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들어오세요. 차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럴까요? 안 사원은 회사로 돌아가도 돼요. 난 여기 있다가 갈게요.”
“알겠습니다.”
안성곤은 고개를 숙인 뒤 떠나갔다.
성필은 정호환을 회사 안으로 들였다.
“모처럼 왔으니 사장님께 인사라도 드려야겠습니다. 사장님 지금 계신가요?”
“예, 계십니다.”
정호환은 통보도 없이 가로 엔터로 왔으나, 그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홍규헌도 흔쾌히 만나주리라.
“정호환? 정호환이 누군데?”
“정호환을 모르세요?”
이 업계의 입지전적 인물을 모른다니.
물론 그게 이상하지는 않다.
아무리 엔터 업계에서 사업하는 사람이라 해도, 다른 회사 이사진까지 꿰뚫을 순 없다.
KS 엔터는 이사급 임원만 해도 열 명이나 되니까.
성필은 그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KS 엔터의 높으신 분이란 거네. 주주고. 그런 분이 직접 찾아왔으면 만나드려야지.”
허락이 떨어지자, 정호환은 사장실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아니, 들어오려 했다.
그는 사장실의 초입부터 느껴지는 짙은 담배 향에 코를 씰룩이며 멈춰 섰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지만, 홍규헌은 그의 반응을 즉시 잡아냈다.
“제가 배려가 없었네요. 응접실로 가실까요.”
“손님으로 온 건데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세 사람은 사장실에서 나와 응접실로 향했다.
가는 길, 정호환이 가볍게 물었다.
“홍연헌 사장님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홍연헌. 홍규헌의 언니 되는 사람이다.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홍규헌은 일순 놀랐으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요즘은 언니랑 연락을 못 해서 잘 모릅니다. 언니랑 아는 사이신가요?”
“그럼요! 몇 년 전까지는 자주 신세를 졌었죠. KS 엔터도 기량을 갖춘 뒤에는 소원해져서, 홍연헌 사장님께는 미안하기도 합니다.”
“아…… 그렇겠네요.”
“계속 손만 벌릴 수는 없으니까요.”
저마다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사장님, 소녀연맹의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괄목할 성과였습니다.”
정호환의 칭찬은 단순한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예전 성필에게 했던 것처럼, 소녀연맹의 좋은 점을 조목조목 말해주었다.
홍규헌은 그의 칭찬을 달게 들었다.
“그래서, 박 이사를 보러 오셨다고요?”
“예. 원랜 박 이사님이랑 나눌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모처럼 사장님을 뵀으니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도 좋겠습니다.”
정호환은 족히 20살은 아래인 홍규헌과 성필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게 두 사람에게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가 진정한 용건을 꺼내려던 순간, 그 부담은 더욱 커졌다.
아까까지의 소탈한 정호환은 사라지고, 진지한 눈빛을 띤 그만이 남았다.
“정지음 작곡가를 KS 엔터로 데려가고자 합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나와서, 성필과 홍규헌은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정지음 작곡가……?”
“데려가겠단 말씀은…….”
“정지음 작곡가를 KS 엔터의 A&R팀으로 영입할 생각입니다. 전속 작곡가로요. 아직 정지음 작곡가는 프리랜서라 따로 접촉해도 문제는 없지만, 도의적인 문제란 게 있는 법이지요.”
정호환은 커피로 입술을 적셨다.
“가로 엔터도 정지음 작곡가를 중요한 협력자로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갑자기 저희가 채가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른바, 인재를 빼앗겠다는 선전포고다.
아니, 빼앗는단 말은 어폐가 있다.
정지음은 그의 말마따나 프리랜서니까.
“물론 저는 정지음 작곡가가 어디에 사는지, 어떤 인물인지도 전혀 모릅니다. 접촉하려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로 엔터를 통해 그분과 만나고자 합니다.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정호환의 말은 사실일 터다. 하지만 KS 엔터가 마음만 먹으면 정지음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가로 엔터에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정호환의 호의와 배려 그리고 도의적인 절차 때문이었다.
“가로 엔터가 정지음 작곡가에게 저희를 소개해주는 게, 보기에 훨씬 좋을 겁니다.”
정지음이 KS 엔터의 전속 작곡가가 된다면, 가로 엔터는 그 길을 소개해준 은인이 된다.
후일에도 가로 엔터는 정지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그런 배려였다.
“부탁드립니다.”
배려, 지극히도 자신감 넘치는 배려다.
정지음이 당연하게도 KS 엔터로 올 것이라 가정한 말이었으니까.
“…….”
호의로 가득했던 홍규헌의 표정은 어느 순간부터 철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 홍규헌을 보는 정호환은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홍연헌 사장님이랑 똑같구만.’
자매는 닮는다는 걸까.
당황했을 때, 그 당황을 표출하지 않고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는 건 집안의 내력인 모양이다.
“음.”
홍규헌은 테이블에 놓인 커피로 손을 가져갔다. 그 짧은 시간, 그녀는 생각했다.
‘정지음한테 전속 프로듀서 제안을 한 게 고작 며칠 전이야. 그런데 하필 이때 KS 엔터에서 이런 제안이 오다니.’
패착이다.
정지음은 훌륭하고 중요한 인재다.
홍규헌도 그를 뺏기고 싶지 않다.
‘나중에 소개해주겠다고 말할까. 그리고 박 이사한테 당장 정지음이랑 계약 진행하라고 하면, 뺏기진 않아.’
정지음은 가로 엔터에 엄청난 호감을 가지고 있다.
만약 성필이 그에게 계약을 종용한다면, 아니. 굳이 종용할 필요도 없이 저자세로 부탁하면 당장 사인해줄 것이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하지만, 홍규헌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익을 눈앞에 두고도 의(義)를 생각할 수 있는 게 그녀의 강점이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권순영이랑 다를 게 뭐지?’
권순영.
순박한 시골 청년인 정지음을 수년 동안 유령 작가로 부려 먹은 쓰레기.
정지음은 그의 밑에서 재능을 썩히고 살았다.
권순영은 그를 그물 안에 가둬두고, 자신이 아니면 길이 없다는 듯 세뇌를 했다.
정지음이 영원히 큰 바다로 나가지 못하도록, 자신의 밑에서 재능을 뽑아내도록.
‘권순영이 연못이라면 가로 엔터는 호수야. KS 엔터는 바다고. 규모의 차이만 있지, 내가 정지음한테 하려는 짓은 권순영이랑 다를 바 없어.’
정지음은 재능이 출중하다.
천재다.
빼앗기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그는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박 이사, 지음 씨가 언제 오지?”
“오늘 오후 2시에 오십니다.”
“곧이네. 정 이사님, 조금 기다리시면 볼 수 있는데, 저희 회사에서 기다리실래요? 시간이 안 되시면 번호를 드릴게요.”
홍규헌이 대답을 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커피잔을 들었다 놓는 정도로 매우 짧았다.
그 짧은 기다림 끝에 나온 신중한 대답에, 정호환은 감탄을 담아 답했다.
“기다리겠습니다. 자리만 주시면요.”
“알겠습니다. 용건은 그게 끝인가요?”
“다음 용건은 좀 사적인데…… 박 이사님. 이번 주 토요일에 술이나 한잔하시겠습니까?”
“토요일이요. 네, 좋습니다.”
“네, 그럼 용건은 끝입니다.”
홍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호환에게 악수를 청했다.
* * *
정호환이 나간 응접실에서, 홍규헌은 곧바로 담배를 꼬나물었다.
성필이 라이터의 불을 붙여주었다.
홍규헌은 연기를 가늘게 뿜었다.
“박 이사.”
“네.”
“왜 보게 해줬냐고 안 따져? 회사의 이익에 배치(背馳)되는 결정이었잖아.”
여기까지만 말해도, 성필은 모든 것을 이해할 터였다.
정지음을 잡을 방법이 있었는데도 왜 쓰지 않았느냐. 성필이 그리 따진다면 홍규헌은 할 말이 없었다.
회사의 이득을 도외시하는 사장은, 부하에게 질타받아도 어쩔 수 없다.
“정지음을 음악 프로듀서로 데려오자는 거. 네가 계속 주장해왔던 거잖아. 내가 네 말을 조금만 일찍 들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홍규헌은 원망이라도 듣고 싶단 듯, 계속 성필을 채근했다.
“지음이는 자격이 있으니까요. 더 큰물에서 살 자격이요.”
KS 엔터에는 인재들이 가득하다.
국내 최대의 인하우스 시스템을 구축한 그들은, 항상 최고 수준의 곡 퀄리티를 보장한다.
정지음은 그 천재들의 틈에서 더욱더 성장할 게 틀림없었다.
“……그래.”
홍규헌은 담배를 마저 태웠다.
“박 이사.”
“네.”
“우리, 서로 생각이 좀 잘 맞는 거 같아.”
“그러니까 같이 일하겠죠.”
“근데 박 이사는 담배 안 피워? 내 앞이라서 안 피우는 거야?”
“저 담배 줄이는 중이에요.”
“금연하게?”
“음, 그건 아닌데. 그냥 줄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요.”
“흡연자가 없어지는 건 외로운데.”
“그런데 그, 홍연헌 사장님? 그분이 사장님 형제자매이신 거죠?”
“어, 내 언니야.”
“전에 홍지헌 사장님보다 누나이신가요?”
“응. 지헌 오빠가 연헌이 언니보다 아래.”
“그분은 어떤 일 하시는데요?”
“그냥, 공연 기획 쪽 일해.”
그래서 정호환이랑 아는 사이였구나.
성필은 홍연헌에 대해 더 물어보려다가, 홍규헌의 눈에 서린 근심을 보곤 그만두었다.
“박 이사.”
“네.”
“지음 씨 KS 엔터로 가겠지?”
“100이면 100 다 가겠죠.”
“……미니 앨범 계획은 조금 미뤄지겠네.”
“리카 레슨 선생님도 따로 또 구하고요.”
“뭐든 쉬운 일이 없구만.”
“그래도, 제가 지음 씨 설득 한 번 해볼게요.”
홍규헌은 설핏 웃고는 담배를 털었다.
“그래.”
가능성은 없겠지만, 성필이 그리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됐다.
* * *
리카는 정호환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사님이다!’
KS 엔터에 있을 시절.
월말 평가 때마다 뒷자리에 앉아 무섭게 노려보던 사람이다!
리카는 그를 보자마자 자동반사적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리카 뭐 해?”
“쉿!”
조아라는 리카의 뒤에 서서, 그녀가 바라보는 쪽을 보았다.
정지음과 정호환이 1층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너 몸은 왤케 떨어?”
리카는 무서워 죽을 것 같지만 공포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관객의 심정이었다.
정호환을 보면 무섭지만, 그가 정지음과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했다.
“원랜 분위기도 있고 좋은 곳으로 가서 드려야 하는 말씀인데, 죄송합니다.”
“아, 아니요.”
진지한 장소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정호환이라는 이름이 장소의 분위기와 질을 결정했다.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가로 엔터의 개방적인 휴게 공간은 대기업의 대회의실과 같은 엄중함이 흘렀다.
“KS 엔터에 와주십시오.”
정호환의 제안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KS 엔터가 어떤 곳인가?
대한민국에서 작곡 좀 배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선망하는 직장이었다.
KS 엔터에서 진행하는 작곡가 훈련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사람이 매년 수백 명이다.
그곳에 붙는 사람은 손에 꼽고, 또 프로그램을 마치고 KS 엔터로 입사하는 사람은 백사장의 모래 한 알 정도다.
그런 KS 엔터에, 정지음이 영입 제안을 받았다.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대부분 가로 엔터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 질이 달랐다.
가로 엔터에서 제시한 기본급을 아득히 뛰어넘는 돈이 주어진다.
계약금도 있다.
음원 수익 배분률은 비슷하지만, KS 엔터에서 곡이 쓰일 때의 흥행은 가로 엔터와 비교가 불가하다.
심지어 직원 복지도 뛰어나다.
곡을 외부로 반출할 수 없다는 조항만 제외하면, 가로 엔터의 제안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여러모로 꿈과 같은, 아니.
직접 신에게 지명받아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제안이다.
“제, 제가 이런 돈을 받아도…….”
“됩니다. 작곡가님의 곡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작곡가님의 재능에는 돈으로도 매길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점에 위치한 프로듀서의 칭찬이다.
그가 자신의 재능을 하늘과 같이 사준다.
정지음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인생의 봄날이 찾아온 듯했다.
“바로 결정하시리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알려주시면 됩니다.”
정호환은 정지음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단순한 악수를 통해서도, 정호환이 정지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반드시 자신의 손에 넣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전해졌다.
“여긴 제 명함입니다. 판단이 서시면 연락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정호환은 가로 엔터를 나갔다.
정지음은 리카의 레슨을 하러 가야 하는 것도 잊고, 소파에 앉아 정호환의 명함만 보았다.
‘정호환.’
진짜 정호환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작곡을 했던,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던, 수많은 아티스트를 성공시켰던.
그 정호환이다.
“오빠.”
기쁨의 늪에 빠져 있던 정지음은 리카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깨어났다.
“어?”
항상 활기찬 리카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녀의 얼굴에선 불안이 보였다.
“가로 엔터를 떠나시는 건가요.”
“아, 음, 들었어?”
“떠나시는 건가요!”
리카가 추궁해왔다.
정지음은 똑 부러지게 답하지 못했다.
그야, 이런 제안을 받으면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
전 세계 사람을 전부 붙잡고 물어봐도, KS 엔터로 가는 게 옳다고 할 것이다.
“으……!”
리카는 정지음의 대답이 없자 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그것을 본 정지음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계약서]
옛날, 정지음이 리카와 처음 만났을 때 쓴 것이었다.
요즘도 자주 가는 소녀연맹 숙소 바로 아래의 ‘한마음 국밥’집에서, 정지음은 저 계약서에 사인했었다.
그날, 정지음은 권순영의 작업실로부터 나오길 결심했었다.
“KS 엔터에 가시면 저한테 곡 못 주잖아요!”
계약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정지음은 리카에게 곡을 판다.
그게 전부였다.
“계약 위반이에요!”
정지음의 눈길이 계약서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이르렀다.
[작곡가 ( 鄭知音 )]
음(音)에는 번진 눈물 자국이 아직도 아련히 남아 있었다.
그날 정지음이 느꼈던 설움과 기쁨이 고스란히 들어간 서명이었다.
“계약 위반……!”
“야 리카, 왜 이래.”
조아라가 리카를 말렸다. 리카는 조아라에게 붙잡혀서도 떼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신고할 거예요! 변호사 사무소 찾아갈 거예요!”
조아라는 리카를 억지로 구석으로 끌고 가 혼냈다.
네가 아무리 속상해도, 그런 식으로 정지음에게 말하는 건 실례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
정지음한테 부담 주지 마라.
평소의 조아라를 생각하면 도저히 떠올리기 힘든 성숙한 말들이었다.
그 합리적인 반박을 조목조목 받은 리카는 기어코 어깨를 떨어뜨렸다.
정지음은 거리가 있어서 그 말들을 듣진 못했으나, 리카가 혼났단 사실만은 알았다. 그는 리카와 조아라에게 다가갔다.
“아라야 왜 그래. 리카가 장난친 거잖…….”
정지음이 다가오자 리카가 2층으로 도망갔다.
“아타시(저) 오늘 레슨 안 받아요!”
리카가 사라졌다.
“…….”
“저러는데도 내가 잘못했어요?”
조아라는 얼이 나간 정지음을 위로했다.
“리카는 신경 쓰지 마요. 오빠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아라야. 너 언제 이렇게 성숙해졌어?”
“난 원래 생각 깊었어요.”
정지음은 불편한 마음으로 리카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 * *
리카가 레슨에서 도망간 후, 정지음은 하릴없이 작업실에 있었다.
조금 있었더니 성필이 들어왔다.
“리카가 농성 중이야. 연습실 문 걸어 잠그고. 나중에 내가 혼낼게.”
“아, 네.”
성필은 정지음의 앞에 앉았다.
“지음아. 너무 생각 깊이 하지 마.”
“네?”
“KS 엔터에서 온 제안 말이야. 좋았잖아. 두 번은 안 올 기회야.”
정지음은 놀랐다. 당연히 성필이 만류하러 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성필은 정지음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는 듯, KS 엔터로 가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당연하지만, 가로 엔터는 KS 엔터보다 돈도 더 많이 못 줘. 그리고 KS 엔터로 가면 최신에 최고급 장비들도 가득하겠지. 뛰어난 동료들도 있고. 최고의 아티스트들에게 곡도 줄 수 있을 거야. 모든 면에서 KS 엔터로 가는 게 낫지. 계약 조건들도 그렇고.”
성필은 사려가 깊다.
옛날부터, 정지음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심지어 회사의 이익과 배치되는 상황에서도, 성필은 정지음이란 인간을 생각해주었다.
그게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또 그가 강하게 잡아주지 않는 게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뭐, 그래도 나는 네가 여기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조건을 하나 더 걸게. KS 엔터에서는 못 하는 제안.”
황송하기 그지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장 내일 먹을 밥을 걱정하던 정지음이, 설마 영입 경쟁의 타깃이 될 줄이야.
정지음은 허탈하게 웃으며 성필의 말을 경청했다.
“바닥부터 정상으로 가는 경험.”
“……네?”
“밑바닥에서 정점까지 갈 기회. 내가 너한테 제안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야.”
추상적이기 그지없고, 제안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공수표.
사실상 정지음의 열정을 빨아먹겠단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
“선택해. 흔들림 없는 정상에서 지루하게 아래를 굽어볼지. 아니면 우리랑 같이 그 정점을 몰아내고 최고란 이름을 빼앗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