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조아라는 성필의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였다. 신뢰가 가득 담긴 그의 말을 듣고, 똑바로 그를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자꾸만 생각을 숨기는 것도 못 할 짓이겠지.
조아라는 심호흡한 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밝히려고 했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믿음이 잔뜩 담긴 성필의 눈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아, 격려가 부족해? 어떻게, 안심될 때까지 머리칼이라도 빗겨줄까?”
“내가 뭔 개예요?!”
성필의 농담으로 긴장이 조금 풀렸다.
조아라는 본격적인 용무를 꺼냈다.
“하이라이트 직전 파트 안무 있잖아요. 그거 계속 연습해도 실패가 한 번쯤은 나올 거 같거든요.”
“그래?”
“안무 좀 바꾸는 거 어떨까 한데요.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안무를 바꾸자.
하기 쉬운 제안은 아니었다.
‘롱 포’에서 가장 멋지다고 평가받는 안무였으니까. 그 동작 자체보다는, 이후로 이어지는 느낌이 대단하다.
고민하던 성필은 조아라의 표정에 서린 아쉬움을 읽었다.
“너도 그거 없애기 아깝지?”
“……그래도, 무대에서 실패하면 안 되니까요.”
“왜 멤버들한테 바로 안 말하고 나한테 왔어?”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했는데…… 내가 바꾸자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닌 듯했으나, 일단은 수긍해주었다.
성필은 따스하게 미소 지어주곤, 조아라를 정지음에게로 데려갔다.
정지음은 퇴근 시간이 지난 지 한참 됐음에도 작업실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지음아.”
“어, 형 오셨어요?”
“……너 병 있는 거 아니야? 가끔씩 뺨이 너무 빨간데?”
정지음은 작업실을 사랑한다.
너무 사랑해서 장비를 사랑스럽게 쓰다듬고 뺨을 비비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뺨이 붉게 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죽을 때까지 혼자 간직해야 한다.
“아니요. 저 원래 피부 약해요.”
“흠. 아라가 곡 관련해서 생각이 있다는데, 지금 시간 괜찮아?”
“네.”
조아라가 낸 아이디어는 이러했다.
‘롱 포’의 구성은 1절 벌스―코러스―2절 벌스―코러스―브릿지―코러스(하이라이트)이다.
그런데 그곳에 한 파트를 추가하는 것이다.
“브릿지 끝나고 댄스 브레이크를 넣자고?”
“네. 오빠도 안무 봤죠?”
“당연히 봤지.”
“하양 언니가 마이크를 뒤로 홱 넘겨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음…… 천천히 넘기면 안 될까? 아니면 브릿지 들어가기 전에 텀을 더 둘까?”
“곡이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게 멋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리고 느리게 하면 안무 느낌이 안 살아요.”
“댄스 브레이크라.”
“중간에 끼이는 부분이 있으면 스탠딩 마이크 정리할 시간 벌 수 있잖아요.”
밴드 사운드로 댄스 브레이크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롱 포’ 자체가 밴드 악기가 주축이 된다. 그런데 밴드를 배경으로 댄스 브레이크를 넣는다니.
“EDM으로 하면 되잖아요. 그 뭐냐, 리믹스 버전처럼.”
“리믹스? 아라 리믹스란 말도 알아?”
“하아, 참나. 대체 회사 사람들 날 얼마나 바보로 아는 거야……. 나 진짜 공부 많이 하거든요!”
“으, 응, 미안.”
정지음은 땀을 삐질 흘리며 조아라를 달랬다.
“나 한의사님이 추천해준 책도 다 읽는다고요!”
“아, 알았다니까…….”
달래는 데 좀 오래 걸렸다.
“알겠어. 한 번 만들어볼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롱 포’의 구조를 따오고, 거기에 전자 악기를 삽입하면 됐으니까.
“여기 이런 거 넣어줘요. 드르르르륵.”
“이렇게?”
“네네. 딱 이거예요. 그리고 여기선 그…… 소리 줄여줘요.”
“이렇게?”
“아니요. 그냥 소리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성필도 중간중간 말을 보탰다.
“악기들이 물에 잠긴 것처럼?”
“어, 네. 네! 그렇게요! 아저씨 말대로 해줘요.”
“이렇게, 이거 맞아?”
“네!”
어떻게 말로만 설명해주는데 전부 다 알아듣지? 조아라는 신기하면서도 존경이 서린 눈으로 정지음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의 짧은 협업으로 15초가량의 댄스 브레이크 파트가 생겨났다.
‘재밌다.’
정지음은 비록 댄스 브레이크가 추가된 버전이 사용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댄서의 의견을 들으면서 작곡하는 건 처음이네.’
댄스와 곡은 일심동체다, 이런 말을 흔히 하긴 한다. 그렇지만 진짜로 두 분야가 긴밀히 협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약간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안무가는 곡의 보컬을 신경 쓰지 않고, 가장 멋지게 보이는 동작을 때려 박는다.
역으로 작곡가는 댄스를 생각하지 않고, 듣기에 가장 좋은 구조로 곡을 만든다.
당연히 두 개가 합쳐지면 불협화음이 난다. 그렇기에 댄스 시안과 곡을 수정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만들면서 댄서 의견을 들으니까 조율도 빠르고. 또 내가 생각하지 못한 형태로 의견이 나오고.’
색다른 경험이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자, 그럼 처음부터 틀어볼게.”
롱 포(편곡: 조아라) 버전이 울려 퍼졌다.
곡이 끝나자, 정지음이 마우스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정지음이 공감해달라는 듯 성필을 보았다.
“어지러워…….”
안타깝게도, 성필은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정지음에게 공감해주지 못했다.
* * *
다음 날 아침 회의.
새로운 롱 포(편곡: 조아라)가 가로 엔터의 임직원들 앞에서 소개되었다.
“……조아라 불러와.”
갑자기 회의실로 불려온 조아라는 공포에 떨었다.
‘내가 낸 생각이 그렇게 안 좋나? 호, 혼나는 건가?’
조아라가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던 도중.
“다들, 조아라 헹가래 올려.”
모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조아라를 하늘 높이 띄웠다.
조아라의 꺄악거림이 한동안 회의실을 울렸다.
그녀가 헛구역질을 하며 벽을 짚고 있는 동안, 홍규헌이 곡에 대해 설명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진짜 훨씬 좋아.”
하이라이트 코러스는 하이라이트란 이름에 맞게 반주도 변화한다.
일렉 기타가 추가되고, 드럼은 더 화려하게 기교를 올리며, 베이스도 강렬해진다.
흔히 ‘터뜨린다’고 표현되는 기교다.
1절 코러스, 2절 코러스와 음악의 가짓수와 기교에서부터 차이를 주어 진정한 ‘하이라이트’로 만드는 것이다.
“브릿지에서 하이라이트로 바로 넘어갈 때도, 물론 좋았어. 그런데 중간에 댄스 브레이크 파트가 삽입되니까…….”
하이라이트의 강렬함과 화려함이 더 돋보인다.
댄스 브레이크, 묵직한 EDM 사운드가 밴드의 사이에 끼어들어 새로움을 준다.
이는 반복적인 곡 구조의 탓에, 곡이 쉽게 질리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극도로 절제된 댄스 브레이크의 EDM 사운드 뒤, 화려하게 터지는 밴드 사운드는 하이라이트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이른바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처음 들으면 댄스 브레이크가 어색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그거 끝나고 나오는 하이라이트가 진짜 극락이에요.”
손혜빈은 물론 다른 임직원도 전부 동의했다.
이 그림을 직접 만들어냈던 정지음은 댄스 브레이크 추가 버전을 듣자마자 손을 덜덜 떨기까지 했었다.
“아무튼 그렇게 돼서, 조아라.”
“네.”
“잘했어. 이 정도면 편곡에 이름 실어도 되는 거 아니야? 진짜 잘했어.”
처음 들어보는 사장의 직접적인 칭찬에 조아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홍규헌은 조아라를 내보낸 뒤, 다시 평소의 무표정을 되찾았다.
“나만 설레발 떠는 건 아니라고 믿어. 바뀐 버전이 훨씬 좋아.”
이미 조아라를 불러오기 전에 합의를 본 내용이었다.
“문제는, 컴백까지 1주 하고도 조금밖에 안 남았는데, 저걸 어떻게 반영하느냐야.”
댄스 브레이크는 15초 정도다.
“먼저, 안무. 댄스 브레이크라는 이름답게 멋진 안무가 필요할 거야.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춤만 볼 거잖아. 그리고 뮤비.”
뮤비에도 15초의 댄스 브레이크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평범한 뮤비였다면 그냥 춤추는 장면을 삽입했겠지. 그런데 ‘롱 포’ 뮤비에는 춤이 없어.”
정말로, 춤을 추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
전부 서사, 스토리로만 채워져 있다.
임직원들 사이에서 공식 뮤비로 통하는 스토리 버전과 달리, 안무로만 이루어진 퍼포먼스 버전이 따로 존재하기까지 한다.
그런 뮤비에 댄스 브레이크를 넣으려면 조정훈 감독도 진땀깨나 뺄 것이다.
“박 이사. 뮤비 심의에 얼마나 걸리지?”
“이틀에서 사흘입니다.”
“뮤비 댄스 브레이크 파트 기획에서 제작까지, 안전하게 간다면 3일이 필요할 거야. 지금 결정해야 해. 바뀐 버전으로 가? 말아?”
물을 필요도 없었다.
댄스 브레이크 삽입 버전으로 만장일치가 나왔다.
“박 이사. 지금 당장 조정훈 감독한테 바뀐 음원 전송하고 미팅 잡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백민정 안무가한테…….”
“안무 쪽은 일단 아라 거 보고 생각하시죠.”
“조아라? 조아라가 왜?”
설마.
“걔 여기에 안무도 만들었어?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 * *
조아라의 안무를 본 모두,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의 안무는 댄스 브레이크에 넣기 부족함이 없었다.
“이걸 하루 만에?”
조아라가 만든 안무답게 동작이 강하고 빠르다. 보기에도 시원하며 강렬하고, 곡의 분위기에도 맞는다.
“아라 아이디어를 받아서 제가 댄스 브레이크를 만들었잖아요. 아라가 저한테 작곡이랑 편곡 요구할 때, 머릿속에 그린 춤을 떠올리면서 의견을 줬다고 해요.”
즉, 댄스 브레이크 파트는 곡이 먼저 등장하고 안무를 짠 게 아니었다.
조아라가 안무를 먼저 떠올리고 곡의 댄스 브레이크를 만든 것이다.
그러니 조아라의 안무는 곡과 찰떡일 수밖에 없었다.
“허어…….”
작곡가와 댄서가 협업하면 이런 결과물이 나오는구나.
홍규헌은 감탄을 삼키고,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았다.
“내가 춤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거 난이도가 꽤 있어 보이는데. 애들이 숙달할 수 있어?”
댄스 브레이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장하양의 안무 때문이었다.
스탠드 마이크를 뒤로 멋지게 돌려보내는 동작. 그 직후, 빠른 템포로 터져나오는 하이라이트 때문에 스탠드 마이크를 뒤로 옮긴 뒤 다시 포지션을 잡을 휴식 지점이 필요했다.
“3초 정도 장하양이랑, 마이크를 받는 신아름이랑 리카가 빠져 있는다고 치면. 나머지 멤버들은 어떻게 배치하지?”
일단 이게 첫 번째 고민.
그리고 두 번째 고민은, 멤버들이 이 안무를 일주일 내에 숙달할 수 있는가.
그에 성필이 의견을 제시했다.
“그냥 아라랑 아름이 빼고 다른 멤버들은 뒤로 보내죠. 마이크를 받는 멤버는 리카랑 설하로 바꾸고요.”
“조아라랑 신아름만? 왜 신아름만?”
자연스러운 의문.
그 직후, 홍규헌은 눈을 크게 떴다.
“맞네. 신아름은…….”
한 번 본 것을 즉시 구현할 수 있다.
많이 보면 볼수록, 하면 할수록, 모방도가 계속해서 상승한다.
홍규헌은 조아라가 그린 그림에 감탄을 이어갔다.
성필은 홍규헌이 진정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사실, 방금 본 댄스 브레이크 안무가 완성본이 아니에요.”
“혹시 신아름이랑 할 듀오 안무까지…….”
“네. 미리 아라가 만들어뒀어요.”
* * *
“곡에 댄스 브레이크를 추가해? 조아라 또 너만 돋보이려고 수 쓴 거야?”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신아름이 틱틱댔다.
“그렇다. 뭐 어쩔래. 꼽냐?”
“꼽다.”
“그럼 같이하자.”
“……어?”
신아름이 당황했다.
“댄브 때 같이 추자고? 내 파트 소화하기도 바쁜데 내가 왜.”
신아름은 아까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걍 너 혼자 해. 스포트라이트도 받고 좋겠구만.”
“아이잉, 아름아앙.”
조아라가 신아름에게 달라붙어 애교를 떨었다.
“아 소름 끼치니까 꺼져!”
“아름아앙. 같이해죠. 해죠오.”
“아라쨩 히도이(너무해)! 왜 아타시(나)한테는 애교 안 해주는 거야!”
리카도 조아라의 뒤에 달라붙었다.
신아름은 두 명에게 붙잡힌 꼴이 되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
“……하아. 진짜, 나도 바쁜데.”
“어차피 해줄 거면서 튕기긴. 비싼 척하지 마.”
“뭐?! 아, 아니, 해주겠단 사람한테 뭔……!”
“빨리 서봐. 바로 맞춰보게.”
신아름이 이를 갈았다.
어쨌거나, 신아름은 조아라의 안무를 보자마자 즉시 터득했다.
“아름이 캇코이(멋져)!”
“하, 이 정도야 별것도 아니…….”
“그럭저럭 봐줄 만하네.”
“안 해!”
“아이잉. 아름아앙. 또 왜그래애.”
“미치고 팔짝 뛰겠다 진짜…….”
소녀연맹 댄스 듀오, 결성!
성필은 둘의 듀오 댄스를 영상으로 찍은 뒤 연습실을 떠나려 했다. 조정훈 감독에게 전송할 용도였다.
그때 조아라가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멈춰 세웠다.
“아저씨.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시간 안에 곡 나올 수 있어요? 그 뭐더라. 믹싱이랑 마스터링이랑 프레싱…….”
성필이 따스한 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네가 걱정할 거 아니야. 그리고 시간 충분해. 오히려 네가 ‘롱 포’를 더 좋게 만들어줬으니까 고마운 마음뿐이지. 잘했어.”
조아라도 기쁜 미소를 띠었다.
* * *
사실, 시간과 자금이 빠듯했다.
“사장님 스탑! 프레싱 들어가지 마요!”
[네? 이제 막 시작했는…….]
“그거 전량 폐기하고 기다려주세요!”
[폐기요? 정말로 찍은 거 전부…….]
“네! 전부 없애요!”
[아, 예. 그럼 마스터 버전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얼마나요?]
성필도 모른다.
[거참, 이렇게 스탑을 시키시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금은 치르고 시간도 꼭 맞추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믹싱 엔지니어에게 연락했다.
[네, 15초 정도면 바로 봐 드릴게요. 완성되면 메일로…….]
“네네! 그렇게 해주세요!”
다음으로는 마스터링 엔지니어에게 연락했다.
[죄송한데 15초 길이라도 갑자기 제가 맡기엔 무리가 있겠네요. 저도 스케줄이 다 차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마스터링 엔지니어, 구태범.
그는 전문 마스터링 스튜디오를 보유한 엔지니어였다.
데뷔 때는 곡이 하나뿐이라, 홈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마스터링 엔지니어에게 곡을 부탁했다.
하지만 미니 앨범은 여러 곡이 포함되었고, 더 높은 완성도를 얻어야 했기에 구태범을 찾았던 것이다.
“어떻게 좀……. 저희가 계속 일해오지 않았습니까?”
[예?]
이번 미니 앨범이 첫 협업인데?
“정에 호소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약간만 봐주시면 됩니다. 곡당 페이도 세게 계산해드리겠습니다. 엔지니어님만큼 걸출하신 분이 정말 드물잖아요. 물론 굉장히 곤란하시겠지만, 제발, 부디…….”
[…….]
한숨 뒤, 구태범이 허락했다.
성필은 당장 그의 작업실로 뛰어갔다.
마스터링은 곡이 탄생하는 마지막 과정이기에, 일반적으로 프로듀서가 그 과정을 감독하는 편이 좋다.
“이렇게 마무리하면 될까요?”
“네네! 정말 감사합니다!”
구태범은 머리를 긁적인 뒤 본심을 고백했다.
“저한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제가 일 못 받았으면 아쉬울 뻔했네요. 확실히 이 버전이 훨씬 좋아요.”
능력 있는 마스터링 엔지니어는 하루에도 앨범을 몇 장씩, 한 달에 수백 장씩 들어본다.
트랙1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한꺼번에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으니, 한 달에 곡을 많게는 만 개까지 들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한국의 음반 업계 트렌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앨범 좋아요.”
그런 마스터링 엔지니어, 구태범이 소녀연맹의 성공을 예견해주었다.
“괜찮으시면 다음에도 저한테 맡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성필은 그와 악수했다.
이후 즉시 마스터 버전을 프레싱으로 넘기고 앨범 생산에 들어갔다.
‘시간 내에 다 찍어낼 수 있을까? 패키지 마치고 유통까지 고려하면…….’
스케줄을 딜레이 시키느라 유통사와 업체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모르겠다.
만약 시일이 늦어지면 엄청난 위약금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
‘보니까 맞출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성필은 기가 다 빨려선 회사로 돌아왔다.
조아라가 1층 휴게실에서 쉬는 중이었다.
“아저씨 하이.”
“어. 쉬는 중이야?”
“네. 이것만 보고 연습하러 가려고요.”
조아라는 텔레비전을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성필은 그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가려던 때.
“아저씨, 고생했어요.”
“어? 뭐가?”
“아니, 요즘 바쁘게 회사 밖으로 돌아다니고 그러잖아요. 그냥 고생했다고요.”
성필은 눈물이 왈칵거리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조아라에게 말했다.
“머리카락 빗겨줄까?”
“내가 개인 줄 알아요?!”
“대견해서 그래. 말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하냐.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해줄 게 없네.”
“그렇다고 뭔 자꾸 머리를…….”
속는 셈 치고 받아보기로 했다.
“아…….”
“기분 좋지?”
“아, 어, 쪼금?”
“이사님 즈루이(치사해)! 왜 아라쨩만 해주는 거예요! 아타시(나)도 해줘요! 아라쨩은 단발이라서 빗을 필요도 없잖아요!”
“너도 이제 단발이잖아.”
헤어샵에서 망가졌던 리카의 스타일은, 결국 컴백이 다가올 때까지 충분한 길이로 자라나지 않았다.
“아타시(나) 대머리 아니에요오! 붙임머리도 했다구요!”
대머리라고 한 적 없는데.
“리카 넌 가발 써서 빗질 함부로 하면 안 되잖아. 걍 보고만 있어.”
“가발이 아니라 붙임머리야아……! 아라쨩 너무해애……!”
리카가 울먹거렸다.
“리카도 이리 와. 해줄게.”
“헤헤.”
리카가 울음을 그쳤다.
* * *
“아, 더워…….”
점심이 지나간 시각.
김채현은 부채를 부치며 땡볕 아래에 있었다. 그녀의 앞으로는 긴 줄이 이어졌다.
소녀연맹의 첫 음방 사전 녹화를 기다리는 인민들의 행렬이었다.
“채현아!”
뒤늦게 도착한 덕질 메이트 이선주가 대열에 합류했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가져왔어?”
“응. 하아,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이선주는 출석표를 프린트해오지 않았었다.
출석표가 없으면 소녀연맹 출석 스티커를 받을 수 없기에, 이선주는 육상 선수가 빙의된 듯 총알처럼 뛰쳐나갔었다.
“어디서 했어?”
“골목으로 계속 들어가니까 인쇄소 있더라.”
“덤벙대긴.”
“처음이라 긴장했나 봐. 근데 너 누구 찾아? 왜 자꾸 두리번거려.”
“응? 아, 그냥.”
김채현은 이번에도 유용태가 있나 싶어서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방청 신청 실패하셨나 보네.’
김채현은 희미한 아쉬움을 누르며, 준비물인 사전 앨범 구매 내역과 신분증을 확인했다.
이번 방청 신청은 치열했다.
추첨이었는데, 양식도 훨씬 복잡했고 소녀연맹에 관한 퀴즈도 맞춰야 했다.
소녀연맹 지박령이 된 김채현에게는 쉬운 수준이었으나, 확실히 절차가 귀찮아지긴 했다.
“다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팬들 사이에서 팬매(팬 매니저)로 통하는 민경섭이 공방 포카와 스티커를 나누어주었다.
“와, 나 미쳐…….”
김채현은 장하양의 포카를 받곤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도 너무 잘 나왔다.
“난 아라 나왔어.”
“야 이선주!”
“왜, 왜?”
“선배님이라고 해야지!”
“아! 난 아라 선배님 나왔어. 흐, 선배님.”
이제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니까!
두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를 지망했는데, 오로지 조아라가 그 고등학교를 나왔단 이유 때문이었다.
청소년기, 우상의 발톱 모양마저 닮고 싶은 법이다. 비록 출신 학교만이라도!
“들어가실게요!”
사전 녹화 관객들이 기대감을 품고 스튜디오 내부로 향했다.
김채현은 무대를 보자마자 가슴을 꾸욱 눌렀다.
‘우리 소련이들…….’
소녀연맹의 팬은 한동안 분열되어 있었다.
모든 뮤비 티저와 컨셉 포토가 공개되었음에도, 부정적인 의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뭐? 벌써 헐벗고 나와서 섹시로 이미지 소비 오지게 할 거라고? 중소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어차피 무대에서 가슴이랑 엉덩이만 흔들 거라고?’
절대 아닐 것이다!
오늘, 김채현은 자신의 눈으로 진실을 지켜본 뒤, 커뮤니티에서 날뛰는 철새들에게 통렬한 일침을 가할 것이다.
“채현아.”
“응?”
“사녹인데 무대 별로 안 꾸몄지 않아?”
“아, 그러게……. 저번에도 그랬는데.”
이왕 사녹 기회를 잡았는데, 무대가 썰렁하다.
다른 그룹은 온갖 장식으로 바닥과 벽면, 심지어 천장까지 도배하던데.
“돈이 없나?”
“중소라서…….”
현재, 무대에 무엇이 있느냐.
흰색 천이다.
흰색 천이 벽과 바닥 전체를 덮고 있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저예산으로라도 분위기를 내려 했던 것일까.
솔직히 실망이다…….
“아냐. 배경이 이래도 우리 소련이들은 빛나니까. 괜찮을 거야.”
“리얼. 아, 진짜 비밀 유지 그거만 안 적었어도 무대 보자마자 스포하고 다닐 텐데. 안티년들 지랄 떠는 거 개꼴보기 싫어.”
아직 시작도 안 했건만, 두 사람은 벌써부터 레전드 무대라도 본 듯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 뭐 나온 것도 없는데 섹시 컨셉이라느니…… 화제 끌어보겠다고 별일 다 한다느니…….”
“그래. 우리 소련이들 그런 거 안 해도 충분히 화제성 있…….”
“안녕하세요!”
백설하의 목소리다!
이전 사녹과는 달리 자신감이 넘친다.
김채현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터질 듯 울렸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무대를 바라보았.
“여러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설하의 복장은, 그래, 정장이었다.
아니, 정장인가?
모르겠다.
파란색 배경에 오만가지 물감을 흩뿌린 듯한 컬러. 그리고 퍼즐을 조각조각 흩어놓은 듯한 패턴.
화룡점정은 그 옷의 형태였다.
정장 재킷인데, 뒤트임과 옆트임이 있다.
백설하는 재킷 안쪽에 탱크탑 입고 있어, 그녀가 걸을 때마다 재킷 자락이 흔들리며 옆구리와 등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배야 이미 드러나 있고.
아예 탱크탑과 숏팬츠를 기본 형태로 하여 다리와 배, 어깨를 훤히 드러낸 아이돌 복장이야 많다. 요즘 유행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흔한 복장보다 더 많이 가린 게 확실한 저 옷이.
너무 야하게 보인다.
‘엄마 나 쓰러질 거 같아…….’
김채현은 이마를 짚고 현기증을 참았다.
옷이 잘 어울리는 것과 별개로 너무나 충격적이다.
‘진짜 섹시 컨셉이었어?’
오늘 커뮤니티 폭발하겠네…….
“저희 의상 어떤가요?”
예뻐요오오오오!
마음과는 별개로, 인민들은 대동단결하여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사실이기도 했다.
멤버들은 저마다 의상의 특징이 조금씩 달랐지만, 정장이라는 기본 형태는 공유했다.
“조금 놀라셨죠? 뮤비 티저랑은 다르잖아요.”
백설하가 블레이저의 옷자락을 살짝 폈다. 그녀의 손은 긴장으로 땀에 젖어 있었다.
처음 무대에 입장했을 때, 그녀도 팬들의 표정을 보았다.
정말 놀란 듯했었다.
‘설하야. 팬 커뮤니티 반응을 봐서 알겠지만, 사람들이 너희 복장에 처음엔 부정적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증명해주어라.
소녀연맹의 의상은 오로지 곡을 위해 만들어졌고, 이 곡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보여주어라.
팬들의 걱정이 봄이 오기 전의 눈더미에 불과했단 것을.
성필의 그 말을 금과옥조처럼 가슴에 새기고, 백설하는 팬들의 사이에 섞인 불신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신 일부러 평소보다 들뜬 텐션으로 토크를 이어갔다.
“하하, 그래서…….”
PD가 큐 사인을 주었다.
아쉽게도 토크 시간은 끝인 듯했다.
백설하는 좌우로 돌아보았다. 멤버들이 그녀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연맹의 눈동자 안에는 불안과 걱정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픈 열망뿐.
“들어주세요. 곡의 제목은.”
Long For.
소녀연맹은 갈망을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