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38화 (138/760)

138화

“리카가 카와이 퓨처 베이스를 앨범에 넣게 되면요.”

정지음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앨범 컨셉에 못 맞추는 거 아닌가요? 그, 만약 소녀연맹에 구체적인 세계관이 생기고 그 이야기를 앨범마다 푸는 형식이면요. 리카의 곡은…… 개인 서사가 너무 크잖아요.”

“그거야 하양이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아무래도 분위기란 게 있긴 하지.”

장하양은 ‘에피타프’로 무거운 사랑을 노래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소녀연맹의 이미지 안에서 포용 가능하고, 오히려 소녀연맹의 이미지를 확대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리카의 자작곡은…….

“그건 소녀연맹의 이미지를 파괴하잖아요.”

아직 타이틀곡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적인 구성을 논의하는 것도 덧없긴 하다.

하지만 리카의 자작곡, ‘플레이리스트’는 그 모든 일정을 뒤엎는 파괴력이 있었다.

“리카의 개인 앨범이면 몰라도요…….”

이는 성필도 오래 고민했던 문제였다.

아이돌은 그룹이다. 아이돌 멤버 개개인으로 이루어지는, 개인보다 더 큰 값이다.

그룹의 색을 벗어난 곡을, 멤버의 자작곡이란 이유만으로 앨범에 실을 수 있는가?

“돼.”

홍규헌이 간단히 답변했다.

“우리가 세계관에 연연하게 된 게 조정훈 감독 때문이지?”

조정훈 감독은 소녀연맹의 뮤비에 세계관을 입혀놓았다.

아직 밝혀지진 않았으나, 충분히 스토리가 확장될 수 있는 단초를 열어두었다.

“우린 그거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고, 애들이 생각한 것도 아니잖아.”

“…….”

“소녀연맹은 소녀연맹이야. 이번 미니 앨범의 목적이 개인곡을 하나씩 담는 데 있다면, 리카의 자작곡도 포용해야 맞아. 타이틀만 소녀연맹의 이미지를 이어가면 될 일이야.”

소녀연맹은 아티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그룹의 최종 목적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곡이나 받아들인다면 그룹이란 의미가 퇴색하겠지만.

“리카의 곡이 나쁜 것도 아니잖아? 그 뭐냐, 카와이…….”

“카와이 퓨처 베이스요.”

“그래, 그거. 그다지 듣기 싫은 것도 아니고, 나름 괜찮던데? 그 장르도 수요가 있는 거지?”

“네, 주로 일본에서요. 한국은 비주류 중의 비주류고…….”

홍규헌은 픽 웃었다.

“잘됐네. 미리 일본팬 끌어올 수도 있잖아? 안 그래도 이름 좀 날리면 일본 진출도 고려할 거였어.”

물론, 농담이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앨범에 리카의 일본어 곡을 넣는다고 일본 팬들이 반응할 리가 없다.

일본까지 반응이 전해지려면 일단 소녀연맹 자체가 떠야 한다.

다만, 홍규헌은 목적이 있었다.

“애들이 창작해놓고서도 지레짐작 포기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애들은…….”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

창조와 도전에 익숙한 아티스트가.

그런 의미에서 리카의 곡은 결격 사유가 없었다.

“정 PD. 리카 곡이 안 좋아?”

정지음은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잘 만들었어요. 뼈대는 완성되었고, 그 뼈대가 좋아요.”

정지음이었다면 절대 만들 수 없었을 분위기의 곡이다.

그가 편곡을 해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다.

* * *

제1차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

기묘한 이름을 지닌 소녀연맹의 팬미팅이다. 팬 사인회도 결합된 형태라고 한다.

그 말인즉슨.

‘언니들이랑 소, 손도 잡고 눈 보고 대화도 하고……!’

김채현은 팬미팅 응모권이 다섯 장 있었다.

한 장 한 장 코드를 입력할 때마다 절을 다섯 번씩 하고 입력했다.

그랬더니 됐다.

역사적인 소녀연맹의 첫 번째 팬미팅에 참석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장소는 청담동의 한 소극장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냐…….”

덕질 메이트인 이선주는 눈물을 머금고, 홀로 당첨된 김채현을 떠나보냈다.

김채현은 슬펐으나, 동시에 기뻤다.

그녀는 아침 댓바람부터 꽃단장을 마치고 목적지로 향했다.

소극장이 있는 건물의 앞에는 소녀연맹의 현수막과 입간판이 서 있었다.

‘여기에 줄 서면 되는구나.’

김채현은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며, 길게 선 줄의 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

“어?”

“엥?”

또 만나버렸다.

이 정도면 운명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오빠?”

“채현아?”

이제는 27살이 된, 사회초년생에서 벗어난 유용태였다.

김채현은 빠르게 그를 훑었다.

신발부터 상의까지 새것이 아닌 게 없다. 이 인간 머리까지 손질했네!

‘내가 놀랄 건 아니지만.’

드라이와 고데기에만 수 시간을 날린 그녀가 가질 생각은 아니었다.

“여기 줄 맞죠?”

“어.”

둘은 어색하게 같이 섰다.

너무도 절묘한 우연이 계속 겹치니, 몇 번 봤음에도 오히려 더 어색해졌다.

“오빠 앨범 몇 개 샀어요?”

유용태는 부끄럽단 듯 소곤댔다.

“13장.”

“으와! 오빠 돈 많아요?”

“직장인이니까.”

직장이 있었구나!

백수인 줄만 알았는데!

“너는?”

“다섯 장이요.”

“대단하다. 커트라인이 몇 장 정도였을까?”

“오빠!”

김채현이 커트라인이란 단어에 격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놀란 유용태를 향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컷 언급하는 거 실례에요! 금기라구요!”

“그래?”

“밖에서 그런 얘기 꺼내면 안 돼요!”

유용태는 시무룩해졌다.

“사인 어디 받을 거예요?”

“나는 앨범.”

“저는 사인지랑 앨범이랑 나눔 받은 슬로건이랑…….”

“야, 사인받는 동안 40초 다 지나가겠다.”

팬 사인회 코너에서 멤버의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40초다.

만약 김채현의 사인 요구를 들어주려면, 멤버들은 거의 30초를 사인만 해야 할 수도 있었다.

이 사실이 발표되었을 때, 팬들은 좋아하기보다 걱정했었다.

‘인당 40초에 인원이 200명이면 2시간 넘게 우리 애들이 앉아만 있어야 하는 건가요!’라면서 팬카페에서도 여론이 들끓었다.

그에 대한 답은 멤버들이 직접 내려주었다.

‘팬분들을 직접 뵈는 거니까요. 피곤하기보단 기쁠 거예요.’

회사도 40초란 시간이 과하다고 말렸으나, 멤버들이 굳이 시간을 늘렸다고 한다.

그에 팬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늘어나면 좋은 거니까.

물론 멤버들도 팬 사인회의 힘듦을 깨닫고, 다음부터는 시간이나 인원을 줄이겠지만…….

“그, 그럴까요? 그럼 두 개만 받을까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네가 돈 내고 당당하게 당첨돼서 온 거잖아. 남의 말 듣고 후회하면 슬프지.”

“아…… 계속 사인하면 우리 소련이들도 손목 아프겠다.”

김채현은 눈물을 머금고 사인을 두 곳에만 받기로 했다. 사인지와 앨범이었다.

“이제 입장인가 봐.”

둘은 팬미팅 장소인 소극장으로 진입했다.

200개의 의자와 그 앞에 놓인 작은 무대.

무대의 뒤는 소녀연맹 스타일에 맞게 꾸며져 있었다.

“뭐야 저게?”

“뭐라고 읽어?”

무대의 위, 붉은 현수막에 독일어로 ‘1차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라고 적혀 있었다.

팬들이 착석을 완료하자 극장이 어두워진다.

기대 서린 속삭임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안녕하세요!”

소녀연맹이 등장했다.

* * *

성필은 자신의 앞에 선 다섯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어엿하게 아이돌 티가 나는 소녀연맹의 멤버들이었다.

“얘들아, 이 자리는 소중한 팬분들을 보는 자리야. 비록 모든 팬분을 볼 수는 없지만, 저분들이 팬의 대표라고 생각해줘.”

팬들은 이 자리에 소녀연맹을 보기 위해 왔다.

그녀들을 보며 기뻐하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어 이곳에 온 것이다.

“잘할 수 있지?”

백설하가 각오를 다지듯 긴 생머리를 어깨 뒤로 쓸었다.

첫 팬미팅임에도 당황한 기색도 없이, 오히려 성필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보였다.

“열심히 할게요.”

“믿는다.”

“네, 믿어주세요.”

장하양은 끈 하나를 사선으로 매는 오프 숄더 탑에 부츠컷 슬랙스를 입었다. 그 위에 무거운 가죽 자켓을 걸쳤다.

배가 훤히 드러나 성필이 걱정했으나, 스타일리스트 김형선과 장하양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오늘의 복장이 됐다.

장하양은 어깨끈을 정리하곤, 백설하와 마찬가지로 미소 지었다.

“이사님도 팬 석에 앉아 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계속 백스테이지에만 계시면 재미없으실 거예요.”

“난 너희 뒷모습만 봐도 즐겁지.”

“뒷모습이라서 즐거운 거 아니구요?”

“……하양이, 농담할 여유도 있네?”

“아하하.”

조아라는 뮤비 촬영 때보다 더 길어진 단발을 뒤로 묶은 채, 걱정스러운 듯 무대를 본다.

팬의 앞에 서는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기에 무대가 너무 좁다는, 너무도 자신만만한 이유 때문이었다.

“아라야. 아직도 무대 크기 걱정해? 어제오늘 직접 서 봤잖아.”

“더 크면 좋을 거라고요.”

“그래. 너를 담기엔 세상이 너무 작지?”

“잠실 정도는 돼야죠.”

“너무 크잖아.”

신아름은 높은 굽이 적응 안 되는지 자꾸만 땅을 톡톡 찼다.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과 멤버들의 옷을 비교해보는데, 항상 그 결과는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래, 리카는…….”

“왜 저 바라봐 놓고 리카한테 말 걸어요?!”

“어? 아니, 너는 격려할 필요 없을 거 같아서. 눈에서부터 자신감 뿜뿜이잖아.”

“자신 있는 건 맞는데에…… 나도 당연히 긴장된다고요. 격려 좀 해줘요.”

“하하, 음방이랑은 다르지?”

“네. 진짜 제 팬들이잖아요.”

“네 팬이 아니라 소녀연맹 팬…….”

“쉿.”

“그래, 넌 그 눈웃음만 보여도 팬들이 다 자지러질 거야. 실수하더라도 웃기만 해. 네 얼굴이 하도 날카로워서 웃기만 해도 반전매력 미쳤으니까.”

마지막으로, 리카.

리카는 다른 멤버들이 비해 확연히 긴장했다. 그녀는 당장 약을 내놓으라고 의사한테 다그치듯 말했다.

“빠, 빨리 저를 진정시켜주세요!”

“리카.”

“네!”

“세상에 너 싫어할 사람 없어. 그냥 즐기고 와.”

“…….”

“어때, 격려가 좀 돼?”

“되겠어요?! 더 제 용기를 북돋워달라구요! 이대로면 저 무대에 서자마자 기절해버려요!”

“들어가겠습니다!”

조진만이 땀을 닦으며 백스테이지를 향해 말했다. 그는 세트리스트와 시계를 끊임없이 확인했다.

“에, 에, 아직 이사님한테 격려도 못 들었는데!”

리카는 오들오들 떨면서 백설하와 팔짱을 꼈다.

“리카!”

성필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리카는 희망을 가지고 그를 보았다. 성필은 그녀를 보고 깊이 미소 지었다.

“파이팅!”

“파이팅? 파이이팅?! 그런 거 말고 좀 더 가슴을 울리는 말을 해주세……!”

멤버들에게 끌려, 리카는 무대로 나갔다.

백스테이지에선 볼 수 없는, 눈부신 조명이 비추는 스테이지에서.

─────!

귀를 멀게 할 정도의 환호가 쏟아졌다.

* * *

유용태는 배에 알이 배길 것 같았다.

너무 웃었고, 너무 재밌었고, 하여튼 많이 웃어서 배가 아프다.

계속 미소 지었더니 얼굴 근육도 맛이 간 듯했다.

가장 먼저, 멤버들이 등장할 때부터 그러했다.

“와아아악! 하양아아아!”

옆자리의 김채현이 거의 괴성이나 다름없는 환성을 내질렀다.

“오빠 저기 봐요 저기! 복근! 복근이에요! 하양이한테 복근이 있어요!”

배가 훤히 드러난 옷이다.

11자 복근이 조명이 비쳐 선명히 보였다.

“오빠 내 말 듣고 있어요?!”

“…….”

“정신을 잃었네.”

1열에서 소녀연맹의 데뷔곡인 ‘아니’를 볼 수 있었다.

음방보다 작고 초라한 무대이지만, 그렇기에 더 가까이서 퍼포먼스를 느꼈다.

팬들은 너무 많이 소리를 질러대서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라이브예요 라이브! 인터넷에서 AR이라고 온갖 음해를 해대더니 진짜 라이브 맞잖아요!”

“내가 진실을 보고 있는 건가? 이게 진실인가? 죽기 전에 이런 엄청난 퍼포먼스를 목도할 수 있다니! 내 삶에 여한이 없도다!”

“뭐라는 거야.”

무대를 마치고, 숨을 헐떡이는 백설하가 마이크를 잡았다.

“인민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요!”

환호!

벌써 소리를 너무 많이 질러서 목이 갈라진 사람이 속출했다.

멤버들은 가볍게 토크를 주고받았다.

게임도 했다.

주전자로 페트병에 물 빨리 채우기.

귀 막고 단어 전달하기.

몸으로 말해요 등등.

팬들을 즐겁게 할 멤버들의 게임과 토크가 반복되었다.

‘팬미팅 가격이 30만 원이라도 사겠다.’

유용태는 벌써 대만족했다.

“리, 리카. 으, 그, 그러니까, 리카, 리카쨩…….”

조아라가 얼굴을 붉히고 말을 이어갔다.

“스, 스키(좋아)…….”

“아타시(나)도 아라쨩 다이스키다요(엄청 좋아해)!”

리카가 조아라를 껴안았다.

조아라는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라서 변명했다.

“대, 대본에 있던 거예요! 내가 평소에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 대본에 있던 거라고요!”

“거짓말! 아라쨩 저번에도 아이시떼루(사랑해)라고 했잖아!”

“언제!”

“너 귀국했을 때. 내가 들었어요. 같은 방 쓰거든요.”

신아름의 증언으로, 조아라는 친구에게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가 됐다.

토크만 재밌는 게 아니었다.

중간중간 멤버들의 개인 공연도 있었다.

백설하가 홀로 무대에서 통기타를 들고 나타났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예쁘고 노래도 잘 부르는데 기타까지 친다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지?”

“오빠 너무 과몰입한 거 아니에요?”

“왜 나만 이상한 사람 만들어?! 너도 하양이 나왔을 때 이랬잖아!”

팬미팅에 오길 정말 잘한 게, 다음 앨범 곡을 미리 들어볼 수 있던 것이었다.

장하양의 ‘에피타프’는 걸작이었다.

트렌디한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에 발라드를 결합시키다니. 심지어 그 애절한 목소리는 유용태와 김채현의 심장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었다.

그 뒤로 백설하가 나타났으니, 기대감은 배가 됐다.

그리고 그녀의 무대가 끝난 뒤,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천사다.’

천상의 선율과 목소리다.

비록 자작곡이 아니라 커버지만, 그래서 아쉽지만, 백설하의 압도적인 보컬은 그 아쉬움을 단숨에 몰아냈다.

백설하는 마이크도 없이, 관객석 가장 끝까지 들릴 만큼의 성량으로 노래했다.

가장 앞 열의 사람은 감동을 심하게 했는지 울기까지 했다.

“다음은 아름이에요!”

신아름이 나오자 유용태는 흥분에 몸을 떨었다. 최애인 신아름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놀랍게도 신아름은 다른 아이돌의 곡을 준비했다. 케이어스의 ‘카오스’였다.

소녀연맹의 팬인 ‘인민’들에게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는 케이어스였다. 케이어스가 신인상을 모두 빼앗아(팬들의 생각)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아름의 무대를 보곤.

“케이어스 노래 좋다…….”

신아름이 직접 노래도 부르고 안무까지 완벽히 소화했다.

커뮤니티에는 케이어스의 안무 난이도를 찬양하는 글이 가끔 올라왔다. 그리고 교묘하게 소녀연맹과 비교하며 소녀연맹을 내려치곤 했다.

그때마다 분노에 찬 댓글을 달았었는데.

‘아름이도 할 수 있어! 아니, 소녀연맹도 걔들만 한 실력이 있어!’

중소지만, 절대 대형 기획사에 꿀리지 않는다!

“어때요, 저 잘하죠?”

네에에에!

“저는 자작곡이 아니라 미안해요.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다음 앨범에서 꼭 들어주셔야 해요.”

신아름은 눈웃음을 지었다.

유용태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신아름이 토크를 하는 동안, 그녀의 뒤에선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나타난 건 디제잉 테이블이었다.

“이제 리카 차례에요!”

리카가 선글라스를 쓴 채 나타났다.

팬들이 리카를 연호했다.

“아타시(저), 작곡을 배웠어요.”

대단해!

“이건 제 순수 자작곡이에요! 제 열정과 재능의 결정체예요!”

팬들은 열광했으나, 대체 디제잉 테이블이 왜 필요한지 몰랐다.

그 정체는 곧 밝혀졌다.

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장르의 사운드가 울렸다. 그리고 리카가 일본어로 비어 있는 보컬을 채웠다.

‘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가만히 앉아서 듣는 게 예의인가?

곡이 좋긴 한데…….

“푸쳐 핸즈 업 인 디 에어(하늘로 손 들어)!”

리카가 먼저 하늘로 높이 손을 뻗었다.

팬들도 따라 했다.

“스탠드 업(일어나)! 앤 셰잌 잇(그리고 흔들어)!”

박자가 가속하는 구간.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베이스와 드럼 속에서, 리카가 따라 하라는 뜻으로 몸을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팬들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리듬에 몸을 맡겼다.

리카의 관객 장악력은 이미 세계 정상급 디제이 수준이었다.

팬들은 마치 디제이 페스티벌의 관객들처럼 신나게 몸을 흔들면서 리카의 곡을 즐겼다.

소극장 안이 작은 클럽으로 변했다.

귀여운 여운을 남기며 곡이 끝났다.

리카는 너무 폴짝폴짝 뛰어다녀서, 곧 죽을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인민이들 즐기고 있습니까아아! 마지막은! 아타시(제)를 사랑하는 아라쨩입니다아아!”

무대 옆, 관객석에선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당황한 조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카, 무대 치워야지! 아직 내 차례 아니야!”

“앗, 그렇다네요. 죄송합니다.”

무대가 준비되는 동안 리카는 팬들과 토크를 나누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1열로 다가가 한 명을 잡아서 무대로 끌고 왔다.

유용태였다.

“성함이 무엇인가요!”

“유, 유용태입니다.”

“최애가 누군가요!”

“…….”

“제가 아닌 건 알겠네요.”

“아, 아니. 리카예요. 리카 맞아요.”

“우소츠키(거짓말쟁이)! 어서 진실을 고하지 않으면 사인을 대충 해드릴 거예요!”

유용태는 지근거리에 다가온 리카의 비현실적인 미모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름이요…….”

“아름아!”

리카가 부르자마자 신아름이 튀어나왔다.

“제 팬이세요?”

그날, 유용태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얻게 됐다. 신아름이 유용태를 위해서, 직접 그가 듣고 싶은 노래를 불러준 것이다.

“좋으셨나요!”

리카의 질문에 유용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앨범도 꼭 구매해주아악!”

신아름이 리카의 목덜미를 손으로 쳐서 말을 막았다.

“장사하지 마.”

“고멘(미안)…….”

리카의 인이어로 무대 감독인 조진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카 씨. 시간 초과입니다. 어서 아라 씨한테 차례 넘겨주세요.]

“아앗! 죄송합니다!”

갑자기 리카가 사과하자 팬들이 어리둥절했다.

“다음은 아라쨩이에요! 아라쨩은요, 지난 6주 동안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어요! 유명한 댄스 아카데미에서요! 거기서 배운 걸 보여드릴 거예요!”

[리카 씨. 시간 초과입니다.]

“아. 그, 그럼 저는 가볼게요 안녕!”

드라이아이스에서 나온 연기가 무대에 짙게 깔리고, 보라색 조명 속에서 조아라가 등장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분위기다.

“안녕하세요. 조아라입니다. 제가 보여드릴 건 자작곡은 아니고요. 그냥 춤이에요. 아니, 그냥 춤은 아니네요.”

조아라가, 내가 추는 춤이다.

컨템포러리 댄스.

6주 동안 그 정수를 배워 온 조아라는 온전히 스스로 창작한 안무를 선보였다.

아이돌의 군무와 댄스에 익숙해진 팬들에게 놀랍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신체의 선(線)과 감정, 표현에 극대화된 예술을 팬들에게 드러냈다.

‘뭐야 이게…….’

유용태는 입만 벌린 채 조아라의 무대에 홀려버렸다.

이런 거, 예술극장 같은 곳에서 비싼 돈을 주고서야 볼 수 있을 게 틀림없다.

곡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받아내어 조아라가 몸으로, 춤으로 표현해낸다.

춤이란 건 몸으로 행해지지만, 예술에 다다른 춤은 말보다도 더 강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조아라의 춤이 끝났을 때, 팬들은 관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관객답게, 예술가를 향해 환호보다 더 큰 박수를 보냈다.

모든 게 만족스럽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 순서, 사인회다.

멤버 개인마다 주어진 40초란 시간 동안, 팬들은 멤버와 대화할 수 있다.

김채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드니.

“안녕하세요.”

미소 짓는 장하양이 있었다.

그 뒤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손을 잡았던가? 모르겠다.

대화를 나누었나? 모르겠다.

무슨 말을 들었지? 모르겠다.

마치 기억이 지워진 것만 같다.

그럼에도, 김채현은 가슴에 가득 채워진 행복감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정말 소녀연맹과 대화를 했구나.

내 사랑을, 진심을, 그녀들에게 전달했구나.

“응원할게요!”

그 말을 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장하양의 대답도.

“네. 저도 노력할게요. 같이 올라가요.”

더 높은 곳을 향해.

아이돌은 팬과 함께 나아간다.

* * *

멤버들은 탈진해서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극장 이곳저곳에선 스태프들이 무대를 치우는 게 보였다. 하지만 철수의 분주함 속에서도, 멤버들은 침묵만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귓가에서 함성이 계속 맴돌아요.”

조아라의 말은 멤버들의 심정을 관통했다.

무대에 섰을 때, 세상이 떠나갈 듯 그녀들의 이름을 외쳐주던 팬들.

그들이 보낸 에너지가 아직도 멤버들의 가슴 깊은 곳, 소중한 곳에 남아 있었다.

재밌었다.

행복했고.

그리고 그 행복이 떠나간 자리에는, 팬들의 환호가 없어진 지금은.

허탈감이 찾아왔다.

또 무대에 서고 싶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과 같은 욕구가 허탈감 아래서 자라났다.

“저…….”

조아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아이돌 하길 잘한 거 같아요.”

성필이 이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항상 조아라에게는 안무가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며 죄책감을 가졌던 그가, 반드시 이 말을 들었어야 했다.

이 순간, 조아라는 인정해버렸다.

자신의 인생에서 아이돌을 택한 건, 두 번 다시 없을 최고의 선택이라고.

“얘들아.”

멤버들이 시선을 뒤로 돌렸다.

가로 엔터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

홍규헌, 한구인, 손혜빈, 민경섭, 정지음.

“잘했어.”

홍규헌이 칭찬했다.

멤버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들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팬미팅을 지켜보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조아라는 ‘당연히 잘하죠’라고 답하려다, 문득 성필이 없단 것을 깨달았다.

“아저씨는요?”

“잠시 어디 갔다 온다던데.”

* * *

성필은 소녀연맹 팬미팅이 끝나자마자 급히 건물을 나섰다.

달리고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또 다른 문화 센터, 그 3층.

“아.”

이미 없었다.

스태프들이 무대를 철거하고 있었다.

성필의 눈은 허무함을 담아 입구에 놓인 입간판을 바라보았다.

[글로브 팬 사인회]

석세스 엔터의 걸그룹, 글로브의 팬 사인회.

소녀연맹의 것과 시간이 겹쳤다.

성필은 주머니에서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초대권을 꺼냈다.

‘내가 미쳤지. 시간 안 맞는 거 뻔히 알면서도 여기 오고. 그리고 와서 뭐 하게.’

석세스 엔터 사람들 뻔히 있을 텐데.

관객석에서 소리 지르고, 글로브 애들 만나서 사인이라도 받을 셈이었나?

성필은 초대권을 주머니 안쪽으로 거칠게 쑤셔 넣고, 입구에서 등을 돌렸다.

“팀장님?”

“아.”

성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석세스 엔터의 연습생이 있다.

아니, 이제는 아이돌로 데뷔한 아이가 있다.

“소민아.”

음방에서 만났을 때도, 눈치 없이 오랜만에 만난 성필에게 인사하다가 윤상열에게 혼나고.

연습생 시절 눈치가 없어서 많이 꾸중 듣기도 했고. 요령도 적어 항상 트레이너들의 눈총을 받았던.

소민이가.

“축하한다, 데뷔해서 사인회도 하고…….”

“티, 팀장님 왜 우세요?”

몇 년을 보아왔던 연습생이 어엿한 아이돌이 되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성필은 그녀가 석세스 엔터 소속이란 것도 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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