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일과를 마치고.
양소민과 글로브 멤버들은 숙소로 들어왔다.
다들 말이 없다.
저마다 씻은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양소민의 방은 그녀를 포함하여 네 명이서 쓴다.
양소민은 방에 오자마자 그녀의 침대 아래에 있는 체스판을 꺼냈다. 그리고 거실로 가서 그것을 펼쳤다.
‘다른 분들은 자야 하니까.’
그녀는 거실에 비치된 책꽂이에서 영어로 된 책을 한 권 꺼냈다.
옛날에 성필이 사주었던 유명 체스 선수의 자서전 겸 기보집이었다. 아주 옛날 것이라, 미국의 헌책방에서 구했다고 했다.
“Counterblow…….”
기보집 옆에는 영어사전도 함께였다.
글로브는 데뷔하고도 핸드폰을 받지 못했다. 사생활 관리라는 명목이었다.
그래서 양소민이 기보집을 읽기 위해선 영어사전이 필수였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단숨에 찾았을 테지만, 없었기에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소민아.”
그때 글로브의 멤버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타났다. 그녀는 양소민의 등을 쓸어주었다.
“오늘 들은 말 신경 쓰지 마.”
“네?”
“윤상열 프로듀서님이 하신 말.”
이딴 것도 제대로 못 하느냐.
아이돌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한 거냐.
어떻게 매번 이딴 식으로…….
“아, 아녜요. 다 맞는 말이에요.”
성필이 있었을 때의 윤상열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혼내지 않았다.
아니, 민경섭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둘이 모두 떠나니, 윤상열은 거칠 것 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글로브에서의 희생양은 주로 양소민이었다.
이번에도, 또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눈치와 요령이 없는 양소민은 윤상열의 눈에 좋은 화풀이 상대였다.
“괜찮, 아요.”
양소민은 언니의 눈을 보지 못하고, 체스판 위의 기물들만 옮겼다.
언니의 눈을 보면 울 것 같았으니까.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
언니도 그것을 알곤 자러 들어갔다.
숙소가 정적에 잠겼다.
다들 피로 때문에 눈을 감자마자 자는 것이다.
게다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도 없어서, 깨어 있어봤자 할 게 없다.
양소민만이 홀로 체스를 둘뿐.
“……팀장님.”
작게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는 양소민과 체스를 둬주곤 했다. 초보 중에서도 초보나 다름없는 그는, 매번 패배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퇴근 시간에도.
‘또? 넌 매일 이기는데도 나랑 하고 싶어?’
‘제발 그만 좀 하자 제발! 나도 자존심이란 게 있어! 계속 지면 괴롭다고!’
‘……소민아. 너 혹시 나한테 혼나는 거 체스로 푸는 거 아니지?’
성필의 업보였다.
소심한 양소민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겠답시고 체스를 배워버렸으니.
그를 떠올린 소민은 미소를 보였다가, 금세 우울해졌다.
“팀장님…….”
자신은 요령도 눈치도 실력도 재능도 뭣도 없었지만,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만, 성필은 그녀를 믿어주었다.
아니, 모든 연습생들에게 그러했지만. 양소민도 그건 알았지만.
성필이 ‘믿는다’고 말해줄 때마다, 양소민은 자신도 특별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던 것이다.
마침내 아이돌이 됐지만, 이 자리에 오게 도와준 성필은 없었다.
“아.”
그때, 양소민은 자신이 울고 있단 걸 깨달았다.
언니에게는 괜찮다고 말했었다.
사실은 안 괜찮다.
윤상열이 인격 모독을 할 때마다, 양소민은 자기 자신이 너무도 쓸모없고 존재 가치가 없게 느껴진다.
왜 자신 같은 인간이 존재할까.
‘믿는다.’
양소민은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의 저금통을 열었다.
“소민아?”
“왜 그래?”
“저금통은 왜…….”
멤버들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양소민은 주머니엔 몇천 원을 쑤셔 넣은 채 숙소 밖으로 나갔다.
전화를 하고 싶다.
* * *
[이 번호가 맞아서 다행이네요. 완전히 잊어버렸으면 큰일이었는데, 헤.]
성필은 밤새도록 양소민과 통화했다.
그녀는 체스 이야기만 했다.
[Bd3. Qxc3. Bb2. Qc7. 이렇게요.]
성필은 알아듣지도 못했다.
기물과 좌표만 말한다고 바로 머릿속에 그려지진 않았다.
[이러면 d5. Bxd5…….]
양소민은, 자신의 유일한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 방법.
체스에 관한 이야기만 주야장천, 성필에게 할 뿐이었다.
시간은 새벽을 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 대단해.”
[헤헤. 그래서 나중에요, 혹시나 그 사람이랑 다시 매칭되면 이 방법 써보게요.]
“그래. 넌 이길 수 있을 거야.”
[아. 팀장님 저 시간 다 됐대요.]
“무슨 시간?”
[PC방 시간이요.]
PC방에서 어떻게 전화를 걸었지? 설마 카운터에 놓인 그 전화인가?
직원에게 미안하다.
[저 이만 끊을게요. 감사합니다.]
“소민아.”
[네?]
“우리 통화했단 거, 멤버들이랑 회사에 말하지 마. 절대로.”
만약 이게 알려지면, 윤상열이 무슨 짓거리를 벌일지 몰랐다.
안 그래도 음방에서 만나보니 성필을 잔뜩 싫어하는 게 보이지 않던가.
[아, 맞다. 그렇네요. 그럴게요.]
“그래. 잘 자.”
[네 팀장님도요!]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좋았어.”
전화가 끊기고, 성필은 우울함에 잠겼다.
‘음방에서 봤을 때도 애들 스트레스 관리가 전혀 안 되는 것 같던데.’
스마트폰도 없이 대기실 바닥만 보고 있던 글로브 아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양소민은 대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면, 이렇게 늦은 시간에 PC방까지 가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게다가 양소민은 다른 애들보다 훨씬 여리고 섬세한 아이인데.
“…….”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다.
새벽까지 성필의 생각을 무겁게 가리고 있던 안개 속에서 흐릿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이디어라 부르기에도 투박한 무언가가.
‘……석세스 엔터.’
만약 가로 엔터가 성공한다면, 그래서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인수할 수 있을까?’
석세스 엔터도 지분 투자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성필은 그 지분이 각각 어떤 사람에게 넘어가 있는지 모두 안다.
‘그 지분을 전부 사들이면…….’
석세스 엔터를 가져올 수 있다.
* * *
“네, 나도 사, 사랑해요…….”
“이사님! 아라쨩 남자친구 생긴 거 같아요!”
“엄마거든!”
조아라가 짜증 내며 통화를 끝냈다.
“보여줘!”
“내가 왜 폰을 보여줘? 폰은 사생활이거든?”
“찔리는 거 있지? 누구야! 어떤 놈팽이 같은 녀석이냐구!”
“아 그래 봐라 봐!”
그렇다고 리카가 진짜 조아라의 핸드폰을 가져가진 않았다. 장난이었으니까.
그녀의 말마따나 핸드폰은 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에이. 그러면 내가 아라쨩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거잖아. 안 그럴 거야.”
“…….”
“앗! 어이가 없을 때의 표정이야!”
“리카 너 한국어가 점점 느네. 인격권이랑 침해란 말도 알아?”
“아타시(나)는 똑똑하니까!”
한구인의 수제자, 리카는 날이 갈수록 어휘력이 상승하고 있었다.
역시 외국어는 그 나라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한구인은 독일인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렇다.
한동안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가던 둘은, 반응이 전혀 없는 성필을 이상하단 듯 보았다.
“아저씨 오다가 개똥이라도 밟았어요?”
“아라쨩 품위 없어.”
“그럼 개똥을 뭐라고 하는데?”
“음, 견변(犬便)?”
“뭔 말인지 전혀 모르겠잖아. 그래서 아저씨 왜 이래요?”
성필은 출근한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어제 샀던 주식이 상장폐지 당했단 소식을 들은 트레이더 같았다.
“…….”
“심각하네. 내 말까지 무시하고.”
“아타시(나)도 기분이 안 좋아졌어……. 이사님, 제가 기분 좋게 만들어드릴게요!”
그러더니 리카가 성필의 어깨를 주물렀다.
“시원하신가요!”
성필이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떼어냈다.
“됐어.”
“진짜 심각해! 내가 어깨까지 주물러 드렸는데!”
성필은 더는 대답하기 귀찮아져서 그냥 사무실로 떠났다. 그리고 어제 미처 마치지 못한 멤버들의 아이디어 편집을 이어갔다.
“형, 무슨 일 있어요?”
리카와 조아라에게 소식을 들은 민경섭이 성필의 옆에 앉았다.
“뭐가?”
“아니, 형 오늘 좀 많이 다운돼 보여요.”
“그러냐.”
민경섭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오랫동안 그를 보아왔기에, 집요하게 물어봤자 답이 나오지 않으리란 걸 알아서였다.
과연, 5분 정도 지나자 성필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경섭아.”
“네.”
“보통 말야. 엄청 사이가 좋았던…… 그런 사이인데.”
연애에 관련된 이야기구나.
민경섭은 직감했다.
“더는 볼 수 없고. 그런 상황이 돼서. 뭐…….”
“연락은 해봤어요?”
“아니. 그쪽에서 연락이 왔거든.”
“그래서요?”
“그냥, 별거 아닌 얘기 하다가 끊었는데.”
“싱겁게 끝났네요.”
“그게, 내가 연락할 순 없는 상황이라서.”
차단이라도 당했나 보구나.
민경섭은 이해한단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왜 성필의 기분이 나빴는지 단숨에 이해가 갔다.
“그 사람을 다시 보려면 내가…… 내가 엄청나게 많이 노력해야 하거든. 근데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해야…… 근데 이런 말 하면 그 사람이 화낼 수도 있을까…….”
“마냥 기다려달라고 하는 건 사람 할 짓 아니긴 하죠. 방법이 없네요. 형 어떡하냐. 힘들겠다.”
“……응.”
‘이 형 진짜 심각한데?’
여태껏 성필이 이토록 좌절한 건 업무 영역에서밖에 못 봤다.
정말 사랑한 사람인가 보다.
민경섭은 마땅히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었고, 성필도 더는 말이 없었기에 그냥 자리를 떴다.
“이사님 왜 그러신대요?”
민경섭을 발견한 장하양이 물어왔다.
성필의 우울함은 이미 가로 엔터 전체에 퍼진 소식이었다.
“내가 말할 얘기는 아닌 거 같아.”
“그런가요.”
민경섭은 입이 가볍지 않았다.
동네방네 떠들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가로 엔터 최고의 지식인이자 상식인, 한구인이 정보를 접했다.
“그래? 박 이사도 사생활이 있었구나. 흠…….”
정보는 홍규헌에게로 넘어갔다.
“아, 진짜요? 걔 매일 일이 먼저라고 하더니,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네요.”
또 손혜빈에게로.
“형이요? 아, 어쩐지 와서도 계속 우울해 보이더라고요. 그랬구나.”
또 정지음에게로.
이윽고 가로 엔터 임직원 전부가 알게 됐다.
“박 이사님. 오늘 민 매니저님, 정 PD님과 술을 먹기로 했습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오시겠습니까?”
“특이한 조합이네요.”
가로 엔터는 자체적인 회식이 많지 않다.
다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희귀한 기회이기도 하니, 성필은 참여하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손혜빈이 화를 냈다.
“뭐예요 지금 여자라고 배척하는 거예요?”
“그,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맞잖아요!”
성필이 가벼운 분위기에서, 눈치 볼 것 없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남자만 모은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갈게요. 되죠?”
“예.”
손혜빈도 술자리에 참가하게 됐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게 됐다.
“어? 김 실장님!”
“혜빈 씨?”
마침 갔던 술집에서 김형선 실장과 이유이 어시스턴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에 맡은 일에서 이유이가 큰 역할을 하여 따로 축하해줄 겸 술을 먹기로 했단 모양이다.
“합석해요!”
“네.”
이미 가로 엔터는 스타일리스트 팀과 언덕을 함께 오른 전우였다.
흔쾌히 합석하게 됐다.
거기서 또 사람이 추가됐다.
“여기예요 여기!”
“안녕하세요 다들. 오랜만에 뵙네요.”
JJH사의 사장, ‘아니’의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던 조정훈이었다.
김형선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다.
그는 요즘에도 소녀연맹의 차후 뮤비에 관련해서 스타일리스트 팀과 협력했고,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김형선에게 호출받고 술자리에 참여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조 사장님!”
“네?”
“아니, 다른 조 사장님 있어요.”
공연 기획사 아틀라스의 사장, 조진만도 불려왔다. 팬미팅 연출로 가로 엔터와 친해지게 된 그였다.
“반갑습니다, 조진만입니다. 제1차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를 연출했습니다.”
“네?”
“팬미팅 말입니다.”
“아, 예. 조정훈입니다. ‘아니’ 뮤비 만들었습니다.”
“오, 감독님이셨군요. 대단했습니다.”
“아하니 뭐, 대단하다고 할 거까지야. 뭐어, 쪼끔 대단하긴 하죠?”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사람과 친해졌다.
어느새 테이블이 가득 차게 됐다.
그리고 또 사람이 늘어났다.
“안녕하세요! 진짜 진짜 오랜만이에요!”
작사가 이수연.
‘아니’의 작사를 맡았고 최종적으로 그녀의 안이 받아들여졌었다.
이수연은 ‘아니’ 녹음 때 환상의 디렉팅 케미를 보여주었던 정지음의 옆에 자리했다.
“뭐야.”
성필은 이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됐다.
어쩌다가 이렇게 사람이 많아졌지?
싫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소녀연맹 데뷔 앨범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전부 모였다.
“뭐긴 뭐야. 술이나 더 받아.”
“……그래.”
성필은 손혜빈이 준 술을 원샷으로 마셨다.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인물이 도착했다.
“다들 잘 놀고 있어?”
제지공장 사업 관련 업무를 마치고 온 홍규헌이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다들 일어나서 홍규헌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뿌듯한 미소를 품고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술 때문에 거의 맛이 가버린 성필이 말했다.
“사장님은 저쪽.”
“어디?”
성필이 계산대를 가리켰다.
“계산해주세요. 자자, 다들 일어납시다!”
사람들이 전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홍규헌을 지나치며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같은 말을 던졌다.
홍규헌은 충격받아서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 나를, 부른 게, 도, 돈 내달라고……?”
농담이겠지?
싶었는데 정말로 다 가게를 나가버렸다.
“…….”
홍규헌, 인생에서 가장 씁쓸하고 슬픈 순간 5위 안에 드는 경험이다.
눈물도 찔끔 나려던 때, 성필이 가게 안으로 짜잔 등장하며 웃었다.
“농담입니다!”
“…….”
“사장님 오기 전에 저희끼리 엔빵했어요. 2차 가요 2차!”
“…….”
성필이 홍규헌에게 등을 연타로 얻어맞았다.
“웃지만 말고 도와주, 아악!”
사람들은 웃으며 구경만 했다.
2차, 저마다 자리를 잡고 술잔을 기울였다.
사실, 그냥 배에 술을 들이붓는 수준이었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가능했다.
그냥 술을 먹는 것도 힘들었지만, 성필에게는 다른 시련도 있었다.
조정훈 감독이 다가왔다.
“거 이사님. 남자는 기세예요.”
“네?”
“힘드신 상황인 건 압니다. 그래도 진심을 계속 보이세요.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으시면요. 내가 너 이만큼 사랑해! 그렇게요.”
“네?”
“잘하실 거라고 믿어요.”
“네?”
다음으로 아틀라스 사장인 조진만이 왔다.
“이사님.”
“네.”
“이사님이 용기를 내야 합니다.”
“……??”
“정말 사랑하신다면 무릎 꿇고 그분이 있는 곳까지 기어가십시오. 그럼 이만.”
다음은 김형선 스타일리스트였다.
“그쪽에서도 잡아주길 바라고 있을 거라니까요. 지레짐작 포기하는 남자 꼴불견이야.”
“왜 갑자기 와서 욕하세요.”
“이럴 땐 무조건 가서 들이박는 게 직빵이에요. 상대가 온갖 이유 갖다 붙여도 우직하게 버텨요.”
“뭔데요 대체.”
다음은 이유이 어시였다.
“그, 그분이랑은 이제, 어, 뭐, 어떻게 하실, 거예요? 헤어지나요?”
“네?”
“그, 마음을 접는 것도, 좋은 방법……. 으, 혹시 상담이라던가, 필요하시, 아, 아니에요!”
“네?”
다음은 이수연 작사가였다.
“이사님, 이 술 시켜도 돼요? 여기.”
“뭐 어떤 거요?”
“여기. 3만 5천 원짜리요.”
“어차피 엔빵인데 시켜요.”
“이사님이 쏘는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요.”
이수연은 씁쓸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은 정지음이었다.
“형.”
“뭐.”
“나는 경험이 없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힘드시겠다.”
“네가 더 힘들어 보여. 술을 주려면 잔에 줘야지 왜 테이블에 뿌리고 있어.”
“암튼 힘내세요. 전 가볼게요.”
“너나 힘내. 아이고, 쟤 다리에 힘 다 풀렸네.”
다음은 민경섭이었다.
“세상에 여자가 하나인가? 형 정도 되면 뭐 어떻게든 되게 돼 있어요. 알죠? 될 거라니까요?”
“넌 밖에 나가서 숙취해소제나 먹고 와라.”
“나 안 취했다고! 아, 놔. 놔요. 놓으라고 했어요. 나 안 취했……!”
민경섭이 한구인에게 끌려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은 손혜빈이었다.
“병신아하하하흐하핳!”
“…….”
“아하하핰, 하하, 하하…… 하아. 크흥, 뭐, 안 됐아하흐핳하하 병신이히히흐하핰!”
웃다가 그냥 가버렸다.
다음은 한구인이었다.
“힘내십시오.”
“아니, 사람들 다 왜 저한테 그래요?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거예요?”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네?”
“알려진 건 창피하시겠지만, 다들 박 이사님을 위로해주기 위해 모이신 겁니다.”
“뭘요?”
“……알겠습니다. 항상 고통을 숨기고 갑옷을 입으시는, 그런 박 이사님의 강인한 모습을 존경해왔습니다. 사생활이라고 다르진 않군요. 존중합니다. 부디 빨리 고민에서 헤어나오시기 바랍니다.”
“진짜 뭐냐고요…….”
성필은 한구인에게서 설명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떠나가고, 홍규헌이 왔다.
홍규헌은 이수연 작사가가 사정사정해서 시킨 고가의 술을 성필의 잔에 부어주었다.
“축 처져 있지 마. 박 이사는 그런 모습 안 어울려.”
“사장님, 사실은요…….”
“박 이사는 항상 어깨도 당당히 펴고, 고개도 안 숙이고, 그런 모습이 어울린다고. 그래, 물론 사랑이란 게 강철 같은 영웅마저도 고개 숙이게 만드는 것이긴 하지. 하지만, 계속 슬퍼하는 박 이사는 보기 싫어. 이거 먹고 훌훌 털어내.”
“아니…….”
“다들 건배 한 번 합시다!”
홍규헌이 잔을 들고 일어났다.
“박 이사, 파이팅!”
“파이팅!”
다들 술을 들이켰다.
성필은 헛웃음이 나왔다.
“돌겠네.”
성필도 술을 위 안으로 들이부었다.
권주사가 끝난 뒤에도 홍규헌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성필의 곁에 붙어 위로해주었다.
“거리가 있으면 포기하는 게 맞을 거 같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성필은 홍규헌의 오해가 어디까지 뻗쳐나가나 궁금해서 그냥 듣기만 했다.
“지금은 그 사람밖에 눈에 안 보이겠지만, 시간을 약처럼 먹어. 그저 마음이 지나가기만 기다려. 아니면 일 더 많이 줄까? 생각할 시간도 없게?”
“아니요.”
“대답 칼 같네.”
홍규헌은 조금 더 자리에 붙어서 성필과 대화하다가 일어났다.
“담배 피우러 가세요?”
“어.”
“같이 가요.”
“너 줄인다면서.”
“술 마셨잖아요.”
둘은 함께 가게 밖으로 나갔다. 둘이 동시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홍규헌이 불을 붙이려는 찰나.
“사장님.”
“응.”
“저희 돈 많이 벌면요, 다른 회사 인수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른 회사 노하우나 인력풀, 아티스트들도 같이 흡수하면 성장이 더 빨라질 거예요.”
“음, 그것도 좋겠지. 꿈같은 얘기긴 한데, 어디 생각하는 데 있어?”
“석세스 엔터요.”
“……흐.”
“사장님?”
홍규헌은 작은 웃음부터 시작해서, 나중엔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녀는 찔끔 나온 눈물을 닦곤,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박 이사의 복수야?”
“복수가 아니라…….”
“그래.”
홍규헌이 성필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러자. 약속할게.”
* * *
소녀연맹 멤버들은 연습실에 동그랗게 빙 둘러앉았다. 중앙에는 홍규헌이 주고 간 10만 원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연습 마치고 택시를 타고 가고, 남은 돈으로는 함께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고 했다.
“뭔가요, 이건.”
리카가 툭 뱉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전부 나간 건가요.”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회사 임직원끼리 어떤 일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박 이사님…….”
그리고 그 일에는 성필이 관련되어 있다.
멤버들 모두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오늘따라 이상하셨어. 아름이는 짐작 가는 거 없어?”
장하양의 질문에 신아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5년 가까이 그를 보아온 신아름이라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멤버들이 기대를 담아 그녀를 응시했다.
“가끔…….”
“가끔?”
“가끔 그러셔요. 화나신 건 아니에요. 팀장님은 화나셨을 때 욕을 하면 했지, 오늘처럼 우울하게 있진 않거든요.”
그렇다면.
“슬프신 거예요.”
슬프다.
성필이 슬프다.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그가 기뻐서 우는 건 보았으나, 슬픔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 일은 드물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슬프게 할 수 있을까?
“이사님이 슬프셨던 적이 있어?”
“4년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지셨을 때요. 그리고 3년 전에 소중하게 기르셨던 애완식물이 있었는데요, 그게 죽었어요. 그때 저러셨어요.”
여자친구와의 이별과 애완식물의 죽음.
확실히 슬플 것 같긴 하다.
“애완식물은 뭔데.”
“넌 애완이란 말도 몰라?”
“아니 당연히 그건 알지! 근데 애완식물이 뭐냐고.”
“애완용으로 기르는 식물이지 뭐.”
“……말이 안 통하네.”
“안 통하는 건 너거든.”
애완동물도 아니고 애완식물은 뭐냐고. 조아라는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앗! 옛날에 아름이가 그러지 않았어? 이사님 쪼꼬만 강아지도 무서워한다며.”
“응. 어릴 때 개한테 물리셨대.”
“그거 때문에 식물을 기르신 건가?”
“아니. 전 여자친구한테 생일선물로 받았던 거야.”
“아…….”
전부 여자친구와 관련된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번 슬픔의 원인도…….
“아름아. 전 여자친구분 직접 뵌 적 있어? 어떻게 생기셨어?”
“그게 궁금해요?”
“……그냥 물어봤어.”
“얘들아.”
장하양이 입을 다물자마자, 백설하가 말했다.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거 같아. 아마 박 이사님 위로해주려고 회식이라도 가셨겠지.”
“차인 거 위로하려고 전 직원이 회식을 간다고요? 그게 말이 돼요? 사장님까지 갔는데요?”
백설하는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야, 성필이 정말 우울해 보였으니까…….
“아저씨 여자친구 있었구나. 신기하네.”
“왜?”
“아저씨 쉬는 날이 거의 없잖아요. 잘도 사귀었단 생각 들어서요. 거의 회사에만 있…….”
자신들 때문에.
소녀연맹을 케어하고 매니지하기 위해.
성필은 일에 미친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녀들이 연습생이던 시절에는 주말까지 나오곤 했었다.
“……아무튼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백설하가 중앙에 놓인 10만 원을 집었다.
“2시간만 더 각자 할 거 하고 숙소로 가자.”
멤버들은 생각이 많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 머리 깨진다.”
작사가 이수연이 작업실로 들어왔다.
홀로 쓰는 곳은 아니었다.
여러 작사가가 모인 작사팀, ‘소리올림’에서 공동으로 빌린 장소였다.
작사팀이라 해도, 같이 일하면서 다과 먹고 수다나 떠는 친목 모임에 불과했다. 일은 각자 받고 각자 해결한다.
“어제 가로 엔터 쪽 회식 갔다며?”
“응.”
“많이 마셨나 보네.”
동료가 낮게 웃었다.
“그분 보러 갔지?”
“뭐?”
“그분. 키 크다는 분 있잖아. 190 넘는 댔나?”
“뭔 소리야. 그분이랑 안 만난 지 몇 개월은 지났구만.”
“그러니까 보러 간 거 아냐?”
“가로 엔터랑 같이 일한 정 때문이지…….”
사실, 정지음을 보러 간 게 맞았다.
소녀연맹 ‘아니’의 녹음 현장.
이수연은 정지음과 함께 보컬 디렉팅에 참여했었다. 같이 영혼이 담긴 디렉팅을 하면서, 이수연은 정지음에게 관심이 생겼다.
큰 키. 소처럼 크고 순수한 눈망울. 게다가 자기 일에 열정적인 태도.
그래, 고백하자. 사실 관심이 생긴 정도가 아니라 완전 마음을 빼앗겼다.
‘용기 냈어야 했는데…….’
어제도 가서 번호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술만 진탕 마셨을 뿐, 그와는 말도 별로 못 섞었다.
“얼굴 보니까 좋은 결과 없었나 봐? 하긴, 계속 골방에 박혀서 가사나 쓰는 애가 용기가 있겠어? 네 얼굴이 아깝다.”
“꺼져.”
이수연은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메일을 열었다.
‘왔네. 가로 엔터 이번 신곡이랑 가사 컨셉.’
이수연은 이번에도 가로 엔터로부터 일을 받았다. 일을 받는다고 돈을 바로 얻는 건 아니다.
가사를 쓴 후 가로 엔터로 보내면, 그 가사가 수많은 작사가들의 가사와 경쟁을 벌인다.
그 뒤 뽑히면 돈을 받는 것이다.
“소녀연맹 꺼야?”
“응.”
“같이 봐도 돼?”
“그래라.”
둘은 함께 곡을 들어보고 가사 컨셉까지 확인을 마쳤다.
작업실에 정적이 내리 앉았다.
“이, 이건…….”
소녀연맹 너희들, 벌써 어른의 계단을 오르기로 한 거야?
“숙녀연맹이 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