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너 ‘롱 포’란 노래 들어봤냐?”
점심시간, 과장이 지나가듯이 던지는 말에 유용태가 깜짝 놀랐다.
“외근 갔다가 라디오에서 들었거든. 좋더라. 아이돌 노래들 시끄러워서 별로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취향이더라고.”
“아, 소녀연맹 거예요, 그거.”
“소녀, 뭐시기였던 거 같긴 한데. 유 사원도 알아?”
“네, 조금…….”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알지만, 아이돌 덕질한다는 사실은 밝히고 싶지 않았다.
“맞다. 과장님 대학생 때 인디 밴드 공연도 자주 가셨다면서요.”
“그랬지. 기타도 배웠었어.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뭔가 향수가 있어 그 곡에. 혹시 밴드 아이돌 같은 거야?”
“아뇨. 밴드는 아니에요.”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온 유용태는 급히 소녀연맹의 스케줄을 검색해보았다.
‘아, 이거구나. 점심의 신청곡.’
소녀연맹이 직접 나와서 라이브까지 했단 모양이다.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다.
‘다시 듣기 할 수는 없나?’
찾던 중, 유용태는 새삼스러운 감동에 사로잡혔다.
‘소련이들 라디오에도 나오는구나.’
데뷔 때는 텔레비전 예능은커녕 라디오에 얼굴도 못 비추었다.
그런데 이젠 라디오나마 나오는구나.
팬으로서 어깨가 으쓱인다.
‘이 기세로 티비에도 나왔으면 좋겠다.’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라디오 스태프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어우, 노래 너무 잘 불러요.”
“감사합니다!”
백설하가 대표로 진행자와 악수를 했다.
“말도 너무 잘하고. 다음에도 꼭 나와주세요. 아셨죠? 나중에 너무 크셨다고 안 나오시면…….”
백설하는 웃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으나, 마음은 딴 데로 가 있었다.
‘빨리 안 돌아가면 카메라 리허설 늦을 거야!’
10분 동안 그의 말을 들었다.
“내가 봤는데, 인성이 바르면 꼭 성공하더라고요. 여러분들은 딱 그 조건에 맞아요. 우리들의 연맹! 캐치프레이즈도 머릿속에 남고! 응원할게요.”
“네, 네, 감사합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스튜디오를 후다닥 빠져나갔다. 이미 입구에선 주차장에서 차를 빼 온 민경섭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꽉 잡아!”
좁은 차 안에 다섯 명이 자리했다.
민경섭이 현란하게 핸들을 꺾었다.
“부스터 쓰지 마세요옷!”
“부, 부딪친다! 피해, 피해요!”
조수석에 앉은 백설하는 두려움에 떨다가, 곧 생존본능이 발동했다.
기절한 것이다.
이 끔찍한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았다면, 뇌가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을 택했음이 틀림없다.
소녀연맹은 아슬아슬 시간에 맞춰서 방송국 앞에 도착했다.
장하양은 기절한 백설하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만져서 그녀를 깨웠다.
“언니. 다 왔어요.”
“어, 어디? 여기 천국이야?”
“지옥이요.”
“거짓마알……!”
“네, 거짓말이에요.”
다섯은 땀을 뻘뻘 흘리며 대기실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성필이 기겁했다.
“메이크업! 메이크업!”
마치 전쟁터에서 위생병을 부르는 듯했다.
메이크업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멤버들의 화장을 수정했다.
카메라 리허설은 완벽히 생방송 무대와 같은 조건으로 하는 것이기에, 의상과 메이크업까지 온전히 갖춰야만 한다.
성필은 초조하게 손톱을 씹었다.
“더 빨리 해주세요!”
“넵!”
메이크업 스태프의 이마에도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전쟁과 같은 메이크업을 마친 멤버들은 다시 뛰어서 무대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복도에서 마주치는 이들과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어, 조아라 씨. 커버 영상 잘 봤…….”
“안냐세요!”
조아라는 인사해오는 시에이스의 규영을 바람처럼 지나쳤다.
규영은 쓸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갔다. 춤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무대에 도착한 소녀연맹은 프로페셔널하게 리허설을 소화했다.
무대 모니터링을 하며 카메라 감독과도 의견을 나누었다.
이제는 제법 프로 아이돌인 티가 났다.
“이 부분은 저희 원래 무빙이랑 달라요.”
“그렇네요. 수정할게요.”
리허설을 마친 뒤, 멤버들은 잔뜩 지쳐서 대기실에 퍼질러졌다.
“라디오…… 불러주는 게 고맙긴 한데…….”
“아라야 그만해!”
백설하가 황급히 조아라의 말을 멈추었다.
“고맙다, 란 말에서 끝내.”
“아, 네…….”
라디오에서 불러주는 건, 소녀연맹 입장에서 고맙기만 한 일이다.
피곤하다니, 힘들다니, 그런 말을 할 단계는 아닌 것이다.
“아저씨. 왜 항상 음방 스케줄이랑 라디오 스케줄이 겹쳐요? 저번 주 수요일 거처럼 밤에 하는 걸로 잡으면 안 돼요?”
“음방 자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기하잖아. 겹칠 수밖에 없지.”
“그렇긴 하네요.”
“다들 많이 힘들어? 그럼 앞으로 라디오 안 잡을까?”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살짝 힘들 뿐이다.
오늘도 죽을 만큼 뛰어서 겨우 시간에 맞추지 않았던가.
하지만 라디오가 재밌단 것도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신아름. 나 오늘 좀 치지 않았음?”
“어, 쳤지. 청취자들 고막을 거의 때려 부쉈지.”
“……넌 뭐 얼마나 잘 불렀는데?”
“나야 항상 완벽하고.”
“…….”
인정해주고 싶진 않았으나, 신아름은 조아라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른다.
당연히 라이브도 그러하다.
춤을 소화하면서도 유리처럼 투명한 목소리를 내는 신아름이, 조아라는 항상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그건 리카나 백설하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로 쌓은 경험의 차이는 조아라가 넘어서기 힘들 정도였으니.
‘뭐, 각자 잘하는 게 있는 거지.’
조아라가 열등감을 가지진 않았다.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으니까.
“아니, 내 말은 노래 잘 불렀냐는 게 아니라. 드립 잘 쳤잖아.”
“어떤 거.”
“너 춤췄을…….”
“그게 뭔 드립이야! 걍 나 욕한 거지!”
라디오 진행자가 신아름에게 춤을 요구했고, 신아름은 성심성의껏 추었다.
그에 진행자가 조아라에게 어떠냐고 질문했었는데.
‘와아, 별론데요?’
진행자는 물론이고 시청자 실시간 채팅창에 웃음만이 도배되었다.
조아라와 신아름이 서로를 깎아내리는 건 이미 밈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아타시(나)도 잘했어!”
“리카는 그냥 웃음 제조기고.”
리카가 일본어를 쓸 때마다 왠진 모르겠지만 다들 웃었다.
처음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는 리카도 당황했다. 심지어 살짝 울기까지 하려고 했다.
그에 리카가.
“인종차별이얏!”
이라고 하자, 사람들이 더 웃었다.
리카의 발언이 드립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리카는 그 반응에 풀이 죽었으나 점차 익숙해져 갔다.
아예 본인이 외국인이란 점을 개그의 요소로 써먹은 것이었다.
“리카 씨, 정말 그거 몰라요?”
“그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 저는 외국인이라구요!”
“아까는 한국이 우리나라라면서요?”
“……아타시(나)는 외국인이에요!”
인지도가 낮은 라디오 방송임에도, 팬들이 리카의 파트만 따로 편집해서 아이튜브에 올릴 만큼 반응이 좋았다.
백설하는 팀의 리더로서 멤버들의 발언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진지한 질문에 감동적인 답들을 했다.
역시 리더! 라며 멤버들과 팬들이 추켜세워줄 정도였다.
“쌤 라디오에 하는 말들 미리 준비하는 거죠?”
“준비는 아니고…… 그냥 생각난 것들만 말했어.”
“재능? 역시 리더다.”
“아, 아니이…….”
멤버들이 화기애애하게 라디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 장하양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라디오에서처럼.
* * *
음방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온 뒤, 성필은 책꽂이 앞에 서 있는 장하양을 발견했다.
“하양아. 뭐 찾아?”
“아니요. 읽을 거 있나 보고 있었어요.”
“요즘 책 많이 읽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다 읽었어?”
“아니요.”
빌려준 지 1년도 넘은 것 같은데, 대체 언제 돌려줄지 모르겠다.
예전에 같이 한강에 갔을 때 듣기로는, 배드 엔딩을 보기 싫어서 끝까지 안 읽는다고 했었지.
그럴 거면 돌려줘도 괜찮을 텐데, 물어볼 때마다 끝까지 읽고 돌려준다고 답한다.
“그래, 천천히 읽어.”
“……저, 이사님. 혹시 말을 잘하는 데 도움 되는 책은 없을까요?”
“말?”
성필은 책꽂이를 둘러보다가, 한구인이 가져다 둔 책 하나를 골랐다.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기술, 쇼펜하우어 저.
“아뇨. 말싸움 말구요.”
“그러면?”
“조금, 말을 유머러스하게 할 수 있는 법이라거나.”
성필은 단숨에 장하양의 고민을 알아보았다.
“라디오 때문에 그래?”
“아하하…….”
장하양이 라디오에 출연하면 무엇을 하느냐.
일단 활기찬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무언가 말이 나올 때마다 아하하 웃는다.
리액션도 잘해준다.
오오, 와아, 하하.
그리고 가끔 타이밍을 보는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입을 뻐끔대다가,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장하양은 웃음과 박수 기계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본인도 그것을 걱정하는 듯했다.
“항상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서요.”
“속상하겠다.”
“아뇨, 이사님이 더 힘드시겠죠. 이사님이 잡아주신 기회인데…….”
성필은 장하양을 휴게실로 데려가 차를 타 주었다.
“하양아. 신인들은 방송 나갈 때 막연하게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곤 해. 너도 그러지?”
“네.”
“물론 그런 애들은 열심히 하지. 열심히 리액션하고, 박수치고, 웃고.”
“…….”
“그러니까 그냥 ‘열심히 한다’는 생각보다는, ‘한 번은 웃기고 온다’라고 생각하는 게 나아. 딱 한 번만 터뜨리겠다. 그런 마음가짐이 더 좋을 거야.”
“한 번만……. 그런데, 설하 언니랑 애들은 다들 말을 너무 잘해서…….”
“한 번도 대단한 거지.”
장하양은 아까보다는 나아진 듯했으나, 여전히 고민 속에 빠져 있었다.
성필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크게 신경 쓰지 마. 사람이 모든 걸 잘할 수는 없잖아.”
“그렇죠. 제가 잘하는 게 없긴 하죠…….”
“아니 아니 아니! 네가 잘하는 게 없단 뜻이 아니라!”
“농담이었어요.”
장하양이 장난스런 미소를 보였다.
성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나한테 하는 거 반의반만 해도 분량은 떼놓은 당상이겠다.”
“아하하, 그러게요. 이사님이랑 말할 때는 편한데, 라디오 가서는 잘 안 돼요.”
“토크도 연습이 필요하지. 무대처럼.”
많은 아이돌이 ‘이 정도면 무대에서도 실수 안 해’라고 자신할 정도까지 연습한다.
하지만 무대는 전혀 다르다.
연습할 때 수많은 사람의 앞에서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수십 명의 스태프 앞에서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신인들의 실수는 게으름이나 연습 부족이 아니라 긴장감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기에 연습은 ‘이 정도면 됐다’는 수준보다 몇 배는 더 많이 해야만 한다.
‘그거 때문에, 데뷔 전에 애들한테 버스킹을 시킨 거였지.’
조금이나마 무대의 기분을 체험시키기 위해서.
하지만 방송에서의 토크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장하양의 고민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떻게 연습하면 좋을까요.”
“음, 일단…….”
“이사님이랑 10시간 동안 독방에서 대화만 나눌까요?”
“무슨 연습인데 그게?”
“대화 연습이요. 싫으세요?”
장하양과 독방에서 10시간이라.
“나야 네 얼굴만 봐도 재밌게 10시간 보내겠지만 넌 아니잖아. 괴로울걸.”
“아하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굳이 웃기는 데 신경 쓰지 말란 거야. 사람의 강점은 저마다 다르잖아. 네 본연의 모습을 보여줘. 팬들도 그걸 바랄 거야.”
“그럼, 이사님은 제가 분량을 못 따도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아. 너는 너인 채로 있어. 부담가지지 말고.”
장하양은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가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라고 말은 했다만.
장하양은 여전히 걱정이었다.
‘이사님은 나인 채로 있으라고 하셨지만, 나인 채로 있으면 재미가 없는데……. 인터넷에 유머 모음집이라도 찾아서 볼까. 그리고 언니랑 애들한테 연습 삼아서…….’
숙소로 돌아온 그녀는 텔레비전 앞에 놓인 플레이스테이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성필에게서 받았던 블루레이 디스크가 여러 장 있었다.
“언니 또 뮤지컬 보게요?”
조아라가 장하양의 옆에 앉아 블루레이 케이스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아니. 그냥 보고 있었어.”
“……언니.”
“응?”
“그냥 물어보는 건데요. 그, 이거 플레이스테이션 받아올 때요. 아저씨 집에 갔었잖아요. 뭐냐, 블루레이 보러요.”
“응.”
“뭐 했어요?”
“뭐 했냐니?”
장하양의 순진무구한 물음에, 조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순간, 장하양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지금이다.
지금이 유머를 터뜨릴 순간이다!
동물적인 감각을 따라, 장하양이 말했다.
“아, 맞다. 이사님이 내 가슴 만졌어.”
“네?!”
조아라가 기겁하면서 장하양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다, 당한 거예요? 아저씨한테?!”
“손나 바카나(그런 바보 같은)!”
리카가 조아라의 옆에 꼭 달라붙었다.
왜 장하양이 아니라 조아라에게 붙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그건, 그건 진짜 성추행이잖아요!”
“아하하.”
“웃음이 나와요?! 심각, 한, 거잖아요…….”
“응. 종아리로 만지셨어.”
“……네?”
“어…… 안 웃겨? 농담한 거였는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이지?
종아리로 가슴을 만진 건 대체 뭔 말이고?
“이렇게요?”
리카가 다리를 뻗어, 종아리로 조아라의 가슴 부근을 슥슥 쓸었다.
“아악! 쥐 났어요오!”
쥐 나서 구르는 리카를 뒤로한 채, 조아라가 진지하게 물었다.
“뭐, 진짜 뭐예요. 아저씨가 진짜 만진 거예요?”
‘설명해야 하는 개그는 개그가 아니다’라는 오래된 격언이 장하양의 머리를 스쳤다.
장하양은 또 농담에 실패했음을 깨닫고 조금 우울해져선, 설명을 시작했다.
* * *
장하양은 이전에도 성필의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아니’의 녹음 날, 그가 몸살에 걸렸을 때였다.
다 같이 성필에게 병문안을 왔었으나, 그는 자는 중이었다.
숙소로 돌아가지 않겠단 리카와, 성필의 간호를 쭉 하고 있던 홍규헌만을 남긴 채 다들 집을 나갔었다.
그때 이후로 처음 온 성필의 집은.
“편하게 있어. ‘내 집이다’ 생각하고.”
소녀연맹의 브로마이드로 도배되어 있었다.
벽면에는 책장에 자리를 얻지 못한 앨범 패키지들이 스톤헨지 모양으로 탑을 이룬 채였다.
“아, 저거. 어제 패키지 가지고 놀다가 정리를 못 했네.”
성필은 소녀연맹의 데뷔 앨범들을 소중하게 정리해두었다.
그중엔 다른 아이돌 그룹의 앨범들도 있었다. 소녀연맹 외에는 케이어스의 앨범이 가장 많았다.
장하양은 얌전히 바닥에 앉았다.
“하양아, 그냥 편하게 앉아. 무릎 안 꿇어도 돼.”
“이사님. 저희 앨범 24장 사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몇 개가 없는데요.”
“지인들한테 선물로 몇 장 줬어. 구성품만 빼두고. 나 혼자 수십 장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순 없잖아.”
“파셨…… 다고요……?”
“아니! 정말 선물로 줬다고. 영업 같은 거지. 파는 건 양심 찔려서 절대 못 하고…….”
성필은 간식과 음료를 테이블에 두고 의자를 방 중앙으로 가져왔다.
“와. 티비가 엄청 크네요.”
“응. 돈 좀 썼지.”
거의 벽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듯했다.
“이게 블루레이 플레이어야.”
성필은 장하양이 가져온 디스크를 그 안에 넣었다. 그러자 놀랄 만큼 깨끗한 화질로 뮤지컬이 재생되었다.
“아, 미안. 실수로 크레딧 틀었네. 이거 누르면 뒤로 돌아오고, 자. 이렇게 틀면 돼.”
성필과 장하양은 어두운 방 안에서 얌전히 뮤지컬을 감상했다.
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장하양은 뮤지컬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꾸만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다.
특히 성필의 침대 위 천장이었다.
어떻게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장에도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다.
‘브로마이드 순서가…….’
신아름, 조아라, 리카, 백설하, 장하양.
일자로 늘어선 브로마이드의 순서에서, 리카가 중앙이었다.
성필이 침대에 눕는다면 리카가 바로 눈에 들어올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나?’
장하양은 생각을 이어갔다. 하지만 곧 눈을 감고 진정한 후, 다시 뮤지컬에 집중했다.
안타깝게도, 또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갔다.
성필이었다.
‘재미없으신가?’
성필은 무표정으로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장하양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휴일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그에게 재미없는 시간을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그만 보자고…… 할까……?’
성필에게서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으니 미안함만 늘어났다.
장하양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시간이 지나 뮤지컬은 피날레에 이르렀다.
‘어?’
장하양은 깜짝 놀랐다.
성필이 무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던 것이다. 얼마나 집중한 것인지, 그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했다.
그의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가 턱에 맺혔다.
뮤지컬이 끝나고서야, 그는 겨우 눈물을 닦곤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네. 오랜만에 봐도 또 재밌어.”
“재밌으셨어요?”
“응. 몰입하고 봤네.”
성필은 몰입할 때 그런 표정이구나.
“넌 재미 없었어?”
“아, 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고양이 분장을 한 사람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자기가 무슨무슨캣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만 기억에 남는다.
“네, 재밌었어요.”
“다행이다. 시간 꽤 지났네. 밥이라도 먹을까?”
“그래도 괜찮아요?”
“너만 좋으면.”
둘은 배달시켜 먹었다.
정리를 마치고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성필이 말했다.
“숙소 데려다줄…….”
장하양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있는 것들을 빠르게 살피던 장하양은 눈에 띄는 것을 하나 집었다.
“이거 재밌어요?”
보이그룹 WTP의 콘서트 블루레이다.
“나야 재밌지. 그런데 너 WTP 노래들 알아? 콘서트는 곡 모르고 보면 별로 재미없어.”
“네, 몇 개 알아요.”
“보고 싶어?”
“네.”
봤다.
2시간이 넘는 분량이었다.
확실히 성필의 말마따나, 노래를 알지 못하고 콘서트를 보니 재미가 반감되었다.
가사 자막도 없어서, 그들이 어떤 가사를 노래하나 계속 집중해야만 했다.
WTP 멤버들이 손을 흔들며 무대 뒤로 퇴장하는 것으로 콘서트도 막을 내렸다.
“이, 이사님?”
성필이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하하 웃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이건 봐도 봐도 감동적이네.”
콘서트가 감동적인가……?
그야 팬들이 보면 감동적이겠지. 그럼 성필도 WTP의 팬인 걸까?
미안한 말이지만, 장하양은 그의 감성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 너무 오래됐네. 이제 가야지?”
“아하하, 네. 그러게요. 오래됐네요.”
장하양은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현관에 서 있던 중, 갑자기 신발을 벗고 다시 들어왔다.
“뭐 안 가져갔어?”
“이사님. 침대 위에 저 브로마이드요. 순서에 의미가 있나요?”
“뭐가?”
“리카가 중앙이잖아요.”
“어…… 딱히? 생각 안 하고 붙였어.”
“오각형으로 붙이는 게 좋아 보여요.”
“굳이?”
“그게 균형이 맞잖아요.”
“뭘 또 그래. 그냥…….”
장하양이 천장 사진을 찍고 멤버들 단톡방에 전송하려고 했다.
“알겠어 알겠어! 다시 붙일게!”
성필은 침대 위로 올라가서 브로마이드를 한 장 한 장 떼어내기 시작했다.
찢어지지 않게 떼기 위해 조심스러웠다.
장하양은 성필의 밑에서 브로마이드를 한 장씩 받아 소중히 침대 위에 두었다.
“이제 하나씩 줘.”
“네.”
장하양은 자신의 브로마이드부터 주었다.
성필은 테이프를 입에 물고, 조금씩 테이프를 뜯어내어 천장에 브로마이드를 하나씩 붙였다.
장하양은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브로마이드를 넘겼다.
끝으로는 리카의 브로마이드를 주었다.
마지막 브로마이드를 붙이려 할 때, 갑자기 성필의 다리가 휘청였다.
“이사님!”
장하양이 성필의 다리를 꽉 안았다.
“괜찮으…….”
“놔! 놔!”
“네, 네?”
“놓으라고! 내 종아리 만지지 마!”
“아, 네…….”
장하양이 뻘쭘하게 그의 다리를 놓았다.
성필은 황급히 균형을 잡은 뒤, 재빨리 브로마이드를 붙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
“……갈까, 이제?”
“……네.”
성필은 장하양을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도중, 성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양아, 아까는 내가 좀 당황했어서 그래.”
“네.”
“네가 내 몸에 닿는 게 싫단 건 아니고…….”
“알아요.”
“응.”
“…….”
“정말로…….”
“안다니까요.”
숙소에 도착하고, 성필은 차에서 내려 장하양을 배웅했다.
“잘 가.”
“네, 이사님. 오늘 재밌었어요.”
“그랬다니 다행이네.”
장하양은 할 말이 있는지 머리칼을 꼬며 뜸을 들였다.
“또, 그리고, 다음에도 가도 되죠? 블루레이 보려면…….”
“아, 맞다. 잊어버릴 뻔했네. 이제 안 그래도 돼.”
“……네?”
성필은 차 트렁크에서 박스를 하나 꺼내어 장하양에게 주었다.
“이거 원래는 게임기인데 블루레이 재생도 되거든. 이제 숙소에서 봐도 돼.”
“…….”
“아이돌 콘서트 블루레이도 몇 개 더 넣었어. 참고가 될 거야.”
“……아하하, 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 * *
“언니는 농담 같은 거 하지 마요!”
“아하하…….”
조아라가 화난 기색으로 말하자 장하양은 기가 죽었다.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응. 이사님은 안 그러시지. 내 가슴으로 이사님 종아리를 만진 거야.”
“농담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하하.”
장하양, 농담 통제!
“손나(그런)!”
리카는 충격받아서 성필에게 전화했다.
“이사님! 아타시(나)의 브로마이드가 천장 중앙에 있다면서요! 절대 안 옮긴다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네 브로마이드 중앙에 붙어 있다니까.]
“거짓말 마세요! 하양 언니가 다 말해줬어요!”
[쿳소(젠장)……!]
“이사님이 일본어만 하시면 제가 헤헤 웃고 좋아할 줄 아시는 거예요?! 친구 계약서에서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위약금 내세요!”
위약금은 외식 1회권이었다.
돈은 성필이 낸다.
그로부터 며칠 뒤, 소녀연맹은 다시 홍보를 위한 라디오에 나오게 됐다.
장하양은 다짐했다.
‘한 번은 웃기고 오자!’
하지만, 힘들었다.
도저히 대화의 틈에 끼어들거나 재미있는 드립을 칠 수가 없었다.
진행자도 그런 장하양의 분위기를 읽고, 그녀에게 분량을 주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박성필 이사님이란 분이 프로듀서시네요. 모두에게 은인 같으신 분이고. 최근에도 KS 엔터의 정호환 프로듀서가 세쿠시 챌린지에서 언급했었죠. 팬들의 궁금증이 많은데요. 하양이는 박성필 이사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하양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 질문을 잡아챘다.
“아, 네. 그게, 좋은 분이에요.”
실패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진행자는 그저 차례를 넘겼으리라.
하지만 그는 재치 있게 질문을 이어갔다.
“박성필 이사님이 본인의 이상형이다. 하나, 둘, 셋!”
장하양은 당황했다.
하지만 표정과 입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이런 질문을 언젠간 받으리라고 항상 생각해왔기에, 그에 따른 대책은 준비되어 있었다.
“어우, 아니, 절대…….”
그때, 장하양은 본인을 찍는 카메라와 그 화면을 보았다.
이곳은 그냥 라디오가 아니라 ‘보이는 라디오’였다. 이 화면이 전국에 생중계된다.
그리고 그 화면에 비친 건, 정말 질색이라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린 자신이었다.
“……아니, 아니, 네, 맞아요.”
장하양이 일그러뜨렸던 얼굴을 펴고 손하트를 만들었다.
“이사님 최고!”
그날, 장하양 움짤이 커뮤니티를 돌아다녔다.
[제목: 사회생활 레벨업 중인 아이돌]
[박성필 이사님이 본인의 이상형이다. 하나, 둘, 셋!]
[오우, 아니, 절대…… 아니, 아니, 네, 맞아요. 이사님 최고!]
일그러뜨린 표정이 즉시 펴지는 게 백미였다.
[하양아…… 사회생활 더 배워라…….]
[돌아가서 이사님한테 사과했을 듯 ㅋㅋㅋㅋ]
[하양이 표정 바뀌는 거 리얼 웃음벨 ㅋㅋㅋㅋ]
순간적인 애드리브가 의외의 반응을 얻는 것을 보며, 장하양은 당황했다.
정말 웃기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사람의 강점은 저마다 다르잖아. 네 본연의 모습을 보여줘. 팬들도 그걸 바랄 거야.’
성필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맞아, 굳이 부담감 가지지 말자.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나인 그대로 있으면 돼.’
분량을 따지 못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그 움짤은 가로 엔터 공식 SNS 채널에도 올라왔기에 성필도 볼 수 있었다.
“……누나.”
“응?”
“내가, 내가 이상형이냐는 말 들으면, 저렇게 찌푸릴 정도로, 내가, 별로야?”
“뭐래. 너 괜찮아.”
“하하, 음, 그렇지?”
“하양이는 그렇게 안 생각하는 거 같지만.”
“…….”
우울하다.
* * *
“여러분, 컴백하고 4주가 지났네요.”
회의실에서, 성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앨범은 약 58,000장이 팔렸어요. 앨범 매출이 12억 정도고, 마진은 3억이네요. 그 3억에서 제작비를 제하면…….”
성필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순익이 났어요! 아주 조금뿐이지만 그래도 순익이 났다고요! 드디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까지 가는 단계로 진입했어요!”
환호가 회의실을 휩쓸었다. 홍규헌은 회의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춤까지 추었다.
손혜빈도 질 수 없다면서 왕년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민경섭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사방팔방 던지면서 기쁨의 고함을 내질렀다.
“그, 그거 다음에 발표할 재무 자료입니다!”
한구인의 절규는 환희에 묻혀서 들리지도 않았다.
정지음은 자꾸만 ‘호우!’를 연발하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치면서 허리를 튕겼다. 그의 저질댄스를 보고 손혜빈이 웃다가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뮤비 조회 수는 3,000만 회 돌파!”
그리고 다음에 할 말은 더 기쁘다.
“워터 멜론 히트24 차트 10위권 내 입성!”
히트24 차트는 24시간 동안 1인당 스트리밍 횟수를 딱 1번만 계산한다.
그러니 많은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도 진입하기 힘들다. 팬들이 아무리 많이 스트리밍해도, 고작 1번만 스트리밍 횟수로 잡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히트24 차트는 팬이 아닌 대중이 들어야만 이름을 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 소녀연맹이 들어갔다는 건!
“활동 2주 더 했으면 음방 1위 했을 수도 있는데에에에에에!”
임직원들은 기쁨에서 헤어나와 한탄과 비명을 질러댔다.
“괜히 공연 다닐 거라고 활동 4주만 잡아서어어어!”
“박성필 프로듀서 사임하라!
“하야하라! 하야하라!”
어떤 음방이든 1위를 하게 된다면 행사 페이가 몇 배나 상승한다.
“다들 몰랐잖아! 몰랐잖아! 음원이 이렇게 뜰 줄은 몰랐잖아!”
“형……?”
정지음이 공포에 질려서 말했다.
“저를…… 안…… 믿었어요? 이렇게 뜰 줄은…… 몰랐다고요……?”
“…….”
아무튼, 컴백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건 맞다.
홍규헌은 정지음을 달래면서 모두를 자리에 앉혔다.
원래부터 자리에 앉아 있던 한구인은 나라 잃은 표정이었다.
아까 손혜빈과 민경섭이 재무 정리 자료를 전부 폭죽처럼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24 차트 들어도 음방 1위는 모르는 거잖아. 메인 차트를 못 뚫었으니까. 가능성만 있었어 가능성만. 너무 박 이사 탓하지 마.”
“사프유착 해명하라!”
“사장과 프로듀서가 유착 관계란 게 사실입니까? 혹시 밀월 관계입니까?”
“이제 진지한 얘기 할 거니까 돌아와.”
“네.”
“넵.”
민경섭과 손혜빈이 입을 꾹 닫았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주로 컴백에서 얻은 성과 발표회 같은 것이었다.
“오케이, 마지막으로 박 이사랑 민 매니저.”
“예.”
“이제 애들 행사 보내자. 행사 스케줄표 짜. 무슨 뜻인지 알지?”
당연!
“돈 벌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