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네? 막날인데 좀 놀아요.”
“나 클럽 가야 하니까 네 숙소로 돌아가라고. 막날이니까 나도 놀아야지.”
“와아, 진짜 나쁘다. 나예요 클럽이에요?”
“클럽.”
“남자는 다 성욕의 노예라더니…….”
“어이없다 너. 클럽이 그런 덴 줄 알아? 순수하게 세계 음악 시장의 트렌드를 파악하려고…….”
“아, 나 또 불안증 올 거 같애. 일주일 더 있으면 안 돼요?”
“동정심으로 사람 조종하지 마.”
“치.”
조아라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 진짜 가요?”
“뭐 우리 놀 것도 없잖아. 할 게 있어?”
“내가 또 조아라 아님까. 다 준비해왔죠.”
조아라가 실실 웃으면서 작은 박스를 꺼냈다.
“우봉고!”
보드게임이다.
여러 종류의 도형을 이용해 정해진 칸을 채우는 것으로, 순발력과 공간지각력이 중요하다.
“요 앞에 팔더라고요. 어허, 반론은 잠시 참아요. 애들이 가지고 노는 것처럼 생기긴 했는데, 막상 해보면 진짜 재밌다니까요?”
조아라도 리카가 가르쳐줘서 했는데, 그날 3시간 동안 우봉고만 했다.
특유의 경쟁심과 쫄깃함이 대단하다.
“재밌겠죠?”
“……어, 그래. 그거 하자.”
“반응이 희한하네. 뭔가 아련한 거 같기도 하고. 왜요. 전 여친이랑 보드게임 카페 가서 이거 했었어요?”
“그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미안해지잖아요.”
둘은 우봉고를 했다.
조아라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내가 리카랑 이걸 얼마나 많이 했는데. 설마 지겠어?’
한 판이 총 8라운드로 진행되는 게임이다.
결과는 성필의 승리였다.
“아저씨 뭔데! 칸을 다 외워두고 있기라도 해요? 어떻게 나오자마자 바로 다 맞추는데요!”
“글쎄다. 내 IQ가 150쯤 돼서 그럴까?”
“진짜요?!”
“아니. 그냥 이길 방법이 눈에 보이던데?”
“사실대로 말해요. 이거 되게 많이 해봤죠?”
“별로 안 했어.”
이번 생에서는 아예 한 적도 없다.
그렇게 세 판을 이어갔다.
“사기…… 치지…… 말라고요…….”
조아라는 분함을 못 이기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딴 거 해요!”
“그래. 뭐 할까?”
둘은 마트로 가서 다른 보드게임을 샀다.
“우봉고 3D!”
3판 뒤.
“이길 거야. 이길 거야. 이번엔 내가 이겨. 이길 거라고…….”
조아라의 눈에 광기가 맺혔다.
그래도 성필은 봐주진 않았다.
봐주는 것을 눈치챈 순간, 조아라는 맹수처럼 성필의 목을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0시가 넘은 시간, 드디어 조아라가 한 번 승리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이제 안 해요. 아저씨 개못하잖아!”
“…….”
조아라는 인디언춤까지 추면서 성필을 능욕했다. 처음엔 웃으면서 받아넘기던 성필도 슬슬 빡치기 시작했다.
“딴 겜으로 더해.”
“응 절대 안 해. 아저씨 개못해서 하기 싫거든요?”
성필의 방은 밤이 깊어가도록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 * *
새벽부터 숙소를 나서니 케빈이 기다리고 있었다.
“Oh, Mr. Park…….”
“한국어로 하세요.”
“박이랑 함께 일해서 즐거웠어요.”
케빈은 조아라의 가이드로 고용됐으나, 차를 빌려줄 때를 빼곤 그다지 얼굴도 못 봤다.
성필이 계속 머무르며 조아라를 케어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 남은 3주 동안은 그가 조아라와 있어야 한다. 주로 조아라의 요청에 따라 운전을 해줄 것이다.
“인사하려고 온 거예요?”
“공항까지 태워주려고요.”
“그냥 택시 타도 되는데.”
“괜찮. 괜찮. 찮.”
“뭐라는 거예요.”
성필은 그의 차를 타고 모텔 주차장을 벗어났다.
이른 새벽이다.
이제는 꽤 정이 들어버린 거리가 햇볕에 물드는 것을 보며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데.
“스탑 스탑!”
“오, 데자뷔. 또 아이돌이 될 인재라도 발견한 겁니까?”
성필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는 진저가 있었다.
“진저 씨?”
“오, 오늘 간다고 왜 말 안 한 검미까!”
“네?”
그걸 말해야 하나?
성필의 당황한 표정을 본 진저는 사납게 그를 쏘아보았다.
“오고 갈 때 인사하는 건 기본임미다!”
“아, 그런가요.”
진저는 어디서 오늘 성필이 떠난단 이야기를 들었을까.
아마 신태웅이지 싶었다.
“설마 인사하려고 오신 거예요?!”
성필은 감격에 겨워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성공한 덕후란 걸까?
세상에, 진저의 배웅을 받다니…….
“아님미다. 예고하러 왔습니다.”
“예고?”
살인 예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감사할 검미다.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으십시오.”
“감사요? 어떤…….”
“박! 이제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아.”
성필은 진저와 케빈을 번갈아 보다가, 진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비행기 시간 다 돼서요. 그, 한국에서 또 봐요! 이렇게 진저 씨랑 직접 대화도 나누고 해서 정말 즐거웠어요. 응원할게요!”
진저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술을 꾹 물더니 성필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했다.
“젠따오 니 워 예 헌 까오씽(저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이허우 짜이찌엔(나중에 또 만나요). 시왕…… 징창 지안 다오 니(자주 만나면…… 좋겠습니다).”
성필이 차에 타자마자 케빈은 쏜살처럼 운전했다. 성필은 차 뒤에 난 창으로 진저를 보았다.
진저는 양팔을 흔들면서 외쳤다.
“셰셰 니(고맙습니다)!”
* * *
성필이 한국으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이 가로 엔터의 주간 회의일이었다.
가로 엔터로부터 업무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있던 성필이었기에 즉시 회의에 참여해도 문제가 없었다.
단 하나의 사안만을 제외하고.
[형. 하양이 개인곡 들어보고 회의 참여하셔야 하니까, 아침에 좀 일찍 오세요.]
정지음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단순히 음원을 받아 들어선 안 됐다.
작업실에 비치된 전문적인 장비로 장하양의 곡을 듣고 평가하는 게 필요했다.
아직 멤버들도 회사로 오지 않은 이른 아침, 성필은 정지음의 작업실을 찾았다.
“형 잘 지내셨어요? 때깔이 더 좋아지셨네.”
“넌 사람이 갈수록 훤칠해지냐.”
“다 회사가 잘해줘서 그런 거죠.”
심심한 인사를 마치고, 성필과 정지음이 각각 자리를 잡았다.
미니 앨범에는 멤버마다 개인곡을 넣기로 했다. 드디어 그 첫 번째 결과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 퓨처 베이스네. 여기에 발라드 감성을 섞는 거야? 특이한 조합이네.”
“네. 그리고 이게 하양이가 쓴 가사인데요.”
“빨리 빨리!”
장하양이 직접 작사를 하다니.
‘하양이가 많이 성장했구나.’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성필은 정지음에게서 가사지(紙)를 받아 읽었다.
[제목: 에프타프(묘비명)
내가 죽으면 묘비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주세요
닦아줄 필요 없어요
당신의 이름만 적어주세요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당신이 왜 사랑했었는지
알고 싶어요
그거면 돼요
내가 죽으면 묘비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주세…….]
성필은 가사를 덮었다.
“하하…….”
이게 진짜냐는 성필의 시선에, 정지음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성필은 두려움에 떨며 다시 가사를 보았다.
‘이게 20대의 사랑 노래? 20대의 감성?’
하양아 대체 얼마나 성장한 거야?
정신이 너무 성장해서 노년이 돼버린 거야……?
* * *
성필이 미국에 있던 3주 동안, 미니 앨범 계획은 꽤 진행되어 있었다.
성필은 간단하게 가로 엔터 사람들과 인사를 마치고 곧장 회의에 들어갔다.
“제가 정말 놀랐던 점은.”
한구인이 입을 열었다.
“하양 씨가 에피타프(Epitaph)라는 단어를 알고 있단 겁니다. 흔히 쓰이는 단어가 아니고 저도 가르쳐드린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영어를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계신 게 아닐까요?”
장하양 개인 곡의 가칭(假稱)이 ‘에피타프’였다.
“그거 저 때문일 거예요.”
“박 이사님이요?”
“음악사 시간 때 킹 크림슨이란 밴드의 ‘에피타프’를 들려준 적이 있거든요. 프로그레시브 록 설명할 때요.”
“그렇군요…….”
한구인은 아쉬운 투였다.
장하양이 스스로 영어를 공부하길 그토록 바랐던 것일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홍규헌이 회의의 방향을 바로잡았다.
“중요한 건 장하양이 쓴 가사…… 잠깐만. 박 이사, 혹시 그 밴드의 에피타프랑 장하양이 쓴 가사랑 비슷해? 비슷한 내용이야?”
“아니요. 전혀 달라요.”
“아, 다행이네. 난 또 표절한 줄 알았잖아.”
홍규헌은 안심한 뒤, 테이블 위에 놓인 에피타프의 가사지를 보았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로, 수십 번이나 읽어본 가사를 다시 읽었다.
아무리 봐도 22살의 머리에서 나올 가사가 아니었다.
“이거 사랑 노래는 맞지?”
“그런…… 거 같긴 한데요.”
“하아, 죽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묘비명으로 적어달라니. 평소에 뭔 생각을 하면 이런 가사가 튀어나와.”
대중들은 아이돌의 앨범이 나와도 타이틀곡만 듣고 끝이다.
하지만 팬들은 수록곡까지 들어본다.
수록곡의 영향력이 크지는 않으나, 그룹의 색깔과 영 다른 것을 내놓으면 또 문제다.
“이게 우리 애들한테 어울리나? 장하양한테는?”
가사는 가수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2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사랑 노래를, 산전수전 다 겪은 40대의 발라드 가수가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듣는 사람이 몰입할 수 없을뿐더러, 가수조차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그런데 장하양의 가사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이 쓴 것 같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의견을 낸 건 민경섭이었다.
“마음을 찌르르 울리는 게 있지 않아요?”
“어, 너도 느꼈어?”
“형도?”
성필과 민경섭이 하이파이브했다.
“뭔데.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거야?”
“형이 먼저 말할래?”
“아냐. 네가 말해.”
“이 가사요, 일단 제가 해석하기론 짝사랑 노래거든요. 그것도 엄청 애절한 짝사랑이요.”
아마도 가사의 화자(話者)는 짝사랑 상대에게 거절당하거나, 혹은 마음을 전하는 데 실패한 듯했다.
“이 절절한 사랑이 가슴을 울린달까……. 하양이가 불러주면 파괴력이 엄청날 거 같아요. 죽어서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단 거잖아요.”
“그리고요.”
성필이 차례를 받았다.
“사랑에 실패하고 슬퍼하는 노래는 많잖아요. 그런데 이건 사랑에 실패한 다음의 대응이 특이해요. 죽기 전까지 사랑하고, 그다음에는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한 사람을 보고 싶다고 하잖아요.”
왜 내가 거절당했는지.
왜 나 말고 저 사람을 선택했는지.
저 사람이 나보다 뭐가 그리 잘났는지.
저 사람은 나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줬는지.
죽은 뒤라도 보고 싶고, 알고 싶다.
“개성이 드러나요. 매운맛 사랑 노래죠.”
“매운맛을 넘어서 소름 끼친다 야. 박 이사, 음악은 공감이고 공유라며. 이런 가사에 누가 공감해?”
홍규헌이 가사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니요, 사장님.”
갑자기 손혜빈의 두 눈이 빛났다.
“이건 공감을 바라는 가사가 아니에요.”
“그러면?”
“장하양이란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가사라고요! 벌써 몰입되지 않으세요?!”
“……손 PD 오타쿠 같아.”
그 뒤, 홍규헌은 거의 발광하듯 가사의 사랑스러움을 설명하는 손혜빈에게 시달려야 했다.
‘오타쿠’란 단어 하나 때문에.
“……그래서 뮤비 길이를 이례적으로 8분 정도로 하고, 스토리와 세계관 설명까지 곁들이면서! 하양이가 마지막 장면에서 빛 화아악! 거리는 곳에 등 돌리면서! 웃으면서 사라지고!”
“알겠다고…….”
손혜빈은 외부인을 본 경비견처럼 절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자, 여기까지가 제 의견이에요. 제 과몰입이 조금 이해가 가세요?”
“나 귀에서 피 날 거 같아.”
“이 정도는 말해야 오타쿠죠.”
“의외로 다들 반응이 괜찮네…….”
홍규헌은 정말 의외인 듯했다.
처음 가사를 받아보곤 ‘장하양 얘가 요즘 많이 힘든가?’라며 걱정까지 했었는데.
“정 PD. 이거 보컬 라인은 다 붙었지?”
“네.”
“장하양이 바로 부를 수 있어?”
“네. 몇 번 불러봤어요.”
“지금 다 같이 있을 때 한 번 들어보자.”
가로 엔터의 임원진 전원이 정지음의 작업실로 모여들었다.
작업실로 불려온 장하양은 부담스러운 듯 아하하 웃었다. 그녀는 마이크 앞에 서서 심호흡하고, 성필을 본 뒤 작게 손을 흔들었다.
성필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박 이사 아직 애들 안 만났어? 오늘 장하양 처음 본 거야?”
“네. 회사 오자마자 하양이 가사 받아보고 회의 들어왔잖아요.”
“신기하네. 공항 도착하자마자 애들 숙소로 쳐들어갈 줄 알았는데.”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정지음이 곡을 재생했다.
스피커로 아련한 기타 아르페지오(혹은 핑거링, 손가락으로 줄을 하나하나 튕기는 주법)가 들려왔다.
그것으로써 귀를 모은 뒤 피아노의 화음이 나타났다. 뒤늦게 드럼이 들어오고, 마침내 장하양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내가 죽으면 묘비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주세요
닦아줄 필요 없어요
당신의 이름만 적어주세요.”
그녀의 보컬에 모두가 놀랐다.
평소 그녀의 창법이 아니었다.
장하양은 가성(假聲)을 냈다.
무겁게 울렸던 장하양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애절하게 이어지는 흐느낌과 같은 것만이 들려온다.
그와 함께 기타와 피아노, 드럼뿐이던 사운드에 전자 악기가 추가되어 점점 풍부해진다.
이 곡의 장르는 퓨처 베이스다. 그에 걸맞은 미디 사운드가 천천히 쌓여간다.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곡이 50초에 이르렀을 무렵, 하이라이트를 예고하듯 드럼이 빠른 박자로 치고 들어온다.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당신이 왜 사랑했었는지…….”
거기서 모든 반주가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장하양은 미소 지으며 검지를 홍규헌에게 향했다.
째깍, 시침 소리와 함께.
철컥, 총을 장전하는 소리.
그리고.
“알고 싶어요.”
장하양이 검지로 총을 쏘는 듯한 시늉을 하자, 총알이 발사되듯 모든 사운드가 터져 나온다.
일정한 템포에 따라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장하양은 미소를 머금고 계속 노래를 부른다.
“그거면 돼요
내가 죽으면 묘비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주세요.”
2절도 비슷한 가사로 진행되고, 곡은 브릿지에 이르렀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들어가기 전, 일정한 폼을 유지했던 가사와 멜로디가 변했다.
“어두운 흙을 넘어
당신이 보여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그 사람에게 했던 말 말고
당신을 보고 싶어
당신에게 듣고 싶어
차가운 흙을 넘어
따뜻한 너를 직접
아직도 너는 내 사랑이니까.”
경쾌하고 몽환적인 멜로디와 박자, 사운드와는 대비되는 어두운 가사.
장하양의 에피타프가 아쉬움을 남기며 잦아들었다.
“아.”
홍규헌이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까 장하양이 검지로 가리켰던 곳이었다.
“하양아.”
“네, 사장님.”
“아니, 언니.”
“……네?”
“나보다 멋지면 다 언니야. 언니가 너무 멋져서 심장이 뛰잖아요. 어떡할 거야, 책임져요.”
“네, 네……?”
“이걸 안 받아주네.”
홍규헌은 크흠, 목청을 가다듬곤 말했다.
“가사만 봤을 때보다 몇 배는 좋네. 역시 들어보고 결정해야 하는구나. 손 PD, 민 매니저, 박 이사. 가사 이상하다고 해서 미안해. 좋다, 이거. 앨범에 넣어도 되겠어.”
대답이 없었다.
홍규헌이 뒤로 돌아보니, 다들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뭐.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게 웃겨? 내가 농담한 게 그렇게 웃기냐?”
“아뇨, 아뇨…… 크흠. 하양아. 사장님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아, 네.”
장하양이 다가와 홍규헌을 안았다. 이어서 홍규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0cm의 키 차이로, 홍규헌은 장하양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게 되어버렸다.
“규헌아, 언니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응, 책임져줄게요.”
“…….”
이젠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다들 감히 홍규헌을 쳐다보지는 못하고 웃음만 터뜨렸다.
* * *
장하양이 연습실로 올라가기 전, 성필은 휴게실에서 그녀와 오랜 회포를 풀었다.
“가성 쓰는 법은 설하한테 배웠어?”
“네. 제가 언니한테 가사 보여드렸더니 가성으로 부르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해봤는데…… 아직 부족해서 이상하게 들리진 않을까 걱정이네요.”
“아냐 아냐. 사장님 표정 못 봤어? 완전 너한테 홀리셨잖아.”
“저한테 안기시고요?”
“……어, 그것도 있긴 한데. 네 노래 듣고 지으신 표정 말한 거야.”
성필은 내심 장하양이 이번 앨범에 랩을 담길 바랐으나, 그녀가 택한 건 노래였다.
하긴 랩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다.
스킬적인 부분이 많이 필요한 랩을 쓰는 것보다는,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노래 가사가 접근성이 높겠지.
“아하하, 그럼 좋겠네요. 이사님도 좋으셨어요?”
“응. 사실 네 가사 처음 봤을 땐 많이 놀랐거든. 어디서 영감 얻었어?”
“그냥요. 옛날부터 머릿속에 떠돌던 가사들이에요. 기회가 와서 직접 써본 거구요. 아하하, 부끄럽네요. 다음부터는 그냥 작사가님 거 받고 싶…….”
“너 엄청 잘 썼어! 엄청 좋아! 앞으로도 계속 가사 써줬으면 좋겠어!”
가사를 쓴다는 게 부끄러울 수 있다.
창작물을 평가받는단 거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성필은 장하양이 그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후일에는 능숙하게 본인의 생각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길 바랐다.
“그렇게…… 좋았나요?”
“응. 가사에서 캐릭터가 막 떠올라. 지고지순하고 일편단심한……. 물론 그런 사랑의 형태가 올바르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감정이입이 돼서 슬프기도 하고…….”
“올바르지 않아요?”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사랑이란 건, 듣기엔 좋아도 슬픈 거잖아.”
“그런가요.”
장하양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했다.
“클럽에 가셨다면서요.”
“뭐야. 누구한테 들었어.”
“민 매니저님이요. 좋은 만남은 있으셨나요?”
“아니. 정말 케빈 DJ 일하는 거 보러 간 거야. 케빈이 한국어 잘하는 게 케이팝 좋아해서 그런 거래. 전 여자친구가 케이팝 좋아했어서, 자기도 한국어 배웠대.”
“그렇구나. 사랑 때문에 언어를 배우다니, 대단하네요. 아라는 이제 괜찮아졌어요?”
“나 올 때는 정말 많이 나아졌…… 아, 미안. 내가 너무 오래 잡아뒀지? 미안. 연습하러 올라가 봐.”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냐. 미안.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계속 나 하고 싶은 얘기만 했네.”
“……정말 괜찮은데요.”
장하양은 성필의 성화에 못 이겨 멤버들이 있는 연습실로 올라갔다.
“언니!”
들어오자마자 리카가 거세게 반겨주었다.
“박 이사님은 언제 오시나요!”
“응? 오셨잖아.”
“저희 보러요!”
“음, 모르겠어. 직접 보러 가면 되지 않아?”
그건…… 안 된다.
* * *
리카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3주를 버텼다.
“너도 징하다. 어떻게 3주 동안 팀장님한테 전화 한 통을 안 해?”
부부 고민 상담 방송이 대체 뭐기에.
그곳에서 인간의 관계도 에너지를 쓰는 일이기에, 관계가 잘 유지되려면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리카는 그것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리카 넌 진짜 조심해야 해. 텔레비전도 이렇게 철석같이 믿는데, 나중에 사이비한테 걸리면 밑바닥까지 다 뜯기겠어.”
“아타시(나)는 지혜로워서 그런 덴 안 걸려!‘
“퍽이나 안 걸리겠다.”
오랜 인고의 시간.
그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
성필이 돌아왔다.
“리카, 오늘 좋은 일 있어?”
“오늘은 박 이사님이 돌아와요!”
“아, 그렇구나. 오늘이네. 그렇게 좋아?”
“네!”
리카는 장하양의 품에 안겨 방방 뛰었다.
아쉽게도, 성필은 회사로 오자마자 연습실을 찾지 않았다.
장하양이 개인곡을 들려주고 난 뒤에도, 연습실로는 오지 않았다.
“아 그냥 만나러 가라고! 뭘 기다리고 자빠졌어? 신경 거슬리니까 만나러 가서 깨지든가 안든가 해서 진정 좀 하라고!”
“3주나 참았는데 여기서 그만두란 말야? 호랑이도 그거 때문에 사람 못 됐잖아!”
“……리카 단군신화도 알아?”
“아타시(나)는 곰이야!”
리카는 연습실 구석에서 노트북을 만지작거렸다. 작곡 프로그램을 펼쳐놔도 집중이 잘 안 됐다.
왜 성필이 안 올까…….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가?
‘아냐! 박 이사님이랑 나는 친구잖아!’
그러니까 이 마음은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닐 터다.
점심시간, 리카는 축 늘어져서 1층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눈에 성필이 포착됐다.
그는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는 중이었다.
“이사…….”
성필을 부르려던 리카는 입술을 꾹 물었다.
먼저 부르는 게 아니라, 먼저 불리고 싶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게실로 식사하러 갔다.
‘보시겠지? 봤나? 봤겠지?’
성필이 일어났다.
‘봤다!’
그리고 회사 밖으로 나갔다.
“…….”
“리카 씨.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리카가 먹기엔 쑥은 좀 과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하양 씨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 쑥은 쓰지 않겠습니다.”
“저는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리카는 깨작깨작 쑥과 마늘 요리를 먹었다.
오후 연습을 하던 리카는 터덜터덜 1층으로 내려갔다. 물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아래에서 올라오던 성필과 마주쳤다.
“앗!”
이제 못 참겠다.
“이사님!”
“어, 리카. 많이 바빴나 봐. 내 전화를 한 통도 못 받으시고.”
성필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의 조각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