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컨템포러리 댄스.
컨템포러리(Contemporary). ‘현대의’, ‘동시대의’란 뜻을 가지고 있다.
직역하자면 ‘동시대의 댄스’다. 즉슨, 현대의 최첨단을 달리는 댄스 조류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시대의 모던 댄스와 구별하여 컨템포러리 댄스라는 단어를 쓴다.
“모던 댄스란 게 뭐냐면, 음. 이해하실 수 있게 쉽게 설명하자면요. 흔히 댄스 스포츠라고 일컫는 것들 있죠? 그런 종류랑 구별해서 컨템포러리 댄스로 두거든요.”
“그럼 스트릿 댄스가 컨템포러리 댄스인가요?”
성필은 조아라가 보여주었던 세련된 춤을 떠올리며 그리 물었다.
조아라는 몇 년 동안 스트릿 댄스의 각종 장르를 팠다고 했었다.
성필의 질문에 KS 엔터의 내부 댄스 트레이너, 신태웅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아니요. 다른 장르에요.”
어렵다.
춤은 성필이 아는 것보다도 더 많은 장르가 있었다.
“음, 컨템포러리 댄스가 뭐냐면. 재즈, 현대무용, 리리컬, 발레를 섞었다고 보면 돼요.”
“오오.”
재즈는 음악 장르인 줄로만 알았는데.
현대무용은 뭐 현대무용이겠고.
발레는 확실히 안다.
리리컬은 뭐지?
어렵다…….
신태웅은 혼란스런 성필을 이해한다는 듯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튼 배워두면 좋은 거,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이돌 안무를 창작할 때도 레퍼런스로 이용할 수 있거든요.”
배워두면 좋은 거구나!
바로 이해됐다.
성필은 그와 함께 늦은 아침 식사를 이어갔다.
케이어스의 진저는 홀로 오지 않고 신태웅과 함께 왔다고 한다.
그는 영어 능통자이기에, 진저가 미국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게 임무였다.
또한 진저가 나태해지지 않도록 감시해야 했다.
‘우리도 사람 딸려서 보냈어야 했는데.’
괜히 미국에서 기다리는 가이드, 케빈만 믿고 조아라 혼자서만 보냈다.
애한테 몹쓸 짓을 했다.
아마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 있지 않을까.
‘앞으로 아라한테 더 잘해줘야겠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박 이사님도 계속 여기 계시나요?”
“아니요. 오늘만 보고 저는 가려고요.”
조아라와 진저는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문에 난 작은 유리창 안으로 두 사람이 춤추는 것을 보고, 성필은 신태웅이 아까 했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발레랑 리리컬…….’
현대무용과 재즈는 어떤 건지 모르지만, 나머지 의미는 확실히 알겠다.
유연함을 과시하는 듯 찢는 다리.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려고 동작을 크게 한다.
‘표현’의 극에 달한 스타일 같다.
“최근의 컨템포러리 댄서들은 무대에 연극과 영상, 음악을 적극적으로 섞어요. 춤과 거의 동등할 정도의 비율로요. 댄서들은 새롭고, 강렬하고, 참신한 표현을 위해 고민을 거듭하죠. 예, 표현이요.”
신기하고 멋지다.
조아라의 강렬한 춤만을 보다가, 저토록 유연하고도 곱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느낌이 새롭다.
그런데.
‘이걸 아이돌 댄스에 접목할 수 있나?’
매 순간 임팩트를 줘야 하는 게 아이돌인데, 이건 너무 전위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돌과는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한 이사님이 교육과정 번역해준 것만 듣고 괜찮겠다 싶어서 보낸 건데.’
그래도 신태웅이 도움이 된다고 했으니, 분명 안무 창작에 효과가 있을 터였다.
“흠.”
신태웅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작게 숨을 뱉었다.
진저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확실히 조아라가 진저보다 더 수업에 잘 따라간다.
“원 모어(한 번 더!).”
트레이너는 같은 동작을 쪼개서 보여주었다.
조아라는 아무리 어려운 동작도 한 번 보면 대강은 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저는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동작이 나오면 버벅대다가, 기억에 남은 동작으로 어설프게 이어갔다.
‘우리 애가 케이어스 멤버보다 춤을 더 잘 춰요!’
그렇게 동네방네 광고하고픈 마음이었지만, 광고할 사람이 KS 엔터 직원밖에 없네…….
성필은 팔불출 같은 마음을 속에 꾹꾹 담아뒀다.
“아저씨 오래 기다렸어요?”
레슨을 마치고 조아라가 연습실을 나섰다.
“아냐. 너 춤추는 거 보고 있으니까 시간 잘 가던데 뭐.”
“다 봤다고요?”
“어.”
“내가 서서 다리 찢는 것도요?”
“아, 다시 생각해보니까 기억이 안 나네. 나 기억력이 안 좋나 봐.”
“뭐래.”
“비켜줘요.”
조아라의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저였다.
당황한 조아라가 문 옆으로 물러나니, 진저는 인사도 없이 신태웅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대화도 나누지 않고 복도 멀리 사라졌다.
“진저랑은 좀 친해졌어?”
“아니요. 쉴 때 말 걸어도 대강 답해요. 너무 띠꺼워서 말 안 걸었어요. 중국인들은 한국 깔본다던데 쟤도 그러나?”
“인종차별이얏!”
“이제 그냥 리카랑 똑같으시네.”
성필과 조아라는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런치 밀’이란 메뉴가 있어서 시켰더니,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놈이 나왔다.
“팬케익에, 베이컨에, 기름 뚝뚝 떨어지는 달걀 프라이랑 머쉬 포테이토…….”
이건 독이다.
조아라에게 매일 이걸 먹이면 오랜 체형 관리가 물거품이 될 게 틀림없다.
아니, 이거 한 끼만 먹어도 더는 돌이킬 수 없다.
“아라야 다른 거 시키…….”
조아라는 이미 먹고 있었다.
심지어 성필이 먹지 말라고 할 것을 예상했는지, 엄청난 속도로 퍼먹었다.
“……하.”
성필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석세스 엔터에 있을 시절이었으면 ‘우리가 너 밥 많이 먹으라고 비싼 돈 들여서 PT 끊어주냐?’부터 시작해서, 온갖 인신공격을 퍼부었을 텐데.
햄스터처럼 볼이 빵빵해진 조아라를 보니 비난의 말이 쏙 들어갔다.
오히려 복스럽게 먹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다.
“천천히 먹어.”
“므에(네).”
성필도 칼로리가 1,000을 훌쩍 넘어 보이는 식사를 시작했다.
“근데 진저 쟤는 왜 여기 왔대요? 우연히 겹쳤을 리는 없잖아요.”
“KS 엔터에 정호환 이사 알지?”
“지음 오빠 빼가려던 사람?”
“빼가려던 건 아니지. 그땐 지음이가 우리 회사 소속 아니었잖아. 암튼, 내가 그분한테 여기 얘기를 해줬거든. 거기에 꽂혔는지 뭔지, 그분이 진저를 여기 보내라고 했대.”
“특이한 사람이네.”
조아라는 궁금증이 해결됐는지, 더는 진저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진저가 춤을 제일 잘 춰서 보냈겠지?’
진저는 다른 케이어스 멤버들에 비해 보컬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다.
일단 발음이 문제다.
그녀는 중국인으로, 한국에서 생활한 지 이제 3년 정도 됐다.
리카와 비슷한 기간이지만, 리카와 비교하면 한국말이 서툴렀다.
진저는 한국어를 배우지 않은 채 KS 엔터 연습생이 되었다. 그렇기에 체계적으로 한국어를 습득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춤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케이어스의 이번 곡에서도 댄스 브레이크 때 당당히 센터를 차지했었지.’
그런데 이상하긴 하다.
정호환과 술자리를 가졌을 때, 성필은 그의 사상을 일부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 보낸 건 진저의 창작력을 올리기 위해선 아닐 것이다. 숙련도를 위해서라면, 굳이 먼 미국 땅까지 보내야 했나?
“진저 걔요.”
“뒷담깔 거면 안 들어.”
“뒷담 아니거든요?”
“그럼 무슨 얘긴데?”
“…….”
“뒷담 맞구만 뭐.”
“아니, 좀 애매한데. 걔요, 저보다 춤 못 추지 않아요?”
이제보니 단순히 진저를 깎아내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악질이었다.
조아라는 칭찬해달란 듯한 태도였다.
살짝 사선으로 피한 시선, 관심 없단 듯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손가락, 무심하게 꼰 다리.
칭찬을 바랄 때 그녀의 버릇이 다 드러났다.
“연습 다 봤다면서요. 어땠어요?”
이걸 받아쳐 줘야 하나?
아니!
남을 깎아서 칭찬해주는 건 하고 싶지 않다.
이미 리카를 달래줄 때 에리카를 성대하게 깎아내리긴 했지만…….
“무시하지 마. 진저 춤 잘 춰.”
조아라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코웃음을 쳤다. 성필이 자신의 마음대로 따라오지 않자 살짝 반감이 생긴 것이다.
성필도 반감이 생겼다.
‘내가 가로 엔터에 몸을 바쳤다지만, 아직도 케이어스 팬으로서의 마음은 살아있는데……!’
우리 춤신춤왕 진저를 까?
아니, ‘우리’ 진저는 아니고.
“진저는 리카보다도 KS 엔터 연습생 생활 짧게 했어.”
“……리카가 딱 1년 했다면서요?”
1년 연습생 생활을 하고 데뷔조 목전에 간 리카도 대단하지만, 진저는 더하다.
“진저는 8개월 연습만으로 데뷔조가 됐어.”
“뭐예요 그게. KS 엔터 제대로 사람 뽑는 거 맞아요? 걔 중국인이랬죠? 아빠가 중국인 부자 투자자 아니에요?”
성필이 조아라의 정수리를 손날로 쳤다.
“악!”
“이 정도 설명했으면 급 알겠지?”
“그, 근데 왜 레슨받을 때는 그래요.”
“신태웅 트레이너님이 그러더라. 걔 연습벌레라고.”
그것도 지독한 연습벌레.
8개월 만에, KS 엔터의 쟁쟁한 연습생들을 전부 짓밟고 위로 설 정도의 인간이다.
“밥 다 먹었어?”
“네.”
“그럼 나가자 이제.”
“아저씨 식후땡 안 해요?”
“누가 그딴 말 가르쳐줬어?!”
“인터넷이요.”
오늘부로 조아라 핸드폰은 차단이다!
이미 도둑맞아서 사라졌지만.
성필은 학원 앞에 도착해서 조아라에게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이걸로 사.”
“이게 법카예요?”
“아니. 내 거야. 귀국할 때 꼭 가져와. 이건 케빈 전화번호고. 갈 곳 있으면 케빈한테 전화해서 데려다 달라고 해. 식사는 알아서 잘 관리할 거라고 믿는다.”
“잠깐…….”
“체크카드 사용 내역 전부 나한테 날아오니까 식단 잘 맞춰서 식사하고. 영수증은 꼭 전부 다 모아서 한국에 가져와. 활동비 내역 정리해야 돼. 또…….”
“잠깐만요!”
“왜? 궁금한 거 있어?”
“아, 아니이. 왜 갈 거처럼 말해요…….”
“어?”
당연히 가야지.
성필은 엄연한 직장인이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있다.
계속 미국에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있어봤자 조아라 댄스 연습하는 거 구경하다가, 조아라한테 장난스런 지적이나 당하겠지.
“나 일하러 가야 해.”
“그건…… 아는데요…….”
“숙소도 있고, 연락 수단도 있고, 케빈도 있잖아. 돈도 있고. 아님 여기서 폰 하나 맞춰줄까?”
“아, 아…….”
조아라는 어렵사리 성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 안 가면 안 돼요……?”
그렇게 불쌍한 고양이처럼 눈 치켜뜨고 봐도…….
월급을 공짜로 받는 것도 아니니 한국에 돌아가야만 한…….
“사장님, 박 이사입니다. 저 미국에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조아라에게 져버렸다.
[그럼 급료는 동결시켜둘게. 그래도 되지?]
“네. 괜찮습니다.”
[……하아. 조아라 걔 많이 심해?]
누구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 십수 시간 이상 버려져 있으면, 조아라 같은 트라우마에 걸릴 것이다.
심지어 조아라는 아직 어린애다.
20살한테 어린애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세상 경험 없단 점에선 어린애나 마찬가지다.
“네. 가지 말라고 저한테 애교 부리고 달라붙고 난리 났어요.”
“내가 언제요?!”
[목소리 들어보니까 괜찮은 거 같은데. 쓰읍…… 그래. 알겠어. 상황 보다가 연락 줘.]
“사장님 그러고 보니 그거 어디 갔어요?”
[뭐?]
“사장님 날개요. 천사시잖아요.”
[……미친놈.]
뚝.
전화가 끊겼다.
“미친놈이라니…….”
홍규헌에게 직접적으로 욕을 들은 건 처음이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 농담이었나?
“아저씨 진짜 미쳤어요?”
이상한 농담이었나 보다.
* * *
오세치. 흔히 일본의 정월 요리를 일컫는다.
한구인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일본 정통 요리를 보고 감탄을 토했다.
“형형색색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군요. 눈으로부터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한구인의 칭찬을 들은 리카의 어머니, 이시카와 에미는 겸손히 웃었다.
“코부마키(다시마 말이), 손이 굉장히 많이 가셨겠습니다.”
“한 이사님이 오신다고 하셔서 오랜만에 손이 많이 가는 요리들도 만들게 됐네요. 즐겨주시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여사님께서도 올 한 해 기쁜(요로코부, 코부마키의 코부와 운어를 맞춤) 일만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리카의 아버지, 이시카와 켄타로는 한구인에게 연신 술을 권했다.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아, 토빙도리로군요.”
“아십니까? 하하! 주변 가게에서 흔히 파는 그런 게 아닙니다. 미치시마 양조장의 것을 선물 받은 겁니다.”
“그런 귀한걸. 환대가 지나치십니다.”
“아니요! 우리 딸애를 맡아주고 계신 분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리카는 오랜만에 집 요리를 먹는 것도 잊고 멍해졌다.
그녀의 옆에 앉은 유우토가 소곤소곤 물었다.
“한 이사님 일본인이셔?”
“천재…….”
정작 한구인은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이 가족 간의 단란한 새해를 방해한 것만 같았다.
그의 지레짐작과는 달리, 리카의 부모님은 한구인의 점잖은 모습을 보고 가로 엔터에 대한 신뢰도가 거의 정점을 찍었다.
한구인은 식사를 끝낸 후 숙소로 가서 쉬었다. 그다지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조아라가 물건을 모두 도둑맞았단 소식을 성필로부터 들었으니까.
‘내가 고민해도 할 수 있는 건 없다. 박 이사님을 믿자.’
다음 날 한구인은 리카네 집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왔다.
그랬더니.
“한 이사님 놀러 가요! 제가 안내할게요!”
“예?”
리카는 한구인을 끌고 유우토의 방까지 갔다.
“유우토, 놀러 가자!”
“누나, 나 공부해야 한다니까.”
유우토도 리카에게 끌려갔다.
세 사람이 온 곳은 집 근처의 놀이터였다.
“여기 옛날에 매일 놀러 왔던 곳이에요!”
“그렇습니까.”
같이 놀자고 했으면서, 리카는 한구인과 유우토를 남겨두고 그네를 타러 갔다.
리카가 그네에 서서 높이 뛰자, 동네 꼬마들이 환호했다.
“……한 이사님.”
“예, 유우토 군.”
“저, 이런 걸 받았는데요.”
유우토는 한구인에게 성필의 명함을 보여주었다.
“저보고 아이돌을 하라고…….”
한구인은 놀랐다. 성필은 아무 데서나 명함을 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유우토를 눈독 들였다면, 그에게도 어떤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구인은 그 재능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외모로군.’
리카의 동생답게, 유우토의 외모는 상당했다.
한국 나이로 겨우 17살임에도 말이다.
“아이돌이 되면 노래도 많이 부르나요?”
“예. 아이돌은 가수기도 하니까요.”
“……제가 아이돌이 될 수 있을까요?”
한구인은 성필을 믿고, ‘본인의 꿈만 있다면 될 수 있다.’라고 답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리카가 둘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다른 데 가요!”
혼자만 신나게 즐기고 와서 하는 말이 이거다.
한구인과 유우토는 픽 웃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날, 세 사람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한구인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리카는 오쇼가츠가 끝난 뒤 가로 엔터로 왔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활기찼다.
“오늘도 파이팅이에요!”
“리카 기분 좋아 보이네.”
“기분 좋아요! 회사 분들을 볼 수 있잖아요!”
리카는 품에 일본에서 가져온 선물을 꼭 안고 있었다. 주로 먹을 것들이었다.
회사로 온 그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선물을 전달했다.
하지만 두 사람만은 찾을 수 없었다.
“아라쨩은 미국에 갔고.”
그럼 마지막 한 사람은?
“박 이사님은 어디 있나요?”
“박 이사는 미국에 갔어.”
“에, 무슨 일이 있나요?”
“조아라한테 일이 좀 생겨서.”
“그런가요…….”
리카는 곧바로 성필을 볼 수 없단 데 실망했다. 하지만 즉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럼 이사님은 언제 오시나요! 내일?”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에?”
일주일?
“이, 일주일이나 이사님을 못 보는 건가요?”
리카가 울상이 됐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었는데.
“일주일이라니…….”
* * *
조아라는 학원으로 가는 길, 기분이 좋아졌는지 종종걸음까지 뛰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나 말고 사장님한테 말해. 사장님이 나한테 월급 주고 일 시키는 건데, 그거 봐주고 나 여기 남도록 허락해주신 거잖아. 안 그래도 너희 미니 앨범 때문에 바쁜데.”
조아라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앗, 너무 강하게 말했나.
“그래도 우리 아라 부탁이니까 어쩔 수 없지.”
“기차 다 떠났어요.”
“…….”
‘얘 점점 나랑 말투가 비슷해지네?’
기차 떠났다, 버스 떠났다.
이런 말은 성필만 쓰던 거였는데.
‘말투가…… 점점…… 전생이랑 비슷해지네…….’
“아저씨 왜 가만히 있어요? 안 가요?”
“어? 어, 나야 학원에 있어도 할 거 없으니까. 샌프란시스코 관광이나 하게.”
“네에 네에 혼자 즐겁게 노세요.”
“넌 춤추는 게 클럽이고 유흥이잖아.”
“그건 그렇죠.”
* * *
밤 11시가 넘어간다.
조아라는 춤을 추다 문득 멈췄다.
‘어? 이 스텝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낮에 배웠던 스텝이다.
총 8번에 걸쳐서 발을 엇갈려 움직이는 어려운 동작이다. 그런데 묘하게 눈에 익는다.
“아!”
조아라의 손이 자연스럽게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아…….”
핸드폰 도둑맞았었지.
‘이거 그거 같은데. 시에이스 아스트로넛에 나왔던 안무.’
8명이 단체로 같이 그 동작을 하는 게 얼마나 멋지게 보였던지. 조아라도 그들의 무대 영상을 보고 연습했었다.
어쩐지 한 번 보고 너무 쉽게 되더라니, 옛날에 연습해서 그런 거였나.
‘그 안무가 여기서 영향을 받은 거였구나. 아, 어디 메모할 데 있으면 좋을 텐데. 시에이스 안무 다시 보고 싶다. 내 핸드폰…….’
거기에 성필이 백설하한테 고백하는 영상도 들어있는데…….
인류의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조아라는 아쉬움을 삼키고 연습을 이어가려 했다.
“저기요.”
그때, 연습실 반대쪽 끝에서 연습하던 진저가 말을 걸어왔다.
진저는 가벼운 크롭 트레이닝복이 전부 땀에 절여져 있었다. 숨도 당장 넘어갈 듯이 헐떡이는 게, 딱 봐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연습할 검미까?”
“네? 언제까지라고 하면…… 지금 몇 신데요?”
“11시 넘었슴미다.”
“그래요?”
조아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간단히 답했다.
“조금만 더 하려고요. 왜 그러세요?”
“……아님미다.”
진저는 다시 저 멀리 떨어져서 연습을 이어갔다. 조아라는 별생각 없이 다시 연습했다.
12시 30분.
“저, 저기요.”
“네?”
“어, 언제까지 연습할 검미까…….”
진저는 아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눈에는 기묘한 절망감이 깃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몇 신데요?”
“12시 30분임미다…….”
“아, 그래요?”
조아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간단히 답했다.
“조금만 더 하게요.”
“이익……!”
진저는 낮은 비명을 지르더니, 발을 쿵쿵 구르면서 반대쪽으로 가서 연습을 이어 했다.
‘이상한 애네.’
조아라는 계속 연습했다.
‘아, 재밌다.’
보컬도, 요가도, 표현 연습도, 그 아무것도 없이 춤만 출 수 있다니!
이게 클럽 아닐까?
아니, 이렇게 재밌는 게 있는데 왜 클럽 같은 곳에 갈까?
조아라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아! 춤을 출 수 있으니까 클럽에 가는구나!’
그렇구나 그렇구나.
조아라는 계속 연습했다.
* * *
진저.
본명은 린 메이다.
그녀는 땀을 폭포처럼 흘리며 연습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자꾸 옆을 흘끔거렸다.
‘언제 가는 거야 대체?!’
아침부터 춤췄잖아.
이제 밤이잖아.
아니, 새벽이잖아!
대체 언제까지 춤출 생각이야!
진저를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나한테, 케이어스한테 자격지심 있는 거지? 연습 시간에서라도 이겨보려고? 독한 년……. 나도 안 져. 못 져. 절대 안 져…….’
진저는 당장 침대에 쓰러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조아라가 연습을 마칠 때까지 계속 연습했다.
이게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모든 게 부족했던 진저가 KS 엔터의 데뷔조로 뽑힐 수 있던 이유.
누구보다 빨리 연습을 시작하고, 누구보다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
다른 연습생들보다 압도적으로 부족한 경험의 차이를, 그녀는 압도적인 연습량과 독한 의지로 극복해냈다.
‘누가 이기나 보자!’
* * *
아침, 진저는 눈을 떴다.
어제 2시간 밖에 못 잤다.
씻고 나오니 신태웅 트레이너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네에.”
진저는 밥을 먹던 중, 고개를 꾸벅꾸벅 떨구며 졸았다.
신태웅이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진저가 깜짝 깨어났다.
“진저. 밥 먹는 것도 트레이닝이야. 정신 차려. 이제 시차로 피곤할 레벨은 아니잖아? 이사님께서 널 특별히 배려해서 이런 기회도 주셨어. 잠이 와?”
“아, 아님미다. 죄송함미다.”
진저는 빠르게 식사를 해치웠다.
죽을 것처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연습실로 왔다. 그녀는 빈 연습실을 보며 자그마한 만족감을 느꼈다.
“내가 첫 번째임미다.”
그 제정신 아닌 조아라마저도, 연습실에 나오는 시간만큼은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진저는 킥킥 웃었다.
좋아, 그럼 조금 눈이라도 붙여볼…….
“안녕하세요.”
조아라가 등장했다.
진저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