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여기서, 팡!”
안무가 백민정이 한 바퀴 돌아서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 기세가 강렬하여 주변의 공기가 진동하는 듯했다.
단순히 춤으로 만들어내는 기세가 아니었다.
백민정은 안무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오늘 남성용 정장 재킷을 가져왔다.
재킷의 밑단이 사타구니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다시, 팡!”
백민정이 큰 동작을 할 때마다 재킷의 옷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여기 옷도 같이 팡! 하는 게 간지거든.”
“오…….”
조아라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옷조차 안무의 일부 같았다. 옷 또한 안무의 소재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크게 움직인다고 재킷이 이렇게 펄럭이는 게 아니거든. 회전할 때 요로케.”
백민정이 발꿈치를 땅에 박은 후, 몸에 힘을 주어 회전했다.
그리고 멈췄을 때, 관성에 따라 재킷이 크게 펄럭였다.
백민정의 머리칼도 합해져, 안무의 역동성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알겠지?”
소녀연맹 멤버들이 박수를 보냈다.
백민정은 쑥스럽다는 웃은 뒤 재킷을 벗었다.
“자, 다음 포인트로 짚어줄 건.”
오늘은 멤버들을 전부 불러서 의견을 듣는 시간이었다.
어느 정도 완성된 시안을 보고 멤버들이 조금씩 생각을 보태어, 소녀연맹만의 느낌이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다.
백민정은 안무를 설명하며 장하양을 흘끗 살폈다.
‘이번에는 옛날 같은 사태는 안 일어나게 해야지.’
아티스트 친화적인 안무, 화려함보다 바이브에 집중할 것.
성필은 이런 요구사항을 붙였다.
단순히 멤버들이 어려운 안무를 소화하느라 무리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요구가 아니었다.
장하양을 위한다는 목적도 포함된 제안이었다.
“어때 이번 건?”
“선생님 캇코이(멋져)!”
“하양이는 어떤 거 같아?”
“좋아요.”
백민정은 장하양을 중심으로 두고 멤버들의 의견을 모아나갔다.
“자, 이제 마지막인데.”
마지막 안무를 위해선 두 명이 필요했다.
‘롱 포’ 시안의 하이라이트다.
백민정은 곡에 따라 춤을 추다가, 다른 댄서의 허리를 한 손으로 받쳤다.
그 댄서는 몸을 뒤로 뺐다.
백민정이 쓰러질 듯 뒤로 누운 댄서를 한 손으로 받아내고, 다른 손으로는 검지로 그녀의 입술을 세로로 그어 내렸다.
“세쿠시(섹시)!”
“그치? 이게 이 춤의 백미! 단, 진짜로 손이 입술에 닿으면 안 돼. 방송에 못 나갈 거야. 닿은 것처럼 보이면 돼.”
“방송에 그런 제한도 있나요?”
“뭐, 확실하진 않아도 조심하는 게 좋지. 자기가 자기 입술 만지는 건 된대. 이 동작에서 입술이 좀 그러면 쇄골을 쓰는 것도 괜찮고. 한번 해볼 사람?”
“저요! 아라쨩, 같이하자!”
리카가 조아라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연습실 중앙으로 나왔다.
“네가 뭐 할래?”
“아타시(내)가 공주님 할래! 아라쨩이 왕자님 해줘!”
그 설명으로 각자가 어떤 역할인지 확실하게 구분이 갔다.
“리카가 키가 더 크니까 왕자님 역할이 더 어울리겠는데?”
“에에, 아타시(나)는 공주님 역할 할래요!”
“……왜 내 의사는 무시해. 나는 남자 역할 하고 싶겠냐?”
“에엑?! 아라쨩 왕자님 싫어?”
“그게 더 재밌을 거 같긴 한데…….”
“그럼 빨리 아타시(나)를 안아!”
조아라는 어쩔 수 없단 듯, 웃으면서 왼손으로 리카의 허리를 받쳤다.
그러자 리카가 몸의 힘을 빼며 뒤로 상체를 젖혔다.
“악!”
조아라의 손은 리카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덕분에 리카만 바닥에 쓰러졌다.
“아라쨩 전혀 왕자님 안 같……! 아라쨩?”
조아라는 왼 손목을 쥔 채 쭈그려 앉아 있었다. 멤버들이 몰려들어 조아라를 걱정했다.
백민정은 그런 멤버들 틈으로 들어가 조아라의 손목을 살폈다.
“아라야 괜찮아? 삐었어?”
“씁…… 아뇨. 조금 아파서.”
“리카!”
백민정의 고함에 리카가 움찔했다.
“에, 에…….”
“갑자기 뒤로 힘을 빼면 어떡해! 내가 코어 힘으로 버티는 거라고 했잖아! 진짜 상대가 한 손으로 받쳐주는 게 아니라니까!”
“고, 고,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리카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조아라는 그런 리카를 보더니, 빠르게 손목을 털어내고 리카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다시 해보자.”
“아, 아니야. 민정 쌤이랑 해…….”
“어차피 우리끼리 맞춰야 하는 거잖아.”
조아라의 위로에, 리카는 우물쭈물 다시 자세를 잡았다.
“쌤. 이거 손으로 안 받치고 그냥 팔로 안을게요.”
“어, 그래. 그게 낫겠다.”
“리카. 코어로 버텨. 스트레칭할 때 허리 뒤로 젖히는 것처럼. 알겠어?”
“으, 응.”
조아라가 리카의 허리에 팔을 감고, 리카가 발을 살짝 뺀 뒤 등을 젖혔다.
드디어 조아라가 리카를 안은 듯한 모습이 나왔다. 그 상태로, 조아라가 리카의 입술을 세로로 그어 내렸다.
“어, 아라야 잘했어. 그 상태로는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보는 거야. 상대 입술을 쓸면서 카메라 쪽 봐. 표정은 내가 아까 보여줬던 것처럼.”
치명적인 매력의 미소.
그리 설명할 수밖에 없는 표정이다.
조아라는 최대한 백민정의 것을 흉내 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거울 보면서 연습하면 돼. 아라 네가 그 파트를 맡게 되면.”
“네. ……리카 왜 그래?”
조아라에게 안긴 리카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흐, 이, 이에(아니). 아라쨩 잘생겼다. 아타시(나)랑 사귈래?”
“싫어.”
“충격! 차임 42회 달성!”
조아라가 다시 리카를 원래대로 일으켰다.
“리카 너는 어때? 버틸 만해?”
“복근이 아파요.”
하긴, 조아라에게 안긴 리카가 자꾸만 몸을 바들바들 떨긴 했다.
그 자세로 버티는 게 힘든 것이다.
백민정은 고민에 빠졌다.
‘난이도가 높은 동작이지. 따라 하기 힘들다기보다는 체력적인 면으로.’
상대가 허리를 받쳐준다곤 하지만, 바로 다음 동작으로 이행하기 위해선 공주 역할의 멤버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주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코어 힘이다.
‘도중에 체력이 부족하기라도 하면, 공주 역할 멤버가 뒤로 쓰러질 거야.’
그런 모습이 방송으로 나가면 은퇴할 때까지 놀림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또한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숙련도로 해결은 되겠지만, 만약 실수가 있어서 아까 아라처럼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그때 장하양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응?”
“굳이 사람이 안겨 있어야 하나요?”
“어?”
굳이 사람을 안아야 하냐니.
그럼 무엇을 안는단 말인가?
방금 안무가 나올 때의 가사는 상대를 유혹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파트너를 안아서 입술을 쓰는, 매력을 최대한 발산할 수 있는 안무를 만들었다.
“위험해 보여서요. 소품을 쓰면 안 되나요?”
“……소품? 사람을 대신할 소품이 있나?”
“스탠딩 마이크요.”
백민정은 순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스탠딩 마이크!’
스탠딩 마이크라면 확실히 길이도 있고 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소녀연맹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니, 안무 소품으로서도 알맞다.
“잠시만.”
백민정은 안무 소품실에 있던 스탠딩 마이크를 가져왔다.
“어떤 느낌인지 하양이 네가 보여줄래? 네 머릿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
장하양은 스탠딩 마이크를 받고 쓴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무겁네요.”
라고 한 즉시, 장하양은 스탠딩 마이크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의 몸도 마이크를 향해 기울였다.
장하양의 가슴이 마이크의 다리에 닿을 정도까지.
아까, 조아라가 어중간한 자세로 리카를 품에 안은 것보다 훨씬 더 관능적으로 보였다.
장하양은 마이크를 껴안고 몸을 딱 붙인 채, 마이크를 검지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멤버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요.”
장하양이 원위치했다.
“……하양아.”
“네.”
“너 천재다.”
“아하하.”
백민정은 장하양에게서 스탠딩 마이크를 받아 홀린 듯 살폈다.
“얘들아. 내가 보여줬던 안무 다 잊어. 새로 만들 거야.”
스탠딩 마이크를 주요 소품으로, 새로운 안무를 만들어낼 것이다.
* * *
백민정의 안무 시안 영상이 임직원들 앞에서 공개됐다.
“멋지네.”
백민정이 만든 안무는 스탠딩 마이크가 주요 소품으로 등장했다.
하나의 스탠딩 마이크를, 중앙에 나오는 댄서가 이어받으며 안무를 이어갔다.
스탠딩 마이크는 노래를 부르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으나, 주로 파트너를 형상화한 듯 온갖 관능적인 동작의 대상이 되었다.
“와, 저거 아이디어 좋은데? 스탠드 마이크를 쓸 생각을 하고.”
“저거 하양이가 낸 아이디어래요.”
“그래? 괜찮다. 아니, 좋네.”
임직원들은 긍정적이었다.
가로 엔터의 의견이 확실히 반영되었다.
아티스트 친화적, 그러니까 안무가 아티스트의 건강과 신체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
동시에 ‘롱 포’의 분위기와 느낌을 잘 살린 안무였다.
“방금 동작 대박이지 않아요? 마이크 다리 아래에서 위로 쓸어올리는 거.”
“그러게.”
당연하지만, 멤버들이 함께 의견을 내어 만들었으니 그녀들도 이 안무를 좋아했다.
추후 시안 선택에서도, 멤버들과 임직원들은 백민정의 시안을 골랐다.
* * *
“조정훈 감독님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마지막으로 예산 집행 검토해달라고 하셔서요. 간단한 거라서 직접 보여드리려고요.”
한구인은 성필에게서 서류를 받아 살폈다.
“이거까지 합쳐지면 예산 초과군요.”
“네. 그런데 얼마 안 되기도 하고, 촬영하면 좋겠다 싶어서요.”
확실히 초과 금액은 십수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이 정도 돈으로 조정훈이 더 좋은 뮤비를 뽑아준다면, 한구인도 짜게 굴 생각은 없었다.
“사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필은 멀어지는 한구인을 보며 손바닥을 비볐다.
‘드디어.’
며칠 뒤면 뮤비 촬영에 들어간다.
컴백까지 남은 기간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정말 바쁘게 달려온 시간이었다.
‘남은 건 뮤비를 찍고 심의받는 거. 곡도 녹음이 끝났고. 앨범 구성품 논의도 마무리가 돼 가.’
이제 두 번째라서 그런가, 기한이 촉박해도 더 여유로워진 느낌이다.
성필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칼날 같던 추위도 한풀 꺾인 3월.
곧 있으면 봄이 신호를 줄 것이다.
‘봄노래를 우리 경쟁 상대에서 제외한다면.’
소녀연맹과 같은 시기에 맞붙을 그룹은 크게 두 개 정도다.
하나는 보이그룹인 시에이스다.
옛날, 어떤 아이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조아라가 공연 영상을 보여주었던 그룹이다.
‘시에이스는 우리가 경쟁 대상으로 삼기엔 팬덤도 탄탄하고 연차도 높지.’
나머지 한 그룹은 걸그룹에다가, 아직 신인이라고 불릴 데뷔 기간을 가지고 있다.
‘포유.’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젝트 포유’로 데뷔한 그룹.
이음 엔터의 김명운이 이끌고 있다.
소녀연맹이 데뷔했을 때 대기실에서 은근한 기 싸움이 펼쳐지기도 했었다.
‘아름이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지.’
포유는 지금 떨고 있을 것이다.
저번 데뷔 앨범의 초동판매량은 4,000장 남짓.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데뷔했다기엔 처참하기 그지없는 수치다.
이번에도 낮은 성적을 보여준다면, 김명운도 포유의 매니지먼트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초동판매량 19,000장.’
포유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싱글 앨범이, 소녀연맹의 컴백과 같은 시기에 등장한다.
이전과 비교하면 충분히 만족할 초동 수치다.
하지만 데뷔 전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프로모션을 고려하면, 1년 프로젝트 그룹을 이어가기엔 부족한 수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포유의 성공은 앨범 판매량에서 있지 않다.
‘음원 성적에 있지.’
음원 차트 상위권 등반에 성공하고, 세상에 포유의 가능성을 입증해냈다.
소녀연맹은 그 포유와 걸그룹으로서 경쟁해야 한다.
‘19,000장…….’
김명운은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전방위적인 프로모션과 마케팅 활동을 감행한다.
SMS 엔터에서부터 쌓아온 인맥, 모회사로부터 투자받은 자원, 그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다.
과연 소녀연맹이 포유에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어.’
초동으로 30만 장 이상을 팔아버리는 시에이스를 이기는 건 무리다.
하지만 포유만큼은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자신이 없었으면 4월을 컴백 시기로 고르지도 않았어.’
이건 성필이 스스로에게 건 시험이다.
그리고 성필은 소녀연맹과 함께 그 시험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이번 컴백이 순조롭다면, 다음 스테이지는 케이어스다.’
손혜빈은 팬의 외연을 확장하는 게 이번 미니 앨범의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성필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번 미니 앨범은 팬덤을 다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충성도를 확보하고 나서야, 9월에 컴백할 케이어스와 비교해 그나마 부끄럽지 않은 성적을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케이어스를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테지만, 적어도…….’
케이어스가 경쟁자로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팀장님, 왜 멍하게 있어요?”
신아름이 성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니. 잠시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요?”
“무대 의상 입은 너.”
“우리 엄마한테 사과해요!”
“왜. 의상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팀장님은 그러면 안 되죠! 평소에도 그런 옷 입은 저 상상하고 그래요?”
그런 옷이라니.
이유이와 김형선이 들으면 울상지을 것이다.
“상상하지 그럼. 어떤 의상이 너한테 제일 어울릴까, 계속 생각해야지. 사람들한테 가장 아름다운 네 모습을 보여줘야 하잖아.”
신아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장난으로 경멸하는 듯한 낯빛을 띠었다.
“상상으로 그쳐야 해요. 알겠죠?”
“알겠다. 너 무대에 올라오면 귀 막고 눈 가리고 다 할게. 앞으로 연습실도 절대 안 가.”
“에이, 삐졌어요? 어른 맞아? 알겠어요. 제가 선심 써드릴게. 봐도 돼요.”
“그래, 고맙다 정말.”
“지금 보실래요? 저 무대 의상 입고 춤추는 거?”
“아니.”
“섭섭하단 티 팍팍 내놓고 안 보겠단 건 뭐예요?!”
신아름은 한동안 투덜거리다가, 관심 없단 태도로 물어왔다.
“그거 어떻게 됐어요.”
보통, 신아름은 대화의 후반부에 꺼내는 주제가 원래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곤 했다.
“어떤 거?”
“김민주랑 그거요.”
신아름과 김민주가 찍었던 아이튜브 콘텐츠, ‘죽고 못 사는 친구’는 상당한 반응을 얻었다.
조회 수, 무려 101만!
물론 케이어스의 채널에 올라온 영상의 조회 수다. 가로 엔터에 올린 건 조회 수 21만 정도였다. 그마저도 김민주의 후광이 작용한 덕이었다.
“아, 그거.”
‘죽고 못 사는 친구’는 KS 엔터 측에서도 꽤 큰 성공이었기에, 시리즈 제안이 들어왔다.
앞으로도 몇 편 더 찍어보는 게 어떻냐는 것이었다.
그에 신아름도 긍정적으로 답해주었다.
‘김민주 걔 져서 부들부들 떠는 거 볼 수 있으니까, 좋아요.’
그런데 정작 며칠 뒤에 돌아온 답은.
“민주가 안 찍겠대.”
“……네?”
신아름이 당황했다.
“왜요?”
“모르지.”
“……흐음.”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 배어 나왔다.
“저번에 나한테 져서 그렇구나? 하긴 또 덤벼봤자 자기가 질 걸 아는데 하고 싶겠어요?”
신아름은 겉으로 보이기엔 자신만만했지만, 어쩐지 아쉬워하는 기색도 있었다.
하지만 순간일 뿐이었다.
어느새 신아름은 어깨를 잔뜩 으쓱이며, ‘저 잘했죠?’란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우리 아름이 잘했어.”
“헤헤. 다음에 만나면 꼭 케이어스 묵사발 낼게요.”
“……그래.”
“왜 대답이 느려요? 지금 저 못 믿는 거죠?”
“…….”
“아예 대답을 안 하면 어떡해요! 진짜 안 믿는 거였어요?!”
그날, 신아름은 계속 성필을 쫓아다니며 ‘믿어요 안 믿어요?’라고 물었다.
그것을 본 조아라와 리카까지 가세해서 ‘우리 못 믿어요?’ ‘역시 그렇구나, 이사님은 케이어스를 더 좋아해’라며 성필을 KS 엔터의 첩자로 만들었다.
“타도 케이어스!”
어쩔 수 없이, 성필은 연습실에서 케이어스 타도를 외치며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해야만 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선생!”
소녀연맹이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주로 동생 라인이.
* * *
KS 엔터 사옥에는 헬스장이 있다.
직원 복지의 일부였으나, 정작 직원들은 일이 바빠 그다지 이용하지 못했다.
텅 빈 헬스장에서, 김민주가 벤치에 앉아 아령 운동을 하고 있었다.
아령의 무게는 9kg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아령으로 이두를 단련했다.
“민주야 여기 있…… 민주야!”
그것을 발견한 매니저가 기겁하며 김민주에게 달려와 아령을 뺏었다.
“팔 운동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음.”
김민주는 아령을 뺏기자 미련 없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타올로 땀을 닦으며 거울을 보았다.
“왜요?”
“왜, 왜긴. 옷 핏 맞춰야 하니까 그렇지. 너 자꾸 근력 운동하면 이사님이 화내실…….”
“아니요. 왜 찾으셨냐구요.”
“아. 전에 ‘죽고 못 사는 친구’ 있잖아.”
“거절했었는데요.”
“응, 그랬지. 근데 콘텐츠 사업부 부장님이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셔서. 어, 어때?”
김민주가 눈매를 좁혔다.
그때 분명 신아름에게 졌었지.
김민주는 눈을 감고, 무심히 말했다.
“안 할래요. 시간 아까워요. 그 시간에 춤이라도 한 번 더 추고 노래나 한 번 더 부르지.”
“그래도…… 반응이 좋은데…….”
“안 할래요.”
매니저는 한숨을 쉬었다.
콘텐츠 사업부 부장에게 왜 설득도 못 하냐며 대차게 까이겠지. 물론 매니저 자신이 아니라 매니지먼트 1팀장이 까일 것이다.
어떻게 소속 팀 아이돌도 못 다루냐면서.
‘골치 아프네.’
케이어스는 명실상부 KS 엔터의 보물이자 성공작으로 떠올랐다.
케이어스를 둘러싼 부서 간 갈등도 생겨났다.
어떻게든 자신이 속한 부서의 이름을 걸고, 케이어스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하실 말씀은 그게 다예요?”
“어, 응. 그리고 이제 운동은 그만…….”
“알겠어요. 스트레칭만 하고 나갈게요.”
매니저는 축 늘어져선 헬스장을 나갔다.
김민주는 거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김민주의 생활은 마치 수도사와 같았다.
완벽하게 조절된 생활 패턴, 식단, 칼로리 섭취, 근육 단련, 다이어트, 연습 등.
완벽한 관리로 완성시킨, 고전 그리스의 예술품과 같은 몸이다.
눈으로 보면 조각과 같았고. 손끝으로 누르면 세상 그 어떤 비단보다도 부드럽고 막 만든 고무보다도 탄력 있었다.
절제와 인내, 노력의 결정체다.
그 고통을 감내하고 완벽해진 자신이 고작 한다는 게.
‘아이튜브 영상? 신아름이랑? 또?’
농담이 아니고, 정말 시간 아깝다.
처음이야 신아름을 걱정해서…….
‘아니! 신아름이 있는 소녀연맹을 걱정해서!’
소녀연맹에 소속된 리카의 평판이 걱정되어, 신아름과 친구인 척하고 영상을 하나 찍어줬을 뿐이다.
물론 신아름에게 졌을 때는 속이 쓰렸으나, 다시금 생각하면 별거 아니다.
고작 그런 것으로 승부를 다투다니, 어린애도 아니고.
‘어차피 가만있어도 이길 거니까.’
아이돌은 판매량과 음원 성적으로 말한다.
소녀연맹 따위, 케이어스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수준이다.
인간이 걸어 다니다 무심코 밟는 벌레와 같이.
‘이제 4월이야. 컴백까지 5개월.’
벌레에 신경 쓸 시간은 없다.
김민주는 샤워한 뒤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컴퓨터로 다가갔다.
“진저. 나 컴 좀 쓰자.”
“네?”
진저가 살짝 꺼림칙한 기색을 보였다.
컴퓨터도 잘 안 하던 애가 뭘 보길래 이러지 싶었는데, 소녀연맹 조아라의 SNS였다.
진저는 조아라가 올린 셀카를 보는 중이었다.
“오래 걸려?”
“……아님미다. 민주 언니는 오래 걸림미까?”
“아니. 나도 얼마 안 걸려.”
진저가 비켜나고 김민주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이튜브로 접속해 가로 엔터 채널로…….
“진저. 계속 보고 있을 거야?”
“아, 아님미다.”
진저는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제야 김민주는 편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2분 남았나.’
소녀연맹의 스케줄러는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해두었다.
‘올라왔다.’
소녀연맹, 뮤비 티저 #1.
김민주는 스피커의 소리를 줄이고 영상을 재생했다. 시간은 20초 정도.
‘뮤비 티저면 노래 정도는 들려줄까? 아니면 안무 일부? 뭐, 그래봤자 대단한 것도 아닐…….’
티저가 이어질수록 김민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오…….”
뒤로 돌아보니, 어느새 진저가 서 있었다.
“멋짐미다.”
“…….”
김민주는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