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61화 (161/760)

161화

동토의 땅, 러시아.

그곳엔 로자라는 이름의 소녀가 살고 있었다. 아니, 이제 소녀가 아니다.

올해부터는 20살!

성인으로서 대학에도 입학했고 동아리 활동도 하며, 멋진 청춘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 로자에게는 취미가 있었으니.

‘소녀연맹 떴다!’

로자는 소녀연맹의 신곡인 ‘롱 포’가 발매되자마자 아이튜브에서 뮤비를 감상했다.

역시 이번에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퍼포먼스 비디오도 따로 내줬구나.’

로자는 고등학교 때는 케이팝 댄스 동아리였다. 졸업 공연에서는 소녀연맹의 ‘아니’와 케이어스의 ‘카오스’를 추기도 했었다.

대학에서는 춤과 연이 없이 살고 있었으나, 소녀연맹의 새로운 뮤비를 보니 또 열정이 생겼다.

‘연습해서 커버 댄스 영상 올려야지!’

로자는 뮤비를 몇 번이나 돌려보고, 곡을 수십 번씩 재생하면서 행복에 젖어갔다.

다만 그녀가 아쉬워하는 점은, 음원 사이트에 소녀연맹의 곡이 없는 것이다.

‘데뷔 때도 그렇고 음원으론 안 올라오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지도 높고 사용자가 많은 음원 프로그램은 애플튠즈나 스포티파잉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덕분에 한국의 아티스트들도, 해외 유통사와 연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 않고서야 그러한 음원 어플에 소홀하기 마련이었다.

음원 시장에서만큼은 한국이 갈라파고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음원 파일을 다운받으면…….’

항상 핸드폰엔 넣고 ‘롱 포’를 듣고 싶은 로자였기에, 일순 불법적인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안 돼! 애들한테 미안하잖아.’

간신히 유혹을 뿌리쳤다.

결국 써본 적도 없던 ‘아이튜브 뮤직’을 결제해서 재생목록에 넣는 수밖에 없었다.

로자의 관심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롱 포’가 담긴 앨범인 ‘Girls’ Craving’을 구매하기 위해 음반 판매 사이트를 전전했다.

“비싸다…….”

아르바이트로 먹고사는 대학생이 구매하기엔 가격이 꽤 있었다.

러시아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 차이는 3배가량이다. 정확하진 않더라도, 로자가 느끼는 가격 체감은 한국의 3배인 것이다.

가격이 높인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음, 이 사이트가 약간 더 싼데. 배송까지 시간이 좀 걸리네…….”

소녀연맹의 음반이 해외로 정식 유통되지 않고 있기에, 여러 업자가 한국에서 음반을 사 오고 있었다.

바다를 건너 도착한 음반은 기존 가격보다 더 비싼 값으로 팔렸다.

이 때문에 로자가 느끼는 앨범의 체감 가격은, 한국 사람의 체감보다 훨씬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로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결제’ 버튼을 눌렀다. 거의 일이 주 동안 외식도, 카페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소녀연맹의 앨범을 가질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비록 초회판은 다 팔려서 없지만…….’

큰 결정을 내린 뒤, 로자는 소녀연맹의 데뷔 앨범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벽에는 조아라의 브로마이드도 붙어 있었다.

연단에 서서 혁명을 부르짖는 조아라. 그 밑으로는 행복과 미소로 가득 찬 인민들이 있었다.

로자는 조아라의 브로마이드를 보며, 사진 속의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앨범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

“어?”

자주 쓰는 SNS에서, 예전부터 팔로우해 두고 있던 사람이 글을 올렸다.

그의 이름은 ‘플레하노브’였다.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소녀연맹 컴백 기념으로 하루 동안 소녀연맹을 주제로 카페를 꾸며둔다는 모양이다.

일종의 팬 이벤트였다.

앨범 구매 인증을 한 사람에게는 조각 케이크가 무료라는 글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깝잖아!’

오후 2시에는 팬들 간의 이벤트 같은 것도 연다고 한다.

로자는 시간에 맞춰 꼭 가겠다는 댓글을 달았다. 플레하노브는 부담 갖지 말고 꼭 와서 즐겨주셨으면 좋겠다며 젠틀한 답글을 달아주었다.

‘팬 행사는 처음이네.’

소녀연맹 테마로 꾸며진 카페…….

현실의 팬들과 만나서 맛있는 커피와 케익을 즐기며, 우리 귀여운 소녀연맹 애들에 대한 토크를 나누는 건가…….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며칠 뒤, 로자는 소녀연맹의 앨범을 택배로 받았다.

‘제발 기스 없길!’

구매 후기를 보니, 바다를 건너와서 그런지 패키지가 구겨진 게 몇 개 있었다.

다행히 로자에게 온 앨범 패키지는 멀쩡했다.

그녀는 패키지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개봉했다. 포토 카드, 포스트 카드, 사진집, 아무튼 많은 사진 종류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옷들 예쁘다. 다 소녀연맹한테 너무 잘 어울려.’

로자는 언박싱 하다 말고 ‘케이팝 클로즈’라는 사이트에 접속했다.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무대나 일상에서 입던 옷을 파는 곳이었다.

소녀연맹 카테고리도 있었으나, 아직 인지도가 부족해서 상품이 많지는 않았다.

로자는 아쉬움을 삼키고 나머지 구성품을 살폈다.

‘이것들은 뭘까?’

한국어로 적힌 응모권과 멤버 손편지였다.

로자가 그토록 좋아하는 조아라의 손편지였으나,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읽지도 못했다.

로자는 CD를 케이스에서 꺼내 플레이어에 넣었다. 그리고 앨범 구성품인 사진집을 보았다.

사진집의 초반부에는 트랙 리스트와 곡별 가사가 적혀 있었다.

곡 제목들에 영어 병기(倂記)가 되어 있어 로자도 읽을 수 있었다.

‘1번 트랙 제목은 플레이리스트. 리카 개인곡이고.’

이미 아이튜브에 들어봤지만, 도대체 무슨 감성인지 모르겠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사운드인가?

로자의 취향은 아니었다.

‘2번 트랙은 하양이 개인곡, 에피타프. 3번째 트랙은 아라 개인곡, 댄스 위드 미. 4번째는 타이틀인 롱 포. 마지막은…….’

팅글.

타이틀곡인 ‘롱 포’와 함께 앨범의 투톱이나 마찬가지다.

로자는 ‘롱 포’도 좋았으나, ‘팅글’ 특유의 밝고 설레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아름이랑 설하는 개인곡이 없네. 다음에 나올까?’

약간의 의문도 생겼지만, 어쨌거나.

‘이번 앨범도 너무 좋아.’

빨리 이 설렘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SNS에서 덕질하는 것도 좋았지만, 현실에서 이야기하면 더 좋을 것이다.

로자는 설레는 마음을 품고 플레하노브의 팬 행사가 열리는 날까지 기다렸다.

행사 당일.

로자는 잔뜩 차려입고 목적지인 카페로 향했다. 카페로 들어가려면 지하로 내려가야 했는데, 특유의 빈티지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오!”

내려가는 계단의 벽면. 소녀연맹 전원의 음방 무대 엔딩 포즈 사진이 커다란 액자 안에 걸려 있었다.

로자는 당장 사진을 수십 장 찍었다.

카페 입구에 걸린 작은 현수막에도 ‘소녀연맹’이라고 적혀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이러한데 안쪽은 얼마나 잘 꾸며두었을까?

설렘을 품고 문을 열었다.

“아!”

정면에 카운터가 보인다.

천장에는 온갖 장식과 멤버들의 포토 카드가 달려 있고, 벽에는 데뷔와 컴백 앨범 한정판 구성품인 브로마이드가 종류별로 걸려 있다.

심지어 카운터 옆에는 등신대 입간판까지!

‘카페 전체가 소녀연맹이야!’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BGM도 소녀연맹의 곡뿐이었다.

로자가 황홀경을 느끼며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을 때.

“‘인민’인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SNS에서 보고 온…….”

로자가 돌아보니.

“흣?!”

남자들이 카페의 좌석을 전부 점거하고 있었다. 그냥 남자들도 아니었다.

모두 험상궂고 마초적인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그중의 한 명, 추운 날씨에도 나시를 입은 남자가 일어나 로자에게 다가왔다.

그의 어깨 근육에 새겨진 ‘люди(인민)’이라는 문신이 보였다.

“시간에 맞춰서 왔군. 나는 플레하노브다. 앉아라.”

“네, 네?”

로자는 억지로 플레하노브에게 끌려와 자리에 앉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앞에 케이크와 커피가 놓였다.

테이블 또한 소녀연맹의 굿즈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녀는 그 테이블에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근육질의 플레하노브가 보였다.

“다 온 것 같으니 시작하자, 동무들!”

남자들이 기립했다.

프로젝터 스크린이 내려오고, 그곳에 소녀연맹의 ‘아니’ 뮤비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합창을 시작한…….”

끼이익, 카페 입구가 열렸다.

막 들어온 여자 손님은 소녀연맹 테마로 꾸며진 카페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오, ‘인민’인가? 어서 와서 앉…….”

“꺄아아악!”

여자 손님이 도망갔다.

플레하노브는 익숙한 일이란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인터내셔널 러시아 지부 팬 행사 개회식, ‘아니’ 합창을 시작한다.”

남자들은 ‘아니’의 사운드에 맞춰서 몸을 까딱였다.

그때 플레하노브가 로자를 째려보았다.

“뭐 하는 거지?”

“네, 네……?”

플레하노브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기립해라, 너도! 여긴 인터내셔널이다!”

“네, 네엣!”

로자는 벌떡 일어나 ‘아니’를 불렀다.

울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서.

‘나, 어째서, 이런……?’

솜사탕과 같은 둥실거리는 분위기.

엔틱한 인테리어를 감상하며 케이크와 커피를 즐기고, 팬들과 최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하호호 웃고 싶었을 뿐인데…….

* * *

한구인은 유통사 담당자와 미팅을 가졌다.

가로 엔터에서 음반, 음원 유통 프로세스는 한구인이 맡고 있었다.

그는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해외에서 팔려도 얼마나 팔리겠어.’

그렇게 생각했던 한구인은, 담당자로부터 자료를 받아들곤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희도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나라별로 많게는 천 장까지도 나가는 거 같거든요.”

“천 장…….”

유통사 직원이 소녀연맹의 팬덤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나라는 약 7개 정도였다.

베트남, 싱가폴,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일본, 미국.

“미국은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퍼지는 거 같고요. 이 나라들에 천 장 가까이 앨범이 나간 거 같아요.”

나라별로 천 장.

많다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구인은 이 수치가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일본과 미국을 제외하고 인당 국민소득을 생각하면, 가격이 덤핑된 소녀연맹의 앨범이 이만큼 팔린 건 기적이다.’

체감 가격도 훨씬 높을 텐데 앨범을 구매했다는 건, 어지간히 소녀연맹에 빠지지 않고는 불가능할 테니까.

담당자가 ‘팬덤이 형성되었다’고 말했던 건 과장이 아닌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저희 가로 엔터가 해외 음반 정식 유통을 진행한다면…….”

“네. 더 많이 팔리겠죠.”

한구인은 빠르게 자료를 훑었다.

불충분하고 대강 작성된 것이기에 수요를 완전 예측하기엔 무리가 있으나, 담당자의 제안은 고려할 가치가 충분했다.

‘소녀연맹 뮤직비디오에 달렸던 외국인 댓글들. 단순히 인터넷에서 소녀연맹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진정한 팬덤이었다.

“어떠신가요? 정식으로 유통해보심은.”

물론, 해외로 보낼 앨범을 얼마나 찍어낼 것인가는 오로지 가로 엔터의 선택이었다.

팔릴 수도 있으나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괜히 헛바람이 들어서 앨범을 잔뜩 찍어냈다가 반품되기라도 한다면, 가로 엔터에는 큰 타격이다.

그래도 한구인은 충분히 현실성 있는 제안이라고 여겼다.

‘이해가 되는군. 어째서 컴백 앨범이 2주 차에 1만 장이나 더 팔렸는가.’

1인당 국민소득이 낮고 유통 과정에 따른 덤핑까지 있다.

해외의 소녀연맹 팬들은 앨범이 너무 비싸다고 여겼으리라.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거야.’

앨범 가격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지고 싶다. 그런 결심을 할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그 고민을 거치고서 2주 차에 앨범을 구매했던 해외 팬들이 많았던 것이다.

‘정식으로 유통해서 가격을 정상화시키면 확실히 판매량이 많이 오를 거야.’

“해외 유통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세일 유니버설과 진행할까 하는데요.”

세계 음원, 음반 유통은 3대 유통사가 거의 장악하고 있다.

그들을 거치지 않고선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기 힘들 정도다.

한국에서 콧방귀 좀 뀐다는 유통사들도 그들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구멍가게들도 한국에서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한국의 음악 유통 시장은 갈라파고스니까. 좋게 말하면 다국적 기업의 침식을 저지한 거겠군.’

골목에선 골목대장이 최고인 법이다.

그리고 그런 골목대장들이 가로 엔터에 제시한 조건은.

‘고작 중간에 껴 있는 게 전부이면서, 수수료를 많이도 받아먹는군.’

한구인은 담당자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음반 음원권, 즉 마스터 권리는 제작사와 유통사가 공유한다.

해외로 음반을 유통하려면 당연히 유통사의 지분도 있을 수밖에 없다.

과거 미국 투자사에서 세계 시장의 흐름을 읽었던 한구인에게는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일 가로 엔터의 힘이 강해지면 해외 유통사와 직접 계약하는 것도 고려해야겠어. 국내 음원 시장에서의 이점은 포기하더라도.’

소녀연맹이 크게 성장했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언제까지 골목에서만 지낼 수는 없으니 대략적인 그림 정도는 그려둬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애플튠즈와 스포티파잉이 강세였으면 더 이익을 봤을 텐데.’

한구인은 아쉬움을 삼킨 뒤, 미소를 만들었다.

“다음 앨범부터는 고려하겠습니다.”

만약 정식 해외 음반 유통이 된다면, 소녀연맹의 초동판매량은 지금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날 수도 있으리라.

한구인은 유통사 담당자를 보내고, 다음 날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해외 팬들을 위한 팬 인프라를 구축해야겠습니다.”

* * *

“더는 못 봐주겠군!”

로자와 대화를 나누던 플레하노브와 남자들이 성을 냈다.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고, 로자는 울음을 삼켰다.

‘도, 도망가야 해…….’

계속 이곳에 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이런 식으로 덕질을 해오다니! 더 슬기롭게 할 수 있단 말이다!”

플레하노브와 남자들이 차례대로 자신들의 덕질 꿀팁을 공유했다.

“앨범은 이 사이트에서 사는 게 가장 빠르고 싸다. 구매자 리뷰를 봐도 알 수 있지.”

“아, 정말이네요!”

“스타그래프를 쓴다고? 거긴 멤버들의 사진 저장이 안 돼. 트잇터의 멤버별 개인 SNS에선 고화질로 저장할 수 있다고.”

“오, 항상 캡처만 해서 저화질로 봤었는데!”

“여기, 우리 선전관의 계정을 팔로우해라. 멤버들이 SNS에 쓴 글을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올리지. 앨범 구매 인증을 하면 멤버별 손글씨 편지 번역본도 볼 수 있을 거다.”

“아, 그게 손편지였구나!”

로자는 덕질 꿀팁을 착실하게 흡수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선전관이라고 불린 남자는 노트북을 꺼내, 로자에게 소녀연맹 팬카페 가입 양식 쓰는 것을 도와주었다.

팬카페 가입 양식은 당연하게도 모두 한국어였기에, 로자는 가입할 꿈도 못 꿨었다.

“여기, 로자 씨의 이름으로 양식을 작성해두었습니다. 다음 기수 가입 때 이것으로 가입 신청을 하시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선전관이라고 불리시나요?”

“선전관(宣傳官)이 부르기 힘들다면 정치장교라고 불러라.”

“아뇨, 플레하노브 씨……. 부르기 힘든 건 아니구요. 왜 선전관이냐는 거…….”

“제가 인터내셔널에서 맡은 역할 때문입니다.”

선전관이 각진 뿔테 안경을 올려 썼다.

“저는 매주 한 번씩, 가로 엔터 공식 SNS 계정과 멤버별 SNS에 요청 글을 달고 있습니다. 앨범 정식 발매 요청이지요.”

“와, 대단해요! 한국어 잘하시나 봐요.”

“이 친구는 코리아에서 유학했었다.”

“정말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코리아어를 조금 하는 편이죠.”

* * *

“매니저님 매니저님!”

리카가 호들갑 떨며 민경섭을 찾았다.

“또 아타시(저)의 SNS에 이상한 댓글이 달렸어요!”

[경애하는 소녀연맹 동지 여러분! 저희 인민과 인터내셔널은 항상 연맹 동지분들의 음악에 경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만약 인민들을 위하여 바다 너머까지 앨범을 정식으로 발매해준다면, 이는 완벽한 혁명적 과업의 성취이며 전 세계 인민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부디 소녀연맹이 저희 인터내셔널의 제안을 혁명적으로 고려하여 위대한 결단을 내려주시길 간청합니다!]

그것을 본 민경섭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반면 리카는 들떠서 방방 뛰었다.

“저희들의 음악이 이념의 벽을 깼어요! 문화의 힘이에요!”

“저, 리카…….”

“박 이사님이 항상 말씀하시던 소프트 파워에요! 문화 승리예요!”

“…….”

민경섭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가로 엔터의 임직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국정원 지하에 들어갈까 봐…….

‘국군의 날 때 감사 손편지라도 올리게 할까? 이념의 순수함을 증명해야 하나……?’

농담이 아니고, 민경섭은 무서워서 손이 떨렸다.

“박 이사님!”

리카는 성필에게까지 자랑하러 갔다.

“이제는 소녀연맹이 현대의 스콜피온즈예요! 변화의 바람과 로큰롤의 힘으로 베를린 장벽을 부술 거예요!”

“스콜피온즈한테 사과해!”

“에엑?!”

“너희는 아직 그분들에게 닿지 못했어.”

“손나(그런)!”

* * *

“와, 대단해요. 저도 한국에는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유학이라니. 그럼 선전관님은 전공이 뭐셨어요?”

“핵물리학이었습니다.”

“오.”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단한 거 같긴 하다.

로자가 처음 팬 행사에 품었던 상상과 다르긴 했지만, 행사는 즐거웠다.

사나운 인상의 팬들도 인상만 그러했지 순수하게 소녀연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로자는 모두에게 인사하며 카페를 떠나려 했다. 그때, 플레하노브가 그녀를 불렀다.

“로자. 우리도 우리가 어떻게 보이는지 안다.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겠지.”

“네? 어음, 그렇게까진…….”

“우리는 모두 군인이었다.”

플레하노브의 과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퇴역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었지. 규율 밖으로 탈출한 게, 우리에게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어. 차라리…… 다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들은 바뀌었다.

우연찮게 소녀연맹의 노래를 듣고, 그녀들이 쓴 가사를 보고.

“우리가 과거에 머물러 있단 걸 알았지. 세상에 필요한 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규율과 속박에 대한 향수가 아니었어. 바뀐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향해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었지. 그래, 익숙한 규율을 향해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필요했던 거야.”

플레하노브는 쑥스러운 듯 콧잔등을 긁었다.

“처음에, 겁을 줘서 미안했다. 고의는 아니었어. 많이 무서웠겠지. 너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어. 우리를 보자마자 도망가거나, 한 번 행사를 보곤 다신 오지 않았어. 그러니, 네가 다시 행사에 오지 않아도 이해한다. 다만, 조금이라도 즐겼다면 기쁘겠…….”

“다시 올게요.”

로자가 미소 지었다.

“아저씨들 생긴 게 무슨 상관이에요. 다들 친절하고 좋으신 분들인데. 그리고…… 우린 모두 ‘인민’이잖아요!”

플레하노브와 남자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머금었다.

로자는 씨익 웃으며 외쳤다.

“다들 기립하세요! 플레하노브 씨도!”

“아아, 그래야지.”

다들 손을 한 곳으로 합쳤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문화는 나라의 경계마저 뚫고 바다와 땅을 넘어서 날아간다.

그곳에 인종과 성별, 환경과 언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문화는 수백만의 군대보다도 강력한 힘이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명이 있었다.

카페에 들러서 커피나 마실까 했던 50대의 노신사였다.

그는 그 광경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소련을 겪지도 않은 젊은이들이 공산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건가. 요즘 살기 힘든 건 맞나보이.’

* * *

한구인의 프레젠테이션이 마지막에 접어들었다.

“……요약하자면, 데뷔 전부터 구축했던 아이튜브의 콘텐츠가 지대한 역할을 한 듯합니다. 항상 영상 제목에는 영어를 병기했고, 제가 짬 날 때마다 영어 자막도 달았던 게 효과를 발휘한 것 같습니다. 트잇터에 언어별로 검색해보니, 확실히 각국마다 일정 규모로 팬 커뮤니티망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기원은 곡이라기보다 영상 콘텐츠가 주를 차지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가로 엔터의 회의실은 기묘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드디어 앨범 판매량의 비밀이 풀렸다. 거기에다가 소녀연맹의 해외 팬덤이 있다는 사실마저 확인했다.

음원 차트 상위권으로 올라갔던 것도 놀랄 만한 일이었으나, 해외 팬덤의 존재는 느낌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케이팝이란 이름을 단 것만으로도 해외에 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긴 하지.”

홍규헌은 평온하게 말했다.

“하지만 앨범까지 사는, 구매력 있는 팬덤이 있다는 건 예상외야. 예상외의 성공이고. 물론 우리가 예측한 것보다 국내 팬덤이 작다는 건 속이 쓰리긴 하지만, 성공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함이 없어. 그리고…….”

홍규헌은 이마를 짚었다.

“매번 회의가 이렇게 끝나는 건 좀 그렇지만…….”

“박성필 그는 신인가?”

“데뷔 전부터 SNS와 아이튜브를 관리해야 한다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씀하시더니, 모두 혜안이 있으셨군요.”

“박성필! 박성필! 박성필!”

성필은 찬사의 물결 속에서 어렴풋이 웃었다.

예전에는 ‘저 혼자 한 것도 아니고……’라며 겸양을 표현했었지만.

“나는 왕이다. 신이다. 누가 부정하겠느냐?”

“헹가래 쳐!”

성필이 회의실 천장까지 날아올랐다.

* * *

미니 앨범 활동이 3주 차에 접어들었다.

“아쉽네요.”

“왜?”

“이번 앨범 활동은 4주 만에 끝나니까요. 2주 더 했으면 1위 후보에도 들지 않았을까요?”

백설하의 질문에 성필이 하하 웃었다.

“우리가 성공한 건 맞지만, 1위 후보들 보고도 그런 말 하는 거야?”

음방에 나오지도 않은 아티스트가 항상 1위 후보로 나왔다.

그의 봄노래는 모든 차트 1위를 석권 중이며 도저히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음방마다 그가 1위를 얻어냈기에, 음방에 나온 아이돌들은 오지도 않은 1위를 위해 박수만 쳐야 했다.

물론 그의 철옹성이 뚫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시에이스도 있잖아.”

초동판매량만 34만 장을 팔아버린 그룹이다.

음원 차트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으나, 특유의 단단한 팬덤 덕을 보아 SNS 지수와 앨범 판매 지수, 실시간 투표에서 월등한 성적을 보였다.

그들은 음방에서 기어코 봄노래를 밀어내며 1위를 얻어냈었다.

“그냥 아쉬워서 말해봤어요.”

백설하는 의자에 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습관적인 행동인 듯했는데, 성필은 그 귀여운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다.

그러자 신아름이 즉시 태클을 걸었다.

“팀장님 뭐 하세요!”

“어? 왜?”

“왜 설하 쌤 다리를 찍어요!”

백설하가 급히 다리를 가지런히 모았다.

“아니, 다리를 찍은 게 아니라…… 됐다. 봐라. 내가 뭐 찍었는지.”

“카와이(귀여워)!”

영상을 본 리카가 즉시 그것을 얻어내어 SNS에 올렸다.

“하, 하지 마아…….”

“제목은 유치원생 백설하에요!”

백설하는 울상을 지으며 제발 내려달라고 리카에게 사정했다.

안타깝게도, 이미 많은 댓글이 달려버렸다.

“그럼, 저희 이번 활동 기간 짧은 게 봄노래랑 시에이스 선배님들 예상해서 잡은 거예요?”

“아니. 5월이잖아.”

“그게 왜요?”

신아름의 질문에 성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5월! 축제의 계절!”

그리고 5월의 축제라면 당연히.

“대학 축제 돌아야지! 우리도 이제 돈 좀 벌자!”

“빨리 가요! 하루에 축제 10개씩 돌아서 빨리 빚 까야 해요!”

“그래! 하루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 전부 돌자!”

성필과 리카가 의기투합했다.

“제작비 회수 가즈아아아!”

“이쿠우우우웃(간다아아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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