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백설하는 화장실 세면대를 짚고 거울을 보았다.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내가 운 거 보였겠지?’
다시 녹음실로 들어가서 밝게 웃고 싶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단 듯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거울 속의 자신은, 누가 봐도 눈물을 흘렸던 게 확실했다.
‘창피해…….’
동생들이 이십 대 중반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맞는 말이다.
자신은 이제 23살이니까.
그런데 그 말이 너무 듣기 힘들었다.
“…….”
화장품 파우치라도 가져왔다면 어떻게 수습을 해볼 텐데.
백설하는 임시방편으로 눈가의 자국을 걷어내곤 화장실을 나왔다.
“설하야.”
깜짝 놀랐다.
성필이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백설하는 평정을 가장했다.
“네, 이, 이사님, 네.”
실패했다.
당황한 게 한눈에 보였을 것이다.
아니다. 사람은 말 정도 더듬을 수 있다.
성필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
‘그래. 우연히 이사님도 화장실을 가시려다가 나랑 마주친 걸 거야. 나를 기다린 게 아니라.’
어쩌면 아까 녹음실에서 나올 때, 단순히 화장실이 급해서 나간 것으로 보이진 않았을까?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데.
“으, 으음.”
백설하는 우물쭈물 성필을 향해 미소를 짓다가,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저, 저 이제 돌아가 볼게요.”
“너 지금 들어가면 안 되겠는데.”
“네?”
“눈.”
그럼 그렇지.
티를 안 낸다고 해봤자 다 보이는 모양이다.
백설하는 다시금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꼈다.
‘이십 대 중반이란 말을 듣고 눈물 흘리면서 도망간 여자라고 생각하실 거야…….’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그 사람은.
안타깝게도 백설하 자신이 그 사람이었다.
“얘기 좀 하고 들어가자.”
“…….”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냥 없던 일이 됐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백설하의 발은 착실하게 성필의 뒤를 따라갔다.
둘은 스튜디오의 옥상으로 올라왔다.
녹음하느라 외투를 벗어두었기에,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칼날 같은 바람이 백설하의 몸을 찌르고 들어왔다.
절로 턱이 떨린다.
“입어.”
성필이 외투를 벗어주었다.
“네? 아, 괜찮아요.”
사양했으나, 성필은 다시 받을 생각이 없는 듯 백설하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곤 난간으로 걸어갔다.
백설하는 어깨에 걸린 외투를 꼭 여미고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설하야 너 그때 기억나?”
“네?”
요즘 자주 들었던 발문(發問)이다.
성필이 메이크업을 마친 장하양에게 하던 말.
그 뒤에 이어질 말은 ‘박물관 털다가 너 혼자만 조각상인 척해서 나만 감옥에 들어갔었잖아’ 정도일 것이다.
백설하는 웃음을 머금었다.
‘나 웃게 해주시려고 그러시나.’
사람을 뭘로 보고.
기분 나쁘다고 웃겨주기만 하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아나?
라고 생각하는 백설하는 벌써 웃고 있었다.
“그때요. 같이 박물관 털었을 때요?”
“뭐?”
“네?”
“아니, 내가 너한테 회사 들어오라고 제안했을 때 말하려고 했는데…….”
“…….”
백설하는 외투를 더욱더 여몄다.
“그때 네가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하냐고…….”
“아, 아아, 음, 네. 대충.”
백설하는 부끄러워서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성필은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네 입으로 네 나이가 너무 많다고 했었잖아. 데뷔할 때는 이십 대 중반이겠다고. 그러니까 아이돌은 못 하겠다고.”
그 뒤로도, 백설하는 자신의 나이를 신경 쓰는 언행을 많이 해왔다.
“뮤비 촬영하러 괴를리츠 갔을 때도.”
자신은 나이가 많으니, 동생 라인이 놀고 있는 방으로 못 들어가겠다.
동생들이 자신을 불편해할 것이니까.
백설하는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신의 나이가 많단 느낌을 자꾸만 받았다. 다른 동생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위로해주시려는 거구나.’
아마, ‘내가 보기엔 너도 아직 충분히 어려’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알지만, 백설하의 가슴에 닿진 않는 말이다.
요즘 데뷔하는 아이돌들은 대부분 나이가 20살 아래였다. 백설하가 고등학생일 때 중학생이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유치원에 있던.
이런 생각이 웃기단 건 알지만, 그들은 자신과 다르게 젊은 애들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23살에 아이돌 데뷔 100일을 겨우 채울까 하는 수준이다.
하지 않으려 해도 비교할 수밖에 없다.
“나도 너 힘든 거 알아. 내가 너무 무거운 역할을 준 것도 알고.”
“네?”
“너는 막내였으니까.”
“……아.”
이전에 있던 그룹에서, 백설하는 막내였다.
막내 대접을 받았다.
언니들에게 사랑받고, 회사 사람들에게는 귀여움받았다.
막내답게 활기차고 때로는 눈치도 없이, 세상 물정 모르고 관심과 사랑을 갈구했었다.
임시 트레이너로 취직했던 학원에서도, 백설하는 막내 트레이너라 불리며 관대한 시선과 손길 속에서 살았다.
심지어 집에서도, 부모님은 다른 동생들보다 백설하를 더 대접해주었다.
여느 집과 다르게 누나로서 양보를 강요받지도 않고, 오히려 누나이기에 다른 동생들에게 양보받았다. 왜냐하면 백설하는 아이돌이니까, 특별한 자식이었으니까.
백설하는 오로지 사랑만 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가로 엔터에서는 달랐다.
“언니 역할이 익숙하지 않고 힘들 수 있어.”
가로 엔터에서, 소녀연맹에서 백설하는 큰언니였다.
그룹의 중심에 버텨 서서 아이들을 잡아줘야만 했다.
“내가 리더란 자리를 맡겨서 더 그렇겠지. 지금까지 잘해줬어. 훌륭한 언니로 있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백설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울컥했다.
자칫하면 또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리카가, 아라가, 하양이가, 아름이가 의지할 수 있는 언니로 있어 줘서. 너한테 정말 감사하고 있어.”
백설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창피한 고민이다.
언니로 있는 게 힘들다고.
아이들을 보살피고 어른인 척해야 하는 게, 너무 부담되고 괴롭다고.
자신도 고작 23살의 어린애에 불과한데.
한창 예민한 나이의 아이들을 받아주고, 보살피고, 동시에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게.
계속 사회에서 막내로만 살아온 백설하는, 고작 몇 살 많다는 이유로 그 많은 짐을 짊어지는 게 너무도 힘들었다.
“네가 힘든 건 알지만, 나는 너를 계속 믿을 수밖에 없어. 너한테 계속 의지해야 해. 미안.”
백설하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도 힘들겠지만, 세상에 자신의 이 창피한 고민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단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그래도 네 주변엔 다른 어른들도 있잖아. 나도 있고. 그러니까 힘들고 지치면, 언제든지 어리광부리고 불평해도 돼. 애들이 없는 데선 얼마든지 그래도 돼. 받아줄게. 그게 당연해.”
당연하니까, 속에 꾹꾹 담아두고 참고만 있을 필요는 없다.
성필의 위로는 백설하가 아직 미숙하고 어리단 뜻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백설하는 그 말이 좋았다.
귀로 들어오는 그 말이 너무나 달았다.
“어떡하냐. 위로해주려고 데려왔는데 또 울렸네. 근데 너 은근히 자주 운다. 완전 애야.”
성필의 장난스런 웃음소리를 듣고, 백설하는 울면서 웃었다.
그녀는 제대로 나지도 않는 목소리에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네, 저 애예요. 아직 애잖아요.”
“그러게. 에휴, 애다 애.”
어린애 같다.
지금까지 그 말은 욕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기분 좋게 들릴 수도 있구나.
* * *
리카는 공포에 떨었다.
‘어째서?’
다시 돌아온 백설하의 얼굴이 굉장했다.
거의 오열한 것처럼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이, 이사님이 달래주러 간 거 아니었나?’
왜 더 처참한 몰골로 돌아온 거야!
리카뿐 아닌, 동생 라인 전체가 심장 깊이 죄책감을 새겨넣었다.
‘운다고…… 갑자기 울면서 도망갔다고…… 이사님한테 혼난 건가?’
리더로서 보일 모습이 아니다.
심지어 회사의 다른 어른들 앞에서.
버릇없게 무슨 짓이냐.
그런 말을 들었을까?
그럼, 그건 자신들 때문이잖은가…….
회사로 돌아온 동생 라인은 다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자신들이 벌인 일이니, 자신들이 해결해야 한다.
“아라쨩 어떡해! 쌤이 저런 꼴이 된 거 처음 봤어! 아타시(나) 가슴이 너무 아파!”
“…….”
“말 좀 해봐!”
조아라도 패닉 상태였다.
설마 자신들이 던진 농담 때문에 백설하가 성필에게 혼나다니.
아니, 겨우 이런 일로?
‘리더니까?’
백설하가 불쌍하다.
어떻게든 그녀의 기운을 북돋워 주고 싶다.
“아저씨한테 항의할까?”
“야다(싫어)! 난 이사님한테 혼나기 싫단 말야!”
그건 조아라도 싫다.
백설하가 눈물 콧물 다 뺄 정도라면, 성필이 대체 얼마나 본격적으로 혼낸 걸까?
만약 조아라 자신이 그렇게 혼난다면, 그녀는 울면서 바닥을 굴러다닐 자신이 있었다.
“그냥 언니한테 사과하자.”
신아름이 정상적인 의견을 냈다.
고작 사과로 수습이 될진 모르겠지만…….
“다들 용돈 모아서 케잌이라도 사서…….”
“너 쌤 견제하는 거야? 컴백 전에 살찌라고?”
“아 그럼 뭐 어쩌자고! 그냥 사과만 하면 모양이 안 살잖아!”
결국 케이크를 사러 가기로 했다.
셋은 저녁 연습이 끝난 뒤, 근처의 베이커리로 가서 케이크를 골랐다.
“소, 소녀연맹 맞죠?”
“네?”
놀랍게도 점원이 그녀들을 알아보았다.
셋은 기쁘게 사인을 해주고 사진까지 찍어주었다.
“저 SNS에 올려도 돼요?”
“네! 홍보 많이 해주세요! 친구분들한테 저희 영업도 해주세요!”
리카가 허락하고, 동생 라인은 다시 진중한 눈길로 케이크를 살폈다.
“이거 저칼로리 케이크라는데. 100g에 160칼로리래.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아?”
“아타시(나) 이거 먹어봤는데 맛없어. 초코향만 나. 초코향맛 케이크야.”
“저칼로린데 당연하지. 근데 언제 먹어봤어?”
“……아름이 무서워! 유도 심문 잘해!”
“안 했거든. 그럼 이거? 저칼로리 요거트 맛?”
“그것도 별로야.”
“이것도 먹어봤다고? 너 은근히 회사 몰래 많이 먹는구나?”
“유도 심문 멈춰!”
어차피 양도 많지 않으니 결국 두 개 다 사기로 했다.
이왕 기분을 풀어주기로 한 거, 다다익선이다.
셋은 저칼로리 케이크를 품에 숨겨서 회사로 돌아왔다. 케이크 포장의 크기는 그녀들의 주먹보다 조금 큰 정도라, 충분히 숨길 수 있었다.
민경섭은 회사로 돌아오는 그녀들을 유심히 보았다.
“매,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저녁인데.”
“아앗! 그렇네요! 눈이 좋으시네요!”
민경섭은 2층으로 올라가는 그녀들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보았다.
조아라가 불안하게 말했다.
“어떡해. 매니저님이 아저씨한테 보고하는 거 아냐? 우리 먹을 거 사 온 거 알았나 봐. 안 그래도 아저씨 심기 불편한데 이거까지 들키면…….”
“숨겨뒀는데 어떻게 알아. 쫄지 마. 절대 안 들켜.”
민경섭이 그녀들을, 특히 조아라를 봤던 이유는, 조아라가 케이크를 가슴에 숨겼기 때문이었다.
조아라의 패딩 가슴 부분이 평소와 확연히 달랐기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라가…… 콤플렉스가 심한가? 아니, 근데 저건 너무 심하잖아. 저런 건 또 어디서 산 거야?’
민경섭은 싱숭생숭했다.
‘스타일리스트님한테 말씀드려볼까…….’
아무튼 동생 라인은 숙소까지 무사히 케이크를 운반해 오는 데 성공했다.
모두 조아라 덕분이었다.
멤버들이 전부 씻고 거실에 잠시 모여 있을 시각, 동생 라인이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쌔, 쌤.”
대표자 신아름이 케이크를 백설하에게 내밀었다.
“그, 녹음실에서 죄송해요. 마, 말한 거. 그거요.”
“응?”
백설하는 당황하며 케이크를 받았다.
“죄송합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백설하는 피식 웃곤, 세 사람을 동시에 팔 안에 품었다.
“괜찮아 얘들아. 쌤이 잠깐 다른 거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너희들 때문 아니야. 고마워.”
“팀장님이랑…… 은요?”
“응? 아, 그냥 이사님이랑 옛날얘기 했어. 혼난 거 아니야. 그거 걱정한 거야? 아이구, 고마워요 우리 동생들.”
동생 라인은 그녀의 위로에 환하게 미소 지었다. 멤버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케이크를 먹기로 했다.
“야, 그거 해?”
“하, 할까?”
조아라와 신아름이 소곤댔다.
백설하는 그녀들이 또 뭔가를 준비했구나 싶어서, 대견하단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이, 이십 대 초반 백설하 파이팅!”
“우윳빛깔 백설하! 젊은 백설공주!”
“와카이(젊어)! 아직 파릇한 새싹이에요!”
“너희들은 안 늙을 줄 알아?!”
동생들의 위로는 백설하가 듣기엔 비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장하양에게 안겨 억울함을 쏟았다.
“하, 하양아아, 쟤, 쟤들이 나한테, 자, 자꾸 나이 들었다고오…….”
장하양은 백설하를 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동생 라인을 쏘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동생 라인이 또 허리를 굽혔다.
* * *
가이드가 나온 뒤, 멤버들은 ‘롱 포’ 맹연습에 돌입했다.
보컬적으로 완벽히 소화 가능할 때까지 백설하에게 특훈을 받았다.
멤버들이 고생하는 뒤에서, 가로 엔터의 임직원들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안무 의뢰는 다 끝냈습니다.”
곡이 나왔으면 다음 차례는 안무다.
이전처럼 여러 안무가를 찾지는 않았다.
엄선한 두 팀을 골라 시안을 부탁했다.
그중 하나는 ‘아니’의 안무를 맡았었던 백민정이었다.
“백 안무가 저번 거 좋았어. 이번에도 멤버들 의견 수합해서 제대로 나오는지 보자.”
이번 백민정의 안무 창작이 다른 점이 있다면, 조아라뿐 아닌 멤버 전체의 의견을 받기로 했단 것이다.
완전히 창작 과정에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멤버들의 느낌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은.
“아티스트 친화적으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어렵고 화려한 안무보다, 소녀연맹이 쉽게 숙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했다.
안무의 난이도보다 바이브, 즉 안무에서 나오는 느낌에 집중시켰다.
이는 장하양을 고려한 조치이기도 했다. 그녀의 특기인 연기가 퍼포먼스에서도 살아나길 바랐다.
“뮤비 의상은 준비 끝났대요.”
손혜빈이 보고를 이어갔다. 그녀는 보고하며 상황판에 붙여진 ‘의상’ 자석을 옮겼다.
각 색깔 자석에는 안무, 곡, 뮤비, 스타일링, 헤어, 메이크업 등 분야별 진행 상황표가 붙어 있다.
상황판의 오른쪽 끝에는 커트라인인 컴백일이 적혀 있다. 자석이 오른쪽에 가까울수록 진행도가 상승하는 식이었다.
따로 사람을 통해 보고받지 않아도 업무 현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한구인이 제시한 방법이었다.
‘각 안건마다 번호를 부여할 겁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자료는 계열화하여 회사 내부 전산망에 등록해주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정보 교환에 필요한 시간이 획기적으로 감소했고, 일 처리가 더욱 빨라졌다.
“JJH 쪽에서도 세트장은 거의 준비 완료했고, 장소 협찬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래요. 그다음은 제작 의상이 하나 도착했는데요.”
“뮤비에 쓸 거?”
“아니요. 무대 의상이요.”
빠르다.
뮤비 의상 준비가 겨우 끝난 시점에서 벌써 무대 의상 한 세트가 오다니.
“그건 직접 봐야겠네.”
보고를 마치고, 홍규헌은 김형선 스타일리스트 팀에서 보낸 의상을 직접 보았다.
의상은 사무실에 있었는데.
“너희들 뭐 하냐?”
벌써 리카와 조아라가 와서 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홍규헌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더니, 손에 들고 있던 의상을 테이블에 두었다.
“아, 아니에요!”
“뭔 아니에요야. 이럴 땐 죄송하다고 해야지.”
“아, 소, 소다나(그러게).”
조아라의 충고에 리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난데(어째서) 아타시(나)만 사과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조아라도 고개를 숙였다.
“그, 의상이 궁금해서…….”
홍규헌은 따스한 미소를 짓곤 리카와 조아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같이 볼까. 박 이사, 부탁해.”
성필이 의상 포장지를 조심스레 벗겨냈다.
“……뭐야.”
홍규헌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색깔이…… 무슨 색인지 모르겠다.
파란색 바탕인 건 확실하다. 그 위에 주황색과 흰색, 남색, 붉은색, 아무튼 많은 색깔의 물감을 아무렇게나 부어 놓은 것 같다.
홍규헌이 해답을 요구하는 눈으로 손혜빈을 보았다.
“사장님 의상 지시서 안 보셨나요?”
“……봤지. 근데, 그림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니까 좀.”
과하게 아방가르드한 컬러와 패턴이다.
원색이 가득하여 볼수록 눈이 쨍하다.
파란색 종이에다가 붓으로 물감을 계속 털어내면 이런 패턴이 될까 싶다.
성필은 한 세트인 옷을 하나하나 분리했다.
먼저 블레이저다.
“꺄악!”
리카가 부끄러워하며 눈을 가렸다.
성필이 블레이저의 끝부분을 들고 올렸다. 전체가 아닌 일부만이 올라간다.
그렇다. 블레이저의 등 부분이 세로로 나뉘어 있다.
“그거 뒤트임이야?”
“네. 그런 거 같은데요.”
“이런 거 입고 춤추면 등골이 다 보일 거예요!”
“리카, 등골이 뭐야.”
“척추기립근이 다 보일 거예요!”
리카의 말마따나, 이 블레이저를 입고 춤을 추면 등이 훤히 보일 것이다.
성필은 그 블레이저와 세트인 상의도 보았다.
“꺄아악!”
리카가 또 부끄러워했다.
상의는 얇은 천 재질이었는데, 가슴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는 길이였다.
“와이셔츠가 아니어도 재킷에 어울릴지 모르겠네. 일러스트레이션에선 괜찮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바지는 정상적이란 것이다. 아방가르드한 컬러인 것만 빼면.
성필은 이 옷을 감싸고 있던 포장지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조아라.”
“……이거 내 거예요?”
“왜 모른 척해. 너도 컨펌한 아이디어잖아.”
그렇긴 한데, 직접 보니까 묘하다.
이유이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았을 땐 마냥 멋지게만 보였는데.
확실히 디자인과 실물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내가 이걸 입어?’
조아라는 블레이저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묘하다.
“이거 안 잠겨요!”
리카도 어느새 본인의 의상을 뜯었다.
그것도 모자라 입어보기까지 했다.
리카는 숏자켓의 단추를 잠그려 노력했으나, 품이 짧아서 되지 않았다.
“사이즈 잘못 나온 거 아닌가요?”
“원래 걸쳐서 입는 건가 봐.”
“소난다(그렇구나).”
“……혹시 사이즈나 사람이 바뀌어서 온 거 아냐? 조아라, 네가 입어봐.”
조아라가 리카의 숏자켓을 입었다.
품이 살짝 남았다.
“단추 잠기는데요?”
“뭐어, 바뀐 건 아닌가 보네.”
“네? 나한테 맞는데 리카한테 안 맞으면 잘못 온 게 맞죠.”
“아니야. 리카 사이즈에 맞잖아. 너한테는 좀 헐렁하고.”
“……?”
“오케이.”
홍규헌이 분위기를 정리하려는 듯 손뼉을 쳤다.
“다른 애들도 쉬는 시간에 입혀보자. 너희들도 그거 벗고 연습하러 가.”
리카와 조아라는 옷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너 저거 사이즈 작게 나온 거 같은데.”
“아니야 아라쨩. 저거 아타시(내) 거 맞아.”
“……?”
다음 날.
가로 엔터 임직원들이 의상 확인을 마치고, 그 의상은 멤버들에게 전달되었다.
멤버들은 자신의 의상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의견들을 나누었다.
“아라야 잠시만.”
그런데 그때 손혜빈이 조아라만 따로 불렀다.
손혜빈은 그녀를 사람이 없는 응접실로 데려가 얇은 비닐백을 내밀었다.
조아라가 그것을 받고 무엇이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손혜빈이 윙크했다.
꺼내 보니 발코넷 브래지어였다.
“이번에는 속옷도 따로 챙겨줘요?”
하긴, 무대 의상마다 노출하는 부위가 제각각이니 속옷도 그에 맞춰 바꿔야겠지.
그런데 왜 조아라 자신만 받는…….
“응?”
조아라가 브래지어의 가슴 부분을 꾹꾹 눌렀다.
볼륨이 있어서 누를 때마다 푹푹 들어간다.
조아라는 손혜빈을 보았다.
그녀가 윙크했다.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
조아라는 브래지어를 내팽개치고 사장실로 달려갔다.
“사장님 내 거가 그렇게 작아요?! 소, 속옷으로 커버해야 할 정도로?!”
“조아라 진정…….”
“난 저런 거 필요 없다고요! 난 내가 좋아요!”
“알겠으…….”
“필요 없다고요오……. 다, 다들 평소에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
잠시 후, 이 사태를 일으킨 주동자가 잡혀 왔다. 주동자라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어쨌거나 그러했다.
민경섭이었다.
“아라 네가 좀, 그, 자신감이, 필요한 거 같길래 회의에서 말했는데…….”
조아라가 케이크를 패딩 가슴에 숨기고 왔을 때의 이야기였다.
케이크를 숨겼었다, 라곤 홍규헌 앞에서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아라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 나름 너를 도와주고 싶던 건데, 괜히 상처만 준 거 같네.”
“…….”
“조아라, 미안하다.”
조아라는 대표자인 홍규헌의 사과마저 받았다.
홍규헌이 위로하듯 조아라의 등을 쓸어주었다.
“…….”
조아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백민정이 1차 안무 시안을 보내왔다.
“이번 안무에는 소품을 썼대요.”
“소품?”
홍규헌은 아이돌 춤에 소품으로 쓰였던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부채, 고양이 손장갑, 지휘봉, 드럼 스틱 등 손으로 쥘 수 있는 종류.
침대, 의자 등 배경이 되면서도 특정한 춤을 연출할 수 있는 종류.
외에도 가면이나 망토 등 아이돌 자체를 꾸며주는 종류도 있다.
“기대되네. 무슨 소품인데?”
“스탠드 마이크요.”
“……스탠드 마이크?”
“네.”
“스탠드 마이크면 그 길쭉한, 가수들이 공연할 때 쓰는 그거…….”
“네, 그거예요.”
스탠드 마이크를 안무 소품으로 썼다고?
무협지에 나오는 것처럼 묘기라도 부릴 속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