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노래방, 배팅장, 방 탈출, 길거리에서 댄스 버스킹하고 스티커 많이 받기, 기타 등등.
수많은 지옥도와 경쟁의 장을 거쳐, 마침내 마지막 승부에 도달했다.
현재까지의 스코어는 4:4.
마지막 경기가 승패의 향방을 가릴 것이다.
“마지막 종목은…….”
신아름과 김민주의 눈이 PD의 입에 고정됐다.
‘스포츠, 스포츠, 스포츠, 스포츠.’
김민주가 기도했다.
‘게임, 게임, 게임, 게임.’
신아름이 기도했다.
“랜덤으로 멤버 이름을 뽑아 그 멤버에게 전화를 걸 거예요. 그리고 그 멤버에게 ‘사랑해’란 말을 빨리 들으시면 됩니다!”
“……네?”
“그게 무슨 경쟁이에요! 본인 능력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요!”
김민주의 거친 항의에 PD가 움찔했다.
“아니. 이건 경쟁이야. 그것도 아주 중요한 능력이 필요한 경쟁.”
“뭐?”
신아름이 미소 지었다.
“대인 관계 관리 능력. 평소 네가 잘하고 다녔으면 반발할 일도 없잖아?”
“…….”
“뭐야 뭐야. 설마 우리 민주, ‘사랑해’라는 말도 못 들어? 멤버들한테 어지간히 차갑게 대하나 보다. 으음, 우리 민주 어떡하지?”
“해.”
“응?”
“하자고.”
김민주는 승부욕이 강하다.
아주 강하다.
지고는 못 산다.
종목이 무엇이든, 지는 순간 인생 전체가 몰락한 듯한 허탈감을 맛본다.
오로지 경쟁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과 같이, 그녀는 승리에서 더 없는 쾌락을 맛본다.
만일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김민주는 뉴욕에서 주 120시간 일하며 연봉을 수십억씩 받는 변호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첫 번째는 아름 씨예요.”
신아름은 박스 안에 손을 넣어 이름표를 뽑았다.
‘장하양’이라고 적혀 있었다.
“…….”
“하하, 어려운 멤버가 뽑혔나요?”
신아름은 입술을 짓씹었다.
‘언니는 좀 그런데.’
회사에는 숨기고 있었으나, 얼마 전 신아름은 장하양과 싸웠다.
자꾸만 신아름이 성필을 ‘팀장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가로 엔터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 장하양의 지적 때문에 ‘이사님’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하지만 근래 슬슬 눈치를 보며 호칭을 변화시켜갔다.
그러다가 사달이 터졌다.
“제가 제 마음대로 부르겠다는데 언니가 왜 뭐라고 해요?!”
장하양은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그래.”
라고 한 뒤 자리를 떴었다.
신아름은 소리 지른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얼굴 보고 살지 걱정했다. 그러나 다음 날, 장하양은 평소와 똑같았다.
“아름아 안녕.”
“아, 네. 언니도요…….”
똑같았으나, 묘한 위화감이 있었다.
그래서 신아름은 아직도 장하양을 대하기 어려웠다.
신아름은 부디 일이 잘 풀리길 기도하며 장하양에 전화했다.
“언니?”
[응.]
“지금 회사에 계세요?”
[응.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언니 저 어떻게 생각해요?”
대체 장하양에게서 어떻게 ‘사랑해’란 말을 들어낼까.
직접적으로 요청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룰로 막혀 있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저를, 그러니까, 으.”
‘사랑’이나 ‘좋아’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지 못하니, 방법이 없다.
이러다간 제한 시간을 넘겨 패배할 것이다.
신아름은 한숨을 쉬고, 어조에 변화를 주었다.
“언니……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애절한 고백을 전하는 자의 말투였다.
스태프들은 다들 ‘오오’ 소리를 냈다.
제발, 이것으로 알아차려주길!
[…….]
답이 없다.
이대로 패배하는 건가?
[아름아. 신경 안 써도 돼.]
“네?”
[저번에 그거.]
“아, 아아. 네. 그거요.”
[내가 잘못했어.]
대화가 이상하게 흘렀다.
PD도 사적인 대화가 나올 것 같자 음향 감독에게 소리를 끄라고 지시하려 했다.
그때.
[아름아.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해. 사랑하고.]
장하양의 입에서 ‘좋아해’와 ‘사랑해’가 동시에 나왔다.
[그런데…….]
“언니 고마워요! 일이 있어서 끊을게요!”
[어?]
신아름이 통화를 끊고 스태프들을 바라보았다.
“몇 초예요?”
“1분 30초요.”
빠르다!
스태프들이 신아름을 받들며 ‘고백 천재’라고 치켜세워주었다.
그럴수록 김민주의 안색은 안 좋아졌다. 그녀는 박스 안에서 이름표를 뽑았다.
“소유…….”
케이어스 멤버, 소유.
김민주는 우울한 낯빛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매니저가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전화를 걸었다.
오랜 발신음 끝에 소유가 받았다.
“소유야?”
[네네, 소유입니다. 여보세요? 혹시 제 번호를 알아내신 팬이신가요? 아니라면 지금 연습 중이라서 길게 전화할 수가 없는데에…….]
“소유야 나야. 민주.”
[민주야? 민주구나.]
김민주가 이를 까득 물었다.
‘얘는 아직도 주소록에 내 번호가 없어?’
[웬일이야?]
“너 나 어떻게 생각해?”
김민주는 신아름이 썼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
[무슨 말이야? 나 잘 모르겠어.]
그래, 모르시겠지.
“나를 뭐, 나한테 감정적으로 뭔가 느끼는 거 없어?”
“저거 반칙이에요!”
신아름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흠…….]
소유는 쉽사리 대답을 꺼내놓지 못했다. 김민주는 초조하게 기다리며 손톱을 씹었다.
[모르겠는데?]
김민주는 화를 다스리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 얘 입에서 누구한테 사랑한단 말이 튀어나올 리가 없지.’
자기 자신밖에 안 사랑하는 애인데.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진 않다.
“와타시와 키미가 스키(나는 네가 좋아). 키미와(너는)?”
신아름과 스태프들이 당황했다.
김민주가 일본어를 사용할 줄은 몰랐다.
룰 위반이 아닌가 했는데, 룰에는 ‘좋아해’와 ‘사랑해’란 말을 금지했을 뿐이다.
스키(좋아)는 금지하지 않았다.
[부끄럽게 뭐라는 거야. 나도오.]
“나도 뭐.”
[응? 나도.]
“그러니까, 뭐.”
[저기이, 나 영문을 모르겠는데? 갑자기 전화 와서 왜 그런 말 하는 거야?]
“…….”
“시간 끝입니다.”
김민주가 핸드폰을 부서질 듯 쥐었다.
얇은 플라스틱 케이스에 빠득거리면서 금이 갔다.
“너어, 너…… 돌아가서 봐…….”
[……? 그랭. 빨리 와. 나 혼자 연습하니까 너어무 심심해. 진저도 없…….]
통화가 끝나고, 김민주가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 승자는…….”
신아름!
* * *
“내가 김민주 박살 내고 왔어!”
“아름이 스고이(대단해)!”
다른 멤버들이 신아름을 칭찬했다.
아니, 칭찬을 넘어서 걸음마를 성공한 아기를 찬양하듯 몰려들었다.
“이대로면 케이어스 이기는 것도 시간 문제야!”
“그거랑 이거랑 상관 있…….”
“팀장님, 남의 잔칫상에 재 뿌리지 마시고 칭찬이나 해줘요.”
“…….”
칭찬해줬다.
신아름은 콧대가 높아져서 에베레스트산과 비견될 정도였다.
다음 날, ‘죽고 못 사는 친구’의 촬영본이 가로 엔터로 전달됐다.
“조정훈 감독 회사에서 이런 거 편집도 해주나?”
그의 회사인 JJH로 연락하니, 원래 맡는 분야는 아니지만 편집해주겠다고 한다.
기꺼이 그에게 맡겼다.
“일단 보자.”
성필과 한구인, 홍규헌은 두근거리며 촬영본을 확인했다.
필요 없는 부분을 자르는 선 편집은 다 되어 있었다.
이제 이것으로 적절히 편집을 해서 가로 엔터 채널에 올리면 된…….
[너 개못하잖아! 아하하핰!]
[저거 보여? 네 차 개박살났는데?]
[58점? 아하핳! 너 가수 맞아? 어떻게 노래방 기계가 58점 띄우지? 나 이런 거 처음 봐!]
[기분이 어때? 나는 패배를 몰라서 말야. 네 기분이 어떤지 모르겠네?]
“…….”
한구인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아름 씨를…… 혼내야 할 것 같습니다.”
성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사장실을 나갔다.
그리고 신아름을 찾아서 회초리를 들었다.
“너 완전 악당이잖아! 저런 거 아이튜브에 올라가면 안티가 100만 명은 생기겠다!”
“이겼잖아요! 이기려면 수단 방법 안 가려도 된다면서요!”
“내가 언제! 그리고 수단 방법 문제가 아니라 네가 진 사람을 죽으라고 모욕했잖아!”
“어, 어제는 잘했다면서요오……!”
“손 내놔.”
그 말을 듣고 멤버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성필이 장난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신아름이 울상을 지으면서도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멤버들은 ‘진짜 손을 내미네?’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성필이 따끔하게 그녀의 손바닥을 때렸다.
아프게 했단 게 아니라, 정말 따끔만 할 정도로 한 대 친 것이다.
“자, 이제 알겠…….”
“팀장님 미워!”
고작 따끔할 정도지만, 신아름은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연습실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마치 아빠에게 혼나고 도망가는 딸 같았다.
“저어, 이사님. 아름이도 성인인데 손바닥을 때리는 건…….”
백설하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름이한테 필요한 일이야.”
“네?”
신아름을 처음 석세스 엔터로 데려왔을 때, 그녀는 안하무인이었다.
신아름의 어머니가 그녀를 맡기며 ‘어릴 때부터 너무 오냐오냐 자라서……’라며 걱정을 내비치었는데. 정말 그 말대로였다.
그래서 성필은 신아름의 보호자이자 훈육자 역할을 수행했다.
“내가 손바닥을 치는 건 일종의 표시야. 이 행동은 정말 잘못한 거고, 다신 하면 안 된다는 표시.”
석세스 엔터에서, 성필은 여느 연습생들과 마찬가지로 신아름을 말로만 혼냈으나 곧 한계가 왔다.
어머니의 애정과 무조건적 수용 속에서만 자랐던 신아름은, 그 방자함을 마음껏 발산했다.
그래서 성필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허락을 맡고 회초리를 들었다.
단 한 대. 그녀의 손바닥을 약하게 쳤다.
그게, 고통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따끔함이, 신아름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자신을 아껴주던 성필이 화를 내고 회초리까지 들었단 사실에, 신아름은 자신을 감싼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감각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런가요……?”
그 이야기를 들은 백설하는 당황스러웠다.
무슨 진짜 부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성필은 잠시 후 신아름을 찾으러 갔다. 그녀는 1층에서 장하양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름아.”
“…….”
“말 사이에 ‘개’ 섞지 마. 개못한다. 개박살났다. 이런 거. 또, 아무리 네가 이겼더라도 비웃거나 하지 마. 좀 심했어.”
장하양은 그만해도 된단 듯 성필을 바라보며, 손으로는 품에 안은 신아름의 등을 쓸어주었다.
성필은 그런 장하양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할 말을 다 끝내려 했다.
“민주는 안 그랬잖아. 평소엔 네가 안 이러는 거 알아. 민주랑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습관이 되면 나중에 너한텐 피해로 돌아올 거야.”
“…….”
“할 말은 이게 끝이야. 가볼게.”
성필은 다시 사장실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급히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아름이었다.
그녀는 삐친 듯 입술을 비쭉 내민 상태로, 작게 말했다.
“앞으로 안 그럴게요…….”
“착하다, 아름이.”
성필은 사장실로 돌아와 경과를 보고했다.
이미 홍규헌과 한구인은 JJH에 영상의 편집점을 전부 전달했단 모양이다.
“신아름이 비속어 쓴 부분은 다 컷하고, 맥락도 좀 부드럽게 해달라고 전했어.”
“네, 그럼 될 거 같네요.”
“KS 엔터에서는 어떻게 편집할까?”
‘죽고 못 사는 친구’는 케이어스의 아이튜브 채널과 가로 엔터 채널에 동시에 올라온다.
편집도 따로 한다.
만약 KS 엔터가 신아름의 모습을 여과 없이 내보내면, 사람들에게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몰랐다.
“우리도 선 편집본이 있어서 괜찮겠지만, 그쪽에서 마음먹고 이상하게 편집하면 신아름 싸가지로 만들 수도 있어.”
사람들은 친구 사이에 흔히 비속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럼에도 연예인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갑자기 엄격해져선 비난을 가한다.
어떻게 공인이 그럴 수 있느냐면서.
연예인은 공인이 아닌데도.
“제가 KS 엔터 콘텐츠 부서에 연락해보겠습니다.”
성필은 콘텐츠 기획팀 안성곤에게 전화하여 제작팀 쪽 번호를 얻어냈다. 그리고 그쪽 편집팀에 연락했다.
[아유, 당연히 그런 부분은 잘라내야죠. 요즘 사람들 민감하잖아요.]
“감사합니다.”
[저희가 자극적으로 시청률 뽑아내는 방송사도 아닌데, 굳이 그런 장면을 그대로 삽입할 이유가 없죠.]
다행히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홍규헌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멤버들의 귀가가 가까워질 즈음, 신아름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성필은 공연 기획사 관계자와 늦은 시간까지 협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네네. 첫 팬미팅이니까요. 리허설은 전날 4시간 정도로 잡으면 충분한가요? 아, 그렇네요. 그럼 조금 더 늘리고. 네, 당일에도 리허설 한 번 더요. 알겠습…….”
성필은 문가에 소심하게 서 있는 신아름을 발견하곤, 통화를 급히 마무리했다.
“아름아 왜 왔어?”
“……팀장님. 이번에, 오죠?”
올해 명절에도 신아름의 본가로 올 것이냐.
작년을 제외하곤 매년 그래왔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확답을 주었음에도, 신아름은 오늘의 일로 불안해진 듯했다.
“어, 가야지.”
그 간단한 답에, 신아름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어머님이 올해는 오지 말래? 하긴, 너도 이제 성인이니까.”
“아 뭔 소리예요. 팀장님 돌아가실 때까지 와야죠.”
“나도 사생활이 있어…….”
“올해도 연휴 이틀은 팀장님이 본가 가고, 마지막 날에 저희 집 오시는 거죠?”
“응. 올해는 뭐 먹고 싶어?”
“소고기!”
“항상 메뉴가 똑같네.”
신아름은 성필의 곁에 앉아, 기대에 부풀어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올해는 같이 밥 먹으면서 아육금 보면 되겠다.
좀 바리에이션을 줘서, 저녁 먹곤 디저트로 케이크를 먹자.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퇴근이 다가올 때까지 나누었다.
* * *
설, 민족의 대명절!
그 첫째 아침이 밝았다.
새벽부터 차가 막히고, 그 치열한 상경의 장이 뉴스로 중계되는 날이다.
“이 정도면 리카도 좋아하겠지?”
“당연.”
이미 일본의 설을 즐기고 온 리카는 숙소에 홀로 남아 외로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그런 리카를 위해 성필과 손혜빈은 장을 잔뜩 봐서 숙소에 도착했다.
“들어줘.”
성필이 손혜빈의 짐을 맡고, 그녀는 문 바로 옆에 있는 화분을 들어 열쇠를 찾았다.
여분 열쇠로 문을 연 그녀는 현관부터 코를 찡그렸다.
“삼겹살 냄새.”
굳이 손혜빈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장 거실 문 저편으로 고기를 굽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성필과 손혜빈은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조심스레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조용히 문을 열었다.
“리카, 집게 줘.”
“할 수 있어요!”
“다 탔잖아…….”
“처음 해서 잘하는 사람이 어딨나요! 다음부터는 잘할 수 있어요!”
“빠, 빨리 그릇에 옮기는 것부터 해!”
“하잇(넵)! 이러, 끼에에엣! 기름이 튀었어요! 아파요오…….”
“아하하, 리카 웃겨.”
“아타시(저)의 고통이 웃긴가요?!”
“얘들아…….”
성필의 목소리에 세 명의 멤버.
백설하, 장하양, 리카가 깜짝 놀라서 그쪽을 보았다.
리카는 그렇다 치고, 왜 백설하와 장하양도 숙소에 남아 있는 거지?
“…….”
백설하는 성필의 눈을 보고, 후라이팬이 올려진 가스 버너를 보고, 다시 성필을 보고.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닷! 리더로서 식단을 잘 관리하도록 해야 했었는데! 제가 먹자고 했습니다! 애들은 봐주세요!”
장하양도 백설하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리카가 먹자고 했지만, 안 말린 저희 잘못이 가장 커요. 리카는 용서해주세요.”
“에, 에, 그, 그걸 말하면…….”
내가 제일 나쁜 사람이 되는데…….
리카는 눈치를 보면서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아니, 설이니까 삼겹살 정도야 먹을 수 있지.”
먼저 정신을 차린 손혜빈이 멤버들을 일으켰다. 간신히 분위기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얼떨결에 성필과 손혜빈도 삼겹살 파티에 참여했다.
그러면서 왜 백설하와 장하양에게 본가로 안 갔냐고 물으니.
“사정이 있어서요.”
“저도요.”
설날임에도 본가로 갈 수 없는 사정.
남에게 말하고 싶을 리 없다.
성필과 손혜빈은 묵묵히 쌈에 삼겹살만 싸서 먹었다.
기름이 잔뜩 튄 거실을 깨끗하고 청소하고, 그제야 성필은 원래 목적을 실행했다.
“여기. 나랑 누나랑 장 봐왔거든. 잘됐네. 셋이서 설날 동안 맛있는 거 해 먹어.”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등. 대부분이 고기였다.
리카 홀로 있을 줄 알고 그 외에는 완제품 위주로 샀고 양도 적었다.
“너희 있다고 말했으면 더 샀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리카, 언니들이 같이 있어 줘서 좋겠네?”
“좋아요! 이제 이사님이랑 혜빈 언니도 함께예요!”
“우린 갈 건데.”
“놀다 가요오!”
성필은 리카에게 옷자락이 잡혔으나 개의치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덕분에 리카가 성필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됐다.
“리카, 이사님 놔드려. 이사님도 본가로 가셔야지.”
장하양과 백설하가 아이를 달래듯 리카를 떼어내려 했다.
“한 이사님이 저희 집에 왔던 거처럼 저도 박 이사님네 집에 인사드리러 갈래요!”
“그럼 저도 혹시…….”
“리카 그게 무슨 말이야. 명절은 가족끼리 보내는 거잖아.”
장하양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한 이사님이 오신 건 뭔가요!”
“인사만 드리러 갔는데 부모님께서 있으라고 권하신 거라며.”
“이사님 부모님도 저를 보면 하루 재워주기까지 하실지도 몰라요!”
손혜빈은 리카의 어깨를 짚었다.
“리카, 언니들 말 잘 듣고 있어. 알겠지?”
그녀의 말은 타협을 허용치 않겠단 듯했다. 리카도 이 이상은 어리광에 불과하다고 느꼈는지, 선선히 성필의 옷자락을 놔주었다.
“설 끝내고 봬요!”
성필과 손혜빈은 멤버들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를 나왔다.
“회사에서 보자.”
“어, 누나도 설 잘 보내.”
성필은 차에 타고 본가로 향했다.
역시나 고속도로는 막혔다.
음악을 계속 들으며 지루한 여정을 이어갔다.
목적지에 도착한 건 해가 졌을 무렵이었다.
인구가 3만도 안 되는 군(郡). 여가, 숙박 시설도 변변치 않은 곳이다.
성필은 모텔에 방을 잡고 씻은 뒤 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음력 1월 1일의 태양이 반겨주었다.
모텔을 나와 산 아래로 갔다. 포장도 되지 않은 산을 차로 오르고, 이제 한계다 싶은 시점에서 멈췄다.
성필은 트렁크에서 박스를 꺼내 들고, 위로, 계속 위로 올라갔다.
“여기다.”
나무에 묶어둔 흰색 끈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나무를 기점으로 30m쯤 올라가자 산소가 두 개 나왔다.
성필은 신문지를 깔고 말린 고기나 과일 등을 접시에 담아 올렸다. 잔에 술을 받아 예법에 따라 그 앞에 두었다.
그다음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오른쪽 산소 앞에 꽂았다.
그리고 절.
몸을 숙인 채 오랫동안 있었다.
고개를 드니, 담배가 절반 정도 줄어들었다.
성필은 바닥에 앉아 무릎을 감쌌다.
“아빠, 엄마, 나 왔어.”
공허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말하는 사람은 성필 혼자뿐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가 주된 주제였다.
그리 홀로 몇 시간을 떠들고 난 뒤에야, 성필은 상을 치우고 다시 산을 내려왔다.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여전히 오래 걸린다.
도착한 건 밤이 되고 나서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성필은 아침 일찍 차를 타고 식자재 마트로 향했다.
‘아름이가 먹고 싶다고 했던 게…….’
수첩을 보며 장보기를 마친 후, 무거운 짐을 들고 신아름의 집으로 향했다.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신아름의 집까지 이어지는 높은 언덕을 탔다.
골목에 들어서고 얼마쯤 더 가자,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신아름이 보인다.
“팀장님!”
신아름은 성필을 발견하자마자 활기차게 달려와 그의 왼손에 들린 봉지를 낚아챘다.
“어서 와요!”
“응, 다녀왔어.”
집 안으로 들어오자 신아름의 어머니가 반겨주었다. 벌써 요리를 만들고 계셨다.
성필도 그에 합세해서 산적이나 전 요리 등을 만들었다.
온 집 안에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야, 그만 집어 먹어.”
“이거 대박 맛있다. 뭐예요 이거?”
“동태. 넌 매년 말해줘도 잊어먹냐? 아니 그만 집어먹으라고!”
“아름아, 팀장님이 고생스럽게 만드신 거잖니. 밥 먹을 때까지 기다리…….”
“엄마도 먹어봐. 올해는 더 맛있어.”
어머니는 딸이 먹여주는 전을 먹고 은은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오후 4시쯤이 되어서야 요리가 모두 끝났다.
식탁만이 아닌, 주방 바닥 전체에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깔렸다.
“이거 용기에 담는 것도 일이네.”
“팀장님은 이제 쉬세요. 여긴 제가 할게요.”
“아녜요 어머님. 저희가 쉬고 아름이한테 시키죠.”
“내가요?!”
세 사람이 합심해서 요리를 용기에 옮겨 담았다. 제사는 지내지 않았기에, 따로 꺼내놓을 필요는 없었다.
“좋아, 이제.”
상을 차리자!
명절에만 꺼내는 커다란 접이식 식탁이 펴졌다. 접시에 정갈히 담긴 요리가 식탁을 차례차례 점령해갔다.
“팀장님 빨리 빨리! 아육금 해요!”
“‘빨리’라고 말할 시간에 밥 푸고 수저 놔!”
“에휴, 저 애를 누가 데려갈지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농담조로 웃으며 말했다.
성필도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게요.”
“‘그러게요’?! 이럴 땐 저 실드를 쳐줘야죠! 그리고 엄만 뭐 그런 걸 걱정해?”
신아름이 자신의 머리칼을 쓸었다.
“당장 길거리 아무나 붙잡고 결혼해달라고 해도 해줄걸?”
“빨리 밥 푸고 수저나 놓으라고!”
“……칫.”
세 사람은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육금이 하고 있었다.
“엄마 저기 봐! 내가 저기서 1등 한다?”
“정말?”
신아름이 트랙을 구르는 장면이 나왔다.
어머니가 경악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 아름아, 너, 괘, 괜찮은 거야……?”
“저 때 그냥 피부만 조금 긁혔어.”
이어서 신아름이 규정 위반으로 4등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등으로 들어오긴 했잖아?”
“…….”
어머니는 어이없단 듯 웃었다.
식사가 끝난 뒤, 신아름네 집안 고유의 민속놀이가 시작됐다.
바닥을 수없이 채운 10원짜리 동전의 행렬. 세 사람이 그것을 각각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초록 모포와 함께 화투가 등장했다.
고스톱, 시작!
“올해는 운수가 안 좋으려나. 끝빨이 안 받네.”
신아름이 화투를 뒤집을 손가락 끝을 핥았다. 조심스럽게 개봉한 패는.
“오케이, 청단!”
10시까지 이어진 화투의 승자는 어머니였다.
연륜 어디 안 간다.
셋은 차례로 씻고 잠자리를 준비했다.
성필은 거실을 차지하게 됐다.
“팀장님 편히 주무세요.”
“네, 어머님.”
“팀장님 굿나잇.”
“너도.”
성필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방문이 열리고 성필의 머리맡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름이야?”
“네.”
“왜 왔어.”
“인사하러요.”
“아까 했잖아.”
“올해도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냐. 내가 고맙지.”
“팀장님은 맨날 자기도 고맙대.”
“고마우니까.”
“팀장님.”
“응.”
“알라뷰.”
“미투.”
신아름은 헤헤 웃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성필도 은은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오랜만에 공허한 가슴이 채워진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