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71화 (171/760)

171화

“설하야 오늘 기분은 어때?”

“좋은 거 같아요. 이사님은요?”

“나도. 너 보자마자 좋아졌어.”

백설하는 옅게 웃었다.

그날, 백설하가 본가를 방문한 이후, 그녀는 변했다.

부정적으로 변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밝고 긍정적으로 변했다.

‘그게 더 무서워.’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건 아닐까 하고, 성필은 불안해졌다.

하지만 상담을 해도, 은근히 고민을 물어봐도, 백설하는 밝게 웃으면서 오히려 성필을 걱정해주었다.

자신은 신경 안 써도 된다고.

자신은 괜찮다고.

“오늘 2시에 회의 맞죠?”

“응. 시간 맞춰서 회의실로 와.”

A&R팀 회의.

그곳에 참여하는 인원은 성필과 손혜빈, 정지음과 멤버들이었다.

신입 사원인 이재호를 제외한 사실상 A&R팀 전원 참가였다.

이재호의 일정은 모두의 생각보다 훨씬 빡빡했다. A&R로서 기본적인 기량을 갖추는 건 물론이고, 손혜빈의 지시에 따라 동아시아 3국의 음원 차트와 빌보드 차트를 매일 확인했다.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죽은 눈으로 음악을 듣고 있지.’

일을 시키는 것보다 그의 기량 향상이 목적이기에, 오히려 그의 감사를 받아 마땅하지만.

성필은 그가 불쌍해지곤 했다.

손혜빈 밑에서 일을 하니까 더더욱.

“자, 그럼 아이디어 회의 시작해볼게.”

정규 1집의 대주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멤버들의 의견, 그리고 이전 앨범과의 통일성이다.

일단 바통은 리카에게 주어졌다.

“역시 배틀밖에 없죠! ‘롱 포’에서 흑막이 밝혀졌잖아요! 한 이사님이요!”

한 이사가 배우로서 연기를 했을 뿐이지만, 아무튼 뮤비의 마지막에 흑막이 존재를 드러내긴 했다.

과연 그 흑막이 무엇인가?

“조정훈 감독님이랑 미팅해서 물어봤는데…….”

손혜빈이 한숨을 쉬며 턱을 괴었다.

“진짜 얼토당토않은 답이 돌아왔거든.”

“얼토당토않다니……. 누나 말이 너무 심해. 조정훈 감독님도 나름대로…….”

“진짜 얼토당토않다니까!”

들어보니, 진짜 그랬다.

“‘서프레스’라고?”

가로 엔터 최초의 아이돌 그룹.

7인조 보이그룹인 서프레스.

그들이 흑막의 정체라고 한다.

“서프레스가 ‘억압하다’란 뜻이잖아. 소녀연맹의 컨셉과 대척점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조정훈 감독님 말로는, 이벤트성으로 곡 하나 만들어서 그분들이 불렀으면 좋겠다고 그러시더라.”

“……누나, 미안.”

“네가 들어도 진짜 얼토당토않지?”

“아타시(저)는 아닌데요!”

리카는 잔뜩 흥분해서 열변을 토했다.

“엄청 재밌겠는데요?! 그거잖아요! 전작 주인공이랑 현작 주인공이 만나서, 대척점에 서서, 서로의 신념을 부딪치는! 만화에서 제일 가슴 뛰는 전개예요!”

“…….”

성필과 손혜빈은 리카를 바라보곤 시선을 떨어뜨려 수첩에 메모했다.

딱히 의미 있는 말은 쓰지 않았다.

[리카가 동의함]

정도만 써두고, 열심히 필기하는 척 몇 자를 더 끄적였다.

“일단 알겠어.”

반박할 말이 산더미처럼 있지만, 아이디어 회의는 반론과 비판을 차단하는 것이 규칙이다.

상상력에 한계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요, 저는 정규 앨범이야말로 배틀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너 왜 그렇게 싸우는 걸 좋아해?”

“아라쨩은 가슴이 이글이글거리지 않아?!”

“우리가 데뷔 때 자유랑 저항을 컨셉으로 잡았고. 미니 앨범 타이틀은 자유에 대한 사랑이었고. 정규 앨범은…… 아예 싸움? 그거랑 저항이랑 같은 거 아니야?”

“그런데.”

장하양이 끼어들었다.

“‘롱 포’ 마지막에는 우리가 사람들을 이끌고 그…… 빌딩? 같은 데로 들어갔잖아. 그 장면에서 끝났어. 싸우는 건 안 나왔지 않아?”

“그렇긴 한데요……. 진짜 뭔 만화처럼 되는 느낌이라서 좀 그래요.”

솔직히, 조아라는 컨셉이나 세계관이란 것을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다음 뮤비 컨셉은 우리가 히어로 옷이라도 입고 싸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쫄쫄이 입고요.”

“오…….”

“팀장님 방금 감탄했어요?!”

신아름이 즉시 치고 들어왔다.

“쫄쫄이를 좋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 아니. 안 그랬어. 너희들이 생각보다 진지해서 놀란 거야.”

“당연히 진지하죠. 저희 노랜데.”

이미 멤버들은 자신을 소녀연맹이란 집단 그 자체로 여겼다.

그녀들의 대화를 듣는 정지음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의 노트북에는.

[싸움? 배틀? 드럼이랑 북? 싸우는 악기. 북채? 심벌즈? 춤은?]

같은 물음표만 가득했다.

컨셉을 음악으로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는 것이다.

“아름이 넌 어때?”

“저는 슬슬 신나는 노래 불러보고 싶어요.”

“오.”

성필의 생각과도 일치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타이밍을 잡고 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멤버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설하는?”

“저는…….”

성필은 백설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설하는 부모님이랑 싸운 거야. 괜찮을 리가 없어. 평정을 연기하고 있긴 하지만…….’

아티스트의 심리 상태는 프로덕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어쩌면 백설하가 아이돌 활동에서 의욕을 잃진 않을까. 성필은 그게 걱정되었다.

이번 대답으로 백설하의 심리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으리라.

“아이디어는 잘 안 떠오르고요. 이번에는 보컬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기교적인 거요.”

의외로 정상적인 아이디어가 나왔다.

‘설하는 노래를 잘 부르니까.’

슬슬 자신이 부각되는 곡과 파트를 가지고 싶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소녀연맹의 전체적인 기량을 고려해서 적당하게 난이도를 조절했으니.

‘이건 또…….’

성필의 생각과는 반대였다.

“보컬이 강조되면요.”

조아라가 백설하의 눈치를 보았다.

“춤이 좀…… 그게, 조금 낮아져야…….”

“아라야.”

백설하가 조아라를 불렀다. 조아라는 조금 기가 죽어서 백설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내 개인적인 바람이야. 나도 보컬에 집중한다고 퍼포먼스를 낮추고 싶진 않아. 아이돌 곡은 춤이 반,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하잖아.”

“그거는, 어…….”

조아라가 떨떠름하게 동의했다.

보컬과 댄스, 어느 게 더 중요한가.

아이돌계에서 결판이 나지 못한 주제다.

둘 다 비중을 가져가면 좋겠으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에 집중하면 하나가 부족한 게 당연하다.

보컬은 백설하의 강점 분야이니, 조아라는 그녀가 ‘춤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게 듣기 힘들었다.

“얘들아, 퍼포먼스는 조금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은 주제부터 정해야 해.”

성필은 다시금 멤버들의 이목을 모았다.

“내 생각인데…… 싸움보다는 화해가 어떨까?”

사람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음악의 힘이란 게 그런 거잖아. 물론 전쟁의 행진곡이나 군가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음악이나 문화는 즐거움을 위한 거니까.”

“악당을 용서하자는 건가요!”

“그 악당이 뭘 했는데?”

“어?”

리카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소녀연맹 세계관에서 악당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모르겠다.

“어어……?”

“리카, 생각해 봐.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보다, 문화의 힘으로 감화시키는 게 더 멋지지 않아? 그…… 아!”

성필은 장하양에게 빌려 보았던 ‘유리구두’라는 만화를 떠올렸다.

“라이벌을 완전하게 몰락시키는 것보다, 라이벌이 주인공을 인정하게 만들고 주인공의 사상에 감화되는 게 감동이 있잖아.”

“그런 전개도 불타오르죠! 그렇네요, 소프트 파워네요!”

문화의 힘!

리카는 이미 설득당한 듯, 자신이 본 소설과 만화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아무튼 성필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아저씨, 그러면 우리가 내걸었던 ‘저항’이란 키워드는 어떻게 되는데요. ‘롱 포’ 뮤비에서 잔뜩 싸울 것처럼 해놨었잖아요.”

“아라야. ‘아니’ 때 하양이 뮤비 파트 생각해 봐. 군인들한테 꽃 내미는 거.”

“아, 그거 멋지긴 했죠.”

조아라는 한구인에게 들었던 68혁명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진정으로 세계를 바꾼 혁명 중 하나.

그것을 컨셉으로 잡았던 장하양의 사진들은 하나같이 심장을 울리는 면이 있었다.

“칼보다 꽃이라잖아.”

“음…….”

조아라는 장하양을 바라보았다.

장하양이 싱긋 웃어주었다.

“뭐, 칼보다 꽃이긴 하네요.”

옛말에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했다.

어감이 다르긴 해도, 수백만의 군대도 무너뜨리지 못한 제국을 아름다움이 허물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무력이 아닌 힘도 충분히 강할 수 있다.

“맞네. 용서도 멋진 키워드잖아.”

신아름까지 가세했다.

“신아름 너한테 전혀 안 어울리는데?”

“조아라 네 평소 행실이나 생각하고 말해.”

“응 너나 생각해라.”

“내가 뭐? 난 유언비어 퍼뜨린 인간도 용서할 정도로 도량이 큰데?”

“안물안궁.”

조아라의 뚱한 반응에, 신아름이 자신의 말에 동조해 달란 듯 성필을 보았다.

그래, 도량이 크긴 했지.

학폭 폭로글을 올린 아이에게 무릎 꿇리고 영상을 찍게 한 정도면 충분히 관용적이다.

성필은 멤버 다수의 반응이 긍정적인 것을 보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걸크러시로 계속 나갔었잖아. 이번에는 신나는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떨까 싶어.”

“예를 들면요?”

“말 그대로 신나는 거지. 우리가 정규 앨범 발매할 쯤이면 아마 크리스마스지 싶으니까. 사람들도 신나는 노래를 더 많이 들을 거 아니야.”

“화해…….”

멤버들은 저마다 화해의 이미지를 생각했다.

손을 잡고, 같이 노래 부르고, 춤추고, 그러면 되나?

회의는 2시간 정도를 거치며 여러 아이디어를 받았으나, 명백한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저 ‘신나는 노래’ 정도가 이번 회의의 결과물이라면 결과물이었다.

“다들 고생했어.”

정규 앨범 기간을 뒤로 미루니, 확실히 타이틀곡 선정과 제작에 여유가 있었다.

물론 15곡가량의 볼륨을 채우기 위해, 멤버들은 나날이 정지음과 협업을 이어가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타이틀곡에 여유가 있단 건 상당한 메리트다.

“지음아.”

성필은 회의실을 나가며 정지음을 불렀다.

“네, 형.”

“잠깐 시간 있어?”

“저야 회사에 있는 한, 시간은 항상 있죠.”

“그럼 나랑 얘기 좀 하자.”

둘은 응접실로 들어왔다.

“어떤 얘긴데요?”

“이게…… 네 기분이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정지음은 눈치가 있다.

보통 저런 말 뒤에는 기분이 나쁜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정지음은 작게 웃고는.

“제가 형 얘기를 왜 기분 나쁘게 듣겠어요. 형이 당장 밖에 나가서 막노동 뛰라고 폭언해도, 저는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일걸요.”

“내가 그런 말을 왜 해.”

“예를 들자면 그렇다고요.”

성필은 정지음에게 은인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삶을 찾아준, 아주 고마운 은인.

그런 성필이 조금 기분 나쁜 말을 했다고, 정지음이 티를 내거나 원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말할게.”

“네.”

“이번 앨범, 엘릭 작곡가랑 같이 진행해보는 거 어떻게 생각해.”

“……형 나한테 왜 이래요?”

정지음은 기분이 팍 나빠진 듯했다.

* * *

정지음은 요즘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가끔 그의 작업물을 확인하는 홍규헌도 난색을 표하곤 했었다.

“정지음 얘 병 걸린 거 같은데?”

그럴 때마다 성필은 강하게 정지음을 옹호했었다. 그가 머니 코드, 흔히 말해 팔리는 곡을 만드는 데만 집중하지 않길 바라서였다.

“사장님! 원래 케이팝이 이런 겁니다!”

“박 이사도 병 걸렸어?”

“현재 대한민국의 음악 시장에서 가장 실험적인 시도는 아이돌계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팬덤이라는 상업적 방파제가 있기에, 콜럼버스와 같은 창조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거죠! 전 세계의 작곡가들이 한국의 아이돌과 컬래버레이션하는 이유도 이러한 실험이 허용된 환경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케이팝은 글로벌 뮤직의 첨단에……!”

“알겠으니까 조용해.”

그래, 성필도 정지음을 존중하여 최대한 그를 변론하고 있긴 하지만.

요즘 정지음이 만드는 곡들은 뭐라고 할까…….

‘너무 특이함에만 집중하는 것 같은데.’

홍규헌이 ‘병 걸렸다’라고 표현한 데 어긋남은 없었다. 오히려 정지음의 상태를 꽤 잘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아마 지음이가 이러는 건…….’

성필은 전생을 겪었기에 정지음이 만들었던 ‘아니’의 가치를 이해했었다.

하지만 정지음이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성필이 ‘아니’에 꽂혔던 것은 ‘특이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지음도 성필의 심미안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 특이함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음아. 너 감을 좀 찾을 필요가 있을 거 같아.”

슬슬 성필이 프로듀서로서 정지음의 방향을 잡아줘야 할 때인 듯했다.

“벌써 감이 떨어졌으면…… 저 은퇴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지음은 조금 우울해진 투였다.

성필이 엘릭을 들이겠다고 말하니, 자리가 위협받는 느낌을 받으리라.

“나는 물론 너를 최고로 쳐. 한국 음악 시장에서 너만큼 자기 색이 뚜렷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드물 거야.”

창작자를 띄우는 데 칭찬만 한 게 또 없다.

특히 그 칭찬이 예술가의 고유성을 띄우는 것이라면 말이다.

과연 정지음의 처진 어깨가 조금씩 올라왔다.

“그런데 그게 네가 올라운더란 뜻은 아니잖아.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장점이 있고, 자기만의 영역이 있는 거니까.”

“그렇긴 하죠.”

“그런 의미에서, 너는 엘릭 작곡가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해?”

그거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본인만의 색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의 귀에 꽂히도록 곡을 쓰는 능력이다.

컵을 대중성이란 물로 가득 채우고, 마지막 비밀 레시피로 본인의 색을 담는.

상업 작곡가의 교본과 같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성공할 수 있던 것이겠지.

“만약 협업이 성사되면 너한테도 이득이 될 거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겠지.”

정지음이 KS 엔터로 영입될 것을 제안받았을 때, 그가 가장 끌렸던 건 돈이나 장비 따위가 아니었다.

KS 엔터 인하우스 시스템. 그 안에 소속된 수많은 작곡가들과의 교류였다.

독방에 박혀 작업만 이어가는 건, 한때 내면에 집중할 수 있더라도 후일에는 독이 되어버린다.

혼자만의 고집이 쌓여서 깰 수 없는 벽이 될 테니까.

“아직 내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지만, 나는 다음 앨범 타이틀로 대중성을 잡고 싶어. 신나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곡으로.”

“소녀연맹 컨셉의 한계를 깨려고요?”

정확하게 읽었다.

자유와 저항이라는 컨셉에서 파생된, 강렬하고 센 느낌의 비주얼과 뮤비.

매니아층을 저격할 수 있는 독특한 컨셉이지만, 그게 곧 소녀연맹의 한계가 되어왔다.

“지금까지 성공했다고 해서 이후에도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지. 그리고 내 목표는 소녀연맹이 세계까지 뻗어가는 거니까.”

이번 미니 앨범으로 확실히 느꼈다.

손혜빈의 강한 주장으로 ‘사랑’이란 대중적인 대주제를 잡았다.

음원 차트에서는 괄목할 성과를 이룩했지만, 앨범 판매량으로 보건대 팬의 유입은 음원 성적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제 곡만이 아니라 비주얼까지 대중적으로 확장해야 해.”

퍼포먼스와 메시지, 비주얼에서 변혁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엘릭이 있다면, 당연히 너야 탐탁지 않겠지만…….”

“알겠어요.”

정지음이 선선히 수락했다.

“제가 부족하단 거잖아요.”

“아니…….”

“인정해요.”

“어?”

“제 부족함을 엘릭 님이 채워주실 수도 있겠죠.”

엘릭과의 협업은 성장의 발판이 될 것이다.

만약 엘릭과 협업한 곡이 대박을 쳐서 정지음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더라도.

“제 첫 번째 목표는 결국 가로 엔터의 성공이니까요. 가로 엔터의 식구로서요.”

“……고맙다.”

“뭘 고맙기까지 해요. 제가 음악 프로듀서라도, 온전히 제 곡만 앨범에 도배할 수 없기도 하잖아요. 지금도 손 팀장님이 다른 작곡가들 알아보고도 있고요.”

엘릭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정지음의 허락은 얻어냈다.

프로듀서로서의 업무 중 하나는 인간관계 관리다. 프로덕션 과정에서 인원들 간의 잡음이나 불화를 잡는 것.

정지음의 허락을 얻어낸 건, 그 과정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첫 번째 계단이었다.

“근데 이거 밑밥 까는 거 아니죠? 막상 저 음악 프로듀서로 들이니까 곡이 별로라서…… 나중에 계약 해지하고…….”

“절대 안 그래.”

“네, 알겠어요. 믿을게요.”

다음 날.

“이사님! 지음 오빠를 막 대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가로 엔터를 위해 열심히 일하신 분인데, 그런 취급은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리카가 성필을 보자마자 일침을 날렸다.

“리카. 혹시 지음이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에, 에에…… 아니요!”

“그렇구나.”

성필은 정지음을 찾아갔다.

“정치질하지 마!”

“아, 아니, 그냥, 조금 리카한테 고민을 말한 거…….”

정지음은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을 해줬는데도 불안해?”

“지음 오빠 너무해요! 이사님만큼 믿음을 주시는 분이 어딨다구요!”

“…….”

“빨리 이사님한테 사과하세요! 이건 믿음의 배신이에요!”

“리카, 연습이나 하러 가.”

“하이(네).”

성필은 정지음을 이해했다.

토사구팽의 불안함은,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 자가 항상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실적이 바로바로 드러나는 업계에 속해 있으니 불안은 더 클 것이다.

‘나도 전생에선 계속 불안했었고, 실제로 토사구팽당하는 미래를 보기도 했었으니까.’

성필은 진득이 자리에 앉아 정지음을 안심시켜주었다.

* * *

숙소.

멤버들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백설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분주할 일이 없긴 하지만, 백설하를 보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얘들아.”

백설하가 퍼프를 내려놓고 거울을 정면으로 보았다. 거울로 침대에 쪼르르 앉은 멤버들이 보였다.

“화장 나 혼자 할 테니까 안 보면 안 돼?”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요. 저희가 봐야죠.”

신아름의 말이 모두의 생각을 대변했다.

오늘은 ‘음악을 위한 동행’의 사전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촬영도 아니고 미팅일 뿐이라, 따로 샵에서 메이크업은 받지 않았다. 그래서 백설하가 직접 화장을 하는데…….

“내가 직접 화장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오늘만…….”

“거기 가면 에리카 있잖아요! 쌤이 걔한테 지면 안 되죠!”

“조아라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쌤이 화장 안 하면 에리카한테 진단 거야?”

“어, 아니, 그건 아닌데…….”

신아름과 조아라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며, 백설하는 한숨과 함께 화장을 이어갔다.

일부러 빨리했다.

계속 멤버들의 시선을 받다가는 제 명에 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녀올게.”

“이건 에리쨩도 감탄할 거야!”

“에리카 콧대 눌러주고 와요!”

“타도 케이어스!”

동생 라인이 저마다 알 수 없는 승부욕을 불태우는 와중, 장하양만이 침착하게 백설하의 앞으로 다가왔다.

장하양은 백설하의 어깨에 붙은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작게 말했다.

“언니, 잘하고 와요.”

“응, 고마워.”

“……하양 언니한테만 반응이 달라.”

“둘이 같은 방 쓰니까…….”

“차별인가…….”

백설하는 미소를 띠며 동생 라인을 한 번에 안았다.

“다녀올게 얘들아.”

동생 라인도 백설하를 꼭 안았다.

“일찍 나왔네.”

기다리고 있던 건 성필이었다.

소녀연맹 멤버의 최초 방송 출연 미팅!

그렇기에 이사급인 성필이 동행하기로 했다.

조수석에 탄 백설하는 습관처럼 무릎 위에 깍지를 꼈다.

“긴장돼?”

“아, 음, 네.”

백설하가 수줍게 인정했다.

“텔레비전에 제 모습이 나오는 거잖아요.”

“음방에도 나왔잖아.”

“그거랑은 다르죠. 제 일상적인 모습이 나오는 거니까요.”

수십만 명이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것에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미 무대에 적응한 백설하마저도 예능 출연은 떨리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소녀연맹 백설하입니다!”

방송국에서의 인사에도,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떨림이 서려 있었다.

‘음악을 위한 동행’ 미팅이 있는 회의실 앞.

“어?”

그곳에 에리카가 있었다.

그녀는 손거울을 들고 앞머리를 정돈하곤, 뒤에 선 매니저에게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매니저가 괜찮다고 답하자, 에리카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핸드백 안에 넣었다.

‘에리카도 떨리는구나.’

백설하는 에리카에 대한 동질감이 생겼다.

항상 케이어스를 라이벌로 생각해와서 에리카가 곱게 보이진 않으리라 예상했었는데.

직접 보니 신인다운 태도가 사랑스럽게만 여겨진다.

“안녕하세요.”

백설하가 먼저 에리카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아, 설하 님!”

에리카가 살갑게 백설하에게 인사했다.

백설하의 손을 거리낌 없이 맞잡기까지 했다.

“‘롱 포’ 잘 듣고 있어요! 이번 뮤비도 너무 멋져요!”

“감사합니다. 저도 아직 ‘카오스’ 플레이리스트에 있거든요. 노래 정말 잘 부르셔요.”

“설하 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아, 예전에 리카한테 들었는데요. 설하 님이 소녀연맹 멤버들 트레이닝도 맡으신다면서요? 전에 트레이너셨고.”

“네에, 그러고 있긴 하죠.”

“너무 멋져요! 가르치는 건 부르는 사람보다 훨씬 잘해야 가능한 거잖아요. 대단해요.”

백설하는 에리카의 칭찬 세례에 귀가 붉어졌다. 어쩜 칭찬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다음 앨범도 기대할게요!”

“네, 네, 저도요.”

에리카는 활짝 웃고는, 시선을 백설하의 뒤로 옮겼다.

“안녕하세…….”

에리카가 흠칫했다.

그녀의 끊어진 인사를 받아, 성필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입니다.”

“네에, 이사님…….”

성필, 박 이사, 이 사람이다.

‘데뷔 때 리카랑…….’

사랑을 속삭였던 사람.

방송국의 휴게 공간. 그곳에서 리카에게 ‘네가 가장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고……’라는 낯부끄러운 말을 뱉었던 사람이다.

‘그냥 리카와 친한 사람은 아니야.’

방송국이라는 공간에서조차 사랑을 숨기지 못하고, 서로의 귓가에 낯간지러운 말을 부어대는.

‘연인이야!’

방송국에서 성필의 말을 듣던 리카는 그저 회사 직원과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보통 회사 직원과 이야기를 할 때, 여자의 얼굴이 그렇게 변하진 않을 것이다.

리카의 표정은 분명히 소중한 사람과 말을 섞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게다가 에리카를 보자마자 ‘큰일 났다!’는 듯이 표정이 싹 굳지 않았던가.

‘방송국에서는 빨리 자리를 뜨느라 자세히는 못 봤지만, 얼굴도 리카가 좋아할 만해.’

이로써 모든 게 명확해졌다.

‘리카는 회사 사람이랑 연애를 하는 거구나!’

에리카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느끼지도 못했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흥분.

‘어쩜,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이…….’

에리카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미건조하다.

모든 게 너무도 쉽게 손에 들어왔기에.

그렇게 살아왔기에.

사람들이 보는 에리카의 밝은 면모는 전부 자동반사적인 것에 불과했다.

톡 건드리면 몸을 웅크리는 공벌레처럼, 에리카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자연스레 보여주는 것이다.

에리카는 마치 인생의 공략집을 가진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고 성공할 수 있는지 너무도 잘 안다.

아니, 아는 것을 넘어 본능의 영역이다.

그래서 지루하다.

그냥 평소랑 똑같이 행동하는데.

‘에리카 너무 사랑스럽다…….’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해내면.

‘에리카 굉장해!’

라는 말이 돌아오니까.

칭찬과 성공이란 에리카에게 너무도 값싼 물건이었다.

그런 무색무취한 에리카의 삶을, 그녀의 심장을 색색이 물들이는 건.

‘너무 로맨틱하다, 리카아…….’

바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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