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흰색이 베이스로 깔린 사무실 안이 탁하게 물드는 것 같았다.
홍규헌은 세로로 뒤집힌 세상을 바라보며, 기어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했다.
‘워터멜론 차트에 잠깐이라도 든 게 어디야.’
지금쯤이면 음방도 끝났겠지.
아니, 음방이 확실히 끝난 시간이지.
시청률 1% 남짓의 음방은 전파를 타고 대한민국 곳곳으로, 전 세계 수십 개국에 생방송됐을 것이다.
과연 사람들이 소녀연맹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과연 사람들의 귀에, 마음에 닿았을까.
글쎄.
음원 차트를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미치겠다.’
98위로 진입했다. 그리고 소리 소문도 없이 100위 밖으로 밀려났다.
화력이 이어지지 못했다.
기대했다.
인터넷에서 반응이 오니까, 데뷔부터 확 뜨지 않을까 기대했다.
헛된 기대였다.
중소는 결국 중소.
첫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다들.”
홍규헌은 바닥에서 일어났다.
살짝 벗겨진 힐을 바로 신고, 사무실의 중앙에서 말했다.
“실시간 차트에 든 건 고무적이야. 워터멜론에서 광탈된 건 아쉽지만, 다른 차트에서는 오히려 순위가 올라가고 있다면서. 민 매니저, 맞지?”
“네. 원래 92위로 진입했던 게 지금은 86위입니다. 윈터 차트에서요. 다른 곳은…….”
“다른 곳도 비슷하겠지.”
홍규헌의 머릿속에서 숫자가 지나간다.
끝을 모르고 이어진 0의 행렬.
데뷔 앨범을 위해 멤버들에게 들인 돈이다.
0은 홍규헌의 머릿속에 쌓여 뇌가 터지도록 짓눌렀다.
그 압박감과는 다르게, 홍규헌은 희망을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데뷔는 전반부에 불과해. 이 기세를 이어가는 게 중요해. 우리는 0에서 겨우 플러스로 돌아선 거니까. 남은 활동 기간에 열심히 임하고 다음 앨범을 기약하자. 정규 혹은 미니. 아직 확정은 나지 않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란 것만 알아둬.”
폐와 뇌가 손아귀에서 쥐어짜이는 감각과는 다르게, 홍규헌의 혀는 부드럽게도 움직였다.
“굳이 승패를 따지자면, 난 이겼다고 말하고 싶어. 적어도 수만 명의 사람이 소녀연맹의 이름을 알게 된 거잖아. 이번 방송으로.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하자.”
부하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홍규헌도 마주 끄덕여주고, 말했다.
“오늘 하루 고생했다. 자진해서 남아서 결과도 확인해주고 말야. 집에 가서 쉬어. 박 이사랑 민 매니저는 시간 맞춰서 멤버들 픽업하고.”
“알겠습니다.”
“좋아, 해산.”
* * *
다음 날, 멤버들은 케이블 음방 대기실에 있었다.
새벽부터 샵에 들러 꾸미고, 아침에 방송국 스튜디오로 왔다.
멤버들은 피곤했다.
대화라도 하면서 활기를 되찾고 싶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겠다.
대기실 안은 인간의 입 따위는 가볍게 제압할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
벽면 의자에 기대어 앉은 두 남자.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
석세스 엔터 총괄 프로듀서 윤상열.
두 사람 때문이었다.
* * *
다시 어제.
뮤직 스테이지 사녹을 마친 날의 저녁.
멤버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녀들의 눈은 몇 초에 한 번씩 음원 차트와 아이튜브 댓글 창을 오갔다.
“저희 실시간 차트 광탈했는데요.”
8시.
신아름의 말에 멤버들이 석상처럼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때쯤, 리카가 바닥을 굴렀다.
“그딴 거 알고 싶지 않았어어어어어!”
“우리 망한 거야?”
“아라쨩 조용해애애애애!”
“망하면…… 회사에서 우리한테 들인 돈이 다 빚이지?”
“언니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오오오!”
“아냐. 계약 기간 채우거나 회사가 방출 의사를 드러내면 빚은 안 져도 돼. 계약서에 적혀 있잖아.”
“쌤은 그런 걸 왜 알고 계시는 건가요?! 알아보셨나요? 알아보신 거죠?! 우리가 망할 거라고 생각해서어어엇!”
조아라가 리카를 제압했다.
“근데 다른 차트에는 전부 걸려 있어. 뮤비 댓글도 반응 좋고. 조회 수도 쭉쭉 오르고 있어.”
“몇인데?”
“이제…… 10만.”
두 시간에 10만인가.
높은 건지 낮은 건지 알 수가 없다.
백설하가 아는 조회 수 상승 추이는 대부분 인지도 있는 아이돌의 것이었다.
그런 그룹은 한 시간에 수십에서 수백만도 찍던데…….
“마마(엄마)……, 응, 리카다요(리카야). 마마노 타카라모노 리카다요(엄마의 보물 리카야)…….”
리카가 부모님께 전화를 걸고 있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려고 전화한 건 아닌 듯했다.
“으응, 다이죠부(괜찮아). 아타시와 겐키다요(나는 건강해)…….”
“리카 뭐라고 말하는 거야?”
“뭐, 대충 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래요. 울먹이면 잘도 엄마가 잘 지내겠다고 생각하겠다.”
조아라는 리카의 일본어 통역관으로 통했다.
그녀는 리카와 오랫동안 같이 붙어 다닌 결과, 일본어 리스닝이 가능하게 됐다.
저녁을 다 먹은 뒤, 백설하는 멤버들에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다들 핸드폰 그만 보고 자. 우리 몇 시간 뒤에 또 일어나서 샵에 가야 하잖아. 핸드폰 금지.”
쉽게 지켜지진 않겠으나, 말이라도 해 둬야 눈 좀 붙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백설하도 방에 들어가서 핸드폰을 보았다.
멤버들의 개인 SNS에는 성필의 지시에 따라 음방 소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부분 팬에 대한 감사의 글이었다.
‘아름이 얘는 라이브까지 켰네…….’
역시 방송에 출연했던 신아름답게, 라이브에 들어온 시청자의 수는 다른 멤버의 추종을 불허했다.
혹여 신아름이 팬들 앞에서 실언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백설하는 신아름이 라이브 방송을 종료할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알람이 울렸다.
‘내가 잠들었나?’
눈이 쏟아지는 폭포처럼 무겁다.
그런데도 몸은 일어나 이불을 개고 커튼을 걷으며 창문을 열었다.
겨울바람에 장하양이 몸을 움츠렸다.
“하양아, 일어나.”
백설하가 장하양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네에…….”
이어서 백설하는 동생 라인의 방으로 갔다.
불이 켜져 있었다.
눈이 충혈된 신아름이 조아라와 리카를 깨우는 중이었다.
리카와 조아라는 서로를 껴안아 하나처럼 붙어 있었다.
“아름아, 애들 좀 깨워줘. 부탁할게.”
“네…….”
“잠 못 잤어?”
“잠이 안 왔어요.”
“힘들겠다. 커피 타줄까?”
“아뇨. 이사님이랑 매니저님이 가져오실 거잖아요.”
멤버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씻었다.
한 명씩 씻은 건 아니었다.
한 번에 두 명씩 들어가서 최대한 빠르게 정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일찍 나왔네.”
숙소 밖에선 민경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성필도 있었다.
가로 엔터에는 아직 밴이 없어서, 멤버들을 데려다줄 때면 차가 두 개 필요했다.
사실 옛날, 가로 엔터가 ‘서프레스’를 케어할 때까지만 해도 밴이 있었다.
그러나 서프레스가 해체한 뒤, 한구인이 차를 팔기로 결정했었다.
“이이이 사사사 님님니이이임.”
리카가 기괴한 멜로디로 성필을 부르며 조수석에 탔다.
뒤에는 조아라와 신아름이 자리했다.
“안녕하세요오, 안안안 녕녕녕 하세요오오.”
“아니.”
“도시테(어째서)?!”
자세히 보니 성필의 눈 아래에도 다크서클이 져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 멤버들만이 아니었다.
“다들 샵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이라도 눈 붙여.”
그렇게 했다.
리카만 빼고.
“이사님. 저희 망한 걸까요. 소녀연맹은 결성부터 해체의 위기를 맞은 걸까요.”
“어쩌면.”
“어쩌면?! 위로는 못 해줄망정 제 마음에 불을 지르시면 어떡해요!”
“리카 한국어 구사력 미쳤다. 거의 현지인이야.”
“앗, 그런가요? 헤헤. 아니 칭찬 말고 위로를 해달라구요!”
샵에서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을 받은 뒤, 스태프들과 함께 스튜디오로 향했다.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과 카메라로 가득했다.
흔히 음방 출근길이라 불리는 곳이다.
“아라쨩. 나 예뻐? 봐줘.”
“어, 예뻐.”
“안 봤잖아! 박 이사님 저 어때요? 카메라 앞에 서도 될까요?”
“어.”
“다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저기압인가요…….”
리카는 스스로 매무새를 정돈하고 위풍당당히 출근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많은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쪽팔려…….”
신아름과 조아라는 그런 리카를 모른 척하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소녀연맹의 팬들도 아닐 텐데 저런 행동을 하다니.
할 수만 있다면 리카를 쥐구멍 안에 넣어두고 싶다.
“안냐세요 리카예요! 이시카와 리카입니다! 돌 석 내 천 배나무 리 꽃 화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다행히 반응이 있었다.
리카의 애교 넘치는 말투와 포즈에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거기다 소녀연맹 팬도 없는 건 아니었다.
익룡과 같은 고함이 그것을 증명했다.
리카는 팬서비스 때문에 한발 늦게 포토라인에 섰다.
카메라가 몇 번 터지고, 그걸로 끝이었다.
“왠지 삼삼하네요. 더 반응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정도면 반응 있는 거지. 우린 무명이나 다름없잖아.”
성필은 대기실 번호를 살폈다.
“여기다.”
대기실 문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소녀연맹, 그리고 또 하나.
“글로브(Globe)? 그룹 이름이 장갑이네요. 특이해요!”
“리카, 그 말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하면 안 돼.”
장갑을 뜻하는 글로브(Glove)가 아니었으나, 그것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글로브라고 하면 장갑밖에 몰랐으니까.
“아, 아니. 특이하단 게 나쁘단 게 아니라, 귀엽고 기억에 잘 남는다구요…….”
“우리는 아이돌이니까 한마디 한마디 신경 써서 해야 해. 네 의도가 그게 아니라도 다른 사람 귀에는 아닐 수 있어.”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조심해. ……이사님?”
백설하가 리카를 훈계하는 시간 동안에도, 성필은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문이 안 열리나? 그건 아니었다.
성필은 아예 손잡이에 손도 안 가져다 댔다. 그의 눈은 다른 그룹의 이름에 박혀 있었다.
‘글로브. 그래, 이 시기에 데뷔하면 만날 수밖에 없지.’
이상증세를 보이는 건 성필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민경섭도 당황해서 우뚝 멈췄다.
“왜 그래요?”
답답함을 참지 못한 조아라가 물었다.
“아니야. 들어가자.”
성필은 노크하고 ‘소녀연맹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들어오란 대답이 왔다.
익숙한 목소리다.
문을 열자 죄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비웃음, 그리고 오만한 낯짝.
“뭐야, 진짜 왔네. 성필이 잘 지냈냐?”
석세스 엔터 총괄 프로듀서, 윤상열.
* * *
다시 현재.
절찬리에 대기실이 침묵에 잠겨 있다.
성필과 윤상열, 두 남자가 뿜어내는 네거티브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목을 죄는 듯했다.
‘아니, 사이가 안 좋으면 떨어져 있기라도 하지. 둘이 왜 붙어 있는 거야?’
조아라는 어이가 없었다.
성필의 이야기는 신아름을 통해 대충 들었다. 그녀의 말에 따른다면, 윤상열은 성필의 철천지원수였다.
그런데 왜 굳이 붙어서 앉아 있지?
덕분에 사람들만 어색해서 죽으려 한다.
“얘들아, 드라이 리허설이야. 가자.”
무대 현장의 민경섭에게서 연락을 받은 성필이 말했다. 그는 멤버들을 데리고 무대로 가려 했다.
그때, 익숙하다 못해 귀에 딱지가 앉아버린 비웃음이 들려왔다.
“아, 너네 차례구나. 빠르네.”
음악 방송의 앞 순서는 인지도가 적은 아이돌과 가수로 채워진다.
뒤로 갈수록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유명 아이돌과 가수가 나온다.
윤상열의 ‘빠르다.’는 말은, 소녀연맹이 인지도가 낮다고 비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필이 바로 받아쳤다.
“그렇지 뭐. 근데 리허설 몇 개 뒤에 형네잖아. 그냥 같이 가서 대기하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곧 나올 텐데?”
석세스 엔터의 신인 걸그룹, ‘글로브’의 차례는 중간보다 약간 앞이었다.
“흐하하! 곧은 뭔 놈의 곧. 우린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라. 너네 늦겠어.”
성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하지만 마땅히 받아칠 말이 없었다.
“가자.”
성필은 멤버들의 앞이라 저기압을 숨기고 싶었으나, 말투에서 모두 드러났다.
드라이 리허설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오자 윤상열과 글로브는 눈에 띄지 않았다.
“윤상열 그 인간은 매니저도 아니면서 왜 찾아온 거야.”
신아름이 수위 높은 발언을 뱉었다.
원래 ‘그 새끼’라고 말하고 싶었을 테지만, 스태프의 귀를 의식해서 ‘그 인간’이라고 한 것이다.
“회사에 매니저가 다 도망갔나? 하긴, 하는 거 보면 그럴 만도 하지.”
“그분이랑 박 이사님이랑 사이가 그렇게 안 좋아?”
“네에 언니. 진짜 팀사님 석세스 엔터에 있었을 때 모습을 언니가 봤어야 해요. 이장님이 그 인간 인중에 주먹 안 꽂은 게 용하다니깐요.”
팀사는 뭐고 이장은 뭐여.
이사와 팀장을 결합한 건가.
사근사근한 말투지만, 그 호칭들은 신아름이 장하양에게 보여주는 작은 반항이었다.
장하양은 신아름에게 성필을 ‘이사’라고 부르길 강요한다.
얼마간은 그 강요가 통했지만, 요즘 들어 신아름은 두 용어를 바꿔쓰며 간을 보고 있었다.
“음, 남자들은 기 싸움을 이렇게 하는구나.”
장하양은 신아름의 간 보기를 넘어가 주었다.
넘어가 준 건지, 대기실이라서 참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박 이사님 좀 봐주세요……. 대기실 공기가 무거워요. 싸우실 거면 기 싸움 말고 밖에 나가서 주먹다짐해주세요.”
“리카 무서운 말 하네……. 마음에 안 든다고 때리면 그게 인간이야? 동물이지.”
문득 회귀하기 전이 떠올랐다.
회의실에서 윤상열을 발로 차버렸던가…….
“말하고 싶으면 해도 돼. 맘껏 떠들어. 나랑 그 인간만 폼 잡고 있는 거니까.”
“하아, 윤상열 그 인간 안 가나? 애들이랑 얘기도 하고 싶은데.”
신아름이 석세스 엔터를 싫어한다고 해서 글로브 자체를 싫어하진 않았다.
함께 연습생 생활을 했던 이들이니, 추억은 깊고도 많았다.
도란도란 윤상열의 더러운 점을 말하고 있던 중, 문이 열리며 윤상열과 글로브가 돌아왔다.
뒤에는 못 보던 매니저가 한 명 달린 채였다.
“너희들 똑바로 해라.”
“……네.”
윤상열은 들어오자마자 글로브의 리더에게 한 소리 하고 원래 자리에 앉았다.
다시 대기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아니, 변화가 있긴 했다.
글로브의 멤버 중 한 명, 소민이 자꾸 성필이 있는 곳을 흘끗거렸다.
성필은 그런 소민을 무시했다.
‘말 걸지 마. 말 걸지 마. 제발 말 걸지 마.’
소민은 눈치가 없단 소리를 자주 들었다.
둔하고 요령도 없고, 그럼에도 사람을 미워하는 법을 몰라 항상 곤욕을 겪었다.
신아름은 그런 소민을 특별히 신경 써주었다.
물론 신경 써주었단 건 도와줬단 뜻도 있지만, 주로 그녀의 무신경한 행동을 혼냈단 것이다.
‘소민아 가만 있어 제발.’
그 소민은, 오랜만에 본 성필에게 인사를 하려 했다.
반가워서였다.
하지만 아까부터 성필이 눈길도 주지 않고 있던 터라, 주의를 끌어보려 자꾸만 부산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성필은 끝까지 그녀를 무시했다.
소민이 성필에게 인사라도 했다간, 돌아가서 윤상열에게 뭔 말을 들을지 모른다.
“야 양소민. 아까부터 왜 자꾸 꼼지락거려?”
“아, 죄송합니다…….”
결국 윤상열에게 한 소리 들었다.
‘애를 잡네 잡아.’
글로브는 척 봐도 스트레스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저 인간은 왜 음방에 따라온 거야?’
앨범 활동 기간 첫 주라서 직접 보러 오기라도 한 건가?
전생에서는 안 그랬으면서.
‘내가 나가고 자기 맘대로 만든 그룹이라 이거지. 애착이 남다르단 건가…….’
애착이 남다르면 좀 잘해주던가.
애들 쥐잡듯이 잡는 꼴 하곤.
시간이 지나 소녀연맹과 글로브가 카메라 리허설까지 끝내자, 윤상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잘해.”
“네, 살펴 가세요.”
윤상열이 나가자.
“하아.”
신아름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윤상열이 나간 문을 향해,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중지를 만들어 보였다.
바로 옆에 있던 백설하가 신아름을 찰싹 때려서 제지했다.
“다들…… 잘 지냈어?”
성필은 윤상열이 나가자마자 글로브 애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들은 성필이 말을 걸어오자 당황하면서도, 표정에서 희미한 활기가 드러났다.
“팀, 팀장님 안녕하세요!”
양소민이 참아왔던 인사를 터뜨렸다.
“어, 소민아 안녕. 데뷔 축하한다.”
그날은, 소녀연맹 멤버들보다 글로브 아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신아름도 그러했다.
“그래서 팀장님이 뭐랬는지 알아? ‘설하 씨가 없으면 안 돼요오옷!’”
“신아름 너 죽는다 진짜. 말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눈치 보지 않고 ‘팀장님’이란 호칭도 마음껏 썼다.
소녀연맹 멤버들도 저들끼리 대화를 했으나, 성필과 신아름이 빠져서 그런지 활기가 적었다.
* * *
“음방 활동 7일째, 무사히 마무리됐네. 마음 같아선 샴페인이라도 터뜨리고 싶은데, 애들한테 미안하니까 참을게.”
홍규헌은 그리 말하곤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나 충격에 기절할 준비 됐으니까 말해.”
참고로, 한구인을 제외한 다른 직원들도 모두 소파에 몸을 묻은 채였다.
홍규헌의 말마따나, 발표를 들으면 진짜 충격받아서 기절한 인원이 나올지도 몰랐다.
“왜 저만…….”
“한 이사가 가장 마음이 강하잖아. 부탁한다.”
“저도 떨립니다만…….”
한구인은 투덜대면서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데뷔곡 ‘아니’가 담긴 앨범 ‘Girls’ League’의 초동판매량은…….”
“으아아악! 나 심장 터질 거 같아! 성필아 나 심폐소생술 좀 해줘!”
“뭔 소리야! 누나나 내 심장 되살릴 준비해! 아, 진짜 터지겠다. 죽을 거 같아…….”
“……저기, 말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말씀하세요.”
“초동판매량은…….”
“흐억, 꺽, 끄읔.”
“경섭이가 호흡 곤란 왔어!”
“…….”
일주일 동안, 가로 엔터의 임직원들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주로 지옥이었다.
결국 워터멜론 차트에는 이름을 박아넣지 못했다. 반대로 비주류 음원 차트에는 꾸준히 이름이 떠 있었지만, 괄목할 성과는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뮤비 조회 수였다.
몇 시간 전 80만을 돌파해서, 곧 100만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한구인은 그들의 발광에 탄식하더니, 어딘가로 가서 화이트보드를 가져왔다.
“그냥 적어서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으우우, 누나 나 눈을 못 뜨겠어. 내 눈꺼풀 좀 대신 올려주라…….”
“우리 서로 눈꺼풀 올려줄래?”
한구인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냥 화이트보드에 숫자를 적어 곧바로 보여주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너무도 신속하게 행해져서 다들 볼 수밖에 없었다.
“끼아아아아아악!”
성필이 비명을 질렀다.
기쁨의 비명이었다.
“처, 천 장! 초동 천 장 넘었어요! 으하하하! 성공이에요! 대성공은 아니지만 선방했어요!”
“미친! 내가 천 장 넘게 판다고 했지! 너희들한테 말했지! 내가 말했었다고!”
온몸을 공벌레처럼 말고 있던 홍규헌도 활력을 되찾아 방방 뛰어다녔다.
성필과 홍규헌이 서로를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탁자에 걸려서 넘어졌다.
한구인은 한심하단 듯 둘을 바라보았다.
“여러분. 잘못 보셨습니다. 다시 보십시오.”
“네? 그, 그럼 천이 아니라 백이었던…… 에에에으어으아에엑?”
성필이 한구인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보드를 낚아챘다. 그리고 눈으로 숫자를 핥듯이 바라보았다.
“일. 십. 백. 천. 므, 마, 만? 영(0)이 네 개……?”
“이리 줘봐!”
홍규헌이 보드를 빼앗아, 아까 성필이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한 이사. 이거 잘못 썼네. 다시 써서 보여줘.”
“그게 맞습니다.”
“……어?”
“일만이백일곱(10207) 장. 앨범 ‘Girls’ League’의 초동판매량입니다.”
앨범이 발매되고 일주일 동안의 판매량.
초동판매량.
인기의 척도나 마찬가지인 지표다.
그 초동판매량이 1만 장이 나왔다.
“…….”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혀가 굴러가지 않는다.
비현실적이다.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는다.
폭죽이 하늘 높이 올라가, 터지지 않았다.
그 정도의 불쾌함과 어색함이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
변변찮은 마케팅과 프로모션을 진행한 중소기업의 걸그룹이 초동판매량 1만 장을 달성할 수 있을 리…….
“사장님?”
성필이 무언가 깨달은 듯 홍규헌을 보았다.
“서, 설마 사재기…… 는 아니죠? 사장님이, 사재기하신 거…… 아니겠죠? 차트에 이름 걸고, 음방에서 점수 얻자고…….”
그것 외에는 이 기현상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1만 장은 장난인 수치가 아니다.
만약 저 숫자가 사실이라면, 가로 엔터는 일주일 동안 매출 1억 이상을 달성한 것이다.
“하하,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란 듯, 성필이 어색하게 웃었다.
반대로 홍규헌의 입가는 눈에 띄게 굳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