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56화 (156/760)

156화

“대단하다 박성필!”

뮤직 스테이지 PD, 구상준의 칭찬에 성필은 사양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앞에선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갔다.

“두 번째 앨범에 바로 이렇게 대박이 터지네.”

“대박까지는 아니죠.”

“아니긴. 신인이 차트 30위 뚫고 올라갔어. 팬덤도 변변찮은데 말이야. 물론 데뷔 때 초동판매량도 뜨악할 수치긴 했지만.”

대단하다.

인지도와 명성도 충분치 않은 중소 기획사에서 만든 성공이라기엔, 너무나도 컸다.

음악 방송 PD로서 수많은 그룹을 보아온 구상준에게도, 소녀연맹의 성공은 이례적이었다.

“이제 워터 멜론 20위권에선 내려갔어요.”

“더 올라갈 거야. 지금은 잠깐 숨 고르는 거지. 그리고 거기 상위권 뚫기가 좀 어려워?”

대형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 그룹의 곡이 거의 도배되어 있다.

팬들은 앨범 활동 기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단체로 스밍(음원을 계속 틀어두는 것)을 하여 철옹성을 쌓아놓았다.

그냥 타이틀곡만 있는 게 아니라, 앨범 수록곡들도 전부 다 올려둔다.

“거긴 복마전이지. 그걸 뚫고 잠시라도 올라간 것만 해도 엄청난 쾌거야. 데뷔한 지 이제 200일은 됐나?”

“아니요. 150일 정도인가. 그쯤 왔을 겁니다.”

“그래 그래. 대단해. 그것도…….”

구상준이 낄낄 웃었다.

성필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것이다.

“이제 겨우 하루 지났잖아?”

자고 일어나니 하루 만에 스타가 되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력이 지대했을 시절에 흔히 있던 말이었다.

뉴스에 잠깐 얼굴을 비추거나, 드라마에 카메오로 나온 것만으로 다음 날 스타가 된 이들을 가리키는 관용어다.

그게 현재의 소녀연맹에게도 적용됐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 가게에서 ‘롱 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쾌하면서도 끈적한 사운드가 길거리를 울렸다.

그것을 들은 행인들은 고개를 돌리더니, 곧 음원 검색 기능으로 ‘롱 포’를 찾아보곤 했다.

“봐. 길거리에도 울리잖아.”

“차트 100위권 안이니까…….”

“박 이사. 이럴 때는 ‘아! 우리 애들 정말 대단합니다!’라고 해도 되는 거야.”

성필은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둘은 카페로 돌아와 대화를 이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또 아쉽네. 최초 음방은 우리 뮤직 스테이지로 해주지.”

“죄송합니다.”

“저번에도 그렇고, 왜 굳이 주말 가깝게 데뷔랑 컴백을 잡는 거야? 뭐 이유라도 있어?”

“아뇨. 스케줄을 짜다 보니 우연찮게 그렇게 된 겁니다.”

“다음 주엔 우리 뮤직 스테이지 사녹 있지? 거기 무대는 어떻게 꾸밀 거야? 뭐 아이디어 있어?”

소녀연맹의 첫 번째 사전 녹화 무대는 좋은 말로도 정성이 들어갔다고 보기 어려웠다.

사방을 하얀 천으로 바르고 색색의 조명만 쏘아댔으니까.

그렇다고 그게 안 좋지는 않았다.

심플 이즈 베스트라고 하던가. 오히려 곡 분위기와 어울리고, 멤버들을 돋보이게 해주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나는 소련이들 첫 사녹 무대도 좋긴 했는데, 우리 음방에선 더 신경 써줄 거지?”

“아, 하하. 아마 비슷하게 가지 않을까 싶네요…….”

“뭐어? 이야, 박 이사. 섭섭하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얼마나 되는데. 내가 맡는 음방에선 힘 좀 써도 되잖아?”

만약 가로 엔터의 자금이 넘쳐났다면, 성필도 모든 사녹 무대에 돈을 처발랐을 것이다.

그런데 무대를 꾸미는 게 보통 돈이 드는 게 아니다. 한 번 꾸밀 때 사용했던 장식을 전부 처분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속이 쓰리다.

“그…… 첫 무대보다는 더 괜찮게 만들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지. 뭐, 그 무대가 안 좋았던 것도 아니고.”

사방을 천으로 도배하고 조명만 쏜다.

이 의견을 낸 건, 공연 기획사 아틀라스의 사장인 조진만이었다.

한구인이 업무차 그와 통화하던 중, 사녹 무대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자 조진만이 그 아이디어를 냈다.

‘회의 때 한 이사님이 흘리듯이 말했더니, 사장님이 제대로 알아보라고 했었지.’

그날, 성필과 한구인은 조진만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조진만은 둘은 소극장으로 데려가, 직접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보여주었다.

멋졌다.

무엇보다 돈이 적게 들었다.

조진만의 아이디어는 즉각 홍규헌에게 올라갔고, 회의를 거쳐 채택되었다.

“오랜만에 반가웠다. 커피 잘 먹었어.”

“네. 들어가십쇼.”

“다음 주에 보자. 주말 잘 보내고.”

오늘은 주말, 휴일이다.

그를 떠나보낸 뒤, 성필은 회사로 향했다. 회사로 갈 필요가 없음에도 말이다.

성필이 회사로 오자, 1층은 물론 모든 층의 불이 켜져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왔다.

모든 임직원이 모여 있었다.

휴일에 회사로 온 건 성필만이 아니었다.

성필도 구상준 PD와의 약속 때문에 잠시 나갔다가 들어온 것이었다.

“뮤비 공개 24시간.”

홍규헌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조회 수 300만 넘었어.”

“오…….”

성필은 기쁨에 겨워 주먹을 꽉 쥐었다.

24시간 조회 수.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까 싶었는데, 기어코 300만을 돌파한 것이다.

“아이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올라갔어. 조회 수는 계속 늘어날 거야. 아마도.”

“사장님! 아마도가 아니죠! 이거 일주일도 안 돼서 1,000만 무조건 뚫어요!”

손혜빈이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았다.

아니, 그건 단순한 희망이 아니었다.

실현될 미래였다.

모두가 그것을 직감했다.

“그래, 그래야지.”

홍규헌은 감격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오늘, 전부 밤까지 남아 있을 거야? 나는 차트 변화랑 조회 수 올라가는 거 계속 보려는데.”

당연하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하지 않으면 인생 절반 손해 보는 게 틀림없다.

“좋아. 그럼 야식도 시키자. 아주 돗자리 깔고 계속 보자.”

차트 순위와 조회 수 상승 추이.

그 무엇보다 맛있는 안주였다.

“근데 조정훈 감독님이 뮤비를 스토리로만 채운다고 했을 때 있잖아. 나 솔직히 이 인간 제정신인가 싶었거든?”

“바로 감독님한테 전화.”

손혜빈이 민경섭의 손목을 쳐내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아직 약정 7개월이나 남았는데!”

“와, 근데 뮤비를 잘 뽑으니까 효과가 좋구나. 이런 건 대형기획사에서나 통하는 줄 알았는데. 조 감독님 최고야 진짜.”

“이게 다 내 선견지…….”

“그래 그래. 이 방에 모인 사람 절반 이상 다 네가 데려왔잖아. 너 잘한 거 다 알아.”

“헤헤.”

“오…… 웃음소리 쫌 귀여운데?”

“껄껄!”

“내가 귀엽단 게 듣기 싫어?!”

아무튼, 손혜빈이 말하는 효과란 콘텐츠의 확대재생산을 뜻했다.

“스토리 넣어두니까 해석이랑 감상 영상이 계속 올라오잖아.”

* * *

김채현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다. 엄지발가락으로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누른 후, 교복도 벗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스마트폰이 있으나, 역시 덕질은 큰 화면으로 해야 제맛이다.

곧바로 아이튜브에 ‘롱 포’를 검색했다.

[모르고 보면 멋진, 알고 보면 더 멋진 롱 포 해석!]

‘해석 영상이다!’

김채현은 ‘롱 포’의 뮤비를 입만 벌리고 보았다. 춤도 나오지 않고 멤버들의 연기와 서사로만 진행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하지만 그 뮤비가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롱 포’의 뮤직비디오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인 구도를 지키고 있습니다. 성처럼 높게 솟은 빌딩. 그리고 빌딩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소녀연맹 멤버들. 멤버들이 보는 건 빌딩 아래의 할렘가입니다.]

“맞네 맞네.”

빌딩과 언뜻언뜻 비치는 할렘가.

뮤비는 이 두 공간으로 나뉘어서 진행되었다.

김채현은 격하게 동의하며 벌써 ‘좋아요’를 눌렀다.

[뮤비를 보면 쉽게 아시겠지만, 각 멤버들마다 상징하는 직업이 있습니다.]

리카는 군인.

백설하는 마피아.

조아라는 디자이너.

장하양은 기업가.

신아름은 검사.

[이 멤버들이 나타내는 건 그냥 직업이 아닌데요, 이건 뮤비 티저를 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티저?”

각 멤버마다 티저가 있었다.

그 멤버들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보여주고, 티저 내내 나레이션이 깔렸었다.

김채현이 듣기엔 그냥 분위기 있는 대사를 말하는 것 같았었다.

[티저에는 각 멤버의 상징이 나옵니다. 그건 티저의 마지막 대사로 알 수 있습니다.]

리카, 폭력에 순응하라.

백설하, 폭력에 굴복하라.

조아라, 다수에 침묵하라.

장하양, 금(金)을 섬겨라.

신아름, 권위를 존중하라.

[여기서 리카와 백설하의 상징이 겹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군인인 리카가 나타내는 건 합법적 폭력입니다. 군인은 폭력을 독점한 거의 유일한 집단이니까요. 반면 백설하는 마피아, 비합법적 폭력을 나타냅니다. 국가가 독점하지 못한, 사회로 누출되는 폭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죠.]

“맞네 맞네.”

[멤버들은 사회의 도처에서 체감할 수 있는 힘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회를 유지하는 힘,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김채현은 해석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저 멋지게만 보였던 ‘롱 포’의 뮤비가, 뜻이 담긴 이야기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야기는 단순한 시각적 화려함보다 인간의 기억에 더 오래 남는 법이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소녀연맹의 이전 앨범은 자유와 저항을 담았는데, 갑자기 멤버들이 힘의 상징을 나타낸다뇨. 이 의문은 뮤비의 후반부에서 밝혀집니다.]

* * *

유용태는 벌써 ‘롱 포’ 뮤비를 몇 번이나 돌려보았는지 모른다.

‘롱 포’의 뮤직비디오는 두 개로 나뉜다.

하나는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 버전. 다른 하나는 안무로만 채워진 퍼포먼스 비디오였다.

유용태는 퍼포먼스 비디오도 좋았으나, 서사가 담긴 스토리 버전이 더 끌렸다.

보면 볼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야, 오늘 술 마실래? 애들 다 모였음.]

대학교 때 친구들의 연락에 ‘못 간다’고 답한 뒤, 유용태는 계속해서 뮤비를 돌려보았다.

‘소련이들 연기자다 연기자야.’

어쩜 이렇게 뮤비에서의 모습도 어색하지 않을까. 마치 이게 원래 그녀들의 모습이란 듯 잘 어울리기까지 했다.

유용태가 특히 좋아하는 건 신아름과 조아라의 파트였다.

최애랑 차애라서 특히 좋아하는 건 아니…… 사실 맞다.

‘아라 멋지다 진짜.’

조아라는 디자이너다.

그녀가 도면을 그려서 넘기면, 그 도면은 커다란 기계 안으로 삼켜진다.

그리고 그 기계 안으로는 모델들이 들어간다.

각양각색의 매력을 지닌 모델들은, 기계 안에서 나오는 순간 틀에 박힌 양복 차림으로만 바뀌어 나온다.

모델들은 양복 차림으로, 마치 군대의 사열식처럼 줄지어 늘어선 군중 안으로 들어간다.

‘다수에 침묵하라.’

분명, 조아라의 뮤비 티저에서 나왔던 나레이션이었다.

이어선 신아름이 등장한다.

정장에 법복(法服)을 걸친 그녀는 어둠을 걷는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벽면이 밝아지며 감옥의 모습이 드러난다.

쇠창살에 갇힌 사람은 고통을 호소한다.

죄수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쇠창살 밖의 사람은…….’

벽에 등을 기대고 공손히 선, 감옥에 갇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그들은 속옷만 입은 채 눈에는 안대가 씌우어져 있다. 그리고 신아름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숙인다.

‘연출이 미쳤어 이거.’

권위를 존중하라.

신아름이 맡은 상징이었다.

만약 이런 장면만 이어졌다면, 유용태는 이 뮤비에 빠르게 질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뮤비의 후반부, 댄스 브레이크 이후가 뮤비의 백미였다.

그 파트가 진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나온다.’

댄스 브레이크.

밴드 사운드에 EDM이 끼어들고, 멤버들은 빌딩의 창문으로 아래를 본다.

카메라는 점점 아래를 잡았다.

마침내 할렘가에 닿은 카메라는 광장에 잔뜩 모인 사람들을 비춘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건 다섯 명의 소녀들.

소녀연맹이다.

민중은 소녀연맹을 따라 빌딩을 둘러싼 권위의 벽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본격적인 저항으로 접어든다.

‘폭력, 권위, 배금(拜金), 다수의 압박을 부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찾아라. 그렇게 말하는 걸까…….’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온다.

소녀연맹은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세계관을 만들고 있다. 그게 이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주제 의식은 공유하는 듯했다.

유용태는 뮤비를 쭉 보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멈추었다.

다른 모든 부분은 대강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것만은 모르겠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거지?’

뮤비가 끝나기 10초 전, 거의 마지막 부분.

이미 곡은 끝났다.

하지만 뮤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빌딩 안에서, 창문을 통해 몰려 들어오는 민중을 보고 있는 멤버들.

그녀들은 동시에 뒤를 바라본다. 그리고 어둠으로 가득 찬 방 안쪽, 의자에 앉은 어느 남자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가 눈을 뜨자 새하얀 흰자위와 검은 동공만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그것으로 뮤비는 끝난다.

‘다음 앨범 스포 같은 건가.’

홀로 생각해도 모를 문제다.

그래서 유용태는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사람들과 뮤비 떡밥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새벽이 가볍게 지나갔다.

* * *

“이분 누군가요?”

‘롱 포’ 뮤비의 마지막 부분을 본 리카가 물어보았다.

“한 이사님이잖아.”

“그건 아타시(저)도 알아요!”

뮤비의 마지막에 흑막처럼 등장한 남자.

그 배우는 한구인이었다.

“이분이 소녀연맹 세계관의 적인가요! 흑막인가요! 뭔가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된 거 같아서 두근두근거려요!”

“그래?”

“빨리 한 이사님을 없애버리고 싶어요! 정의구현!”

“……한 이사님은 그냥 배우라니까.”

“그건 아타시(저)도 안다니까요! 그래서 한 이사님의 정체는 뭔가요?”

“우리도 몰라.”

“에엑?!”

조정훈 감독의 떡밥 뿌리기 병이 발동한 것일 뿐이다.

그는 데뷔곡인 ‘아니’ 뮤비에서도 마지막에 저런 연출을 주었다.

무슨 악의 세력이 드리우는 것을 표현했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이번에 등장한 한구인은 그 악의 세력이 구체화한 형태인 거겠지.

“흠…….”

리카는 성필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자꾸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녀는 성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갑자기 애교를 부렸다.

“이사님, 아타시(제)가 애교를 보여드릴 테니까 알려주세요! 실은 알고 계시는 거잖아요! 이잉, 아잉, 뿌뿌.”

“몰라.”

“히도이(너무해)! 제 애교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요!”

“아닌데? 리카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애교부리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손나(그런)! 그럼 이제부터 애교 통제예요! 아타시(저)의 애교는 희소자원이라구요!”

리카는 흥, 하더니 등을 돌렸다.

‘귀엽다.’

“리카 삐졌어?”

“아뇨! 이건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예요!”

“그렇구나.”

“저 갈 거예요! 지금부터 30초 동안 이사님을 싫어하기로 정했어요!”

“그렇구나.”

“따라오지 마세요!”

리카는 직접 한구인을 보러 갔다. 그라면 뮤비에 담긴 떡밥을 해결해주리라 믿어서였다.

성필도 따라갔다.

“따라오지 마시라니까요!”

“그렇구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거 같네요!”

한구인은 1층 소파에 앉아 신아름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중이었다.

“아앗! 아름이 너무해! 혼자서만 한 이사님의 알아 두면 쓸모없지만 재미있는 잡학 지식 강의를 듣다니!”

“리카 씨. 굳이 ‘쓸모없지만’을 붙여야 합니까? 인문학이란 게 일견 쓸모없어 보일 수는 있지만, 인간다운 품성과 세련된 지혜를 도야하는 학문으로써…….”

“무슨 이야기인가요! 저도 처음부터 들려주세요!”

리카는 신아름의 곁에 자리 잡았다. 덩달아 성필도 한구인의 옆에 앉았다.

성필은 그가 든 책을 보았다.

“성경?”

“예. 아름 씨가 궁금하다고 하셔서 가르쳐드리는 중입니다.”

“아름이가 왜?”

“사장님 때문에요.”

신아름이 말하길, 성경이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다고 한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홍규헌은 기독교도다.

데뷔 앨범 발매 때 사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까지 드리지 않았던가.

“사장님 되게 강한 이미지잖아요. 근데 좀…… 종교를 믿으신다는 게 안 어울린다고 할까.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그럼 신아름의 머릿속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약한 이미지일까?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하자면, 종교는 마음의 위안을 줍니다. 비합리적인 고난과 시련에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지요. 예를 들어 여기, 마르코 복음서의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읽어보시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까?”

“정신승리 같은데요.”

한구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주변에 홍규헌이 있는지 빠르게 살폈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스승의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정신승리란 단어는…… 질박한 느낌이 납니다만, 아름 씨의 발상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걸 포장해주네.

“예수님이 정신승리 했다는 거요?”

“……니체도, 프리드리히 니체도, 아름 씨보다 훨씬 세련된 언어와 유려한 문체로 서술하긴 했지만, 아름 씨와 비슷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정신승…….”

“아름 씨. 세상에는 정말, 본인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거 혹시 저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저히, 평생 이해할 수 없을 듯한 돌아버린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분노하다 보면, 결국 자신도 같은 곳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도, 돌아버린 사람이요? 진짜 저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한구인이 과격한 어휘를 쓰자 신아름은 깜짝 놀랐다.

그는 금세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언제요? 한 이사님이 다른 사람 싫어할 줄도 아셨어요? 누구 싫어하시는데요? 팀장님?”

“한 이사님이 나를 왜 싫어하는데.”

“혹시 모르잖아요. 누구예요?”

“군대에 있을 때…….”

한구인은 최전방 수색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저도 군대에 있을 땐 종교를 가졌습니다.”

“많이 힘드셨…….”

“그때 성경이 없었다면 저는 육군 교도소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대체 어떤 군 생활을 보낸 거야!

“아무튼, 정말 본인의 힘으로 이겨내기 힘든 일이 있다면 종교에 의지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입니다. 혹시나 뜻이 있으시다면 사장님께 말해보십시오. 같이 교회로 가주실 겁니다.”

“전 괜찮아요. 힘든 일 있으면 팀장님한테 말하면 되거든요.”

신아름이 신뢰를 담은 웃음을 보였다.

성필도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에에, 둘이 뭐예요. 아타시(저)만 소외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요.”

“그거 ‘같아서’가 아니라 진짜 그런 거야. 팀장님이랑 나랑 쌓아온 세월이 있는데 리카 네가 어떻게 끼어들어.”

“히도이(너무해)! 이사님은 우리 차별하는 사람 아니야!”

“리카, 너 나 싫어하기로 했다며.”

“30초만 싫어하기로 했잖아요?! 혹시 삐지셨나요? 그런가요? 사과드릴…….”

“아니.”

“휴우, 그럴 줄 알았어요!”

“이건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야.”

“손나(그런)……!”

리카는 성필의 화를 풀어주려고 또 애교를 부렸다. 아까는 자신의 애교가 희소자원이라고 해놓고선.

“리카, 너 끼 좀 그만 부려. 네 외모에 어울리지도 않잖아. 뮤비 본 사람들이 지금 너 보면 놀라서 뒤집히겠다.”

“편견이얏! 아타시(나)는 원래 이랬어!”

성필과 한구인은 즐겁게 대화하는 둘을 보며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롱 포’로 거둔 엄청난 성공은 멤버들의 분위기도 훨씬 좋게 만들었다.

임직원들도 서로를 보면 자동적으로 웃음이 나오는데, 이 성공을 직접 체감할 소녀연맹은 더할 것이다.

‘하아, 행복하다 진짜. 매번, 계속 성공만 했으면…….’

예전에도 그랬지만.

성필은 점점 더 회사에 있는 게 좋아졌다.

* * *

컴백 3일째.

아침 회의 자리는 초상집 같았다.

[저는 소녀연맹 아름(신아름)과 동창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으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당연히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

신아름은 반에서 실세 같은 느낌이었고 같은 반 친구들에게 욕설을 하거나 툭툭 치면서 위화감 조성을 했습니다.

…….

저랑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신아름의 표적이 됐습니다. 이유는 나중에 알았는데 자기보다 예쁘다는 이유였습니다. 필통을 훔쳐서 창밖으로 던지거나 근처에 친한 남자애들을 불러서 성희롱을 했습니다.

…….

신아름은 진짜 막 나가는 애였습니다. 선생님한테도 소리치고 대들고 교무실 문도 부서져라 닫고 나오고 그랬습니다. 선생님들도 신아름을 못 건드릴 정도였습니다.

…….

저와 제 친구에게 죽을 정도로 고통을 줬던 애가 정작 티비에 나와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고 있었습니다…….]

홍규헌이 마른세수를 했다.

“신아름 학폭은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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