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밤.
백설하는 갑작스레 눈을 떴다.
“화장실…….”
자기 전에 에리카와 계속 연습하느라 물을 너무 많이 마셨다.
백설하는 잠에 취한 채로 비틀비틀 화장실로 향했다. 일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에리카가 들어왔다.
“에리카?”
“저 나가는 소리 때문에 깨셨어요?”
“아니. 화장실……. 어디 다녀와?”
그리 묻는 순간, 백설하의 코에 냄새가 잡혔다.
익숙한 냄새다.
전에 속했던 그룹의 멤버에게서 났던.
성필이나 민경섭에게서 나는.
그리고 사장실에서 맡을 수 있는.
‘담배 냄새?’
매캐한 냄새가 탈취제 은은한 향기 속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흡연자들과 지냈던 세월이 길어, 백설하의 코는 담배 냄새를 예민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불쾌하진 않은, 탈취제 섞인 담배 냄새를 성필에게서 자주 맡기도 했었다.
“오늘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래서 잠깐 산책이요.”
“그래…….”
백설하는 하품하는 척했다. 그녀는 정말로 잠이 깨지 않았단 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에 다가갔다.
누워서 이불을 어깨까지 올린 순간.
‘뭐야?!’
심장이 쿵쾅거렸다. 덮은 이불이 들썩이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에리카가 담배를 피워?’
그 완벽한 에리카가?
KS 엔터는 담배나 술 금지 아닌가?
몰래 피우는 건가? 어떻게?
숙소에서도 멤버들과 같이 생활할 텐데. 설마 멤버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안녕히 주무세요, 언니.”
에리카가 말했다.
백설하는 답하지 않았다. 지금 답하면 목소리에서 동요가 드러날 것 같았기에, 잠에 빠져든 척을 해야 했다.
에리카가 이불을 덮는 소리가 나고, 방은 다시 정적에 빠져들었다.
백설하는 째깍째깍 시침 소리만 듣다가, 곧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란 생각과 함께 눈을 감았다.
“언니, 눈치챘죠?”
백설하는 깜짝 놀라 몸을 거칠게 떨었다.
목소리가 몇 미터 건너의 침대에서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들렸기에.
급히 고개를 돌리니 에리카의 얼굴이 지근거리에서 보였다.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렸었는데?!
“역시.”
에리카는 싱긋 미소를 짓고는 벽면으로 다가가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갑작스러운 빛에 백설하가 눈을 찡그렸다.
눈꺼풀에 가려진 시야 사이로 에리카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 안 말해! 아무한테도 안 말할……!”
에리카가 손을 들었다.
‘내 머리를 때리려는 거야?!’
때려서 기억을 잃게 만들려는 건가?
위험부담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는 철두철미함인가!
“여기요.”
에리카가 본인의 오른손 검지를 백설하의 코에 가져다 댔다.
“냄새 맡아보세요.”
“…….”
아무런 냄새도 안 난다.
보통 흡연자는 담배를 쥐는 손가락에서 냄새가 강하게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에리카에게는 냄새는커녕 향기밖에 나지 않았다.
“담배 냄새 안 나죠?”
“으, 응.”
“박 이사님이랑 있다가 왔어요.”
아, 그러고 보니 에리카에게 맡아지는 담배 향은 성필의 것과 비슷했다.
탈취제의 향마저도.
순식간에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아니다.
게다가 성필이 담배를 피우는 장소로, 에리카가 우연히 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왜, 왜애……?”
백설하가 저도 모르게 늘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에리카는 그런 백설하를 슬쩍 내려다본 후, 간단히 답했다.
“비밀로 해주세요.”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알려줄 수 있는 이유가 아니란 뜻이다.
‘박 이사님이 에리카랑 새벽에 따로 만날 이유가 뭐가 있지? 게다가 담배 냄새가 밸 정도로 가까이에서…….’
성필은 소녀연맹 멤버들의 앞에서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백설하도 그가 담배 피우는 광경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째서 에리카에게서는 그의 향이 나는 걸까?
‘박 이사님이 다른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는…….’
홍규헌이나 민경섭이나, 흡연자의 앞일 때거나.
혹은 친한 손혜빈이나 한구인의 앞인데……. 자신의 본모습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백설하의 눈동자에 경악이 서렸다.
“부탁이에요, 언니.”
에리카가 ‘부탁’이란 말까지 입에 담았다.
절대 이유를 알려줄 수 없다는 의지 표명이다.
에리카는 혼란에 빠진 백설하를 보고 자신의 계획이 잘 먹혀들었음을 알았다.
‘이유를 알려줄 필요가 없지.’
어차피 인간은 이유를 알 수 없을 때는 본인이 가진 정보를 조합해서 이유를 만들어내니까.
그저 뉘앙스만 흘려주면 된다.
‘박 이사님도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으니까.’
헤헤, 담배 피우다 들켰어요.
라고 말하는 것보다, 비밀을 가진 두 사람을 이용하는 게 훨씬 쉽고 싸게 먹힌다.
에리카는 모종의 거래를 통해 성필에게 절대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단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에리카가 지켜본 바로, 백설하는 함부로 비밀을 발설할 위인이 아니었다.
담이 작은 인간이니까.
“……으, 응. 그럴게.”
역시나, 백설하는 에리카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에리카는 감사의 의미로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고마워요, 언니.”
담배를 피웠다, 그런 의심조차 받아선 안 된다.
그 옛날 로마의 집정권이었던 카이사르의 말마따나, 이미지가 필요한 인간은 단순한 의심마저도 치명적이다.
“믿고 있을게요.”
그러니, 백설하가 멋대로 망상하게 두는 편이 나았다.
* * *
성필은 장하양과 통화하며 짐을 챙겼다.
벌써 30분이 지났다. 슬슬 통화도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다.
“응, 나도 건강하게 지낼게. 내일 보자.”
[네, 이사님도…….]
“박 이사님!”
노크 소리와 함께 백설하의 외침이 퍼졌다.
[방금 설하 언니 목소리예요?]
“어, 그런가 본데. 이제 진짜 끊어야겠다.”
[둘이 같은 숙소를 쓰나요?]
“파리에서는 그래. 나 이만 체크아웃도 해야 해서 끊을게.”
[잠…….]
성필은 문을 열었다. 백설하가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설하야 잘 잤…….”
“이사님. 잠시 얘기 좀.”
그녀가 성필을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에리카랑 만나서 뭐 하신 거예요?!”
에리카의 예상과는 달리, 백설하는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위 없었다.
며칠의 정에 휘둘리기엔 사안이 너무 컸다.
“KS 엔터 이직 제안받으신 거죠? 그런 거죠? 전에 저한테 해주셨던 말 다 거짓말이잖아요! 그렇죠?!”
성필은 백설하의 말은 차분히 들었다.
그녀의 폭주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성필은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부탁.”
“네?”
“에리카한테 부탁했어.”
“뭘요?”
“너랑 잘 지내달라고…….”
성필은 조금의 막힘도 없이 말했다.
근래 백설하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였고, 이 프로그램을 잡은 것도 백설하가 기분전환을 하길 바라서였다고.
“네가 트레이닝에 흥미가 점점 줄어드는 게 보였거든.”
백설하는 놀라서 입만 뻐끔댔다.
최근 생겨난 노래 슬럼프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는 줄만 알았는데.
“계속 회사 안에만 있으면 회사가 세계의 전부인 줄 알게 돼. 가까운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너도 언니로서, 리더로서 중압감이 있잖아. 애들보다는 잘해야 한다는 그런 거.”
“…….”
“정작 회사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가도 너는 어린애고, 회사에서 느꼈던 중압감은 아무것도 아닌 게 돼. 선배 뮤지션들이랑 촬영하면서 그걸 느끼길 바랐어. 다른 친구도 사귀고. 이미 에리카랑 잘 지내는 것 같지만, 그래도 너랑 앞으로도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에리카한테 부탁했어.”
그런 부탁을 했다고, 성필은 거짓말했다.
어제 에리카를 만나고, 혹시나 그녀가 추궁을 받을 때 입을 맞춰주기 위해 준비했던 거짓말이다.
당연히 전부 성필의 머리에서 나왔다. 에리카가 이런 것까지 부탁하진 않았다.
“뭐, 무슨.”
백설하가 펭귄처럼 팔을 파닥파닥 저었다.
“제, 제가, 어린애도, 아닌데. 친구로, 지내달라고 부탁, 하다뇨…….”
“미안. 내가 좀 과했지? 어젯밤에 에리카랑 계속 대화한다는 게 길어져서. 너한테 들킬 줄은 몰랐네. 속여서 미안해. 괜히 참견한 거 같기도 하고.”
“…….”
“용서…… 해줄래?”
* * *
‘음악을 위한 동행’의 마지막 촬영.
나석문은 긴장하며 세션 악기가 설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길거리에는 파리의 시민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중이었다.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 가는 사람이 훨씬 많지만.
‘괜찮아. 방송에 내보낼 그림이 그려질 정도의 관중만 오면 된다.’
버스킹 관객의 수보다 중요한 건 출연자들이 멋진 버스킹 무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장면은 프로그램의 피날레이자 하이라이트.
‘음악을 위한 동행’의 성공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조각이 될 것이다.
“PD님. 설하가 오늘 기분이 좋나 봐요.”
“응?”
스태프의 말대로, 백설하는 이전 촬영보다 몇 배는 텐션이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잘 하지도 않던 농담으로 선배들을 웃겨주는 중이었다.
“긴장할 줄 알았는데.”
“실전에 강한 타입인가 봐요.”
아니면 긴장을 숨기려는 거거나.
“어찌 됐든 좋은 장면만 뽑아주면 그만이야. 근처에 몰려든 외국인들 반응이나 더 찍으라고 해.”
“네.”
“……아니다. 카메라 하나는 백설하 쪽으로 돌리라고 해. 음향도.”
백설하의 텐션이 굉장히 높고, 그녀가 하는 농담도 매우 재밌다.
말 자체가 재밌지는 않은데 분위기와 선배들의 반응이 대단하다.
“동물원 입장 가격이 얼마일까요오?”
“설하야 제발 그만해!”
“4,820원! 사파리공원(4, 8, 2, 0, 원)이니까요!”
“끼아아아아악!”
꼭 다음 예능에도 부르고 싶은 드립력이다.
백설하의 어이가 털리는 개그를 들으며 악기 설치도 끝마쳤다.
에리카와 백설하의 차례는 가장 마지막으로, 선배 뮤지션들의 뒤라서 중압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석문은 그녀들을 믿었다.
‘그래도 곡이 좋으니까.’
아이돌 콤비는 상상 이상의 곡을 만들어냈다.
* * *
선배 뮤지션들의 공연이 끝났다.
‘대단하다.’
각자의 분야에서 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공연을 보는 내내 백설하의 마음속에서는 존경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언젠가 그들처럼 되고 싶단 소망이 자라났다.
‘언젠가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언니.”
“응.”
백설하가 통기타를 잡자 에리카는 건반에 손을 얹었다.
나머지 악기들은 선배들과 섭외된 연주자가 하기로 되어 있다.
백설하는 기타를 꾹 쥐었다. 그녀는 에리카를 돌아보며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에리카.”
“선배님들! 설하 언니가 또 부끄러운 말 하려나 봐요! 빨리 와서 들으세요!”
“오, 또?”
“설하야 그래 말해봐. 마지막이잖아.”
옛날의 백설하였으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실제로 부끄러운 말을 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들 들어줬으면 좋겠다.
“에리카, 너랑 같은 팀이 돼서 다행이야.”
“와, 에리카보다 우리가 더 창피해.”
“헤헤, 부족한 나를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 너는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야.”
평소 같으면 선배들이 ‘그럼 나는?’ ‘우리는 존경 안 해?’라며 장난쳤을 것이다.
하지만 백설하의 어조에 담긴 진심을 읽은 터라, 그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기만 했다.
“고마워, 정말로.”
“언니…….”
에리카는 백설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저도요. 언니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둘은 버스킹을 준비했다.
에리카가 뒤로 돌아 드러머를 보자, 그가 킥 드럼을 쳤다.
백설하와 에리카의 자작곡 ‘World on fire’가 울려 퍼졌다.
* * *
첫 시작은 에리카.
백설하는 기타를 치며 그녀를 보았다.
일주일간 질리도록 보아왔지만, 그럼에도 에리카는 여전히 천사처럼 아름답고 착하다.
자신도 아이돌이라고 자부하지만, 에리카의 옆에 서면 막연히 작아지는 듯했다.
‘이 곡도 에리카가 거의 다 만든 거나 마찬가지고.’
심지어 에리카는 곡의 하이라이트마저 백설하에게 양보했었다.
백설하가 한사코 사양했지만, 에리카는 막무가내였다.
“언니가 노래를 더 잘 부르시잖아요! 언니가 불러주세요!”
그래서 백설하가 맡게 됐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어쩜 저렇게 착한 애가 다 있을까.
모든 게 완벽한 아이…….
‘그래, 에리카는 완벽해.’
인정한다.
더는 질투 따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한 능력도, 심성도, 그녀와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언니도 언니 나름의 보석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보석을 덮은 먼지가 아니라, 그 보석을 바라봐주세요.’
에리카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백설하는 자신이 가진 보석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있다.
‘박 이사님.’
지금도 제작진의 중간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성필.
그렇기에 백설하는 믿을 수 있다.
자신에게도 에리카 못지않은 보석이 있을 거라고. 그 보석을 성필이 찾아준 것이라고.
느슨한 가사를 주고받던 백설하와 에리카의 뒤로 세션의 연주가 격함을 더해간다.
관객들은 곡이 하이라이트로 진입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백설하는.
“음?”
스탠드 마이크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렇다. 한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너무 멀어진 거 아닌가?”
관객들이 의아해했다.
가수들은 고음을 낼 때 마이크를 멀리 떨어뜨린다. 성량이 강하여 음향 장비가 전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위치에서 최적의 공명점을 찾는다. 그런데 백설하가 물러선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다.
“저러면 마이크까지 소리가 잘 안 닿을 텐데.”
백설하의 뒤에 선 연주자들, 그리고 에리카마저도 불안한 시선을 보내왔다.
너무 멀리 떨어진 건 경험의 부족 때문인가? 그렇게 걱정했지만, 그들은 연주를 멈출 수 없었다.
이내 백설하가 입을 열었다.
* * *
“개 혓바닥 호흡법?”
트레이너는 연습실이 울릴 정도로 큰 웃음을 터뜨렸다.
신아름은 흥이 올라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요. 개처럼 혀를 내밀고 숨을 쉬래요. 근데 팀장님이 그게 진짜 있는 거랬다니까요. 트레이너님도 처음 들으시죠?”
“하하, 이해는 가네.”
노래란 게 상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야 좋은 소리가 나는 것이다.
숙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며 저도 모르게 어깨를 올리거나 목에 힘을 주는데, 그러지 않기 위한 연습법으로 ‘개 혓바닥 호흡법’이란 것을 알려줬으리라.
“혀를 늘어뜨리고 숨을 쉬면 자연스럽게 몸에서 힘이 빠지거든. 원래 노래 부를 때 기본적인 혀의 위치가 입 바닥이기도 하고.”
“진짜 있는 거였구나.”
“나는 잘 모르지만, 효과는 있을 거야.”
재밌으신 분이네.
트레이너는 백설하의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 신아름은 재밌는 이야기가 생각났단 듯 아 소리를 냈다.
“옛날에 쌤이 해주신 말인데, 노래를 부를 때는 가슴에 태양을 품었다고 생각하래요.”
“태양?”
“네. 태양을 가슴에 품었고, 노래를 부를 때는 그 태양이 가진 빛을 몸 전체로 뿜어내라고요.”
트레이너는 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우리 쌤 무시하는 거예요?!”
“어? 아니, 어, 웃으라고 한 말 아니었어?”
“맞긴 했는데 트레이너님이 우리 쌤 너무 무시하잖아요!”
“나도 네 쌤인데…… 미안. 근데 뭐, 그런 말은 많아. 나도 내 선생님한테 배울 때 임신했다고 상상하란 말을 들었거든.”
“……지금 저 성희롱한 거예요?”
“진짜라니까! 노래를 부르려면 무게중심을 아래에 둬야 하잖아. 상체는 가볍게 하고. 그러니까 뱃속에 소중한 거, 생명을 품었다고 생각하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겠지. 상체는 덜 움직이고, 하체는 단단하게 고정하게 되는 거야.”
그처럼, 가수마다 노래를 부를 때 상상하는 이미지가 다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야 해요? 성희롱 맞네.”
“넌 네가 알아서 이미지를 찾아야지! 여하튼, 난 그렇다고.”
“트레이너님은 남잔데 그걸 어떻게 상상해요.”
“……생물학적 한계에 본인을 가두지 마. 음악의 길에 이정표는 없는 법이니까.”
“우욱, 오글거려서 토할 거 같아.”
그건 그렇고 태양이라니, 정말 거창하기 그지없는 이미지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가슴에 태양을 품고 색색의 빛깔을 노래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에서도 통하는 성악가 정도일까.’
오페라 하우스 같은 곳을 홀로 쓰고.
마이크도 없이 수백 미터 떨어진 수만 명의 관객에게 노래하면서도.
그 소리가 가장 끝에 떨어진 사람의 귀에까지도 들릴 수 있게 할.
‘그 정도 사람이겠지.’
아마 백설하가 말하는 태양의 이미지란 것도, 자신이 그리 생각한단 건 아닐 터다.
과한 이미지를 가져봤자, 실력이 부족하다면 가수에게는 족쇄만 될 뿐이다.
‘태양의 이미지라는 건 본인이 닿고 싶은 이상향을 뜻하는 거겠지.’
백설하, 소녀연맹 멤버.
동시에 멤버들에게는 ‘쌤’으로 통하는 사람.
‘너무 본인을 몰아붙여서 좌절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으련만.’
트레이너는 마음속으로 백설하를 응원했다.
자신도 트레이너 이전에는 가수를 지망했었고, 늘지 않는 실력의 벽에서 무너졌었으니까.
그녀가 과한 목표를 잡아서 절망하지 않길, 트레이너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 * *
‘자세(姿勢).’
백설하가 어깨와 목에서 힘을 뺏다. 그녀의 상체에는 그 어떤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가슴 위가 없는 듯이, 공허하게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듯이. 그리하여 근육과 뼈가 막고 있던 공기의 통로가 훤히 열렸다.
동시에 아랫배와 엉덩이, 다리는 하늘 높이 세워진 대리석 기둥처럼 대지를 지탱하듯 힘이 들어간다.
‘호흡(呼吸).’
백설하의 허파와 갈비뼈가 팽창한다.
코와 입으로 숨을 들이마셔서 폐가 차는 게 아니라, 몸이 팽창하기에 숨이 들어오는 것.
윗배, 등허리, 옆구리가 부풀었다.
‘발음(發音).’
백설하의 혀에서 힘이 빠진다.
마치 개가 혀를 쭉 빼는 것과 같이.
입 안에서 유연해진 혀는 그 어떤 가사의 발음이든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자세’가 소리의 길을 만드는 것이라면, ‘발음’은 소리가 나오는 문을 바르게 열어두는 것이다.
‘발성(發聲).’
마침내 백설하의 목에서 숨이 뿜어져 나온다.
성대의 울림은 숨결에 소리를 부여한다.
아주 짧은 순간, 최초로 뽑힌 음절이 백설하의 귀에 닿았다.
깨끗하다.
여기까지가 0.1초도 되지 않을 정도의 찰나.
오랜 연습으로 만들어낸 기술과 습관.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노래는 성공할 것이라고.
숙련된 가수는 첫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부터 노래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다.
백설하는 최후의 단계에 돌입했다.
마지막.
‘공명(共鳴).’
백설하의 하체가 울린다.
몸의 중심인 허리를 지지대 삼아 엉덩이, 다리, 발 전체로 소리가 타고 흐른다.
소리에 장중함이 더해진다.
백설하의 상체가 울린다.
허리가 하체의 떨림을 받아, 배, 가슴, 어깨, 머리로 소리가 타고 올라간다.
소리에 섬세함이 더해진다.
‘흉부공명(胸部共鳴).’
중저음의 소리가 가슴을 진동시킨다.
소리는 물길처럼 성대에서 목구멍으로, 마침내 혀 위로 올라온다.
하지만 백설하는 그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비강공명(鼻腔共鳴).’
흉부공명으로부터 뽑아낸 소리를 콧속으로 보낸다.
좁은 공간으로 들어간 소리는 부딪침을 이어가 점점 더 커져 증폭된다.
여기서도, 백설하는 소리를 코 밖으로 내지 않았다.
‘두성공명(頭聲共鳴).’
비강까지 올라온 소리는 더욱더 위로 향한다.
눈으로, 이마로, 인간의 정중선상을 타고 머리를 향해 뿜어질 기세로 돌진한다.
머리끝까지 올라간 소리는, 그저 머리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울린다.
여기다, 라고 백설하는 직감했다.
정수리를 치는 찌르르한 느낌.
코끝의 떨림.
입가에 맴도는 진동.
이어서 목덜미가, 가슴이, 등이, 배가, 허리가, 엉덩이가, 다리가, 발끝이.
모든 몸에 소리가 닿은 것을 확인한 후, 백설하는 곡의 하이라이트를 뿜어냈다.
백설하가 어릴 적부터 썼던 노래 노트.
그 중간에는 백설하의 스승이었던 트레이너가 해주었던 말이 적혀 있다.
[태양을 삼켜라! 그리고 빛을 노래해라!]
어린 백설하의 귀에 마냥 멋지게 들려서 적어두었던 말을, 백설하는 몇 년 전부터 확실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 깨달음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전신공명(全身共鳴).
백설하의 몸 전체가 기타의 울림판처럼 소리를 증폭시켰다.
그녀의 노래는, 탁 트인 광장임에도 수십, 수백 미터를 돌파하여 사람들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노래는 햇빛이었다.
백설하가 가슴에 품은 태양이 색색의 빛깔을 소리의 형태로 쏘아 보냈다.
* * *
차례가 끝난 선배 뮤지션들은 백설하의 노래를 멍하니 들었다.
백설하의 뒤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들과 세션맨들도 똑같았다. 그들은 백설하의 뒤에 있으면서도, 마치 백설하의 뒤통수에서도 목소리가 나오는 듯 노래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설하…….”
발라더 박영모가 감탄을 터뜨렸다.
“아이돌 수준이 아닌데?”
다들 넋이 나가 있지 않았다면 기겁하고 박영모의 입을 막았을 발언이었다.
아이돌은 노래를 못한다, 가수가 아니다, 그런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박영모에게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러게.”
프로듀서이자 음악가인 김상신도 박영모를 말리기는커녕 동조해버렸다.
하이라이트 직전, 백설하는 마이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졌다.
저 정도 거리라면 마이크의 흡음벽을 뚫지 못하고, 마이크로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아예 백설하의 생목소리만 울려 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리, 진짜 완벽하게도 벌렸다. 설하의 실력, 저거 운빨로 나오는 게 아니야.”
백설하는 이미 저 경지에 도달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이크까지 얼마나 거리를 벌려야 하는지 알고 있던 게 틀림없다.
“겨우 23살이……. 체면이 안 사네. 나는 저 나이 때 뭐 했지?”
“하하. 저도 발라드 가수로 나름 일찍 데뷔했는데, 설하 나이 때는, 뭐…….”
백설하와 에리카의 버스킹 무대.
선배 뮤지션들의 리액션도 반응을 만드는 좋은 재료다.
버스킹 전에 나석문 PD가 최대한 리액션을 잘해달라는 부탁을 했음에도, 김상신과 박영모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천재야, 설하는.”
가수가 가수에게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찬사.
그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나석문 PD도 그들을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그 또한 멍해져 있었으니까.
그는 카메라에 녹화되는 장면을 바라보다가, 백설하의 보컬에 과도하게 이입한 나머지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내가 봤던 아이돌 중에 가장 잘 불러…….’
단연코 그리 말할 수 있었다.
스태프는 그에게 티슈를 내밀며 말했다.
“설하 여태까지랑 완전 다른데요?”
“어, 그러게.”
“힘 숨기기 놀이라도 한 걸까요?”
“장난치냐? 설하는 힘들었잖아.”
어머니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했단 말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도, 나석문과 제작진은 성필과 백설하에게 촬영을 이어가달라고 부탁했다.
백설하는 가슴이 얼마나 찢어졌을까.
“오히려 그 상황에서도 촬영 열심히 해준 게 고마워 죽을 지경이지. 애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갑자기 고열이 나서 쓰러졌겠어.”
“그러게요. 그래도…….”
마지막 날에는 모든 고통을 극복한 듯, 이토록 훌륭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PD님.”
“응.”
“위에서 계획 중인 프로그램 플롯 있잖아요. 아이돌들 모아서 경연시키는 거. 거기에…….”
“그래.”
굳이 스태프가 말을 끝마치지 않아도, 이미 나석문은 결정했다.
“거기에 백설하도, 소녀연맹도 부르자.”
꼭 부르고 싶다.
다시 한번 백설하의 노래를 듣고 싶다.
아니, 세상 사람들에게 백설하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태양처럼 퍼져나가는 소리의 빛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