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김채현, 고등학생이 되다!
“너무 떨려…….”
“나도.”
덕질 메이트인 이선주와 같은 학교로 왔다.
원래 집과 가장 가까운 학교가 있었으나, 15분 정도 더 먼 학교를 1지망으로 적었다.
이유는.
“여기가 아라가 다녔던 학교 맞지?”
“응. 어, 여기다! 아라가 졸업사진 찍었던 곳!”
두 사람은 성지(?)에 각자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등교 첫날부터 소녀연맹 덕질에 한창이었다.
이선주는 김채현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문득 현타가 왔다.
‘소녀연맹 아라가 다녔던 학교라고 1지망에 적어서 내다니…….’
인생을 아이돌에 갈아 넣은 건가.
매일 15분 더 일찍 일어나게 됐지만, 후회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라한테 DM 보내자!”
“서, 선배님이라고 보내도 되나?”
“빨리 보내!”
후회 따위 조금도 없다.
청소년, 질풍노도의 시기.
끊임없이 자아에 대해 고민하고 그렇기에 우상을 찾아 헤매는 시기.
누군가는 위인을, 누군가는 사업가를, 또 누군가는 주변의 어른이나 또래를 우상으로 삼는다.
김채현과 이선주는 그 우상을 아이돌에서 찾았을 뿐이다.
청소년들은 우상과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 한다. 비록 출신 학교뿐일지더라도.
두 사람은 2층까지 함께 올라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같은 반이었음 좋았을 텐데.”
“응, 선주야. 잘 지내. 2학년 때는 꼭 같은 반 되자…….”
둘은 눈물을 머금고 서로를 떠나보냈다.
김채현은 1학년 6반 교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일찍 온 탓인지 아직 몇 명 없다.
눈이 마주친 아이들과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누고, 김채현은 칠판을 보았다.
담임이 미리 마련해 둔 듯한 좌석표가 붙어 있었다.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구나.’
정해진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점점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너 윤미 맞지? 3학년 3반에!”
“응! 넌 2반?”
“어어, 맞아 맞아! 나 너네 반 지나가면서…….”
“너 게임 뭐 하냐?”
“롤.”
“어, 나도. 티어 몇임? 끝나고 피방 고?”
같은 학교였던 이들은 빠르게 무리를 이루었다. 침묵만이 감돌았던 교실이 조금씩 떠들썩해지는 것을 보며, 김채현은 불안에 빠졌다.
‘친구 못 사귀면 어떡하지? 바, 밥도 혼자 먹고 그러면……. 앞이랑 뒷자리 애한테 말 걸기가 제일 좋은데 아직 안 왔고…….’
김채현은 입을 꾹 다물고 괜히 공부하는 척했다. 귀를 열어도, 자신이 관심 있을 만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제발 아무나 나한테 말 좀 걸어줬으면! 무슨 말이든 맞춰줄 텐데! 아이돌 좋아하면 같이 좋아해야지! 그, 그럼 잡덕이 되는데……. 소녀연맹 좋아하는 애 없을까? 아직 메이저는 아니니까 확률이 엄청 적겠지…….’
왠지 모르게, 김채현의 머릿속에 27살이 된 유용태가 떠올랐다.
‘이제 고등학생 된다고? 뭐? 친구를 못 사귈까 봐 걱정이야? 별게 다 걱정이다. 그냥 생활하다 보면 친구는 그냥 생겨.’
뭐 그런 무신경한 말이 다 있어!
생각나도 이런 말이 생각나네…….
어른에게는 별거 아니게 보일지라도, 중학생과 고등학생에게 새 학년이란 엄청난 긴장과 고통의 순간이다.
‘대화하는 데 못 맞추면 어떡하지? 아아, 난 친구 못 사귈 거야…….’
그때, 김채현의 옆으로 어느 남학생이 지나갔다.
‘와.’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눈 돌아가게 잘생겼다.
그는 가방을 책상 걸이에 걸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동작에서도 예의 바른 분위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마치 웹툰에 나올 것만 같은 미남 모범생 스타일.
김채현은 멍하니 그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앞자리는 남자애구나. 이름이 여자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그럼 뒷자리 애한테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응?”
김채현의 눈에 무언가가 잡혔다.
그 남학생의 가방에 앙증맞게 달린 열쇠고리.
검은색과 분홍색의 가죽을 엇갈려 꼬고, 둘이 만나는 금속 부분에는 작게 글자가 새겨져 있다.
People(인민).
‘저, 저거, 한 달 전에 케다크림 님이 나눔하신 열쇠고리잖아?’
케다크림.
수제 액세서리 샵을 하는 소녀연맹의 팬이다.
김채현도 케다크림을 팔로우했기에, 그가 직접 만든 소녀연맹 굿즈를 나눔 한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그래서 신청을 했었는데, 아쉽게도 떨어졌다.
그것을 눈앞의 남학생이 가지고 있다.
“저기.”
김채현은 그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응?”
남학생이 살짝 당황했으면서도, 습관이 된 미소를 입에 걸며 돌아보았다.
“이름…… 백수현 맞지?”
“아, 응. 너는 김채현이지?”
“어어, 어, 맞아. 어떻게 알아?”
“좌석표 있잖아.”
그, 그렇지 참.
“그런데 왜 불렀어?”
김채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너…… 소녀연맹 알아?”
백수현은 눈을 크게 떴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그가 말했다.
“투쟁.”
김채현이 답했다.
“해방.”
“소녀.”
“연맹.”
“승리.”
둘의 입이 반가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인민……!”
그 기괴한 구호에 반 아이들이 이상하단 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둘은 하나된 인민일 뿐이었다.
“수현이 넌 누가 최애야?”
“설하 누…… 설하.”
“아 진짜? 설하 좋지. 예쁘고.”
“응.”
그리 답하는 백수현의 표정은 따스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얘 진짜 소녀연맹 좋아하는구나.’
아니라면, 저런 미소는 짓지 못할 테니까.
두 사람 사이에 쳐져 있던 어색함은 베를린 장벽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붕괴되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올 때까지 활기찬 대화가 이어졌다.
김채현.
그녀의 3월은 봄빛이었다.
* * *
유용태는 퇴근하고 집에 와 경건히 샤워했다.
그리고 단정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4월, 이번 달에 새로 산 35인치 모니터가 웅장한 자태로 유용태를 반겨주었다.
그는 떨리는 심정으로 아이튜브에 접속했다.
‘있다.’
이미 퇴근길에 몇 번이고 확인했으나,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뮤비 티저!’
데뷔 앨범 때는 컨셉 사진부터 조금씩 풀었으면서, 이번에는 통 크게도 뮤비 티저를 먼저 풀었다.
유용태는 가로 엔터에게 감사를 바치고, 방을 어둡게 만든 뒤 티저를 켰다.
어둠만이 보인다.
혹시 인터넷이 안 좋아서 렉이라도 걸렸나?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세상이 내린 감옥에 짓눌려]
백설하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나오며 화면에 빛이 잡히기 시작했다.
영상은 걷고 있는 어느 남성의 뒷모습을 잡았다. 정장을 입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구두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배경이 점점 넓어진다.
이윽고 남자의 어깨 너머로 장소가 밝혀진다.
‘방 안?’
이탈리아식으로 고풍스러우면서도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인테리어.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가 방 안을 엷게 비추고, 벽면에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정장의 사람들이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서 있었다.
[화분 속에 보존되던, 간신히 살아남은 순수함은 질식되었다.]
백설하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남자는 계속 걷는다. 그의 목적지는 방의 중앙에 있는 원목 탁자와, 그 너머에 있는 뒤로 돌려진 의자였다.
‘의자에 누가 앉아 있나?’
남자가 계속 그쪽으로 다가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 백설하겠지 싶었다.
이 영상의 제목이 Girls’ Craving Music Video Teaser #1 설하’이기도 했으니, 백설하가 주인공으로 나올 것이다.
[내 심장의 밑바닥을 파먹고 올라온 악의만이 유일하게 남은 친구였다.]
남자가 탁자 앞으로 오자, 의자가 돈다.
‘드디어 설하가……!’
얼굴이 안 보인다.
목 아래, 마치 마피아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정장 차림의 그녀만이 보인다.
[한없이 어둡고 파괴적인 악의만이.]
남자는 탁자를 돌아 백설하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카메라는 남자의 시선과 맞춰졌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받들고 손등에 키스한다.
그의 천천히 시선이 위로 올라가자 백설하의 얼굴이 드러났다.
지독한 무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에 키스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는 백설하.
[폭력에 복종하라.]
카메라는 점점 둘에서 멀어지고 마침내 방의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점처럼 작게 보이는 둘에게만 빛이 비추고, 문이 닫히며 다시 영상이 검게 물들었다.
검은 배경에 글자가 떠오른다.
[Long For]
“…….”
영화 예고편 같다.
아니, 애니메이션인가?
‘설하 뭐야? 컨셉이, 이게 무슨 컨셉이야?’
어둡다.
대체 소녀연맹은 뭘 표현하고 싶었던 거지?
이번 소녀연맹의 곡은 어떤 스타일이지?
‘컴백이 4월 말이잖아. 근데 티저 분위기를 보면 이건…… 도저히 계절이랑은 안 어울리는데.’
봄답게 화사한 느낌의 곡을 준비할 줄 알았건만,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유용태는 급히 ‘소녀연맹 마이너 갤러리’로 접속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소녀연맹 팬 커뮤니티로, 소녀연맹의 데뷔 후 파생 갤러리를 전부 통합함으로써 덩치를 불렸다.
그렇다고 나머지 갤러리가 사라진 건 아니고, ‘신아름 마이너 갤러리’나 ‘아라 마이너 갤러리’ 등 멤버별 갤러리는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
‘소녀연맹 마이너 갤러리’는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때문에, 소녀연맹 공식 팬 사이트에서는 언급조차 금지된 커뮤니티였다.
‘역시.’
게시판은 이미 광란의 도가니였다.
* * *
“어제 뮤비 촬영이 끝났는데요. 조정훈 감독님이 설하 뮤비 티저는 따로 찍고 싶으시대요.”
“왜?”
“뮤비 세트 중에서 원하는 그림을 낼 곳이 없었다고 하시네요. 고민하다가 연락하셨대요.”
어제 뮤비 촬영을 끝내고 피곤해할 백설하에겐 미안하지만, 빨리 진행해야 한다.
“그럼 비용을 더 들여야 하는 거야?”
“아뇨. 예산 안에서 JJH의 인건비로 나간 부분 있잖아요. 거기서 조정훈 감독님이 따로 쓰신대요.”
“……그렇게까지?”
“네. 이미 장소 섭외도 끝내두셨으니까, 가능한 시간 알려주면 진행하겠답니다. 대신 저희 도움이 필요하대요.”
“도움? 어떤?”
“정장이요.”
“응?”
다음 날, 소녀연맹 멤버들은 휴일을 맞아 절찬리에 늦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엔 늦게라도 다 함께 아침을 먹지만, 전날 뮤비 촬영을 끝내서 다들 피곤했다.
쿵쿵쿵!
“으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백설하가 잠에서 깼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10시였다.
‘아, 너무 많이 잤다.’
쿵쿵쿵!
백설하는 깜짝 놀랐다.
문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깨긴 했으나, 맨정신으로 다시 들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장하양이 부스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언니……?”
“하양아 더 자도 돼. 누워 있어.”
백설하가 그녀의 등을 받치고 가슴께를 누르며, 부드럽게 다시 눕혔다.
“네에…….”
장하양이 다시 잠에 빠져드는 것을 보며, 백설하는 터덜터덜 방문을 열고 나갔다.
백설하는 아침에 약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현관에 섰다.
반쯤 감긴 눈, 힘이 빠진 어깨, 구겨진 잠옷.
백설하가 문을 열었다.
“누구세여……?”
말끔하게 양복을 빼입은 성필이 있었다. 왁스도 발랐는지 헤어스타일이 깔끔하기 그지없다.
백설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어, 이사님?”
“설하야 오늘 약속 있어?”
백설하는 아까 쿵쿵거리며 현관이 두들겨질 때보다 더 놀랐다.
성필이 이렇게 차려입고 숙소까지 와서 약속이 있냐고 묻는 이유는…….
“어, 없는…….”
“그럼 씻고 나와. 나랑 오늘 어디 좀 가자.”
백설하가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이이, 이사니임, 이, 이러면 안 되는……. 저, 저는 아이돌, 데뷔했고, 이제……. 더, 더 이러면 안 되는데에……. 다시, 생각, 나중에…….”
“데이트 신청하는 거 아니니까 빨리 씻고 나와. 뮤비 티저 촬영하러 가야 해.”
“……네?”
“40분 줄게.”
성필은 촉박한 듯 시계를 보곤 문을 닫았다.
“…….”
백설하는 우당탕탕 세면실로 들어갔다.
“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현관을 나섰다.
머리카락의 물기를 대강 털어내고 화장도 하지 않으니 딱 30분 걸렸다.
바로 앞에 성필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일부러, 이사님 일부러 그렇게 물어보신 거죠?! 수, 숙소 들어가기 전에 남친 있냐고 물어보셨을 때처럼!”
“어, 맞아. 이번에도 걸리네. 빨리 가자.”
“이이……!”
백설하는 화난 발걸음으로 성필을 따랐다.
숙소 앞에는 성필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뒤에는 한구인의 차도 있었다.
“여기 타.”
성필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백설하는 성필의 장난에 화가 나 있었으나, 그가 직접 문을 열어주니 왠지 에스코트 받는 듯하여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티저 촬영하러 간다는 게 무슨…….”
“안녕.”
뒷좌석에 홍규헌이 타고 있었다.
“어?”
“설하야 안녕.”
조수석에는 민경섭도 있었다.
다들 짜기라도 한 듯 양복 차림이었다. 아니, 홍규헌은 원래 양복을 입긴 하지만.
“그럼 샵에 갈게.”
“네?”
샵에 왔다.
백설하는 영문도 모르고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을 받았다.
“촬영 장소 갈게.”
“네?”
왔다.
유명 호텔 안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중에서도 포토룸으로 사용되는 방이다. 하지만 기본 가격의 5배를 지불하면 레스토랑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정훈이 홍보를 해준다며 레스토랑 매니저와 담판을 벌인 결과, 원래 가격보다 낮게 방을 빌릴 수 있었다.
오늘 촬영장은 이곳이었다.
벌써 조정훈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 안쪽으로 가면 레스토랑 여자 스태프룸 있거든? 거기서 입고 와.”
백설하는 뮤비 촬영 때 입었던 정장을 다시금 받았다.
클리닝을 마쳤는지 따스한 향이 났다.
“…….”
아침에 약한 백설하.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만, 일단 입고 왔다. 오자마자 조정훈 감독이 대본을 주었다.
“대사가 아무것도 없네요?”
“어. 마지막에 의자를 돌리고 앉아서 손만 내밀면 돼.”
“아…….”
[(손등에 키스를 받는다)]
“…….”
백설하는 눈을 비빈 뒤 다시 읽어보았다.
“제, 제가 키스를 당한다구요?!”
“왜 앞에 ‘손등’은 안 읽어.”
“아, 아아. 그러네요. 나는 또……. 그으, 그럼 이 배우분은 누구신가요?”
“골라.”
가로 엔터 임직원들이 일렬로 섰다.
다들 정장을 입고 있었다.
홍규헌, 성필, 한구인, 손혜빈, 민경섭, 정지음.
백설하는 갑자기 찾아온 선택의 기회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임직원들과 눈을 맞추다가, 곧 불안감을 눈동자에 담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어, 왜 배우분이 아니라…….”
“인건비 절약.”
너무도 합리적인 이유다.
백설하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저, 저 혹시 하고 싶으신 분은…….”
“나 할래 나 할래 나 할래!”
손혜빈이 나오자마자.
“박 이사님으로 할래요!”
백설하가 기겁하며 외쳤다.
“왜?! 설하 너 언니가 싫어?”
“아, 아니요…….”
“근데 왜! 근데 왜애!”
팬미팅이 끝난 후의 회식 때, 가로 엔터 전원은 너무 취해서 떡이 됐었다.
다들 홍규헌의 집으로 가서 조금 더 놀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잠에 들었다.
백설하도 그러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손혜빈이 백설하를 끌어안고 티셔츠 안에 손을 넣은 채 잠들어 있었다.
말하진 못했지만, 무서웠다.
“……그래, 첫 키스인데 여자랑 하면 그렇다 이거지? 알겠다.”
손혜빈이 성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성필아, 설하를 부탁할게.”
“처, 첫 키스 아니잖아요! 손등에 하는, 아니, 그것도 진짜는 아닌…….”
“나한테 맡겨만 둬.”
“네?!”
“아니면 뭐야.”
손혜빈이 한구인, 정지음, 민경섭의 앞에 섰다.
“왜 성필인데?”
“그으…….”
“한 이사님은 싫어?”
“아뇨…….”
“지음이는?”
“으…….”
“경섭이는?”
“아니이…….”
“한 이사님, 지음아, 경섭아. 자존심 안 상해요? 뭔가 진 기분 안 들어?”
“박 이사님이면 인정하겠습니다.”
“형이니까요.”
“어쩔 수 없죠.”
“모야 모야. 나만 모르는 이유가 있어? 왜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여? 아, 맞다. 설하는 성필이한테 고백받았었지?”
백설하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몸만 꼬았다.
“설하 손등은 내가 가져간다!”
다들 박수를 치며 성필을 인정해주었다.
백설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익숙하니까요! 가장, 제일, 오래 봤으니까아…….”
성필은 씩 웃으면서 백설하에게 다가갔다. 백설하는 그가 다가오자 잔뜩 굳었다.
“이제 긴장 좀 풀렸어?”
“……네?”
“너 아침에 약하잖아. 일어나서 바로 촬영하려면 몸 좀 풀어야지. 소리 지르느라 목도 다 풀렸겠네. 다음에 나레이션 녹음하러 갈 때 따로 목은 안 풀어도 되겠다.”
“…….”
아침에 숙소 앞에서도 그렇고.
촬영하러 와서도 그렇고.
백설하는 두 번이나 놀림감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심지어 가로 엔터 전원이 합심한 듯 키득키득 웃고 있다!
확실히 백설하는 긴장이 풀렸다.
모두에 대한 분노 때문에…….
어쨌거나 긴장도 풀렸으니, 티저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설하야, 손등 키스할 때 입술 물지 마!”
“네, 죄송합니다. 그, 근데 손등 키스라고 하지 말아주시면 안 될까요……?”
입술도 안 닿는데…….
“설하야 설하야! 박 이사님한테도 눈 돌리지 마! 완전 냉철하고 잔혹한 표정! 어떤 마피아 보스가 부하한테 인사받으면서 눈을 돌려! 뮤비 때 몰입했던 거 벌써 다 잊었어?!”
“죄송합니다!”
의외로 시간이 꽤 걸렸다.
“설하야 너 입 좀 가만히 있어. 무표정이라니까! 자꾸 웃지 마!”
“네!”
백설하는 심호흡을 한 뒤 아래를 보았다.
성필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쥔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설하야 웃지 말라니까!”
“네, 넵!”
고단한 티저 촬영을 마치고, 백설하는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오늘 수고했어. 휴일이라 힘들 텐데.”
“……아니에요. 박 이사님도 고생하셨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백설하는 기가 다 빨린 기분이었다.
그녀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며 계속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악!”
그러다가 현관문에 머리를 박았다.
“아으…….”
머리를 문지르며 문을 열려던 순간, 그보다 빨리 문이 열렸다.
“누구신가요! 아, 쌤!”
리카는 반갑게 인사하려다가 갑자기 태세를 바꾸었다.
“아타시(저)를 빼고 어디서 놀다 온 건가요! 혼자만 놀러 가고 치사해요!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입고!”
“……응.”
백설하는 대답할 기력도 없어서, 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다들 늦은 점심을 먹던 도중이었다.
백설하는 밥을 한 공기 퍼서 식탁에 앉았다.
“쌤 어디서 놀았나요? 누구랑 놀았나요? 재밌는 일 있었나요?”
“야, 우리 식탁에 마피아 보스 있는데?”
“그러게. 갓 파더, 그라체(고맙습니다), 그라체.”
“여자면 갓 마더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음, 그럴듯하긴 한데. 아라 네 말이라서 신뢰가 안 가는데.”
“뭐?”
“언니, 밥 안 드세요?”
“아, 응.”
장하양의 물음에, 손등만 바라보던 백설하는 뒤늦게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밥을 먹다가 문득 떠올랐다.
‘아, 이거 옷 반납해야 하는데. 깜빡했네.’
근데 왜 아무도 말을 안 해줬지?
또 놀림이라도 당한 걸까.
뭐, 밥 먹고 회사로 갈까? 그러면…….
‘아냐, 일단 박 이사님한테 연락해보자. 그럼 회사로 오라고 하거나, 아니. 박 이사님이 오시겠, 지……?’
백설하는 밥을 빨리 먹었다.
* * *
소녀연맹 뮤비 티저가 공개된 이후, 유용태는 저녁도 먹지 않고 커뮤니티만 돌아다녔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소녀연맹 컨셉 어디다가 팔아먹었냐 ㅅㅂ]
[아니 딱 봐도 찐득한 노래 나오겠구만 ㅋㅋㅋㅋㅋㅋ 벌써 섹시로 이미지 소비하면 우리 애들 어쩌라고?]
[애들 다 20살 넘자마자 이 ㅈㄹ이네. 중소 하는 거 보기 X같다.]
[야 다 같이 단합해서 마플 좀 하자. 이거 가만히 둬야 함?]
[마플은 파생 갤러리인 ‘아라 마이너 갤러리’에서 해주세요.]
마플, 마이너스 플로우의 약자다.
커뮤니티를 부정적인 이야기로 도배하고, 소속사와 그룹에 불만인 사항을 계속 올려 커뮤니티를 곱창내는 기술이다.
당연히 기획사는 한껏 당황하게 된다. 특히 매니지먼트나 프로듀싱 노하우가 적고, 팬 반응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영세 기획사가 그러하다.
유용태는 한숨을 쉬며 몸을 뒤로 크게 젖혔다.
‘부정적인 여론의 비율은 대략…….’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