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매니지먼트 팀장으로 승격된 민경섭.
그는 새로 장만한 중고 밴 앞에서 병아리 두 명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죽어도 시간에 맞춰야 해. 그러니까 오늘은 방송국 스튜디오까지 최단 시간 내에 가는 훈련을 해보자. 중간에 절대 사고 내지 말고.”
“예!”
“넵!”
특이하게도 새로 들어온 로드매니저는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의 조합이었다.
일반적으로 매니저의 성비가 9:1인 것을 고려하면, 가로 엔터에 여자 로드매니저가 들어온 건 특이한 일이었다.
‘있으면 훨씬 좋죠. 저희 애들도 여자잖아요.’
그런 이유로, 민경섭은 여자 매니저가 생긴 것을 환영했다.
남자 로드매니저가 챙겨주기 힘든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게 가능하니까.
대표적으로 지금까지 손혜빈이 맡았던 숙소 관리나 남자가 떠올리기 힘든 사항 등이 있다.
“자, 출발!”
민경섭은 주요 방송국을 쭉 돌아보았다.
신입 로드매니저들은 신중하게 운전했다. 방어운전을 하면서도 빠르게 간다는 이율배반적인 과제이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지리는 익혔겠네.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민경섭은 그들과 대화하면서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쌓기 위함이었다.
인간적인 관계를 쌓아야, 나중에 힘들더라도 쉽게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
민경섭은 사석에서도 그들과 자주 만나서 친해진 다음, 가로 엔터로부터 벗어날 생각조차 불가능해질 정도로 가까워질 생각이었다.
‘로드매니저가 자주 일을 그만두곤 하잖아요. 저는 그거 별로예요. 뭔가, 매니저가 전문적인 직업으로 인식되지 않는 거 같잖아요.’
과거, 석세스 엔터에서 민경섭이 성필에게 했던 말이었다.
로드매니저의 경력이 이어지지 않는 건 매니저를 물건 다루듯이 쓰는 기획사의 탓도 컸다. 게다가 마땅한 비전도 없으니 매니저들도 미련 없이 자리를 터는 것이다.
‘가로 엔터는 안 그럴 거야.’
그러기 위해서, 민경섭은 신입 매니저들에게 실용적인 지혜와 동료로서의 애정, 그리고 소속감을 줄 심산이었다.
회사로 돌아온 민경섭은 그들은 매니저 대기실로 이끌었다.
“일이 없을 땐 여기 있으면 돼.”
가로 엔터의 비어 있는 수많은 사무실 중 하나. 그중 하나가 드디어 쓰임새를 찾았다.
“그리고 매니저가 예절이 정말 중요하거든. 이건 박 이사님이 전에 있던 회사에서 정리한 건데, 꼭 외워서 나중에 실례되는 일 없도록 하고.”
소책자에는 전화 예절, 호칭 예절, 소개말, 명함 교환, 접대법, 업무 과정과 처리, 서류의 양식 등등.
매우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옛날,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 있을 시절 도제식 매니저 육성에 질려버린 나머지 아예 책으로 매니저 업무를 집대성한 것이었다.
민경섭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행사 스케줄 관련 정보는 오늘 안에 꼭 외워. 오후에 직접 가볼 거니까.”
두 로드매니저는 그 말을 듣고 땀을 뻘뻘 흘리며 행사 스케줄 관련 내용을 암기하기 시작했다.
성필은 문틈으로 매니저실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잘하고 있네.’
* * *
홍보, 마케팅, 프로모션, 콘텐츠 팀을 합친 부서인 홍보팀.
그곳에 소속된 인원은 둘이었다.
아니, 손혜빈까지 합쳐서 셋이었다.
손혜빈은 무려 A&R팀장 겸 홍보팀 팀장이기도 했다. 성필과는 팀장 관련 업무를 분담하기에, 그녀의 업무량이 과도하지만은 않았다.
“강지혜입니다!”
첫 번째 직원은 막 대학을 졸업한 강지혜였다.
그녀는 막연히 기획사에 환상을 가지고 입사했다고 한다.
“여기 보도 자료 쓰는 법이에요. 활동 기간에 가장 많이 해야 할 일이 기자들한테 넘기는 자료 쓰는 걸 거예요. 또 마케팅 업체 같은 곳에도 이런 자료를 돌려야 하니까, 아예 양식을 몇 개 외우시는 편이 좋아요.”
“네, 팀장님!”
친절하게 강지혜를 가르치는 손혜빈.
그녀를 파티션 너머에서 지켜보는 A&R팀의 이재호는, 벌써부터 강지혜가 안쓰러웠다.
“지혜 씨. 홍보팀은 뭐다?”
“기획자입니다!”
“그래요. 지금은 다 잡무처럼 느껴지겠지만, 홍보도 결국은 기획이고 그 기획은 지혜 씨 머리에서 나올 수도 있어요. 항상 진취적인 마음가짐!”
“네, 팀장님!”
기합이 바짝 든 게 마치 병아리 같다.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준 손혜빈은 이재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호 씨, 물어보실 거 있으세요?”
“아, 아닙니다.”
“말 더듬지 말라고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이재호의 커다란 대답에 강지혜가 놀라서 그쪽을 보았다.
둘은 시선을 맞추고 어색하게 웃었다.
홍보팀의 일반 직원은 두 명이다.
한 명은 강지혜이고, 나머지 한 명도 신입이냐고 한다면, 아니었다.
그는 경력자였다.
그것도 대기업에서 근무했던 경력자.
* * *
“이 사람 ‘야자수’에서 근무했었네요?”
국민 메신저인 ‘야자수톡’으로 유명한 IT 회사였다. 또한 조아라가 사랑해마지않는 ‘야자수 프렌즈’로도 유명했다.
그의 이름은 양상헌.
‘야자수’에서 근무하다가 자회사인 콘텐츠 업체 ‘넘버원’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유배 같은 건 아니었다.
‘넘버원’이 만들어졌을 당시, 야자수는 콘텐츠 시장 확대를 목표로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었다.
양상헌은 그 전쟁의 첨병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콘텐츠 기획자…… 와 뭐야 이 사람!”
손혜빈이 깜짝 놀라며 성필의 어깨를 팍팍 쳤다.
“왜 때려 누나…….”
“이거 보라니까! 이 사람이 이거 만들었어!”
아이튜브 영상 콘텐츠인 ‘(100)1위’.
주요 음원 차트에 오르진 못했지만, 사람들에게 명곡으로 회자되는 것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가수를 불러서 인터뷰와 라이브를 진행하는 콘텐츠였다.
주목받지 못한 가수들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많은 시청자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덕분에 ‘넘버원’의 아이튜브 채널이 급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너무 대단해서 오히려 의심스럽네.”
“뭐가?”
“우리 회사 노하우 빼려는 거 아닐까?”
“누가. ‘야자수’가?”
“응.”
“아하하하하핳하흐핰!”
손혜빈이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 웃었다.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가라앉히고, 똥 씹은 표정의 성필에게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럼 이분이 우리 회사를 왜 와?”
“소녀연맹 좋아하시겠지.”
“고작 그걸로?”
“고작 그거?!”
손혜빈은 사무실을 뛰쳐나가 멤버들이 있는 연습실로 들어섰다.
“얘들아! 성필이가 너희들 보고 ‘고작’이래!”
“손나(그런)!”
리카가 당장에 성필을 찾아 응징했다.
그녀는 자동 안마기가 되어 성필의 등을 계속 두드렸던 것이다.
“빨리 타도 케이어스라고 외치세요!”
“케이어스 때문에 한 말 아니야…….”
“말 안 하시면 계속할 거예요!”
성필은 안마를 받으면서 회의를 이어갔다.
“우리 입장에서는 안 받으면 손해인 분이지. 면접 보러 오시라고 해야겠지?”
“성필이 너 왜 말투가 공손해졌어.”
“어, 어? 그러게.”
대기업이란 후광이 이렇게 무섭다.
“아타시(저) 팔 아파요…….”
“어쩐지 안마가 안 시원하더라니. 리카, 등 돌려봐. 답례로 나도 어깨 주물러줄게.”
성필이 어깨를 주물러주자 리카의 표정이 녹아내렸다.
“어, 어째서어…… 이렇게나…… 능숙한가요오……?”
성필이 손혜빈을 보았다.
손혜빈이 눈을 찡긋했다.
“그냥, 옛날에 누가 시켜서 많이 했거든…….”
* * *
면접 당일, 양상헌에게 물었다.
왜 가로 엔터에 지원했느냐.
“소녀연맹이 좋아서 지원했습니다. 저는 이전 회사에서 아이돌을 좋아해서 콘텐츠 기획 쪽으로 갔는데, 막상 가니까 생각이랑 달랐습니다.”
“…….”
손혜빈이 ‘이거 봐. 내 말 맞지?’란 뜻을 담아, 테이블 아래로 성필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 그렇구나.
“저, 양상헌 씨. 가로 엔터는 아직 영세한 곳입니다. 조직 분화가 완전하지 않아요. 그래서 원래 생각하신 업무랑 다른, 직접적으로 말해서 잡무를 맡게 될 수도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 실적 있는 사람, 학벌 좋은 사람.
물론 좋다.
하지만 그들에겐 문제점도 있다.
우월 의식이나 엘리트 의식도 있어, 잡무를 맡기면 ‘나한테 고작 이런 일을!’이라며 사기가 저하할 수도 있다.
회사에 분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충분하고 말이다. 아무리 양상헌이 뛰어난 사람이라지만, 현재 가로 엔터가 원하는 직원은…….
“알고 있습니다. 회사를 옮겨도 저는 신입이나 다름없는걸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솜씨 좋은 도공도 대장간으로 가면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인 법이죠. 거기까지 생각하고 지원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양상헌, 영입!
그렇다고 정말 잡무만 맡길 수는 없었다.
성필은 그가 출근한 날, 콘텐츠 쪽으로 아이디어를 받기로 했다.
“소녀연맹의 데뷔부터 지켜봤습니다. 아니, 데뷔 이전부터 보았습니다. 아이튜브와 SNS를 사전 홍보법으로 택한 건 탁월했습니다. 모두가 성공시킬 순 없는 방법이라도, 가로 엔터는 성공했으니까요. 대단하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혹시 아부하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양상헌은 성필이 SNS 프로모션을 주도했단 것을 몰랐다.
그러니 그의 말은 정말 순수한 칭찬이리라.
“특히, 가로 엔터의 홈페이지에 있는 타임라인 있잖습니까. 그게 대단합니다.”
멤버들의 입사(入社)부터 현재까지, 그녀들의 여정을 기록한 타임라인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읽는 사람은 마치 소녀연맹과 연습생 시절부터 함께 한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그 타임라인이 신규 팬을 소녀연맹의 팬덤에 정착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집니다. 가로 엔터의 홈페이지가 있단 것도 모르는 팬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죠. 보통은 아이튜브나 SNS만 확인할 테니까요.”
“맞습니다. 커뮤니티로 정보를 접한 사람이면 몰라도요. 그래서 계속 생각한 겁니다만, 다큐멘터리를 찍어서 아이튜브에 올리는 건 어떨까요.”
“……다큐멘터리요?”
“예. 타임라인에 올라온 글과 소녀연맹 멤버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적절한 영상까지. 이것들을 교차 편집하여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겁니다. 분량은 반드시 10분 이내로. 장기 제작 시리즈입니다. 홈페이지에 덩그러니 글만 올려두는 것보다 훨씬 접근성도 높을 겁니다.”
생각조차 못 해본 것이다.
소녀연맹의 타임라인, 연보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자니?
“생각해보니까, 다큐멘터리는 조금 무거운 단어네요. 그냥 예능 영상…… 그 정도로만 생각해주셔도 됩니다.”
“음, 괜찮은 생각이네요.”
이어서, 그는 이 프로젝트가 전문적인 다큐멘터리 스태프와 팀 전체를 쓸 필요도 없으니 제작비도 예상보다 훨씬 낮을 것이라 했다.
‘제작비가 낮다니.’
성필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확실히 양상헌은 본인의 주장을 전하면서도, 상대가 바라는 점을 콕콕 짚어주는 기술이 있었다.
폼으로 대기업에서 근무했던 게 아니다.
“그렇다고 아예 예산이 적은 건 아닙니다.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음…….”
“무엇보다, 이건 국내 팬과 동시에 해외 팬을 위한 거기도 합니다.”
“해외 팬이요?”
“예.”
소녀연맹의 다큐멘터리는 아이튜브에 올라갈 것이다.
또한 일본어와 영어 자막까지 입혀서.
“전 세계의 사람들도 소녀연맹의 성장을 체감하고 팬이 될 수 있도록요. 스토리는 무엇보다 강력한 프로모션이자 마케팅 수단이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소녀연맹의 퍼포먼스가 좋아서가 아니라, 소녀연맹 그 자체의 이야기가 좋아서. 단순한 소비자를 얻는 게 아니라, 팬을 얻을 수 있도록요.”
“상헌 씨!”
성필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가 당황하며 몸을 물렸다.
“적극 동감합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이사님…….”
양상헌의 말은, 과거 성필이 홍규헌에게 했던 청사진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었다.
“당장 기획안으로 만들어서 올려주세요!”
* * *
가로 엔터의 이사이자 최고 운영 책임자이자 경리이자 총무이자 때때로 로드매니저였던 한구인.
드디어 이사, 최고 운영 책임자, 재무팀장으로 직책이 삼원화되다!
후일에는 일원화(一元化)되는 날도 올 것이다. 아마도…….
아무튼 경리와 총무, 로드매니저 업무를 뗀 것만 해도, 그에게 쏠려 있던 과도한 업무 편중이 해결되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라고 말은 하지만, 한구인은 오히려 자신의 일이 적어졌음에 알 수 없는 실망감까지 느끼는 듯했다.
“총무까지는 제가 해도 되지 않습니까?”
아니, 실망감을 넘어 위기감도 느끼는 듯했다.
당연하게도 그의 요청은 묵살되었다.
“제, 제가 그래도 이사인데 의견 정도는 낼 수 있는 거 아니…….”
묵살되었다.
한구인은 어엿한 재무팀장이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권아인입니다!”
재무팀에는 직원이 한 명 들어왔다.
상업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20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한구인 이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넵!”
권아인은 그와 악수하면서 반쯤 넋이 나갔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잘생기고(맞다) 젊고(아니다) 돈도 많으며(어느 정도 맞다) 직급도 높은 사람이 자신의 상사가 된 것이다.
권아인이 다녔던 고등학교는 여고였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로맨스를 꿈꾸게 됐다.
특히 막 취업한 만큼, 드라마에서만 보던 오피스 로맨스에 대한 동경을 남모르게 간직하고 있었다.
한구인은 그녀를 사무실의 자리로 안내해주고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이게 전표입니다. 증빙 서류는 여기에…….”
권아인은 안심했다.
첫 출근이라 긴장을 잔뜩 했으나, 업무 내용 자체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배운 대로만 하면 문제가 없으리라.
결산하고, 세금 신고하고, 입출금 정리하고, 권아인이 3년 동안 공부해온 것 중에서도 기본이었다.
“파일은 전부 넘겨드리겠습니다.”
“네. 아, 여기 프로그램은 어떤 거 쓰나요?”
“예?”
“아, 아, 어, 어떤 거 씁니까?”
“말투 때문에 여쭌 게 아니라……. 프로그램이면 엑셀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얼만가요’나 ‘이지카운트’ 같은 경리 소프트웨어…….”
한구인의 표정에 당혹이 스쳤다. 그는 스마트폰을 열어 검색해보더니.
“죄송합니다. 제가 모르는 거군요. 배우겠습니다.”
“네?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만, 제가 그것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엑셀과 한글로 작업해주시…….”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 엑셀도 잘 써요! 엑셀로도 할 수 있어요! 당연히 엑셀로 해야죠!”
권아인은 한구인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업무에 들어갔다.
‘내가 총무 업무도 한댔으니까, 품목도 정리해서 둬야…….’
그녀는 능숙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다.
한구인이었다.
그가 낮은 파티션 너머로 권아인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시지? 내가 뭐 잘못하고 있나?’
아니면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으신…….
‘아냐! 아냐! 정신 차려!’
권아인은 자신도 모르게 귀가 달아오른 채로 업무를 이어갔다.
그때 갑자기 한구인이 벌떡 일어났다. 권아인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던 중, 한구인은 가만히 권아인의 뒤를 지나갔다.
‘나한테 일이 있으신 게 아니었구나.’
한구인은 홍규헌에게 일이 있었다.
그는 사장실로 가서 말했다.
“제 일이 너무 없는 것 같습니다. 권아인 경리님과 일을 맡아서 하면…….”
“그럼 권아인은 뭐 하는데?”
“맡아서 하면 빨리 끝나는…….”
“빨리 끝내고 뭐 하게. 걔랑 손잡고 데이트라도 하러 가게? 한 이사 할 거 많잖아. 예산 더 검토하던가, 박 이사랑 소녀연맹에 관해 대화나 나누거나, 전산망 상황판 관리하거나.”
“……박 이사님과 소녀연맹에 관한 대화는 몰라도, 다른 것은 전부 충분할 정도로 해뒀습니다. 사무실에 가만히 있으니 월급을 축내는 것 같습니다. 권아인 경리님과 업무를 분담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
홍규헌은 한구인을 쫓아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한구인은 아까보다 더 굳은 표정으로 권아인을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뭐 잘못했나?!’
퇴근 시각까지, 권아인은 긴장한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일했다.
* * *
“공연 도는 건 재밌지만요…….”
신아름이 한숨을 내뱉으며 소파에 누웠다.
“뭔가, 성취감이랄 게 없네요.”
소녀연맹은 행사 철에 맞춰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질리도록 춤추고 노래했다.
환호하는 사람들의 외침은 무엇보다도 강한 마약 같았지만, 모든 무대가 그렇진 않았다.
대표적으로 무슨 무슨 한우 축제를 갔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뚱한 눈빛으로 1열에서 쳐다보기만 했었다.
“아티스트가 아니라 그냥 댄서가 된 거 같달까…….”
“야 신아름. 너 댄서 무시하냐?”
조아라의 태클을 받은 신아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신아름의 말에 다들 어느 정도 공감하던 차였다.
앨범을 만들 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지만, 그래도 창조적인 일에 완전히 배제되어 행사만 도니 성취감이랄 게 없었다.
“위문공연은 진짜 재밌었는데.”
“그쵸? 쌤도 그렇죠? 또 가고 싶지 않아요?”
몇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함성을 어찌나 우렁차게 지르던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마저 뚫고 멤버들의 귀를 울렸었다.
“에에, 아타시(나)는 지금도 좋은데.”
리카는 별종이었다.
그녀는 관객석에서 한 명만 웃으면서 손뼉을 쳐줘도, 앙코르를 세 곡은 더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공연을 좋아했다.
“무대 하나하나가 돈이야! 빨리 빚 까야 해!”
돈 때문에 좋아하는 거였구나.
“모찌론(물론) 사람들의 미소가 가장 좋아!”
“갑자기 포장해도 아무도 안 믿거든.”
“진짜야!”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 조아라와 리카를 보며, 백설하는 내심 생각했다.
‘나도 지금이 편하긴 해.’
생각 없이, 아니.
이런 생각을 하면 직원분들에게도 실례겠지.
하지만, 실제로 백설하는 생각 없이 차를 타다가 무대에 오르는 이 삶이 싫지 않았다.
말 그대로, 생각이 필요 없었으니까.
‘연습도…… 안 하고…….’
일시적일 줄 알았던 노래 슬럼프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다.
백설하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아마도 벽에 부딪혔기 때문인 듯했다.
이미 어느 정도 올라와서, 올려다볼 곳이라곤 빛나는 업적을 쌓은 선배 가수들뿐이다.
자신이 그들처럼 된다는 게, 도저히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난 지금도 괜찮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어서 의욕이 나질 않는다.
지금 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처럼, 영원히 평온 속에서 지내고 싶…….
“쌤 전화요.”
“응?”
바닥에 내려둔 백설하의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다. 성필이다.
백설하는 빠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와, 신아름 너 쌤 목소리 바뀌는 거 들었냐?”
“평소보다 옥타브 하나는 더 올라갔는데?”
“리얼. 갑자기 목소리 비단처럼 간드러짐.”
“…….”
조아라외 신아름의 짓궂은 장난을 넘기고, 백설하가 다시 말했다.
“이사님?”
[어, 설하야. 지금 전화 돼?]
“네.”
[티비 방송 하나 들어왔었거든. 꽤 예전부터 들어왔던 건데, 너 어떤지 물어보려고.]
“……텔레비전이요? 방송이요?”
그 말에 거실에 있던 모든 이의 눈이 백설하에게 모였다.
백설하는 아까보다 더 공손해진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성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가 당황한 듯 말했다.
“에리카도…… 나와요……?”
케이어스의 에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