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43화 (143/760)

143화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리 말하고도, 홍규헌은 단어를 조심스레 선택하는 듯 망설였다.

“그러니까, 싼 티 없는 섹시? 그런 컨셉으로 가고 싶은 거야?”

“아.”

그때 무언가 생각났단 듯 민경섭이 소리를 냈다.

“민 매니저 왜. 뭐 떠올랐어?”

“아, 아니요.”

떠오르긴 했다.

얼마 전 성필이 멤버들에게 보여주었던 익스 이블의 공연 영상이다.

설마 성필은 멤버들에게 그런 모습을 바라고 있는 건가?

민경섭은 성필의 눈을 유심히 관찰했다.

‘욕망……!’

성필의 눈에서 욕망이 보인다.

‘평소랑 똑같네.’

평소의 성필도 항상 저런 상태다.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좋아하는 연예인이 대화 주제로 나온 여중생처럼 눈가에 흥분이 감돌곤 했다.

“싼 티 없는 섹시라뇨……. 무슨 2000년대 초반에 나올 말을 하고 그러세요.”

“그렇지? 근데 이 곡에 맞출 비주얼이나 스타일을 떠올리려고 하면 ‘섹시’밖에 모르겠거든.”

백설하가 멜로디를 따라 입힌 보컬에선 끈적임이 느껴진다.

현재 소녀연맹의 이미지와 매치하는 게 힘들 정도였다.

“이 곡이 소녀연맹에 어울리겠습니까?”

한구인이 입을 열었다.

“소녀연맹이 쌓은 이미지는 거친 세상에 저항하는 당찬 소녀들 아닙니까.”

20대가 소녀라고 불리는 건 어폐가 있지만.

“아직 이상적인 꿈과 희망을 간직한,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 있는 게 멤버분들의 포지션인데. 만약 이 곡을 다음 타이틀로 뽑는다면 계단을 몇 개나 뛰어넘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팬들도 당황할 것이다.

데뷔 앨범에서 나타났던 자기주장 가득한 소녀들이, 순식간에 감정의 밑바닥까지 핥아 먹어본 숙녀로 돌아왔으니까.

“완벽한 컨셉 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단순한 팬의 입장이었다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회의실이 정적에 잠겼다.

다들 한구인의 말을 음미하기에 찾아온 침묵인 줄 알았으나, 무언가 달랐다.

모두 한구인을 보고 있었다.

“제가 말실수라도 한 겁니까……?”

“아니. 한 이사도 생각이 있구나?”

“예? 당연하지 않습니까. 멤버분들의 일인데.”

옛날의 한구인은, 자신이 아이돌에 관해 잘 모른다며 결정을 홍규헌이나 성필에게 넘겼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강한 자기주장을 하다니.

다들 놀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럼 한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멤버들의 사랑은 어떤 형태로 표현돼야 하나요?”

손혜빈은 기세를 이어 한구인에게 질문했다.

“멤버분들의 사랑이라면…….”

그로부터 나온 한구인의 설명은,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컨셉 배반이었다.

애인의 손을 잡고 반대 손에는 솜사탕을 들며, 만면에 순수한 미소를 지은 채 놀이공원을 거니는 리카.

애인과 가로등 아래에서 기타를 치며, 가난한 현재에도 사랑 하나로 만족하는 백설하.

원거리 연애로 애인의 얼굴을 직접 본 게 오래지만, 식지 않은 사랑으로 영상 통화만 해도 행복해하는 조아라.

애인과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쉬는 시간에는 커피를 나눠마시는, 판에 박힌 일상마저도 천국처럼 느끼는 장하양.

애인의 생일을 위해 직접 요리를 준비하고,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배시시 미소를 흘리는 신아름.

“한 이사님이야말로 우리 애들 컨셉 전혀 모르시는 거 아니에요?!”

“박 이사님이 표현한 것보다 멤버분들께 어울리지 않습니까.”

“우리 애들은 청순돌이 아니라고요! 그런 걸 시도하려면 데뷔 때 했어야죠!”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제가 박 이사님께 이런 말을 듣는 게 맞습니까? 박 이사님이 제시하신 컨셉에서 나는 짙은 향수 냄새보다, 제가 말한 컨셉에서 느껴지는 솜사탕 향이 훨씬 낫습니다.”

“둘 다 망상 멈춰라. 너희들 이상형은 충분히 알겠으니까.”

홍규헌이 두 남자의 뜨거운 논쟁을 말렸다.

“사랑을 주제로 삼자고 하긴 했는데, 이 곡은 너무 나간 느낌이 있어. 백설하 개인곡이면 몰라도, 타이틀로 애들이 소화하기엔 무리야.”

“저…….”

그때 백설하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백설하?”

“그,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한데. 멤버들도 이걸로 타이틀 하고 싶다고…….”

“그럴 수가!”

한구인이 절망하며 소리쳤다.

* * *

어째서 멤버들이 이 퇴폐적인 곡에 애착을 갖게 되었는가.

첫째, 듣기가 너무 좋다.

아직 가사가 붙지도 않았건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

“밴드 사운드 되게 좋다. 그치?”

“응. 특히 코러스로 들어갈 때 드럼 빨라지는 거.”

이유는 성필에게 있었다.

과거 음악사 시간, 성필은 영국 록의 역사를 설명해주며 수많은 록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멤버들은 밴드 사운드와 록의 매력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됐다.

EDM이 익숙한 세대임에도, 밴드에 알 수 없는 향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아타시(나)도 이게 마음에 들어!”

특히 리카가 그러했다.

이시카와 리카, 고향은 일본.

일본의 오리콘 차트는, 심심찮게 차트에 오른 곡의 절반 이상이 밴드 사운드로 채워지곤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은 밴드 사운드에 익숙하며, 또한 그것을 좋아한다.

일본의 웬만한 도시에는 인디 밴드를 위한 소극장이 수백 개가량 존재한다.

엄청난 공연 인프라다.

서울은 소극장이 200개 정도이다. 지방으로 내려가선 소극장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것을 보면, 일본인의 밴드와 공연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리카도 그런 일본의 문화에 익숙했다.

“우리가 만들어서 더 좋은 거 같아.”

그리고 멤버들이 이 곡을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녀들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지음의 지시에 따라 악기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만감을 느꼈다.

다 함께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여 완전하게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

합주를 제외하곤 느끼기 힘든 감정이다.

그 충만감이 멤버들을 사로잡았다.

그 결과.

“멤버들이 다 이걸로 하고 싶어 한다고?”

미니 앨범 발매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아직도 타이틀곡 선정은 지지부진이었다.

여러 후보곡들은 가이드 보컬만 붙어 있을 뿐 아직도 선택받지 못하고 있었다.

가로 엔터 경영진은 물론, 멤버들의 의견도 갈렸기 때문이다.

“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멤버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홍규헌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뿐 아니라 가로 엔터의 모든 직원들도.

“이 곡이 경쟁력이 있을까?”

홍규헌의 물음에 임직원들은 침묵에 빠졌다.

그야 곡이 좋긴 하다. 게다가 멤버들도 만장일치로 타이틀로 쓰고 싶어 하니, 이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첫째, 애들이 소화할 수 있겠는가. 둘째, 시기에 적절한가.”

갓 20살이 된 파릇파릇한 새내기 대학생을 생각해보자.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를 꿈꾸는 그녀는 매일 친구들과 함께 대학가를 거닐고, 동아리 가두모집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자꾸만 눈에 밟히는 동기가 있어, 그가 참여하는 술자리에는 없는 이유까지 만들어서 낀다.

아직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

다가가는 법도, 마음을 전하는 법도 모른다.

그저 사랑하는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그리고 자신을 바라봐주길 기다릴 뿐.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이 곡 부른다고 생각해봐. 막 향수 냄새랑 술 냄새 팍팍 나고.”

“저, 사장님. 제가 향수랑 술 냄새를 비유로 들긴 했는데, 그것만 강조하시니까 너무…….”

“그치? 이미지로 매치가 안 되잖아. 내가 보기에 소녀연맹 애들은…… 어, 진짜 애들이야. 이 곡이 맞을까 싶다.”

성필이 시무룩해졌다.

“백설하.”

“네.”

“너 이 노래 표현할 수 있겠…….”

그 순간, 홍규헌은 가이드로 들어 있던 백설하의 보컬을 떠올렸다.

“표현할 수 있구나. 오케이, 일단 이건 넘어가고…….”

“네, 네?”

“둘째. 시의적절한가.”

4월!

꽃과 사랑이 만개하는 시기!

모든 게 어딘가 이상야릇한 계절!

낭만과 희망이 가득한 4월의 음원 차트.

그곳에 하나의 곡이 등장한다!

“그게 이거라고 생각해봐. 봄볕을 맞으며 이 곡을 듣고 싶을까?”

“그 측면은 크게 고려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꺼낸 건 한구인이었다.

“그런 말이 있잖습니까. 계절마다 나오는 노래가 비슷비슷하다. 물론 그게 가장 잘 먹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한 가지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봄 시기의 노래들은 비슷한 컨셉으로 제 살 파먹기를 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요는 항상 존재한다.

“그들이 승리하기 위해선, 기존에 존재하는 곡을 열등으로 몰아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봄 노래의 특성이 더욱 강해지고, 역설적으로 우월성 증명 전략들은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영세한 소녀연맹이 봄의 컨셉에 맞춰 경쟁하는 건 승산이 적을 뿐이기에, 저희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합니다.”

“어떤?”

“신하위범주화.”

봄의 음악 시장과는 다른, 완전히 다른 범주를 개척한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이 곡과 마찬가지로, 승산을 높이려면 아예 시의를 비껴가는 편이 좋습니다.”

“한 이사님 아까는 이 곡 컨셉 듣고 충격받으셨었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전략적인 장르 선택이란 점에선 옹호하고 싶습니다.”

설마 한구인이 도와주다니.

성필은 놀람과 동시에 그에게 감사했다.

솔직히 이 노래가 봄에 안 맞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한구인의 설명이 붙자, 갑자기 암살자가 품 안에 숨긴 비수와 같은 이미지로 변했다.

“한 이사.”

“예.”

“그냥 다른 곡들이랑 차별점이 있다,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굳이 복잡하게 설명해야 해?”

“왠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조금 생소한 말을 쓰고 꼬아서 설명하면 설득 확률이 올라가더군요. 어떻습니까. 사장님도 제 말에 설득이 되셨습니까?”

“…….”

홍규헌은 고민에 들어갔다.

“……박 이사.”

“네.”

“이 곡, 가사 받아서 가져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걸 선택하는 건 아니야.”

가로 엔터가 타이틀곡 후보로 골라두었던 나머지 세 곡과 경쟁을 펼칠 것이다.

“주의점은, 노골적인 섹스어필은 안 된단 거야. 싼 티 안 나는 섹시…….”

“사장님 그 말 좀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

“이런 말밖에 생각 안 나는데 어떡해! 진짜, 표현할 단어가 없다고…….”

퇴폐미 정도면 될까.

홍규헌은 잘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정신을 다잡고 말했다.

“내가 너희들 의견 안 듣고 바로 이렇게 지시 내리는 건, 이 곡이 멤버들에게 만장일치로 선택받았기 때문이기도 해. 그리고 타이틀곡 선택이 너무 밀렸잖아.”

임직원들 간 회의가 오래도록 이어졌지만, 아직도 선택되지 못했다.

이러다간 컴백 커트라인에 못 맞출 지경이다.

“이 곡 포함해서 후보로 올랐던 총 4개 곡. 전부 가사 받아서 붙이자. 그리고 빨리 회의 들어가서 타이틀곡 결정 내는 거야. 알겠지?”

임직원들이 결의에 차서 ‘네’라고 답했다.

사장의 명령을 이행할 의지에 가득 차 있었다.

한 명만 빼고.

“…….”

한구인은 멤버들이 이 곡을 택했단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비록 자신이 이 곡을 전략적 관점에서 옹호했더라도, 충격적이란 건 변하지 않았다.

한구인은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리카 씨, 설하 씨, 아라 씨, 하양 씨, 아름 씨…….’

언제 이렇게 성장하신 겁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맑게 웃으면서 ‘한 이사님’이라고 불러주던 아이들이었는데.

어느새 너무나도 커버렸다.

한구인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눈가를 훔쳤다.

* * *

성필은 멤버들을 불러 모아 질문했다.

“너희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건 어떤 거야?”

“놀러 가고 싶어요! 애인이 생기면요, 같이 쇼핑도 다니고 맛집도 가고 사진 찍으러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거예요! 아, 놀이공원 가고 싶어요! 머리에 동물귀 머리띠 쓰고 솜사탕도 먹으면서 손잡고 돌아다닐래요!”

“…….”

“이상한가요?”

“아, 아니.”

한구인의 설명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대체 한구인은 리카의 어디까지 꿰뚫고 있던 거지?

역시 리카의 지적(知的) 스승이다.

제자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다.

“설하는?”

“저느은, 잘 모르겠네요. 생각해본 적이…….”

“거짓말이에요! 쌤한테 이런 거 물어보면 엄청 자세하게 답해주고 그랬어요!”

“오, 그랬어? 설하가 뭐라고 했는데?”

“리카 내가 말할 테니까…….”

“고백할 때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를 거래요!”

백설하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낭만 있네.”

곡의 컨셉과는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아름이는?”

“뭐, 깊게 생각한 적은 없는데. 요리 같은 건 해줘 보고 싶어요.”

“가정적이네.”

“팀장님이 요리해주는 거 먹어보니까 괜찮을 거 같아서요.”

“이사님이 요리를 해주셔?”

장하양의 질문에, 신아름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띠었다.

“팀장님은 한두 달에 한 번씩 저희 집에 오시잖아요. 팀장님 요리 되게 잘해요. 못 드셔보셨죠?”

“…….”

장하양은 입꼬리만 올리며 수긍해주었다.

따로 대답은 없었다.

“하양이는?”

“이사님. 이렇게 포괄적으로 묻기보다, 곡에 맞춘 느낌을 물어봐야 하지 않나요?”

“아, 그러게.”

안 그래도 성필은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주로 한구인이 꿈에 가득 차서 내놓았던 컨셉이, 모든 멤버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단 데서 나온 이상함이었다.

‘한 이사님. 누구보다 애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계셨네요. 이상하다고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성필은 주제를 바로잡았다.

“음, 이 곡에 맞춰서요…….”

리카도 이 곡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무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지배…… 하고 싶네요.”

“어?”

“아타시(저)의 발에 매달려서 사랑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달까?”

“씹덕.”

“이게 왜! 이건 메이저한 취향이라구! 그럼 아라쨩은 어떤데?”

“그게 어떻게 메이저인데? 애초에 사랑하는 사람이 구걸하는 걸 보고 싶어? 그게 사랑이야?”

“……그 사람도 복종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래, 미래의 애인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고생 좀 해라.

리카가 무릎을 꿇으라면 꿇는 수밖에 없겠지.

성필은 미래에 리카의 애인이 될 사람에게 동정을 보냈다.

“리카, 너 맨날 나 좋아한다고 하잖아.”

“소다요(그래).”

“그럼 너 내가 무릎 꿇고 매달리는 거 보고 싶어?”

“헤.”

“방금 웃었냐?”

“아, 아니. 아라쨩이랑 나는 동등한 관계니까. 그런 건 안 시키지…….”

성필은 묵묵히 필기했다.

[지배.]

수첩에 들어찬 단어를 보니 마음이 새까맣게 물드는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아라 너는 어떤데?”

“음…….”

“부끄러워하지 말고. 가사에 필요한 거잖아. 가사는 아티스트의 사상을 드러내는 수단이야. 네가 바라는 사랑의 형태를 마음껏 말해봐. 판타지 같은 거 있잖아.”

“……판타지? 아저씨 지금 나 연애 못 해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못 해봤잖아.”

“그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아라 눈에 어떤 남자가 차겠니.”

조아라는 당황했다.

옛날, 리카가 장하양에게 ‘언니는 연애 많이 해봤죠?’라고 질문했던 적이 있었다.

장하양을 처음 봤을 때였다.

그녀는 ‘내 눈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별로’라고 했었다. 조아라는 그 대답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누가 물어보면 꼭 그렇게 답하자고 생각했었는데…….

“자, 빨리 말해줘.”

조아라 자신이 말하니 효과가 전혀 없다.

일에 열중하는 유능한 여자처럼 보이고 싶었는데…….

“음…….”

조아라는 성필의 질문에도 쉽사리 답을 꺼내놓지 못했다.

성필은 볼펜을 똑딱이다가, 말했다.

“혜빈 누나 불러올게.”

성필은 질문자가 남자인 자신이기 때문에 대답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다.

손혜빈은 성필에게 끌려 연습실로 들어왔다.

“난 나가 있을 테니까 잘 부탁할게.”

“어, 맡겨만 둬.”

손혜빈은 실실 웃으면서 핸드폰 메모장을 켰다. 그녀의 표정에서 흥미와 악의가 동시에 드러났다.

“자, 얘들아. 편하게 가자.”

두 시간 뒤.

“남친이 있으면 걔가 아이돌 춤추는 거 보고 싶어요. 좀…… 옷을 벗고?”

“아라쨩 남친 불쌍해! 무슨 죄야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한 죄.”

“사랑의 대가가 너무 무겁지 않아?! 그런 거 부탁하면 천년의 사랑도 식을 거야!”

멤버들은 마음 깊이 숨겨두었던 취향까지 꺼내놓았다.

손혜빈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멤버들의 의견을 기록해나갔다.

* * *

3시간에 다다르는 아이디어 회의가 끝났다.

성필은 손혜빈에게서 아이디어 메모를 받아보았다.

“……누나.”

“나 열심히 했지? 웬만한 말은 안 빼놓고 적었어. 작사가님한테 전달할 핵심 아이디어는 네가 적절히 편집하면 될 거야.”

“누나부터 좀 편집하고 보여주지 그랬어…….”

이런 거.

이런 심연에 가득 찬 생각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았어…….

“미안. 좀 중구난방으로 쓰긴 했지?”

“중구난방인 게 문제가 아니라…….”

성필의 눈이 조아라의 아이디어에 머물렀다.

“……아, 현기증 오네.”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머릿속에서 기어 올라온다. 당장이라도 메모를 덮고 싶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텨냈다.

“고생했어 누나. 애들 얘기 계속 들어주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아냐. 재밌었어. 가로 엔터 아니면 어디서 아티스트 얘기를 이렇게 들어주겠냐? 이게 다 프로듀싱이지.”

“그렇지. 우리 회사가 정말 좋…….”

성필의 눈이 메모의 가장 아래쪽으로 향했다.

[손혜빈]

“누나 아이디어는 왜 적어놨어?”

“애들이랑 얘기하다 보니까 내 말도 해야 하더라고. 읽어봐.”

읽었다.

“어때. 네 수비 범위 이내야?”

“누나 대체 어떤 연애를 해 온 거야?”

“하아, 이거 말해주려면 또 새벽까지 달려야 할 텐데. 직원들끼리 모여서 오랜만에 회식이라도 할까?”

듣고 싶지 않아.

“암튼 뭐, 알겠어. 내가 적절히 골라서 덜어내고 할게.”

“그래, 수고해라.”

성필은 사무실로 가서 핸드폰에 저장된 아이디어 파일을 메일로 전송했다.

컴퓨터로 그 파일을 띄우자 한구인이 다가왔다.

“아이디어 수합 끝나셨습니까? 저도 읽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성필은 기겁하며 한글 파일을 닫았다.

“저기, 안 읽어보시는 편이 좋을 거 같은데요.”

“……박 이사님. 이런 말씀이 실례란 건 알지만. 혹여 제가 프로듀싱에 관여하는 게 편치 않으십니까?”

“그건 아닌데요…….”

“물론 제가 다른 분들에 비해서 아이돌에 대한 전망이나 지식이 부족하지만, 저도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전 회의 때도 그렇고, 조금, 섭섭합니다.”

“…….”

성필은 말없이 의자에서 비켜났다.

한구인은 그가 비켜난 자리에 앉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며, 한구인이 모니터에 뜬 멤버들의 아이디어를 읽어갔다.

“……!”

한구인이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20초 정도 읽었을까.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저, 저는, 잠시, 쉬어야겠습니다.”

한구인이 간신히 벽을 짚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심연을 보아버렸으니, 회복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 * *

성필은 퇴근 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리카가 테라스에 앉아 달을 보고 있었다.

거의 매일 저녁 시간마다 이런다.

“앗! 이사님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가시나요! 저희들이 연습하는 거 봐주세요!”

“나도 퇴근하고 좀 쉬어야지.”

“저희의 고통과 눈물을 공유해주세요!”

“또 옛날처럼 내가 쓰러졌으면 좋겠어?”

멤버들의 데뷔곡 녹음일, 성필이 과로와 몸살로 쓰러졌을 때의 일이었다.

“아니요 아니요! 어서 가서 쉬세요!”

성필은 옅게 웃었다.

“리카, 항상 열심히 해줘서 고마워.”

“당연한 일이에요! 이사님도 항상 저희를 위해주셔서 감사해요! 아, 집에 붙여 놓은 브로마이드는 아직도 멀쩡한가요?”

“응.”

“침대 위 천장에 있는 제 브로마이드도요?”

“응.”

“떼어내거나 다른 위치로 옮기시면 안 돼요!”

“안 그럴게.”

성필은 집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그에게선 들뜬 기분이 그대로 풍겨 나왔다.

집에 도착하여 씻은 뒤 경건히 바닥에 앉았다. 그의 앞에는 진저에게서 받은, 선물이 가득 든 종이백이 있었다.

‘여유로울 때 열어보려고 아직도 안 뜯었지.’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

팬인 그룹에게서 받은 선물을 천천히, 아주 소중히 하나씩 확인할 것이다.

성필은 보물처럼 굿즈를 차곡차곡 꺼냈다.

멤버들이 직접 쓴 사인을 몇 분이나 눈으로 확인하고, 굿즈를 만져보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이다.”

하이라이트, 멤버들이 직접 쓴 편지다.

에리카의 편지는 저번에 조아라가 큰 소리로 읽어주었으니.

‘진저 거부터 읽자.’

이 선물을 직접 가져다준 사람이니까.

[진저입니다. 밤에 레슨룸으로 오셔서 나누었던 대화는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박성필 이사님 덕분입니다. 말 따위로 뭐가 얼만큼 바뀌었느냐, 그리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해가 안 되신다면, 제 감사함만 받아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박성필 이사님. 제 은인이십니다.]

‘레슨룸에서…….’

팬은 아이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팬들은 진저의 행복을 바란다.

그런 이야기였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나중에 케이어스가 더 성공해서 핸드폰을 받게 된다면, 꼭 가장 먼저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만수무강하시길. 이사님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성필은 은은한 미소를 흘렸다.

다음은 김민주의 편지다.

[케이어스의 비타민! 과즙미 뿜뿜 민주입니다! 박성필 이사님 저희 진저 봐주셔서 너무 너무 넘나 넘 감사드려요 ㅠㅜ. 다음에는 에리카 사인 말고 제 사인도 꼭 받으셔야 해요! 그 이야기 듣고 쪼오끔, 아주 쪼오끔 섭섭했어요! 제가 최애가 될 수 있도록 더 밝고! 예쁘고! 귀여운!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닷!]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김민주의 편지였다.

‘대체 나는 얼마나 행복한 놈인 거지?’

마지막으로 소유의 것이다.

[제가 최애가 아니시라니 의외네요. 팬미팅이나 팬싸가 있을진 모르겠는데요. 그때는 저를 최애로 두셨길 바랄게요.]

“응?”

성필은 편지를 앞뒤로 돌렸다.

아무것도 안 적혀 있다.

정말 저게 끝이다.

혹시 불을 가져다 대야 글자가 나타나는 트릭 같은 거라도 있나?

라이터를 켜서 확인했는데, 정말 저게 끝이다.

“……멋져.”

성필은 감동하였다.

편지를 몇 번이나 돌려서 읽고 난 뒤, 성필은 선물들을 소중히 포장해두었다.

힘이 안 나면 다시 꺼내서 읽어야겠다.

성필은 만족하곤 침대에 누웠다. 자기 위해 눈을 감으니, 진저의 편지가 아른거렸다.

‘핸드폰도 마음대로 못 쓰는 건가.’

성공해서 핸드폰을 받으면 가장 먼저 연락하겠다. 그것을 보고, 성필은 진저가 기특하단 생각보다 불쌍하단 마음이 먼저 들었다.

리스크 관리라는 이름하에, 현대인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핸드폰마저 마음대로 못 쓰다니.

이해는 간다. 그래도…….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인데?’

스팸인가 싶었어도, 일단 받았다.

“여보세요?”

[팀장님? 팀장님 번호 맞나요?]

익숙한 목소리.

당장 얼마 전에 팬사인회 때 만났던.

“소민아?”

석세스 엔터, 글로브의 양소민이다.

[아, 맞구나. 안녕하세요.]

“어, 응. 안녕. 이 번호는 뭐야?”

[PC방 번호요.]

“응?”

[PC방에서 걸고 있어요.]

석세스 엔터도 연습생의 핸드폰을 관리한다. 데뷔한 후에는 돌려주지만.

‘잠깐…….’

설마, 얘네들 데뷔하고도 핸드폰 못 받았나?

“왜 전화했어?”

[아…… 얘기하려구요. 팀장님이랑.]

오랫동안 소민을 보아왔던 성필은 알 수 있었다.

‘얘 기분 엄청 안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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