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73화 (173/760)

173화

에리카와 헤어진 뒤, 성필과 백설하는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

성필이 핸들을 잡은 지 10초.

“이사님…….”

백설하가 목을 메운 송곳을 뱉어내듯 힘겹게 말했다.

“제가 아까 한 말은…….”

“하지 마.”

성필이 단호하게 백설하의 말을 끊었다.

“지금 너랑 대화하면 제대로 말 못 할 것 같아. 나중에 얘기하자.”

“…….”

만약 성필의 목소리를 채운 게 분노뿐이었다면, 백설하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애처롭게 번지는 슬픔이 있었기에, 백설하는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이사님이 슬프셨던 적이 있어?’

옛날에, 가로 엔터 직원들이 성필을 달래준다는 이유로 회식을 갔을 때.

소녀연맹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성필이 왜 그러지는 지 알아내려 했을 때.

백설하가 물었었다.

성필이 슬펐던 적이 있냐고.

‘4년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지셨을 때요. 그리고 3년 전에 소중하기 기르셨던 애완식물이 있었는데요, 그게 죽었어요. 그때 저러셨어요.’

신아름은 그리 답했었다.

성필이 슬퍼할 일이란,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지고 소중하게 여겼던 애완식물이 죽었을 때.

그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의 성필이 그러했다.

‘내가…….’

백설하 자신이, 은인인 성필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 이유란 아이돌로서의 실패나 중요한 무대에서 실수한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백설하 스스로의 의지로 말한 험담 때문이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성필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듯 한마디 한마디를 씹어가며 소리 냈다.

백설하는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만 애처롭게 꼬물거렸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회사로 도착했다.

비틀거리며 입구로 걸어가는 성필을 보고, 백설하는 더는 참지 못해 그를 불렀다.

“이사님……!”

성필은 반응도 없이 거칠게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미팅은 어땠나요!”

연습실로 들어오자마자 리카가 물어왔다.

“쌤?”

“으, 응?”

“미팅…… 안 좋았나요?”

리카가 우울해진 백설하의 감정을 읽어냈다. 백설하는 급조된 미소를 띠었다.

“아니, 좋았어. 재밌, 었어. 그, 유명한 가수분들도 봤어. 꼭 보고 싶었는…….”

“설하야.”

연습실 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손혜빈이 손짓했다. 백설하는 밖으로 나가 그녀와 마주 섰다.

“성필이 왜 저래? 미팅에서 안 좋은 말이라도 들었어? 방송 잘렸다거나?”

“아, 아니요.”

“그러면?”

대체 얼마나 성필이 우울해 보이면, 손혜빈이 곧장 연습실로 달려와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까.

말해야 한다.

지금 손혜빈에게라도 말해서 오해를 풀어야…….

‘…….’

백설하의 사고가 정지했다.

이걸 말하게 되면, 백설하 자신은 어떤 인간으로 보일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소중한 사람에 대한 험담마저도 불사하는.

그런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까?

성필도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아니 오해를 풀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중에 진정되면 말해줘.”

손혜빈은 격려하듯 백설하의 팔을 주물러주곤 자리를 떴다.

백설하는 연습실로 들어갈 엄두도 못 냈다.

지금 다른 아이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1층의 소파로 향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백설하의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주지화.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분석하여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는 방어기제.

‘내가 잘못한 거야. 말해야 해. 내가 어떻게 생각되더라도, 말해야만 해. 내가 잘못한 거니까. 얼마나 잘못했냐면…….’

역으로, 성필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보자. ‘백설하가 기분 나쁘다’고 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현기증에 쓰러질지도 몰랐다.

적어도 백설하 자신은 성필처럼 감정을 억누르지는 못하리라.

“사과…… 언제…… 드려야…….”

그래, 사과를 하자.

그전까지는 자신의 역할을 하자.

연습하는 것이다.

백설하는 연습실로 가려다가, 목이 타는 듯하여 휴게실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아주 꽉 잡았다.

“읏…….”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더라도 성필에 대한 험담을 하다니.

자기 자신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올라서 견딜 수가 없다.

백설하는 문을 벌컥 열었다.

“악!”

순간적으로 손을 타고 오르는 저항감.

무언가에 부딪혔다.

놀라서 안을 보자.

“아, 아아…….”

이마를 부여잡은 성필이 보였다.

“이, 이, 이사님, 괘, 괜찮, 으…….”

“어, 괜찮아.”

성필은 벌떡 일어나 미소를 보였다.

마치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때도 성필은 문에 머리를 박고는, 백설하가 걱정할까 봐 로켓처럼 벌떡 일어났었다.

……잠깐만.

미소를 보여?

성필이 미소 짓고 있다고?

“너는 괜찮아?”

성필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 순간 백설하는 비합리적인 환희를 느꼈다.

성필이 웃고 있다는 게 기쁘다.

지금처럼 그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그의 이마를 문으로 수백 번이고 찍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기쁘다.

“네, 네…….”

“물 마시려고? 그럼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어? 응접실 가자. 내가 차 타 줄게.”

백설하는 온갖 부정적 감정이 합쳐진 채, 불안함을 안고 성필을 졸졸 따라갔다.

응접실에 들어와 마주 앉은 순간.

“미안.”

성필이 사과했다.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 그렇지. 기분이 나쁠 수 있지. 이해해. 연습하는 거 보거나…… 뭐…… 그럴 수 있어.”

아, 아닌데.

“나도 내가 정상적인 인간이라곤 생각 안 해. 이 나이 먹고도 아이돌한테 빠져서 월급을 앨범 사는 데…… 아. 물론 아이돌이란 게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훌륭한 문화라고 생각해! 그래도 직접 보는 너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지.”

아닌데, 그게…….

“너희 보면서, 너희가 보기에 기분 나쁘게 웃기나 하고. 응, 이해해. 앞으로는 조심할게.”

“이사님!”

백설하는 더 이상 성필의 말을 듣고 있기 어려웠다.

그녀는 고해실에 들어간 신자처럼, 앞에 앉은 성필을 향해 고백을 시작했다.

자신의 죄와 악행에 대해서.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서 제대로 전달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했다.

말을 마쳤을 때, 목은 갈라져서 아프고 코에도 콧물이 차서 숨이 막혔다. 백설하는 울음을 그쳤음에도 흐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목에서 낡은 쇠문이 바람을 맞고 내는 듯한 끼익거림이 계속 삐져나왔다.

“……KS 엔터가 나를 데려갈까 봐?”

“느, 느에, 네에…….”

“에리카가 나를, 그러니까, 네 말을 빌리자면, 꼬시려고 하고?”

“끅, 네…….”

“내가 가로 엔터를 가버릴까 봐?”

“믿어주세요오…….”

“……믿어.”

성필은 말없이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녀가 눈물을 닦은 것을 확인한 성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너 얼굴, 다른 사람한테 보이면 안 될 정도로, 어어…… 그렇거든. 거울 보면서 좀, 고치고 나와.”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설하는 30분 동안 훌쩍이며 얼굴을 원상태로 복원시켰다.

울었던 흔적을 전부 지운 뒤 응접실을 나섰다.

그러자 연습실로 향하는 손혜빈이 보였다. 그녀는 백설하를 보자마자 달려와서 손을 맞잡았다.

“설하야!”

“네, 네?”

“너 뭔 짓을 했길래 성필이 걔가 바로 변했어?!”

들어보니, 성필은 구름을 밟는 듯 폴짝폴짝 뛰어다니기까지 했단 모양이다.

사무실에 앉아서도 계속 콧노래를 부르는 통에 직원들의 눈총을 받았고, 결국 한구인에게 무어라 들었다.

성필은 사과하면서도.

“으하하핫! 죄송합니다!”

라며, 1달 뒤에 결혼이 예정된 새신랑처럼 솜사탕향 가득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너 상담사 공부라도 한 거야? 걔한테 무슨 말 했어?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야! 나도 좀 알려주라!”

“…….”

백설하는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도 지금 솜사탕에 발을 디디고 있었으니까.

* * *

케이어스 최초의 텔레비전 예능 출연.

이 엄청난 일을 앞두고, 케이어스를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1팀은 흥분에 빠져 있었다.

매니지먼트 계열 이사가 아닌 정호환도 절찬리에 흥분 중이었다.

“아, 할 수만 있다면 에리카 따라가고 싶네. 1팀장, 내가 매니저 뛸 수는 없나?”

“안 됩니다.”

웬만하면 정호환에게 저자세인 1팀장도, 그의 실없는 소리에는 곧장 NO를 외쳤다.

어차피 농담이기도 할 테니까.

“하하.”

정호환이 씁쓸하게 웃었다.

에리카를 따라가고 싶단 건 농담이 아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걸작의 첫 예능 데뷔다.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건만, 매니지먼트는 그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한 수 접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호환이 진짜 따라가기로 한다면.

‘호환이 너 돌았냐?’

라며, 매니지먼트 계열 이사인 남홍범이 면전에서 쌍욕을 날릴지도 모른다.

왜 괜히 제작진들 기죽이려고 하냐고 말이다.

“에리카, 잘하고 와라.”

“아직 가려면 한참 남았지 않아요?”

“그래도 말하는 거야. 내일도, 모레도, 사흘, 나흘 뒤에도 또 말할 거야. 잘하고 와라!”

정호환의 애정 가득한 배웅을 받으며 에리카와 케이어스는 퇴근했다.

숙소로 돌아온 그녀들은 샤워 순서를 정했다. 회사에도 샤워 시설이 있으나, 다들 숙소를 더 선호했다.

“내가 먼저 하고 싶…….”

“소유 넌 제일 마지막이야.”

“왜?”

김민주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샤워실만 들어가면 거울 쳐다보면서 1시간도 넘게 있으니까 그렇지. 아니, 너 진짜 샤워실 들어가서 뭐 해? 진짜 거울만 보고 있는 거야?”

“언니한테 너무한 말투잖아. 나 가슴이 아파지려고 해. 나야 씻지. 샤워하면서 뭘 또 해. 궁금하면 같이 씻을래?”

절대 싫다.

가위바위보 결과.

“예이.”

진소유가 1등이 됐다.

김민주는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거칠게 문을 닫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진저는 자연스럽게 컴퓨터 앞에 앉았다. 조아라의 SNS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에리카는 진저의 뒤에 섰다.

“진저.”

“네?”

“박 이사님, 미국에서 자주 봤댔지?”

“그렇슴미다.”

“너랑 아라 님 연습하는 것도 박 이사님이 자주 보셨어?”

“음…….”

그랬던 것 같다.

특히 1, 2주 차 때는 문 쪽을 바라보면 항상 있기도 했다.

‘정말 할 일 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이야 그의 행동이 조아라에 대한 애정에서 나왔단 것을 알지만.

“그렇슴미다. 자주 보셨슴미다.”

“눈빛은 어떠셨어?”

“눈빛 말임미까?”

“뭔가, 보는 눈빛에 어떤 감정이 있다던가?”

“어…… 모르겠슴미다.”

“표정이 음흉하다던가?”

“절대 아님미다! 박 이사님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검미까!”

“장난 좀 친 거야. 진저 너, 다른 회사 사람인데 너무 감싸는 거 아니야? 나한테 화도 내구.”

“가, 감싼 게 아님미다. 그냥…….”

진저는 입 안에 든 말을 오물오물 씹는 듯하더니,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에리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설하 언니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본인이 속한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다.

얼마나 싫어하든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힘들 텐데.

‘어지간히 싫어하지 않고서야.’

에리카는 한숨을 쉬었다.

‘리카. 왜 그런 분이랑 사귀는 거야.’

계속 연습생으로 살아서 남자를 보는 눈이 없는 걸까?

‘아니, 아마 내가 모르는 어떤 매력이 있겠지. 그저 성격 나쁘고 음흉할 뿐이라면, 리카가 띠동갑인 박 이사님이랑 사귈 리가 없잖아.’

에리카는 리카와 성필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훌쩍 지나 보냈다.

사랑에 대한 상상은 언제 하든 즐겁다.

상상이 끝나고, 다시금 생각의 머리는 백설하에게로 돌아왔다.

‘설하 언니는, 박 이사님이 싫다 해도 험담을 그렇게 자연스레…….’

으음.

‘그래, 아직 정신이 성장하는 중인 거야.’

백설하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에리카는 상대가 누구더라도 나쁘게 생각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의 사정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게 버릇처럼 배어 있는 사람이다.

본인은 그러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과하게 착한 척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성격 덕에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도 질투와 아니꼬움이 섞인 시선도 자주 받았었다.

‘언니가 험담하는 건 성격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성격을 이루는 부분일 뿐인 거야. 언니한테는 빛나는 부분이 더 많아. 분명.’

에리카는 일렉 기타를 들었다.

앰프가 연결되지 않아 줄을 튕길 때마다 나는 소리라곤 허한 금속음뿐이지만, 에리카는 그것마저도 멋지게 연주했다.

‘작곡.’

음악을 위한 동행에 출연하면 에리카가 직접 곡을 만들 것이다.

자신이 직접 만든 곡과 직접 쓴 가사가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겠지.

드물게도, 에리카는 진심이 담긴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 * *

“음.”

매니지먼트 팀장이 된 민경섭은 성필의 제안을 받자마자 난색을 표했다.

“설하 촬영에 형이 따라가신다는 게…… 저는 잘 모르겠네요.”

백설하와 동행하는 인원은 성필, 백설하, 로드매니저 김수희.

이 셋으로 하자고 성필이 의견을 냈다.

“해외로 간단 거 자체가 큰일이긴 하죠. 로드만 보낼 수 없으니 관리자급이 가야 하는 것도 맞고요. 그런데 제가 같이 가는 게 맞지 않아요? 형은 프로듀서 일도 있으니까요.”

“어차피 네가 설하랑 가면, 매니지먼트 팀장 업무를 내가 대리로 받아야 하잖아.”

멤버들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픽업하며, 행사와 섭외를 조절한다.

그 업무와 프로듀서 업무를 병행하려면, 어차피 성필에게 희생이 강요될 수밖에 없다.

매니지먼트 관리자급이 민경섭과 성필밖에 없으니까.

“설하 첫 번째 예능 촬영이기도 하니까.”

“걍 형이 가고 싶은 거죠?”

“들켰어?”

“네. 말 꺼내자마자 들켰어요.”

“이런…….”

성필이 머쓱한 듯 머리칼을 긁었다.

“형 말도 일리가 있네요. 제가 제작진 측에서 곤란한 요구가 들어왔을 때 바로 결정 내릴 급은 아니니까요.”

“야, 매니지먼트 팀장급이면 충분히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

“팀원이 저 합쳐서 3명인데 급이 안 맞죠. 제가 뭔가를 책임질 만한 급이 아니잖아요.”

“에이, 너 너무 너 자신을 깎아내는 거 아냐?”

“형.”

“응?”

“형 체면 살게 도와주는 거잖아요. 그냥 고개만 끄덕여요.”

“아.”

프로듀서가 자리를 비우고 담당 멤버의 촬영에 동행하는 게 없는 일은 아니다.

리얼 버라이어티나 예능 촬영이란 게, 기획사의 의도와 다른 장면을 연출하는 게 빈번하니까.

급이 낮은 매니저나, 경험이 적은 아이돌은 제작진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제작진의 지나친 요구를 커트할 만한 인원이 동행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팀장님 생각은 어때?”

“형이 매니지먼트 관리 감독이니까, 형이 정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임원 회의 때 사장님한테 보고해야 하잖아. 네 동의가 있으면 일이 편하지.”

“제가 A&R팀이나 홍보 쪽은 잘 몰라서 딱 매니지먼트 입장에서만 말하면요.”

“응.”

“저는 괜찮을 거 같아요.”

“오케이.”

매니지먼트 쪽의 허락은 얻어냈다.

다음은 A&R이다. 성필은 손혜빈을 찾아갔다.

“진짜 깬다 너……. 프로듀서가 설하 보려고 일 다 내팽개치고 방송을 따라가? 월급 도둑이다 진짜.”

“아니, 일본 쪽 앨범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리고 누나도 나랑 똑같은 파트 맡고 있잖아. 이러려고 관리 프로듀서가 둘인 거 아니야?”

“걍 너 놀리려고 말해봤어.”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너도 알잖아, 괜찮은 거.”

성필과 손혜빈이 접하는 자료는 차이가 없다.

가로 엔터의 향후 계획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으니, 성필이 최대 일주일 정도 부재해도 문제가 없단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가서 애 좀 잘 보살펴줘.”

“응.”

“수희도 레벨업 좀 시켜주고.”

“아, 박수희 매니저? 알겠어. 내 옆에 딱 붙여놓고 매니저 레벨 팍팍 올려줄게.”

“박수희가 아니라 김수희거든?”

성필은 당황해서 수첩을 꺼냈다.

“아, 그러네.”

“진짜 아름이가 생일선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줬다. 너 그 수첩 없었으면 실수 죽도록 하고 다녔을걸?”

과거 신아름이 성필에게 수첩을 선물로 준 이유도, 그가 이름을 자주 까먹었기 때문이다.

“그러게나 말야.”

“수희 앞에선 이름 틀리지 말고.”

안건은 임원 회의까지 올라왔다.

홍규헌은 회의가 처음 시작될 때는 막 벼려낸 칼처럼 날카롭지만, 끝날 때가 되면 풀어지는 경향이 있다.

성필은 회의가 막바지에 끝났을 때쯤 자신이 준비했던 안건을 내놓았다.

“박 이사가 직접 간다고?”

홍규헌은 당황하면서도, 바로 반론을 꺼내놓지 않고 한구인과 손혜빈을 보았다.

“경섭이도 동의했어요.”

손혜빈의 지원사격.

“일주일 정도라면 괜찮을 듯합니다.”

한구인의 동의.

이사가 둘이나 긍정했다.

성필은 초조하게 홍규헌의 답을 기다렸다.

‘꼭 따라가고 싶어.’

백설하가 본가로 갔던 날 이후, 그녀는 긍정적인 체를 하고 있지만 속내는 어떨지 몰랐다.

차라리 적당히 쳐져 있다면 모르겠으나, 옛날보다 과하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성필의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촬영에 가서 설하가 쓴 가면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외국.

그곳에서 부모님께 거부당한 좌절이 몰려온다.

그렇다면 백설하는 스스로의 감정을 수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성필이 곁에 있어 주고 싶다. 성필 본인이 백설하를 다독일 수 있다고 하는 건 오만할지도 모르지만, 성필은 확신했다.

‘설하가 내 험담한 이유를 말해줬을 때.’

백설하는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부끄러운 생각들을 전부 꺼냈었다.

그 안에는 백설하가 얼마나 성필을 의지하고 믿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성필은 오만하게도, 백설하의 멘탈이 무너지더라도 최소한 촬영이 가능한 수준까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음…….”

홍규헌은 일주일간 가로 엔터의 스케줄표를 꼼꼼히 보더니.

“그래, 알겠어.”

사장의 허가가 떨어졌다.

“프로듀서한테 매니지먼트를 맡기려니 미안하기도 하네.”

미안하다. 그 말을 듣고, 성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홍규헌도 백설하의 이상을 눈치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백설하 잘 부탁할게.”

홍규헌은 항상 사장실에 박혀 멤버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면서도, 실은 전부 꿰뚫어 보고 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성필은 홍규헌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촬영을 무사히 마치게 하겠습니다.”

* * *

‘최대 일주일, 박 이사님이 안 계신 건가.’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건만, 한구인은 적적함을 느끼며 회사로 들어섰다.

“빨리 결정해야 한대요!”

출근하자마자 손혜빈이 급박한 투로 말했다.

“일단 진정하시고…….”

“진짜 급하다니까요!”

진짜 급한가 보다.

손혜빈의 요청에 따라 성필이 없는 임원 회의가 소집되었다.

소식을 들은 홍규헌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뷔라이브’에서 제작 지원을 해준다고?”

홍보팀의 양상헌이 냈던 의견인 소녀연맹 다큐멘터리.

가칭(假稱) ‘소녀연맹 비긴즈’의 제작을 위해, 양상헌은 요 몇 주 동안 영상 제작팀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도중 전 직장인 ‘야자수’에서의 인연으로 ‘뷔라이브’의 인물을 만났다고 한다.

“내가 아는 그 뷔라이브 맞아? 연예인들 인터넷 방송 플랫폼 그거?”

“맞아요!”

전 세계적으로 아이튜브는 유일무이한 거대 영상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을 한국의 터줏대감인 네이버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네이버는 아이튜브의 등장으로 몰락했던 영상 플랫폼의 역사를 잊어버린 듯, 글로벌 영상 플랫폼을 목표로 ‘뷔라이브’를 출범시켰다.

“젊은 아이돌 팬덤을 노리고 시작한 서비스긴 한데, 요즘 네이버가 미친 듯이 투자를 하잖아요! 수천억이 우스워요!”

“……손 이사 네이버 홍보대사야? 왤캐 흥분했어.”

어쨌거나, 그 뷔라이브 측에서 ‘소녀연맹 비긴즈’의 제작 지원을 맡아준다고 한다.

자금은 물론이요 촬영 스태프까지 합쳐서.

단, 조건이 있다.

“뷔라이브 독점 공개와 서비스예요.”

“독점 공개면 다른 데는 못 올린단 뜻이지?”

“네. 상헌 씨가 말하길, 저희도 슬슬 뷔라이브 쪽에서 독점 서비스 수익 만들면 좋겠다고 해요.”

월에 얼마를 결제하면 추가 영상을 볼 수 있다거나, 아예 뷔라이브에서만 결제 가능한 콘텐츠 등을 일컫는다.

“수익…….”

홍규헌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가로 엔터의 매출을 상승시킬 안건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빨리 결정해야 해?”

“우리한테 올 제작 지원이 다른 그룹으로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죠! 저희가 2시간 내로 확답 안 주면 딴 데로 넘긴대요!”

“진짜 빨리 결정해야 하네……. 여하튼 공룡 놈들 하는 일 처리 보면 자만심이 대단해. 작은 회사들이 무슨 돈 넣으면 원하는 거 나오는 자판기인 줄 알아.”

“방금 네이버 욕하신 거예요?”

“아, 아니…….”

홍규헌은 턱을 괸 채 고민하다가.

“양상헌 불러와. 그리고 한 이사.”

“예.”

“박 이사가 지금 백설하랑 프랑스에 있지? 지금 프랑스는 몇 시지?”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입니다.”

“미안하지만, 깨워서 의견 물어봐.”

“알겠습니다.”

한구인은 회의실을 나가서 성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다섯 번쯤 울렸을까, 왜인지 성필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박 이사님, 지금 상황이…….”

설명을 마치자 성필이 즉답했다.

[안 돼요.]

“그렇습니까.”

뷔라이브에서 촬영 제작비에 스태프까지 지원해준다는데,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성필이니까 그만한 혜안이 있…….

[제가 지금 바빠서 자세한 이유는 못 말씀드리겠어요. 제 의견만 전해주세요.]

“예?”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때 더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끊을게요.]

“자, 잠시만! 지금 2시간 내에 결정을 내려야……!”

끊겼다.

한구인은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안 된다고, 하셨지.’

이유가 뭘까?

가로 엔터에 이득일 뿐인 제안 아닌가?

한구인은 고민을 씹으며 회의실로 들어왔다.

홍보팀의 양상헌이 들어와 있었다.

“한 이사, 앉아. 상헌이 설명 들어보자.”

“예.”

가로 엔터에 들어온 지 1년, 아니. 3개월도 안 됐으면서 임원 회의 자리에 불려오다니.

중소기업이라 해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이다.

“시작하겠습니다.”

양상헌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청산유수로 설명을 시작했다.

한구인마저도 빠져들 정도였다. 손혜빈과 홍규헌도 양상헌의 설명에는 멍하니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입니다.”

홍규헌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이사, 박 이사는 뭐래?”

“아…….”

한구인은 망설이다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

들떴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급격히 내려갔다.

다들 어째선지 모르겠단 듯 한구인을 보았으나, 한구인이라고 알 도리가 없었다.

“왜, 반대하시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양상헌이 예의 바르지만, 투지를 잔뜩 담아서 물었다. 반드시 이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마치 기업 드라마에 나오는 능력 있는 신입 주인공처럼.

“그게…….”

성필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한구인은 성필을 믿었다. 그가 반대한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짐작 가는 부분도 있어.’

한구인은 세뇌당할 정도로 성필에게 아이돌 산업의 비전에 대해 들어왔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성필의 의견을 예측해내는 것쯤은 쉽게 할 수 있었다.

‘박 이사님의 생각을 완전히 알 순 없지만.’

그에 가깝게 예상할 수는 있다.

한구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양상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그에 지지 않을 정도로 투지를 담은 목소리로 답했다.

“소녀연맹의 프로모션 전략에 어긋납니다.”

이 순간, 한구인은 성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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