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공항, 홍규헌이 손목시계를 살폈다.
건물 밖으로는 귀청을 찢어버릴 듯한 비행기의 착륙음이 들려왔다.
“저거지?”
“네.”
2월, 오늘은 조아라가 돌아오는 날이다.
6주의 수련을 마치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멤버들은 저마다 학원에 있었기에, 마중하러 나온 인원은 성필과 홍규헌이었다.
* * *
진저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살을 에는 추위에 깜짝 놀랐다.
샌프란시스코보다 훨씬 춥다.
옷을 더 두껍게 입었어야 했는데.
어깨를 감싼 그녀의 위로, 기모가 달린 가죽 자켓이 내려왔다.
“입어.”
조아라였다. 그녀는 스웨터만 입은 채로 무심히 진저를 앞질러 갔다.
“괜찮슴미다.”
“공항 나갈 때까지만이야. 그땐 돌려줘.”
둘의 관계에는 많은 진전이 있었다.
먼저, 언니인 조아라가 반말을 쓰게 됐다.
“아라 씨도 춤잖슴미까.”
“난 안 추워. 몸에 살이 많아서.”
“그렇슴미까.”
“이걸 동의한다고?”
조아라와 진저는 출구까지 함께 움직였다.
“아라야!”
그때, 진저는 3주 동안 듣지 못한 목소리를 듣곤 급히 시선을 주었다.
성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아저씨!”
조아라가 기쁘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성필과 어느 여자. 그 둘이 조아라를 격하게 환영해주었다.
진저는 조아라의 자켓을 덮고 있음에도 추위를 느꼈다. 그녀는 혹시 몰라 여기저기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진저, 우린 저쪽이야.”
“……알겠슴미다.”
진저는 신태웅과 함께 다른 길로 향했다.
“진저!”
그때 조아라가 달려왔다.
진저가 퍼뜩 깨달았다.
“아, 미안함미다. 자켓 돌려주겠슴미다.”
“그것도 그렇고.”
조아라는 말하기 힘든 게 있단 듯 시선을 내리깔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춤출래? 오늘?”
둘은 듀오 댄스를 여럿 연습했다.
조아라의 말은 그 춤들을 가리켰다.
“오늘은 진저가 스케줄이 있어서.”
신태웅의 거절에 조아라는 시무룩해졌다.
“그렇겠네. 케이어스는 바쁘겠지.”
진저는 자켓을 돌려주며 말했다.
“며칠 뒤에 찾아가겠슴미다. 그때 춤춥시다.”
“네가 직접?”
“네. 제가 직접 가겠슴미다. 아라 씨 회사로요.”
“그럼 내가 미안하잖아.”
“아님미다. 다른 볼일도 있슴미다.”
예고했던 대로, 성필에게 감사를 전하러 가야 한다.
미국에서 그가 해줬던 말 덕분에, 진저는 많은 것을 얻었으니까.
* * *
“조아라, 뭐 배웠는지 한 번 볼까?”
“진짜 사장님 기대해요. 보자마자 눈 까뒤집고 좋아하실걸요?”
“눈까지 뒤집어야 해? 기대에 못 미치기만 해봐라.”
홍규헌은 실실 웃었다.
그래, 그 정도는 보여줘야지.
조아라를 아카데미에 보내는 데만 수백만 원이 들었다. 그 정도 성과도 없다면, 눈이 아니라 혀를 깨물고 쓰러질 것이다.
가로 엔터 직원들과 멤버들이 전부 모여 조아라의 춤을 구경했다.
“시작할게요!”
조아라가 유연성을 자랑하듯 다리를 하늘 높이 찢었다. 그리고 즉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트월킹이다.
“……응?”
그리고 땅에 엎드려 몸을 바짝 붙이고 엉덩이를 빙글빙글 돌렸다.
트월킹이다.
조아라가 벌떡 일어났다.
“오…….”
“어때요. 아주 뻑이 가죠?”
“내 돈 다시 내놔아아!”
남자 직원들의 감탄 속에서 홍규헌이 절규했다.
* * *
조아라의 진정한 춤 시연이 끝났다.
다들 입을 쩍 벌린 채였다.
“우와…… 아라 진짜 무용수 같아.”
멋지다.
우아함을 몸으로 표현하면 이런 형태일까.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스타일이다.
홍규헌은 아까의 절규와 정반대로, 더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헛되진 않았네.”
“사장님 반응 겨우 그거예요? 아까처럼 소리라도 질러주세요.”
“진짜 네가 트월킹 추는 거 보고 기절할 뻔했어. 돈 전부 갖다 버린 줄 알고.”
“트월킹도 훌륭한 춤이에요.”
“그래, 대강 알겠어. 열심히 했구나.”
조아라가 뿌듯하게 웃었다.
“며칠 뒤에 팬미팅이거든. 이미 들었지?”
“네.”
“제1차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 오늘 안으로 세트리스트 외우고 대사도 쭉 읽어둬.”
“네?”
“그리고 가능하면 그때 할 퍼포먼스도 하나 준비했으면 좋겠다.”
“……네?”
귀국한 지 하루, 조아라는 또 다른 시련을 맞이했다.
* * *
조아라, 인생 최대로 바쁜 나날이 찾아오다!
“미니 앨범 발매가 곧인 건 알지? 솔직히 진행이 이렇게 더딜 줄은 몰랐어. 미안.”
“아저씨가 사과하는 거 보니까 진짜 급한 거 같긴 하네요.”
“일단 네 개인곡도 준비해야 하거든. 이거 회의 끝나자마자 지음이 작업실로 가서 곡 골라. 몇 개 준비돼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거 없으면 아예 새로 만들어도 되고.”
“내가요?”
“지음이랑 같이.”
먼저, 곡부터 선택해야 한다.
“다음으론 가사를 써야 해.”
“내가요?”
조아라는 몇 시간을 줘도 고작 글 몇 줄 뽑아내는 실력의 소유자다.
글을 써 본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데뷔 앨범 구성품인 팬에게 보내는 편지도 한구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적지 않았던가.
“가능하면.”
“…….”
“그럴 줄 알았어. 작사가님들 후보군 추려놨으니까 그분들 작품 보고, 어떤 분한테 맡기고 싶은지 결정해.”
조아라의 가슴 속에서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그야 글을 못 쓰는 건 사실이다. 가사라고 잘 쓸 리가 없겠지.
그렇다고 초장부터 포기하다니……!
“어쩔래. 네가 써 볼래?”
“……아니요.”
하지만 조아라는 주제 파악을 잘했다.
자신이 가사를 쓴다면 초등학생 동시 수준이 나올 게 틀림없었다.
“이것만 해도 바쁘지만, 아직 할 일이 더 있어. 곧 팬미팅이야.”
“미니 앨범도 곧이고 팬미팅도 곧이에요?”
“팬미팅은 진짜 곧이야. 당장 일주일 뒤니까. 너도 소식은 들었잖아.”
“아니, 글킨 한데……. 앨범 작업이랑 같이 준비하려면 너무 힘들지 않아요? 나 미국에 있을 때 곡이라도 미리 보내주시지.”
“너 춤에 집중하라고 일부러 안 말했어.”
“아.”
조아라는 성필과 회사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리고 아이튜브 콘텐츠도 준비하고 있는데……. 이건 팬미팅 이후로 미루자. 자, 전달할 건 이 정도야.”
스케줄 전달이 끝나고, 조아라는 정지음과 함께 개인곡 협의에 들어갔다.
정지음은 먼저 조아라의 의견을 들었다.
조아라는 곡 준비가 부담됐다. 하지만 온전히 자신만의 곡을 가질 수 있단 건 매우 큰 행복이다.
아티스트가 된 기분이다.
“저는 춤에 집중하고 싶어요. 박자감도 살아 있고 보컬도 별로 안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춤추면서도 쉽게 부를 수 있는 거?”
“네. 그런 거 있어요?”
정지음이 곡을 하나 재생했다.
드럼과 베이스가 주류인, 정말로 미니멀한 곡이었다. 드럼을 타고 흐르는 박자는 조아라의 머릿속에서 절로 춤이 떠오르게 했다.
“우리 데뷔곡이랑 비슷하면서도 다르네요.”
“이건 리얼 드럼 사운드거든. 여기에 보컬 라인을 여유롭게 배치하면 될 거야. 보컬 난도도 낮춰서 춤추기 쉽게 만들 건데. 어때?”
“곡이 심심하네요.”
“심심하긴 하지. 원래 그런 의도로 만들었어. 춤에 집중해야 하잖아. 여기서 살 좀 더 붙이면 들을 만할 거야.”
“다른 것도 들어봐도 돼요?”
준비된 모든 곡을 들었다.
초두 효과 때문인지, 가장 심심하다고 평했던 첫 번째 곡이 기억에 남았다.
“당연하지. 내가 너 생각하면서 만든 곡인데.”
“완전 조아라 맞춤곡이네요.”
“사실, 박 이사님이 미리 언질을 줬어. 너 이런 스타일 곡 원할 거 같다고. 진짜였네.”
춤에 어울리는 박자감 있고, 고난도의 보컬이 필요 없을 반주.
성필의 예측에 따라 정지음을 이 곡을 탄생시켰다.
“나는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네. 다음은 작사가님을 골라야 하는데…….”
협의를 마친 뒤, 조아라는 다시 성필에게 불려갔다.
응접실 안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두 명 있었다. 공연 기획사 사장과 직원이라고 한다.
“공연 기획사 아틀라스 사장 조진만입니다.”
“사장님인데 젊으시네요.”
“29살이거든요.”
29살인데 회사 사장?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홍규헌도 나이가…….
“이게 세트리스트랑 토크 대본이거든요. 이거 보시고 피드백 주시면 됩니다.”
조아라는 토크 맥락을 읽었다.
어디 보자…….
[아라: 리카쨩 아이시떼루(사랑해)!]
“내가 이딴 말을 왜 해요?! 저, 저, 전혀 나랑 캐릭터가 다르잖아요!”
“당연하죠. 토크는 팬들의 염원이 들어있으니까요. 팬들이 멤버분들께 듣고 싶어 할 말들을 토크에 넣은 겁니다.”
“……팬들이요?”
“예. 팬의 민심을 읽으려고 팬 커뮤니티만 48시간을 돌아다녔죠. 여기서 48시간은 이틀이 아니라 순수하게 48시간입니다. 일주일 동안 고생 좀 했죠.”
토크 대사는 이상했지만, 조아라는 조진만의 노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드셨겠다.”
“아뇨. 힘든 건 제가 아니라 직원들이죠.”
조진만의 옆, 그의 부하 직원이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깊이 박혔다.
언뜻 보아도 피로가 줄줄 흐른다.
“마음에 안 드시면 바로 수정해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고요…….”
조진만네 직원들의 피와 눈물이 들어간 대본이다. 마냥 거절하는 것도 미안하…….
“이건 어떠세요?”
[아라: 리카쨩 스키(좋아)!]
“전혀 수정이 안 됐잖아요! 대체 어떤 팬들이 이딴 걸 원하는데요?!”
“이미 두 분은 케미로 묶였습니다. 동생 라인이요. 팬들도 호응이 좋고요.”
가로 엔터는 아이튜브로 방대한 콘텐츠를 풀었다. 그 안에는 리카가 조아라에게 치근덕대는 수많은 영상들이 있었다.
또한 멤버들의 라이브 방송에서도 조아라와 리카의 케미는 익히 드러났다.
“뭔데요 이게……. 이 사람들, 아니, 팬들 뭐 나랑 리카랑 혀 섞으면서 키스하기라도 바라는 거예요?”
“음, 그런 글이 있긴 했지만…….”
“있었다고요?!”
“아라 씨의 인격권과 행복 추구권을 과하게 침해하기에 무시했습니다.”
“…….”
조아라는 떨떠름하게 대본을 더 읽어내려갔다.
[아라: 에이이, 내가 언제 그랬다고요. 내가 얼마나 쌤 사랑하는데요.(백설하의 가슴께에 뺨을 부빈다.)]
“안 해.”
조아라가 대본을 내팽개쳤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숙소를 보며, 조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제 숙소가 진짜 집처럼 느껴진다.
조아라는 복도의 벽지부터 발에서 느껴지는 바닥의 감촉, 옅은 채광을 모두 색다르게 바라보았다.
거실로 들어섰다.
못 보던 게 보인다.
“이게 뭐야?”
“게임기야.”
거실에서 요가를 하던 백설하가 대답해주었다.
“쌤이 샀어요?”
“박 이사님이 주셨어.”
“게임기를요? 이거 비싸지 않나?”
텔레비전 밑에 놓인 건 플레이스테이션이란 비디오 게임기였다.
“이사님이 옛날에 쓰시던 거래.”
“우리 놀 거 없다고 줬나.”
“하양이가 이사님한테 블루레이 디스크를 선물로 받았거든. 근데 우리 숙소에는 그거 재생할 게 없잖아.”
덕분에 장하양이 성필의 집까지 가서 뮤지컬 ‘캣츠’를 보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성필의 집에 구비되어 있던 유명 아이돌의 콘서트까지 블루레이로 보고 왔다.
“근데 그게 블루레이도 재생할 수 있대. 게임만 되는 게 아니라더라.”
성필의 집에서 먼지만 맞고 있던 것이었다.
처음 플레이스테이션이 숙소로 왔을 때, 리카는 잔뜩 흥분해서 게임을 하려고 했었다.
문제는 성필이 게임은 주지 않았단 것이었다.
리카가 성필에게 게임도 달라고 하니, 이미 옛날 옛적에 중고로 팔았다고 했었다. 리카는 시무룩하게 플레이스테이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응?”
“하양 언니가 아저씨 집에 갔다고요? 혼자?”
“응.”
“이상…… 안 이상해요? 그래도 돼요?”
“사장님이 허락하셨대.”
조아라는 샤워를 하며 과연 그게 정상적인 행동인지에 관해 숙고했다.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나? 아니, 하양 언니는 뭐야? 아저씨 집에 혼자서 가겠다는 게…… 보통 할 수 있는 발상인가?’
그녀는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채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신아름은 어디 가고 리카만 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곱게 펴는 중이었다.
“아라쨩 여기 여기!”
“뭐.”
“싸늘해! 오늘 여기서 자라구!”
“흠, 나 최근 깨달았는데 혼자 자는 게 더 편하더라.”
“마, 마사카(설마). 아타시(나)랑 같이 안 자려고? 미국물 먹더니 개인주의자가 된 거야?!”
“그래요 저는 개인주의자입니다아.”
조아라가 오랜만에 본인의 침대에 누웠다. 리카가 즉시 파고들었다.
“아름이랑 자면 되잖아.”
“6주 동안 언니들이랑 아름이 번갈아 가면서 잤어. 그래도 아라쨩이 제일이네.”
“음…….”
누군가 몸을 더듬는 이 느낌, 오랜만이다.
설마 만지는 느낌이 제일이란 건가?
“리카.”
“응?”
“아이시떼루(사랑해).”
“소소, 소, 손, 손나아(그러언)!”
조아라는 웃으면서 리카를 쓰다듬었다.
“저러니까 대본에 이상한 말이나 쓰이지.”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신아름이 본인의 침대에 누웠다.
“야 신아름!”
조아라의 고함에 신아름의 가슴이 철렁였다.
뭐 잘못이라도 했나……?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같이 잘래?”
“……참나.”
같이 잤다.
중간에 끼인 리카가 신음했다.
“좁아아…….”
리카의 끙끙댐을 들으며, 조아라는 멍하니 어둠 속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한 이름이 떠오른다.
‘진저.’
조아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를 꽉 물었다.
“아라쨩 잠 안 와? 고민 있어?”
“넌 어두운데도 그게 보여?”
“보여!”
“잠 좀 자자.”
“아름이도 안 자? 우리 새벽까지 얘기나 하자. 아타시(나) 심심해.”
“빨리 코오 자세요.”
조아라가 리카의 머리를 규칙적으로 쓰다듬으며 재웠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진저로 가득 차 있었다.
* * *
청담동의 어느 아트홀.
약 200석 규모의 소극장이다.
첫 팬미팅을 위한 중요한 리허설 현장인 만큼, 성필까지 와서 점검에 참여했다.
성필은 조진만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사장님, 우리 애들 잘 부탁드려요. 첫 팬미팅이에요.”
“압니다.”
“…….”
조진만 이 사람, 한구인이랑 비슷한 과인가?
날카롭게 날이 선 안경만큼이나 똑 부러지고 공감 능력이 없는 모습이다.
“모든 사람에게 첫 번째란 큰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소녀연맹 분들에게 이 팬미팅은 단순한 팬미팅이 아닌, 첫 번째 팬미팅입니다. 처음으로 보는 세계, 처음으로 겪는 경험, 그러니 최고로 만들어드리고 싶습니다. 팬들도 반드시 또 오고 싶단 마음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요.”
“아…….”
성필은 조진만의 사려 깊은 대답에 크게 감동했다.
‘공감 능력 없어 보인다는 생각 취소할게요.’
조진만은 능수능란한 솜씨로 리허설을 지휘했다. 무대, 음향, 스태프 동선, 그리고 아티스트의 절차마저도 세심하게 점검했다.
팬미팅의 구조는 이러했다.
일단 멤버들의 데뷔곡인 ‘아니’ 공연. 이어서 소녀연맹의 스토리가 담긴 VCR 상영. 그리고 토크, 또 다음은…….
‘멤버별 커버 공연.’
데뷔곡만 보고 가면 심심할 것 아닌가.
멤버별로 준비한 커버곡이나 커버댄스 공연이 준비되어 있다.
‘몇몇은 커버가 아니기도 하지.’
홍규헌은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장하양의 ‘에피타프’를 팬미팅에서 최초, 사전 공개하자는 것이었다. 거기서 팬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다.
‘선공개는 위험한 전략이긴 하지. 기대감을 높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거든. 하지만 200명 규모의 팬들을 상대로라면, 만약 장하양의 곡이 반응이 안 좋더라도 수습 가능해.’
이른바, 미리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장하양에게 이런 컨셉이 어울리는지 말이다.
‘아라는 창작 댄스 공연. 설하는 발라드 커버곡. 아름이는 퍼포먼스. 그리고 리카인데…….’
쿵!
무대 중앙에 커다란 디제이 테이블이 놓였다.
리카가 위풍당당히 그 앞에 섰다.
“아타시(저)는 DJ입니다!”
과연 반응이 어떨까…….
아이돌이 디제잉하는 것을 본 팬들은 뭐라고 생각할지 전혀 모르겠다.
사실, 선공개를 하는 건 장하양만이 아니었다.
리카도 자신의 개인곡을 먼저 발표한다.
그리고 그 곡이란 게 바로 리카가 스스로 작곡한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이었다.
정확한 장르명은.
‘카와이 퓨처 베이스.’
* * *
“리카가 작사·작곡을 다 했다고?”
정지음의 보고를 받은 홍규헌은 입이 귀에 걸렸다. 바로 옆의 성필도 그러했다.
아티스트로 가장 먼저 다가간 건 리카였다.
홍규헌이 눈물을 글썽이는 것처럼 눈가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노트북이랑 작곡 프로그램, 200만 원, 쓸데없는 투자가 아니었어. 리카, 장하다.”
홍규헌과 성필은 당장 정지음의 작업실로 향해서 리카의 곡을 들어보기로 했다.
리카는 마스터 키보드를 앞에 두고, 디제이 흉내를 내려 선글라스까지 썼다.
“들으세요, 제 재능의 결정체를!”
곡명은 ‘플레이리스트(Playlist)’였다.
조촐한 박수 뒤, 리카가 곡을 재생시켰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시원한 파도 소리, 통통 튀는 발랄한 사운드에 보컬찹(인간의 목소리를 악기처럼 조정한 것)이 섞여 나온다.
절로 고개가 끄덕거리는 박자감 있는 베이스, 그리고 리카가 노래를 부른다.
일본어로.
“네가 들어본 적 없던 플레이리스트
이 노래가 아키하바라에 울리면
너는 당장 애플튠즈에 검색할 거야!
노래방에선 찾을 수 없어!
이건 일렉트로닉!”
발랄하다. 상큼하다. 귀엽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귀엽단 건 알겠다.
카와이 퓨처 베이스(Kawaii future bass).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귀염움을 한껏 살린 장르이다. 리카가 직접 만든 이 곡은, 그녀의 귀여움이 한껏 담겨 있었다.
“하우스 장르는 흔해졌어도
네게 흐르는 전류는 새로울 거야!
딥 하우스
펑키 하우스
트로피컬 하우스
이건 뉴 하우스!
네가 들어본 적 없던 플레이리스트!”
사운드가 쌓이고, 멈춘다.
그리고 그 정적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사운드가 폭탄처럼 터져 나오며, 아까보다 더 신나는 멜로디를 발산한다.
하이라이트다.
“플레이리스트!
플레이리스트!
플레이리스트!”
리카는 완전히 몰입했는지 디제이처럼 손을 휘적인다. 아마도 디제이들의 공연을 보고 퍼포먼스를 연구한 듯싶었다.
무엇보다, 정말 신나 보인다.
한바탕 파티가 끝난 뒤, 리카가 자신만만히 홍규헌의 앞에 섰다.
“어떤가요! 아타시(제)가 지음 오빠한테 배운 정수를 여기에 쏟았어요!”
“…….”
홍규헌은 다리의 힘이 풀렸다. 성필이 그녀를 받아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사장님!”
“아이고 내 머리……. 머리가 아파…….”
한국 아이돌 앨범에 카와이 퓨처 베이스가 들어가게 된, 한국 문화계 역사상 초유의 사태!
과연 홍규헌과 가로 엔터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해답은 소녀연맹의 첫 번째 팬미팅.
제1차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에서 밝혀진……!
* * *
“이사님! 아타시(저)의 리허설을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셨나요!”
“……응.”
성필은 리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리카, 귀엽다.”
“네? 네! 저는 귀엽다구요!”
“넌 아티스트야.”
“하이(네)?”
너만의 길을 가!
너만의 예술을 해!
그렇게, 팬미팅은 내일로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