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성필은 도저히 사무실 안에 있기가 힘들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임혜영과 그 부모들. 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신아름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듯 하고 있었다.
성필은 흘끗 홍서헌을 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재판까지 가봤자 벌금 몇백이 끝입니다. 그럴 바에야, 비굴할 정도의 사과를 받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홍서헌은 그리 주장하며 연기를 요구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리 그래도 법의 심판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눈 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보니, 법의 심판도 이것보단 철저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름아 미안해 미안해 진짜. 나, 아직 어린데 빨간 줄 그이면 안 돼애. 미안, 미안, 네가 하라면 평생 사과할게. 감옥 가기 싫어…….”
눈물과 콧물 범벅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채,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 임혜영.
용서해달라는 이유가 본인이 망하기 싫다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성격인지 알겠다.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듯했다.
“학생, 아줌마 기억나? 학교 찾아가고 했을 때 봤을 거잖아. 우리 애가 아직 철이 안 들어서 그래. 아줌마가 사과할 테니까 잘 좀 봐줘…….”
역시, 임혜영의 어머니 또한 비굴하리만치 절박한 미소를 지으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어떻게든 옛 인정에 호소하려는 듯하다.
“혜영이 너 말 꼬라지가 그게 뭐야! 그냥 빌어! 고개 숙여! 학생, 정말로 미안해. 합의로, 제발, 우리 애 좀 살려줘. 마음이 넓은 우리 학생이 이해해줘…….”
아버지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비슷한 족속들이다.
자신의 처지가 안 좋은 것만을 이유로 당연하게도 용서를 비니까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비빈다는 동작 자체가 굴종의 극치나 다름없는 행동이긴 하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이 저 정도밖에 안 되는 거겠지.
“어떻게든 합의로, 학생이 원하는 건 다 해줄게…….”
참고로, 아직 고소 안 했다.
홍서헌이 겁만 주었다. 뭐 어떻게 겁을 준 지는 모르겠으나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성필은 신아름을 보았다. 그녀는 이 사과를 받고 기분이 풀렸을까?
홍서헌이 이런 자리를 만든 것 자체가, 사태를 수습하고 신아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이었으니까.
“아…….”
드디어, 신아름이 입을 열었다.
임혜영과 그 부모는 빌던 것도 멈추고 신아름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며 신아름은 생각했다.
‘이게 뭐야.’
설마 사태가 이렇게 풀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곳에 오기까지만 해도, 신아름은 자신이 사과할 것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도리어 이렇게나 비굴한 사과를 받다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아름 양이 받은 스트레스를 그대로 푸시면 됩니다. 마음껏 갑질하세요.’
그게 당연한 권리라는 듯, 홍서헌이 말했었다.
원한다면 이마마저 땅에 박게 만들 수가 있을 거라고 한다.
‘그게 보고 싶나?’
신아름은 자문했다.
그야 임혜영이 사실도 아닌 내용을 썼단 것을 알았을 땐, 화가 났었다.
그런데 이미 화는 전부 풀렸다.
오히려 불쌍하다.
“임혜영, 이라고 했지?”
“으, 응! 아름아, 나야, 혜영이…….”
기억도 안 난다.
그런데도, 임혜영이란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기억해줬구나.
무슨 억하심정인지는 몰랐으나, 기억이 될 만큼 자신의 행동에게도 문제가 있던 거겠지.
‘행동거지가 안 좋았던 건 사실이니까.’
신아름은 용서해 주자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무른 이유 따위는 아니었다.
‘난 잘못이 없으니까. 없다고, 팀장님이 말해줬으니까. 팀장님이 믿어주니까.’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임혜영의 얼굴이, 어제까지만 해도 성필을 향해 눈물을 쏟아냈던 자신의 얼굴과 겹쳤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죄를 탓하고 공포와 슬픔에 빠지는 감정을, 신아름은 알고 있다.
‘무서웠지. 소녀연맹에서 퇴출되고, 팀장님의 꿈에 피해를 주고, 멤버들이랑 회사 사람들을 볼 면목도 없겠다고.’
역지사지(易地思之).
모든 종교의 황금률(黃金律).
신아름은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것과 여겨보았다.
용서란 게 별 건 아니다. 그저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을 더는 몰아붙이지 않고, 동정심에 자리를 떠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임혜영이 잘못을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저토록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값을 치렀다.
인생의 교훈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기억이 나네. 임혜영. 재밌다. 나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으, 응 응! 기억했어!”
“그래서 폭로글 적은 거야? 내가 그 정도로 나쁜 년이었어?”
“아니, 학생 그건 혜영이가…….”
“저 혜영이한테 묻고 있는데요?”
임혜영의 아버지가 낭패란 기색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딸은 올바른 답을 내놓을 정도로 현명하지 않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혜영아, 그랬어?”
“아, 아, 아니이…….”
“그럼 왜 그랬어?”
“…….”
“나 그냥 순수하게 알고 싶어서 그래. 왜 그랬던 거야?”
“…….”
“나, 네 글 읽고 나서 울었어. 진짜 무섭더라.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앞으로의 내 미래가 망가진다는 게. 그것도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말야. 너도 지금 그렇지? 아, 너는 나랑 다르겠다. 넌 당장 어제 고의로 내 인생을 망치려고 했고, 그 대가를 지금 보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미안해애애애애…….”
임혜영이 다시 눈물을 질질 짰다.
“내가 이유를 묻고 있잖아!”
신아름이 사무실을 다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임혜영도 깜짝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내가, 묻잖아, 왜 그랬는지. 안 들려? 다시 말해줄까?”
“아, 아, 으…….”
신아름은 홍서헌에게 눈짓했다.
“그냥 원래 계획했던 대로 처리…….”
“부러워서!”
임혜영이 뒤늦게 답을 꺼냈다. 신아름이 천천히 그녀를 보았다.
“부러워서?”
“질투가 나서…… 네, 네가…….”
“질투가 왜 날까?”
“…….”
“또 못 들은 거야?”
“아, 아름이 네가아…….”
임혜영은 울면서 말했다.
“나랑, 다르지 않, 흑, 똑같이, 놀면서 학교생활, 끅, 했는데에……. 네가, 잘돼서…… 질투가…….”
참으로 추악한 이유다.
“장난으로…….”
그 발언에, 임혜영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겁하며 딸을 쳐다보았다.
피해자에게 ‘장난’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쯤, 연륜으로 당연히 알게 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임혜영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은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저기, 혜영아. 어떻게 내가 너랑 똑같이 산 거야?”
“……어, 어?”
“나는 연습생이었잖아. 공부를 안 한다고 노는 거야? 그냥 분야가 다른 거지. 이상하다, 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머리가 안 돌아가는구나’ 정도였을 것이다.
“응, 대충 알겠어. 네가 왜 그랬는지. 그럴 만하네. 부모님이 네가 철이 안 들었다고 계속 그러시더니, 진짜 그러네?”
딸이 욕을 먹고 있음에도, 임혜영의 부모님은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혜영도 그랬다.
“혜영아.”
“으, 응.”
“나도 갑자기 생각났어. 중3 때 네가 나한테 했던 말 하나 떠오르네. 겨울에 말야. 내가 솜 튀어나오고 실밥도 늘어진 패딩 입고 오니까, 네가 거지냐고 말했었잖아.”
임혜영과 부모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거지…… 맞지. 그랬지. 넌 그때 좋은 거 입었으니까, 거지로 보였겠지.”
“아, 아니야. 안, 그런, 아니…….”
“나 그때 엄청 상처받았었거든.”
임혜영이 입술을 벌벌 떨었다.
“그러니까, 사줘.”
“……어?”
“그거, 패딩.”
요즘은 유행이 지나서 입는 사람이라곤 없는 브랜드이지만, 꽤 고가의 상품인.
“그때 네가 입었던 거랑 똑같은 거 사줘. 그러면 용서해 줄게.”
신아름은 상쾌하게 미소 지었다.
고작 60만 원으로, 임혜영은 용서를 얻어냈다.
아니, 고작 60만 원은 아니다.
자신과 부모님의 무릎과 눈물을 바쳤으니까.
“응, 어! 그럴게! 사줄게!”
“그리고.”
신아름이 다른 조건을 요구할 것 같자 임혜영의 표정이 또 굳었다.
신아름이 피식 웃었다.
‘죄를 지었는데도, 벌을 받긴 싫어하는구나.’
사람들 모두 그렇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임혜영은 반성하진 않고 어떻게든 자신이 받을 벌을 줄이려고만 한다.
자신의 죄가 고작 패딩 하나쯤 지불하는 것으로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것일까.
‘이러면 안 되지.’
과거의 친구, 아니. 과거의 반 친구를 위해서라도 더 따끔한 교훈을 줘야겠다.
“친필 반성문 써서 커뮤니티에 올려.”
생각보다 낮은 수위의 요구에 임혜영의 표정이 안도로 물들었다.
“그리고 사과 영상도 찍어.”
인류 문명이 멸망하기까지, 임혜영의 사과 영상은 인터넷이란 바다를 떠돌 것이다.
“어, 어?”
“얼굴은 모자이크해줄게.”
“그, 어, 영, 영상은.”
“싫어?”
임혜영은 고민을 이어가다가, 신아름의 표정이 썩어가기 시작하자 즉시 답했다.
“하, 할게!”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홍서헌이 임혜영과 부모를 의자에 다시 앉혔다. 그리고 백지를 내밀었다.
“자필 사과문입니다. 제가 불러주는 대로 쓰십시오. 이걸 커뮤니티에 올릴 겁니다. 토씨 하나도 틀리시면 안 됩니다.”
* * *
“아름아,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
“네. 어차피 법원 가봤자 벌금 2, 3백만 원 정도라면서요.”
거기에, 홍서헌은 이번 사건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그다지 없다고 보았다.
얼마 전 대법원 판례에서,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성립을 위한 조건이 까다로워졌다고 한다.
물론 임혜영이 무릎 꿇고 사과한 시점에서 이미 유죄로 만들기 충분한 조건을 만들었지만.
“그리고 저 패딩 가지고 싶었어요.”
“이제 여름인데?”
“겨울에 입으면 되죠.”
신아름은 경쾌한 걸음으로 차로 다가갔다.
차에 타자, 한구인이 말했다.
“아름 씨, 세련된 대응이었습니다. 분노를 적당한 수준에서 갈무리한 모습, 감명 깊었습니다. 어느 어른이라도 하기 힘든 대응이었습니다. 나이에 비해 월등히 성숙한 마음가짐입니다.”
“아뇨. 한 이사님 덕분이에요.”
“저 말입니까?”
“네. 전에 한 이사님이 해주셨던 얘기요.”
한구인이 성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해주었던 말이었다.
‘아름 씨. 세상에는 정말, 본인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돌아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분노하다 보면, 결국 자신도 같은 곳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신아름은 그 말을 꽤 감명 깊게 들었다.
“또 한 이사님이 예전에 말해줬잖아요. 그 뭐더라. 니체? 얘기해주시면서요. 가장 강한 인간은 어린아이라고요. 작은 일에도 행복해하고, 안 좋은 일은 빨리 잊고. 저도 그러려구요. 안 좋은 일은 그냥 잊을래요. 용서는 강한 사람만 할 수 있잖아요. 맞죠?”
“대단하십니다.”
한구인은 드물게도 만개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박수까지 쳤다.
“이게 다 인간성을 도야하고 세련되게 하는 품위 있는 글과 예술의 힘이죠.”
“키케로의 말까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눈물 나면 운전대 놓으세요.”
“관용어구입니다.”
“저도 알거든요…….”
“아름 씨, 제가 알려드린 게 헛되지 않았군요. 대단한 성취입니다. 리카 씨와 아라 씨 이후로 이런 감동을 느껴보는 건…….”
“제가 리카랑 아라보다 떨어진다고요?!”
“예, 예?”
“허 참 진짜. 제가 걔들보다 뭐가 부족한데요? 한 이사님 수업도 제일 열심히 듣는데!”
‘한 이사의 수업을 가장 열심히 듣는다’는 말은, 동생 라인이 경쟁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어, 그, 죄송합니다…….”
결국 한구인이 사과를 입에 담았다.
성필은 신아름이 리카나 조아라보다 뭐가 부족한지 알 것 같았다.
회사로 돌아오고, 한구인이 먼저 건물로 들어갔다.
신아름은 성필의 옷자락을 잡고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즉시, 신아름이 다리를 떨면서 주저앉았다.
“아름아?”
성필은 신아름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그녀는 일어나고도 손을 놓지 않았다.
“잘 해결돼서 다행이에요, 진짜아……. 저 진짜, 진짜 무서웠어요. 소녀연맹 나오게 될까 봐요.”
“그렇지. 무섭지.”
“팀장님 꿈 못 이뤄드리면 어쩌나 하고 계속 걱정했단 말이에요.”
신아름은 빨리 감동하란 듯 어렴풋한 미소를 보였다.
“응.”
“뭐예요 반응 짠 거. 감동 안 해요?”
“나야 너 그런 짓 안 한 거 아니까. 걱정 자체를 안 했지.”
거짓말일 것이다.
신아름이 백설하에게 듣길, 성필은 종일 얼굴에 먹구름이 껴 있었다고 했다.
또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녔단 것도 들었다.
“아아, 걱정 자체를 안 하셨구나. 근데도 저 달래줄 때 세상 무너질 거 같은 표정 짓고 있었어요?”
“네가 우니까.”
“제가 우는 게 세상이 무너지는 거랑 동급이에요?”
“으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무하다 진짜.”
“나라가 무너지는 정도는 되지.”
“뭐예요 그게.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그리 말하는 신아름은 활짝 웃고 있었다.
“이제 기운 좀 차렸어? 회사 들어가자. 나 더워. 그리고 들어가면 사장님한테 감사 인사 꼭 하고. 홍서헌 변호사님, 사장님이 힘들게 모셔온 분이야. 능력 있는 분이라 일도 빨리 끝났잖아.”
“알겠어요.”
신아름이 성필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아, 이대로 집까지 가고 싶다. 장보고, 집 가서, 엄마랑 팀장님이랑 같이 요리해 먹고.”
“넌 요리 안 하잖아. 그리고 이제 손 놔. 회사 바로 앞이야.”
“팀장님, 슬슬 저 귀찮죠? 5년이나 앵기니까 정도 점점 떨어지고?”
“살짝?”
신아름이 어깨로 장난스레 성필의 등을 쳤다.
“팀장님.”
“왜.”
“저 만약에, 일이 잘못돼서 소녀연맹 나갔으면 어떡했을 거예요?”
“상상도 하기 싫은데…….”
“상상만 해봐요.”
“음, 공무원 공부라도 해볼래? 내가 학원 보내줄게.”
“팀장님 가끔 보면 사람 마음 너무 모르는 거 같애.”
“아님 수능?”
“됐어요.”
“그럼 뭘 바라는데?”
“제 가족 노릇 해주셔야죠.”
“내 인생은……?”
“뭐야. 저 버리려고 했어요? 아이돌 끝내자마자? 실망이다 진짜. 이럴 땐 멋지게 ‘내가 책임질게!’ 정도는 말해줘야죠.”
“아름이 너 혹시 나를 무슨 보험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맞는데요?”
성필은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혈족 아닌 사람에게는 아무리 잘 해줘봤자 소용없다…….
그렇더라도 성필은 계속 신아름에게 잘해줄 테지만.
절망에 빠진 성필을 보고 신아름이 배시시 웃었다.
“팀장님이랑 저는 쌍방보험이죠. 팀장님이 다리 하나 없어지더라도 제가 먹여 살릴게요.”
“음…… 시한부 되면?”
“거기까진 보장 안 돼요.”
“깐깐한 보험이네.”
“업그레이드하려면 비용 더 내세요.”
“비용? 얼마?”
“그건…….”
신아름이 악동 같이 웃었다.
“비밀. 이스터 에그에요.”
회사로 들어가, 신아름은 다시금 홍규헌과 대면했다.
“고생 많았다.”
홍규헌은 신아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신아름은 그녀가 자신을 위해 힘을 써줬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살짝 막힌 목소리로 감사를 전했다.
이후로는 평소처럼 연습실로 들어갔다.
“아름아 수고했어.”
백설하가 안아주었다.
다른 인사는 필요 없었다.
다들 신아름을 믿고 기다려주었다.
“자, 이제 다시 연습하자!”
가로 엔터는 이전과 변함없이 굴러갔다.
그리고 쉬는 시간.
“리카, 아라, 잠만 이리 와봐. 상식 퀴즈 하자.”
“갑자기 웬 상식 퀴즈.”
“걍 하자. 어차피 쉬는 시간에 할 것도 없잖아.”
“미리 말해두는데 너만 아는 건 상식 아니다?”
“아라쨩, 아타시(나)도 질문! 일본 상식은 인정해주는 거야?”
“아니. 네 나라 상식도 인정 안 해. 우리나라 상식만 인정이야.”
“그럼 주제를 정하자.”
신아름의 눈동자에 승부욕이 떠올랐다.
“한 이사님이 가르쳐준 거 중에서 내자.”
아까 한구인이 리카와 조아라를 먼저 언급했던 건 신아름의 심기를 거슬렀다.
증명해야만 한다.
자신이 리카와 조아라보다 위라는 사실을!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낼게. 파시즘의 4대 이데올로기가 뭐야?”
“뭐? 너 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상한 거 내는…….”
“리카 리카 리카 리카!”
“어, 리카.”
“군국주의, 팽창주의, 국가지상주의, 파시스트 독재!”
“정답.”
“에헤헤.”
“리카 똑똑한데? 그걸 외워?”
“한 이사님이 ‘군대’가 ‘팽창’하면 ‘국가’가 ‘파국’에 이른다라고 외우랬어!”
“…….”
신아름은 정신이 멍해졌다.
아무래도, 한구인이 말했던 순서가 맞는 모양이다.
* * *
임혜영의 사과문과 사과 영상이 올라온 이후,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급격히 반전했다.
[◯◯◯입니다. 소녀연맹의 아름에게 거짓말로 피해를 입힌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온전히 저의 잘못입니다. 제가 적었던 글에는 진실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자필 사과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으나, 영상은 그 파급력이 더욱 컸다.
사람들이 신아름의 결백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좌 신아름 믿고 있었다구!]
이런 제목의 게시글이 소녀연맹의 각종 커뮤니티를 도배했다.
이 사건의 파급력은 단순히 학폭 폭로가 허위라는 점에 있지 않았다.
가로 엔터와 신아름의 대응도 파급력을 높였다. 신아름이 입장문을 올린 것이다.
[……직접 만나 화해했습니다. 제가 마음을 먹으면 벌금형을 받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미래가 창창한 친구에게 너무도 어두운 기억을 심어주는 것 같아 하지 않았습니다.]
천사인가?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신아름은 이번 사건으로 어두운 기억은커녕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욕을 한꺼번에 들었는데 말이다.
[예전에 그 친구가 제 패딩이 낡았다며 ‘가난한 아이(순화)’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때가 떠올라서 합의금 대신 패딩을 받았습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깔끔한 입장문이었다.
당연히 이 입장문도 여러 사이트를 떠돌았고, 그녀에게 ‘패딩좌’란 새로운 별명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당부드리고 싶은 점은, 이 친구의 신상을 알아내거나 과도한 욕설이나 비난은 말아주셨으면 한다는 점입니다. 이건 제 회사의 지시가 아닌 저의 마음입니다. 저는 이 친구를 용서하기로 했고, 화해 또한 했습니다.]
이 입장문은 미담이 되어 신아름의 이미지를 하늘 높이 올렸다.
‘위기를 기회로’란 말은 이럴 때를 위해 있는 것만 같다.
커뮤니티의 관리자들은 초기에 중립을 지키지 않고 분란을 일으켰던 자들을 숙청했다.
[마플과 진위가 불분명한 내용의 글은 차단 대상입니다. 마플은 ‘아라 마이너 갤러리’에서 해주세요.]
새로운 공지까지 속속들이 추가됐다.
[가로 엔터 일 잘하네. 폭로글 뜨자마자 바로 법적 대응 ㅋㅋㅋㅋㅋㅋ]
[어떻게 자필 사과문이 이렇게 빨리 올라오냐?]
[ㄹㅇ 이 정도면 서울에 있는 흥신소 전부 다 불러서 일 시킨 거 아님?]
빠른 일 처리와 대응에 가로 엔터에 대한 민심도 급상승했다.
또한 가로 엔터의 홈페이지나 멤버별 SNS에 욕설을 실었던 사람들도 재빨리 자신의 글들을 삭제했다.
하지만 악플러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아름이 SNS에 악플 달았던 인간들 전부 캡처해서 가로 엔터에 보냈다.]
신아름의 팬인 유용태가 한 일이었다.
사진 파일만 수백 개였고, 그 게시글의 아래에는 댓글도 수백 개 달렸다.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이런다고 가로 엔터가 고소를 하겠느냐. 법적 효력도 없다.
[여기서 옹호하는 새끼들 죄다 악플러죠? 똥줄 타서 죽겠죠? 고소장 잘 받아라 ㅂㅅ들아 ㅋㅋㅋ]
유용태는 시원하게 댓글을 적었다.
물론, 그들의 말이 맞다.
이런 사진 파일로 고소가 가능할 리도 없고, 가로 엔터가 고소할 리도 없다.
단지, 악플러들이 며칠이나마 마음이 무거워진 채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
바쁜 건 기뻐하는 팬들만이 아니었다.
“경섭아 빨리 보도자료 적어서 기자들한테 돌려! 우리 보도자료 보내기 전까지는 기사 최대한 적지 말라고 해줘!”
“네!”
기사로 올라갈 글들은 최대한 정갈해야 한다.
인터넷 신문사가 수십, 수백 개다. 그곳에 기사를 올리는 자들은 기자란 이름을 달고 있으나, 자격 미달인 인간들이 너무도 많다.
“사건 관계 잘 알지도 않고 적은 기사 올라가는 것 못 봐. 무조건 기다리라고 해!”
성필과 민경섭은 이번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적은 자료를 모든 곳에 돌렸다.
이로써, 힘겨웠던 싸움이 막을 내렸다.
* * *
곧 컴백한 지 1주일이 다가온다.
소녀연맹 앨범의 초동판매량이 잡힐 시기인 것이다.
보통 이 시기면 초동판매량을 예측하며 행복회로를 태우겠지만, 소녀연맹의 팬덤인 인민은 또 다른 떡밥에 빠져 있었다.
그건 가로 엔터의 아이튜브 채널에 올라온 어느 영상으로부터 시작됐다.
소녀연맹이 ‘롱 포’의 음방 무대를 직접 리뷰한 영상이었다.
아티스트가 직접 본인의 무대를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관전 포인트다.
다른 멤버들의 리뷰 영상도 재밌었지만, 리카의 반응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라쨩 세쿠시(섹시)!]
조아라가 블라우스 끝자락을 손으로 잡고 위로 슬쩍 올리는 부분. 그녀의 복근과 옆구리가 훤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리카는 그것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손을 눈으로 가렸다.
정말 야한 것이라도 본 듯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게 인기를 얻어 여러 사람이 모방했고, 어느 순간 챌린지 콘텐츠처럼 변했다.
‘세쿠시(섹시)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 * *
“이거 하고 싶슴미다.”
케이어스의 진저가 ‘세쿠시 챌린지’ 영상을 보여주었다.
매니지먼트 1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진저야. 인지도도 적은 그룹 이벤트에 참여해주는 건 좀 그래. 괜히 얽혀서 좋은 말 들을 게 없잖아. 그다지 뜬 챌린지도 아닌데 굳이 할 필요도 없고. 뭐, 민주랑 에리카가 신아름이랑 리카랑 친구라지? 지인 도와주는 거냐고, 뒷광고 같은 거냐고 말 나오면 피곤해.”
“그렇슴미까…….”
진저는 풀이 죽었다.
이제 며칠 뒤면 소녀연맹의 미니 앨범인 ‘Girls’ Craving’의 초동판매량이 나온다.
챌린지에 참여해서 소녀연맹의 인지도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게다가 조아라의 멋진(!) 모습을 보고 리액션을 하는 콘텐츠라니, 진저는 꼭 하고 싶었다.
‘아라 씨가 내가 올린 영상을 봐주실 수도 있을 건데…….’
진저는 터덜터덜 매니지먼트 사무실을 나갔다.
1팀장은 드물게도 풀이 죽은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고, 또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그냥 하게 둘까?
‘아냐. 괜히 말 나오는 것보단 낫지.’
1팀장은 의지를 굳혔다.
그런데 잠시 후, 진저가 정호환 이사와 함께 찾아왔다.
1팀장은 화들짝 놀랐다.
“이,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요. 진저, 그 뭐냐?”
“세쿠시 챌린지임미다.”
“그래 그거. 그냥 하게 해주면 안 돼요? 나도 같이하려는데.”
“하, 하셔도 됩니다! 하세요! 마음껏 하셔도 괜찮습니다!”
* * *
“아라쨩 이거 봐!”
“또 나 놀리려는 거면…….”
스마트폰 화면에 진저와 정호환 이사가 나왔다.
둘은 조아라의 무대 직캠 영상을 보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아라 씨 세쿠시(섹시)!]
[소녀연맹 조아라 멋지다!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 파이팅!]
“…….”
“도오 도오(어때 어때)? 재밌지?”
조아라는 혀를 깨물고 쓰러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