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하양이 곡 보고 떠올랐거든요. 다음 타이틀은 사랑으로 가도 되겠다고요!”
“너무 즉흥적이지 않아?”
역시, 소녀연맹의 수호자인 성필이 즉각 반박해왔다.
“누나가 말하는 사랑 컨셉이면 어떤 거야? 흰색 옷 입고 나와서 부끄럽게 사랑을 전하는 그런 건 아니지?”
“아니. 우리 애들은 더는 그런 컨셉을 소화할 수 없어. 데뷔곡이 ‘아니’로 결정된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된 거지.”
“그러면…….”
“야,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
손혜빈의 갑작스런 고백.
회의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이런 느낌?”
“……걸그룹엔 안 어울릴 거 같은데.”
“난 너한테 다 걸었으니까 닥치고 키스할 거 아니면 꺼져.”
다시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이런 느낌?”
“…….”
“봐요. 효과 있다니까?”
손혜빈은 얼굴이 붉어진 성필을 대신해서 대화를 이끌었다.
“손 PD, 근데 말야. 저번에 조정훈 감독이랑 미팅했었잖아. 그건?”
‘아니’의 뮤직비디오 감독인 조정훈.
얼마 전 가로 엔터는 그와 미팅을 가졌었다. 주제는 다음 앨범과 타이틀곡의 주제, 세계관, 비주얼 등이었다.
그곳에서 조정훈이 폭탄 발언을 퍼뜨렸었다.
“그때 저한테 스토리보드를 일임해주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사알짝 뭘 넣어 봤는데…….”
‘아니’의 뮤비 끝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각 멤버가 뒤로 돌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이다. 그리고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가 각각의 멤버들을 절반쯤 가리며, 뮤비가 끝이 난다.
그저 영상미를 위해 넣은 장면이구나 싶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지 않아요? 주제가 각국의 혁명인데, 왜 동양인 여자애가 그 혁명을 이끄는 거죠? 아름이 4·19혁명 빼고요.”
그 질문에 홍규헌은 당황했었다.
그야, 주인공이 소녀연맹 멤버들이니까 어쩔 수 없잖은가.
애초에 컨셉이 각국의 혁명이었던 것도, 깊은 고민 없이 멤버들의 의견을 받은 데 불과했다.
“이건 그냥 제 뇌피셜인데요. 아직 구체적인 건 아니에요. 뭔가…… 인류를 해하려는 거대한 악의 세력이 있고.”
“…….”
“소녀연맹이 그걸 막으려는 거죠. 그 악의 세력의 목적은 인류가 발전하는 걸 막는 거예요. 계속 왕정이나 독재를 유지하게 만들고, 인류의 자유 정신을 막는 거요.”
“…….”
“그 악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멤버들이 연맹을 만든 거죠! 과거로 돌아가 원래 일어났어야 할 혁명을 멤버들이 일으키는 거예요!”
그 미팅에 참석했던 가로 엔터 직원들 모두, 신난 조정훈에게 아무런 말도 못 했다.
회사도 모르는 사이에 그룹의 세계관이 생겨났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악의 세력이라고 하니까 좀 오글거리기도 하는데, 제 생각은 그랬어요.”
“그래서…… 뮤비 마지막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게, 그 악의 세력이라고요?”
“네, 대충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만약 다음 뮤비도 맡겨주시면 이런 걸 구상해봤거든요.”
조정훈 감독은 노트북을 돌려 여러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김형선 실장님네 스타일리스트 팀이랑 약간 협의를 거쳐 얻은 레퍼런스예요.”
군(軍)의 장교복이었다.
탁한 청색의 트렌치코트에 각이 잡힌 모자. 그 안으로는 단정한 장교복이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싸우는 거예요. 자유와 저항이란 골격을 유지하는 거죠. 이번에는 ‘저항’에 초점을 맞춰서요.”
홍규헌은 시선을 떨어뜨리고 수첩에 메모했다.
“그렇군요.”
수첩에 메모되는 건 무의미한 낙서였다.
그냥 그의 말을 알아듣는 척했을 뿐이었다.
소녀연맹 세계관에 관한 회의는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드디어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왔다.
손혜빈의 다음 앨범 컨셉 발언이 그 포문을 열었다.
“뮤비 세계관 말씀하시는 거죠?”
“어. 나는 박 이사 말에 동감했거든. 미니 앨범으로 팬덤을 다져야 해. ‘우리 믿고 따라와도 된다’고 팬들한테 말해줘야지. 데뷔 컨셉에 끌려서 팬이 되어준 분들 말이야.”
“일리가 있네요. 확실히 컨셉 배반은 팬 이탈을 불러오기도 하니까요.”
“그렇지? 갑자기 사랑 노래로 가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싶네.”
“그럼 컨셉을 나누죠.”
“컨셉을 나눠?”
“비주얼과 곡 컨셉을 나눠요. 뮤비와 비주얼로 보이는 컨셉은 데뷔 때의 소녀연맹과 맞추고요. 곡은 사랑으로 가는 거죠. 컨셉의 분리가 없는 경우도 아니거든요.”
손혜빈은 보이그룹 뮤비를 하나 소개했다.
곡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뮤비의 내용은 방황하는 소년기의 아픔을 말하고 있었다.
음방 1위도 한 적 있던 곡이라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귀로는 대중을 매혹하고! 눈으로는 팬들을 만족시킨다! 어때요?”
“누나 왜 이렇게 사랑에 꽂혔어?”
“하양이 때문에.”
“어?”
“하양이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 예쁜 애가 사랑을 노래한다고! 나, 나, 진짜 숨이 턱 막히고 정신 나갈 뻔했잖아. 딴 애들도 그러는 거 내 눈으로 보고 죽을 거야.”
어쨌거나, 손혜빈의 주장은 확고했다.
‘이것도 팬의 마음으로 생각해보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하긴, 장하양 개인곡이 이미지 변신에 큰 영향을 주긴 했지.’
소녀연맹이 소화할 수 있는 범위를 늘렸다고 해야 할까.
그만큼 장하양의 개인곡은 그녀의 개성이 드러내면서도, 가로 엔터가 새로운 도전을 열망하도록 만들었다.
홍규헌은 고민하며 볼펜을 똑딱였다.
“다른 사람들 의견은 어때?”
민경섭과 한구인은 중도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곡이 나와야 알 수 있겠단 것이다.
“그래. 그럼 정 PD 음악 작업 진행되면 다시 논의해보자. 다음으로는, 박 이사.”
“네.”
“팬미팅 준비는?”
“계속 업체랑 논의 중이에요. 아라 들어올 시기에 윤곽 다 갖출 것 같아요.”
“상황판에 붙여진 거 말고 내가 알아야 할 거 있어?”
“없습니다.”
“그래.”
회의가 끝나고 직원들은 저마다 무리를 이루어 흩어졌다.
“누나, 사랑 노래가 그렇게 끌려? 하양이 곡이 좋긴 했나 보다.”
“그것도 있는데, 아무래도 현재 소녀연맹 컨셉엔 한계가 명확해 보이거든.”
자유와 저항이라는 키워드를 건 채, 소녀연맹은 데뷔했다.
그 독보적인 컨셉은 가로 엔터가 예상치 못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상상 이상의 팬을 끌어들였다.
허나, 손혜빈은 그 독보적인 이미지가 무기임과 동시에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돌 메이킹이 결판나는 건 주요 앨범이 세 개가 나올 시점. 시간으로 따지면 3년. 그 3년째에 생사의 기로를 나눈다면, 그때 소녀연맹이 가져야 할 음악적 풀은 훨씬 넓어야 해.”
3년째, 가로 엔터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 한다.
그때의 앨범에서 기대치만큼의 팬을 유입시키지 못한다면, 그 이상의 상승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때 유입되는 분들은 우리 애들의 곡을 전부 들어볼 거야. 그때를 위해서 곡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해. 네 말대로 팬덤을 다지는 것도 좋겠지만, 미리 승부를 가려보는 것도 좋겠지.”
“음…….”
성필은 조정훈이 보여주었던 비주얼 레퍼런스를 떠올렸다.
멋들어진 장교복.
거기에 사랑 노래를 부른다, 라…….
‘매치가 전혀 안 돼.’
굳이 실행한다면 작사가와 뮤비 감독의 역량이 중요할 것이다.
“잠깐 하양이 보고 갈래?”
손혜빈은 휴게실에서 랩을 연습하던 장하양을 보자마자 포옹했다.
“하양아. 언니 좋아해? 사랑해?”
“사랑해요 언니.”
“귀여워어어어!”
대체 평소에 얼마나 저런 질문을 자주 했으면……. 애가 그냥 기계처럼 대답해버리네.
“하양아, 감정노동 안 해도 돼. 싫으면 그냥 누나한테 저리 가라고 말해.”
“아하하. 아니에요. 저는 회사 분들 다 사랑해요.”
“성필아 봤지? 하양이가 사랑 노래 부르면 누가 싫어하겠어?”
손혜빈은 장하양을 잔뜩 쓰다듬은 뒤, 정지음을 닦달하러 지하로 내려갔다.
“누나가 많이 주책이지? 용서해주라.”
“아니에요. 저도 언니 좋아해요. 정말 동생처럼 대해주시거든요.”
그럼 다행이고.
과거 성필이 손혜빈의 매니저였을 시절, 그녀는 정말 성필을 동생처럼 대해주었다.
친근하단 의미의 동생이 아니라, 애처럼 대했단 뜻이었다.
어찌나 사람을 잘 놀리던지…….
그래서 손혜빈이 장하양을 대하는 것을 볼 때 내심 걱정했다. 장하양이 손혜빈을 꺼리진 않을까 싶어서.
“이사님. 이전에 주셨던 선물이요. 그거 따로 플레이어가 필요한 거죠?”
“……아.”
성필은 장하양에게 뮤지컬과 연극의 블루레이 디스크를 선물해주었다.
“맞다. 숙소에 블루레이 재생기가 없겠구나. 미안 미안. 그걸 생각 못 했네.”
“덕분에 저만 이사님이 준 선물 못 써보고 있단 말이에요.”
“미안. 음, 나중에 내가…….”
“이사님 집에는 플레이어가 있는 거죠?”
“어, 있지.”
“그럼 휴일에 이사님 집 가도 돼요?”
성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순간일 뿐이었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순발력을 발휘해서 즉각 대답했다.
“뭘 내 집까지 오려고 그래.”
“그럼 저는 어디서 봐요?”
“…….”
“빨리 보고 싶은데. 아, 그러네요. 휴일이니까 이사님도 쉬고 싶으시겠네요. 죄송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성필은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편하게 대해주는 건 물론 기쁘지만, 휴일에 이성의 집으로 찾아간다는 건…….
‘아니지. 하양이가 나를 이성이라고 생각할 리가 없지. 10살 차이잖아.’
그래도, 성필은 양심의 가책이 생겼다.
“잠시만.”
성필은 사장실로 올라가 홍규헌에게 물었다.
모든 내막까지 포함하여.
“그래서 하양이가 휴일에 저희 집에 온대요. 괜찮을까요?”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회사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도 있잖아요.”
“리카가 가겠다고 했으면 두말없이 받아줬을 거면서. 박 이사 눈에도 장하양이 다르게 보이긴 하는구나?”
“아니…….”
“거리감이 다른 건 이해해. 말로는 다 똑같이 좋다고 해도, 대하는 방법은 다른 거지. 그 건은 박 이사 좋을 대로 해.”
홍규헌의 허락이 떨어졌다.
“단, 술 마시지 말고.”
“그거야 당연하죠.”
“내가 진짜, 진짜 매우 엄청 박 이사를 믿어서 허락해주는 거야. 집에 여자 들여놨다고 눈 돌아가서…….”
“제가 그런 인간이었으면 사장님이 제 몸살 간호하러 오셨을 때 뭔 일이 있었겠죠. 그리고 상대가 하양이잖아요.”
“……씁, 갑자기 불안하네.”
“왜요?! 서, 설마 저 잠들었을 때 뭐 잠꼬대로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요……?”
“흠.”
홍규헌이 고민하는 게, 성필에겐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네 집에 있는 플레이어 숙소에 주면 안 돼?”
“그거 200만 원이에요! 저 그걸로 주말마다 아이돌 콘서트 본다고요!”
“이제 박 이사가 주말마다 애들 숙소에 가면 되겠네.”
“…….”
성필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지켜냈다.
“사장님이 해도 된대.”
“이런 것도 사장님 허락이 필요해요?”
“특수한 상황이잖아. 역으로 내가 휴일에 숙소 놀러 간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아?”
“……그런가요.”
장하양이 순수한 웃음을 보였다.
그것을 보니, 해맑은 애한테 괜히 혼자 호들갑 떨었단 생각이 들었다.
‘나를 믿어서 부탁한 걸 텐데.’
“그럼 이번 주 일요일에 갈게요.”
“위치는 알지?”
“예전에 이사님 아프셨을 때 가봤잖아요.”
“너희 ‘아니’ 녹음할 때구나. 혹시 길 잃으면 연락해.”
“네.”
* * *
요즘 소녀연맹 멤버들은 신경 거슬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물론 미니 앨범 준비가 가장 신경 쓰이지만, 이 문제는 더 일상적인 것이었다.
“진저 대단하더라.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연습하는데 지치질 않아. 그렇다고 연습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팬들을 위해 완벽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하더라.”
“……대단하네요.”
성필이 케이어스의 진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사인을 받았고, 어떤 대화를 했고, 진저가 얼마나 올곧고, 뭐라 뭐라 뭐라 뭐라.
자주 진저 이야기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처음 해외여행을 경험한 사람이, 며칠 동안은 해외여행 이야기만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들어줄 만도 했지만…….
“리카는 진저랑 친했어?”
“진저는 한국말 못 했어요. 저도 중국말 못 했고요. 거의 얘기 못 했어요.”
“아쉽네.”
“…….”
그래, 다른 사람이었다면 잠자코 수십 번이고 들어줬을 테지만……!
성필이 케이어스를 칭찬하는 건 듣기가 힘들었다. 가끔 나오는 말이더라도, 멤버들은 참기 어려웠다.
소녀연맹의 라이벌(소녀연맹 멤버들의 개인적인 의견)인 케이어스 아닌가!
그 성격 좋은 리카마저도, 성필의 진저 이야기는 참기 힘들어했다.
기승전진저 칭찬으로 끝나니까 말이다.
“아라 얘기랑 다르지 않아?”
조아라도 가끔 멤버들에게 전화를 해왔다.
특히 성필과 함께 있던 3주 동안은 전화가 더 잦았다.
그때마다 진저란 애랑 어색하니, 싸가지가 없니 하는 얘기를 했었다.
“요즘은 전화가 안 와서 모르겠네.”
“혹시…….”
장하양이 가설을 냈다.
“진저란 분, 회사 직원들한테만 친절한 거 아닐까요? 아라는 경쟁자니까 본 모습이 나오는 거고요.”
“그럴듯하네요. 불쌍한 팀장님은 그런 것도 모르고 뱀한테 홀려선.”
“지, 진저가 그런 애는 아닌데…….”
리카가 얇디얇은 실드를 펼쳤다. 그녀도 진저와 함께 연습생 생활을 했던 만큼, 친하진 않더라도 애정이 있었다.
“이건 진짜 팀장님한테 말해야 해요. 너무 신경이 없으시지 않아요? 뭔 시도 때도 없이 진저 진저 진저 진저. 노이로제 걸리겠다고요.”
참고로 그날은 성필이 진저 이야기 따위 하지도 않았었다.
그 전날도.
단지 멤버들이 오래 기억하고 있던 터라, 성필이 자주 말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일부러 질투하게 만들려는 거 아닐까요! 아타시(제)가 테레비에서 봤어요! 그런 남자들이 있대요!”
“음…….”
“하양 언니도 동의하시나요!”
“음?”
장하양은 다시 유선 채널을 끊어달라고 부탁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리카가 텔레비전에서 뭐만 보면 철석같이 믿어버리니, 언니로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멤버들이 점점 진저와 성필의 관계에 대한 피해망상을 키우고 있던 와중.
오랜만에 조아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라쨩! 오랜만이야!”
[리카 잘 있었어?]
“응 응 응 응! 아라쨩 나 보고 싶지? 미안해. 당장 비행기 타고 가고 싶은데……. 아라쨩 외로워서 어떡해…….”
[안 외로운데?]
“비겁자! 아타시(나)는 아라쨩이 없어서 이렇게 괴로운데! 그런데 이 번호 나니(뭐야)? 새로 샀어?”
[아니. 진저 꺼 빌렸어.]
진저.
그 단어에 멤버들의 오감이 집중됐다.
“진저……?”
[응. 내가 폰이 없어서 요즘 자주 빌리거든. 근데 걔도 매니저한테 받아야 해서 그렇게 자주는 못 쓰고.]
“아라쨩 진저랑 친해졌어?”
[뭐, 같이 있다 보니까.]
“아라쨩 예전엔 진저 보고 싸가지 없다며!”
[야 리카 내가 언제! 아, 아니야 진저. 아니야. 나 그런 말 한 적 없……. 그, 네가 나한테 좀 쌀쌀맞게 군 건 사실이잖…… 미안.]
조아라는 한동안 진저에게 갈굼을 당하는지 ‘미안’이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진저 좋은 애야.]
어떻게 사람이 몇 주 만에 평가가 바뀌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결국, 오랜만에 조아라와 통화했으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조아라마저도 진저에게 홀려버린 것이다.
다음 날이 밝았다.
신아름은 회사에서 나설 준비를 마쳤다. 그때 성필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진…….”
“아 진짜 팀장님 진저 얘기 좀 그만해요! 귀에 딱지 앉겠다구요! 그렇게 진저가 좋으면 KS 엔터 가세요! 저 데리고요!”
“어, 아니, 진짜 옷 잘 입었다고…….”
신아름은 성필이 선물해준 구제 옷들로 단장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언제 목소리를 높였냐는 듯, 자신의 자태를 자랑하려 한 바퀴 돌고 포즈까지 잡았다.
“맞죠? 예쁘죠?”
“응, 예쁘다. 촬영 잘하고 와. 경섭아, 아름이 잘 부탁해.”
“맡겨둬요 형.”
오늘 신아름은 아이튜브 영상을 촬영하러 간다.
KS 엔터가 제안했던 콘텐츠, ‘죽고 못 사는 친구’의 촬영이다.
신아름과 김민주가 여러 종목으로 경쟁하며 승부를 가른다.
“이틀 뒤가 아육금 방영이니까, 오늘 촬영 끝내고 와서 연휴 동안 푹 쉬자. 아름이 파이팅!”
“넵, 팀장님도 파이팅!”
신아름은 헤헤 웃으며 즐겁게 회사를 나섰다.
설 연휴 그 마지막 날, 성필은 매년 신아름과 함께 그녀의 본가를 찾았다.
신아름은 그날이 기대됐다.
오늘은 비록 김민주라는 달갑지 않은 얼굴을 보러 가는 거지만, 이 일만 마치면 연휴니까.
* * *
KS 엔터 내부의 콘텐츠 제작팀.
그들은 촬영 장비를 점검하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저 둘이 진짜 친구예요?”
“그렇다던데…….”
오늘의 주인공.
소녀연맹 신아름과 케이어스 김민주.
둘은 멀찍이 떨어져서 서로 할 일을 했다.
신아름은 핸드폰을 만지작댔고, 김민주는 메이크업 스탭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도저히 친구로 안 보인다.
“촬영 시작할게요.”
사람이 북적거리는 길거리, 김민주가 서 있다.
스태프가 말한다.
“오늘 반가운 얼굴을 만날 건데요. 기대되세요?”
“네!”
김민주가 싱그럽게 웃었다.
“서로 연습생 생활이 바빠서 많이 못 만났거든요. 근데 이렇게 놀 기회도 생기구. 우리 제작팀 최고!”
애교 넘치는 김민주의 말에 스태프들 사이로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스태프 중 하나가 신호를 주었다.
신아름이 터덜터덜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도저히 반가워 보이지 않는다.
‘진짜 친구 아닌가……?’
그때, 신아름이 속도를 높였다.
“민주야아아아!”
신아름이 김민주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그녀를 태클하듯이 안았다.
“크흡!”
김민주는 그 힘을 받아내지 못하고 몇 걸음 물러났다가, 곧 신아름을 팔로 꽉 감쌌다.
베어 허그다.
“끅…….”
“아름아아아! 너어어어무 오랜만이다아아!”
둘은 서로를 부서질 듯이 껴안았다.
소녀들의 우정을 보며 훈훈한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그럭저럭 토크를 따낸 뒤, 첫 번째 경쟁 장소로 향했다.
오락실, 자동차의 내부를 그럴듯하게 구현한 레이싱 게임이 첫 번째 종목이었다.
신아름이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죽어!”
쾅! 화면 안에 비치는 신아름의 차가 김민주의 것을 들이박았다.
“이이익……!”
“죽어! 부서져! 터져!”
“이거 레이싱 게임이야!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러면 우리 둘 다 시간 내에 골인 못 하……!”
“아하하하핰!”
결국, 신아름이 김민주의 차를 반파시키는 것으로 게임이 끝났다.
신아름은 후련하게 자리에서 내려왔다.
“제가 이긴 거죠?”
제작진이 침묵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이긴 거잖아! 누가 봐도 네 반칙패야! 너 학교에서 스포츠 배울 때 잤어? 스포츠 정신 몰라?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어?”
“뭐어? 그대로 달렸어도 내가 이겼겠는데? 네 차 완전 개박살 났잖아 하하하핰!”
김민주의 이마에 빠직하고 힘줄이 돋았다.
“……다시 해.”
제작진은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친구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