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익스 이블.
미국의 4인조 걸그룹이다.
영미, 유럽권에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으며, 투어를 도는 족족 매진시키는 대단한 그룹이다.
음악성이 좋은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도 댄서와 가수들의 커버가 줄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런 대단한 그룹을 본 멤버들의 반응은.
“이건 저항해야 해요! 이사님은 점점 노출의 정도를 높여서 결국에는 수영복 같은 걸 입힐 거라구요! 속옷을 입힐지도 몰라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익스 이블의 복장이 문제였다.
그녀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노출도가 많았다. 당장 스크린 화면에 비친 한 멤버의 복장도, 속옷 위에 비닐을 감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이사님이 말씀하신 최고의 아이돌인가요!”
리카가 청문회의 기자처럼 성필의 입가에 무언가를 가져다 댔다.
리모컨이었다.
“……소다(그렇다).”
성필이 일본어로 답하자 리카가 움찔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기쁨으로 씰룩거렸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질문을 이어갔다.
“충격! 그, 그러면 저 그룹처럼 되는 게 소녀연맹의 목표인가요!”
“아니.”
리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우리는 익스 이블을 뛰어넘는다.”
“저걸 뛰어넘으려면 옷을 벗어야 한다구요?!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니게 된단 말이에요! 음지의 아이돌이 되어버려요!”
“오빠는 알고 계셨어요?”
신아름은 거리를 벌리고 있던 민경섭에게 물었다. 그는 시선을 살짝 피하더니 허허 웃었다.
“뭐어, 그렇…….”
“오빠도 한패였어!”
석세스 엔터에서 박성필 2호기로 불렸던 민경섭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한 이사님은요?”
“예?”
건강즙을 나르고 있던 한구인이 신아름에게 잡혀 와 텔레비전 앞에 강제로 앉혀졌다.
신아름이 최면 걸듯 물었다.
“이거 괜찮아 보이세요?”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멤버들의 말문이 막혔다.
가로 엔터의 상식인이자 지식인.
지혜의 상아탑을 거닐었던, 고도로 전문화된 경영인을 육성하기 위한 미국 대학의 경영학 석사 과정을 수료한, 휴일에도 책만 읽는 한구인이 긍정해버렸다.
“아, 근데 한의사님 미국에서 살다가 오지 않았던…….”
“다, 다시 보세요. 저 옷, 팀장님이 저런 옷을 저희한테 입히려고 해요.”
“…….”
한구인은 화면을 꼼꼼히 보다가, 소심하게 말했다.
“박 이사님이 그러신다면 뭔가 혜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아름아 그만해.”
멤버들이 충격받은 건 알겠다면, 장난을 이어가는 게 너무 심하다.
“저 옷을 입기로 결정한 아티스트를 무시하는 말이잖아. 저 옷을 준비한 스타일리스트분들이랑 디자인한 디자이너분들도. 그렇게 깎아내리지 마. 저 무대를 연출한 모든 사람들에게 실례야.”
만약 신아름이 익스 이블과 같은 옷을 입는다면, 그녀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릴지도 몰랐다.
그 장면을 떠올렸던 신아름은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었다.
그런데 성필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하나같이 합리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맞다. 이렇게 과민반응하면 익스 이블, 아티스트에 대한 실례겠지.
“죄송합…….”
“잠깐.”
조아라가 신아름의 사과를 막았다.
“이거 가스라이팅일 수도 있어. 우리가 과민반응하는 게 옳고.”
“아앗! 맞아! 나도 티비에서 봤던 거 같아!”
리카는 심야에 보았던 고민 상담 프로그램의 전문가(무슨 전문가인지는 여전히 모름)를 떠올리곤 조아라에게 동조했다.
“아저씨, 나중에라도 저런 옷 저희한테 입힐 거예요?”
“그래.”
“지, 진짜요?”
“아라야.”
그때 장하양이 조아라의 어깨를 잡으며 제지했다.
“충격적인 건 이해하지만, 박 이사님도 생각이 있으실 거야. 그리고 그다지 나쁜 옷도 아니…….”
“너희가 입고 싶다고 사정사정하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한국에서 저런 옷 입으면 방송도 못 나가고, 뮤비도 19세 판정받을걸. 내가 자진해서 저런 옷을 추천하진 않지.”
장하양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직 너희가 받아들이기에 이르긴 하지? 아, 아니, 그렇다고 나중에 받아들이란 뜻은 아니고.”
드디어, 성필이 영상을 재생했다.
스피커를 펑펑 울리는 팬들의 함성과 함께 콘서트장의 전경이 잡혔다.
백설하가 놀라서 물었다.
“몇 명이나 있는 거예요……?”
“5만 5천 명.”
사람이 개미처럼 보인다.
T자형 무대, 익스 이블의 멤버들이 어둠 속에서 등장한다. 그들의 뒤와 옆에는 수십 명의 댄서들이 함께다.
첫 멤버가 마이크를 잡았다.
MR만이 울린 채, 그녀가 노래했다.
“와…….”
성량이 엄청나다.
고음이 말도 안 되게 올라간다. 음색이 좋은 건 두말할 나위 없다. 오랜 시간의 노력으로 단련된 보컬이다.
메인 보컬인가? 그리 생각했는데, 다음 파트의 멤버도 전혀 뒤지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럼 저 사람이 메인 보컬인가?
아니었다. 다음 멤버가 진정한 메인 보컬로, 3옥타브 초반을 가볍게 돌파했다.
“…….”
의상을 보며 호들갑 떨던 아이들은 온데간데없고, 무대에 집중하는 아이돌만이 있었다.
조아라는 춤에 집중했다.
춤의 난이도는 어렵지 않았다.
아니,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익스 이블의 춤에는 힘이 넘쳤다.
간단한 춤임에도, 에너지가 공연장을 사로잡듯 관객의 시선을 모조리 빼앗는다.
무엇보다, 익스 이블은 물론이고 댄서들마저 진심으로 신나 하는 게 보인다.
“아.”
장하양이 무심코 탄성을 내질렀다.
곡이 중반에 접어들었음에도 파트를 배분받지 못했던 멤버가 마이크를 들더니 랩을 시작했다.
귀에 때려 박힌다.
그리고 그녀는 T자형 무대의 돌출부로 걸어 나온다. 다른 멤버들과 함께.
뒤로는 수십 명의 댄서가 따라온다.
단순히 걸어가는 동작이지만, 그 자체가 안무라도 되는 듯 정신을 빼앗는다.
마지막, 멤버들이 함께 노래 부르며 춤춘다.
그리고 메인 보컬만이 춤을 멈추고 자신의 모든 기량을 토해낸다.
댐핑, 가수로서의 힘.
단순히 고난도의 고음이 아닌, 사람의 심장을 울리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솟아오른 무대의 천장을 때린다.
비록 화면 안의 노래이지만, 그것을 들은 백설하의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5만이 넘는 관객들이 하늘까지 닿을 찬사를 익스 이블에게 바쳤다.
“어때.”
성필이 영상을 껐다.
“이게 현재 걸그룹의 정점이야.”
최고의 걸그룹은 아이돌 시장이 가장 활성화된 한국이나 일본에 있지 않다.
미국에 있다.
전 세계 대중문화의 정점에 오른 국가에.
“멋져요! 저 이 언니들처럼 될래요!”
리카가 아까와 전혀 다른 발언을 했다.
“그런데 이거, 노래는 무슨 뜻인가요?”
한구인에게 영어를 배운 멤버들도 가사를 완벽히 해석하진 못했다.
그건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익스 이블의 발음이 빠르고 본인의 개성이 강해, 여태껏 꽤 많이 들었는데도 해석이 힘들었다.
“음, 그러게. 나도 듣기만 들었지 가사까진 본 적 없…….”
“박 이사님. 죄송하지만 잠깐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일이 있었는데 영상 보느라 마치지 못했습니다.”
“아, 갈게요. 너희들도 이제 연습하러 가봐도 돼. 시간 뺏어서 미안.”
성필은 한구인을 따라 사무실로 갔다.
“무슨 일인데요?”
“박 이사님. 저기, 그 가사는 멤버 분들이 알기에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계속 아까 대화의 흐름대로 갔다면, 멤버 분들이 가사까지 찾아보셨을 것 같아서……. 그래서 일부러 박 이사님을 부른 겁니다.”
대체 가사가 어떻기에?
성필은 핸드폰을 꺼내 익스 이블의 곡을 검색했다. 유명한 만큼 가사 해석본이 바로 나왔다.
그것을 찬찬히 읽던 성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거 이런 뜻이었구나…….”
“예. 이제 멤버분들도 모두 성인이시지만, 굳이 이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괜한 참견이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멤버들의 앞에서 가사를 찾아봤다면, 성필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 뻔했다.
* * *
“우봉고!”
“아 씨, 어떻게 맞추지.”
“20, 19, 18…….”
“천천히 세!”
조아라와 리카가 거실에서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신아름은 거실 소파에 누워 하릴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3, 2, 1! 아싸, 아타시(내)가 이겼어!”
“다시 해.”
“헤헤, 아라쨩 벌써 2연패인데? 오늘은 지기만 하는 거 아니야?”
“다음엔 내가 이겨.”
“리카. 오늘 팀장님이 보여주셨던 그룹말야. 이름이 뭐랬지?”
“익스 이블이랬어.”
신아름은 아이튜브에 이블 익스를 검색해 영상을 보았다.
다시 봐도 멋지다.
화면을 뚫고 나오는 에너지와 자신감! 마치 자신이 아니면 이곳에 설 자가 없다는 태도였다.
‘와. 같은 여자를 보고도 이런 느낌이 오는구나.’
지금까지 신아름은 동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좀 알 듯했다.
노래의 제목은 ‘엔진’이었다.
‘자막이 없네.’
검색창에 가사를 찾아보았다.
“야, 신아름.”
“야, 조아라. 너 사람 이름 부를 때 앞에 ‘야’ 붙이지 마. 야, 야, 야, 이거 기분 좋아?”
“그래 담부터 안 할게. 혹시 할 거 없으면 아까 들었던 노래 가사 좀 찾아서 말해줘.”
“내가 네 하인이야?”
조아라는 신아름이 누운 소파로 다이빙했다.
“아 좁다고!”
“말해주기 싫다며? 그럼 같이 보자.”
“짜증 나…….”
조아라는 신아름의 뒤에 딱 붙어 누웠다.
“아타시(나)도 볼래!”
리카는 신아름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찾았다.”
[거기 너, 내게 예의를 보여
내 안으로 들어오려면 그래야 해
이번만은 봐줄게
하지만 아니야, 네가 크기 때문만은]
“이 사람 번역 진짜 못했다.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소오(그래)? 난 또 내가 한국어 실력이 떨어진 줄 알았어.”
[넌 나 같은 엔진은 본 적이 없을걸?
가솔린이 뚝뚝 떨어져 네 아래에 불을 지르지
이번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아니야, 네가 크기 때문만은]
“…….”
그쯤에서 신아름은 위화감을 눈치챘다.
이 가사, 이상하게 번역된 게 아니다.
직역이다.
“신아름 뭐해. 아래로 내려.”
“그냥 다른 데서 보면 안 돼? 아타시(내)가 이해하기엔 어려워…….”
“아이튜브에 자막 달린 영상 없어? 유명하면 있을 거 아냐.”
신아름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가사의 밑을 보았다.
[네가 나보다 몇 cm 위에 있다 해서
나를 지배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야
목줄은 내 손에 있어
네가 분수를 만든다면 나는 비를 내리게 해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 못 봐주겠네. 번역을 뭐 이렇게 개떡 같이 해뒀어.”
신아름은 인터넷 창을 껐다.
“에, 보고 있었는데 왜 그래. 다음 가사도 궁금해.”
“리카, 나랑 같이 우봉고나 마저 하자.”
조아라도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신아름에게 달라붙으려던 리카를 보드게임 앞에 앉혔다.
신아름은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손등으로 식혔다.
‘……이 노래로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나는 잘한다? 나는 매력 있다?
자신을 치명적인 여자라며 자랑하는 가사는 한국에도 많지만, 이토록 직설적으로 표현한 가사는 처음 본다.
게다가 이 노래가 빌보드 차트 1위까지 따냈고, 몇 주 연속 1위를 했다는 게 도저히 안 믿긴다.
물론 노래야 좋긴 하지만…….
‘이게 미국이야? 대중문화의 정점이야?’
이런 가사, 한국에서 쓰는 순간 영원히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할지도 모른다.
신아름은 충격을 받았다.
익스 이블이 그토록 자신감 있게 소리치는 게, 설마 이성과 침대 위에서 벌이는 일을 표현한 거라니…….
‘그, 한 이사님이 뭐라고 했었지. 남자랑 여자 사이에 파워 게임? 그런 게 있다고 했었나? 이게 그걸 표현한 건가?’
신아름은 다시 익스 이블의 무대를 보았다.
가사를 아니까 전달력이 더 좋다.
신아름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하지만.
‘더 멋져.’
이 언니들, 끌린다.
비슷한 시각, 백설하와 장하양의 방에선.
“…….”
두 사람은 익스 이블의 뮤비에 자막이 달린 영상을 보았다.
첫 소절부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영상이 끝나고.
“당당한…… 힘 있는…… 그, 당당하고 에너지가 있네…….”
“그러게요…….”
두 사람은 얼굴은 물론 어깨와 귀까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런 말을 노래로 하는 거 쉽지 않겠죠……?”
“으, 응. 그러게. 이런 분들이 아티스트라고 불리는 거구나.”
“…….”
둘은 어색하게 하하 웃곤 각각의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도,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박 이사님은 이런 가사를 좋아하시는 건가? 당당한 여성상? 그, 근데 나는 이런 가사 못 쓸 텐데…….’
백설하는 고민에 빠졌다.
‘미국 걸그룹은 연애 금지 조항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그룹에 들어오기 전에 겪었던 이야기를 가사로 쓴 건가? 그것도 아니면 연애 금지 조항이 풀리고…….’
장하양은 궁금증이 많아졌다.
조아라와 리카는 피 튀기는 보드게임 대결을 마치고 늦게 방으로 돌아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리카는 조아라의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피곤했던 터라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아라쨩.”
아니었다.
조아라가 아까의 패배를 지우지 못한 듯, 살짝 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왜.”
“아타시(나) 몸이 뜨거워.”
“아 씨 이럴 줄 알았어! 리카 너 나한테 이상한 감정 드는 거 남자 못 만나서 그런 거야! 맨날 내 침대에 들어오고 내 몸 만지다 보니까 혼동 오나 본데 다시 생각……!”
“아니 아라쨩 때문이 아니라.”
“……아니면 아까 봤던 가사 때문에 그래?”
리카는 익스 이블의 가사 번역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이해를 못 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닌가?
“가사가 왜?”
“아냐. 그럼 왜 몸이 달았는데?”
“그 영상 때문에.”
리카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빛을 뿜어냈다.
“나도 콘서트 하고 싶어. 팬미팅도 좋았지만, 그거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싶어.”
리카의 가슴 안에 뜨거운 열망이 소용돌이쳤다. 그 열망 때문에 리카는 몸이 달아, 침대에서도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수만, 수십만,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그녀의 귓가로, 그녀의 열망보다 뜨거운 함성이 휩쓸고 지나갔다.
리카는 다른 사람이 행복한 걸 보는 게 좋다.
성필이나 한구인, 홍규헌이 미소를 보여줄 때마다, 리카는 절로 웃음이 난다.
그런데 만약, 수만 명의 관중이 자신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어.”
사랑받고 싶은 욕망.
그것은 아이돌로서, 아티스트로서 가장 필요한 재능일지도 모른다.
* * *
“요즘 들어 애들이 연습 열심히 하지 않아?”
데뷔 앨범 활동 기간 종료 후, 멤버들의 연습 시간은 자율이 됐다.
학원 스케줄만 소화하면 휴게실에 계속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제 데뷔도 했으니, 그녀들을 한 명의 아티스트로서 존중하는 차원이었다.
“조아라는 이제 점심때 낮잠도 안 자고.”
성필이 익스 이블의 공연 영상을 보여준 후, 그녀들은 성필이 말하는 ‘최고의 아이돌’이 어떤 형태인지 알게 됐다.
익스 이블의 컨셉은 잘 모르겠지만, 그녀들의 실력만큼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최소한 지금의 소녀연맹은 익스 이블에게 닿지 못한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려면, 훨씬 더 긴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리라.
“신기하네. 영상 하나로 동기 부여가 그렇게 되고. 케이어스 때도 그렇더니.”
“케이어스랑은 조금 다른 거 같아요. 케이어스가 잡아야 하는 목표라면, 익스 이블은 정말 우상처럼 보고 있으니까요.”
“하긴, 바다 저 멀리 있으신 유명한 팝스타들이니까.”
아무튼, 홍규헌은 기분이 좋았다.
멤버들을 자율 연습으로 풀어준 게 악수가 되진 않을까 은근히 걱정해왔다.
하지만 명확한 목표가 있는 한, 멤버들의 나태를 걱정하진 않아도 될 듯하다.
“자, 첫 번째 회의 주제부터 무거워서 미안하지만. 투표 들어가자.”
홍규헌이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적었다.
[팅글]
과거, ‘아니’와 함께 소녀연맹의 데뷔곡으로 경합을 벌였던 곡이다.
그 팅글의 작곡가인 엘릭이 일주일 전에 가로 엔터에 연락해왔었다.
* * *
‘내 곡이 타이틀 경쟁에서 졌다고?’
엘릭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어느 그룹이든 타이틀로 두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던 ‘팅글’이, 고작 신인 작곡가와의 경합에서 패배했다.
‘가로 엔터 인간들은 다 귀가 없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다들 ‘팅글’을 들어봤을 것이다. 직접 들려주었을 때 반응도 호의적이지 않았던가.
엘릭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곡이다.
곡의 퀄리티도, 화제성도, 무엇 하나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분하다.
분해서 잠을 못 이루겠다.
전교 1등이 전교 꼴지에게 추월당한 듯한 자괴감과 질투심이 번갈아 엘릭을 괴롭혔다.
‘……그래, 그렇다 이거지. 중소는 중소인 이유가 있는 거야.’
가로 엔터의 인원들 중 자신의 곡이 지닌 가치를 알아볼 인간이 그렇게도 없다면.
자연스레 망하는 게 순리일 것이다.
‘지켜봐 주마.’
소녀연맹 데뷔 D+1.
엘릭은 음원 공식 공개까지 집요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공개되자마자 들었다.
‘이게 뭐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곡이…….
‘이런 건 처음 들어봐.’
‘아니’ 같은 곡이 한국에서 나올 수 있나?
북유럽 애들이라도 불러왔나? 아니면 미국의 레이블과 협업이라도 했나?
이건 트렌드를 바꿀 곡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속이 쓰린 건.
‘잘 어울려.’
소녀연맹.
엘릭이 반했던 그녀들에게, ‘아니’가 너무도 어울린단 사실이.
너무도 속이 쓰라렸다.
가로 엔터는 선구안이 없거나 귀가 막인 인간들만 있던 곳이 아니었다.
“…….”
“저 새끼 또 저러네.”
작업실로 오는 동료들은 몇 달 동안 엘릭의 불안 증세를 보아야만 했다.
엘릭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소녀연맹의 뮤비를 보았다가 껐다가.
정신 사나운 행동만 반복했다.
엘릭의 마음속에서 자존심과 열정이 싸우며, 서로 뒤엎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결국 승리한 것은 열정이었다.
‘부르게 만들고 싶어.’
소녀연맹 멤버들의 입술이 열리고, ‘팅글’이 나오는 것을 봐야만 하겠다.
이 곡의 주인은 소녀연맹밖에 없다.
엘릭은 손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빈아, 나…….”
* * *
가로 엔터는 ‘팅글’을 두고 일주일의 숙고를 거쳤다.
아직 타이틀곡 선택에 난항에 있기도 하고, 엘릭이 실력 있는 작곡가란 점은 변함이 없으니까.
“민 매니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팅글’이란 곡은 옛날에 ‘아니’와 경합했었어. 투표를 거쳐 ‘아니’가 데뷔곡이 됐지. 그게 다시 돌아왔어.”
일주일, 고민의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투표가 끝나고, 홍규헌은 표를 모아 펼쳤다.
“역시.”
한 명도 ‘팅글’을 타이틀로 두는 데 찬성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알려지자 손혜빈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엘릭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럼 제가 걔한테 전달할게요.”
“아니, 내가 할게.”
성필이 말했다.
“네가?”
“어. 엘릭은 유명하신 분이고, 굳이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능력이 있으셔. 가로 엔터의 이사로서 내가 직접 거절해 드리는 게 예의야. 후일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라도 성의를 보여야지.”
성필은 홍규헌을 보았다.
그녀가 허락한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 PD는 엘릭이랑 친구 사이니까. 손 PD의 거절은 격식이 떨어질 수도 있어. 엘릭은 그만한 예의가 필요한 상대야. 손 PD도 그편이 더 낫잖아?”
그러했다.
이 소식을 엘릭에게 알렸을 때,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데뷔 때부터 알아 왔던 친구니까.
“……네.”
“박 이사, 언제 갈 거야?”
“회의 끝나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성필은 엘릭에게 연락했다.
그는 흔쾌히 성필의 방문을 허락했다.
성필이 엘릭에게 향하기 전, 손혜빈은 잠시 그를 따로 불렀다.
“성필아. 걔한테 최대한 칭찬해줘. 우리가 곡을 거절하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고. 걔 곡은 진짜 진짜 진짜 훌륭하다고. ‘팅글’을 못 쓰게 돼서 우리도 정말 정말 정말 아쉽다고. 알겠지? 걔가 자존심이 강해서…….”
그 말을 하던 손혜빈은 갑작스레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미안. 너한테 이런 거 부탁해서.”
“아니야. 나 이런 거 잘해. 걱정 마. 작곡가님이 잘 이해하시도록 설명할게.”
“……고마워.”
성필은 엘릭의 작업실로 도착했다.
처음 오는 그의 작업실은 어둡고도 넓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입니다.”
엘릭은 심심한 입을 달랠 다과와 차를 가져왔다. 성필의 맞은편에 앉는 엘릭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드러났다.
“작곡가님. 다시금 팅글을 저희에게 제안해주신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니에요. 애착이 붙어서 그런가, 팅글을 들으면 소녀연맹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곡이 주인을 찾아간 거죠.”
성필은 너무 과하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이사님?”
“죄송합니다. ‘팅글’을 다음 타이틀로 쓰는 건 힘듭니다.”
엘릭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마치 원하는 대리석을 얻지 못한 미켈란젤로처럼, 그는 예술가의 슬픔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리고 튀어나온 건.
“허, 안 된다고요?”
분노.
그에 맞서는 성필은.
“예. 안 됩니다. 소녀연맹의 컬러와 맞지 않습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