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정호환은 소녀연맹의 ‘아니’가 발표된 후 충격을 받았었다.
‘어디서 이런 작곡가가 나왔지?’
실험적이다. 그리고 실험은 성공이다.
여태껏 왜 이런 디자인을 생각하지 못했지?
같은 작곡가로서 몇 걸음은 뒤처진 기분이다.
‘아니’를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들어서, 이 작곡가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에 영감을 받아 작곡하면 할수록, 그의 아류가 되고 있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른 레퍼런스를 찾아보기엔, 이건 너무 새로워서 레퍼런스 자체가 없어. 계속 이거만 들으면 귀가 이상해지겠어.’
정호환이 반한 건 ‘아니’란 곡만이 아니었다.
뮤비도 대단했다.
세상에! 아이돌의 컨셉으로 각국의 혁명을 채택하다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그 대단하다는 KS 엔터의 A&R 팀에게 ‘아니’를 줬다면, 그저 현대적인 감각의 뮤비만이 나왔을 게 틀림없다.
그야 멋지겠지. 훌륭하겠지.
하지만 지금의 ‘아니’ 뮤비처럼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곡, 가사, 뮤비, 스타일링, 컨셉, 멤버…… 전부 대단하다.’
정호환은 문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곡에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많이 담아왔다.
아예 정치적이진 않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라.’, ‘우리는 다 같이 소중하다.’라는 등의 인본주의를 곡에 담으려 노력했다.
다른 아티스트나 회사들도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곳은 해안의 모래알 한 줌만큼이나 적었다.
그 가운데 소녀연맹이 등장한 것이다.
자유와 저항을 부르짖는 소녀들!
‘근데 이게 왜 안 뜨지? 다 완벽하잖아! 사람들은 귀가 없나? 눈이 없나?’
오래도록 감춰두었던 엘리트 정신이 머리를 내밀었다. 멍청한 대중들이라며 욕하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하지만, 뭐.
‘데뷔에 이 정도면 준수하지. 이름도 없는 중소 기획사잖아.’
매일 감탄만 하는 나날이 지나간 뒤, 정호환은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가로 엔터와 협업했던 팀들을 조사한 것이다.
직원들을 보내 정보를 얻었다.
먼저 스타일리스트 팀.
“컨셉이요? 뿌리는 멤버들한테서 나왔다던데.”
다음은 뮤직비디오.
“뮤비 컨셉은 멤버들 의견을 받았어요.”
그리고 ‘아니’의 곡에 가사를 의뢰받은 작사가들.
“그, 박성필 이사라는 분이랑 연락했어요.”
가로 엔터와 협업했던 모든 인물, 팀을 찾아다니면서 정보의 가지를 넓혀갔다.
그러자 ‘아니’의 작곡가 정지음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권순영이란 작곡가의 아래에 있었단 모양이다.
‘대충 외부에서 얻을 정보는 다 모았나.’
집요한 조사의 결과, 정호환은 하나의 결과를 내놓았다.
현재 가로 엔터에서 프로듀싱에 대한 비전과 능력을 갖추고 있을 만한 사람은 한 명이다.
‘박성필 이사.’
홍규헌과 한구인은 아니다.
소녀연맹은 가로 엔터의 이전 그룹인 ‘서프레스’와 완전히 다르다.
서프레스의 컨셉은 홍규헌이 고용한 프로듀서로부터 나왔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로 성필이 영입됐단 결론이 나온다.
‘모든 정보가 박성필을 가리킨다.’
사람들에게서 들은 말, 회의 내용, 결과물 등.
프로듀싱을 총괄한 건 성필이다.
‘만나고 싶다.’
프로듀서로서, 창작자로서.
소녀연맹을 탄생시킨 자와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만났다.
우연히 서점에서.
* * *
“제 팬이요?”
성필은 당황스러웠다.
전생에서도 평생을 영웅이라 생각했던 정호환이 갑자기 자신의 팬이라 말한 것이다.
“예! 소녀연맹 대단했습니다.”
그 뒤로, 정호환은 자신이 소녀연맹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줄줄이 말했다.
성필은 우상의 칭찬에 어쩔 줄을 몰랐다.
마냥 기뻐하기엔 너무도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언제 한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오네요. 어디 카페라도 가서.”
그때 케이어스 멤버, 민주가 정호환의 등을 쿡쿡 찔렀다.
“응? 아, 이제 들어가야 하는구나. 여기 제 명함입니다.”
성필은 정호환의 명함을 신중하고도 소중하게 지갑 안에 넣었다.
그가 회사 외부로 곡을 주는 경우는 매우 매우 드물지만, 혹여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민주야, 인사드려라.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님이시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쪽은 신아름입니다.”
“안녕하세요.”
성필은 그가 왜 서점에 민주를 데리고 왔는지 궁금했다.
물어보니 신선한 답이 나왔다.
“케이어스 애들한테는 달에 한 번씩 꼭 책을 한 권 읽게 하거든요. 웬만하면 서점에 데려와서 직접 책을 고르게 해요. 가로 엔터도 그러나요? 어떤 책을…….”
정호환은 신아름의 손에 들린 책을 보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싸구려 연애 소설이었다.
그에 비해 민주의 손에 들린 건 ‘대중의 반역’이란 이름의 철학서였다.
성필은 창피한 기색을 보이는 신아름을 대신해 변명했다.
“원래 아름이가 사고 싶어 하던 책이 있었는데 품절이더라고요. 영웅숭배론이라고.”
“아, 그거. 아름 양이 읽기엔 어려울 텐데요.”
민주가 읽기에 ‘대중의 반역’은 안 어렵나…….
왠지 그가 신아름을 낮잡아 보는 듯해서 기분이 안 좋았다.
“저도 대학 1학년 때 읽었거든요. 그때도 배경지식이 적어서 읽기 힘들었어요. 옆에 역사책 펴두고 읽었다니까요.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모르는 말 나올 때마다 역사책 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도서관에 역사책만 탑처럼 쌓아두고 읽었어요.”
아, 그럼 어려울 만하지.
책이 어렵기도 하지만, 정호환의 비상한 탐구심이 오히려 독서를 어렵게 한 듯했다.
“정 이사님이 직접 멤버를 데리고 서점도 오시고. 애정이 많은 게 보이네요.”
“하하. 제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거의 자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전적 자식이랄까요. 음악으로 낳은 자식이죠.”
정호환이 민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민주가 그 손을 털어냈다.
“하하, 녀석. 부끄러워하긴.”
“비유전적 자식이라면서 연습생 때 그렇게 대해요?”
“다 너 잘되라고 그랬던 거지. 아, 너도 ‘아니’ 들어봤지? 소감 좀 말씀해드려.”
“네, 좋았어요.”
성필도 신아름에게 답하라는 뜻으로 눈짓했다. 신아름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겨우 말했다.
“저도요. 케이어스 ‘카오스’ 잘 들었어요.”
“네.”
너무도 당연한 ‘네’였다.
그러고 나서, 민주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아쉽게 되셨네요. 신인상이요. 내년에는 다른 상 받으실 거예요.”
그 말은 신아름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안 그래도 케이어스의 신인상 싹쓸이로 화냈던 게 당장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케이어스 멤버인 민주에게 직접 동정 어린 말을 들으니, 이젠 잊었다고 생각했던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연말 다 돼서 데뷔하셨으니까 불리하죠. 앨범, 음원, SNS 지수 전부요. 더 빨리 데뷔하셨으면 하나는 받으셨을 텐데.”
연말 다 돼서 데뷔했던 건 케이어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나하나 사람의 속을 긁는다.
더 화나는 건, 이런 말을 하는 민주에게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단 것이다.
민주는 소녀연맹이 신인상을 못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왜냐, 케이어스가 데뷔했으니까.
동시기에 데뷔했으니 밀리는 게 당연하다.
자신들이 최고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으니, 저토록 날 선 동정이 자연스레 나올 수 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민주가 본인의 역량을 모두 동원해서 신아름을 위로했다.
그건 신아름에게 위로가 아니라 모욕이었다.
“좋았어요.”
케이어스를 제외한 그룹들 중에서는 좋았다.
“다음에는 꼭 좋은 결과 있을 거예요.”
그때라면 케이어스는 이미 소녀연맹의 경쟁자가 아닐 테니까.
케이어스는 대상, 소녀연맹은 그저 그런 어떤 상. 신인상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으니, 적당한 상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하…….”
“팀장님, 저 이제 시간.”
신아름은 민주의 말을 다 듣지 않고 말을 끊었다.
“아, 그렇네. 서점이 문을 닫네. 정 이사님도 가셔야죠?”
“네, 그래야죠.”
넷은 나란히 서점을 나와 인사하고 헤어졌다.
“다음에 꼭 봅시다.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땐.”
정호환이 술잔을 꺾는 시늉을 했다.
성필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가자.”
성필과 신아름은 주차장으로 걸었다.
신아름은 더 놀자고 조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성필도 말이 없었다.
“걔 하는 말 들었어요? 아주 자기가 왕이야. 다 이겨 먹었어. 뭐? 불리해서 상을 못 받아? 그럼 자기들은 안 불리한가? 위로는 개뿔 자기네 자랑만 한 거잖아요.”
“…….”
“정호환 이사란 사람은 또 어떻고요. 김민주 걔가 나 돌려서 깔 동안도 걍 보기만 했잖아요. 그 인간도 김민주랑 하는 생각이 똑같아요. 자기들이 이기고 인기 있는 게 당연해. 하아, 진짜. 원래도 싫었는데 더 싫네.”
“…….”
“팀장님 뭐라고 말이라도 좀…….”
줄곧 내리깔던 시선을 올린 신아름은 흠칫 몸을 떨었다.
성필이 화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일자로 꾹 다문 입술과 정면만 보는 눈.
석세스 엔터에 있을 적, 진심으로 화냈던 성필의 모습과 같았다.
신아름은 재빨리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성필의 뒤만 따랐다.
“차에 잠시만 혼자 있어. 나 산책 좀 하고 올게.”
산책이란 담배를 뜻했다.
신아름은 차 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의 분노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단 건 알아도, 성필이 화내는 건 무서웠으니까.
성필은 한결 맑아진 표정으로 차에 탔다.
“아름아, 우린 케이어스한테 진 거야.”
“……네?”
“민주 말이랑 달리, 패배에 어쩔 수 없는 이유는 없어. 그냥 진 거야. 비록 배경이 다르더라도, 세상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보니까. 결과적으로 우리는 케이어스보다 뮤비 조회 수나 음원 성적, 앨범 판매량도 전부 낮았어. 진 거야. 변명은 없어.”
팀장님이 진짜 화났구나.
신아름은 그것을 직감했다. 동시에 성필의 말은 신아름에게 죄책감이 들도록 했다.
그냥 패배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 패배의 몫은 멤버들에게도 있지 않을까?
“팀장님 아까 화 많이 났었나 보네요. 그러면 그 인간들 앞에서 소리라도 질러주시지.”
패배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돌려지는 게 싫어서, 성필에게 미움받는 게 싫어서, 신아름은 농담으로 대화의 방향을 돌리려고 했다.
“아름아. 회사는 매출로 말하고 아티스트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야. 아까 그 말 듣고 너도 화났겠지만, 나도 그랬어. 동정하는 듯 깔아보는 시선하곤……. 악의가 없어서 더 화났어.”
성필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화난다고 쏘아붙이면 화가 풀릴까? 아니야. 이겨야 해.”
“케이어스를요?”
“이겨서, 오늘 김민주가 했던 말 그대로 돌려주자. 우리가 너무 뛰어나니까 너희가 진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신아름의 표정이 천천히 우울에서 밝음으로 변해갔다.
“네. 다음에는 초동판매량 10만 장 찍어요.”
“……그건 많이 힘들 거 같은데.”
“벌써 포기예요?! 부끄러운 말 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니, 10만 장은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우리 데뷔 초동 1만 장도 충분히 비현실적이거든요?”
어쨌거나.
“다음엔 케이어스 콧대 납작하게 만들어줘요.”
“응.”
성필에게 목표가 생겼다.
우상인 정호환을 이기는 것이었다.
전생에서는 석세스 엔터의 시가총액이 KS 엔터 엔터를 뛰어넘어서, 이미 이긴 적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이기고 싶다.
‘프로듀서로서 정호환을 뛰어넘을 거야.’
성필의 꿈은 두 개가 됐다.
최고의 아이돌을 키워내는 것.
그리고 우상으로만 그려왔던 정호환을 뛰어넘는 것이다.
프로듀서로서 정호환을 뛰어넘는다…….
이 꿈은 성필의 가슴속에 뜨거운 열망을 새겨넣었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이기 그지없었다.
극소수의 천재가 만들어낸 한국의 스타시스템.
그 스타시스템을 만들어낸 극소수의 천재 중 한 명이 바로 정호환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뛰어넘는 거지.’
평생 오르지 못할 거대한 벽으로만 보이는 아버지다.
하지만 성필은 그 투쟁의 결과를 안다.
‘내가 이긴다.’
모든 아버지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아들에게 패배하는 법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먹으며 자라나기에, 어느 순간 작아진 아버지를 가볍게도 뛰어넘는다.
성필도 그리될 것이다.
* * *
“미니 앨범. 기한은 4개월.”
소녀연맹의 컴백은 내년 4월 말이다.
홍규헌은 당혹으로 물드는 직원들을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이 몰아칠 때야. 손 PD랑 박 이사는 이미 알겠지만, 애들 활동 기간에도 곡 수급을 꾸준히 했잖아.”
“사장님, 그건 그렇지만. 다음 앨범을 꾸준히 준비해 온 건 맞지만요. 싱글은 몰라도 미니를 4개월 만에 준비하는 건 너무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 아니에요?”
손혜빈이 당연한 반박을 제시했다.
거기에 민경섭이 가세했다.
“그리고 4월이면 봄 괴물들 올라올 거예요.”
봄 괴물.
이른바 연금이라고 불리는 봄 노래들이 음원 차트를 뒤덮는 때다.
계절은 음악의 유행에 큰 영향을 준다.
모든 계절이 그러하다.
특히 봄에는 봄을 알리려는 듯 산뜻하고 감성적인 노래가 잔뜩 나오고, 또 잘 팔리기도 한다.
“저희 애들 컨셉이랑 가장 안 맞는 게 봄이잖아요. 연말을 데뷔로 정한 것도 컨셉을 고려한 조치 아니었나요?”
“음, 반발이 좀 있네. 이유는 성급함과 타이밍이고. 박 이사.”
성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혜빈과 민경섭이 그를 보았다.
“이 의견을 낸 건 박 이사야.”
“성필이가요?”
“형이?”
이 업계를 오래 겪어온 성필이 이런 의견을 냈다고?
무언가 큰 그림이라도 있는 건가?
“컴백을 4월로 정한 건, 제가 여러 엔터사의 정보를 취합한 결과를 바탕으로 했어요. 4월에 컴백하는 아이돌이 다른 달에 비해 가장 적어요.”
“…….”
“그래서…….”
“당연하지! 기획사들도 봄 노래들이랑 싸우기 싫은 거잖아!”
요즘엔 청순한 컨셉의 걸그룹도 적다 보니, 봄을 배경으로 곡을 내기가 쉽지 않다.
기획사들도 봄 괴물들과의 정면승부를 피하고 여름 시즌을 노리거나, 아예 봄이 오기 전 곡을 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4월이 상대적으로 비게 됐다.
그래도 아예 텅 빈 건 아니고, 그나마 다른 달에 비해서 적단 뜻이다.
“하아, 누나. 누나 이렇게 담이 작은 사람이야?”
“뭐? 지금 내 가슴 작다고 한 거야?”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크흠.
성필은 다시 진지한 눈빛을 되찾았다.
“봄 괴물도 못 이길 정도면, 우리 애들이 세계를 제패한단 목표 따위는 없애는 편이 나아.”
“…….”
“그래서…….”
“언제부터 우리 목표가 세계 제패였는데!”
“최고의 아이돌이 우리 회사의 목표잖아!”
“이게 앨범 1만 5천 장 팔더니 눈이 안 보이게 됐나. 왜 이러지?”
설왕설래가 오갔다.
승기는 성필에게로 기울었다.
사실, 4월 컴백을 반대할 근거가 적었기 때문이다.
4월이 안 되면 언제 컴백해? 3월? 왜? 5월? 왜? 이렇게 질문을 이어가면, 모든 달이 컴백하기 적합하지 않단 결과로 이어진다.
어쨌거나 소녀연맹은 다른 그룹들보다 네임 파워가 적으니까.
모든 달이 적대적인 환경일 수밖에 없다.
“……그래, 우린 아예 데뷔도 아니고 컴백이지. 팬덤도 어느 정도 모였으니까, 미니 앨범이면 팬 이탈도 막고 적당하겠지.”
“4개월이란 시간도 지금까지 준비한 정도를 보면 이해 가능하고요.”
손혜빈과 민경섭이 패배를 선언했다.
성필이 이토록 4월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었다.
‘케이어스의 컴백이 9개월 뒤.’
그동안, 소녀연맹은 4월의 미니 앨범으로 팬덤을 더 탄탄하게 다진다.
그리고 케이어스와 같은 달에 정규 앨범으로 컴백하여.
‘승부를 본다.’
게다가 가로 엔터에는 비장의 수도 있었다.
“마지막 안건인데, 정지음 작곡가를 음악 프로듀서로 영입하는 거야.”
이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소녀연맹이 한창 데뷔를 준비하고 활동에 들어설 때도, 가로 엔터는 꾸준히 곡 수급과 추후 앨범 계획을 했었다.
그리고 정지음의 곡은 매번 좋은 평가를 받으며 차곡차곡 쌓여갔다.
정지음의 능력은 검증이 끝났다.
“정지음을 음악 프로듀서로 두고 조촐하게나마 A&R(Artist&repertory)을 꾸리자.”
A&R은 부서의 명칭이다.
회사마다 맡는 임무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곡 수급에서 앨범 제작까지 전 과정을 통솔하는 역할을 한다.
전문적인 A&R이 있고 없고는 회사의 성장에 큰 영향을 준다.
“한 이사는 정지음 작곡가한테 제시할 조건 작성, 검토해서 나한테 올려.”
“알겠습니다.”
“박 이사는 영입 준비. 박 이사가 정지음 작곡가랑 가장 친하니까.”
“알겠습니다.”
“손 PD는 A&R 부서 기본적인 조직이랑 업무체계 정리해서 올려.”
“네!”
“민 매니저는 박 이사랑 애들 매니지먼트 계획, 예정 사항, 스케줄 관련 협력 계속해.”
“예.”
새해가 다가오기 직전, 가로 엔터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했다.
* * *
[아이돌스타 육상 금메달!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12월 중순, 아육금의 녹화가 시작됐다.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기회.
동시에 소녀 연맹에게는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케이어스한테 이기자.”
백설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1등, 금메달, 따자.”
비록 다른 곳에서나마 승리를 선물해주고 싶다.
홍규헌에게, 한구인에게, 손혜빈에게, 민경섭에게, 그리고 성필에게.
시상식의 쓰라림을 보상받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