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미팅은 나석문 PD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방향이나 숙지사항을 알려주고, 출연자들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 이어졌다.
“여행이 컨셉이니 숙박이나 촬영에 여러 문제가 생길 수가 있거든요. 그, 특히 제가 신경 쓰는 게요, 여러분들의 개인 스탭에 관해서예요.”
메이크업, 스타일링, 매니저 등을 위한 비용은 지급되지 않는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나석문이 신경 쓰는 건 특히 여성 출연자 쪽이었다.
“그래서…… 만약 스태프를 대동할 의사가 없으시면 메이크업 같은 건 본인이 직접 하셔야 하거든요. 그리고 야외 촬영도 많을 테니, 중간에 화장을…… 뭐라고 하죠 그걸?”
막내 스탭이 귓속말로 전해주었다.
“아, 수정. 메이크업을 수정할 시간을 따로 드리는 것도 힘들어요. 날씨가 날씨다 보니 아마도 땀도 많이 나고, 메이크업도 흐를 거 같은데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석문은 두려웠다.
예전에 ‘여가 시간’을 연출할 때 중년의 여성 출연자를 캐스팅했던 적이 있다.
나석문이 진행했던 콘텐츠는 캠핑이었는데, 그 출연자들이 햇볕이 너무 따갑다며 그늘에서 나오지를 않았었다.
조명도 최대한 오지 않게 해달라고 했었다.
연예계에서의 경력도 높았던 사람이라, 나석문을 비롯한 스태프진이 강력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겨우 어르고 달래서 분량을 따내긴 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번 프로그램도 그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나석문은 기꺼이 방송국에 사표를 내고 프로그램 제작 스튜디오로 이직할 생각마저 있었다.
“저, 아무래도 아이돌분들도 계시니까.”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석문은 30대 후반의 여성 가수를 보는 대신, 나이가 어린 백설하와 에리카를 콕 찝었다.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에리카가 매니저를 보았다.
벽면의 의자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일어나 자신을 소개했다.
“그쪽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실히 촬영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KS 엔터도 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때부터 고려한 사항이었다.
메이크업이 원활하지 않단 건, 곧 아이돌의 이미지를 좌우할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특히 현재는 햇볕이 쨍쨍한 여름이다.
“미리 알려드렸던 대로, 저희 KS 엔터 측은 따로 스탭진을 꾸려 제작진과 동행하겠습니다.”
매니저가 이토록 자신 있는 건, 단순히 에리카의 이미지를 지킬 스태프진을 운용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에리카의 얼굴에 대한 믿음이 가장 컸다.
설령 방금 자고 일어난 후의 쌩얼이 카메라에 잡히더라도, 에리카는 굴욕 움짤 하나 뜨지 않을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설하 씨는?”
백설하는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아까 매니저의 기세에 지지 않으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도 괜찮습니다.”
성필도 백설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주로 얼굴에 대한 믿음이었다.
‘설하는 혼자서도 메이크업을 잘하고 화장품에도 빠삭하니까.’
메이크업 스탭은 일주일만 데리고 다녀도 비용이 100만 원 이상으로 발생한다.
그 스탭을 위한 교통비, 숙박비, 식비 등을 생각하면 단순 고용비보다 값이 더 뛴다.
미디어 출연을 위해서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긴 하지만, 가로 엔터는 풀메이크업으로 리얼 버라이어티 촬영을 내보낼 생각도 없었다.
‘번거롭기도 하고, 제작진이랑 출연자 선배분들이 안 좋게 볼 거고, 무엇보다 설하는 기초화장만 해도 빛나니까.’
게다가 화장이 없더라도, 백설하의 쌩얼이 밝혀지는 것에 두려움은 없다.
백설하의 뮤비 티저 촬영 때, 아침에 갑자기 찾아갔음에도 전혀 미모가 안 죽지 않았던가.
본인은 창피했을지도 모르겠다만.
“알겠습니다.”
나석문은 한층 밝아진 표정이 됐다.
미팅은 3시간 정도 진행되었고, 모든 출연자가 납득할 만한 스케줄과 제작 서포팅 계획이 잡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백설하와 에리카는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하는 선배 가수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녀들은 스태프와 가수들이 다 나갈 때까지 회의실을 나서지 않았다.
“설하야 힘들었지?”
“아니요. 재밌었어요.”
“그럼 다행이고.”
성필과 백설하도 회의실을 나가려 할 때.
“설하 님!”
에리카가 백설하를 불렀다.
“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가서 얘기나 할래요? 같은 아이돌 동료로서!”
“아, 얘기요……?”
백설하는 성필을 보았다.
성필이 괜찮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하는 동안 둘이 서로를 의지할 테니까. 미리 친해지면 좋겠지.’
장기간의 촬영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출연진 간의 케미다.
만약 서로가 친하지 않다면 촬영 효율이나 텐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는 백설하 홀로 우두커니 떨어져서 땅바닥의 흙만 차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거 보고 싶지 않아…….’
백설하가 방송 촬영에 좋은 인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또한 즐겁게 촬영하길 바란다.
다른 연예인 친구도 사귀고 말이다.
절대 성필 자신이 케이어스의 팬이기 때문에 허락해주는 건 아니었다.
“네, 전 좋아요.”
“그럼 가요!”
에리카가 백설하와 팔짱을 꼈다.
백설하는 순간 놀랐으나, 곧 에리카의 천진난만함을 보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 사람이 온 곳은 방송국 내부의 카페였다.
바쁜 시간이라서 그런지 한산했다.
“나랑 매니저님은 다른 데 앉아 있을게. 둘이서 얘기 나눠.”
성필과 에리카의 매니저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음료가 나오자마자,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라도 되는 듯 화기애애하게 대화했다.
‘원래 알던 사이신가?’
백설하는 귀를 쫑긋 세워서 두 사람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들으려 노력해보았다.
“설하…… 예쁜…… 노래 잘 부르…… 최고…….”
“에리카…… 착하고…… 예의 바르…… 천사…….”
“왜 그러세요?”
“응? 아, 아니요.”
백설하는 창피해서 고개를 숙였다. 에리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음료를 들고 백설하의 맞은 편에 앉았다.
‘무슨 얘기를 열심히 하시나 했더니…….’
둘 다 자기 자식 자랑을 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앉은 게 다행이다.
만약 그들과 한자리에 앉았다면, 백설하와 에리카는 쏟아지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고 하하 웃고만 있어야 했을 테니까.
“설하 님!”
에리카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외쳤다. 백설하는 놀라서 눈만 깜빡였다.
진지한 표정을 짓던 에리카는 갑작스레 배시시 웃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아, 네.”
“언니는 반말하세요!”
“그으, 그럴까?”
왠지 모르겠지만, 리카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조금 더 성숙한 리카?
“우리 둘 다 리더네요. 리더 대담이에요!”
“그러게. 에리카 대단하다.”
외국인이 아이돌 그룹 내에서 리더를 차지한 사례는, 백설하가 알기로는 전무했다.
어떻게 케이팝 그룹의 리더가 일본인이냐! 이런 비판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어스도 초반에는 그런 비판으로 도마 위에 올랐으나, 에리카가 보여준 리더로서의 면모와 실력 덕택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보컬, 댄스, 퍼포먼스, 랩.’
전부 그룹의 메인으로 서기 부족함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텐데.
‘비주얼이랑 비율, 몸매.’
외모적으로도 완벽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아이돌 생태계를 파괴할 정도의 힘을 가졌지만.
‘작곡이랑 악기 연주도 할 수 있고 인문학적 소양도 뛰어나다고…….’
이쯤이면 놀라는 게 지칠 지경이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면모가 완벽할 수 있지?
인터넷으로만 봐도 그랬는데, 직접 보니까 사람이 아닌 듯한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에리카는 리더야.’
백설하는 리더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소녀연맹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전에 속했던 그룹의 리더도 항상 고통을 호소했었으니까.
‘또래의 애들을 통솔하고 잡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야.’
다들 자기가 있던 집단에서는 누구보다도 빛나는 이들이었을 텐데, 아이돌이 되면 그 빛나는 별들 사이에 있게 된다.
때때로 자격지심이나 질투가 생기고, 그게 이어지면 분쟁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사전에 막는 게 리더의 역할이지만, 쉽지 않다.
“제가 리더인 게 대단한가요? 외국인이고 20살밖에 안 돼서요? 데뷔할 때는 19살이었고?”
“이, 일본인이라서 그렇단 건 아니고…….”
사실, 맞다.
외국인이 리더라니?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백설하가 케이어스 멤버라도 반감이 생길 법하다.
안 그래도 케이어스는 데뷔 초반에 리더가 일본인이란 이유로 엄청난 악플 세례를 받았었다.
KS 엔터도 나라를 팔았니 CEO가 친일파니 일뽕에 취했니, 그런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백설하가 그런 비판을 받으면, 당장 1시간 동안 울다가 탈진해서 기절할 자신도 있었다.
“언니, 저 너무 어렵게 대하실 필요 없어요! 앞으로 프로그램하면서 계속 볼 거잖아요. 일주일 정도지만요. 언니가 저를 친구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자고로 친구란 쓴 말도 나누는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눈치 보면서 말씀하지 마세요.”
에리카는 백설하의 손을 따스하게 쥐었다.
그녀의 눈웃음에, 백설하는 자신의 심장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20살이, 자신보다 3살 어린 동생이, 너무나 성숙하다.
백설하가 우물쭈물하며 답을 하지 못하자, 에리카는 고민하듯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으음, 그렇죠. 저는 일본인…….”
에리카의 얼굴에 장난스런 미소가 고였다.
“와타쿠시(저)는 일본인이니까요. 그야 처음엔 반발이 있었죠.”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김민주가 가장 많이 반발했었다.
김민주는 에리카가 아무리 뛰어나도, 일본인인데 케이팝 그룹의 리더를 맡는 게 말이 되냐고 정호환에게 따졌었다.
결과는 보다시피.
“그래도 다들 함께 지내면서 서로를 이해해주고, 보듬어주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아졌어요. 사랑과 믿음의 힘이에요!”
사랑과 믿음.
그 단어 안에는 수많은 암투와 압박, 전쟁과 같은 나날이 있었다.
에리카는 그 모든 난관을 넘어서고, 마침내 피로 얼룩진 언덕 위에 리더의 깃발을 꽂았었다.
백설하가 알 도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믿음…… 응, 그러게.”
백설하는 본인이 리더가 되는 데에 반발을 겪지 않았었다.
하지만 본인이 본인을 리더로 생각하는 게 어려웠었기에, 에리카가 말한 힘듦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오(그래)!”
에리카가 갑자기 떠올랐단 듯 손뼉을 쳤다. 그녀가 일본어를 쓰자, 백설하는 리카가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에리카는 백설하의 반응을 예민하게 캐치했다.
일본어 쓰는 걸 좋아하는구나.
“진저한테 박 이사님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미국에 있었을 때 도움을 많이 받았다구요. 오늘 언니랑 같이 오신 분이죠?”
“응, 맞아.”
두 사람은 음료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래도 이야기했다.
에리카는 처음 대화를 시작했을 때와는 달리, 말수가 그다지 없는 편이었다.
보통 한 쪽이 말이 없다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마련이겠지만, 백설하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지 내가…….”
주로 말하는 쪽은 백설하가 됐다. 그것도 신나서 쉬지도 않고 이야기를 했다.
에리카는 턱을 괴고, 정말 백설하의 이야기가 즐겁단 태도로 귀를 쫑긋 세웠다.
사려 깊고 배려심 가득한 에리카의 태도는, 백설하의 입에서 실타래처럼 말이 나오도록 만들었다.
‘즐거워.’
백설하는 그리 느꼈다.
입이 마르도록 본인이 말을 쏟아내고, 에리카는 잠깐씩 질문만 할 뿐인 게.
너무나도 즐거웠다.
백설하는 소녀연맹에서 언니로서, 리더로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쪽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 말을 듣는 게 좋아.’
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 그럴까?
누구든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법이다.
체면이나 분위기를 생각해서 그러지 못할 뿐.
백설하도 지금까진 그러했다.
하지만 에리카의 검은 눈망울에 나타난 사랑스러움을 보면, 그녀의 입술로부터 새어 나오는 흥미 어린 질문을 들으면, 체면마저도 잊고 이야기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에리카의 눈동자 속에 떠오른 백설하는 이미 포로의 모습과 같았다.
에리카의 경청과 배려에 잡힌 채 행복한 수다를 즐기는, 마치 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누가.’
백설하는 문득 생각했다.
‘누가 에리카를 싫어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사랑받는 방법을 아는.
아니, 본능적으로 사랑받는 행동을 느끼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아, 너무 내 말만 했지?”
“아니에요 언니. 재밌었어요. 그래서 그건 어떻게 된…….”
두 사람이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와중, 물론 둘의 매니저도 1시간이 넘게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각자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아까부터 묘하게 박 이사님 얘기를 많이 꺼내네.’
에리카는 대화의 중간중간, 교묘하게 성필에 대해 질문했다.
처음에는 짧게 질문하여 신상을 알아내고.
이후로는 주요 대화 주제로 오르는 등, 성필이 대화 주제의 절반을 차지할 지경이 됐다.
‘이사님이 궁금한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성필이 직접 에리카에게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고, 미국에선 진저를 도와주기도 했고.
당연히 관심이 생길 수 있겠…….
‘잠깐.’
백설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정지음이 정호환으로부터 KS 엔터 입사 제안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설마 박 이사님도?’
신아름에게 듣기로, 정호환은 성필의 팬이라고 말했었다. 프로듀서로서 말이다.
정호환은 작곡가인 정지음을 빼가려고 했었는데, 프로듀서인 성필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제야 백설하는 에리카가 만든 행복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에리카가 검지 끝으로 빨대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 손동작이, 마치 하와에게 사과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을 보는 듯했다.
무릎 위에 올린 백설하의 손이 초조하게 떨려왔다.
“언니 개인적으로, 박 이사님은 어떤 분 같아요? 와타쿠시(저)는 한 다리 건너서 듣는 게 전부였어서, 언니한테도 들어보고 싶거든요.”
백설하는 느꼈다.
이건 사전 작업이다.
에리카. 성필이 직접 가서 사인까지 받았던 케이어스의 멤버다.
성필은 그녀의 무대를 보고 울기까지 했다.
집에는 케이어스의 앨범이 12장이나 있다.
장하양의 보고에 따르면, 벽면에 에리카의 포스터도 붙여져 있었다는 모양이다.
후일 장하양이 개인톡으로 압박을 넣어 떼게 만들긴 했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이사님이 KS 엔터에 프로듀서 자리라도 제안받으시면 혹시나, 설마…….’
가버리는 게 아닐까?
이 뱀 같은 아이에게 홀려버려서?
아니야, 라고 단언하기 어려웠다.
‘그야, 에리카는 모든 게 완벽하잖아…….’
소녀연맹과 케이어스를 비교하지 않더라도, 당장 에리카와 백설하만 비교해도 쉽게 판가름이 날 듯했다.
백설하는 자신을 두고 에리카를 따라나서는 성필을 상상했다.
상상만으로도 슬퍼지는 게 가능하구나…….
“어떤 분이세요, 박 이사님은?”
“서…….”
백설하는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뇌가 뜨겁다.
평생 사용한 뇌의 용량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뇌의 용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맹렬한 두뇌 회전 끝에 나온 답은!
“성격이…… 안 좋으셔…….”
“……네?”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셔.”
그것을 시작으로, 백설하는 성필 깎아내리기에 돌입했다.
“항상 연습실 감시하시고. 우리한테 자유 시간도 안 주시고. 우리 의견은 없고. 으음, 그, 그리고 차로 태워줄 때도 공격 운전 하시고.”
“공격 운전……?”
“그리고, 또오…….”
없는 말을 지어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백설하는 힘을 냈다.
성필을 지키기 위해서!
“조, 조, 조금, 그, 조금…….”
백설하는 마음속으로 성필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를 위해서니까!
“조금…… 기분, 나빠…….”
에리카가 눈을 크게 떴다.
“우리를 대하거나, 좀, 보는 게…….”
“…….”
“응, 그래. 이 정도?”
“…….”
에리카는 답이 없었다.
‘충격적이겠지…….’
아이돌 그룹이 메인 프로듀서를 이렇게 말하다니. 놀랄 만도 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영원히 두 사람만의 비밀일 것이다. 설령 에리카가 KS 엔터에 말하더라도, 백설하가 말했단 증거가 없잖은가?
녹음하고 있을 리도 없고 말이다.
훗날 성필에게 이 이야기가 건너가더라도, 백설하가 부정하면 그만이다.
‘아, 그러면 에리카가 거짓말쟁이가 돼버리는데. ……오히려 좋나?’
어쩌면 성필의 방에 쌓인 케이어스의 앨범들도 없앨 수 있을지 모른다.
“…….”
그런데 에리카의 반응이 너무 오랫동안 없다.
아무리 그래도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
“저, 에리카?”
백설하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를.
눈동자에 비친 자신과, 그 뒤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백설하가 기겁하며 뒤로 돌아보았다.
성필이 있었다.
그는 파르페 두 개를 양손에 든 채, 죽은 눈으로 백설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
세 사람의 오랜 침묵.
그리고, 툭.
파르페 두 개가 두 사람의 테이블로 올라왔다. 성필은 말없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사님 애들 자리엔 왜 계속 서 계셨어요? 애들이 뭐라고 했어요?”
“……아니요. 아까 했던 말 이어서 하자면요.”
성필은 아무 일도 없단 듯, 에리카의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