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관심이 없으, 십니까?”
“이사 되면 뭐가 좋아요?”
“좋다기보다는…….”
일단 돈을 더 많이 받는다.
책임을 지는 자리이면서, 회사의 전략에 본인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도 있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랬잖아요?”
“직원이 더 들어오고 조직이 개편되면 그렇지 않을 겁니다. 최종적인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사장님과 이사급일 테니까요.”
“아, 그래요? 부담되네.”
한구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돈을 벌고 즐거운 삶을 위해 회사를 다닌다곤 하지만, 그 즐거운 삶에 명예욕을 빼놓을 수는 없다.
분명 손혜빈도 가로 엔터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픈 욕망이 있을 것이다.
“손 PD님은 팀장이란 직급을 얻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왜 억울해요?”
“손 PD님은 소녀연맹이란 이름이 없을 시절부터 가로 엔터에서 일해오셨습니다.”
“경섭이는요?”
“그보다 더 빨리요. 연습생이 모이고 컨셉을 어떤 것으로 해야 할지 고민할 때부터, 손 PD님은 의견을 내오셨습니다. 현재 가로 엔터의 성공을 대변하는 개국공신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와, 한 이사님 말씀 엄청 잘하시네요. 듣는 사람이 다 부끄럽다.”
“예? 아, 그렇습니까…….”
손혜빈은 생각에 빠진 듯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옅게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우리 애들 미니 앨범 초동판매량 나왔을 때요. 21,000장 나왔던가. 그거 들었을 때 저 엄청 무서웠던 거 아세요?”
“손 PD님이 말입니까?”
“네. 미니 앨범의 대주제인 ‘사랑’은 제 의견이었잖아요. 기억나세요? 성필이가 처음에 반대했던 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성필은 데뷔 앨범의 컨셉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지음이가 곡을 잘 써줘서, 어쩌다 보니 성필이도 사랑이란 주제에 동의하긴 했어요. 그래도 따지고 보면 그 기원은 저한테 있으니까…….”
초동 21,000장이라고?
대체 왜?
음원 차트 20위권까지 뚫었잖아?
왜 고작 이거밖에 못 판 거지?
데뷔 때는 변변찮은 프로모션도 없이 10,000장이나 팔았잖아.
워터 멜론 차트에서는 1시간 만에 광탈했었고.
그런데 훨씬 나은 음원 성적을 거둔 이번 앨범에서는 고작 팬을 10,000명 밖에 못 끌어왔다고?
기존 팬이 이탈한 건가?
왜?
아, 설마, 컨셉 때문에……?
“진짜 사표 쓰고 도망갈까도 생각했어요. 도망가서 휴양지에 몇 달 정도 처박혀 있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니까요.”
손혜빈의 말은 도저히 겸손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손혜빈답지 않게 조금은 나약해진 태도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책임을 진다는 건 무서운 거죠. 알아요, 저도. 가수로 활동할 때 지겹도록 느꼈으니까요. 저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고, 아티스트였고, 그러기 위해선 저만의 철학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철학이 대중에게 통하지 않을 때 느꼈던 절망감은, 인생 전체에서 겪었던 절망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필이가 대단한 게, 걔는 확신이 가득하거든요. 설령 실패하더라도…….”
이건 다음 성장을 위한 발판이다.
이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다.
우린 다음에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애예요. 그냥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어요. 자기가 결정한 일에 대해선 어떤 두려움도, 후회도 없어요.”
손혜빈의 매니저였던 병아리 시절부터, 성필은 그래왔다.
“이사요? 제가 걔랑 동등한 선에 설 수 있단 생각은 안 들어요.”
“…….”
“사장님도, 한 이사님도 느끼셨겠지만요. 성필이는 비전이 있어요.”
사업에서든 삶에서든, 중요한 건 비전이다.
위기를 맞닥뜨려 해결하거나, 단기적으로 이익을 가져오는 것 따위.
태양처럼 빛나는 비전에 비하면 전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제가 메인 프로듀서였으면 뭘 생각했을까요? 와, 이번 앨범 좀 잘됐네. 다음 앨범도 힘내자. 행사도 많이 돌리자. 다음 앨범엔 행사 더 많이 돌려서 돈 더 많이 벌면 좋겠네. 굿즈도 만들자. 팬도 많을 테니까 꽤 팔리겠네…….”
그 정도밖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앨범을 만들어서 팔고, 행사 무대에 그룹을 세우고, 굿즈를 팔고…….
“저는 그 정도의 단기적인 시야밖에 없거든요. 근데 어제 성필이 말 떠올려보세요.”
해외 투어를 돌자!
“그리고 옛날에 했던 말을 떠올려도요…….”
소녀연맹의 목표는 당연히 최고의 아이돌이잖아!
“애들한테 했던 말들도.”
너희는 아티스트야.
“가슴이 뛰지 않아요? 이상적이고, 헛소리처럼 들려도, 걔 말에는 낭만이 있어요.”
그 낭만이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다.
“저는 성필이에 비하면 자격이 없죠.”
“…….”
한구인은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네, 사장님한테 말씀 잘해주세요.”
한구인이 떠난 응접실에서 손혜빈은 얼핏 미소를 띠었다.
‘이걸로 됐어.’
그저, 자신은 전문 분야를 살려서 성필을 서포트해주면 되는 것이다.
성필의 거대한 이상 앞에서, 자신의 현실적인 안목은 압정이나 장애물이 될 뿐이었다.
‘내가 무슨 이사야.’
손혜빈은 후련하게 응접실을 나섰다.
* * *
다음 날.
“……뭐요?”
“박 이사님이 그러셨습니다. 만약 최종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사장과 이사진이라면, 손 PD님도 꼭 필요하다고요.”
“성필이가요?”
“그렇습니다.”
“어제 제가 한 말 걔한테 해줬어요?”
한구인은 답 없이 핸드폰을 테이블에 두었다. 그로부터 녹음된 성필의 음성이 재생되었다.
[누나 엄청 도움 됐죠, 당연히. 디테일을 보는 눈이 남달라요. 특히 앨범 패키지 만들 때 느꼈는데요, 저 같았으면 그냥 종이 재질에 담아서 적당한 사진 인쇄했을 거거든요. 근데 데뷔 앨범 패키지 봐요. 개봉하면서부터 이펙트를 주잖아요. 감동이란 게 디테일부터 나오죠.]
“이거 무슨…….”
손혜빈의 질문에, 한구인이 ‘쉿’ 소리를 내며 조용하란 사인을 주었다.
[그리고 애들을 파악하는 것도요. 제가 항상 애들을 아티스트로 대하고, 애들의 의견을 듣는다 해도요. 저도 꼰대인지 생각이 막힌 부분이 있어요. 당연히 있죠. 미니 앨범도 그냥 데뷔 컨셉을 이어가자고 했는데, 그게 막힌 생각이나 다름없었죠. 근데 누나가 ‘사랑’이란 주제를 낸 거예요.]
팬의 외연을 확대할 시기라며, 손혜빈은 미니 앨범의 대주제를 사랑으로 잡았었다.
성필의 의견과는 정반대였다. 성필은 데뷔의 컨셉을 이어 팬덤을 다지자고 했으니까.
하지만 손혜빈은 비주얼 컨셉과 곡 컨셉을 나눠가면서까지, 끝끝내 ‘사랑’이란 주제를 지켜냈었다.
[데뷔 앨범 때도 해외에서 반응이 있었다곤 했지만요. 이번에 해외 팬덤이 형성될 수 있던 건 미니 앨범의 주제 덕이 큰 거 같아요. 사랑. 솔직히 말하면, 소녀연맹 멤버들이 계속 데뷔 때처럼 추상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사랑, 이런 주제도 해보고 싶었겠죠. 근데 누나가 없었으면…….]
성필은 눈가리개를 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직진하여 기어코 데뷔의 컨셉을 이어갔을 것이다.
후회는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성공과 같은 수준을 달성했을까?
[누나를 데려오자고 했을 때부터 말했지만, 프로듀싱에는 다른 시각이 필요해요. 이를테면 저랑 누나가 왼쪽 눈 오른쪽 눈이죠. 두 개가 있어야 사물이 정확하게 잡히는…….]
한구인은 녹음 파일 재생을 정지했다.
“어떻습니까.”
답이 없었다.
손혜빈은 붉어진 얼굴을 가려야만 했으니까.
* * *
“고생하셨습니다아…….”
저녁, 숙소 앞에 도착한 멤버들은 하나같이 지친 투로 민경섭에게 인사했다.
하루 동안 부산을 찍고 미친 듯이 광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 때문에 민경섭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도저히 피로가 숨겨지지 않았다.
“……아.”
그때 백설하가 뭔가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민경섭에게 물었다.
“저, 혹시 회사로 좀 갈 수 있을까요?”
“어. 나도 어차피 회사 가거든.”
“아타시(저)도 갈래요!”
“리카는 왜?”
“보드게임 두고 왔어요.”
그렇게 세 사람이서 회사로 향했다.
“설하는 회사에 왜 가?”
“커버곡 찍어서 올려야 해요.”
“벌써 일주일 지났어? 오늘은 피곤할 텐데 좀 쉬지.”
“아뇨, 팬들과의 약속이니까요.”
백설하는 매주 커버곡을 올리고 있다.
연습생인 시절부터 그러하였다.
비록 준비 시간이 일주일뿐이라 완벽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팬들에게는 호응이 좋았다.
아니, 팬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백설하의 커버곡을 좋아했다.
아예 백설하의 커버곡을 재생목록으로 저장해두고 그것만 듣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조회 수도 영상을 올릴 때마다 만 단위는 가볍게 올라가곤 했다.
“오늘 곡 여섯 개나 불렀잖아. 괜찮아?”
“괜찮아요. 쉬었으니까요.”
백설하는 모든 무대 공연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부른다.
돈을 받고 무대에 오르는 것이니, AR에 맞춰 입만 뻐끔거리고 싶진 않았다.
어느 가수가 말하길,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가수가 아니라 ‘립싱커’라고 했다.
백설하는 립싱커가 아니라 가수가 되고 싶었다.
라이브는 그만한 성취감도 있었다.
백설하가 보컬 실력을 보일 때마다, 소녀연맹의 곡을 모르는 사람들도 입을 쩍 벌리곤 했다.
백설하는 그것을 보는 게 좋았다.
하지만.
“쉬엄쉬엄해.”
“……네.”
피곤하다. 쉬고 싶다.
커버곡도 한 주 정도는 넘기고 싶다.
아니, 단순히 피곤해서 커버곡을 쉬고 싶은 게 아니었다.
요즘 백설하는 노래 부르는 게 질려갔다.
너무 많이 불러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기엔, 보컬 트레이너였을 때도 노래를 많이 불렀었다.
백설하는 답답했다.
이유도 없이 노래를 부르기가 싫고, 연습도 조금씩 지겨워지고…….
‘그만.’
배가 부른 소리다.
꿈에 그리던 아이돌이 되어 예전에는 꿈도 못 꾸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뭐? 노래를 부르기가 지겨워?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래, 슬럼프 같은 것이다.
곧 회복될 게 틀림없다.
“자, 도착했어.”
“감사합니다.”
“아리가토(고마워)!”
“리카, 나도 일본어 조금 알거든?”
“아리가토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
“이게 은근히 나랑 맞먹으려고 하네.”
민경섭이 장난스레 꼬집자 리카가 헤헤 웃었다. 그녀는 요즘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일본어를 주입하는 데 맛 들였다.
백설하와 리카는 회사로 들어왔다.
그리고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야야, 삐졌냐. 야야, 기분 나쁘냐. 야야, 우리 성필이 기분 나빠서 어떡해?”
손혜빈이 성필을 괴롭히고 있었다.
“아이구, 귀여워어.”
“머리 만지지 마. 나 애 아니라고.”
“그랬어요? 우리 성필이 애 아니에요?”
“나 옛날에 누나 매니저하던 박성필 아니라니까! 아니, 오늘따라 왜 이래!”
“귀여워 죽겠네.”
성필의 수호자인 리카가 즉시 손혜빈에게 달려갔다.
“이사님 괴롭히지 마세요!”
“리카도 성필이 머리 쓰다듬어볼래?”
“하이(네)!”
“…….”
성필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왠지 알 수 없지만, 오늘따라 손혜빈의 기분이 과하게 좋은 듯했다.
“근데 리카 너도 이러면 안 되지!”
성필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리카의 손목을 비틀었다.
“끼에에에엑!”
* * *
26살 이재호!
케이팝 학과를 졸업한 그는 절찬리에 구직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돌겠네.”
이재호는 종일 자신의 학과와 연관된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그다지 소득이 없었다.
케이팝 학과에서 댄스나 보컬, 뮤직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해 배웠다.
전공을 살려 기획사의 A&R 쪽으로 취직해보자고 생각했다.
‘원랜 아이돌이 되고 싶었지만…….’
애매하게 잘생긴 얼굴로는 어중간한 회사의 연습생으로밖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1학년 때 바로 포기!
학점도 잘 받고 토익도 700점을 넘겼으며 컴퓨터 관련 자격증도 몇 개 땄으나.
정작 졸업하니 막막한 현실에 부딪힐 뿐이었다.
“이런 새끼들이 제일 악질이야!”
A&R, 경력 1년+.
“이 망할 놈의 경력 1년 이상!”
도대체가 신입을 뽑으려는 곳이 없다.
이러면 사회초년생은 경력 1년을 어디서 쌓는단 말인가?
그나마 경력 6개월 이상이라고 적어둔 회사가 좋은 곳이었다. 그 6개월마저도 어떻게 쌓을지 감도 안 왔지만.
‘미치겠네. 3개월 넘게 집에서 컴퓨터만 보고 있…… 응?’
있다.
경력이 필요 없는 A&R.
“가로 엔터…….”
당장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소녀연맹 소속사구나!’
중소지만, 소녀연맹이면 인정이지.
이재호는 당장 가로 엔터에 지원했다.
얼마 후 서류 심사에 통과했다는 문자가 왔다.
부모님도 기뻐하며 정장까지 맞춰주었다.
“우리 아들 멋지네.”
“멋지기야 원래 멋졌잖아.”
“취업만 하면 더 멋지겠어.”
“…….”
이재호는 떨리는 마음으로 가로 엔터로 향했다. 1층으로 들어오니 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직접 대기 장소까지 안내해주었다.
이미 다섯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총 여섯 명. 내가 마지막인가?’
면접은 일대일이었다.
하나둘씩 대기실을 빠져나가고, 마침내 이재호의 차례가 왔다.
장소는 사장실이었다.
‘와, 뭐야.’
중앙의 사람이 사장인가?
엄청 젊어 보이는데.
혹시 연예인 하다가 회사라도 차린 걸까?
이 업계에는 그런 경우가 꽤 있었으니, 영 실없는 예상은 아니리라.
이재호는 자연스럽게 식은땀을 닦으며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이재호 씨?”
“그렇습니다!”
“작게 말해도 돼요.”
“아, 알겠습니다…….”
다행히 압박 면접은 아니었다.
음악 산업이 돌아가는 과정이나, 산업 전체의 역사에 관한 것이나, 본인이 바라보는 뮤직 비즈니스의 상태 같은.
조금 당황스러운 질문들이었으나, 충분히 기획사에서 나올 만한 것들이었다.
‘다른 면접자들은 더 적게 걸렸었는데, 나는 좀 오래 보네.’
면접은 꽤 시간이 걸려 벌써 30분이 지났다.
“마지막으로 질문드리겠습니다.”
사장의 옆에 앉은 남자, 아까 듣기로 박 이사란 사람이 질문했다.
“아이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이재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이돌이 뭐냐고?
아이돌…… 그냥 춤추고 노래하는 직업이잖은가.
하지만 이재호의 머리가 말하고 있었다.
절대 그딴 답은 내지 말라고.
“아이돌은…….”
새하얗게 변한 머리로, 이재호가 답했다.
“빛, 입니다.”
성필이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날, 이재호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쓰레기 새끼야! 아이돌이 빛은 뭔 놈의 빛이야아아아아! 뒤져! 뒤져! 이 등신아 그냥 뒤지라고오오오오!”
며칠 뒤.
“엄마 나 합격했어!”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다 장해!”
이재호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기획사 첫날 출근 복장을 물어보았다.
정장을 입고 가라고 한다.
입었다.
“흐흐흥.”
이재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부모님이 장만해주신 자동차(중고차 매장에서 300만 원에 삼)를 몰며 가로 엔터로 향했다.
회사 문 앞에 서서 심호흡한 뒤.
“안녕하십니까!”
1층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뻘쭘하게 계단을 올라 2층의 사무실로 향했다. 신입 사원을 위한 팻말 덕분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니.
“아, 안녕하십니까! 이재호입니다!”
몇 사람이 보였다.
그중에선 면접 때 얼굴을 보았던 두 사람, 성필과 한구인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이재호가 안심했다.
‘휴우, 정말 정장 입은 사람이 있네.’
인터넷 커뮤니티 사람들이 정장을 입으라기에 반신반의하면서 입고 오긴 했다.
하지만 가로 엔터로 오면서도 자꾸만 불안했던 그였다.
“이재호면…….”
“어, 누나 쪽.”
손혜빈이 이재호 쪽으로 다가왔다.
이재호는 깜짝 놀랐다.
왠지 얼굴이 익숙하더라니, 옛날에 가수로 활동했던 손혜빈이었던 것이다.
‘소, 소속 가수인가? 손혜빈도?’
손혜빈이 이재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재호 씨라고 불러도 되죠?”
“네, 넵!”
“손혜빈이에요. A&R팀장, 이면서 홍보팀장, 이면서 동시에 이사. 손 이사님…… 이란 말은 쬐끔 그러니까 손 팀장님이라고 불러요. 저쪽이 재호 씨 자리.”
“감사합니다!”
이재호는 본인의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재호 씨. 이직(移職) 안 할 거죠?”
“가, 가로 엔터에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고 뼈를 묻겠습니다!”
“아하하핳! 네네, 꼭 그래 주세요. 왜냐하면.”
손혜빈이 그의 앞에 엄청난 두께의 책을 내려놓았다.
“오늘부터 제가 재호 씨를 사람으로 만들어드릴 거니까요.”
“……예?”
“사람 만들어드렸는데 갑자기 도망가거나 하면, 평생 이 업계에서는 일 못 할 줄 아세요.”
이재호의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렸다.
평생 이 업계에 발을 못 들이게 한다는 건, 절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A&R의 첫 번째 업무, 섭외.”
손혜빈이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주소록이에요. 기획사. 연습실. 영상과 오디오 업체. 영상 제작업. 음반 제작업. 프로그램 제작사. 공급사. 유통사. 댄스 보컬 학원. 공연장. 무대. 섭외 대행사. 광고 대행사. 기타 등등 많아요. 여기 제가 주요한 장소는 다 표시해뒀거든요? 서울이랑 수도권 내로요.”
“예, 예.”
“전부 핸드폰에 저장해요.”
“예……?”
“그다음에는 장소를 외우고…… 외운다는 건 위치를 말하는 거예요. 만약 제가 재호 씨를 차에 태우고 어디 어디로 가라, 이러면 굳이 떠올리지 않고도 바로 액셀 밟을 정도여야 해요. 장소를 외우면 그곳이 뭘 하는 덴지도 외워요. 이 스튜디오는 어떤 장비가 있고, 어떤 게 강점이고, 스튜디오 스태프는 어떤 사람이 있고…….”
“예, 예?”
“재호 씨.”
손혜빈이 위압적으로 책을 덮었다. 이재호가 겁을 집어먹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까부터 ‘예, 예’만 반복하시는데. 말버릇이에요? 원래 그러세요?”
“고, 고치겠습니다!”
“말 더듬지 마세요.”
“고치겠습니다!”
“그래요. 아무튼 제가 말한 거, 전부 외워야 해요. 아시겠죠?”
이재호는 이 순간 이해했다.
어째서 A&R 모집은 전부 경력 1년 이상이었는지를…….
“가로 엔터로 온 걸 환영해요. 재호 씨 파이팅! 같이 정상으로 올라가요!”
자신의 앞에 놓인 두꺼운 책을 보며, 이재호는 울고 싶은 것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