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엘릭은 화를 삭이는 듯 코로 숨을 크게 뿜어낸 뒤,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저도 ‘팅글’이 현재 소녀연맹의 컨셉에 역행한다는 사실은 알아요. 그런데, 곡이 안 좋은 건 아니잖아요? 데뷔곡 회의 때도 경영진 쪽에선 치열하게 갈렸다고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그로써 가로 엔터가 ‘팅글’에 호의적이란 건 증명되었다.
홍규헌도 ‘이렇게 좋은 곡을 우리한테 판다고?’라며 반색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데뷔 전의 이야기입니다.”
“박 이사님. 이 업계에 오래 있으셨으니 아실 거라고 믿어요. 소녀연맹이 가진 약점이요.”
알다마다.
소녀연맹의 데뷔는 예상 이상의 성공을 가져다주었으나, 그 이상의 성공을 바라보긴 힘들다.
손혜빈이 미니 앨범의 주제를 사랑으로 잡은 것도, 그 약점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걸그룹은 대중성이 필요해요. 그리고 소녀연맹의 이번 컨셉에 대중성이 없단 건 결과로 증명됐습니다.”
앨범 판매량에 비해 확연히 떨어지는 음원 성적. 그게 증거였다.
사실 음원 성적으로 판단하면, 소녀연맹의 앨범 판매량은 비정상적이다.
“특정 소비층 공략에 성공한 거겠죠. 훌륭해요.”
마니아의 심장을 노렸단 건, 역으로 대중을 비켜나갔단 뜻이었다.
“만약 소녀연맹이 다음 앨범도, 다다음 앨범도 같은 컨셉으로 간다면 롱런하지 못 할 겁니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과거, 엘릭은 가로 엔터에 투자를 제안했었다.
데뷔 앨범 프로듀싱이 조건이었다.
골방에서 작곡만 한 사람이 프로듀서로서 자질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번 대화로, 그는 시장을 읽는 눈을 보여주고 있었다.
“걸그룹 팬덤은 결집력이 약하고 충성도도 빨리 떨어져요. 그게 걸그룹이 대중적인 컨셉에 목을 매는 이유잖아요. 소수 대형 기획사를 제외하고, 항상 비슷하게 사랑만 노래하고 비슷하게 걸크러쉬만 가는 건 이유가 있어요.”
걸그룹은 많은 사람의 눈에 띄어야 한다.
아이돌 시장의 소비자 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렇기에 걸그룹은 보이그룹과 같은 태생적인 이점이 없다.
“걸그룹이 살아남기 위해선, 소수를 노리는 게 아니라 다수를 노려야 합니다. 지금의 컨셉으로 팬덤을 늘려도 얼마나 늘릴 거고, 충성도를 유지해도 얼마나 유지할까요.”
그러니까, 엘릭은 ‘팅글’을 제시한다.
소녀연맹의 성공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예술가적 욕구를 위해서.
그는 반드시 팅글을 소녀연맹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팅글. 가사의 주제는 사랑과 시작, 도전. 듣기에도 편하고 사람들 귀에도 꽂혀요. 한 치 앞 읽기 어려운 게 이 바닥이라지만, 저는 성공을 자신해요.”
“수록곡이라면 가능합니다.”
필사적인 설득의 뒤, 성필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수록곡’이었다.
엘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수많은 기획사가 못 받아서 안달인 자신의 곡을, 뭐?
“수록곡이라고요?”
자신이 피와 땀을 갈아 넣고, 이 정도면 타이틀로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한 ‘팅글’을.
“수록곡이면 가능하다, 라고요?”
모든 창조자는 창조물에 애착을 가진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가 그 창조물을 보고 말한다.
‘백화점 말고 시장에 내놓으면 괜찮겠네.’
화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엘릭은 화낼 입장이 아니었다.
곡을 파는 사람인 동시에, 곡을 사달라고 구걸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안 된다면, 죄송합니다. 여전히 가로 엔터의 답은 같습니다. 작곡가님의 곡은 좋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저도 처음 듣곤 홀렸습니다. 이건 제 진심이고, 가로 엔터의 진심입니다. 하지만, 소녀연맹의 타이틀로는 쓸 수 없습니다.”
“…….”
엘릭은 주머니에 넣어둔 USB를 부서질 듯이 꽉 쥐었다.
소녀연맹에게 곡을 주고 싶다. 그녀들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싶다.
그런데, 안 된다.
“더 어울리는 다른 그룹이 있을 겁니다.”
성필은 한 명의 예술가에게, 존경과 죄송스러움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엘릭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다과, 드세요.”
그리 말하곤, 엘릭은 작업실 안쪽 방으로 사라졌다.
성필은 그의 말에 따라 과자를 하나 집어 먹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방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나간 작업실.
엘릭은 좁고 어두운 방에 박혀 몸을 감쌌다. 그렇게 오랫동안 있다가, 다시 메인 홀로 나왔다.
이미 성필은 가고 없었다.
“…….”
소녀연맹에게 ‘팅글’을 주지 못했다.
그럼 ‘팅글’은 어떻게 하지?
가만히 창고에 박아둘까.
하지만, 그건 너무나 큰 낭비다.
‘팔아야지. 다른 곳에.’
그럼 어디에 보내볼까. 오랜만에 퍼블리셔에 연락해서 곡 영업이나 해달라고 할까.
그때 엘릭의 머리에 한 이름이 지나갔다.
‘걸그룹, 글로브.’
글로브가 있는 회사는.
‘석세스 엔터.’
성필이 있던 곳이다.
소녀연맹을 만든 성필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완벽한 비유는 아니더라도, 글로브는 소녀연맹의 자매 그룹이 아닐까?
어쩌면 소녀연맹에게서 보았던 빛을, 글로브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엘릭은 핸드폰을 들었다.
“…….”
고민이 이어졌다.
그래, 어차피 소녀연맹에게 줄 수 없는 곡이라면…….
* * *
백설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튜브에 커버곡 영상을 업로드한다.
옛날에는 연습실에서 찍었으나, 요즘에는 정지음의 작업실에서 했다.
그의 작업실에서는 고가의 마이크는 물론이요, 각종 음향 장비가 가득했으니까.
“사장님. 여기 처음 만들 때 얼마 들었어요? 방음도 완벽하네요. 그냥 돈을 방에 바르셨는데요?”
“윽, 머리가…….”
홍규헌은 작업실로 올 때마다 안 좋은 생각이 나는지, 자주 발걸음 하진 않았다.
아무튼 정지음에겐 잘된 일이었다.
정지음은 작업실을 사랑했다.
너무 사랑해서 들어올 때마다 스피커나 마스터 키보드에 뺨을 비비기도 한다.
“설하야 오늘도 파이팅. 열심히 커버곡 불러보자.”
“오빠 뺨이 왜 빨개요?”
“응?”
“뭐에 찍히신 거 같은데.”
“어, 아니야. 내가 피부가 원래 좀 민감해.”
오늘 영상 컨셉은 평소와 달리 특이했다.
백설하가 직접 통기타를 치는 것이다.
팬미팅 때도 보여줬던 대로, 백설하는 기타를 꽤 잘 친다.
‘옛날 그룹에 있었을 때 연습했어요.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어서요.’
옛날 그룹에선 쓸 일이 없었다만, 가로 엔터로 오고 나선 꽤 도움이 됐다.
백설하는 순조롭게 녹음을 하고 영상을 찍었다. 미니 앨범 준비 기간이니, 홍규헌이 커버곡은 쉬어도 된다 했으나 백설하가 거절했다.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백설하의 커버곡을 기다리는 팬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오케이, 이대로 하자. 내가 음향 좀 만져서 업로드할게.”
“작업도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아냐. 이러려고 받는 월급인데 뭘.”
참고로, 아니다.
정지음은 음악 프로듀서로 영입됐다.
기타를 가방 안에 넣는 백설하를 보며, 정지음은 어렵사리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거 쳐줄 수 있어?”
어느 영국 락밴드의 곡이었다.
백설하는 악보를 보더니 가방에서 집게형 카포(기타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장비)를 꺼냈다. 그리고 기타 지판에 집었다.
“노래도 불러드릴까요?”
“이거 알아?”
“네. 박 이사님 음악사 시간 때 들었어요.”
정지음은 가끔 멤버들의 입에서 ‘음악사 시간’이란 말을 듣곤 한다.
대체 무엇을 얼마나 자세하고 정확하게 배웠는지, 가끔 그녀들의 음악 지식을 듣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시작할게요, 흐흠.”
목청을 가다듬은 백설하가 연주를 시작했다.
정지음은 4분 40초 동안 혼이 강탈당했다.
최고의 악기는 목소리라던가.
악기를 다루는 작곡가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정지음은 그 말에 십분 동의했다.
“와, 설하 대단해. 진짜 잘 친다. 천상의 목소리야. 천상의 선율이야. 팬들이 커뮤니티에 쓴 말들 다 사실이네.”
“에, 헤헤, 아, 아니요오. 천상의 목소리는…….”
정지음이 리카에게서 배운 ‘백설하 기 살려주기’를 사용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어느 정도로 굉장했냐면, 백설하가 시키지도 않은 애드리브까지 했다.
백설하가 현란한 손길로 아르페지오 곡을 연주했다. 정지음이 옆에서 박수를 쳐주었다.
“설하 잘한다!”
칭찬할 때마다, 백설하는 간식을 받아먹은 강아지처럼 신나서 기교를 올렸다.
“하아, 하아, 어땠어요?”
“방금 그거 길거리에서 했으면 즉석해서 팬 100명 추가야.”
백설하는 더욱더 신나서 또 기타를 치려 했다. 정지음이 요구 사항을 넣었다.
“약간 악녀 같은 이미지로 칠 수 있어?”
“악녀(惡女)요?”
“응. 막 치명적으로. 그런 느낌으로.”
백설하는 기괴한 요구에도 피식 웃으며, 자기가 생각하는 악녀의 이미지에 맞춰 기타를 쳤다.
“흐으음― 흐으음―.”
그녀는 허밍까지 해주며 악녀의 이미지를 연출했다.
감각적인 기타 아르페지오가 묵직하게 작업실을 울렸다.
“어떠세요? 이 정도면 악녀 같…….”
“계속해! 멈추지 말고 계속해!”
“네, 네?”
“허밍도! 절대 멈추지 마! 그거 계속해!”
정지음은 홀린 것처럼 노트북을 열고 작곡 프로그램을 켰다.
그는 마치 지상으로 강림한 뮤즈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초조하게 백설하와 노트북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쌤, 레슨 시간인데 왜 안 오…….”
“조아라 이리 들어와!”
“네?”
“빨리! 급하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네, 네.”
조아라는 뻘쭘하게 백설하의 곁에 섰다.
표정으로 물으니, 백설하도 표정으로 ‘몰라’라고 답했다.
“핑거 스냅 해.”
“네?”
“핑거 스냅!”
딱.
정지음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거 박자 맞춰서 해.”
“아, 네.”
조아라가 일정 박자를 따라 핑거 스냅을 이었다.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박자가 되고, 기타가 멜로디를 연주했다.
5분 뒤.
“야 조아라. 작업실 간다면서 왜 안 오…….”
“신아름 들어와!”
신아름도 조아라의 옆에 강제로 섰다.
신아름이 표정으로 묻자, 조아라는 자신의 붉게 부은 손가락을 보여주며 울상을 지었다.
“박수 쳐!”
“네?”
“박수 박수! 이렇게!”
신아름은 정지음의 요구대로 일정한 박자를 따라 박수를 쳤다.
────────♬
짝. 짝. 짝.
딱. 딱. 딱. 딱. 딱.
흐으음― 흐으음―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을 눈치챈 건 신아름이 추가됐을 때였다.
세 사람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설하 언니 여기 계세…….”
“장하양 컴온!”
장하양이 합류했다. 그녀는 무슨 일이냔 뜻으로 다른 멤버들을 바라보았으나, 멤버들은 힘들어서 답을 못했다.
백설하는 손가락 끝 피부가 아플 정도로 기타만 쳤다.
조아라는 손가락을 너무 장시간 튕긴 나머지 손가락뼈가 어긋날 것 같았다.
신아름은 박수를 너무 많이 쳐서 혈액순환이 과하게 잘 될 듯했다.
반복된 동작임에도 매우 힘들었다.
“발 굴러!”
“네?”
“발 구르라고! 이렇게!”
장하양의 발구르기마저 더해졌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이건 음악이다.
그런데, 장하양의 난이도만 너무 높았다.
“이, 이, 이렇게요?”
“더! 타탁, 타타타, 타타탁!”
마치 발구름으로 드럼을 재현하려는 것 같았다.
장하양은 가벼운 마음으로 작업실에 온 것이었는데,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며 탭댄스를 추고 있었다.
멤버들은 생각했다.
‘그래도 하양이(하양 언니)보다는 내가 낫구나.’
얼마 후, 마지막 타자가 들어왔다.
“저만 왕따시키고 다들 뭐 하시는 거예요! 지음 오빠가 과자라도 줬나요!”
“리카 빨리 와!”
“아타시(저)도 과자 주시는 건가요?”
리카도 추가됐다.
“트라이앵글 두드려.”
“트라이앵글이 어디…….”
“없으면 금속성의 아무거나 두드려!”
“히에엑!”
* * *
성필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멤버들이 연습을 잘하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 연습실로 왔는데.
‘아무도 없다고?’
어째서…….
이렇게 회사의 믿음을 배신하는 거야?
열심히 한다고 약속했잖아!
성필은 회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종착지인 지하, 정지음의 작업실에 이르렀다.
“…….”
성필은 연습실이 비어있는 것보다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합주를 하는 불쌍한 다섯 명의 소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정지음이 지휘자처럼 굴었다.
“습따라라라, 쓰따리라르라, 라라리라라…….”
“방금 그 보컬에서 마지막 거 자수 2개 지워.”
“스, 습따라라, 쓰다리라르라, 라리라…….”
백설하는 기타를 치느라 손가락 끝이 붉게 변했고, 그것도 모자라 정지음에게 멜로디 짜내는 기계처럼 대해졌다.
“오빠 나 손가락뼈 나간 거 같아요…….”
“왼손으로 해!”
조아라는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빌런처럼 계속 손가락을 튕겼다.
“오빠 작곡 프로그램 폼으로 있어요?! 왜 굳이 저희한테 시켜요!”
“리얼 사운드로 들어야 느낌 온단 말야! 너희는 지금 창조의 한가운데에 있어! 7일 낮과 밤이 태어나기 직전의 궁창, 태초의 카오스에 있다고! 이 위대한 과업에 참여해!”
신아름이 반항을 시도했으나, 예술가적 열정에 밀려서 본전도 못 찾았다.
“하아, 하아.”
가장 불쌍한 건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언제 탭댄스라도 배웠는지, 빠른 속도로 계속 발을 굴렀다.
“하아, 하악…….”
장하양은 거친 신음을 내뱉으며 성필에게 눈빛을 보냈다.
‘살려주세요 박 이사님!’
성필은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리카를 보았다.
“손바닥 피부가 찢겨나가겠어요!”
리카는 쇠젓가락으로 금속성의 마스터 키보드 다리를 뚱땅뚱땅 두드리고 있었다.
금속에서 전해지는 진동 때문에 손이 많이 가려운 모양이다.
‘이게 뭐지?’
브레멘 음악대인가?
굉장히 이상한 광경이다.
그런데.
‘좋다.’
이 미니멀한 음악이, 성필의 귀를 천당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 * *
정지음의 곡은 완성된 즉시 회의 주제로 올려졌다.
먼저 곡을 들려준 뒤, 성필이 설명을 맡았다.
“들리십니까? 이 리드미컬한 사운드가? 밴드 사운드를 이용했는데도 현대적인 팝의 느낌을 주고 있어요.”
백설하가 쳤던 기타는 베이스 기타로 변했다.
장하양의 발구르기는 드럼으로 변했다.
리카의 마스터 키보드 때리기는 진짜 금속 타악기 소리로 변했다.
조아라의 손가락 튕기기는 진짜 녹음한 그녀의 손가락 소리다.
신아름의 박수도 진짜 박수 소리고.
외에도 트럼펫이나 일렉 기타가 추가되었으나, 그것뿐이었다.
그 예전, 밴드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었다.
“무엇보다 압권인 건 설하가 부른 보컬 멜로디예요.”
단순한 허밍이다.
흐으음, 흐으으음, 그런 소리만 반복되어 보컬을 채우는 것.
그런데 이게 걸작이다.
“느껴지십니까, 인간의 욕망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끈적함이? 상대를 향해 울부짖는 듯한 야성미가? 화장 냄새와 결합한 향수 냄새, 거기에 술 냄새를 휘감은 듯한 퇴폐미가? 뇌를 휘젓는 강렬함. 마치 설하의 목소리가 제 뇌 주름을 하나하나 펴는 것 같…….”
“박 이사. 그거 정지음한테 들은 설명이야?”
“아니요. 제 느낌인데요.”
“그렇구나.”
홍규헌이 백설하를 보았다.
“우리 보컬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녹음할 때 저런 생각이었어?”
백설하는 푹 숙인 고개를 좀처럼 듣지 못했다.
“대답 좀 해줘. 인간의 욕망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끈적함.”
“아, 아니…….”
“상대를 향해 울부짖는 듯한 야성미.”
“그게 아니라…….”
“화장 냄새, 향수 냄새, 술 냄새를 휘감은 것 같은 퇴폐미.”
“그만…….”
“이 멜로디 네가 만들었다면서. 어필 좀 해줘.”
“…….”
홍규헌은 침묵한 백설하를 보곤 픽 웃었다.
“자, 다들 의견 듣고 싶은데.”
“대단하다 백설하! 이미 세상의 쓴맛 매운맛 다 봤구나!”
“설하 씨, 가사가 없는 단순한 허밍인데도 감정이 온전히 전달됩니다. 대단합니다.”
“와, 설하 진짜 솔로 앨범 내보는 거 어때? 잘 먹힐 거 같은데.”
손혜빈, 한구인, 민경섭의 이어진 칭찬에 백설하의 인내심은 한계치에 달했다.
“저, 저어 계속 놀리실 거면 갈래요……!”
“아냐 아냐. 진짜 대단해서 말한 거야. 가사도 없이 이 정도 느낌이라니. 이것만 발매해도 팔릴 거 같아.”
“정말요……?”
“응. 박 이사, 아직 설명할 거 남았어?”
“네. 이 곡의 주제인데요. 일단 멤버들한테 일차적으로 수합했거든요.”
성필은 수첩을 펼쳤다.
“이건 사랑 노래예요. 답을 주지 않는 상대를 유혹하거나, 뭐, 그렇다네요. 저희가 다음 앨범 타이틀 주제를 사랑으로 잡았는데, 그게 완전히 이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잖아요?”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나,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에 대한 사랑을 다룰 예정이다.
그게 숨겨진 속뜻이고, 겉으로 듣기엔 단순한 사랑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게 그 느낌이 딱 들어맞거든요.”
“잠깐만 박 이사. 이거 백설하 개인곡 아니었어? 애들 얘기를 들었다고?”
“네, 저는 타이틀로 생각했었는데요.”
“…….”
이걸 애들이 표현한다고?
백설하 혼자라면 몰라도 소녀연맹이…….
‘인간의 욕망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끈적함. 상대를 향해 울부짖는 듯한 야성미. 화장 냄새, 향수 냄새, 술 냄새를 휘감은 것 같은 퇴폐미를 표현할 거라고?’
문득, 홍규헌은 순수하게 미소 짓는 리카가 떠올랐다.
우리 리카.
세상의 때를 타지 않은 듯 해맑은 아기…….
‘헤헤, 사장님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은 정장이 더 잘 어울리세요!’
‘사장님 목덜미 만져봐도 돼요?’
‘사장님 여기 보세요! 아타시(저) 복근 생겼어요! 에에, 복근 맞다구요!’
‘제가 아껴 먹으려고 했던 건데 드릴게요!’
‘목덜미 좀 만지게 해주세요! 닳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장님, 제가 혀로 팔꿈치 핥는 거 보여드릴까요? 에, 모처럼 장기를 보여드린 건데 더럽다뇨!’
‘헤헤, 사장님……. 숙소에 유선 채널 연결해주시면 안 될까요? 보고 싶은 방송이 있어서…….’
‘아타시(저)는 이제 성인이라구요!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도 알아요! 이미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요!’
“…….”
음, 뭐.
가능할지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