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40화 (140/760)

140화

진저가 성필에게 선물을 주러 찾아왔다.

직접.

성필은 순식간에 두 가지 플랜을 세웠다.

첫 번째.

‘진저 정말 예의 바르지 않아요? 세상에, 도움을 받았다고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다뇨. 게다가 선물도 좀 보세요. 정성이 꽉꽉 들어갔어요.’

안 될 것 같다.

당장 얼마 전에도 신아름이 진저 이야기 좀 그만하라면서 성까지 내지 않았던가.

별로 안 했었는데…….

성필은 곧장 두 번째 플랜으로 넘어갔다.

“아라야, 진저가 너 보러 왔대.”

“뭘 해줬길래 얘가 선물까지 가져와요.”

조아라는 성필을 도와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성필의 품에 안긴 종이백을 가져갔다.

어느새 근처에는 가로 엔터 인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라야, 내가 받은 건데 맘대로 꺼내면…….”

“진저. 우리도 봐도 돼?”

“괜찮슴미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봐달라는 듯 당찬 대답이 돌아왔다.

조아라는 케이어스 굿즈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사진집 두 개.”

케이어스의 앨범은 두 가지 버전으로 발매되었다. 버전마다 들어간 사진집의 종류가 다르다.

사진집마다 케이어스 멤버의 사인이 두 개씩 적혀 있었다.

“열쇠고리 네 개.”

케이어스 각 멤버의 상징 컬러와 상징 마크가 그려진 열쇠고리였다.

“이건…… 카드 뭉치?”

“저희 앨범 포토 카드 모든 종류임미다.”

이미 성필은 케이어스 포토 카드는 올클리어했기에 그다지 의미가 깊지는 않았다.

“스티커.”

케이어스 멤버들의 얼굴이 인쇄된 각종 스티커 모음이었다.

“친필 사인 앨범…… 여덟 개?”

“앨범이 두 버전이잖슴미까. 각 버전마다 멤버들이 따로 사인했슴미다.”

“…….”

앨범 패키지가 테이블 위에 탑처럼 쌓였다.

가장 위의 앨범에는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에리카의 사인이 적혀 있었다.

“지관통 두 개.”

“안에 포스터가 들어 있슴미다.”

직접 묶은 듯한 리본까지 달려 있다.

“파우치 네 개.”

각 파우치에는 멤버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잡지?”

“저희 멤버들이 메인 표지로 나온 버전임미다.”

패션 잡지였다.

깨알같이 표지 아래쪽에 또 사인이 있었다.

조아라는 마지막 물건을 꺼냈다.

“편지…….”

편지도 네 개였다.

편지 봉투에 밀봉된 형태가 아니라, 투명 비닐에 편지지만 들어 있었다.

덕분에 뜯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다.

“에리카예요. 우리 진저를 잘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성필 이사님. 히읗 히읗. 방송국에서 저한테 사인 부탁해주셨을 때 깜짝 놀랐어요. 기뻤단 뜻이랍니다. 앞으로도 ‘유스’로 남아주실 거죠? 믿고 있을게요. 진저가 최애시면 차애는 저로 부탁드려용…….”

‘유스’는 케이어스 팬덤의 이름이었다.

편지를 다 읽은 조아라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그녀가 다음 편지를 보려고 하자, 한껏 당황한 진저가 말렸다.

“아라 씨, 편지는 개인적인 검미다…….”

본인의 편지가 읽힐까 걱정하는 듯했다. 조아라는 진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녀는 종이백 안에 굿즈를 차곡차곡 담아갔다. 그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이었다.

재포장을 마친 조아라가 싱긋 웃으며 성필에게 종이백을 내밀었다.

“좋겠어요. 최애한테 직접 선물도 받고. 사랑하는 케이어스 사인도 잔뜩 생기고. 부럽다아.”

“……응.”

차마 ‘아니야’라곤 할 수 없었다.

바로 앞에 진저가 있었으니까.

성필은 호흡을 가다듬고, 일부러 밝게 말했다.

“아라야, 진저가 너 보러 왔대!”

“진저 너 똑바로 말해.”

“네, 네?”

“너 나 보러 온 거야 아저씨한테 선물 주러 온 거야? 어느 거에 더 비중 뒀어. 나야 아저씨야?”

진저는 눈치가 있는 아이였다.

“당연히 아라 씨를 보러 온 게 주목적임미다!”

진저, 고맙다…….

“아라 씨가 공항에서 말했잖슴미까. 춤추자고. 오늘은 춤을 추러 왔슴미다.”

“……그랬던가?”

“가로 엔터 특징이 약속을 잊는 검미까! 혼자만 기대했던 거 같아서 가슴이 아픔미다!”

“농담이야, 기억하지 그럼. 바로 올라갈까?”

“알겠슴미다. 그런데 그 전에 사장님한테 인사라도 드려야지 않슴미까?”

아까부터 사방에서 들어오는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진저다.

그녀는 드디어 주변을 샅샅이 살필 여유가 생겼다.

그에 홍규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사장 홍규헌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심미까. 케이어스 진저임미다.”

“박 이사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홍규헌마저 성필 놀리기에 들어갔다.

“이사님이 제 말을 많이 하셨슴미까?”

“네.”

“어떤…….”

“너무 많아서 기억도 잘 안 나네요. 진저 씨가 실력도 뛰어나고 예의도 바르고 인성도 좋다고 칭찬이 자자했어요.”

“그으, 그 정도는 아님미다.”

진저가 부끄러워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아라 씨와 춤출 수 있게 허락해주시겠슴미까?”

과도한 경어체에 홍규헌이 설핏 웃고는,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저와 조아라는 2층 연습실로 올라갔다.

그녀들만이 아니었다.

가로 엔터의 모두가 그 둘을 따라갔다.

진저가 살짝 겁에 질려서 물었다.

“다 오시는 검미까?”

“네 춤 보고 싶겠지.”

가로 엔터 사람들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소녀연맹을 짓눌렀던 케이어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말이다.

이미 데뷔 퍼포먼스로 실력 증명이 끝났다곤 하나, 그게 쭉 이어질지는 모른다.

기본적인 기량을 쌓지 못하고 그룹의 곡에만 매달리면,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후에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슴미까.”

옛날의 진저였다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대와 시선 때문에 잔뜩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진저는 변했으니까. 그녀는 조아라를 향해 살가운 미소를 보였다.

“아라 씨의 춤을 매일 본 분들이니, 제 춤은 성에도 안 찰 검미다.”

“……그러냐.”

조아라는 무심한 답을 돌려줄 뿐이었다.

그런 그녀들의 뒤를 따라가는 성필. 그는 자꾸만 등이 찔리는 감각을 느꼈다.

시선이나 분위기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누가 손가락으로 등을 찌르는 것이었다.

손혜빈이었다.

“누나 왜 이래. 내가 아무리 싫어도 우리 폭력은 쓰지 말자.”

“응? 내가 하는 거 아닌데? 애들이 전달해달라고 했어.”

손혜빈은 계속 성필의 등을 찔렀다.

‘다 내 업보다.’

그리 받아들이려던 성필은, 손혜빈이 손가락으로 허리를 일자로 그어 내리자 화들짝 놀랐다.

성추행이야!

화난 표정으로 돌아보자 그녀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애들이 해달래.”

“…….”

미안하다 얘들아…….

선물을 받더라도 응접실같이 조용한 곳에서 받았어야 했는데.

짧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 진저와 조아라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춤의 주인공인 둘은 중앙에 자리 잡았다.

“한의사님. 곡 이걸로 틀어주세요.”

“알겠습니다.”

제목, Prisoned me.

조아라와 진저가 2주 차에 마스터 칼에게서 배운 듀오 댄스였다

“진저, 옷 갈아입고 올래?”

“아님미다.”

진저가 두꺼운 롱 패딩을 벗었다.

그러자 스포츠 브라탑과 숏팬츠만 입은 진저의 몸이 드러났다.

진저의 몸을 보자 가로 엔터 인원들이 숨을 삼켰다.

“너 그 꼴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렇슴미다.”

“안 추워?”

“바로 앞까지는 매니저님이 차에 태워주셨슴미다.”

“……나는 옷 갈아입고 올게.”

다시 돌아온 조아라는 크롭티와 숏팬츠 차림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 섰다.

조아라는 미국에서 질리도록 보았던 진저의 몸을 다시금 찬찬히 보았다. 그게 이상하게 생각되진 않으리라. 가로 엔터 사람들도 진저의 몸을 보고 있었으니까.

‘다시 봐도…….’

완벽하다.

작은 머리, 가늘고 긴 목, 하얀 피부, 모델과 같은 비율, 평균 신장보다 우월한 키.

끝없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많은 여성들이 닮길 바라여 몸을 깎아내고 고통을 씹어 삼키는 다이어트마저 인내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신체의 박제였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몸의 이상향이다.

무엇보다 조아라가 부러워하는 건, 판타지 속의 요정이나 천사와 같이 가늘고 순수해 보이는 몸임에도 가슴과 엉덩이가 슬림하단 것이다.

발레단의 최상급 무용수인 당쉐 에뚜왈(Danseur etoile)과 비교해도 흠결이 없는, 아니. 전설적인 발레리나이자, 발레리나의 교본이라 불릴 정도로 탁월한 신체를 가졌던 실비 귀렘과 비교해도 흠결이 없다.

‘그에 비해 나는…….’

조아라는 진저의 너머, 거울로 비치는 자신의 몸을 보았다.

진저의 비율은 따라가더라도, 평균 신장보다 크지만 진저보다는 낮은 키.

피부톤도, 파우더를 찍고 막 무대에 오를 준비를 마친 듯 하얀 진저의 것보다는 어둡게 보였다.

하지만 이 단점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모두 부차적이었다.

넓은 골반, 그리고 뼈를 감싼 살과 근육들은 부드럽기보다 올림픽 선수처럼 탄력적이다.

사람들이 건강해 보인다며, 멋지다며 칭찬하는, 여자의 자연적 조건이 부각된 조아라의 신체 구조는.

아이돌이 아닌, 댄서로서 진저와 비교될 때 약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저가 동화 속 요정과 같이 유리와 같은 몸을 지녔다면, 조아라는 매캐한 숯 냄새가 나는 대장간 속의 강철이었다.

‘씨…….’

조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삼켰다.

잊고 살아왔다.

그녀의 우상이었던 댄서, 릭 칼먼. 춤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처럼 되는 것이 소원이자 꿈이었다.

하지만 사춘기가 오고, 몸에 변화가 나타나고, 몸의 곡선이 달라지는 순간, 조아라는 절망에 빠졌었다.

도저히 릭 칼먼과, 남자와 같은 선(線)을 구현할 수 없단 사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연습생이 되고 또 아이돌로 살아가며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열등감과 절망이, 진저와 함께 지내면서 점점 살아났었다.

신체적인 재능.

도저히 뒤바꿀 수 없는 한계.

조아라가 죽어도 깰 수 없는 한계를, 진저는 태어나는 순간에 깨버린 것이다.

“…….”

조아라는 지그시 눈을 감고 평정을 되찾았다.

“몸 풀고 추자.”

“알겠슴미다.”

춤선을 드러내기 위해 딱 붙은 옷을 입은 둘은, 시작하기에 앞서 몸을 풀었다.

마치 갑옷을 입고 칼을 손질하는 기사처럼.

“아라 씨. 이 곡이 맞습니까?”

“네, 맞아요. 신호 주면 틀어줘요.”

스트레칭이 끝난 둘은 자세를 잡았다.

진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표정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반면 조아라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시작할게요.”

곡이 재생됐다.

이어서 두 명의 댄서가 감정을 섞었다.

감탄이 따라 나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팬은 나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서 나를 선택했다, 라고 했슴미다.’

성필이 해주었던 그 말은, 미국에 있는 동안 진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진저의 삶을 바꾸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녀는 본인의 행복을 찾아가기로 했다.

“오늘은 골든게이트 자연공원임미다!”

“그래.”

5시, 레슨이 끝나면 신태웅에게 부탁해서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녔다.

“오늘은 케이블카를 타고 싶슴미다!”

“그래.”

신태웅도 진저가 밝게 변하자 기뻐했다.

“오늘은 퍼포 바버샵에 가고 싶슴미다! 여기선 인디 아티스트들이 공연을 한다고 함미다!”

“……그래.”

다만, 그게 매일 이어지니 신태웅도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차이나타운에 가고 싶슴미다!”

“…….”

박성필이 진저에게 독을 주입했다!

신태웅은 인생의 조언자로까지 여겼던 성필에게 반감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우리 진저가 변했어!’

연습에 목숨을 걸고 퍼포먼스의 완성을 위해 잠도 희생하던 그녀는, 이젠 완벽하게 관광객이 되어 있었다.

“저기, 진저야. 우리 너무 노는 거 아닐까? 이번 주만 해도…….”

“하루에 8시간씩 연습하는 게 부족함미까?”

불안한 듯 그리 물어오는 진저를 보면, 신태웅은 입술을 벌벌 떨면서 고개를 좌우로 젓는 수밖에 없었다.

8시간, 많지.

밥 먹고 쉬는 시간을 뺀 순수한 8시간이다.

신태웅에게 그만큼 연습하라 해도 시간을 꽉 채울 자신이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도 죄책감이 드는 건 매한가지였다.

‘정호환 이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진저를 망친 거 같아요.’

돌아가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라도 해야겠다.

그에겐 다행히도, 진저는 일주일이 지나자 조금씩 달라졌다.

“오늘은 안 가고 싶슴미다.”

“어, 그래?! 그럼 연습…….”

“방에서 쉬겠슴미다.”

“…….”

진저는 침대에 누워 발을 까딱였다.

발의 움직임은 어느새 레슨에서 배웠던 스텝을 따라갔다.

팔에, 다리에, 좀이 쑤신다.

움직이고 싶다.

하지만 몸은 편해서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계속 다리를 움직이던 진저는, 갑자기 침대에서 팍 일어났다.

‘마음이 불편해.’

마음이 불편할 바에야 몸이 불편하겠다. 그게 훨씬 나을 듯하다.

진저는 저녁 7시, 연습실에 발을 들였다.

조아라는 밥을 먹으러 갔는지 없었다.

혼자만 남은 연습실에서, 진저는 배경 음악도 없이 춤을 추었다.

시원하게 뻗어가는 팔과 다리, 흩날리는 땀방울, 거칠어져 오는 숨결.

그때 진저는 깨달았다.

‘나, 춤을 좋아했구나.’

그토록 지겹다고 느꼈던 춤이, 이제는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아라 씨가 이해돼.’

이런 마음이라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춤이란, 노래란, 진저가 가진 유일한 장기이며. 그녀가 온전히 소유한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건 곧 진저 자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것을 지겹다고 여기거나 싫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팬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성필의 말했던 대로.

‘나도 행복해질 거야.’

춤으로, 노래로, 아이돌로서.

행복해질 것이다.

* * *

조아라가 우측으로 팔을 뻗었다. 그에 따라, 진저가 사슬에 묶인 듯 끌려가다가 쓰러진다.

진저는 풀려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조아라의 눈빛과 손짓에 따라 끌려가기만 할 뿐.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 표정에서 보이는 절망감, 행동에서 보이는 애절함, 그리고 속박을 완벽히 표현하는 연기에.

‘씨…….’

조아라는 절로 욕이 나왔다.

따라가기 벅차다.

동작이 아니라 진저의 감정을.

조아라 자신이 뒤처지는 듯하다. 마치 마스터 칼과 함께 이 춤을 추었을 때처럼.

지금으로선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벽을 손으로 더듬는 듯, 조아라는 겨우 진저를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어떻게 이런, 미국에서보다 더 잘하잖아.’

아카데미에서의 5주 차 때, 조아라는 점점 위기감을 느꼈었다.

진저가 달라진다.

이제껏 습득 속도가 조아라보다 느렸던 그녀는, 점점 조아라를 따라잡고 있었다.

그게 6주 차에는 결판이 났다.

컨템포러리 댄스에서만큼은, 진저의 기량이 조아라보다 더 높았다.

‘왜? 춤은 내가 훨씬 더 오래 췄는데? 레슨을 받을 때도 내가 더 빨리 배우는데?’

들인 시간의 차이? 아니다.

진저는 경쟁심 때문에 조아라보다 늦게 연습실에서 나가곤 했지만, 고작 30분 차이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이만큼 차이가 벌어진다고?

게다가 진저는 4주 차 때 레슨이 끝난 뒤엔 연습도 안 했잖은가.

그것을 고려하면 들인 시간조차 조아라가 앞선다.

‘대체 왜…….’

그 때문에, 조아라는 점점 진저를 대하는 게 거북해졌었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느끼는 감정이리라.

천재를 보게 된 범인(凡人)의 질투심.

‘아름 씨는 인지를 곧장 심동으로 전환하는 게 가능합니다.’

처음 한구인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조아라는 긴장했다.

춤을 한 번 보고 바로 따라 할 수 있다고?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애가 있어?

신아름과 춤을 춰보고, 조아라는 안심했다.

‘자기식대로 표현해내는 건 별개구나.’

신아름의 괴물 같은 능력도, 조아라가 춤에서 쌓은 애정과 경험을 따라오진 못했다.

그런데 진저는 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듯 가속해서 쫓아왔다.

‘진저 무시하지 마. 진저는 리카보다 연습생 기간이 짧아.’

타고난 연습벌레.

누구보다 빨리 연습을 시작하고, 누구보다 늦게 연습을 마친다.

그 압도적인 연습량으로, KS 엔터의 모든 연습생을 누르고 데뷔조에 발탁됐다고 한다.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그딴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연습생 생활을 5, 6년 했던 이들은 바보인가? 멍청이인가? 고작 8개월 만에 따라잡힐 리 없다.

진저의 아버지가 중국의 거부(巨富)이며, KS 엔터의 투자자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그럴듯하다.

하지만 진저의 신화가 진짜라면, 정말 8개월 만에 다른 연습생을 따돌릴 정도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천재.’

춤의 재능이란 게 있을까?

그렇다고 믿어왔다.

당장 조아라 자신부터가 재능이 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줬다.

단순히 기술을 습득하는 속도부터, 춤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가짐까지.

조아라는 천재란 명칭에 어울렸다.

그런데 진저와 비교하니, 조아라 자신은 잘 쳐줘도 범재(凡才)에 불과했다.

‘진저는…….’

조아라가 지금껏 천재라고 여겨왔던 이들과 궤를 달리하는 천재다. 조아라는 지금까지 범재만 보고 살아온 것이다.

만약 춤의 천재란 게 있고, 천재의 재능이란 게 유전된다면, 현대에 춤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자생존이라고 합니다. 환경에 적합한 종이 살아남아 현대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구인이 설명해주었던 진화론이 떠올랐다.

현생 인류가 등장한 건 2, 30만 년 정도다.

최초의 인류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유전자들은 모두 생존에 적합한 특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 따진다면 외견에서 드러나는 매력, 더 많은 근육량, 동체 시력, 순간 판단력, 강한 생존 본능 등이 있겠군요. 현대에선 쓸모가 많지 않은 분야입니다.’

포식자에게서 벗어나고, 식량을 얻으며, 굶주림과 추위를 수월히 버티는 능력.

그런 능력을 지닌 유전자들이 현대까지 계승됐다. 그 번영의 사슬 속에, 춤의 재능은 없을 것이다.

춤을 잘 추는 재능만 가진 인간 따위, 이미 옛날옛적에 사자나 호랑이에게 먹혀 도태됐을 것이다.

‘흥미로운 가설입니다만, 현대에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분들은 사실, 인류 초기에 있었던 진짜 천재들과 비교하면 범재 수준에 불과할 거라고들 합니다. 프로그래밍의 재능, 마케팅의 재능, 연구의 재능 등. 그런 재능을 타고난 천재들은 수십만 년 전에 모두 죽었을 테니까요. 적자생존입니다.’

인간은 예술의 동물이라고들 한다.

당연히 춤을 출 수 있다고들 한다.

춤은 본능이라고.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왜 춤을 배워야 출 수 있는 건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춤을 만들어내고 춤을 밥 먹듯 간단히 익히는 재능들은, 벌써 수십만 년 전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아니야.’

한구인의 설명은 틀렸다.

‘있었어.’

집요하게 현대까지 전달된, 기적 같은 확률 속에서 살아남은 천재의 유전자가.

조아라의 눈앞에 있었다.

진저, 케이어스의 메인 댄서.

춤을 배운지 3년도 안 된 아이.

그녀의 3년이 조아라의 10년을 추월했다.

* * *

박수 소리.

조아라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눈앞에는 애인의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를 찾은 여인이 있었다.

진저는 천장의 형광등을 태양이라도 되는 듯, 눈동자에 숭배의 감정을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조아라는 그녀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었다.

춤은 끝났다.

“아라 씨.”

가는 호흡의 진저가 다가왔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함미다. 재밌었슴미다.”

재미?

미국에서, 조아라가 진저에게 ‘재미있죠?’라고 물었을 때. 진저는 거칠게 분노를 토해냈었다.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생각했는데, 이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도 또 초대해주시면 기쁘겠슴미다.”

진저가 화사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조아라는 물끄러미 그녀의 손을 보다가, 맞잡았다.

“응. 나도 재밌었어.”

직원들과 멤버들은 저마다의 자리로 돌아가고, 조아라는 진저를 배웅하러 갔다.

문 앞에 선 진저는 바로 나가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아라 씨. 호, 혹시 번호, 주실 수 있으심미까?”

“너 폰은?”

“케이어스는 핸드폰을 매니저가 맡아둠미다. 저희가 성공하면 돌려준다고 했슴미다.”

“그러냐.”

조아라는 그 말만 하고 가만히 있었다. 진저는 당황했다. 그리고 기가 죽었다.

수첩과 펜을 든 그녀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 순간 조아라가 그것을 빼앗아 간단히 번호를 써주었다.

“가끔 연락해.”

“감사함미다! 그, 그리고…….”

진저가 웅얼거렸다.

들리지 않는다.

“뭐?”

“사, 사인 부탁드림미다!”

“……사인?”

“네! 아라 씨는, 그, 저는, 아라 씨의 팬임미다. 팬이 되기로 했슴미다.”

팬, 진저가 미소를 지었다.

조아라는 그 미소를 보고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사인을 해주었다.

진저는 사인을 보고 눈을 빛냈다.

“잘 가.”

“네. 안녕히 계십시오!”

문 너머 사라지는 진저는, 어찌나 기뻐하는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기까지 했다.

조아라는 유리 벽 너머를 바라보다가, 아예 밖으로 나섰다.

무거운 걸음으로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캔 맥주를 하나 샀다. 테이블 앞에 앉아, 추위도 신경 쓰지 않고 맥주만 홀짝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런 그녀의 앞에 그림자가 졌다.

“갑자기 어디 갔나 했더니, 너 뭐 하냐?”

성필이었다.

“어떻게 찾았어요?”

“너 전화 울리고 있잖아.”

핸드폰은 지금도 조아라의 주머니에서 절찬리에 ‘아니’를 뱉어내는 중이었다.

“그거 소리 듣고 찾았어.”

“부재중 전화 21통? 집착 쩌네요.”

“21통을 안 받는 네가 더하다. 나중에 연애할 때 상대가 불쌍해. 이렇게 밀기만 하면 다 도망간다.”

“안 혼내요?”

성필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조아라는 성필에게 혼나겠구나 생각했다.

“연습 시간도 째고, 편의점에서 술이나 먹고 있는데.”

“네가 얼마나 심란하면 이러겠냐. 원래 안 이러던 애가. 갑자기 술에 맛 들인 건 아니지?”

“맛없네요.”

그런 것치곤, 캔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저씨.”

“응.”

조아라는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녀가 진저를 보고 불쾌함과 우울함이 드는 건, 단순히 그녀에 대한 열등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저가 케이어스이기 때문이다.

소녀연맹 멤버들의 목표는 케이어스를 이기는 것이다.

‘근데, 나는 진저도 못 이길 거잖아.’

어떤 퍼포먼스를 해도 진저보다는 뒤처질 듯하다. 그러니, 영원히 케이어스를 이기지 못하는 건 아닐까.

영원히, 성필의 꿈을 이뤄줄 수 없는 건 아닐까. 최고의 아이돌이 되지 못하고, 소녀연맹은 그저 그런 그룹으로 남아 있진 않을까…….

“진저 때문이야?”

“……네, 뭐. 애가 나보다 춤을 더 잘 추더라고요.”

“네가 더 잘해.”

“아, 이제 알겠네.”

“뭐가?”

“옛날에 하양 언니가 거짓된 칭찬이 차가운 진실보다 아프다고 했었거든요.”

“와, 하양이 무슨 시인이야?”

“그거, 이제 뜻 알겠네요.”

성필은 조아라를 위로해주려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기쁘긴 해도, 위로가 되진 않는다.

“아라야. 만약 네가 댄서나 안무가가 됐으면 말야, 너 엄청 유명해졌을걸?”

“그거야 그렇겠…….”

“온레블 캣츠 같은 그룹한테도 안무 주고.”

전원 댄서로 이루어진 영국의 걸그룹이다.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다.

“크리스토프 비용 같은 가수한테도 안무 주고.”

조아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저씨. 내가 댄서가 됐으면 한국에서야 그럭저럭 날릴 건 뭐, 이해하겠는데요. 그렇게 유명한 스타들이 왜 내 안무를 받겠어요? 칭찬도 정도껏 해야 허허 웃고 넘어가지.”

“진짜야. 넌 그 정도로 재능 있어.”

“재능…….”

“물론, 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가장 크지만. 아무튼 너가 안무가 됐으면 또 아빌 레쉬 같은 팝스타랑…….”

성필은 계속해서 ‘조아라가 안무가가 됐다면, 댄서가 됐다면’ 같은 주제로 칭찬을 했다.

조아라는 어이가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으며 듣기만 했다.

입에 발리고 귀가 떨어질 듯 다디단 칭찬이라도, 비록 그게 거짓이란 것을 알아도, 조아라는 성필의 말이 마냥 듣기 싫진 않았다.

“됐어요. 이제 돌아가요.”

“술 더 안 마셔?”

“이제 됐어요.”

둘은 나란히 걸으며 회사로 돌아갔다.

“아저씨.”

“응.”

“우리 케이어스 언제 이기게 해줄 거예요?”

“글쎄다. 한 3, 4년 뒤?”

“꿈도 크시네.”

“네가 물어봤잖아!”

조아라가 큭큭 웃었다.

그래, 진저에 대해 열등감 가져서 뭐 하겠는가.

소녀연맹은 팀 아닌가.

멤버들 외에도, 프로듀서가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이기면 된다.

함께라면 이길 수 있다.

“아저씨.”

“응.”

신아름을 따라서 ‘알라뷰’라고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빠큐.”

“갑자기 왜 욕해?!”

“어, 아? 아, 죄송해요. 진짜 나도 모르게 나왔네.”

“너 인성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시답잖은 대화에도 조아라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천천히 가자.

아이돌이 된 건 행복해지기 위해서니까.

굳이 목숨까지 걸며 아등바등 살긴 싫다.

조아라는 회사의 문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까 아저씨. 아저씨 꿈이 최고의 아이돌을 만드는 거라고 했잖아요.”

“응.”

“지금 최고의 아이돌은 누구예요? 지금 걸그룹 최고요.”

“음…….”

* * *

다음 날, 성필은 멤버들이 바쁜 와중에도 1층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현재 걸그룹의 정점이다.”

“서양인이네요!”

아이튜브 공연 영상 섬네일이 네 명의 멤버 얼굴이었다.

“이게 몇 분에 공연 영상이 나오더라.”

성필이 영상을 이리저리 만졌다.

그리고 한 장면에서 영상이 멈추었다.

그 그룹 멤버가 한쪽 손을 가슴 부근에, 다른 쪽 손을 가랑이 사이에 둔 동작이었다.

옷은 거의 속옷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고, 그 위에 입은 것도 투명한 비닐 재질이라 속이 훤히 비쳐 보였다.

멤버들이 경악했다.

“아타시(나) 최고의 아이돌 안 될래!”

“이, 이, 이사님 저, 저런, 저런 옷을 저, 저희한테 이이, 입히실 생각이신 거예요?”

“이게 걸그룹의 정점……?”

“…….”

“팀장님 우리 엄마한테 사과해요! 최고의 아이돌로 만들어주겠단 게 이런 의미였어요?!”

성필은 답이 없었다.

“혼또니(정말로) 우리한테 입히려고 했나 봐!”

“어어, 어, 어, 어어어…….”

“근데 춤출 때 입는 거라고 생각하면 별로 거부감 없기도 한데.”

“꼭 입어야 한다면…….”

“언니랑 조아라 제정신이야?!”

걸그룹의 정점은 멤버들에게 너무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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