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조아라와 성필이 미국으로 떠난 지 1주일이 지났다.
홍규헌은 직원들을 불러모아 그에게 통화를 걸었다. 핸드폰은 스피커 모드로, 테이블 중앙에서 발신음을 지속적으로 흘려보냈다.
[~♬]
“얘 대기음이 우리 애들 곡이네. 수천 번 들었으면서 질리지도 않나.”
“사장님은 멤버분들의 곡이 질리십니까?!”
“……내가 잘못했다 그래.”
치익,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어, 박 이사. 일주일 동안 잘 지냈어? 지금 직원들 다 모여 있…….”
“노동자 대표 이사님! 저 좀 살려주세요! 일이 너무 많아요! 빨리 저희 권익을 보호해주세요!”
민경섭이 소리쳤다.
홍규헌이 냉혹하게 눈짓했다.
“처리해.”
“도와주, 우웁! 당신들 뭐야!”
정지음과 한구인이 민경섭을 붙잡고 입을 막았다.
“잠시 소란이 있었네.”
[경섭이 과로보다 더 큰 일이 있어요!]
“민 매니저 과로보다 더 큰 일?”
다들 핸드폰 주위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홍규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또 조아라가 없어졌어? 그거만큼 큰일이야?”
[제가 돌아간다고 하면 아라가 비 맞은 고양이랑 강아지를 합친 거 같은 눈동자로 올려다봐요! 저, 저는 어떡하면 좋죠?]
홍규헌이 피식 웃었다.
계속 타지에 있으니까 외롭긴 한가 보다.
안 하던 장난까지 전화로 하고 말이다.
“이제 됐으니까 그냥 돌아오…….”
“그건 어쩔 수 없군요.”
“그렇지. 아라가 그러면 남아 있어야지.”
“동의합니다.”
“만장일치. 박 이사님이 일주일 더 체류하는 걸로 결정됐습니다.”
[역시 다들 이해해주실 줄 알았어요!]
“…….”
홍규헌은 피곤하단 듯 이마를 짚었다.
“뭐어, 진짜야 농담이야? 조아라가 아직도 많이 힘들어해?”
성필의 말투도 진지하게 바뀌었다.
[제가 뭐 사러 없어지거나 하면 자꾸 저를 찾는 거 같아요.]
“‘같아요’는 뭐야?”
[저 돌아오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든요. 그런데 케빈이랑…….]
“케빈은 누군데?”
[아, 가이드요. 아라 맡아주기로 했던 사람이요. 케빈이랑 태웅 쌤이랑….]
“태웅 쌤은 누구고?”
[아, 진저 아시죠? 케이어스 진저. 걔도 지금 여기 와 있거든요.]
“뭐?”
[진저랑 같이 온 KS 엔터 사람이에요. 어쨌든, 케빈이랑 태웅 쌤이랑 칼 선생님이…….]
“칼은 누군데?”
[아라 가르치는 선생님이요. 여기는 일정 수준 이상 오른 선생님을 마스터라고 부르는데, 그럼 마스터 칼 님이네요. 어쨌든 케빈이랑 태웅 쌤이랑 마스터 칼 님이 그랬어요. 저 없어지면 아라가 자꾸 저 찾는다고요.]
“…….”
거 참, 먼 타지에 가서도 친구 잘 사귀고 다니는구만.
“분리불안 같은 거야?”
[부, 분리불안이라고 하면 아라가 강아지 같잖아요…….]
홍규헌은 잠시 스피커폰을 끄고 직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저라도 말 안 통하고 돈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땅에 몇 시간 동안 버려지면 아라처럼 될 거예요. 무섭죠.”
“그렇습니다. 아라 씨는 아직 어리시니까요. 댄스 학원, 가로 엔터가 세상의 전부셨을 겁니다. 어딘가에 홀로 선 경험이 없으신 분이죠.”
“좀 과한 거 같기도 한데……. 아티스트의 멘탈을 챙겨주는 것도 매니저의 업무니까요.”
“민 매니저가 그런 말 해도 돼?”
“앗!”
민경섭이 핸드폰 가까이 입을 가져갔다.
“노동자 대표 이사님! 저 좀 살려주세요! 일이 너무 많아요! 형이 없으니까 제 일이 더 많아지잖아요?!”
[너 뭐라는 거야. 스피커 모드 맞아? 더 가까이 와서 말해.]
홍규헌이 민경섭을 밀어내고 스피커 모드를 다시 켰다.
“그럼 일주일 더 보고 와. 너 없으니까 확실히 업무량이 많긴 하다.”
[죄송합니다……. 아라 상황 좋아지는 대로 돌아갈게요. 오늘 상담 한번 하고, 가능하다면 내일이라도 갈 거예요.]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말고. 근데 박 이사 거기서 뭐 해? 계속 조아라만 보고 있는 거야?”
[…….]
“뭐지. 왜 대답이 없어?”
[네, 네? 어, 그냥. 레퍼런스 찾기?]
“무슨 레퍼런스.”
[세계 음악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고, 패션 트렌드를 선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박 이사 클럽 가?”
[케, 케빈이. 케빈이 DJ래요. 신기하죠? 그래서 케빈이 클럽에 초대해줘서…….]
홍규헌은 머리가 아파서 전화를 껐다.
“이제 아침 회의 시작하자.”
“노동자 대표 이사 해임 불가능한가요?”
“직원 투표에서 과반수가 나오면 해임 가능하긴 한데.”
그날, 성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임당하고 다시금 선임됐다.
“그럼 오늘 주제는…….”
홍규헌이 보고서를 펼쳤다.
“멤버별 개인 곡 장르.”
미니 앨범에는 멤버들의 개인 곡이 들어가기로 계획됐다.
멤버들의 요구에 맞춰 편곡이 이뤄지고, 가능하다면 작사까지 멤버들에게 맡긴다.
물론 전문 작사가의 강의도 섭외해뒀다.
“어디 보자. 의외로 하양이가 발라드 하고 싶댔지. 정지음 PD가 준비한 것들 보면…….”
성필과 조아라가 없는 사이에도, 가로 엔터는 전진하고 있었다.
* * *
마스터 칼은 조아라와 진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느릿느릿하고 쉬운 영어를 구사했다.
고향의 억양도 최대한 절제하며, 표준적인 영어를 쓰려고 노력했다.
“개개 동작을 익히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실전만큼 좋은 게 없죠. 원래는 개인 과제를 생각했습니다만, 이왕 둘이니 듀오로 해봅시다.”
마스터 칼은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남녀 댄서가 함께 춘 춤이었다.
그것을 본 조아라는 감탄하고, 진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Prisoned me’라는 작품입니다. 애인에게 마음이 묶여,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여인의 비극을 표현한 작품이죠. 최후에는 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에너지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겁니다.”
마스터 칼은 어프렌티스(도제)를 불러, 방금의 작품을 시연해주었다.
“보셨습니까. 제가 손을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파트너가 그대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왼쪽으로 몸을 펼치면.”
파트너는 왼쪽으로 날아가듯 움직인다.
“마치 사슬이 묶인 것 같죠. 저는 이 사슬로 파트너를 조종합니다. 어려운 점은, 그 사슬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단 겁니다. 여러분은 완벽하게 숙련된 동작과 공간감으로 이 사슬의 존재를 표현해야 합니다.”
조아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조아라와 진저가 합을 맞췄다.
“스탑. 진저, 이 작품은 속박당하는 애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동작이 가장 많고 크죠. 그리고 그 동작이란 활기차기보단 힘이 없는 듯 느껴져야 합니다. 제 말을 이해하십니까?”
이렇게 격렬하게 움직이는데, 어떻게 힘이 없게 느껴지도록 하지?
그 의문을 마스터 칼이 해결해주었다. 그는 다시금 시연을 펼쳐, 그게 가능한 일임을 증명했다.
“힘이 빠진 것처럼, 이해하셨습니까? 신체적인 힘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애인의 구속에 몸과 마음도 모두 닳아서, 힘 자체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건 마음의 힘입니다.”
“……네.”
“다시 해보겠습니다.”
춤, 무용이란 인간의 감정을 신체로써 표현해내는 예술이다.
진저는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연습한 건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팬들을 매혹하기 위한, 그저 고도로 단련된 기계적 반복이었다.
그래서, 그걸 알았기 때문에.
‘뭐야 이게.’
지겹도록 흥미가 없었다.
* * *
밤 10시.
조아라와 진저는 마스터 칼이 가져다 준 야식을 먹고 자리를 정리했다.
“더 할 거죠?”
조아라가 자연스럽게 그리 물었다.
그야, 진저는 항상 조아라와 함께 새벽까지 연습했으니까. 심지어 조아라보다 더 오래 연습했다.
조아라는 그런 진저에게 존경심마저 품었다.
마치 장하양을 보았을 때처럼.
‘이런 애들이 성공하는 거구나.’
케이어스에 대해 품고 있던 방향 모를 자격지심도 점점 희석됐다.
진저의 노력을 보면 누구든 그러리라.
“……더 할 검미다.”
“네, 그럼 저 손 씻고 연습해요.”
둘은 파트너로서 춤을 추었다.
‘프리즌드 미’는 듀오 댄스였다. 둘의 합이 완벽히 맞아야 비로소 완성된다.
아이돌의 군무처럼.
아니, 그것보다 난이도가 높다.
단순히 동작의 일치만이 아닌, 감정마저 주고받아야 했으니까.
같은 감정이 아닌, 서로 다른 감정을 표현하며 통일성을 주어야 한다.
예술. 그 외엔 붙일 말이 없었다.
괜히 마스터 칼이 ‘작품’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다.
“하아, 하아.”
11시 30분. 조아라가 상쾌하게 땀을 닦았다.
진저는 벽에 등을 기대고 발목을 주무르는 중이었다.
조아라는 점점 진저가 좋아졌다.
누군가와 함께 합을 맞춰 춤을 춘다는 게 이토록 재밌는 건 줄 몰랐다.
조아라는 진저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재밌네요. 그쵸?”
발목을 매만지던 진저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재미?”
“네.”
진저는 입술을 찡그리며 조아라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조아라는 깜짝 놀랐다.
타인에게 이토록 적대적인 시선을 받은 건 처음이다.
“저는, 저는 재미 없슴미다.”
“……네?”
“저는!”
진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선 진저는 발목을 움찔 떨었다. 고통 때문인지, 그녀의 인상이 더 찌푸려졌다.
“저는 춤이나 노래 따위, 재밌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슴미다!”
조아라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표정이 굳었다.
춤이…… 재미없다고?
“그럼 왜…… 이렇게 늦게까지 연습하는 건데, 요……?”
“돈 때문인 게 당연하잖슴미까! 돈이 아니고야 어떤 미친 인간이 매일 이딴 식으로 산단 말임미까! 아침부터, 아침부터, 아침부터 노래, 연기, 춤, 운동, 유연성 단련, 노래, 연기, 춤, 운동, 노래, 연기, 춤, 노래, 연기, 춤! 이딴 거 인간의 삶이 아님미다!”
“…….”
“더 완벽해야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니까! 돈을 버니까! 재미? 이런 식으로 살아서 재밌고 행복한 사람이 어딨슴미까!”
진저는 흥분해서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좋겠슴미다, 아라 씨는. 이런 미친 삶이 재밌고 좋아서!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계속 이 미친 짓거리에 끌려서, 계속, 계속…….”
대체 뭐가 그리 분한 걸까.
춤이 재밌냐는 말을 들은 후부터, 진저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는 조아라를 계속 노려보다가, 홀로 가방을 들고 연습실을 나갔다.
* * *
성필과 신태웅은 터널탑의 어느 바(bar)로 왔다. 시원한 생맥주가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아이돌들이 점점 상향 평준화돼요. 특히 춤에서요. 안무의 난이도가 지속적으로 올라가요.”
“그렇죠. 요즘 애들 보면 진짜 대단해요.”
“어려움이란 게 곧 새로움으로 연결되니까요.”
요 일주일 동안, 둘은 함께 많은 맛집과 술집을 돌아다녔다.
그동안 성필은 안무가, 댄서의 생각을 많이 알 수 있었다.
“연습생 기간도 더 길어질 가능성이 높아요. 초등학생부터 시작해서…… 그 난이도를 소화하려면 긴 기간이 필요하죠.”
“진저는 아니었잖아요?”
“진저는 타고난 독종이죠. 그만한 애를 살면서 본 적이 없어요.”
연습을 가장 빨리 시작하고, 가장 늦게 끝낸다.
말이 쉽지, 직접 하려고 하면 사람 죽어난다.
매일을 그렇게 살면 무슨 일이든 못할까.
“애가 재능도 크고요.”
“음.”
“아, 방금 ‘레슨받을 땐 안 그러던데’라고 생각하셨죠?”
“하하…….”
“배운 걸 혼자 연습해서 완벽히 습득하는 게 대단한 거죠. 그것도 재능이에요. 연습해도 안 되는 애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두 번째 생맥주가 나왔다.
성필은 줄곧 하고 싶던 질문을 던졌다.
“리카는, 리카도 열심히 했지 않았나요?”
“하하하…… 리카요…….”
신태웅은 맥주로 목을 축였다.
“이건 다른 사람들한테 발설하면 안 돼요.”
이 인간 많이 취했구만.
저런 말을 해서 좋은 꼴 본 사람을 못 봤는데.
“KS 엔터에서 케이어스 데뷔조 만들 때요, 점수를 매기거든요? 리카가 5위고 진저가 4위였어요. 간발의 차로요.”
“……!”
이건 정말 깜짝 놀랐다.
리카가 데뷔조에 근접했다기에, 데뷔조 후보 중에서도 중위권 정도겠구나 싶었는데.
까딱하면 케이어스로 데뷔할 뻔하다니.
“진저가 이기도록 한 게 비주얼이랑 춤이었어요. 그때의 리카는 아시다시피, 지금 케이어스 색이랑 안 맞잖아요? 지금의 리카면 몰라도요.”
“많이 변했죠, 리카가.”
“둘 다 훌륭해요. 다만, 그 차이가 있다면 비주얼뿐만 아니라.”
얼마만큼 독기를 품었느냐.
얼마만큼 스스로를 갈아 넣을 수 있는가.
“진저는 아무리 불가능한 목표가 와도 이룰 수 있는 애예요. 포기하지 않아요. 자기가 모든 사람을 다 뛰어넘었단 생각이 들 때까지요.”
“와…… 대단하네요.”
“대단한 인재죠.”
그런 진저가 4위라면, 나머지 세 사람은 어떤 거지?
타고난 독종 진저보다 위에 섰다면.
리더인 에리카, 김민주,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벌써 세 잔 다 비웠네요. 슬슬 갈까요.”
“그, 죄송한데 오늘은 박 이사님만 돌아가실 수 있을까요?”
“……또요?”
신태웅이 실실 웃으면서 한쪽으로 눈짓했다.
어느 여성이 혼자 테이블 바 쪽이 있었다.
“저한테 말하잖아요. 유혹해달라고.”
“이쪽 한 번도 안 봤는데요.”
“제가 보게 해야죠. 갔다 올게요.”
안 올 거잖아.
성필은 계산을 마치고 택시를 잡았다.
숙소로 돌아와 방문을 여니.
“아 씨 깜짝이야! 너, 너 뭐야. 왜 남의 방에 들어와 있어!”
조아라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성필은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12시도 안 넘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
“……오늘은 그냥 빨리 마쳤어요.”
“기분 안 좋아?”
“그냥요.”
계속 물어봐 달란 티를 팍팍 내네.
그런데 오늘은 술도 먹고 해서 피곤한데.
“그냥 아무 일도 없으면 돌아가 주라. 나 씻고 자게.”
“흐음…….”
조아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필을 흘겼다.
성필은 말없이 자켓을 벗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씻을 거라고.”
“아 진짜……. 사람이 눈치 있게 물어보고 그런 것도 있어야지.”
드디어 말할 생각이 들었나 보다.
성필은 창가 쪽의 의자에 앉았다.
“진저요. 춤추는 게 재미없대요.”
“그래?”
“저, 그 말 듣고 뭐랄까, 기분이 이상해요.”
“그렇구나.”
“……안 놀라요? 춤추는 게 재미없다잖아요.”
“어, 그러게. 신기하네. 이상한 애다, 그치?”
“……갈래.”
“응, 잘 가라.”
“아 뭔데 진짜! 평소처럼 좀 관심 좀 가져줘요! 아저씨야말로 오늘 뭔 일 있던 거 아니에요?”
“피곤해서 그래.”
조아라가 킁킁댔다.
“술 냄새……. 술 마셨어요? 누군 힘들게 연습하고 있는데 자기는 술만 마시고.”
‘자기는 술만 마시고’?
‘자기’는?
“너, 너, 너 나한테 ‘자기’라고 한 거야?”
“아 뭐라는 거야 아까부터!”
조아라가 베개를 던졌다.
성필은 자신의 얼굴을 때린 베개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라야. 네가 재밌는 거라도 다른 사람은 싫어할 수 있어. 너무 당연한 세상의 이치잖아. 제발 네 그 작은 세계의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렴. 세상은 네 생각보다 훨씬 넓고 다양해.”
“씁, 오늘따라 아저씨 진짜 이상한데? 좀 퇴폐적인…….”
“넌 뭐라는 건데 아까부터!”
성필이 조아라의 얼굴에 베개를 던졌다. 그녀가 들뜬 웃음을 흘렸다.
둘은 한동안 베개를 던지며 놀았다.
그러다가, 조아라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진저, 갑자기 연습실에서 나갔어요. 내가 춤이 재밌다고 하니까, 그게 이상한가 봐요.”
“음, 상황 맥락을 전혀 몰라서 뭐라 대답해주기가 그렇네.”
“이럴 때는 그냥 ‘그렇구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구나. 우리 아라, 속이 많이 상했겠네?”
“네에, 맞아요. 이상하다고요. 걔가 그랬어요. 아이돌은 돈 때문에 하는 거라고요.”
박성필, 충격받고 실신하기 직전!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노력파!
케이어스의 귀염둥이 팬심 블랙홀 진저가 그런 말을 하다니!
팬으로서 충격이다!
“무대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지겹고 싫기만 하다고요…….”
“…….”
“돈 때문에 그렇게 싫은 삶을 계속 살아야 할까요? 아니,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어요? 그건, 그러니까, 그건 정말…….”
진저의 말마따나, 인간의 삶이 아니다.
애초에 아이돌의 삶 자체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아이돌은 현대의 신, 영웅, 완전무결한 존재여야 하니까.
일반인이 받는 스트레스와 그 궤와 질을 달리할 것이다.
“……우울해요.”
“어, 그래 보여. 나도 우울하고.”
진저가 돈 때문에 아이돌을 하다니…….
팬들을 사랑해서가 아니었어?
울고 싶다.
“우울하다고요.”
“씻고 자. 네 숙소로 돌아가서. 나 슬슬 한계야. 눈이 자꾸 감겨…….”
하지만 세상은 성필을 재울 생각이 없는지,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피곤하게 화면을 확인한 성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멤버들이에요?”
“응.”
“아저씨 눈만 봐도 알겠네.”
“너 귀신이야?”
“이름도 맞출 수 있어요. 아름이죠?”
진짜 귀신이네!
성필은 전화를 받았다.
“응, 아름아.”
[팀장님 지금 통화되죠?]
“어. 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아뇨. 아라랑 통화하려고 전화했는데요?]
속상하구만.
성필은 핸드폰을 조아라에게 넘겼다.
* * *
성필이 없는 가로 엔터는 상상 이상으로 텅 빈 기분이었다.
직원들도 그리 느꼈으니, 항상 그와 얼굴을 맞대고 사는 멤버들은 더했다.
하지만 이제 기다림도 끝났다.
드디어 일주일이 지난 것이다.
“박 이사 일주일 더 있다가 온대.”
허.
신아름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라 때문에요?”
“어. 아무래도 혼자 지내니까 살필 것도 많고. 박 이사가 있길 바라는 거 같아. 이해는 돼.”
아니, 전혀 이해 못 하겠다.
조아라가 애도 아니고, 어른이 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니? 신아름은 짜증이 나서 연습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연습실 안의 멤버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름아 무슨 일 있어?”
“이사님 일주일 더 있다 오신대요.”
“에?!”
역시, 리카부터 반응했다.
“일주일이나 기다렸는데 또?”
“아라가 무섭다나 뭐라나.”
“음, 그렇겠다. 혼자면 무섭지.”
백설하의 사려 깊은 답은 도리어 신아름을 더 짜증 나게 만들었다.
“쌤. 아라가 이제 애도 아니잖아요. 걔 스무 살이에요. 근데 이게 뭔. 걔가 이사님 잡고 있는 거 때문에 회사 사람들도 더 힘들어지잖아요.”
“어쩔 수 없지…….”
멤버들은 아쉬워도 조아라를 이해한단 눈치였으나, 신아름은 아니었다.
얼마 후 쉬는 시간, 신아름은 성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아뇨. 아라랑 말하려고 전화했는데요?”
잠깐 뒤, 조아라가 핸드폰을 받았다.
[신아름 잘 지내냐.]
“어. 지금 스피커폰이야?”
[아니.]
“야, 조아라. 팀장님 일주일 잡고 있었으면 됐지 뭘 또 더 붙잡고 있으려고 그래? 지금 팀장님 없어서 회사 사람들 다 업무량 많아졌다고.”
조아라에게선 답이 없었다.
과연, 아무리 당찬 조아라라도 합리적인 신아름의 말에는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드문드문, 조아라는 변명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너, 너도 혼자서 다른 나라 가 봐. 말도 안 통하고…… 그러거든……?]
“한 이사님한테 영어 수업은 폼으로 들었어? 일주일이나 있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하잖아. 나도 너 어떤 일 당했는진 알고, 이해도 하는데, 팀장님 계속 붙잡고 있는 건 좀 아니잖아.”
조아라가 성필이 필요하다고?
신아름도 성필이 필요하다.
성필이 석세스 엔터를 나간 1년여 동안, 신아름은 그를 보고 싶은 것을 꾹 참아왔다. 때문에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정신적인 병증도 재발했다.
다시는 그런 경험 따위 하고 싶지 않다.
“네가 애야? 성인이면 성인답게…….”
[무서운데 어떡하라고 그럼…….]
독하게 쏘아붙이려던 신아름은, 조아라의 그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무섭다고?’
그 조아라가 무섭다는 말을 꺼냈다.
창피할 텐데, 자존심 상할 텐데, 신아름 앞에선 죽더라도 꺼내지 않을 말인데.
“너, 너.”
신아름은 파편적인 단어를 흩뿌리다가, 천천히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알겠어. 잘 추슬러. 많이 힘든가 보네.”
보아하니 단순히 어리광부리는 건 아니었다.
친구가 힘들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 내가 조금 더 참자.’
“다시 팀장님 바꿔줘.”
조아라가 핸드폰을 성필에게 넘기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 얘기 했어?]
“왜 애처럼 팀장님 안 놔주냐고요.”
[야, 힘든 애한테…….]
“네 진짜 힘들어 보이네요. 그래서 허락해줬어요. 아라 잘 부탁해요.”
당분간은 이걸로 참자.
* * *
통화가 끝난 뒤, 조아라는 더 우울해진 듯했다.
“나도 술 먹을래요.”
“술은 한국 돌아가서 먹자. 제대로 어른 데리고 주도(酒道) 배우면서. 첫술은 소주로 먹어야 주량 잴 수 있어.”
“사다 줘요.”
“그렇게 먹고 싶음 네가 사러 가.”
“무섭다고요. 여기 위험하잖아요. 그리고 술 사 본 적이 없어요.”
“왜 이래 진짜아……. 나 좀 살려줘…….”
“사다 줘요!”
조아라가 숙소에 돌아가서 먹는 것을 조건으로, 성필이 사다 주기로 했다.
‘빨리 보내고 자는 게 이득이지.’
성필은 터덜터덜 밤거리를 걸었다.
무섭긴 하네.
갑자기 총 든 강도가 나타나진 않겠지?
성필은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산 뒤, 왔던 길을 돌아갔다.
가는 길에는 포스트 무브먼트 아카데미를 흘끗 볼 수 있는 모퉁이가 있다.
성필의 눈은 습관처럼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멈춰 섰다.
‘불이 켜져 있잖아?’
건물 우측, 2층의 가장 끝 방.
조아라와 진저가 연습하는 공간이다. 그곳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아라가 진저는 연습실에서 나갔다고 했었는데?’
성필은 몽롱한 기분으로 길거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결단을 내렸다.
‘사인받아야지.’
사인지(紙)와 펜도 없으나 진저에게 사인을 받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 그냥 가면 실례인가.’
진저가 기운 좀 차리게 에너지바를 몇 개 샀다. 이미 조아라에 대한 생각은 취기에 쓸려 사라진 뒤였다.
성필은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성필을 보자 미소를 지었고, 성필도 미소로 답해주었다.
2층으로 올라가 연습실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진짜 아직 있잖아?’
설마, 조아라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내보낸 뒤 자신만 연습을 하려던 계략이었나?
이 얼마나 용의주도한 전략가인가!
성필은 연습실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진저가 인기척을 눈치채자,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진저 씨.”
“……누구심미까?”
박성필, 충격으로 쓰러지기 직전!
일주일 동안 여러 번 마주쳤는데 얼굴도 기억 못 하는 건가?
하지만 성필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저 아라랑 같이 온…….”
“뭐, 뭠미까!”
진저가 자신의 몸을 감싸면서 뒤로 물러났다.
“술 먹고 뭐하러 온 검미까!”
술?
성필은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캔 맥주를 보았다. 조아라에게 주기 위해 산 것이었다.
“아, 이건…….”
“싸, 싸움미다! 저 호신술 배웠슴미다! 당신 뜻대로는 안 됨미다!”
진저는 정말 싸울 생각인지 그럴듯한 무술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한쪽 다리를 움찔 떨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무릎이 아프구나!
“밴드 가져올…….”
“내, 내게 다가오지 말란 말임미다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