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26화 (126/760)

126화

정지음은 인스턴트 김치찌개를 끓였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보며, 정지음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어. 지금 먹으려고요. 밥 드셨어요?”

찌개가 다 끓었다.

정지음은 냄비를 잡고 조심스레 옮겼다.

문을 지나갈 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찌개를 앞에 두고도, 정지음은 통화를 계속했다.

“아니, 돈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요. 안부 전화한 거지 무슨 돈을 자꾸…….”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정지음이 음악으로 돈을 번단 사실을 잘 믿지 못했다.

최근 들어 밝아진 것도,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정지음은 지겹기도 하고, 가로 엔터로 오기 전의 자신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새삼스레 떠오르기도 했다.

“네, 잘살고 있어요. 그리고…….”

정지음은 말을 멈추었다.

KS 엔터에서 입사 제안이 왔다.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당신의 아들이 이토록 능력이 있다, 대단하다,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기뻐하겠지.

자식의 성공만큼 부모를 기쁘게 하는 건 없으니까.

“…….”

그러나 정지음은 그 기쁜 소식을 온전히 말해줄 수 없었다.

KS 엔터로 갈 것인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정호환이 내건 조건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대단했으나,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가로 엔터에 정이 들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으리라.

리카가 나가지 말라며 계약서까지 들이밀고 떼썼을 때, 정지음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성필이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바닥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경험.’

정지음은 그 제안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돈도 아니며, 구체적이지도 않고, 미래를 위한 지원조차 아닌.

그저 말뿐인 것을.

“……어어, 아니에요. 할 말이 있었는데 까먹었네. 아니, 뭔 디지털 치매예요. 하나뿐인 아들인데 말 너무 심하게 하시네.”

정지음은 안부 전화를 마치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핸드폰을 집었다.

“여보세요. 네, 정지음입니다.”

* * *

성필은 토요일에 정호환과 만났다.

과연 KS 엔터 이사쯤 되면 어디서 술을 마시나 싶었는데, 평범한 이자카야였다.

“실망하신 티를 너무 내시네요. 요정(料亭)이라도 갔어야 했나요?”

“아니요. 장소가 무슨 상관입니까. 훌륭하신 분과 함께 있는데요.”

“이야, 매니저부터 시작하셔서 그런가 말을 잘하십니다.”

둘은 사람들의 틈에 섞여 술잔을 주고받았다.

대화의 주제는 당연하게도 아이돌이었다.

“락스타, 팝스타, 밴드를 거쳐 이제는 그룹입니다. 아이돌 그룹의 형태는 영국, 미국, 일본 등에 옛날부터 있어 왔지만 현대의 대한민국만큼 잘 소화하는 곳이 없어요.”

정호환은 아이돌에 관한 의견을 피력했다. 성필도 듣는 재미가 있는 것이었다.

“아이돌은 과거의 모든 우상들을 아득히 뛰어넘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외모, 노래, 춤을 완벽한 상태로 가공한 그룹을 생각했을까요. 거기에 메시지까지 전달되면 금상첨화이지만, 한국에선 실현되기 힘든 부분도 있죠. 아이돌이 본질적으로 가지는 한계기도 하고요. 하지만 감수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아이돌이 아티스트적인 측면이 부족하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창조성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단 말입니다.”

정호환은 아이돌을 아티스트로 만드는 데 부정적인 입장인 듯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아티스트로 성장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굳이 ‘한계’란 말을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성필은 흥분해서 그에게 자신의 신념을 전달했다. 그가 공감해주길 바라서.

“저는 아티스트로서의 아이돌을 꿈꿔요. 그래서 애들한테 창작력을 길러주려고 하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뮤비나 스타일링 같은 곳에서 멤버들의 의견을 들었다고 하셨죠. 굉장한 도전이었습니다. 성공적인 도전이었고요.”

성필은 우상의 칭찬에 흥이 돋았다.

그를 라이벌로 생각하긴 했어도, 그건 그를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적으로 보는 게 아니었다.

“예. 그래서 리카한테는 작곡을 가르치고, 다른 멤버들도 작곡 과정에 참여하길 독려해요. 나중에는 연주도 가르칠 거예요. 아라는 내년에 미국의 댄스 아카데미에 보내서 안무 창작에 도움을 주려고 하고요.”

“미국이요? 어떤?”

“포스트 무브먼트 아카데미라고, 유명한 댄서가 만든 학원이 있거든요. 거기에…….”

“하하, 창작력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너무 힘은 안 빼는 게 좋습니다.”

그리 말하며, 정호환은 유쾌하게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성필은 위화감을 느꼈다.

‘창작력을 돋보이게 만들어’?

창작력을 기르는 게 아니라?

“연주든 작곡이든, 팬들이 좋아할 요소지요. 다만 보이는 부분까지만 단련하면 될 일이지, 너무 본격적으로는 안 들어가셔도 될 겁니다.”

생각의, 대화의, 이념의 괴리감이 다가왔다.

지금 둘 사이에는 벽이 있었다.

그 벽에서 서로의 말이 튕겨져 나왔다.

성필은 그것을 눈치챘다.

“아니, 저는…… 정말로 멤버들한테 창작을 맡기려고 하는 거예요.”

“네?”

그 말에 정호환도 괴리감을 눈치챘다.

빠르게 비워지던 술잔이 소강상태를 맞았다.

“정 이사님도 케이어스 멤버들한테 연주나 작곡, 작사를 가르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기사에서는…….”

“그건 어디까지나 팬들에게 보이는 부분을 위해서입니다. 동경하는 우상이 그런 것까지 할 줄 안다, 그렇게 생각하고픈 팬들을 위해서지요.”

“…….”

충격에 빠진 성필을 향해, 정호환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박 이사님. 한국의 아이돌 시스템은 완벽을 추구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연습생을 뽑는다.

최고의 보컬 트레이너에게 보컬을 배우고.

최고의 댄스 트레이너에게 댄스를 배우고.

최고의 작곡가에게 곡을 받고.

최고의 안무가에게 안무를 받고.

최고의 작사가에게 가사를 받고.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에게 스타일링을 받고.

최고의 메이크업, 헤어 아티스트에게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고.

최고의 무대 감독, 뮤비 감독, 기획작가 등등.

모든 최고를 모아 최고를 만든다.

거기에 아이돌 본인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전문적인 작곡가가 있는데, 굳이 전문가도 아닌 아이돌이 작곡을 할 필요는 없죠. 다른 것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한국의 아이돌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이유일 터다.

“아이돌은 아티스트가 아닙니다, 박 이사님.”

“…….”

“그룹에서 나오고 솔로로 데뷔한 아이돌들. 이제 자기도 솔로고 아티스트라며 멋대로 프로듀싱에 손을 댄 아이돌들. 거의 다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전문적인 프로듀서를 버린 대가고, 감히 프로듀싱에 끼어든 결과이지요.”

정호환은 다시금 말했다.

아이돌은 아티스트가 아니다, 라고.

“배우가 감독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지요. 가끔 둘을 병행할 수도 있겠지만, 극소수입니다.”

성필은 말없이 술만 홀짝였다.

“그럼에도 박 이사님의 이상은 훌륭합니다. 향수가 일어나네요. 옛날에 제가 좋아했던 밴드와 팝스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요. 친구들과 지역씬의 바닥부터 정상까지 오른, 전설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요.”

굳이 과거를 말하지 않더라도, 미국은 지금도 그러하죠.

정호환은 그리 말했다.

“지역씬에서 유명세를 얻고 레이블과 계약하여 메이저에 오른다. 수많은 개성적인 아티스트를 위한 인프라가 갖추어진 미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건 훌륭합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시스템이 미국을 대중문화의 정상에 올려둔 것이겠지요. 하지만 한국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의 수도, 인프라도, 모든 게 미국보다 뒤떨어지는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한국의 문화계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이끌어야만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러지 않으면, 이 좁은 나라가 세계시장과 싸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해합니다. 천재들의 이야기에는 마력이 있죠. 그 천재들을 현대로 불러내고 싶은 욕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랑은 생각이 다르시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호환은 가게 문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옛날에는, 아이돌의 태동기에는, 제 생각이 가장 앞선 거였습니다. 아티스트를 따지던 이들은 몰락해나가고, 체계적인 스타시스템을 구축한 이들은 정상으로 올라갔죠. 저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세대가 바뀌니 박 이사님 같은 분도 나오는군요. 제 선배들과 같은 결말은 맞지 않기를 바랍니다.”

존중은 해도, 지지(支持)는 하지 않습니다.

그 후의 술자리는 어색해졌다.

성필은 그의 말을 반박하며 열띤 토론을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세월과 경험으로 쌓은 신념은 세상 그 어떤 말로도 흔들리지 않는다.

고작 30대의 성필이 몇 마디 한다고 정호환이 ‘예 그렇습니다.’ 할 리는 없기에. 성필은 그저 말을 아꼈다.

둘은 가게를 나섰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박 이사님.”

“저도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뵀으면 좋겠네요.”

작별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은 등을 돌려 저마다의 길로 갔다.

“박 이사님!”

그때 정호환이 큰 소리로 성필을 불렀다.

“저는 아니지만, 박 이사님의 이상에 끌리는 사람은 많을 겁니다. ……처럼요.”

“네?”

정호환은 다시 말해주는 대신 손을 흔들었다. 성필도 굳이 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차로 돌아가는 길, 성필의 마음은 심란했다.

‘저 사람이 케이어스를 만든 건가.’

미래 걸그룹의 정점을?

그렇다면 정호환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이돌은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 말이 맞을 테지.

애초에 성필도 강압적인 시스템으로 연습생을 키우고, 마침내 아이돌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아니.”

자신이 맞다.

오늘, 우상과의 대화로도 성필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정호환은 점점 성필의 우상에서 멀어졌다.

이제 그는 쓰러져야 할 거짓된 우상이었다.

* * *

“계약하겠습니다.”

월요일에 출근하니, 정지음이 그리 말해왔다.

“저희랑요?”

홍규헌은 크게 놀랐다.

사실 오늘 그가 사장실을 찾았을 때, 홍규헌은 정지음이 레슨을 그만둔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하하, 이제 KS 엔터로 가니까 가로 엔터랑의 인연도 끝이네요! 지금까지 즐거웠습니다!’

분명 그럴 줄 알았는데…….

“가로 엔터 전속 음악 프로듀서로 들어오신다고요?”

“네!”

홍규헌은 책상 아래에 두었던 케이크를 조심스레 발로 밀어 넣었다.

그가 KS 엔터로 간다고 하면, 송별회 때 쓰려고 미리 사둔 것이었다.

사장실 옆에는 샴페인을 든 한구인이 대기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 바로 계약할게요!”

“어음, 네. 감사합니다.”

홍규헌이 정지음과 악수했다.

30cm가 넘는 키 차이 때문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목이 뻐근했다.

홍규헌은 사장실을 나가 한구인과 성필을 불렀다. 그러자 두 사람이 샴페인과 폭죽을 들고 등장했다.

정지음이 감동했다.

“저, 저를 위해서 이런…….”

“KS 엔터로 가시게 된 걸 축하드립니다.”

“……???”

“축하합니드아…….”

성필이 잔뜩 뿔이 나서 폭죽을 터뜨렸다.

폭죽 부산물이 정지음의 머리에 얹혔다.

“영전이군요. 그곳에 가서도 잘하시길 바랍니다. 여기, 샴페인을 따시죠.”

“계약 위반이야아아앗!”

리카가 사장실로 난입했다.

그녀는 정지음이 쓴 계약서를 들먹이며 계속 ‘계약 위반’을 외쳤다.

“우라기리모노(배신자)! 위약금 줘요! 위약금은 1억이에요!”

정지음이 반응이 없자, 리카도 떼쓰기를 그만두고 우울하게 축하해주었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세요! 저희가 빌보드에서 상을 받으면 국물도 없어요! 길거리에서 봐도 모른 척할 거예요!”

정지음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에 떨어진 폭죽 천 조각을 털어냈다.

“저, 가로 엔터에 정식으로 입사하기로 했어요. 박 이사님, 한 이사님, 리카.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구우우우우!”

그날, 가로 엔터에서 파티가 열렸다.

홍규헌이 미리 사 두었던 케이크는 쓸모가 있었다.

총 11명이 먹기엔 모자라서, 케이크를 하나 더 사와야 했다.

“이제는 프로듀서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오빠라고 불러.”

“와, 방금 말 진짜 소름 돋지 않냐? ‘오빠라고 불러’래.”

“그, 그럼 그냥 PD라고 불러…….”

“뭘 농담 가지고 삐치고 있어요. 오빠라고 불러드릴게.”

“아라야 나는?”

“아저씨는 아저씨예요.”

멤버들도 정지음의 잔류 소식에 기뻐했다.

데뷔곡 ‘아니’가 그의 손에서 나왔고, 데뷔곡인 만큼 애정이 더 컸으니까.

“다들 주목.”

파티가 끝나갈 무렵, 홍규헌이 샴페인 잔을 스푼으로 두드렸다.

“이제 정식으로 가로 엔터가 고용한 인원이 다섯 명이 됐어.”

“에에, 그럼 저희는 뭐였나요!”

“직원이 다섯 명 이상이면 정해야 하는 게 있거든.”

“무시당했어! 우리는 직원도 아닌가 봐!”

“경영 이사회에 참여할 노동자 대표 이사를 뽑아야 해.”

다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너희 책꽂이에 가로 엔터 사칙 있는 거 안 읽어봐? 너희 읽으라고 둔 건데.”

한구인이 마련한 책꽂이의 구석에, 왠지 모르게 두꺼운 남색 책이 있긴 했다.

당연히 아무도 읽지 않았다.

“……그러냐. 한 이사.”

한구인은 사칙 책을 가지고 와 해당 부분을 읽었다.

“임직원이 5명 이상일 때,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할 노동자 대표 이사를 선임한다. 경영 이사회에서 사장이 가진……, 이 부분에서 부칙이 있습니다. 사장이란 경영권을 위임받은 전문 경영인을 일컫는 것이 아니며…….”

“그건 스킵해.”

“알겠습니다. 노동자 대표 이사는 사장이 가진 의결권의 1/6에 해당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상입니다.”

“주주도 아닌데요?”

“그 정도는 돼야 권익을 보호할 수 있지.”

가로 엔터, 대체 얼마나 선진적인 거야!

“노동자 대표 이사는 투표로 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혜빈과 민경섭, 정지음이 성필을 가리켰다. 그리고 멤버들도 전원 성필을 지목했다.

성필을 가리킨 여덟 개의 손가락을 보고 홍규헌이 한숨을 쉬었다.

“비밀투표라고…….”

그렇게 성필은 1년 임기 노동자 대표 이사로 선임됐다.

이제 직함과 권한만이 아닌, 진정한 의결권을 지닌 이사가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권익을 최대한 보호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사님 파이팅! 아타시(제)가 의견이 있습니다! 휴일을 이틀로 늘려주세요!”

“사장님, 그렇다는데요?”

홍규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경영 이사회 개회를 선언합니다. 휴일 이틀 건에 대해 반대하시는 분, 손을 들어주세요.”

홍규헌이 손을 올렸다.

“과반수로 기각되었습니다.”

“…….”

“뭐어, 대충 이런 느낌이지.”

가로 엔터, 선진적이지 않아!

“더는 자본가 계급의 착취를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리카가 벌떡 일어나 열변을 토했다.

“언제까지 참아야만 하나요! 모두 함께 연대해서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허어, 우리 리카. 어쩌려고?”

“스트라이크(파업)예요!”

“리카 넌 해고야.”

“에에에에엑?!”

리카가 울먹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 다들 연대해요!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해요! 잃을 건 쇠사슬뿐이고 얻을 건 전 세계예요!”

“케이크 맛있다.”

“이거 어디 거예요?”

“요 앞에 있는 베이커리 거야. 맛있지? 아침에 줄 서야 살 수 있는 거야.”

싸늘한 반응을 보고, 리카는 눈동자에 의지를 새겨 넣었다.

“아타시(저),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가 됩니다! 폭력 유혈 혁명이에요!”

“복직시켜줄게.”

“가로 엔터에 몸과 마음 모두 바칠게요!”

정지음은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보며 생각했다.

가로 엔터에 남기를 잘했다고.

‘같이 정상으로 가는 거야.’

그건 분명, KS 엔터에서 얻을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 * *

성필은 조아라와 함께 쇼핑을 나갔다.

스포츠 테이프를 사기 위해서였다.

“미국에 가서도 필요할 테니까 많이 사.”

“그럼 열 개 살게요.”

“그건 너무 많잖아.”

성필은 조아라와 같이 다니며 희미한 향수에 빠져들었다.

전생에서는 자주 이랬었는데.

“나온 김에 외식이라도 할래요?”

“응 안 넘어가. 회사에 가서 한 이사님의 영양만점 건강식이나 먹어.”

회사로 돌아가려던 때, 리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사님 도와주세요!]

“뭘?”

[제가 이렇게 다급하게 말하는데, 이사님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하시네요.]

“넌 항상 다급하잖아.”

[소난다(그렇구나). 아니, 도와달라니까요!]

“그러니까 뭐를?”

[제 동생이 길을 잃었어요!]

리카의 동생.

이름이 유우토라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1월 1일 전으로, 리카의 부모님이 회사에 인사를 드릴 겸 유우토를 보낸다고 했었다.

홍규헌은 괜찮다고 했으나, 소중한 딸을 맡아주고 있는 곳이니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던가.

[택시가 이상한 곳에 내려준 거 같대요!]

“또 택시 타면 되잖아.”

[제 동생은 조심성이 많아요. 겁도 많아요! 한번 사기당한 일에 다시 걸려들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구요!]

앞으로 평생 서울에서 택시는 못 타겠네.

“사기라니……. 택시 운전사분이 실수한 걸 수도 있잖아.”

[아무튼요. 마침 유우토가 내린 곳이 이사님 근처예요. 또 아라쨩도 있구요!]

갑자기 조아라는 왜?

“나 일본어 할 줄 알아요.”

“오, 진짜? 리카한테 배웠어?”

“뭐, 쪼금?”

통화를 끊고 리카가 사진을 두 장 보내주었다.

유우토의 사진과 유우토가 캡처한 GPS 지도였다.

“진짜 가깝네. 아, 여기 기획사 거리구나. 운전사분이 헷갈릴 만하네.”

“가로 엔터랑 이름 비슷한 데가 있어요?”

“글쎄다.”

성필은 차를 가지고 유우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쟤예요.”

조아라가 가리킨 곳을 보자, 사람들 사이에서 확연히 빛나는 한 소년이 있었다.

아니, 그의 얼굴에는 앳된 소년과 활달한 청년이 공존했다.

“와, 역시 리카 동생이다. 연예인이네. 그럼 차 돌려서 저쪽에 세우…….”

“잠깐만요.”

조아라가 성필을 제지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떠올랐다.

“장난 좀 쳐봐요.”

“……갑자기 무슨 장난?”

“리카 동생이라잖아요.”

리카 동생이 왜?

리카 동생이라서 장난치고 싶단 건가?

정말이지 끔찍한 사고방식이다.

“뭐 어떡할 건데?”

“보기만 해요.”

성필은 유우토의 반대편에 차를 세우고, 조아라와 함께 걸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유우토는 어느 건물의 계단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그런 그에게 조아라가 다가갔다.

“어이 키사마.”

* * *

이시카와 유우토는 누나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설날에 누나가 온다고 하긴 했으나, 부모님은 누나가 신세를 지는 회사에 인사를 드려야 한다며 유우토를 보냈다.

수험 스트레스를 덜 겸 여행도 하고 말이다.

‘공부해야 하는데…….’

유우토는 펜을 놓고 있는 상황이 못내 불안했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신나게 놀긴 할 것이다.

‘근데 택시도 잘못 내려주고. 칠칠치 못하게 누나한테 도움이나 구하고…….’

그나마 다행인 건, 누나인 리카네 회사 사람이 온다고 한 것이다.

‘회사에 감사드리러 온 건데 폐만 끼치고……. 누나한테 불이익이 가거나 하진 않겠지?’

불안하게 망상을 이어가던 중, 고개를 숙인 유우토의 앞에 그림자가 졌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인이 나타났다. 아름답지만, 그 시선이 너무도 날카로웠다.

그녀와 눈을 맞춘 유우토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나, 나한테 용무가 있으신 건가?’

아니면 혹시 갸루(일진)? 양키(불량배)?

‘에이, 설마. 한국도 치안이 좋댔는데 설마 그런 게 있을 리…….’

“어이 키사마(어이 네놈).”

유우토가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손나(그런)! 진짜 갸루(일진)였어!’

그녀는 사람을 죽일 듯 매혹적이면서도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나니카 요오 아루카이(뭐 볼 일이라도 있냐)?”

유우토는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는 웬 건장한 남자도 있어서, 쉽게 발을 떼놓을 수 없었다.

유우토가 필사의 기지를 발휘했다.

“아, 아임 아메리칸(나는 미국인이다)…….”

“…….”

“아이 캔트 스피크 재패니즈(난 일본어를 못한다).”

“…….”

“소, 소레쟈(그, 그럼 이만)…….”

유우토가 슬금슬금 발을 옮기자.

“맛떼로 코라(기다려 임마)!”

“흐이이익!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유우토는 한국의 일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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