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고등학생이 된 백수현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갓길에 올랐다.
매일 12시간 이상을 의자에 앉아만 있으려니 몸이 남아나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타민과 같은 게 있었다.
‘오늘도 새 영상 올라왔네.’
아이튜브 가로 엔터 채널.
멤버들의 라이브 방송 하이라이트 편집본이었다.
원래 이런 하이라이트 편집본은 팬들이 직접 만들어서 뿌리곤 했으나, 요즘은 가로 엔터도 간간이 올려준다.
가로 엔터의 홍보팀으로 들어와 콘텐츠 담당자가 된 양상헌 덕이었다.
그는 영상 편집 기술도 익히고 있어, 멤버들의 영상을 편집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콘텐츠 요약본도 만들었다.
덕분에 팬들은 연일 가로 엔터를 찬양하는 중이었다.
백수현도 그중 하나였다.
[아라야, 복숭아 먹어.]
조아라가 숙소의 방에서 팬들과 소통 방송을 하고 있는데, 백설하가 깎은 과일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쌤 잠만요. 이것만.]
조아라는 ‘롱 포’ 안무 강의를 이어갔다.
백설하는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대충 이렇게. 인민이들 알겠어요?]
조아라가 강의를 끝낸 뒤 호흡을 가다듬고 있자, 백설하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조아라의 입으로 가져갔다.
조아라는 아기처럼 복숭아를 받아먹었다.
[내가 먹을게요.]
[이것만 먹어.]
이번에는 사과를 조아라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조아라가 화들짝 고개를 뒤로 빼더니.
[아 나 사과 안 먹…….]
마치 엄마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어보라고 할 때 거절하려는 것처럼, 조아라가 ‘안 먹어’라고 하려 했다.
그 순간, 조아라는 깨달아버렸다.
상대가 백설하라는 사실을.
[안 먹…… 안 먹는…… 고맙…… 사과는, 쌤 드세…….]
조아라는 말을 더듬으며 최대한 감사를 전하려 했다.
“흐.”
백수현은 아빠 미소를 지었다.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을 보고 느낄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누나, 재밌게 살고 있구나.’
백수현의 눈은 조아라보다, 과일이 담긴 접시를 두고 방을 나서는 백설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버스에서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백수현.
그는 어머니로부터 충격 선언을 들었다.
“내일 설하 방 비울 거야.”
“네?”
백설하는 집을 나갔다.
저녁 식사 시간, ‘나 아이돌 다시 해볼래’란 발언을 터뜨렸던 백설하였다.
결과는 뻔했다.
어머니는 격노했고 말싸움이 시작됐다.
보통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이면 백설하가 고개를 숙이지만, 그때는 그러지 않았다.
‘할 거라니까!’
백설하는 반항했다.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짝.
어머니의 손자국을 뺨에 새겼다.
백설하는 충격받아 주춤거리더니, 눈물을 흩뿌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캐리어에 급하게 짐을 싼 후 집을 나갔었다.
“너도 방 필요하잖아. 들어오지도 않는 애 방 가만히 둬서 뭐 해.”
가출한 백설하는 1년이 넘도록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은 소녀연맹으로 데뷔했다.
지금까지 백설하의 방은 마치 백설하가 있는 듯 깨끗이 관리되어왔다.
어머니는 백설하의 방을 청소할 때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아련함이 담긴 눈동자로 백설하의 침대를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이젠 백설하의 흔적을 지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일 설하 물건 뺄 거니까, 오늘은 수현이 네가 짐 대충 정리해둬.”
“…….”
방이 생겼다.
기쁜 일이다.
백수현은 17살이고, 사춘기에다가, 한창 예민할 시기의 소년이었으니까.
본인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곤 항상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게 누나의 방을 빼앗는 것이라니.
“엄마. 누나한테 연락은 해봤어?”
어머니는 대답 없이 차곡차곡 개어진 빨래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백수현은 입을 꾹 다문 채,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을 손바닥에 담아 주먹을 꽉 쥐었다.
“……누나.”
백수현은 백설하를 조용히 부르며 체념한 듯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깨끗하다.
백설하가 살았을 때처럼.
“오늘은 책상에 있는 물건만 박스에 담아둬. 구겨지지 않게 잘 담아야 해.”
백설하가, 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어머니는 짧게 말하곤 다시 사라졌다.
아직도 어머니는 백설하가 아이돌이 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어머니가 백설하를 싫어하지 않는단 것을 위로로 삼아, 백수현이 책상 앞에 섰다.
책상 위에는 노트가 여러 권 꽂혀 있었다. 백수현은 그중 하나를 펼쳤다.
[노래 노트]
백설하가 노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쓴 반성록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썼기에 분량이 수십 페이지는 됐다.
백수현은 하나를 골라 페이지를 넘겼다.
[설탕이 든 끈적한 음료나 우유(특히 우유!)는 노래 부르기 전에 절대 먹지 말자! 우유가 목에 붙어서 목소리가 잘 안 나와(중요)!]
‘그러고 보니, 누나는 우유를 좋아했었지.’
매일 한 팩을 먹을 정도로 좋아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유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소리를 지르면 성대가 상해!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목소리는 조곤조곤! 웬만하면 화는 절대 내지 말자!(수현이한테 친절하게 대하자)]
‘……그러게. 누나 원래 나랑 자주 싸웠었지.’
백수현은 미소를 지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눈물이 나온다.
누나가 보고 싶다.
[목을 푼다고 헛기침을 하면 안 돼. 성대가 상해. 목 관리 철저히!]
노래도 공부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백설하는 공부를 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경험과 지식을 쌓아, 마침내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백수현은 책꽂이에 있는 보컬, 성악, 신체 구조에 관한 전문 서적들을 눈에 담았다. 책뿐 아니라, 백설하가 따로 정리한 요약 노트도 가득했다.
백설하의 능력과 지식은 어중간한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사람보다 훨씬 나았다.
아니, 세월만 따져도 백설하는 이미 석사 이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크흨.”
노트를 쭉 훑어보던 백수현은 울다가 웃었다.
재밌는 글을 발견해서였다.
굵은 볼펜으로 또박또박, 아주 크게 쓰였다.
[태양을 삼켜라! 그리고 빛을 노래해라!]
청소년기의 흑역사를 집안에 남기고 나가다니.
나중에 만나면 꼭 놀려줘야겠다.
“응?”
백수현은 이상한 페이지를 발견했다. ‘노래 비법’ 파트에 있는 것이었다.
[개 혓바닥 호흡법.]
“개 혓바닥……?”
백수현은 뒤를 보았다.
거실에 가족들은 없었다.
그는 책에 적힌 것을 따라 했다.
혀를 개처럼 쭉 내밀고 숨을 들이쉬었다.
“헤엑 헤엑…….”
탁.
백수현은 창피함에 가득 차서 노트를 덮었다.
* * *
신아름의 노래를 듣고, 백설하는 생각했다.
‘아름이는 아직도 호흡이 불안정하구나.’
보컬의 5대 요소라고 흔히 말해지는 것이 있다.
자세, 호흡, 발음, 발성, 공명.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신아름은 특히 호흡이 문제였다.
백설하도 여러 번 교정해주려 했으나, 신아름은 이미 석세스 엔터에서 익힌 호흡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건 과감하게 고쳐야 하는데. 근데 내가 고치려고 하면…….’
신아름의 보컬 실력이 급락하는 구간이 생길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노래를 불러야 할 테니까.
앨범 준비 기간에는 치명적이다.
“어땠어요 쌤?”
“잘했어.”
신아름은 노래를 잘 불렀다.
유리처럼 깨끗하고 투명한 보컬이다.
프로듀서의 디렉팅에 맞춰야 하는 아이돌로서는 이상적인 보컬이나 마찬가지다.
‘괜히 건드렸다가 오히려 망가지진 않을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신아름의 보컬법이 그녀의 성장을 막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호흡 조절이 잘 안 되지?”
“네, 그렇네요. 근데 계속 운동하면서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음…… 이거 한번 해볼래?”
언젠가 소녀연맹 멤버들에게 장기간의 공백 기간이 생긴다면, 백설하는 대대적으로 신아름의 보컬을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은 조금씩이나마 나아갈 수밖에.
“개 혓바닥 호흡법이라고 있거든.”
백설하가 설명을 마치자 신아름이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지었다.
“쌤 내가 아는 거 없다고 이상한 거 걍 말하는 거죠? 카메라 어딨어요?”
콘텐츠 담당자인 양상헌의 영입 이후로, 멤버들은 라이브 방송 촬영에 열중했다.
연습 도중이나 레슨 때도 심심하면 방송을 켜곤 했는데, 그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최근엔 신아름이 맨발로 불량하게 소파에 누워 있는 장면이 찍혀서 아이튜브에 박제 당한 참이었다.
“지, 진짜 있는 거야.”
“개 혓바닥 호흡법이요? 그냥 저 창피하게 만들려는 거잖아요. 개처럼 혀 내밀고 헤엑거리라뇨.”
“그, 내가 말했었잖아. 힘이 안 들어간 자세에서 노래해야 한다고. 그으, 그래. 이소룡. 이소룡을 보면 가슴 위는 힘이 빠졌고, 코어는 유연하면서도 단단하고, 다리는 꽉 땅을 밟고 있잖아. 그거처럼 가슴 위로는 힘이 아예 안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개 혓바닥 호흡법을 쓰면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빠지고 목에 준 힘도 풀린다.
“그 상태로 숨을 쉬었을 때, 횡격막이 내려가고 몸 안이 팽창한 상태를 기억해야 해.”
“그건 알아요. 저도 배웠어요.”
“응. 기초적인 거니까. 가수의 전투태세를 쉽게 만들어주는 게 이 호흡법이야. 춤출 때도 항상 그 상태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해. 물론 춤추면서도 힘을 뺀다는 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노력이 의미 없는 건 아니거든.”
신아름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단 표정이었다.
백설하가 쓰게 웃었다.
“그런데 이건 소프라노 조수희 선생님도 추천해준 방법이니까, 내가 아니라 그분을 믿고…….”
신아름이 핸드폰을 꺼내자 백설하가 움찔하며 몸을 피하려 했다.
혹시 또 방송 중인가?
“그럼 찍어도 되죠?”
“으, 응?”
“그 소프라노분도 추천한 거라면서요. 그럼 좋은 방법인 거죠?”
“으, 음, 그렇지?”
“영상으로 남겨서 쉴 때마다 연습할게요.”
“…….”
“부끄러우세요?”
아니다.
안 부끄럽다.
안 부끄러워야 한다.
왜냐하면, 정말 과학적으로 증명된 훈련법이니까…….
“왜 대답 없어요. 역시 저 놀린 거죠?”
“아, 알겠어. 찍어도 돼…….”
사랑스러운 제자이자 동생이 학구적인 목적으로 영상을 찍겠다는데 거절할 수는 없다.
신아름은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 영상 촬영을 켰다. 그 앞에 선 백설하가 긴장했다.
“하, 할게.”
“네.”
백설하가 개처럼 혀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숨을 쉬었다.
“헤엑, 헤엑, 헤엑.”
신아름은 싱긋 웃으면서 촬영 종료를 눌렀다.
찍힌 영상을 확인하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걸작이네요. 스타그래프에 올리면 하트 만 개는 받겠다.”
“어?!”
“빨리 올려야…….”
* * *
한구인은 들뜬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필이 허 웃으며 물었다.
“한 이사님 그렇게 좋으세요?”
“예, 좋습니다.”
요즘 한구인은 업무 부족에 시달렸다.
자신의 일을 경리 직원인 권아인에게 뺏긴(한구인의 생각) 뒤, 종일 하는 일이라곤 이미 했던 일을 확인하고 권아인을 노려보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또 다른 일이 생겼다.
바로 소녀연맹 멤버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박 이사님. 제가 반드시 3개월 이내에 멤버분들을 일본어 능통자로 만들겠습니다.”
“믿고 있어요.”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한구인은 당장 언어교육학으로 전공을 전환하고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하리라.
한구인은 힘차게 연습실 문을 열었다.
“여러분, 일본어 수업 오리엔테이션이 있으니 강의실로……!”
충격적인 광경이 성필과 한구인의 앞에 펼쳐졌다.
“아름아아 제바아알……! 그거 올리면 안 돼애……!”
백설하가 무릎을 꿇고 신아름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 애원하고 있었다.
“쌤 빨리 인정해요! 나 놀리려고 그 개 혓바닥인지 뭔지 지어낸 거잖아요!”
“아, 아니야아! 성악가도 인정한 건데 내가 뭘 만들었단 거야아!”
“안 되겠네요 쌤. 내가 쌤보다 보컬에 관해 모르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사람을 놀리면 안 되죠.”
“놀린 거 아니라니까아…… 흑, 저, 정말이야 믿어죠…….”
“올릴게요.”
“안 돼! 제발, 제바알 부탁이야아……. 올리지 말아줘어……. 나, 나 그거 올라가면 시집 못 갈지도 몰라아…….”
“아직 데뷔 1년도 안 된 아이돌이면서 결혼을 생각해요? 더 괘씸하네요.”
“새, 생각은 할 수 있잖아……!”
백설하는 조금만 더 있으면 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