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뷔라이브’의 제작 지원을 받을 것인가.
이 안건을 두고 한구인과 양상헌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일반 직원과 이사가 대립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양상헌은 회의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의견을 낼 권리를 보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 양상헌 자신에게는 권리가 있다.
있을 것이다.
‘이 기회는 내가 잡아 온 거니까.’
소녀연맹의 다큐멘터리 콘텐츠를 만들자는 것도, 뷔라이브의 제작 지원 기회를 얻은 것도.
전부 양상헌의 아이디어와 노력 덕분이다.
그러니, 자신은 한구인과 대립할 자격이 있다.
“가로 엔터의 프로모션 전략과 어긋난다는 건, 그거군요. SNS와 아이튜브를 이용한 프로모션. 무료로 접근성 높은 콘텐츠를 제공한다, 인가요?”
“그렇습니다. 상헌 씨도 그런 이유로 가로 엔터의 프로모션을 고평가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입사 후 성필과의 면담에서도, 양상헌은 성필이 만들고 실행해낸 전략을 높이 샀다.
중소기업에선 실천하기도, 이루어내기도 힘들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뷔라이브의 제작 지원이란 건 그 대국적인 전략마저 수정할 가치가 있습니다. 독점 공개와 조회 수로 인한 광고비 수익 분배 비율 상향 조정.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모든 제작비와 스태프 인건비를 뷔라이브에서 부담하는 거예요.”
“압니다.”
“저희가 자체적으로 만든 ‘소녀연맹 비긴즈’는 퀄리티가 그다지 높진 않을 겁니다. 뷔라이브에서 제공하는 제작진에 비해서요.
“인정합니다.”
“거기다가 아이튜브에 ‘소녀연맹 비긴즈’를 만들어 올려도 얼마나 볼까요?”
양상헌은 아이돌 그룹들이 만든 자체 콘텐츠들의 처참한 조회 수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애초에 전문적인 기획자가 없고서야, 소속사에서 만든 아이돌 콘텐츠 자체는 그다지 재미가 없다.
그런 것들을 볼 바에야 자극적인 아이튜버의 영상을 보고 말지.
“저희 홍보팀이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퀄리티가 뷔라이브의 도움을 얻은 것보다 낮을 건 명확합니다. 아이튜브에 올리더라도 정말 보는 사람들만 볼 겁니다.”
“아마도요.”
“뷔라이브가 아이튜브보다 작은 플랫폼인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아이튜브에 올린 영상보다 홍보력이 적다곤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뷔라이브의 지원을 얻어낸다면, 플랫폼 측에서 광고도 해줄 것이다.
소녀연맹의 팬이 아닌 사람이더라도, 뷔라이브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볼 만도 하다.
“뷔라이브 이용자들은 절대 다수가 아이돌 팬입니다. 아이튜브보다 팬덤 흡수력이 훨씬 높겠죠.”
“그렇습니다.”
양상헌은 확신에 차서 설명을 이어갔다.
동시에 위화감을 느꼈다.
‘왜 한 이사님은 계속 동의해주는 거지?’
딴지를 걸거나 아니꼬운 눈으로 침묵만 지키고 있어도 될 터였다.
어차피 그의 입장에서, 양상헌의 이야기는 신입 사원의 말에 불과하니까.
양상헌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내보내고, 친한 손혜빈과 홍규헌을 구워삶아도 될 일이다.
그런데 왜 굳이…….
“제 말을 요약하자면, 뷔라이브의 지원을 받는 쪽이 훨씬 이득이란 겁니다. 홍보에서도, 조회 수에서도, 금전적 이익에서도, 그리고 제작비가 0은커녕 플러스란 점에서도 압도적인 이득이죠.”
“예.”
“게다가 뷔라이브의 호의를 얻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플랫폼의 지원을 등에 업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시리라 믿습니다.”
“알고 있고, 동의하는 바입니다.”
“…….”
양상헌은 설명을 마쳤다.
그래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한구인이 반론했다면 양상헌도 반박했을 텐데. 그는 조용히 양상헌의 말을 듣기만 했다.
“끝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까.”
양상헌은 불안하게 홍규헌을 곁눈질했다.
‘이대로 날 내보내겠지?’
설명이 끝났으니, 이제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임원진들만의 회의가 시작될 것이다. 그 안에서 양상헌이 손 쓸 도리는 없다.
“그럼,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놀랍게도 한구인은 양상헌에게 직접 답하려 했다.
양상헌은 주의를 집중했다.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을 생각으로.
“먼저, 상헌 씨가 말해주신 모든 이점을 들더라도, 저는 반대하겠습니다.”
그래, 예상했던 거다.
한구인의 눈은 도저히 설득된 인간의 눈이 아니었으니까.
“상헌 씨가 생각하시는…….”
한구인의 기세가 달라졌다.
평소 멍청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멤버들에게 져주고, 그녀들에게 굽신거리며, 직원들에게 놀림당하며 어색하게 웃었던 한구인은 없었다.
“소녀연맹의 고객군은 무엇입니까?”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소녀연맹에 금전적 소비를 감내하며, 또한 미래에 감내할 자들. 누굽니까?”
너무나 대국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유통사의 자료를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앨범 판매를 성별로 따진다면 여성 68%, 남성 32%. 구매 나이대로 따진다면, 아이돌 시장의 소비자 대다수를 차지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일 겁니다.”
“그리고요?”
“……그리고, 또, 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전체가 소녀연맹의 고객입니까?”
“…….”
그딴 거, 답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 없다.
전 세계를 통틀어 한 명도 없다.
“생각해본 적 없으십니까?”
“…….”
“좁혀봅시다.”
한구인이 양손을 모았다.
“상헌 씨가 입이 닳도록 칭송했던 가로 엔터의 프로모션. 그것을 접하는 통로는 무엇이었습니까?”
“SNS…… 대부분 아이튜브입니다.”
“왜 그 프로모션이 통했을까요? 그 프로모션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어째서 고객이 되었을까요?”
왜 소녀연맹의 콘텐츠를 봤지?
심지어 데뷔도 하지 않았던 연습생들의 콘텐츠를?
“재밌으, 니까, 아닙니까?”
“예, 재밌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재밌는 건 아이튜브에 널려있지 않습니까. 아마, 소녀연맹의 콘텐츠에 반응했던 건 아이돌 시장에 익숙했던 사람들이겠죠. 그들이 만약 아이돌 콘텐츠를 소비한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재밌어서, 그리고.
“금전적 소비마저 감내할 가치가 있는지, 질박하게 말하자면 소녀연맹을 팔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 아니었겠습니까? 무료라서. 모든 영상이 무료이기에. 시간을 제외하곤 들여야 하는 자원이 없잖습니까.”
“……예. 그런 거 같습니다.”
“가로 엔터의 아이튜브 채널은 급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상헌 씨가 예전에 했던 말마따나, 뷔라이브에 올리고 유료 콘텐츠로 전환할 만한 팬이 모였다, 그리 판단할 수도 있겠죠.”
팬덤은 유료 콘텐츠마저 소비한다.
그렇기에 팬이고, 팬덤을 이룬다.
“뷔라이브에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에 비해 무료인 아이튜브에 들이는 공은 줄어들 겁니다.”
“그렇습니다.”
“상헌 씨, 소녀연맹을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
한구인은 홍규헌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아이튜브의 그 대단한 조회수들. 전부 플랫폼이 아이튜브이기 때문에, 무료라서 나온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럼 소녀연맹 콘텐츠의 가치는 0이라는 겁니까? 무료여도 괜찮습니까? 소녀연맹이 그만한 값입니까?”
“아니요. 그래서 경쟁력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계속 이럴 수는 없어요! 대체 언제까지……!”
한구인은 답했다.
성필이 했을 만한 말로.
“세계로 퍼질 때까지, 입니다.”
멤버들의 영상이란 무형 콘텐츠이며 공급 비용이 0에 수렴한다.
그렇기에 무료로 공급할 수 있다.
“프로모션의 목적은 어찌 됐든 알리는 것입니다. 미래의 고객에게 말입니다. 상헌 씨에게 미래의 고객은 한국 사람들뿐입니까?”
양상헌은 입을 다물었다.
이건 외통수다.
왜냐하면, 이전에 성필에게 했던 말이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사람들도, 소녀연맹의 성장을 체감하고 팬이 될 수 있도록요.’
양상헌은 당돌하게도 세계를 노리겠다고 선언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의 팬만을 생각한 발언을 해버렸다.
한국 팬들의 소비만을 고려했다.
단기적이고 확실한 이익만을 고려했다.
“가로 엔터가 생각하는 미래 고객은 전 세계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 세계의 대부분은 대한민국보다 1인당 소비력이 낮습니다. 만약 상헌 씨의 말대로 된다면, 그런 분들은 소녀연맹의 콘텐츠에 접근할 방법이 없습니다. 애초에 뷔라이브란 게 글로벌 플랫폼도 아니고요. 가로 엔터의 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어느 정도의 미래까지도.”
초저가 전략이다.
질 높고 방대한 콘텐츠를 무료로 풀어, 전 세계의 아이돌 콘텐츠에 목마른 이들을 만족시킨다.
그들은 미래에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소비자가 되어 소녀연맹을 살찌울 것이다.
“이상이 저의.”
그리고 성필의.
“의견입니다. 이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듣겠습니다.”
“…….”
양상헌은 오랜 침묵을 지키다가, 겨우 말했다.
“저도 아까 드린 말씀이 전부입니다.”
“그렇습니까.”
한구인 홍규헌을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상헌이, 나가도 돼.”
“알겠습니다.”
그가 나갔고, 회의가 진행되었다.
오랜 논쟁으로 남은 시간은 이제 1시간 약간 넘는 정도였다.
그 상태로 1시간 가까운 설왕설래가 오갔고, 결국은.
“뷔라이브의 제안은 거절할게.”
사장이 결단을 내렸다.
홍보팀장 손혜빈이 양상헌에게 소식을 전했다.
“……예, 알겠습니다.”
양상헌은 뷔라이브 측에 연락해서 제안을 거절했다. 손혜빈은 그를 끌고 휴게실로 갔다.
사무실의 사람들은 직감했다. 손혜빈이 양상헌을 달래주리라고.
한구인도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박 이사님의 의견대로 됐습니다. 직접 계셨으면 저보다 더 나은 말씀을 하셨겠지만, 저로선 이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성필이었다면, 한구인보다 훨씬 달콤하고 이상적이며 꿈에 가득 찬 이야기를 했을 텐데.
그러면 양상헌도 단순히 설득되는 게 아니라, 감복했을지도 모르는데.
한구인은 마음이 불편했다.
‘혼신을 다한 기획과 의견이 거절되는 건 속 쓰린 일이지.’
한구인도 이해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를 불쌍히 여길 수만은 없었다. 한구인도 재무팀장으로서 일을 시작했다.
바로, 경리인 권아인을 노려보며 자신의 일이 적다고 한탄하는 것이었다.
권아인은 매일 같이 쏟아지는 한구인의 눈빛에 적응해서, 이제는 그를 신경 쓰지도 않고 업무를 볼 수 있게 됐다.
잠시 후, 이미 수십 번이나 검토한 예산안과 전산망을 재검토하던 한구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박 이사님?”
[한 이사님, 그거 일은 어떻게 됐어요?]
“박 이사님의 의견대로 됐습니다.”
[그런가요. 상헌 씨는 괜찮으세요?]
“모르겠습니다. 지금 손 이사님이 기분을 풀어드리고 있는…….”
사무실 문이 열리고 손혜빈과 양상헌이 들어왔다.
대체 무슨 위로를 듣고 어떤 격려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양상헌의 얼굴에는 충만감이 가득했다.
“어…… 상헌 씨는 괜찮으십니다.”
[그래요…….]
한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프랑스는 새벽 아닙니까? 무슨 일이라도 난 겁니까?”
성필은 피곤한 투로 소식을 전했다.
“설하 어머님이! 그럼 설하 씨는?”
[남기로 했어요. 촬영 계속하기로요.]
성필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뚝뚝 묻어났다.
백설하의 어머니가 사고로 입원했으며 수술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인데 멀쩡하단 건 말도 안 된다.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촬영은 이어져야만 한다.
백설하를 설득하고 달랬던 성필의 고생이 얼마나 컸을지, 한구인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은 뒤 한구인은 소식을 홍규헌에게 전했다.
홍규헌은 즉시 의자에서 일어나 자켓을 걸쳤다.
“병원으로 가자.”
* * *
작곡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
록커 신홍인이 즉석으로 백설하에게 기타 연주를 요청했다.
“원래 연습했던 곡도 돼. 굳이 만들어낼 필욘 없어.”
그에 맞춰 신홍인이 보컬 라인을 붙이기로 했다.
백설하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돌 곡의 멜로디를 연주했다. 신홍인이 당황하며 보컬을 멈추고, 장난스레 말했다.
“설하 감이 너무 없는데?”
출연자들도 신홍인의 장난에 가세했다.
백설하는 어렵사리 미소를 지었다.
“네, 헤헤, 그러게요…….”
정적이 감돌았다.
에리카가 재빨리 바통을 이어받았다.
“선배님, 제가 해볼게요.”
에리카는 앰프에 일렉 기타를 연결하여 다들 호응할 만한 멜로디를 풀어냈다.
“PD님.”
“응…….”
나석문은 굳이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스탭이 무어라 할지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촬영은 뭐라고 할까, 그래.
백설하가 분위기를 망치고 있었다.
어제랑 마찬가지로.
‘박 이사님은 설하가 촬영에 잘 임할 거라고 했는데. 어떻게든 설득할 거라고…….’
그런데 백설하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제작진과 출연진도 백설하의 사정을 알았다. 그래서 최대한 이해해주려 하지만, 분위기가 망가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에리카마저 없었다면, 몇 시간을 촬영하더라도 분량을 1분도 뽑아내지 못했으리라.
“그럼 내일은 본격적으로 세션 다 모아서 만들어보자.”
촬영이 끝났다.
다들 숙소로 돌아가려는 길.
“박 이사님.”
나석문이 성필을 불렀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성필은 줄곧 저자세였다.
허리를 딱따구리처럼 숙이며 입으로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아마 ‘잘하겠습니다’ 정도일 것이다.
그와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 성필은 백설하를 불렀다.
“수희 씨는 먼저 가 있으세요. 설하는 제가 데려갈게요.”
“네, 이사님.”
성필은 백설하를 근처에 보이는 카페로 이끌었다. 며칠간 이 거리에는 자주 와 봐서, 분위기나 간판으로 어떤 가게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됐다.
메뉴판을 가리킴으로써 커피를 주문한 뒤, 성필은 백설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설하는 톡 건드리면 움찔거리는 강아지와 같이, 성필의 시선에 반사적으로 자책을 쏟았다.
“하하, 저 오늘 잘 못 했죠……?”
당연히, 어제도 똑같았다. 백설하도 알았다.
에리카와 선배들의 말에 잘 답하려 해도, 도저히 재치 있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울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하는 것 외에 백설하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성필은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마치 백설하에게 할 말은 전부 하라는 듯했다.
“죄송해요…….”
백설하는 사과를 입에 담았다.
동시에 머릿속에선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엄마.’
아이돌이 된 백설하에게 험한 말만 쏟았던 어머니지만, 그래도 소중한 가족이다.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거기에 문제가 더 있었다.
‘에리카.’
에리카는 정말 빛나는 사람이다.
아이돌의 아이돌, 그 단어가 꼭 알맞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밝게 이끌어가는 재치.
수많은 악기를 다루는 다재다능.
게다가 선배 뮤지션들이 절로 감탄할 만한 보컬 실력까지.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백설하를 몇 달 동안 고심하게 만든 작사와 작곡 능력마저 에리카가 더 뛰어나다.
‘난 그거 때문에…….’
슬럼프가 더 심해지기까지 했는데.
에리카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만들어내는 멜로디나 가볍게 던지는 가사마저도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 가사마저도 아름답다. 일본인인데도 말이다.
‘가까이 있으니까 더 비교돼…….’
이제는 에리카가 그저 사랑스러운 동생이 아니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우상으로 보일 지경이다.
희미한 질투마저, 아니.
명확한 질투가 생겨난다.
어머니에게 벌어진 불의의 사고.
에리카와의 비교됨으로써 깎이는 자존감.
이 두 가지가 백설하를 끝없이 우울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살짝 편하다.
성필의 위로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걸로 오늘 하루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마무리할 만한 힘을 얻을 것이다.
자기 전, 성필의 위로를 떠올리며 불행한 생각들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설하야.”
성필이 오랜 침묵을 끊고 그녀를 불렀다.
“꼭 그래야만 했어?”
“……네?”
“선배분들이 말 걸고 장난치고, 어떻게든 토크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성의 없이 대해야 했어?”
백설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했다.
설마 성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스태프가 몇 명인지는 알아?”
“…….”
“아니, 몇십 명이지. 그 사람들 말이야, 너 이해해주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 일 때문에 온 거야.”
안다.
그런 것쯤 알고 있다.
성필에게 듣지 않아도 이미 안다.
이미 알고 있으니, 백설하가 듣고 싶은 건 비판이 아니라 위로였던 것이다.
“저, 저는…….”
“알아. 부모님이 아프신 거. 사고당하신 거도. 멀쩡할 수가 없겠지.”
“그런데, 아시면서, 왜…….”
“멀쩡하지 않더라도 역할을 다하는 게 프로야. 넌 지금 여기 프로로 와 있는 거야. 무대에 서서도 오늘처럼 이럴 거야? 흐느적거리면서, 노래도 대충하고, 우울하게 말하면서, 무대를 지켜보러 온 팬들에게 이렇게 대할 거야? 그리고 설명할 거야? 아, 어머니가 편찮으셔요. 그럴 거냐고.”
성필의 목소리에는 동정심이란 조금도 없었다.
백설하는 혼란 속에 반박하려 했다.
아니, 성필의 이해를 얻고자 했다. 그리고 위로받고자 했다.
위로라도 안 받으면 정말 화가 나고 우울하고 슬퍼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저는, 저, 저는…….”
“설하야, 프로답게 행동해.”
그 말로, 백설하는 성필을 설득할 모든 마음을 잃어버렸다.
“가수 중에서도 실력 있는 사람들은 널렸어. 너보다 더 잘 부르는 사람도, 유명하진 않더라도 발에 챌 정도로 많을 거야. 다만, 그 사람들이 유명하지 않은 이유는 믿음을 얻지 못해서야.”
이 사람을 무대에 세우면 기대한 만큼 보여주겠구나.
이 사람을 방송에 내보내면 기대에 보답해주겠구나.
즉, 가수가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건 신뢰를 형성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 방송도 무대랑 똑같아. 신뢰를 만드는 과정이야. 너를 또 방송에 불러도 되겠다. 너를 미디어에 내보내도 되겠다. 그런 신뢰를 쌓는 중인 거라고. 거기에 변명은 없어. 한 번 실패하면 아무리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있더라도, 다신 불러주지 않아.”
무대랑 마찬가지다.
아무리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더라도, 한 번 무대를 망친 가수는 다시 불러주지 않는다.
“심지어 네가 네 사정으로 이해받길 바라? 힘들 수 있겠지. 그런데 이미 동생이랑도 통화했잖아.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어머니도 깨어나셨다며. 요양하면 추후에도 문제가 없으실…….”
“이, 이사님이 뭘 아시는데요.”
백설하가 잔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가로 엔터에 들어온 뒤로는 최초로, 성필에게 분노를 쏟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사님이 뭘 아냐고요! 이사님이 제 마음을 아세요? 뭘 다 안다는 듯이 말하세요? 이사님은 부모님이 그렇게 심하게 다친 적도 없잖아요! 그런데 뭘 알아서 잘난 듯이 말하세요?!”
“……뭐?”
성필도, 백설하와 마찬가지로 손을 떨었다.
“아냐고? 부모님이 다친 기분을…… 나한테, 부모님이, 그걸 묻는……?”
“그래요!”
성필은 표정을 굳혔다.
얼굴이 붉었다. 마치 100도까지 끓는 물을 담은 주전자처럼 파들거린다.
하지만 그의 흥분이 말로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성필은 분노를 갈무리하는 듯 숨을 깊이 들이마실 뿐이었다.
잠깐이지만,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짧은 침묵 후에.
“그래. 나는…….”
성필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몰라.”
“그,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세요!”
아이 같은 말투였다.
아이처럼, 오로지 부모에게 동정받고 싶어 내쏟는 분노였다.
“대체 왜 저한테……!”
“도저히 눈 뜨고 봐주기 힘들어서.”
“……!”
“너 이전에 올라왔던 수많은 캐스팅 후보들. 그 사람들에 대한 실례일 정도로. 아이돌이라고 불리기도 부끄러웠어. 설하야, 잘하자.”
“……이사님은.”
내가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
요즘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슬럼프를 겪으며.
얼마나 고민하고.
에리카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또, 얼마나 엄마를 걱정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잘하라’고만 말하고…….
“이사님은…… 그냥.”
분노를 이어가려던 백설하는 자신의 감정에 못 이겨, 기어코 밑바닥까지 숨겨두었던 진심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위로해주실 수도 있잖아요오…….”
하지만 그에 대한 성필의 답은.
“위로해주면, 내일은 이렇게 안 해? 위로는 어제도 했어. 그런데도 넌 오늘 똑같았고. 넌 지금 너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잖아. 비운의 여주인공마냥. 제작진이랑 출연자 모두에게 실례야. 그래, 실례라고.”
백설하는 충격받았다.
자신이 이토록 애절하게 말하는데, 심지어 지금 눈물까지 흘리는 듯한데, 그런데도 성필은 화를 내고 있다.
목소리는 높지 않으나, 그 안에 섞인 거친 호흡을 들으면 알 수 있었다.
“내일도 이러면 PD님이랑 제작진들, 출연자분들을 볼 면목이 없어. 네가 아니라 내가. 가로 엔터가. 소녀연맹 전체가!”
성필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화나 있다.
“…….”
백설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 합, 니다…….”
성필은 커피도 다 비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하지 말고 부끄러워해. 그게 제 역할을 못 한 사람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야. 내일은 안 이럴 거라고 믿는다.”
성필은 백설하가 일어나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백설하는 오랫동안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있는, 자신의 마음과 비슷하게 검은 커피를.
* * *
성필은 매니저 김수희와 밥을 먹었다.
상사와 먹기 때문인지 김수희는 줄곧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었지만, 성필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조금씩 먹혀들어 갔다.
‘직원이 적었을 땐 이사란 직함도 정말 별거 아니었는데.’
막 가로 엔터로 들어온 사람은 전혀 다르게 느끼는구나.
성필은 석세스 엔터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많았다.
식사를 마치고, 성필은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바로 숙소로 오시지 말고 설하 좀 봐주세요. 잠깐이라도요. 일 더 시켜서 죄송해요.”
“아니요! 원래 제 일이잖아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마음 같아서는 김수희를 숙소로 보내고, 성필 자신이 백설하를 보러 가고 싶었다.
‘그런데 혼내고 바로 달래주는 것도 안 좋아.’
백설하가 성필의 분노를 받아들이고 소화해낼 적절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 내가 나쁜 역할을 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김수희는 백설하와 같은 여자이니, 좀 더 편히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성필은 숙소로 돌아와 씻은 뒤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자려 했다.
‘설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됐는데…….’
성필 나름의 충격요법이었지만, 너무 심했다.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백설하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시키고 촬영에 진지하게 임하게 할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성필은 화를 내버렸다.
백설하의 그 말이 방아쇠였다.
‘뭘 다 안다는 듯이 말하세요? 이사님은 부모님이 그렇게 심하게 다친 적도 없잖아요! 그런데 뭘 알아서 잘난 듯이 말하세요?!’
다시 떠올려도, 백설하를 용서하기로 했어도, 성필은 머릿속이 열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을 꽉 감고 억지로 화를 잠재웠다.
그러자 다시 죄책감이 몰려왔다.
‘설하…… 많이 힘들 텐데.’
방송만 아니었다면, 최소한 지방 행사 무대였다면.
물론 지방 행사 무대도 중요하고 큰일이긴 하지만, 성필은 백설하를 곧장 어머니에게 보냈을 것이다.
‘미안, 설하야, 미안…….’
끝없이 마음속으로 사과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지났다.
전화가 울렸다.
성필이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수희 씨?”
[이사님! 설하가 쓰러졌어요!]
안 그래도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리가 혼탁하게 흐려졌다.
[출연자들이랑 가볍게 합주로 맞춰보려고 모였는데 거기서 갑자기…….]
“바로 갈게요!”
* * *
머리가 어지럽다.
기타를 잡은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오늘 촬영까지만 해도 전혀 아프지 않았는데. 갑자기 몸이 왜 이럴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손은 기타를 연주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어?’
내가 쓰러졌구나.
백설하는 그것을 깨달았다.
잘 기억은 안 나도, 그녀의 객실로 옮겨지고, 호텔의 닥터에게 진찰을 받고, 약을 먹고,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니 아득하게 올라갔던 열기가 조금은 수그러들고, 조금이나마 정상적으로 생각할 정신머리가 됐다.
‘아파.’
머리가 끊어질 듯하다.
열이 너무 높아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마라톤을 완주한 듯 몸이 뜨겁고 힘이 없다.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
백설하는 슬퍼서가 아니라 몸의 열 때문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어떻게든 몸을 식히기 위해 수분이 피부로 배출되는 것이다.
흐려져 가는 정신 안에서, 백설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사님, 죄송해요.’
다시 사과하고 싶다.
억울함에 가득 차서 억지로 뱉은 사과 따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빌고 싶다.
성필의 말대로, 프로로서 그러면 안 됐는데.
‘하지만 이사님은 여기 안 오시겠지.’
그렇겠지.
자신이 잘못했으니까.
몽롱한 후회 속에서 신음하던 백설하의 귀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설하 대신 아팠으면…….
엄마인가?
엄마가 여기 있을 리는 없는데.
아, 꿈이구나.
그렇구나.
백설하는 잠에 빠졌다.
* * *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가 시원하다. 방금 올린 듯 촉촉한 물수건이 올려져 있다.
머리맡의 창가에서는 햇볕이 들어온다.
시계를 보니, 잠들 때로부터 9시간이나 지나 있다.
‘오래 잤구나.’
백설하는 완전히 눈을 떴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 이사님?”
성필이 침대 바로 옆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
저 자세로. 저토록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다.
“……어.”
성필은 백설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을 화들짝 떨었다.
얕은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어, 설하야? 괜찮아?!”
그는 방금 깼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은 어때? 조금 나아졌어?”
“…….”
“목은? 열 많이 났잖아. 목은 괜찮아?”
“……이사님.”
“어, 그래. 뭐 필요한 거 있어?”
“언제부터…….”
“어?”
“언제부터, 계신 거예요?”
“언제라니…….”
성필은 기억이 안 나는 듯했다.
“계속 있으신 거예요?”
계속 이마에 올릴 수건을 갈아주면서, 지켜본 건가?
불편한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자면서?
“어…… 그렇지.”
“저한테 화나신 거, 아니셨어요?”
“내가?”
성필이 피식 웃었다.
“내가 너한테 화가 왜 나. 나더라도 순간적인 거지. 왜 계속 마음에 품고 있겠어.”
* * *
이른 아침, 김수희는 숙소 아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성필은 어젯밤에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 수희.”
“채식이 하이.”
에리카의 매니저 중 한 명인 문채식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요 며칠간 같이 다니다 보니까 말을 트게 됐다.
“뭔데. 너 밥 먹으면서 책 읽냐?”
“나 지적인 여자야.”
“뭐 읽는데?”
김수희가 표지를 보여주었다.
“연예 비즈니스 경영론?”
“우리 매니지먼트 팀장님이 시간 나면 읽으랬거든. 여기 박 이사님이 쓴 파트도 있어.”
문채식이 그녀에게서 책을 받아 대충 살폈다.
“여기 이 파트야? 뮤지션 매니지먼트 실무. 아티스트와 매니저의 관계.”
“어, 거기 맞아. 그 책이 우리 회사에선 의미가 깊은 책이래. 한 이사님이란 분이 그 책에 적힌 박 이사님 이름 보고 영입한 거라서.”
문채식은 성필이 썼다는 파트를 가볍게 넘겨보았다. 중간에 형광펜으로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이거 네가 칠한 거야?”
“아니. 아마 우리 매니저 팀장님일걸. 그분 거 받아왔거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다. 매니저는 담당 연예인을 사랑과 믿음으로 대해야 한다. 담당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매니저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진심으로 이어진 관계는 오래도록 이어지며, 서로를 존중하게 만든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순수함을 항상 간직해야 한다. 매니저의 기쁨은 곧 담당의 성장과 기쁨이다.]
문채식은 ‘오글거려 죽겠네’란 말을 참아야 했다.
‘이런 걸 매니저 교재로 쓰고 판다니. 어이가 없네.’
소제목은 ‘매니저의 마음가짐’인데, 무슨 ‘교사의 마음가짐’이나 ‘성직자의 마음가짐’이 될 법한 것을 적어두었다.
문채식은 뚱한 표정으로 책을 돌려주었다.
‘박 이사님이라고 했지.’
잔뜩 헛바람만 들어서 멋진 문장이나 써뒀다.
‘본인도 이렇게 안 할 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