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20화 (120/760)

120화

아육금은 명절마다 방송된다.

여러 아이돌이 모여 남자부와 여자부로 나뉘고, 각각 몇 개의 종목을 맡아 승부를 펼친다.

아이돌의 부상이나 편의의 부족함 등등, 구설수에 오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문제가 있는데도 왜 폐지가 안 되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시청률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이돌을 수백 명 모아두고 스포츠 경기를 시키는데 재미가 없기도 힘들다.

“거절하기도 힘들고요.”

아육금에 나오지 않는 그룹들도 있다.

아예 나오길 금지하는 기획사도 있고.

하지만 그런 기획사는 힘이 있는 쪽이다.

아육금에 나가기 싫어도 방송사와 척 지는 게 싫어서 억지로 나오는 그룹도 있다.

반면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 위해 어떻게든 나오고 싶어하지만, 너무도 인지도가 없어서 나오지 못하는 그룹도 있고.

양면이 뚜렷한 방송이다.

“그래, 나오라면 나와야지. 우리가 준비할 건 직관 오는 팬들 도시락 정도인가?”

“네. 잘 아시네요.”

“어릴 땐 많이 봤으니까. 근데 우리 팬들이 올까?”

“팬카페에 올려보면 알겠죠.”

앨범 활동 일주일 차에, 드디어 소녀연맹도 공식 팬카페를 개설했었다.

주요한 공지와 일정, 스케줄은 팬카페에 올라가게 되어 있다.

데뷔 활동 기간 중에만 가입 신청을 받았고, 현재는 가입이 닫혀 있는 상태다.

“애들은 뭐래. 좋아해?”

“티비 나오는 거니까요. 소중한 기회죠. 특히 아라가 좋아해요.”

“걔는 운동은 뭐든 잘하니까. 그럼 우리가 나가는 종목은 뭐야?”

“60m 달리기랑 계주요.”

“노멀하네.”

인기 종목인 양궁에 얼굴이라도 비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직 신인 중의 신인인 소녀연맹에게는 육상 종목만이 주어졌다.

“녹화는 곧이고 방영은 설날이네. 설날에 리카는 본가에 간다고 했었지?”

“예.”

한국의 설날 연휴는 음력이지만, 일본의 설날 연휴는 양력으로 친다.

“리카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겸해서 한 이사 보낼까. 선물 들려주고.”

“좋을 거 같아요.”

타국의 회사에 소중한 딸을 맡겨주고 있으니,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비추는 것이 예의다.

“오케이. 그건 그렇게 하고. 뭐어, 애들 아육금 나가기 전에 연습이라도 시킬까?”

“그래야겠죠. 팬들한테 좋은 모습 보여주기 위해서라도요.”

* * *

소녀연맹은 저녁 시간에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았다.

연습을 하러 모였는데, 다섯 명 모두 벤치에 옹기종기 붙어서 추위를 피했다.

성필은 추위에 코를 훌쩍이며 타이머 어플을 켰다.

“먼저 60m 기록 재볼게. 가장 빠른 사람이 60m 달리기 나가고, 나머지 네 명이 계주 뛰는 거야.”

“굳이 그래야 해요? 그냥 제일 못 달리는 사람을 빼고 넷이서 하면 되잖아요.”

“다 경기에 한 번씩 얼굴은 비춰야지. 아라 네 말대로 하면 한 명은 종일 손가락만 빨고 있는 거잖아.”

“괜찮아요.”

리더인 백설하가 말을 받았다.

“저희는 이기는 걸 목표로 정했어요. 한 명은 희생해도 괜찮아요.”

“……굳이?”

1등 한다고 큰 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터뷰에서 얼굴을 비추는 정도일까.

물론 그 정도만 돼도 인지도가 없는 그룹에게는 대단한 포상이긴 하다.

하지만 성필은 멤버 전원이 한 번이라도 경기에 참여한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학교 운동회에서 모든 학생이 경기를 뛰는 것처럼 말이다.

팬들도 그걸 바랄 것이다.

“안 돼. 다 한 번씩 나가야 해.”

백설하를 위시한 멤버들은 성필의 결정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그에 성필이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녀들은 성필이 하자는 일이면 불만 없이 따라주었다.

그런데 고작 달리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이겨야 하는데…….”

성필은 몰랐으나, 소녀연맹 멤버들은 이번 아육금에 대단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주로 케이어스에 대한 투지였다.

시상식에서 케이어스에게 바닥까지 털려버린 끝에, 케이어스를 라이벌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리 중에 아예 운동능력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야.”

“네. 그래야죠.”

멤버들은 짐(Gym)에서 무산소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병행한다.

무조건 살만 빼지 않고 철저히 관리한다.

그러니 운동능력이 일반인보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

“연맹!”

“승리!”

와아아아!

멤버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성필은 그녀들의 동기가 잘 이해되지 않았으나, 승부욕을 불태운단 건 좋은 일이다.

“아저씨. 우리 진심이니까 오늘 빨리 퇴근할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 원래도 빨리 퇴근 안 하지만.”

“카와이(불쌍해)!”

“아라가 귀엽긴(카와이, ‘불쌍하다’와 동음이의어)하지.”

“아라 말구 이사님이요!”

“내가 귀엽다고……?”

“이사님의 카와이(불쌍)함은 범죄예요!”

“어? 그래, 고맙다.”

멤버들은 의지를 불태우며 트랙 위에 섰다.

이토록 승부욕이 생긴 건, 단순히 시상식에서 상을 못 받을 것 때문은 아니었다.

상을 못 받을 때마다 보았던 가로 엔터 직원들의 표정 때문이었다.

괜찮다. 다음을 노리자. 너희들은 충분하다.

직원들이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할 때마다, 멤버들은 도리어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부끄러웠다.

특히 자신들을 믿는다고 습관처럼 말하던 성필에게는 더 미안했다.

“준비.”

정적.

“땅!”

멤버들이 땅을 박찼다.

“흐엑! 헤엑!”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서, 꼴찌는 백설하였다.

그녀는 결승점에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길,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을 길이 없다는 듯 자꾸만 헐떡였다.

“설하야 걸어와도 돼!”

“네, 네헤에…….”

“…….”

성필은 백설하가 구보로 뛰어오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저러니까 달리기를 잘 못 하는구나.”

“CG 같다.”

“저게 저렇게 흔들릴 수 있는 거였어?”

“쌤 브라 안 찼나?”

성필은 귀도 막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냐. 못 달리는 게 당연하지. 처음이고.”

단거리 달리기, 전속력 달리기는 몸 전체의 근육을 사용하는 격한 운동이다.

단거리 달리기 선수의 몸을 보면 알 수 있다.

멤버들이 뛰는 일은 러닝머신 위에서만 이뤄지니, 전속력 달리기를 할 기회 자체가 없다.

힘든 건 당연하다.

백설하는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긴 하지만.

“1등, 조아라.”

조아라가 양팔을 번쩍 들고 위세를 부렸다.

멤버들이 박수 쳐주었다.

“갈채하라.”

“정말 대단합니다 선생!”

조아라가 피식 웃으면서 신아름을 흘겼다.

신아름은 이를 빠득 갈았다.

“2등, 신아름. 아름이가 마지막 주자로 뛰면 되겠다.”

“……한 번 더 해보면 안 돼요?”

“음.”

성필은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는 왜 그러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측정의 정확성을 위해서 두 번만 더 해볼까? 먼저 기록 좀 하고. 3등 리카, 4등 장하양…….”

“왜 리카만 이름으로 부르고 저는 성까지 붙여서 부르세요? 차별하시는 거예요?”

“이시카와 리카 3등. 장하양 4등. 백설하 5등.”

“에에, 이사님이 풀네임으로 부르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그 뒤로도 두 번의 60m 측정이 이어졌다.

순위는 변동되지 않았다.

“이거 우연이야! 나 뛸 때만 바람이 역풍이었어! 원랜 내가 이겨!”

“뭐? 패배자의 말은 잘 안 들리는데?”

“으그르으그극!”

성필이 신아름을 말렸다.

조아라와 신아름은 서로에 대해서만 유독 승부욕이 강했다.

성격이 비슷해서 그런 걸까.

“첫 번째 주자는 설하. 두 번째는 하양이, 세 번째는 리카, 마지막은 아름이. 이러면 될까?”

“빠른 순서예요?”

“그런 것도 있는데, 설하는 스타트가 빠르더라고. 초반까지는 가장 앞이었어. 근력이 높아서 그런가 봐.”

백설하는 ‘근력이 높다’는 말이 칭찬인지 헷갈려서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칭찬이지?

“아앗, 이사님! 여자한테 근육 힘이 세다니! 섬세함이 없어요!”

“너 옛날엔 나한테 성 평등이니 뭐니 했잖아. 유엔 선언까지 들먹이면서.”

“……맞아요! 여자도 힘 셀 수 있어요! 쌤이 근육이 세니까 스타트 주자네요!”

“으, 응.”

멤버들은 열심히 연습했다.

조아라는 홀로 트랙에서 기록을 단축하거나, 인터넷에 달리기 방법 같은 것을 검색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바통을 주고받는 연습, 400m 계주 실전 등을 치렀다.

그러니 변화가 생겼다.

“하양 언니 점점 빨라지지 않아?”

“혼또다요(정말 그렇네).”

혹시 몰라서 다시 기록을 재보았다.

“와, 처음 했을 때보다 1.5초나 줄었어.”

“1.5초가 높은 건가요?”

“우사인볼트가 1.5초 기록 단축된다고 생각해봐.”

“이능력자로 각성한 건가요!”

“그래. 그만큼 대단한 거야.”

장하양은 멋쩍게 웃으면서 별거 아니라고 했다. 그냥 달리다 보니 감각이 생겼다고 하던가.

‘운동을 시켰어야 했나?’

슬랜더 체형이니 운동에 적합할 것 같긴 하다.

“하양 언니 운동 시작해보는 거 어때요? 잘할 거 같지 않아요?”

“아하하, 그럴까?”

“안 돼! 하양이한테는 아이돌뿐이야! 절대 안 놔줘! 가려면 위약금 3배로 내고 가!”

“이사님 집착 무엇.”

“아하하, 역으로 위약금을 3배로 준대도 안 갈게요.”

오늘, 대한민국은 육상 금메달 하나를 잃었다.

하지만 더 큰 별을 얻었으니 손해는 아닐 터다.

슬슬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자, 멤버들은 다시 롱패딩을 입고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성필 홀로 멤버들을 데리고 온 터라 차 안이 북적거렸다.

“조수석 가위바위보.”

쾌적한 자리를 얻기 위한 결투, 그 끝에 신아름이 승리를 차지했다.

“앗싸 조수석.”

“앗싸 하양 언니 무릎 위.”

“나는 설하 쌤 다리 사이.”

“언니 안전벨트 해줘요!”

장하양이 리카의 배를 끌어안았다.

“에헤헤, 따뜻하다.”

“뭔데. 쌤도 안전벨트 해줘요.”

백설하도 조아라를 안았다.

“팀사님 저도 안전벨트 해줘요.”

“이미 했잖아.”

“왜 저만 차별해요!”

저마다 자리를 잡은 후 숙소에 도착했다.

“다들 오늘 고생했다. 다음 주에 좋은 결과 내자.”

“하잇(넵)! 안녕히 가세요!”

멤버들이 숙소 계단을 올라가던 때, 신아름은 무언가 생각났단 듯 성필에게로 돌아왔다.

“팀장님, 오늘 저랑 어디 가요.”

“어디?”

“엄마 신년 선물 사러요. 오늘 말곤 시간 안 날 거 같아서요.”

9시가 다 되어간다.

그래도 신아름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 없었고,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유가 이유이니만큼 거절할 수가 없지.

얼마나 기특한가?

“아름아 안 들어와?”

계단 위에서 장하양이 물었다.

“언니 저 이사님이랑 어디 좀 갔다 올게요.”

“어디?”

“엄마 선물 사러요.”

“……잘 다녀와.”

신아름은 다시금 성필의 차 조수석에 탑승했다.

“어디 갈까?”

“서점이요.”

“선물로 책 드리게?”

“아뇨. 팀장님이랑 놀러 가려고요.”

“뭐?”

“연말이잖아요 이제. 오늘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회 있겠어요?”

“야 너…….”

“아앙 빨리요.”

신아름이 애교를 부리며 성필의 선택을 재촉했다.

딸이 생기면 이런 기분일까, 결혼도 안 한 성필이 느끼기엔 이른 감정이 들었다.

“어머니 선물은?”

“이미 샀어요. 팀장님 다음 달에 우리 집 올 거죠?”

“어, 그래야지. 명절이니까.”

“같이 다니면서 그때 뭐 해 먹을지 고민도 하고, 놀기도 놀고. 좋죠?”

성필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서점으로 향했다.

“근데 서점은 왜? 너 책 안 읽잖아.”

“며칠 전에 한 이사님이 책 소개해줬는데 재밌을 거 같아서요.”

“뭔데?”

“‘영웅숭배론’이요.”

“……토머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

“네네! 작가 이름이 그거였던 거 같아요. 팀장님도 아는구나. 한 이사님이 그 책 내용이랑 아이돌을 엮어서 설명해줬거든요. 재밌었어요.”

영웅숭배론이랑 아이돌을 엮어서 설명해?

심지어 재밌게 설명했다고?

도대체 한구인 당신의 한계는 대체…….

‘책에는 눈도 안 대던 아름이가 책을 사게 만들다니.’

출판사 마케팅 부서에 취직하면 거물이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바닥을 친 독서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위대한 마케터가 될 수도 있겠다.

곧 문을 닫을 시간임에도 서점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런 거 보면 독서율 바닥이라는 기사도 다 거짓말 같지 않아요?”

“책 읽는 사람만 오는 거겠지.”

검색대에 ‘영웅숭배론’을 검색했다.

품절이었다.

“이거 인기 많나?”

“인기가 없어서 품절이겠지.”

“인터넷으로 시킬까…….”

신아름은 서점 구경을 계속했다. 성필을 끌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책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롱패딩 후드를 깊게 쓰고 있어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이거 재밌겠죠?”

감각적인 표지에 ‘나는 오늘 죽는다. 당신 때문에.’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책 소개를 보니 로맨스 장르인 듯했다.

주인공에게 모질게 대해왔던 애인이, 그녀의 자살 시도 때문에 후회 속에서 몸부림친다, 라…….

“이런 게 재밌어?”

“소개만 봐도 핵꿀잼 예약인데요?”

“그러냐.”

신아름은 그 책을 품에 안고 계산대로 향했다.

도중, 성필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철학]이라고 적힌 팻말 근처, 무수히 늘어선 책들을 보고 있는 두 명의 남녀.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눈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필은 둘을 알아보았다.

케이어스의 멤버 중 하나, 민주. 그리고 다른 한 명도 성필이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정호환 이사!’

KS 엔터의 개국공신 중 한 명.

프로듀싱 총괄인 정호환 이사였다.

‘서울대 철학과에 재학 중 운동권에 투신. 집행유예를 받고 학업에 열중. 대학원에서 석사과정 중, 실천 없는 학계에 환멸을 느껴 석사과정 중단. 1년간 백수로 살다가 ‘유지태와 친구들’이 사회에 미치는 어마어마한 파급력에 매료됨. 그 후 문화업계에 몸을 바치고, KS 엔터 설립 당시 말단 직원으로 입사. 이후 작곡을 배워…….’

성필이 어떻게 이런 사소한 것까지 아느냐.

정호환 이사의 팬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프로듀서의 정점에다가 성필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팀장님?”

성필은 홀린 듯 정호환과 민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정호환이 성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호환은 자연스럽게 민주를 자신의 뒤에 감추었다.

“저, 저기.”

“죄송합니다. 사람 잘못…….”

“정호환 이사님 맞으시죠?”

“……네? 저요?”

“네, 네. 패, 팬입니다.”

“……??”

성필은 허겁지겁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공손히 그것을 내밀었다.

“가로 엔터 이사 박성필입니다.”

“박성필?”

정호환은 명함을 받고, 그것을 공손히 명함 지갑에 넣은 후, 거칠게 성필의 손을 맞잡았다.

“소녀연맹 회사! 박성필 이사님!”

“어, 네. 박성필입…….”

“팬입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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