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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22화 (122/760)

122화

유용태는 주말에 아육금 녹화가 열리는 것에 감사했다.

팬카페에서 열린 치열한 아육금 녹화 방청 신청 경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녹화장에 들어섰다.

“아침부터 오시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1기 팬클럽 회장 이호진입니다!”

소녀연맹 응원단은 회장 이호진에게 주의사항과 숙지사항을 들었다.

이미 알고 있더라도 더 주의 깊게 들었다.

혹시라도 어겼다가 소녀연맹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응원 도구입니다.”

작은 손깃발이었다.

깃발에는 소녀연맹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이후에는 팬클럽에서 만든 현수막을 가장 뒷줄의 사람이 설치했다.

‘우리는 저런 거 안 하나.’

유용태는 아쉬움을 담아 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들을 보았다.

시야를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것들이다.

벽의 공간이 제한되어 있어, 자금력이나 동원력을 고려한 팬클럽 간의 협상이 필요했다.

그 결과 몇몇 팬클럽은 대형 현수막 자리를 얻어내고, 자신의 아이돌을 응원하는 현수막을 걸었다.

‘저걸 보는 아이돌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소녀연맹은 그 경쟁에서 패배했다.

듣자 하니 사전 대형 현수막 모금에서는 목표 금액을 달성했지만, 다른 팬클럽과의 가위바위보에서 패배했다는 모양이다.

유용태는 다른 그룹의 현수막을 보다가, 바로 옆에 있던 회장 이호진을 보았다.

“크흠…….”

이호진은 그 시선을 눈치채고 헛기침을 했다.

가위바위보 좀 질 수도 있지…… 마음은 아프지만…….

“소련이들이 저희 볼 수 있을까요?”

“네. 팬클럽 응원단석이랑 가까운 곳에 대기 장소 잡아준대요.”

“다행이네요.”

유용태는 손깃발을 흐물흐물 펄럭이며 촬영 시작을 기다렸다.

가만히 있으니 하품이 나왔다.

새벽 5시니까 당연했다.

그때 계단 쪽에서 남자 셋이 다량의 커피와 간식을 들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인민 여러분!”

그 괴상한 인사에 주변의 타 그룹 팬들이 돌아보았다.

“인민 여러분? 뭐야 저게?”

“소녀연맹 팬덤 이름이 인민이야.”

“진짜 뭔데…….”

세 남자는 다른 팬들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부끄러움을 겨우 감추고 간식을 인민들(팬)에게 전달했다.

“아침이라 많이 피곤하시죠? 소련이들이 주는 선물입니다.”

“아침부터요? 와아, 감사합니다.”

이호진이 가로 엔터로부터 간식을 입수하고 응원단에게 배분했다.

유용태는 빵과 쿠키를 받고 포장을 살폈다.

투명한 포장 위에는 인쇄한 손글씨가 있었다.

[새벽부터 응원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한 마음입니다. 꼭 여러분의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 장하양]

유용태는 헤헤 웃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메모를 받았나 궁금해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그쪽의 팬도 유용태를 보았다.

“어?”

“앗!”

사녹 방청에서 같이 대화를 나누었던 중학생, 김채현이었다.

‘뭐지 얘는? 현생 안 사나?’

‘뭐지 이분은? 현생이 없나?’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한동안 얼떨떨 가만히 있더니,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학교 안…… 아, 오늘 휴일이었지.”

“네에. 오빠는 직장…… 아, 휴일이지.”

“…….”

“넌 누구 편지야?”

“저는 아름이요. 보여드릴까요?”

“어!”

안 그래도 아는 사람이 없던 차라, 둘은 소녀연맹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 * *

[각 그룹 대표 선수단,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200명의 아이돌이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형형색색의 체육복을 입은 그들은, 수학여행으로 들뜬 학생들처럼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선서!]

대표로 나온 유명 그룹의 남자 아이돌이 손을 번쩍 들었다.

팬들의 비명과 같은 환호가 경기장을 웅웅 울렸다. 농담이 아니라 함성만으로도 철골 구조가 울린 것이다.

[……다음 경기 규칙을 준수합니다!]

총 세 명의 대표단은 번갈아 가며 선서문을 읽었다. 선서가 끝나고, 중계진이 대회의 시작을 선언했다.

수백 명의 아이돌들은 우왕좌왕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수가 많으니 고작 몇 미터 움직이는 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스태프들은 더 바쁘다.

수백 명이 이뤄내는 혼란 속에서 조아라가 혀를 내둘렀다.

“이래서 저녁까지 촬영한다고 하는 거구나. 쌤은 여기 와본 적 있어요?”

“아니. 전 그룹에 있을 땐 못 와봤어.”

백설하는 설렘을 품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체육대회나 수학여행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연습생, 아이돌로서의 삶을 살기 바빴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흥분을 감출 길 없이 두근거렸다.

“언니 어디 가요. 이쪽이에요.”

“아, 응.”

“저희 자리가 대략 저쯤이라고 했…….”

장하양이 미아를 보호하듯 백설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어느 응원단석에서 기쁨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 저긴가 봐요.”

덕분에 눈으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멤버들은 소녀연맹 응원단석과 가까운 대기석으로 갔다.

대기석에서도 가장 끝이었다.

좁진 않아도, 중앙에서 열리는 경기가 잘 보이진 않을 듯싶었다.

“작년에는 실외에서 했다던데 올해는 왜 실내일까요?”

“그러게. 이유가 있나?”

아마 추위가 이유일 듯했다.

12월 중순, 실외에 십수 시간을 방치하면 아이돌들이 모두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그것마저도 감수하고, 여태껏 아육금은 실외에서 열려왔다.

건물 안이라 좁긴 해도, 이쪽이 아이돌들의 건강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으리라.

[60m 육상 개인전!]

“갔다 올게요.”

조아라는 자신만만하게 대기석에서 나갔다. 그리고 트랙의 구석으로 가서 줄을 섰다.

한 번에 4명, 총 16명이 60m 개인전에 참가한다. 4번의 예선을 거치고, 각 예선에서 1등이 된 4명이 결승에서 승부를 겨룬다.

“아라쨩 하야이(빨라)!”

리카의 감탄대로, 조아라는 바람을 가르듯 모든 아이돌을 추월하고 예선 1등을 차지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고르며 손을 흔들었다.

“우와아아아악!”

조아라가 1등을 차지하자 다른 곳은 모두 침묵에 잠겼으나, 팬덤 ‘인민’들만이 함성을 보내주었다.

조아라는 인민들의 응원이 고맙기도 했으나, 무섭도록 싸늘한 타 팬과의 대비에 겁을 먹었다.

‘내, 내가 잘못이라도 했나?’

방금 예선에서 탈락한 그룹 멤버의 팬들이 소름 끼칠 정도의 침묵과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조아라는 괜히 시선을 내리깔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예선이 진행되며, 선수 대기 장소에서 사람들이 점점 빠져나갔다.

남은 건 결승 진출자 넷이었다.

조아라를 포함해, 그중에는 케이어스의 김민주도 있었다.

“안녕.”

예선에서 무참하게 다른 선수들을 탈락시킨 김민주가 조아라의 곁으로 와서 앉았다.

“어, 안녕.”

“소녀연맹 조아라?”

“응. 넌 김민주 맞지?”

“저기 전광판에 뜨네.”

[예선 4차 1등 김민주]

“이자 진죠니 쇼부(자, 정정당당히 승부).”

“너 일본인이야?”

“아니. 배우는 중. 곧 일본 앨범 데뷔라서.”

“어…….”

좋으시겠어.

“방금 내 말 이해했어?”

“응.”

“너도 일본어 해?”

“아니. 리카가 나랑 보드게임할 때 매일 그 말 하거든.”

“흐응. 숙소에서? 재밌겠네.”

“리카가 좋아해.”

“리카가? 리카 보드게임 좋아했구나.”

그 말에서 조아라는 기묘함을 느꼈다.

분명 김민주는 리카와 함께 연습생 생활을 1년 정도 했다.

음방 대기실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보면, 리카와 꽤 친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런데 리카가 보드게임 좋아하는 걸 모르나?

“곧 우리 부르겠네.”

김민주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고 조아라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서 조아라는 무언가 깨달았다.

‘뭐야 얘. 날 왜 저런 눈빛으로 봐.’

먼저 일어났으면 손을 뻗어줄 만도 하건만, 그녀는 고고하게 서서 조아라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저건 경쟁자를 보는 눈빛이다.

묘하게 아까부터 말이 짧고 틱틱거리는 느낌을 받았는데, 경쟁 상대를 파악했던 것인 모양이다.

조아라는 픽 웃으면서 일어났다.

‘그래, 지기 싫다는 거지?’

김민주는 종목이 뭐든지,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60m 육상 개인전 결승!]

네 명의 결승 진출자가 출발선에 섰다.

‘이긴다. 1등이다. 겨우 달리기지만, 케이어스한테 이기는 거야.’

조아라는 60m 개인 달리기 기록 1위였다.

김민주마저도 조아라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김민주도 조아라를 경쟁 상대로 생각했겠지.

[준비.]

조아라는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수천 년에 걸친 인류의 지혜가 개발해낸, 최대 속력으로 달리기를 시작할 수 있는 자세다.

다른 달리기 주자들은 남들이 그냥 다 하니까, 엉성하게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했다. 그러나 조아라는 아니었다.

이날을 위해 철저히 연습했다.

탕!

그리고 그건 김민주도 마찬가지였다.

조아라와 김민주가 다른 이들과 확연히 격차를 벌리며 달려 나갔다.

출발 총성이 울리고 2초도 지나지 않아 10m를 넘어섰다.

9초의 싸움. 9초 안에 결판이 난다.

조아라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약속했어.’

멤버들에게 꼭 승리를 가져다주기로 약속했다.

질 수 없다.

어린아이 같은 호승심이다.

성필이 케이어스의 무대를 보고 눈물을 흘려서.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하나도 받지 못해서.

신아름이 김민주에게 무시하는 듯한 말을 들어서.

자격지심에서 나온 승부욕이다.

그래서, 아직은 아이돌로서 이기지 못하지만.

적어도 다른 곳에서만큼은 지고 싶지 않다.

남은 거리는 20m.

‘이겼다!’

라고 생각한 순간, 조아라의 시야 구석에서 분홍색 물체가 잡혔다.

분홍색 운동복을 입은 김민주였다. 그녀가 한 걸음 이상 차이로 조아라를 앞섰다.

아.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따라잡.

[케이어스 김민주 선수,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위기감을 느낄 새도 없이 승패가 정해졌다.

결승선을 통과한 김민주는 뒤를 돌아보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조아라를 흘끗할 뿐이었다.

앞으로도, 김민주가 조아라에게 시선을 주는 일은 그게 끝이었다.

* * *

“2등이에요!”

조아라가 은메달을 땄다!

비록 진짜 은메달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16명 중에서 2등을 한 것이다!

‘인민’들은 행복한 함성을 보내며 붉은 깃발을 마구 흔들었다.

아니, 자신들이 기쁜 것보다 소녀연맹이 기뻐해줬으면 좋겠다.

“아라야 잘했어어어!”

유용태를 시작으로 인민들이 저마다 조아라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조아라는 2등 시상대에 오르고, 카메라를 향해 소감을 말한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대기석에 돌아왔다.

……무거운 걸음?

“어?”

응원단석에 당혹이 퍼졌다.

소녀연맹 대기석으로 돌아오는 조아라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도저히 2등이나 했다며 기뻐서 흘리는 눈물은 아닌 듯했다.

대기석에서 리카와 백설하가 재빨리 튀어 나가 조아라를 부축했다. 그러자 조아라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더 울었다.

근처의 아이돌들이 이상하단 듯 그녀를 보았다.

유용태는 높이 들었던 손깃발을 내렸다.

“아라야…….”

[케이어스 민주 선수! 8.57초! 압도적인 기록으로 아육금 60m 달리기 신기록을 갱신합니다!]

* * *

신아름은 운동화를 고쳐 신었다.

탕! 출발 총성 소리가 들렸다.

백설하가 멋지게 출발했다. 가장 안쪽 트랙에서 달리는 건 명백한 이점이 있었다.

그녀는 한 바퀴를 거의 다 돌 때까지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언니!”

“하양아!”

백설하가 장하양에게 바통을 넘겼다.

다른 팀처럼 끊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오랜 연습의 결과였다.

신아름은 묵묵히 달리는 장하양을 보았다.

‘잡혔다.’

흔히 첫 번째나 마지막에 가장 잘 달리는 사람을 배치해야 한다고 알지만, 프로들이 뛰는 계주는 두 번째에 에이스를 배치한다.

그걸 알아서일까, 이번 400m 계주 결승에는 두 번째 순서에 에이스가 꽤 있었다.

‘먼저 케이어스의 진저.’

진저는 필사적으로 장하양을 추월했다.

이어서 장하양은 다른 그룹의 멤버에게도 추월당했다.

거리가 점점 벌어진다.

“리카!”

“언니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장하양을 앞선 두 명보다 상당히 늦게, 리카가 바통을 받았다.

신아름은 리카와 케이어스 세 번째 주자인 소유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따라잡을 수 있나?’

안 된다.

특히 마지막 주자가 케이어스 김민주다.

60m 달리기에서 8.5라는 기록을 찍은 괴물.

밥 먹고 달리기만 하나?

아육금 역대 기록보다 0.5초나 빠르다.

그 뜻은, 김민주의 피지컬이 일반적인 여자 아이돌의 수준이 아니란 것이다.

‘원래 학교에서 멀리뛰기 했다고 그랬지. 지역 대회에도 나가고.’

근력이나 실력은 녹슬었어도, 아이돌이 비벼볼 수준이 아니란 건가.

신아름은 짙게 한숨을 쉬고 트랙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기석을 보았다.

조아라가 한껏 우울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 바보 같은 게. 고작 메달 하나 못 땄다고 죄인처럼 굴긴.’

저딴 식으로 우울해져 있으면 우리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여하튼 배려심 없는 건 옛날부터 여전하네.

바보처럼…….

“후우.”

신아름은 출발선 위에서 가볍게 뛰었다. 그러자 그녀의 시야에 누군가 잡혔다.

좌측 관객석 계단 쪽, 성필과 한구인이 서 있었다.

시선을 눈치챈 성필이 파이팅이란 뜻을 담아 주먹을 꼭 쥐었다. 그것을 본 한구인이 뒤따라 무어라 외쳤다.

안 들린다.

피식 웃은 신아름이 뒤를 보았다.

현재 1등, 케이어스의 소유가 여유롭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신아름의 옆에 김민주가 섰다.

김민주가 말했다.

“음.”

음? 음, 뭐? 오늘 뭐 먹을지라도 생각하나?

“민주야 내가 다 이겨놨어!”

바통을 받은 김민주가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신아름의 옆에 서 있던 김민주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저 멀리 사라졌다.

한 명, 두 명.

신아름을 지나친다.

‘설하 쌤 때 거리를 더 벌려야 했어. 하양 언니 때 따라잡히면 안 됐어.’

이기려면 그랬어야 한다.

신아름이 뒤로 손을 뻗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리카가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바통을 내민다.

“아름아아아!”

리카의 포효와 함께 신아름이 바통을 받았다.

신아름은 달렸다.

이미 1등과의 거리는 트랙의 1/4 정도 벌어졌다. 역전 가능성이 없다시피 하다.

‘1등 할 수 있어?’

3등의 등이 보일 거리가 되자, 신아름은 몸에서 힘이 빠졌다.

죽도록 달려봤자 1등은 무리잖아.

빈민가에서 홀로 태어난 아이와 부촌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큰 아이가 공부로 경쟁하는 것처럼.

이 계주 달리기란 건 마지막 주자에게 불평등을 강요한다.

그저 달리는 게 전부인 스포츠임에도, 달리기는 신아름에게 이 세상의 온갖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집중이 안 된단 뜻이다.

“아름아 힘내애애애!”

백설하가 외친다.

“신아름! 신아름! 신아름!”

팬들이 응원한다.

“……!”

잘 안 들리지만, 성필과 한구인의 목소리도 섞인 것 같다.

신아름은 정면을 보던 고개를 살짝 꺾었다.

성필이 손을 확성기처럼 모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응원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언젠가가 떠오른다.

‘……언제였더라.’

* * *

신아름은 아버지가 없이 컸다.

아버지가 어릴 때 자신을 버렸단 건, 그녀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상처를 감추기 위해, 바깥을 향해 짖고 이빨을 드러냈다.

“신아름. 선생님 말 듣고 있는 거야?”

“네.”

“너 언제까지 이럴래? 중학생 때부터 이러면 앞으로는 뭐 하게?”

“몰라요. 내 인생이지 쌤 인생인가. 알아서 살 테니까 그런 말 할 거면 걍 보내줘요.”

“하아, 넌 선생님이 걱정해주는데도…….”

“걱정?”

신아름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선생님이 당황했다.

“쌤이 뭔데 절 걱정해요. 내가 뭐요? 내가 불쌍해요? 아빠가 없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신아름은 아버지가 없는 아이였다.

중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그것을 알게 됐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이어진 그 소문은 없어지지 않았다. 중학교 선생님들이 신아름에게 살갑거나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소문은 진실이 됐다.

신아름이 버릇없고, 말을 듣지 않고, 같은 학생들에게 비우호적으로 대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들은.

“역시.”

란 눈빛으로 신아름을 보았다.

아빠 없는 애니까.

그러니까, 조금 엇나가도 봐줍시다.

아빠가 없으니까.

아빠가 도망갔으니까.

남들이 다 있는 아빠가 없으니까.

원래 저런 애야.

그러니까 참아요.

그 배려 없음에서 나온 배려가 신아름을 더 엇나가게 했다.

“내 인생 이미 나락으로 떨어졌으니까 어찌 되든 상관 말고 걍 내버려 두라고요! 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어도 할 여유도 없어요! 뭘 하든 알아서 먹고 살 테니까 걍 냅둬요!”

또 그 눈빛이다.

역시, 넌 그렇구나 하는 눈빛.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가란 듯 손을 저었다.

신아름은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갔다.

교실을, 학교를,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

신아름은 교문에서 멈추었다.

최근 익숙해진 얼굴이 있었다.

“아름아!”

성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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