데뷔 1년도 안 됐잖아. 춤이랑 노래 익숙해지는 것도 힘들 시기야.”
연주는 여유가 좀 생겼을 때 가르칠 것이다.
* * *
“이제 쌤이 왔으니까 브레멘 음악대 창단식 할 수 있겠어요!”
백설하는 당황하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리카의 머리칼을 부지런히 쓰다듬었다.
“리카. 그런데 이미 밴드 인원 다 모인 거 아니야?”
조아라는 드럼.
장하양은 베이스 기타.
신아름은 일렉 기타.
리카는 건반.
이미 밴드의 구성 요소는 전부 갖추었다.
“내가 할 게 있어?”
“네! 쌤은 일렉 기타예요!”
불만스럽게 일렉 기타를 들고 있던 신아름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만약 백설하가 일렉을 맡게 된다면, 신아름은 브레멘 음악대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름이는?”
“아름이도 일렉 기타예요! 밴드에서 일렉이 둘인 경우는 흔하다구요! 메인이랑 서브예요!”
신아름의 표정이 다시 불만으로 채워졌다.
“리카. 나 그냥 안 하면 안 돼? 쌤도 왔잖아. 쌤이 보컬이랑 일렉 맡으면 되잖아.”
“다메(안 돼)! 아름이가 우리 브레멘 음악대 에이스인데 어딜 간단 거야!”
그 말대로, 신아름은 음악대에서 유일하게 일렉 기타를 완벽히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아름이 옛날에 일렉 배웠어?”
“아뇨. 그냥 보고 연습했어요.”
“아, 맞다…….”
신아름은 춤도 보면 그냥 외워버리는 애다.
기타라고 다를 건 없겠지.
아이튜브에서 연주 영상 몇 번 보면 금세 숙달될 게 틀림없다.
“그럼 아름이가 메인 기타고, 내가…….”
“쌤이 서브 기타고 보컬이에요!”
“…….”
백설하는 에리카가 일렉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멋졌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배워보자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쌤, 리카한테 뭐라고 말 좀 해줘요. 얘 며칠 전부터 밴드에 꽂혀서 자꾸 우리한테 연습하라고…….”
“그런데 연습은 뭐 보고 하는 거야? 그냥 악보?”
백설하가 밴드에 관심을 보이자 신아름은 또 울상이 되었다.
리카가 구석에서 두꺼운 책과 DVD를 들고 왔다.
“기타 교본이랑 강의 영상 DVD예요! 악기 옆에 먼지 맞고 있던 걸 가져왔어요!”
“왜 이런 게 창고에 있어?”
“서프레스 선배님들 쓰라고 사장님이 사셨대요! 홈쇼핑에서 30만 원에 기타랑 같이 샀다고 했어요!”
그렇구나.
지하실의 작곡 스튜디오 시설도 그렇고, 과거의 홍규헌은 씀씀이가 굉장히 컸던 모양이다.
‘3층에는 뭐가 있을까?’
가로 엔터는 인원이 적어서 2층까지만 사용한다. 연습실과 큰 사무실도 2층에 있으니까.
그런데 창고에 들어있는 물건을 보면, 폐쇄되어 있는 3층에도 뭔가 대단한 게 있을 듯하다.
* * *
“그래서요…….”
숙소 앞, 성필은 신아름과 1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 차의 보닛에 앉았을 때는 엉덩이가 따뜻했는데, 이제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정말 잠깐 얘기할 거 같아서 차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아름아.”
“왜요. 팀장님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리카랑 조아라랑 침대에서 매일 자는 건 딴 사람이 봐도 이상…….”
“너 슬슬 숙소로 안 들어 가봐도 돼?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어.”
“……저랑 얘기하는 거 지겨우세요?”
“아니! 전혀!”
“알았어요.”
신아름은 삐친 듯 드디어 엉덩이를 뗐다. 그러자 성필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다시 앉혔다.
“아 됐어요. 팀장님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거 제가 눈치도 없이 붙잡고 있었네요. 죄송해요 죄송해. 저는 빨리 가볼게요.”
“아니라니까. 나야 새벽까지 너랑 얘기만 해도 즐겁지.”
“거짓말…….”
“나는 너 내일 피곤할까 봐 걱정돼서 물어본 거였지.”
그렇게까지 말해줬음에도, 신아름은 여전히 삐친 듯 시선을 반대로 돌리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만나 반가워서 이러는 걸 텐데, 눈치도 없이 ‘언제 들어가냐’고 묻다니. 성필은 그녀를 달래줄 말을 찾다가, 문득 다른 게 떠올랐다.
성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로 들어갔다.
“진짜 가게요?! 아니, 아니, 갑자기…….”
성필은 당황한 신아름에게 차 안에서 가져온 선물을 주었다.
“헤어핀이야. 파리에 갔을 때 예뻐서 샀어.”
깜빡하고 차에 선물을 두고도 멤버들에게 주지 못했다.
다른 애들 것도 한 번에 신아름에게 맡길까 싶었지만, 내일 따로 주는 게 나을 듯했다.
선물은 직접 줘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선물?”
역시 효과가 좋았다.
신아름은 헤어핀을 받곤 잔뜩 들떴다.
그것을 달빛에 비추어보거나 머리의 이곳저곳에 가져다 대기도 하고, 이윽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성필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지금 해봐.”
“나중에요. 나중에 거울 보고 제일 잘 어울리는 위치 잡아서 달 거예요.”
“그래라.”
신아름은 기분이 모두 다 풀려서 그제야 성필을 놓아줄 마음이 생겼다.
“팀장님 굿나잇!”
“어, 너도 빨리 자라.”
그렇게 신아름은 1시간이 지나서야 숙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방으로 오니, 조아라가 책을 드럼 모양으로 쌓아두곤 젓가락으로 책들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뭐함?”
“연습.”
“드럼?”
“어.”
“그런 걸로 잘도 되겠다.”
“도와줄 거 아니면 가라. 화나게 하지 말고.”
“리카는?”
“씻어. 걔가 제일 마지막 차례.”
신아름은 열중한 조아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진심이야?”
“뭐가.”
“진심으로 드럼 연습하는 거냐고. 그냥 리카 장단만 맞춰주는 거 아니었어?”
“처음엔 그랬는데 하다 보니까 오기 생겼어. 혹시 알아? 우리가 콘서트에서 직접 ‘롱 포’ 연주하게 될지.”
조아라는 그 광경을 상상하는 듯 잠시 멍해졌다.
“……존나 멋있겠다.”
신아름은 자뻑하는 조아라에게 소름이 돋아서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거실에는 장하양과 백설하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마지막 날은 파리에서 묵으셨다구요?”
“응. 시설이 좋은 곳은 아니었는데, 파리라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지 느낌이 있더라.”
“거기에 박 이사님이랑 김수희 매니저님도 같이 있으셨던 거고요?”
“응. 그런데…….”
“방송 관련 협의 같은 걸로 방을 옮겨 다니거나, 같은 방에 들어가기도 했나요? 이사님이랑?”
“어, 응? 아니, 난 에리카랑만 있었어. 그리고 방송 협의면 굳이 방 안에서 할 필요는 없지.”
“그럼 같…….”
“쌤 촬영 재밌었어요?”
어느새 신아름도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응, 재밌었지. 근데 아름이 이제 들어온 거야?”
“네. 팀장님이랑 얘기했어요.”
“아름아.”
장하양이 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신아름을 불렀다.
“이사님도 일 마치시고 퇴근하셔야 하잖아. 업무 시간 끝나고도 붙잡고 있는 건 실례 아닐까.”
갑자기 이렇게 훈계한다고?
신아름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전부 맞는 말이라 곧바로 대답하기 쉽지 않았다.
“팀장님은 나랑 얘기하는 거면 새벽까지 해도 괜찮댔거든요…….”
장하양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주눅 든 신아름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옛날의 신아름이었다면 따박따박 말대꾸를 했을 텐데, 장하양을 언니로서 존중하는 듯 옅게 불만만 표할 뿐이었다.
장하양도 더는 뭐라고 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백설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읽고 신아름을 품에 안았다.
“아름아, 파리 얘기해줄까? 거기는…… 아름아 너 손에 뭐 쥐고 있어?”
“아, 이거요? 팀장님이 선물로 준 헤어핀이요.”
“선물……?”
장하양이 보여달라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신아름은 자랑스레 그것을 머리에 가져다 댔다.
“예쁘죠? 팀장님이 파리에서 사오셨대요. 저 주려구요.”
“다른 건 안 받아왔어?”
“다른 거요? 어떤 거요?”
그 대답에, 백설하는 내막을 눈치챘다.
‘박 이사님이 오늘 선물 주는 걸 잊어먹으셨구나.’
신아름과 오래 대화하다가 선물을 사두었단 사실을 깨닫고 그녀에게만 준 것이다.
나머지는 멤버들에게 따로 주려는 듯했다.
그렇다면 멤버별로 선물이 있단 것을 밝히는 건 눈치 있는 행동이 아니겠지.
백설하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아냐, 아무것도. 헤어핀 예쁘다.”
“그죠? 무슨 문양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유로일걸? 유로존 화폐.”
“그럼 이거 달러 같은 의미에요? 돈?”
“어어, 그렇지 않을까? 잘 모르겠…….”
“아무나 수건 좀 가져다주세요!”
복도에서 리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을 듣자마자 백설하는 수건을 가지고 샤워실로 달려갔다.
“…….”
거실에 신아름과 장하양만 남겨졌다.
살짝 어색한 분위기지만, 신아름은 다시금 헤어핀을 자랑하려고 했다.
성필에게 받은 것이니 수십 번이고 자랑하고 싶었다.
특히, 방금 성필과 대화 좀 나눴다고 훈계를 한 장하양이니까 더더욱 자랑해야만 한다.
아주 속을 태워버릴 것이다.
“이거 예쁘죠?”
“……아름아.”
“네.”
“박 이사님 퇴근 시간 지나고서도 붙잡고 있지 마. 박 이사님도 사생활이 있으시잖아. 알겠지?”
“그거 끝난 얘기 아니었어요?!”
결국, 장하양에게서는 칭찬을 얻어내지 못했다.
* * *
홍보팀의 양상헌은 ‘소녀연맹 비긴즈’의 시나리오를 검토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영상팀을 섭외하고 감독과의 미팅도 하루가 멀다 하고 진행했다.
그런 도중에도 트렌드 파악은 놓치지 않았다.
추천 영상이 아이돌 관련 채널로 도배된 그의 아이튜브에, 어느 날 일본 영상이 추천되었다.
‘뭐야. 일본 영상이 추천으로 왜 뜨지?’
국적이 한국으로 설정돼 있으면 웬만해선 외국 영상은 안 뜨는데 말이다.
또 알고리즘이 오작동이라도 일으킨 것일까.
“음?”
그 영상의 썸네일이 리카와 조아라였다.
제목을 읽을 수 없었으나 소녀연맹 관련 콘텐츠임은 확실했다.
“뭐야 이거. 조회 수가…….”
300만이라고?
가로 엔터 채널 중에도 뮤비를 제외하곤 이만한 조회 수의 영상은 없다.
양상헌은 허겁지겁 영상을 재생했다.
“진짜 뭐야.”
조아라와 리카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10초 남짓한 영상이었다.
조아라가 무어라 말하자 리카가 폭소를 터뜨리는 게 전부다.
‘이런 게 왜 조회 수가 300만이지?’
양상헌은 당장 홍보팀장 손혜빈에게 보고했다. 그녀는 영상을 보자마자, 영상 속의 리카와 같이 폭소를 터뜨렸다.
“웃긴 내용이에요?”
손혜빈은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닦고 말했다.
“아라가…… 아라가, 아라 말투가…… 크흠. 아라 말투가 특이해요.”
“말투가요?”
“네.”
손혜빈은 댄스 가수 시절 일본에서도 활동했었다. 일본어도 공부했기에 조아라의 말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좀 양아치 느낌? 남자 같은 느낌이에요. 아라 외모랑 갭 때문에 재밌어요.”
손혜빈은 이 영상과 관련된 콘텐츠를 쭉 훑었다.
“상헌 씨, 이거 관련 영상이나 반응 수집해서 못 올리겠죠?”
“제가 일본어는 못해서…….”
그럼 이건 손혜빈이 해야 할 일이겠다.
“알겠어요. 수고했어요.”
“아뇨. 그냥 알고리즘에 떠서 본 건데요 뭐.”
* * *
연예인들의 인터넷 방송 플랫폼, 뷔라이브.
리카는 요즘 라이브 방송에 맛 들였다. 맛 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카가 무슨 말만 해도 하트가 도배되고 팬들이 우쭈쭈해주니까 말이다.
팬들이 주는 관심은 초콜릿케이크보다 달았다.
[언니 너무 예뻐서 저 죽을 거 같아요…….]
“아타시(제)가 예뻐요?”
[네 네네 네네네!]
“……너무 당연한 사실이네요!”
리카는 ‘귀엽다’는 말을 자주 들을지언정, ‘예쁘다’는 말은 잘 들은 적이 없었다.
특히 성필에게서 그러했다.
뭐만 하면 귀엽다고 해서, 리카는 본인의 매력이 귀여움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팬들은 리카에게 귀엽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게다가 팬들이 SNS에서 공유하는 사진들을 보면, 정말 여신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리카의 사진이 많았다.
리카는 점점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사님! 오늘부터 선언할게요! 아타시(저)에게 귀엽다는 말은 금지예요!”
성필과 한구인이 회의를 진행하던 응접실에, 갑자기 리카가 들이닥쳐서 선언했다.
“뭐야 갑자기 쳐들어와서.”
“정식적인 요청이에요! 카와이(귀여워) 금지!”
“어쩌지? 너무 귀여운데?”
“엑?! 귀여운 게 아니라 예쁜 거예요!”
한구인은 침묵을 지켰다.
‘리카 씨는 일부러 저러시는 건가?’
리카도 이제 애가 아니다.
물론 한구인도 리카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터라, 그녀의 외모가 성숙해졌단 사실을 깨닫기 어려웠다.
하지만 리카는 20살이 아닌가?
‘그런데 말투가 아직도 아이 같으셔. 한국어가 미숙해서는 아닌 거 같은데.’
지금 절찬리에 성필에게 귀여움받는 리카도, 마치 귀여워 보이려는 듯이 애교 넘치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일부러 의도하지 않고도 어떻게 저런 분위기를 낼 수 있지?
“으으!”
리카는 계속 성필에게서 귀엽다는 말을 들으며 좋아했다가 화냈다가를 반복하다가, 결국은 화를 내기로 결정한 듯했다.
“이사님은 제 고통을 이해하셔야 해요! 그러니까 이 순간부터 저도 이사님한테 귀엽다고 할 거예요!”
“버릇없네.”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진짜 귀여워 죽겠다.”
“히도이(너무해)! 제 애절한 요청이 왜 닿지 않는 건가요! 역지사지!”
리카는 목청을 가다듬고.
“귀요미!”
라고 성필을 불렀다.
“이사님이 저를 인정하실 때까지, 저도 이사님을 귀요미라고 부를 거예요!”
“그래라.”
“자존심도 없으신가요!”
“리카한테 듣는 거면 ‘쓰레기’도 달게 듣지.”
“저는 죽어도 이사님한테 그런 말은 안 한다구요?!”
리카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응접실을 나가야만 했다.
“박 이사님. 리카 씨가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요?”
“뭐가요?”
“귀여움을 어필하는 거 말입니다. 조금 과도한 애교라고 해야 할까. 나이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리카 성격 아닐까요? 팬들이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일부러 저러겠어요.”
“음, 그것도 그렇군요.”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일본으로 가는 건 저희 둘이어야겠죠?”
“그렇습니다. 제가 통역이고, 박 이사님은 프로듀서로서 가로 엔터의 입장을 전달하시면 되겠습니다.”
또한, 가로 엔터의 재무를 책임지는 한구인이니 협상에서의 빠른 결단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네요.”
일본의 기획사, ‘웨벡스 사무소’.
가로 엔터가 소녀연맹의 일본 매니지먼트를 위임하기로 한 곳이다.
웨벡스 사무소와 협의를 이어가던 중, 갑자기 그쪽에서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해왔다.
“일본판 앨범의 타이틀을 ‘팅글’로 해달라니. 이해가 안 되는 제안이긴 합니다.”
“저희가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니까요.”
“원래 일본 매니지먼트사들이 다 이럽니까?”
“아뇨.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죠.”
매니지먼트를 위임한다 해도, 정말 주어진 일만 할 뿐이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프로듀싱의 영역에 관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맡게 되는 그룹이 어지간히 규모가 있어서, 일본에서의 예상 수익이 엄청나지 않고서야.
아무튼, 가로 엔터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해가던 시점에서 웨벡스 사무소가 만남을 제안해왔다.
“더 시간 끌기도 싫으니까 빨리 만나서 끝내죠. 시간 낭비예요.”
웨벡스 사무소는 일주일 정도 후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연락했으나, 가로 엔터는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일본에서의 매니지먼트를 맡아줄 회사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대면 협의 문화가 일반적이라 하며, 성필도 대체 그쪽에서 뭘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기에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내일 갈 거라고? 빠르네. 그래, 알겠어.”
홍규헌에게 보고하니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웬만한 건 박 이사 선에서 컷하거나 받아들여. 이건 진짜 모르겠다 싶은 거만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성필은 사무실로 돌아와 업무에 매진했다.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다.
“형, 저 갈게요.”
정지음이 퇴근하고.
“성필아. 우리 갈게.”
홍보팀과 A&R이 퇴근하고.
“가보겠습니다.”
재무팀이 퇴근하고.
“형, 저희도 가볼게요.”
멤버들의 귀가를 맡은 매니저를 제외하곤, 매니지먼트팀도 퇴근했다.
성필은 그 인사들에 답해주면서도 일에 빠져 있었다. 주로 정규 앨범 타이틀에 대한 레퍼런스를 찾고 조합하는 것이었다.
수 시간 동안 본 사진만 해도 수천 장, 들은 음악도 수백 개에 이르렀다.
지금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으니.
그때 누군가 성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성필이 이어폰을 빼고 뒤를 보았다.
“이사님은 퇴근 안 하시나요!”
리카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어, 나는 좀 있다가 퇴근하려고.”
“그런가요.”
리카는 성필을 내려다보다가, 근처에서 의자를 끌고 와 그의 곁에 앉았다.
“이사님 일 너무 열심히 하시는 거 아닌가요! 며칠 동안 매일 야근이에요! 그러다가 건강 안 좋아지신다구요! 가끔은 일찍 퇴근하셔서 운동도 하세요!”
“난 새벽에 깨서 운동해.”
“부지런하시네요!”
“너 이제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리카의 눈동자는 시계와 성필을 오갔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는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자신이 애교를 부린다. = 성필이 좋아함.
자신이 함께 있는다. = 성필이 좋아함.
야근하는 성필. = 슬픔.
리카와 함께 야근함. = 성필이 좋아함.
‘그렇구나!’
항상 업무와 야근으로 바쁜 성필에게 힘이 돼주고 싶었다.
비록 매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오늘만이라도!
“정했어요!”
“뭘?”
“오늘은 제가 이사님이랑 같이 남아서 이사님의 비타민이 되어드릴게요!”
“필요 없어.”
“에엑?!”
“이미 충분해.”
생각은 기특하지만, 리카가 사무실에 남아 있어도 뭘 하겠는가.
옆에서 이상한 소리만 하겠지. 물론 성필은 그것도 재밌게 들을 자신이 있었지만.
“너도 가서 쉬고…….”
그때 성필이 멈칫했다.
뭔가 떠오른다.
뭔가가…….
“리카, 안 나와?”
사무실 문이 열리며 백설하가 나타났다.
“저는 오늘 이사님이랑 야근하기로 결정했어요! 이사님에게 힘을 줄 거예요!”
백설하는 ‘리카가 또 이사님을 귀찮게 하는구나.’ 싶어서, 그녀를 어서 끌고 사라지려 했다.
“설하야, 괜찮아. 리카는 내가 숙소까지 데려갈게.”
“……네?”
“쌤 보셨나요! 이사님도 아타시(저)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아, 응…….”
백설하는 머뭇머뭇 사무실을 나갔다.
잠시 후, 창밖으로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이제 사무실에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리카. 미안한데 건강즙 좀 만들어줄래?”
“……하이(네)?”
“못 해? 한 이사님 만드는 거 많이 봐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 할 수 있어요!”
리카가 후다닥 사무실을 나갔다.
그동안, 성필은 미친 듯이 문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재빨리 프린트하여 파일에 넣고, 최대한 그 문서를 공식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겨우 문서를 완성했을 무렵.
“여기 건강즙이에요!”
뛰어왔는지 리카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진짜 만들었네……?”
맛도 비슷하다.
건강이 좋아질 것 같은 맛…….
“고마워.”
“에헤헤, 다른 도와줄 건 없나요!”
“지금은 없고, 일단 이거 잘 외워둬.”
“이게 뭔가요?”
“가로 엔터 야간 근무자 수칙이야. 야간 근무하려면 꼭 알아둬야 해.”
“이런 것도 있었네요!”
리카가 싱글벙글 문서를 받아들었다.
[가로 엔터의 야간 근무자는 반드시 아래 규칙을 준수하여 주십시오. 규칙을 준수하지 않아 발생하는 피해는 온전히 근무자의 책임입니다.
1. 밤 12시 02분, 06분, 12분, 12시의 3의 배수 분각에 해당하는 시각에는 절대 천장을 보지 마십시오. 고개를 위로 올려선 안 됩니다.
2. 회의실에서 팩스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면 문을 열어선 안 됩니다. 소리가 들리는 즉시 귀를 막고 다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리십시오. 도중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 단, 1층 휴게실과 지하 작업실은 피하십시오.
3. 가끔 2번 연습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을 닫지 마시고, 자연스럽게 연습실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십시오. 만약 내려가는 계단과 반대쪽으로 향하고 있었다면, 난간에서 뛰어내려서라도 1층으로 가야 합니다.
4.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누군가 노크할 때, 손잡이를 꽉 잡고 안쪽으로 당기십시오. 절대 문을 열어선 안 됩니다.
5. 서로 상반되는 상황에서는 상위 규칙을 따르십시오.
6. ‘근무 수칙을 지킬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근무 수칙은 즉각 폐기하십시오. 그리고 매니저 대기실의 선반에서 정식 근무 수칙을 찾으십시오.]
“좀 많지? 근데 빡빡하게 지킬 필요는 없어.”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