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리카는?”
“음료수 사러요.”
물이 있어도 음료수가 마시고 싶을 수도 있지.
성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카메라 리허설의 때가 찾아왔다.
“리카! 리카 어딨어!”
리카가 돌아오지 않는다.
성필은 좁은 복도를 뛰어다니며 리카를 찾으러 다녔다. 리카가 핸드폰을 대기실에 두고 사라졌기에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어딜 간 거야?’
화장실에 갔나 싶어서 근처를 어슬렁거렸지만, 이상하게 보일까 걱정되어 오래 있지도 못했다.
“리카…… 어디 있어…….”
관성처럼 돌아다니던 성필은 휴게 공간에서 리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플라스틱 벤치가 줄지어 몇 개 있고, 벽면에는 자판기가 가득한 곳.
리카는 자판기 사이의 틈에 쏙 들어가 앉아 있었다.
“…….”
리카는 성필의 그림자가 져도 모른 척 바닥만 보고 있었다.
“뭐 하냐.”
“…….”
“가자. 곧 카메라 리허설이야.”
“……하이(네).”
성필은 리카를 데리고 대기실로 향했다.
“케이어스 때문이야?”
리카가 흠칫했다.
맞는 모양이다.
성필도 이해가 갔다.
리카는 아이돌에 진심이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라는 성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항상 자신의 꿈은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말해왔던 아이다.
그렇기에 케이어스의 무대는 충격적이었으리라.
‘옛날에 같은 선에서 달리고 있던 애들이, 갑자기 따라잡지도 못할 거리에 선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분명 KS 엔터에서 나와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은 2년도 안 될 텐데.
그 시간 동안 케이어스는 너무도 멀리 나아갔다.
리카도 나름 노력했을 텐데, 그 결과물이 마음만큼 나오지 않으니 속상했을 테지.
성필은 리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 리카. 멤버들 실력이 더 다듬어지고, 우리 회사가 돈 많이 벌면 더 잘해줄게. 무대도 더 비싸게 꾸며주고, 곡이랑 뮤직비디오도, 의상이랑 안무도. 앞으로 더 잘해줄게.’
대답 없는 리카를 향해, 성필은 마음속으로 미안함을 전했다.
“리카 데려왔어. 혼자 자판기 앞에서 음료수 마시고 있더라.”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멤버들은 성필의 예상과 달리 딱히 반응이 없었다.
카메라 리허설도 마치고, 생방까지의 기다림만이 남았다.
성필은 잠시 대기실에서 나와 민경섭과 함께 흡연장으로 갔다.
“형 케이어스 뮤비 봤어요?”
“어. 공개 8시간 만에 조회 수 1000만 넘었더라. 대박 났어.”
“역대 걸그룹 데뷔 중 최고 성적 아니에요?”
“그렇지. 초동도 10만 찍는 거 아니야?”
“설마요.”
흡연장에서는 성필과 민경섭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둘만 케이어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케이어스는 장안의 화제였다.
“소녀연맹 뜰 거 같지 않냐?”
“애들이 다 괜찮더라.”
소녀연맹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성필은 승천하는 광대뼈를 바로잡고 건물 안으로 돌아왔다.
“수고해라.”
“네. 형도요.”
민경섭은 스테이지 쪽으로, 성필은 대기실로 향했다.
기본적으로 기획사는 음방에 매니저를 둘 데려온다. 한쪽은 현장에서 변동 사항을 체크하며 제작진과 빠르게 조율한다.
반대로 대기실의 매니저는 멤버들의 케어와 현장과의 협조를 담당한다.
연락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응?”
대기실에는 또 리카가 없었다.
“리카 어디 갔어?”
대답이 없었다.
“설하야, 리카 어디 갔어?”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어요.”
성필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성필은 백설하를 데리고 대기실을 나왔다.
“리카랑 싸웠어?”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직접적으로 싸우진 않았더라도 비슷한 일이 있던 모양이다.
“말해줘.”
“……그게요.”
들어보니, 싸운 것도 아니었다.
신아름이 평소처럼 리카에게 농담을 했는데, 그 내용이 리카의 역린이었던 모양이다.
“KS 엔터에서 떨어진 게 당연하다, 라고…….”
그 말만 똑 떼서 들어보면, 웬 신아름 같은 나쁜 녀석이 있나 싶지만.
말이란 분위기나 상황과 결합하는 것이다.
백설하는 그때, 신아름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평소처럼 리카에게 농담을 던진 것이라고 한다.
‘진짜 역린(逆鱗)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네.’
가끔 리카를 보고 ‘역시 KS 엔터 출신!’ 같은 칭찬을 하면, 그녀는 헤헤 웃으면서 당당히 가슴을 폈었다.
KS 엔터 출신이란 건 리카가 가진 자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하필 케이어스의 무대를 보고 난 뒤에 건드렸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리카 찾아서 올게.”
“죄송합니다…….”
“아냐. 아름이 혼내지 마.”
“네.”
“벌써 혼낸 거 아니지? 아름이 표정 장난 아니던데.”
“아, 아니에요. 아름이도 리카가 이럴 줄은 몰라서…… 미안해하는 거예요. 아마도.”
성필은 리카를 찾으러 갔다.
다행히 생방까지는 시간이 남아서 여유가 있었다. 가장 먼저, 아까도 리카를 발견했던 휴게 공간으로 갔다.
“…….”
리카는 아까랑 똑같은 자리에 있었다.
이 정도면 찾아달라는 거 맞지?
“리카.”
“…….”
“거기 먼지 많아. 일어나.”
“……하이(네).”
성필은 리카를 벤치에 앉히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평소에 리카가 그토록 마시고 싶어했던 초코 음료였다.
리카는 성필의 호의에 당황했다.
“이거 칼로리 132이에요. 이거 먹으면 15분 동안 시속 6.7km로…….”
“마셔.”
리카는 음료수를 쥐기만 하고 있을 뿐 뜯지도 않았다.
“고민 있어? 있으면 나한테 털어놔. 아니면 나한테 못 하는 말이야?”
“……이사님.”
은근히 내려간 톤의 목소리.
리카가 진실을 말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런 상담은 얼마 만인지.’
연습생이나 그룹 멤버들 간의 다툼은 여간 처리하기 골치 아픈 게 아니다.
남자와 여자 둘 다 저마다의 문제가 있다.
‘엡실론 걔들 케어하는 데 고생 좀 했지.’
가지각색의 개성을 가진 남자애들을 모아두고 한 공간에 밀어 넣으니, 다툼이 없을 수가 없었다.
사소한 일 하나로 신경전이 이어지다가, 기어코 주먹다짐까지 간 사태도 있었다.
성필은 그날 진심을 다해 화냈다.
아예 회사 사람들 보는 앞에서 싸우라고 투기장을 열어줬더니, 싸운 녀석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진짜 싸웠으면 그것도 문제지만.
‘그 뒤로 진짜 심하게 갈궜었지.’
과도한 연습, 과도한 비난, 과도한 통제.
단순히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엡실론이 기획사, 즉 성필이라는 적을 공유하고 그룹끼리 뭉치길 바라서였다.
그 전략은 통했다.
이후에 보상을 줘서 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애들은…….’
좀 더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멤버들 간에 파벌이 갈리면 진짜 답이 없다. 아무리 풀어주고 화해를 시켜도, 눈에 보일 때만 세상에 둘도 없는 동료일 뿐이다.
뒤에서는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곤 했다.
전생에서, 성필은 반목하는 두 멤버의 사이를 풀어주기 위해 여행까지 보내주었다.
그리고 둘이 허심탄회 대화할 상황을 마련했다. 둘은 서로가 섭섭했던 점을 말하고 포옹까지 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그래도요. 저는 평생 언니랑 친하게는 못 지낼 거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성필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에 몰렸었다.
‘만약 우리 애들도 그런 거면 어떡하지.’
이번 일로 신아름과 리카가 반목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둘 사이에서 나머지 셋이 눈치를 보다가, 결국에는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해서 파벌이 갈리지는 않을까…….
‘이건 초장에 해결 봐야 한다.’
반드시 화해시켜야 해!
“만약에요…….”
“응.”
“제가 KS 엔터 데뷔조로 뽑히고, 에리카가 떨어졌으면요.”
“……응?”
“에리카가 가로 엔터로 들어왔겠죠?”
에리카.
케이어스 엔터의 리더다.
나이는 19살로, 멤버들 중 나이는 중간에 위치한다.
보컬, 댄스, 랩, 비주얼, 퍼포먼스, 작곡, 연주.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만능 아이돌이다.
“뭔 말이야?”
“에리카가 가로 엔터로…….”
“뭐라는 거냐고.”
“……에?”
성필의 말투는 누가 들어도 화가 난 채였고, 목소리는 섬뜩하게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리카는 처음 보는 성필의 모습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너 후회하는 거야?”
“에, 으우…….”
“케이어스 무대 보고? 왜, 가로 엔터에 온 게 마음에 안 들어? KS 엔터에 있었을 때 데뷔조로 뽑혔으면, 지금의 케이어스 같은 안무랑 곡 받고 더 좋은 성적을 냈을 텐데. 그런 뜻이야? 그게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아름이 말 듣고 이렇게 화내는 거야 지금?”
“아니에요!”
리카가 손과 발, 머리를 다 동원해서 아니란 의사를 전했다.
“이사님이…… 이사님 때문이잖아요!”
“나?”
“네! 케이어스 무대 홀린 듯이 보고 눈물도 흘리고! 저희 무대 보곤 안 울었잖아요!”
그거야 눈물 닦고 대기실로 들어갔으니까.
“케이어스가 대기실에 들어오고 나서 계속, 계에속 보고 있고! 그리고 앨범 보고 홀려서!”
리카는 무릎 위에 둔 손을 꾹 쥐었다.
“따, 따로 사인도 받으러 가고…….”
“봤어?”
“봤어요! 퇴근하는 에리카 붙잡고 앨범에 사인받았잖아요!”
이거 참. 못 볼 꼴을 보였네.
“근데, 알아요. 에리카…… 에리쨩…… 예뻐요. 제가 남자라도 반할 거 같아요. 여자라도 반해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아니라 에리쨩이 떨어졌으면요. 에리쨩이 가로 엔터에 들어와서 지금 제 자리에…… 이사님도 더…….”
자신이, 리카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결국에는 우연이 아닌가.
리카든 에리카든, 혹은 케이어스의 누구든.
데뷔조에서 떨어졌으면 성필이 알아보고 데려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자신은 결국 대체품이 아닌가.
우연찮게 KS 엔터 데뷔조에서 떨어져서 가로 엔터에 있을 뿐.
그것 외엔 성필에게 주목받을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에리카가 가로 엔터에 들어왔으면 성필이 더 기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아 진짜 뭐라는 거야. 못 듣고 있겠네.”
“네?”
“리카 너 기억 안 나? 내가 너 어떻게 찾았는지?”
“……앗!”
“난 KS 엔터 데뷔조에서 떨어진 아무나 찾아갔던 게 아니야. 너를 콕 찝어서 찾으러 갔던 거야. 네가 케이어스에 붙고 에리카가 떨어졌어도, 난 에리카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필요했던 건 KS 엔터 연습생이 아니라 리카 너였어.”
성필은 리카가 듣고 싶은 말만 콕콕 짚어서 해주었다.
그렇기에 리카는 속이 뻥 뚫렸다.
기뻤다. 기쁠 수밖에 없었다.
리카 자신이 바랐던 말만 해주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10대 마지막 사춘기라도 겪는 거야? 이상한 데서 예민하네.”
“이사님 때문이잖아요!”
리카가 활력을 되찾았다.
고작 성필의 말 몇 마디만 듣고서.
“무대 보고 울고! 에리쨩 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하고! 따로 사인도 받으러 가고!”
“나 케이어스 팬이야.”
“에엑?!”
“어제부터.”
“손나(그런), 그럴 수가……. 이사님이 잡덕이었다니!”
“그리고 난 3년 4개월 전부터 네 팬이었어.”
“손나(그런)?!”
“이제 서열 정리 끝났지?”
리카는 부끄러움과 기쁨이 합쳐진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니요! 안 끝났어요! 더 말해주세요!”
“나는, 에리카 수십 트럭으로 가져다줘도 너 한 명을 고를 거야.”
리카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어, 이 말이 좀 먹히나?
성필은 자신감을 얻고 말을 이었다.
“그만…….”
“케이어스보다 우리 소녀연맹이 더 소중하고, 더 예뻐 보이고, 더 잘해 보여. 그래, 스킬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튼 에리카? 걔보다 리카 네가 훨씬 더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그만 하세요!”
리카가 성필의 입을 막았다.
얘가 부끄러워서 이런가?
성필도 부끄러웠다.
그런데 리카가 좀 이상했다. 그녀의 눈은 성필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어깨너머를 향했다.
성필이 뒤를 보았다.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에리카가 있었다.
“…….”
“아, 와, 와타쿠시(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에리카는 초조하게 자판기 앞에 서서 음료수를 뽑았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조심스레 멀어졌다.
“예쁜 사랑 하세요…….”
에리카가 떠나간 자리에는, 수치심으로 죽기 직전인 두 남녀만이 남았다.
“케이어스 사녹 마치고 퇴근한 거 아니었나?”
“시리마센(몰라요).”
둘은 말없이 대기실로 돌아갔다.
“리카, 아까 미안…….”
드물게도 신아름이 죄송스러움을 잔뜩 담아 사과를 전했다.
“나니가(뭐가)?”
“아까 그거, 케이어스.”
“에에, 아름이 그런 거 신경 쓰고 있었어? 담이 작네! 아타시(나)는 그런 말 신경도 안 쓴다구! 나는 마음이 넓으니깐!”
“신경도 안 쓰긴 개뿔이!”
신아름이 리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걱정해서 손해 봤네! 너 일부러 이런 거지?!”
“아타시(나)는 무죄야아아아앗!”
* * *
6주의 음방 활동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매일 새벽마다 샵으로 달려가는 삶도 이제 끝이다.
멤버들은 섭섭하면서도 뜻깊게 마지막 음방을 소화하고, 오랜만에 찾아온 휴일을 즐겼다.
가로 엔터에서 준 공식적인 휴가였다.
반면 가로 엔터의 다른 인원들은 여전히 바빴다.
“앨범 활동 기간이 끝났는데, 이 정도면 대성공이라고 봅니다.”
다들 성필의 의견에 동의했다.
“먼저, 뮤비 조회 수 천만 달성!”
박수와 함성이 회의실을 몰아쳤다.
조회 수 천만을 달성한 지는 꽤 됐다.
활동이 5주 차에 들어갈 때쯤 천만을 넘었다.
“댓글도 다 좋은 것만 있어요.”
성필은 가져온 댓글 캡처를 프로젝터에 띄웠다.
[Hayang’s singing&voice is the no.1 and only one that people never got to hear up until Girls’ league’s debut. She is so talented!]
“……언제부터 가로 엔터 기본 스펙이 영어가 됐는데요.”
민경섭이 옅은 불만을 표했다.
“미안. 이건 나중에 보여주려고 했는데. 일단 다른 것부터 볼게요.”
[아 ㅋㅋ 또 중소에서 이상한 노래 내놨네 ㅋㅋㅋㅋ 라고 한 저는 한 달 동안 ‘아니’만 흥얼거립니다.]
[진짜 마성의 노래다. 10시간 동안 이 노래만 듣고 있다.]
[나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내 취향 누가 조사했어? 누가 노래로 내래? 진짜 잘했다.]
“기본적으로 곡엔 호평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이상하단 말이 많았는데, 사람들도 점점 적응하니까 좋게 들리나 봐요.”
홍규헌마저도 처음 ‘아니’의 곡을 듣곤 대체 이게 뭐냐며 당황했었는데, 대중들은 더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곡가 정지음의 천재성은 도저히 숨겨지지 않는 빛 같았다.
“처음 이 곡 받아올 때, 박 이사가 백지라고 했었지. 오로지 멤버들의 색으로만 채워 넣어야 하는 곡이라고. 잘 된 거 같네.”
음악적으로 성공했다고 자부할 수준이었다.
평범하지도, 비슷한 컨셉의 아이돌과 비교될 수도 없는, 소녀연맹만의 독창적인 곡이다.
이 정도면 소녀연맹의 스타일은 대체재가 없을 정도다.
“곡 외에 뮤비도 반응이 엄청 좋아요. 이건 진짜 대단해요.”
[이게 뮤비냐 영화냐.]
[아무 데서나 멈추고 캡처 떠도 전부 배경 화면으로 쓸 수 있겠는데?]
[멤버들마다 컨셉 확실한 거 너무 좋다 ㅜㅜ]
[우리 아라 정장 넘 찰떡이양]
[영국 귀족 컨셉 일본인 한국 아이돌 이시카와 리카 파이팅!]
[리카가 탄 말이 되고 싶다]
[삼색기 흔들 때 설하 카리스마 뭐냐고…… 나도 혁명하러 가면 돼?]
[뮤비에 4.19 넣는 아이돌이 어딨냐. 뜻깊고 좋은 시도다. 앞으로도 이런 거 많아지길.
└ 아름이가 직접 낸 의견이래요!]
[하양이가 군인들한테 꽃 내미는 거 보고 울었다……. 사랑은 가장 큰 힘이라고 말하는 거 같아서…….]
[마지막에 멤버들 다 하늘 쳐다보고 그림자 지는 거 뭐임? 세계관 떡밥임?]
[가로 엔터 이런 거 할 수 있으면 서프레스한테는 왜 그랬어!]
“……마지막 댓글은 왜 캡처해왔어?”
“아, 죄송합니다. 한꺼번에 따다 보니까.”
성필은 급히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곡과 뮤비 반응을 보았고, 남은 건 멤버별 호응도에 대한 것이었다.
어차피 뮤비나 곡에 달린 댓글을 몇 개 찍어온 것이라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참고는 됐다.
“다들 골고루 좋아하네.”
“그런 분위기에요. 그리고 저희가 예상치 못한 반응이 있는데요, 이런 종류예요.”
[Hayang’s singing&voice is the no.1 and only one that people never got to hear up until Girls’ league’s debut. She is so talented!]
“하양이 음색이 좋다는 댓글이 꾸준히 달려요.”
장하양의 목소리는 낮고 울리는 쪽이다.
귀에 팍 꽂히는 느낌이 없어, 아이돌 노래를 부를 때 약점이 되리라 예측했다.
하지만 반대였다.
장하양은 백설하의 트레이닝을 받으며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갔다. 또한 랩 트레이닝도 그런 개성의 확립에 도움을 주었다.
“대체 불가능하다, 그런 느낌이죠.”
“그러게요. 가요계나 돌판 뒤져봐도 하양이 음색 비슷한 사람이 없어요. 진짜 대체 불가능이네요.”
그 덕에, 가로 엔터의 예상과 달리 장하양은 노래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반응 보고를 마친 뒤, 성필은 다시 뮤비 분석으로 넘어갔다.
“이게 또 상승 추이가 특이해요. 보통 뮤비 조회 수는 공개 후 일주일 안에 상승 폭이 크게 줄거든요. 그런데 ‘아니’는 3주가 되도록 상승 폭이 균일했어요.”
대중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마도 SNS와 커뮤니티를 통해 전방위 영업을 펼치는 ‘인민이들’의 역할이 클 것이다.
“인민 여러분들이 괄목할 성과를 취해주셨습니다.”
“한 이사님이 말씀하시니까 진짜 북쪽에 계신 분 같네요.”
‘인민’은 소녀연맹 팬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팬클럽 이름이 ‘피플(People)’인데 팬들이 ‘인민’을 자칭했다.
소녀연맹의 애칭이 ‘소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멤버들은 단체 라이브 방송을 켜면 ‘소련이들’이라고 불린다.
가로 엔터가 예상한 결과이긴 하지만, 보면 볼수록 헛웃음이 나왔다.
“저 근데요. 진짜 이거 이름 문제없는 거 맞아요? 국보법에 걸리는 거 아니죠?”
“민 매니저. 농담을 뭐 이렇게 진지하게 해?”
“농담 아닌데요…….”
소련과 인민이라니.
수십 년 전이었으면 국보법으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네이밍이다.
팬들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멤버들이 SNS 게시물을 하루라도 거르면 ‘소련이 국정원 지하에 있니?’란 댓글을 달거나, ‘충격! 현직 아이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혀들어가…….’ 같은 글이 올라오곤 한다.
“설마 그렇겠냐.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잖아.”
어쨌거나, 가로 엔터로서는 기뻐할 수밖에 없는 성과가 이어졌다.
“아쉽지만, 아니. 이것도 기쁜 소식이긴 한데. 앨범 판매량은 현재 1만 5천을 넘었습니다. 2만은 못 넘을 거 같고요.”
초동판매량은 1만을 찍었고, 이후로도 5주 동안 5천 장을 더 판 것이다.
이것도 대성공이었다.
다시 한번 환호가 회의실을 채웠다.
“음원 성적은…… 네, 다음 기회를 노려봅시다.”
옛날처럼 침울해지지는 않았다.
국내 최대 음원사인 워터멜론 차트에는 광탈했어도, 다른 음원 차트들에서는 중위권까지 오르는 등 준수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지금은 순위에서 밀려났지만, 다음에는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앨범 판매량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제 연말인데, 이 의미는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홍규헌을 필두로 모두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총 8개에 달하는 대중 음악 시상식이 연말을 맞아 성대하게 열린다.
“그리고 저희는 대부분 시상식 여자 신인상 부분에 노미네이트됐어요!”
이미 익숙해진 기쁨의 파도가, 역시 회의실을 휩쓸었다.
회의를 마치고, 성필은 이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백설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희가 신인상 받았다고요?!]
“아니, 노미네이트됐다고.”
[노미네이트…… 가 뭐예요?]
“후보로 올랐다고.”
[아아, 그럼 상을 받은 건 아니네요.]
“그렇지.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아.”
[상 받으면 좋겠네요. 항상 제 꿈이었는데.]
“응. 좋은 결과가 있길 빌자. 아니, 믿을게. 꼭 신인상 하나는 가져가자!”
[네!]
* * *
백설하는 멤버들을 불러 모아 시상식 노미네이트 소식을 알렸다.
“시상식이 8개나 있어요?”
“응. 그거 전부에는 못 나가고 몇 개만 나갈 거야. 그리고 우리가 노미네이트된 신인상 부문에는…….”
모두 케이어스가 있다.
그 말을 들은 멤버들이 굳게 다짐한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백설하가 선창했다.
“투쟁!”
멤버들이 답했다.
“해방!”
선창.
“소녀!”
답.
“연맹!”
합창.
“승리!”
아자 아자 파이팅…… 그런 기묘한 구호가 이어지고, 멤버들의 눈은 벽에 걸린 케이어스의 포스터로 향했다.
리카가 에리카에게 선물로 받아온 것이었다.
“한 곳에서만이라도 꼭 신인상을 받아야 해!”
“아타시(저) 기분이 이상해요! 피부 안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거 같아요!”
“피는 원래 붉은색이야.”
“소련 만세!”
“소녀연맹이라고 해줘. 진짜 이상하게 들리잖아…….”
리카가 뮤비 소품이었던 붉은 깃발을 힘차게 흔들었다.
아닌 밤중의 난리에 1층 국밥집 사장님이 올라와서 조용히 하라고 했다.
멤버들은 쭈글쭈글 잠자리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