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76화 (176/760)

176화

홍규헌은 사과를 깎으며 말했다.

“저는 어릴 때 옷장 위로 올라가서 뛰어내리는 놀이를 즐겼어요. 정말 어릴 때요. 바닥에 이불을 깔아두고 그 위로 떨어졌죠.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사달이 났어요.”

실수로 옷장 위에서 발을 헛디뎌, 옷장 옆에 있던 책상에 머리부터 정통으로 박았다.

“하필 책상에 얇은 유리 같은 걸 덧대뒀었거든요. 머리에 유리가 수십 조각이 박혔댔나……. 생전 저를 안아주지도 않던 큰오빠가 저를 안고 병원까지 달려가더라고요. 바보 같죠? 차를 타고 가지.”

아마, 오빠도 정신이 없었겠죠.

“그래서 아직도 제 정수리 부분에 살짝 부풀어 오른 곳이 있는데, 어렸을 때 꿰맨 자국이에요. 그 뒤로 높은 데는 안 올라가요. 무서워서요.”

홍규헌은 사과를 접시에 담아, 백설하의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어머니가 어이가 없단 듯 말했다.

“그래서요?”

“어머님께서 머리에 유리 조각이 박히셨다기에, 제 생각이 나서 말씀드렸어요.”

홍규헌이 병문안까지 왔음에도, 어머니는 잘 왔다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그래서 홍규헌은 분위기라도 풀 겸 자신의 이야기를 했는데,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옛날에는 인생이 천운(天運)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차운(車運)이라고 한다네요. 인도로 걷는데 갑자기 차가 달려들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어머니는 정말 그냥 인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 달려와서 인도 변에 주차되어 있던 차를 들이박았다.

들이박혀진 차가 어머니를 덮쳤고, 유리가 박살 나면서 어머니의 머리에 박혔다.

“수술을 잘 마치셔서 다행입니다.”

“그쪽한테 다행이란 말 듣고 싶지 않네요.”

“요즘 백설하가 본가에 다녀온 뒤로 우울하더군요.”

어머니는 여전히 홍규헌을 보지 않고 있었다. 평온한 척하지만, 방금 말로 인해 생긴 동요가 여실히 느껴졌다.

“아이돌이란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쪽은 몰라요.”

백설하가 있던 그룹이 해체된 후, 그녀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방에 꼬박 한 달을 박혀 있었어요. 울다가 지쳐서 자고, 일어나면 다시 울고. 밥도 안 먹고, 볼이 반쪽이 돼서.”

백설하는 슬펐을 것이다.

단순히 슬픔이라고 표현하기도 힘든 감정이었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 또한, 딸보다 괴로우면 괴로웠지 덜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딸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다신 그런 꼴 못 봐요. 안 본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그쪽이, 그쪽네들이…….”

드디어 어머니가 홍규헌을 보았다.

눈에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멀쩡한 애를 달콤한 말로 꼬드기고, 이루지도 못할 꿈을 저당 잡아서, 우리 애를 또 구렁텅이로 몰고 있어요. 제가 좋게 볼 이유가 있나요?”

“…….”

꿈을 저당 잡아?

백설하 본인이 바라서 가로 엔터로 온 것인데, 어머니는 그렇게 보고 있구나.

‘그렇게 따지면 대한민국의 모든 청년들이 꿈을 저당 잡히고 있는 건데.’

반박할 말이야 넘쳤지만, 홍규헌은 반론을 삼켜야만 했다.

“그 애는 나이가 들었어요. 저도 딸이 아이돌을 목표로 했고, 아이돌이었고, 안타깝게도 지금도 아이돌이라서. 그래서 잘 알아요. 평균 데뷔 나이가 16세에서 18세 사이라죠.”

백설하는 현재 23살이고, 22살에 데뷔했다.

“남들이 스펙 쌓고 더 나은 삶을 준비할 때, 걔는 도박이나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실패하면 그 애 손에 뭐가 남아요? 춤추고 노래하고, 그런 능력으로 뭘 해 먹고 살 수 있겠냐고요. 그 애를, 노래랑 춤만 익히다가 사회로 내쳐진 애를, 그쪽이 책임져 줄 수 있어요?”

홍규헌은 ‘본인이 선택한 건데 제가 왜 책임을 져요?’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어차피 설득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백설하에 대한 인상이 약간이나마 나아지길 바랐다.

“저희 회사에 박성필 이사란 사람이 있어요. 박 이사가 백설하를 설득할 때 뭐라고 했는지 아시는지…….”

“안 봐도 뻔하죠. 감언이설이나 늘어놨겠지.”

“‘아이돌 하고 싶으세요?’.”

“……뭐라고요?”

“아이돌 하고 싶으냐, 그렇게 질문했죠. 그랬더니 뭐라고 했냐면.”

자신은 나이가 많다.

남들 스펙 쌓을 때 또 연습생이 되고, 아이돌이 되고.

그러다가 실패하면 자신의 손에 뭐가 남느냐.

인생 전체를 칩으로 도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방금 어머님이 해주셨던 말씀과 똑같이 말하더군요.”

“…….”

“하지만 그건 본심이 아니었어요. 박 이사가, 예, 어머님 말씀대로 감언이설이죠. 그 모든 불안에 대해 답해주고 나니, 백설하는 저희 회사로 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말 몇 마디로 인생 전체를 거는 도박을 할 수 있을까요?”

백설하도 아이돌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웬만하면, 어머님의 본심과 다르더라도 백설하를 격려해주세요. 어머님의 걱정대로 아이돌이란 건 힘드니까요. 가족의 지지가 필요한 애예요. 부탁드립니다.”

홍규헌은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불편하신 거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쾌차하시길.”

밖으로 나오니, 한구인이 백수현의 숙제를 봐주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10년 넘었는데 수학이 다 기억나세요?”

“물론입니다.”

“와, 진짜 대단하시네요 이사님.”

“하하, 뭘요.”

“그럼 이건 어떻게 풀어요?”

“아, 이건 이렇게…….”

이제 보니, 그냥 숙제를 봐주는 게 아니라 숙제를 대신 풀어주고 있었다.

한구인은 백수현의 칭찬에 홀려, 자신이 숙제를 다 해주고 있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 이사, 가자.”

“아, 예. 수현 씨, 다 못 봐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뇨, 도움 많이 됐어요. 저기, 사장님.”

백수현이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홍규헌은 백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했는데, 키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그만두었다.

‘얘 17살 맞아?’

그의 머리로 손을 올리려면 팔을 위로 쭉 뻗어야 할 듯했다.

“그래. 맡겨둬.”

홍규헌과 한구인은 병원을 빠져나왔다.

“한 이사. 백수현이랑 친해졌어?”

“잘 모르겠습니다.”

“친해져.”

“예?”

나중에 데려올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 *

이른 아침, 에리카는 빠르게 단장을 마치고 객실을 빠져나왔다.

아침의 거리를 걸어보고 싶단 이유에서였다. KS 엔터의 매니저들은 꿈나라에 있을 것이다.

‘뭐 재밌는 게 있을까.’

조금이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 벌어지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벌어졌다.

에리카는 급히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박 이사님?’

그리고 그가 나오는 방은.

‘설하 언니 방이잖아?’

이렇게 이른 새벽에?

아직 해도 전부 떠오르지 않아 사방이 푸른빛인 이 시각에?

‘왜?’

에리카는 어제 백설하가 합주 중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바른 생활 소녀인 에리카는 촬영을 마치자마자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백설하가 합주하자고 문을 두드렸으나, 에리카는 이미 꿈나라에서 양들과 놀고 있던 중이었다.

‘제작진들도 겨우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을 시간인데…… 매니저들도…….’

에리카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그렇구나!’

성필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설하 언니는 박 이사님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험담도 그렇게 했었는데…… 아, 그렇구나!’

성필이 백설하를 꼬신 것이다.

이토록 짧은 시간 동안!

‘불쌍한 리카…… 어쩌다가 저런 카사노바 같은 남자한테 걸린 거야아…….’

리카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에리카는 오랜만에 찾아온 흥분에 즐거움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촬영지에서, 새벽에, 같은 방에, 어쩜 저리 대담할까…….’

* * *

백설하는 동생인 백수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다시 검진해보아도, 어머니의 상처는 몇 주의 요양만 거치면 완전히 회복될 수준이라고 한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

[그러니까 누나는 안심하고 촬영이나 잘해. 아, 그리고 누나 회사 분들이 병문안 오셨었어.]

“진짜? 어떤 분들?”

[사장님이랑 한구인 이사님.]

백설하는 그들에게 감사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동안, 회사는 그녀가 했어야 할 일을 대신해주었던 것이다.

[또…….]

백수현이 머뭇거렸다.

하기 어려운 이야기라서가 아니었다. 백수현은 호흡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는데, 그건 기쁨 때문인 듯했다.

[엄마가 말했는데.]

“엄마가?”

[자기는 걱정하지 말고…… 응. 그냥 걱정하지 말랬어. 할 일은 제대로 하고.]

백설하가 성필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던 게 방금 전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전한 말을 들으니 또 눈물이 나올 듯했다.

비록 어머니가 전한 말에 온기는 없었으나, 험한 말만 쏟아냈던 이전에 비하면 태양처럼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응. 열심히 할게. 엄마한테 안부 전해줘.”

백설하는 아직도 열이 남아 있어서 꼬박 하루를 쉬었다. 그녀의 간호는 김수희가 맡았다.

“죄송해요 매니저님.”

“뭘요. 제 일 자체가 설하 씨를 케어하는 거잖아요. 저도 밖에 나가 있는 것보다 안에서 에어컨 바람 쐬고 있는 쪽이 좋아요.”

“방금 그 말 이사님한테 해드려야겠다.”

“…….”

“장난이에요.”

김수희는 백설하의 좋은 말 상대가 돼주었다. 둘의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몰라도 대화가 잘 통했다.

“이사님은 뭐 하고 계신지 아세요?”

성필은 간호를 김수희에게만 맡기고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촬영팀 따라가셨어요.”

“제가 없는데요?”

“촬영 흐름 읽어야 한다면서 가시던데요? 설하 씨 복귀할 때 내용 알려줘야 한다고요.”

“아…….”

정당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섭섭해하기만 하다니.

김수희는 백설하를 가만히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이사님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해야겠어요.”

“뭘요?”

“그게, 설하 씨 열이 좀 내렸잖아요? 아직 힘드시긴 하지만요.”

“네에, 나아졌죠.”

“원래 PD님이 몸을 가누는 게 가능하면 오늘 촬영에 나오라고 했었거든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저는 아직 잘 모르지만, 방송이란 게 돈이 많이 드나 봐요.”

그렇겠지.

단순하게 스태프의 인건비만 생각해도 하루에 수백만 원일 것이다.

거기에 숙박비, 교통비, 식비, 장비 대여, 장소 대여 등 현지에서 쓰는 비용. 그리고 출연자 캐스팅 비용. 방송의 기획 단계부터 들어간 비용.

이 모든 것을 합하면 억이 넘어간다.

“이사님이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 제작진들한테 엄청나게 미안해하면서요. 고개도 숙이시고.”

“아…….”

그렇구나. 당연히 그렇겠지.

학교처럼 조금 아프다고 조퇴하거나 양호실에서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명의 출연자가 하루 빠지는 것만으로도, 원래 계획했던 그림에서 상당히 멀어질 테니까.

‘난 바보인가…….’

그런 것도 예상하지 못하고, 편히 누워 쉬면서 잡담이나 떨고 있다니.

“설하 씨한테 촬영할 거라고 물어보면 100% 할 거라면서, 이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근데 해야 할 거 같아서…….”

“매니저 실격이시네요.”

“네?”

“상사가 시키는 걸 어기고 말이에요. 벌 받으셔야겠어요.”

김수희의 표정이 헬쑥해졌다.

“장난, 이죠?”

“네.”

“아 뭐예요! 깜짝 놀랐네…….”

백설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 무거운 마음을 우울함으로 더 무겁게 만들진 않을 것이다.

성필이 쉬라고 고개를 숙여가면서까지 만들어준 시간이니, 그의 의도에 맞게 쓸 것이다.

‘고마워요 이사님. 내일 촬영은 열심히 할게요. 꼭.’

다음 날, 백설하는 단장을 마친 뒤 촬영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촬영에 들어가니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이 보였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찼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설하 너 가사 잘 쓴다.”

서시연이 백설하의 가사를 보고 칭찬해주었다.

“아니요, 선배님들이랑 에리카에 비하면…….”

“얜 뭐래. 각자 장점이 있는 거지. 설하 넌 가사에서 따뜻함이 느껴져. 음, Just like 태양처럼?”

“누나 너무 설하 띄워주는 거 아니야? 설하 얼굴 새빨개진 것 좀 봐.”

“아하핳! 이제 진짜 태양이네!”

선배들과 에리카는 백설하에게 한없이 따스했다.

백설하가 아팠기에, 어머니가 사고를 당해서 친절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백설하에게 따뜻하기만 했다.

단지, 백설하가 세상을 차갑게 보았던 것뿐이었다.

“언니 멜로디 너무 좋아요. 언니가 바꾼 게 더 나은데요?”

“아, 아니. 네가 짠 곡에 숟가락만 얹은 거지.”

“언니 떽!”

“어?!”

“자꾸 그러지 마요. 칭찬은 칭찬으로 듣는 거예요. 방금 거 괜찮았으니까 곡에 넣어봐요.”

촬영인데, 분명 일인데, 마치 멤버들과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백설하는 깨달았다.

이 세상은 숫자와 질서로 가득 덮인 곳이 아니라, 아름다운 음색과 선율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평가가 없단 것만으로도 세계가 달리 보인다.

‘행복해.’

곡을 만든다는 게, 가사를 쓴다는 게, 노래를 부른다는 게, 이렇게도 행복한 일이었구나.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하다.

백설하가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 더 나은 보컬 실력이나 작사 능력이 아니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평가하지 않는 동료들이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평가하지 않는 건, 백설하 자신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자신이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음악은 즐겁게 해야 하는 거구나.’

이미 옛날에 깨달았으나 잊어먹었던 진리를 깨우쳤다.

그런 백설하를 보는 제작진과 나석문 PD도 싱글벙글 미소를 지은 채였다.

“오늘 설하 좋은데요?”

“그러게. 그저께랑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대단하면서도, 불쌍하네요. 애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기까지 했을까요.”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던가.

나석문 자신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멀쩡한 정신으로 촬영에 임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백설하는 사흘 만에 그것을 극복하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예전보다 훨씬 밝다.

“저분 덕일까요.”

쉬는 시간, 스태프가 백설하와 함께 있는 성필을 가리켰다.

“그렇겠지. 저분 매니저 생활만 거의 10년을 했는데. 연예인들 멘탈 케어하는 데는 도가 텄을 거 아니야.”

“매니저가 진짜 중요하긴 하네요. 무슨 말을 들었으면 설하가 저렇게 바뀌었을까요?”

“모르지. 우리가 알 필요도 없고.”

각자 자신의 전문 분야가 있으니까.

“설하 하루 더 쉬게 해달라고 했을 때 언짢은 티 냈었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네요. 이왕 쉬게 해주는 거.”

“그러게. 쉬니까 훨씬 나아지네.”

나석문은 아까까지 찍은 촬영분을 확인했다.

“우리, 이 프로그램 흥하겠다.”

정지시킨 녹화 화면에는, 출연자들에게 둘러싸인 백설하가 나와 있었다.

태양과 같이 따스하고 밝은 미소였다.

* * *

‘음악을 위한 동행’ 제작진과 출연자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출연자들은 프랑스의 한적한 도시를 돌아다니며 영감을 얻고, 2인 1팀을 이뤄 작곡을 하고, 서로 결과물을 공유하며, 마침내 최종 목적지로 향한다.

프랑스 파리!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함께 버스킹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정신과 문화의 집대성!

총 세 팀이 그들이 만든 곡으로 버스킹을 펼치는 게 에피소드의 피날레다.

“이번엔 호텔이 아니네요.”

“파리의 숙소는 비싸니까.”

성필과 김수희는 백설하의 방까지 짐을 옮겨주었다. 뒤에는 에리카와 그 매니저들이 따라왔다.

백설하와 에리카는 촬영의 마지막 날은 같은 방에서 지낸다.

“설하야,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수희 씨랑 나도 여기에 묵으니까.

“네.”

백설하와 에리카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내일 꼭 완벽한 무대로 만들어요!”

“응, 꼭 그러자.”

둘은 같은 방을 쓰는 만큼 합을 맞추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

연습은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곡은 이미 완성단계였지만, 더 나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가차 없이 수정했다.

‘재밌다.’

다른 뮤지션 선배들도 그러했지만, 에리카는 정지음이나 이수연처럼 백설하를 평가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은 상하관계가 아닌 동료였다.

‘지음 오빠도 나를 존중해줬지만…….’

그래서 백설하가 만든 곡을 꼭 쓰고 싶다고 한다면, 정지음도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백설하가 거절했다.

음악 프로듀서인 정지음이 ‘앨범에 넣긴 좀 그렇다’라고 판단한 곡을, 굳이 앨범에 넣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백설하도 찜찜했으니까.

‘내가 나를 검열한 거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백설하는 즐겁게 작업하다가, 문득 에리카를 보자 가슴이 조여왔다.

“언니 왜 그러세요?”

“어? 음, 아니…….”

백설하는 줄을 튕기던 손을 기타의 울림통 위에 가볍게 얹었다.

“에리카 넌 완벽하구나.”

“헤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정말…….”

백설하가 아플 때, 에리카는 홀로 곡을 완성해두었다.

오히려 백설하와 같이 만들었을 때보다도 나았다. 그럼에도 에리카는 백설하가 복귀하자, 그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에리카가 백설하의 분량을 챙겨주기 위해 배려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작곡도 작사도 잘해. 노래도 잘 불러. 춤도 잘 추고. 그리고, 리더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완벽하고…… 천사 같아. 정말.”

에리카는 백설하의 칭찬이 단순한 칭찬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백설하는 에리카와 비교하여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챈 에리카는 본능적으로 말했다.

“언니, 그건 당연한 거예요.”

백설하가 픽 웃었다.

“개그도 잘하고…….”

“저는 남부러울 거 없는 환경에서 자랐어요.”

“어?”

“원하는 건 전부 가질 수 있었어요. 아무리 비싸고 얻기 힘든 거라도요. 부모님은 저를 정말 사랑하셨어요. 저는 큰 사랑을 받으면서, 원하는 건 모두 손에 가지고 살아왔어요. 가족이 아닌 주변의 사람들도 다들 저를 사랑했어요. 이렇게 자랐는데, 완벽하지 않을 수가 없죠.”

에리카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니, 진심이라기보다는 사실을 말하는 듯 평온한 어조였다.

마치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달이 뜬다는 듯이.

“누구라도 저로 태어나면 저처럼 될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된 건 우연 같은 거죠.”

“우연……?”

“네. 언니도 저로 태어났으면 저처럼 됐을 거고, 저도 언니로 태어났으면 언니처럼 됐을 거예요.”

에리카로 태어난다…….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저는 거의 모든 일에 흥미가 없어요.”

“응?”

“전부 너무 쉬우니까요. 사람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 라고 그러잖아요. 현실에서는 얻기 힘든 성취감이 있으니까. 그런데 저는 현실이 게임이에요.”

게임처럼, 공략을 알기만 하면 너무나도 쉽게 원하는 것을 얻는다.

에리카는 존재 자체가 공략이었다.

“아이돌이란 것도 어려워 보여서 시작했거든요. 왜, 뮤지션이 뜨는 건 운칠기삼이라잖아요. 운이 칠이니까,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은 순조롭게 흘러서 너무도 안정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요.

에리카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의 백설하를 보곤 배시시 웃었다.

“배부른 소리로 들리시죠?”

“그으, 그런 건 아니구…….”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있게 된 대신, 나이가 들면서 원하는 거 자체가 없어졌어요. 인생이 재미없달까……. 마아(뭐어), 어쩔 수 없겠죠. 등가교환이라잖아요. 그러니까요, 언니.”

드디어 에리카는 본론을 꺼냈다.

“언니가 저에게 부러워하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저도 언니를 부러워하는 부분이 있어요.”

“네가?”

“네.”

아마 뭐, 있겠지. 떠오르는 건 없지만.

에리카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언니가 생각하시는 언니의 결점 대신 장점도 있을 거예요. 너무 본인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백설하는 싱긋 웃는 에리카를 보며 생각했다.

이 애는 모든 면이 완벽하다.

마음씨마저도.

더는 그녀의 능력을 질투할 마음조차 사라졌다. 밑바닥의 노예가 왕을 보며 질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리카가 백설하의 손을 맞잡았다.

“저는 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언니도 언니 나름의 보석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보석을 덮은 먼지가 아니라, 그 보석을 바라봐주세요.”

* * *

드디어 내일이 마지막 촬영이다.

‘음악을 위한 동행’ 제작진과 출연자, 매니저들이 한데 모여 식사했다.

성필은 운 좋게도 나석문과 대화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와 친해지기 위해 일부러 가까운 자리를 골라잡고, 타이밍을 보아 다가간 것이었다.

“요즘은 사람들이 티비를 많이 안 봐서 큰일이에요.”

나석문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OTT 서비스가 있지 않나요? 다시 보기 같은 건 많이 본다고 들었는데요.”

“중요한 건 방송국의 수익보다…… 물론 그 수익이 중요하긴 하지만요. 영향력이 줄어드는 거죠.”

“아이튜브 때문이군요.”

이러다가 후일에는 방송국들이 규모를 축소하여, 예산을 끌어다 모은 대규모 프로그램 같은 건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최소 20년은 방송국들이 버텨주면 좋을 텐데요. 그래야 제가 일자리를 안 잃죠.”

나석문이 유머스럽게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했다. 성필은 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긍정적인 말을 꺼냈다.

“그래도 티비 방송이 갖은 이점도 있잖아요. 스타를 걸러내는 장치로서의 기능이요.”

“아, 그렇죠.”

방송에 얼굴 한 번 비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고를 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사고를 치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 티비에 출연할 수 있다.

특히 공중파는 도덕적 잣대가 더 엄격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티비 스타들은 계속 광고계에서 사랑받을 거예요.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렇겠죠. 인터넷 유명인들은 인터넷이란 환경 탓인지 도덕적 기준이나 콘텐츠의 정갈함이 부족하죠.”

유명하다며 인플루언서를 광고에 출연시켰다가, 갑자기 벌어진 사건으로 역풍을 맞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효과도 크지만, 위험부담도 크다. 티비 스타보다 더.

나석문도 성필의 말에 동의했다.

“전문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의 부재 때문인 거 같아요. 스타로 띄우는 프로듀싱도 중요하지만, 매니지먼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죠.”

성필이 매니저 출신이란 것을 알고 하는 말인 듯했다.

칭찬의 의도가 다분하지만, 안 좋게 들을 이유가 없었다.

성필은 웃음으로 그의 칭찬에 화답했다.

“사실 이 프로그램 짜면서도 살짝, 아주 살짝 걱정했거든요. 국내 톱 뮤지션분들을 모셨는데, 아티스트 기질이 다들 강하시니까요.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요.”

톱 뮤지션의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인성은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 모습이나 카메라의 뒤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오랜 세월 동안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아왔단 것 자체가 인간성의 증명이다.

“특히 아이돌은 쥐잡듯 관리하기로 유명…….”

나석문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찰나, 성필이 크게 웃었다.

“그럼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설하는 바른 애예요.”

“아, 네, 그런 거 같아요. 설하 착하죠.”

화제에 오르진 않았지만 KS 엔터의 에리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은퇴할 때까지 아무런 사고나 스캔들도 터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완벽 그 자체인 아이돌이니까.’

* * *

새벽 3시, 에리카는 눈을 번쩍 떴다.

귀에 꽂아두고 잔 이어폰에서 시끄러운 알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눈을 슬쩍 돌려 백설하가 자는 것을 확인하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였다.

방을 나서 숙소의 옥상으로 향했다.

“와.”

새벽인데도 도시가 번쩍번쩍 빛난다.

마치 도시가 별빛에 잠긴 듯했다.

“키레(예뻐).”

에리카는 웬만한 일에는 흥미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사람이나 사건을 대하는 데도 감정을 담지 않는다.

아까 백설하를 격려해줄 때도, 에리카는 그저 본능적으로 말했을 따름이었다.

그녀를 향한 동정도 뭣도 없었다.

단지 습관처럼 몸에 밴 것이었을 뿐.

“소라모(하늘도).”

하지만, 그렇다 해서 심적인 피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격려한단 것 자체가 체력과 마음을 쓰는 일이다.

에리카에게도 자신의 가슴을 채우고 의지할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옥상이 산책로라도 되는 듯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파리의 야경을 감상했다.

“토카이모(도시도).”

에리카는 미소를 가득 머금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칙칙.

“이이나(좋다).”

담뱃불이 타올랐다.

* * *

“하아…….”

성필은 새벽 2시까지 아이튜브만 보았다.

멤버들은 성필과 백설하가 없음에도 콘텐츠 업로드를 꾸준하게 했다.

양상헌이 제 일을 잘해주고 있었다.

‘이제 자자.’

그때 뷔라이브 알람이 울렸다.

리카가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성필은 재빨리 라이브에 접속했다.

[주말 아침, 다들 안녕하신가요!]

“아니…….”

아침인데도 시청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아타시(저)는 아침 먹구 다시 침대에 왔어요! 잠꾸러기 아라쨩도 눕자마자 다시 잠들었네요! 앗, 아라쨩이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말할게요오…….]

리카는 침대에 누워 조용한 목소리로 팬들과 소통했다.

[여러분, 아라쨩 보여드릴까요?]

리카가 히히 웃으면서 카메라 각도를 살짝 돌렸다.

세상 모르게 잠든 조아라가 보였다.

‘아라 잠자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

[아라쨩, 사랑해.]

[우응…….]

[대답했어! 인민이들도 들었죠?]

리카는 꽤 오랫동안 라이브를 진행했다.

1시간 정도 지나자 리카도 졸리는지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주말 아침엔 밀린 잠을 보충해야 해요! 인민이들은 저처럼 살지 마세요!]

“응, 리카 잘자.”

성필은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리카를 쓰다듬었다.

방송이 꺼지고 시계를 확인하자 벌써 새벽 3시였다.

‘빨리 자야 하는데.’

내일이 마지막 촬영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성필은 선반 위에 올린 담배와 라이터를 잡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중앙 복도의 계단. 아래로는 4층, 위로는 3층이다. 성필은 옥상으로 가길 택했다.

‘담배 피우면 피로가 깰 텐데.’

담배에는 각성 효과가 있다. 하지만 계속 깨어 있다 보니 욕구를 참기가 힘들었다.

성필은 살짝 열려 있는 옥상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에리카 씨?”

에리카는 한껏 당황한 눈동자로 성필을 바라보았다.

‘뭐지? 잠이 안 왔나?’

성필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등 뒤로 감추는 동시에 코를 찡긋했다.

‘섬유유연제…… 아니, 섬유 향수? 아냐. 이 싸한 향기. 다른 냄새를 지우기 위해 있는…….’

탈취제.

그와 함께 섞여 나오는 옅은 매캐함.

담배 냄새.

성필의 눈이 자동적으로 에리카의 바지로 향했다. 그녀의 주머니 속, 사각형으로 부풀어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

“…….”

에리카는 여전히 굳어 있다.

그건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에리카는 당황했다.

하지만 성필보다는 아닐 것이다.

1단계, 부정.

‘에이, 에리카가 무슨 담배야. 이것도 담배 냄새가 아니라, 그 뭐냐. 난로? 그래. 그거 탄 냄새일 거야. 그런데 지금 여름인데? 아…… 음, 그래도 아닐 거야. 주머니에 든 저것도 지갑일지 누가 알아? 좀 작은 지갑이겠지.’

2단계, 분노.

‘아이돌이 담배를 피워? 아니, 피울 수야 있지. 나도 피우는 애들 많이 봤는데. 팬들한테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그런데 KS 엔터는 술 담배 안 하겠다고 서약하고 들어가지 않나? 이건 팬에 대한, 나에 대한 배신이잖아! 설마, 담배라니, 언제부터? 에리카는 20살인데, 갑자기 20살 돼서 담배를 피웠다고? 일본에선 불법이잖아! 혹시,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 때부터……? 에리카, 내가 널 얼마나 애정했는데……!’

3단계, 공포.

‘담배 피우면 노래도 잘 못 할 텐데! 에리카 점점 폼 떨어져서, 케이어스 내에서 수납당하는 거 아니야?! 안 돼, 에리카, 담배 피우면 안 돼. 아, 그래! 겉담일 거야. 속담은 안 할 거야. 분명 그럴 거라고……!’

4단계, 흥정.

‘으하하하! 에리카도 성인인데 담배 피울 수도 있지! 내가 뭐라고 할 게 아니잖아! 나도 모르게 고나리(관리)질 할 뻔했네. 이야, 완벽한 아티스트 아이돌이 담배라니, 뭔가 예술가 향 좀 나는 거 같아서 멋진데? 그래, 멋진 거야. 에리카도 관리를 하겠지.’

5단계, 수용.

“흐끅…….”

성필은 전생과 합쳐서 8년에 가까운 팬심이 박살 나는 것을 느끼며, 결국은 절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이돌이라는 게 결국 이미지 장사다.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 우상으로 세워,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필이 그렸던 에리카는, 나의 에리카는 이렇지 않았다.

에리카는 담배 같은 거 안 피운단 말야…….

“우윽…….”

8년이나 무언가를 사랑했다면, 이미 그건 애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돌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견고한 우상의 벽이 깨지고, 성필은 8년간 사귄 애인에게 배신당한 듯한 울분을 지니고 등을 돌렸다.

그가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 한 순간.

“으억……!”

에리카가 성필의 어깨를 붙잡고 다리를 건 다음 바닥에 눕혔다.

성필은 하늘을 보아야만 했다.

곧, 에리카의 얼굴이 하늘을 대신했다.

“이사님.”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한 거리에서, 에리카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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