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사람들이 바쁘게 일터로, 학교로 떠날 시간.
멤버들은 하루를 불태운 듯한 허탈감에 빠졌다.
몇 개월 동안의 노력을 4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쏟아냈다.
이 4분을 위해서 그토록 심장을 졸이고 매일같이 땀을 흘려왔던가.
허탈했지만, 그와 한 쌍을 이뤄 충만감과 후련함도 찾아왔다.
첫 무대는 완벽했다.
너무도 완벽했기에, 사전 녹화임에도 다시 찍을 필요가 없었다.
멤버들을 오래 보지 못한 팬들은 아쉽겠지만, 스태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결과였다.
“다들 고생했다!”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성필이 반겨주었다.
“이사님…….”
리카는 성필을 보자마자 입술을 덜덜 떨더니,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성필에게 달려갔다.
리카가 성필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 울었다.
어찌나 우렁차게 우는지 성필의 가슴이 다 떨려왔다.
“잘했어, 리카”
왜 우는지 리카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리카를 이해했다.
“……너 언제까지 울 거야.”
그런데 우는 것을 들어주는 일도 잠깐이지, 리카는 10분 넘게 성필의 품 안에서 울었다.
조아라는 당황하는 성필을 대신하여 리카의 목덜미를 잡고 떼어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와, 실화냐.”
성필의 흰 셔츠에 리카의 화장이 잔뜩 묻어 있었다. 눈물 때문에 번지기까지 했다.
세탁기에 넣고 돌려도 원상태로 돌아올 가망은 적어 보였다.
“아저씨 그 옷 버려야겠…….”
“아라쨔아아앙!”
다음 희생양은 조아라였다.
리카는 또 조아라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쏟아내려 했다.
그 즉시, 누구보다도 빨리 성필이 리카를 떼어냈다.
“야 의상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울려면 혼자 벽 보고 울어!”
“으아아아아앙! 너무해애애애애!”
결국 성필은 리카를 가슴에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리카의 눈물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계속 울기만 하니까 당혹스러웠다.
“저희는 이제 뭐 하나요? 생방송 때까지 기다려요?”
다른 이들보다 감정적 동요가 적었던 장하양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니. 이제 가면 돼.”
“하아, 다행이다.”
장하양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양아, 어땠어?”
“음, 좋았어요.”
“뭐야. 그게 끝이야?”
“아하하, 드는 생각이야 많은데 말로 표현하려니까 어렵네요.”
“그래, 수고했어.”
“네?”
“어, 왜? 내가 이상한 말 했나?”
“‘잘했어’가 아니라 ‘수고했어’예요? 리카한테는 잘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저는 리카보다 못한 거예요?”
“아아, 그거. 수고도 했고 잘하기도 했지. 특히 댄스 브레이크 때 숨도 안 쉬고 봤어.”
그제야 장하양은 안심하고 미소를 보였다.
“나는요.”
“아라도 잘했어.”
“덤 같이 말하니까 섭섭하잖아요. 구체적으로 평가해줘요.”
“내가 팬이었으면 너 보고 앨범 바로 10장 주문했다.”
“그럼 저는요!”
신아름이 경쟁의식을 불태우며 조아라의 옆으로 다가왔다.
“말이 필요해?”
“네!”
“……아니,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했다고.”
“아항, 그쵸. 저는 굳이 평가가 필요한 수준도 아니고.”
“그럼 나는 평가가 필요한 수준이란 거야?”
“아라는 노력 더 해야지. 나에 비하면.”
“설하 쌤, 아름이가 하는 말 들었어요? 자기는 우리랑 달리 어나더 레벨이라는데? 진짜 오만하다.”
“아니 언니들 말고 너 말야 너 너 조아라 너!”
신아름과 조아라가 투닥거렸다.
성필은 아직까지 소감을 말하지 않은 마지막 멤버, 백설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하는 어땠어?”
백설하가 움찔했다.
아직도 성필이 그냥 ‘설하’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설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곧 평소의 미소를 되찾았다.
“좋았어요.”
“담백하네. 언니 라인은 다 연륜이 보여.”
“저는 두 번째 데뷔니까요.”
“하하. 그러게. 제일 여유 있더라. 잘했어.”
피드백도 끝났다.
성필은 크게 손뼉을 쳤다.
“스탭분들, 새벽부터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스태프 등.
소녀연맹을 위해 새벽부터 같이 따라와 준 이들도 있었다.
스태프들도 오늘의 주인공인 건 확실했다.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주인공이다.
“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시고! 내일 또 봅시다!”
6주 동안은 계속 숨도 돌릴 틈 없이 바쁠 것이다. 음방을 6개나 나가니, 매일 같이 긴장의 연속이다.
그래도 오늘은 사정이 낫다.
사녹을 뜬 덕에 이제 겨우 아침이니, 쉴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멤버들도 무대 위의 감상에서 벗어나 뒤늦게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소녀연맹 팀은 대기실을 비웠다.
슬슬 음방에 출연하는 그룹들과 매니저, 스태프들이 오고 있었다.
이 대기실에도 두 팀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다.
“자, 다들 놔두고 온 거 없지? 나간다?”
“네.”
“근데 리카, 언제까지 붙어 있을 거야?”
“흐엥, 끄흨, 끄으…….”
“아라야, 리카 좀 맡아줘. 이 상태로는 밖에 못 나가잖아.”
조아라가 리카와 어깨동무함으로써, 성필을 오랜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좁은 복도를 지나 십수 명의 인원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아이돌로 보이는 여자가 오고 있었다.
그녀는 벽면에 붙어서 소녀연맹 인원이 수월히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연습한 듯한 자연스러운 인사가 계속 나온다.
그리고 그녀가 신아름과 눈이 맞을 때쯤.
“어, 효민아!”
신아름이 그 아이돌에게 아는 체를 했다.
“너도 오늘 여기 나와?”
“어, 응.”
“아아, 맞다 맞다. 저번 주에 데뷔했지. 나오는 게 당연하네. 나 너희 나오는 음방 다 봤거든.”
효민이라 불린 아이는 그룹 ‘포유’ 소속이었다.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젝트 포유에서는 신아름과 유독 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효민은 신아름의 말에 기계적으로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저, 나 이제 대기실 가봐야 해서.”
“미안.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지? 오늘 방송 파이팅!”
“고마워. 나도 너 무대 볼게.”
“응응. 잘해!”
효민이 떠나가고, 조아라가 말했다.
“너 진짜 싫어하나 보다. 역시 방송이랑 현실이랑 다른가? 대놓고 쌩까려고 하던데.”
“……그러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필은 조아라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효민이 급한 기색을 보였지만, 대놓고 쌩까려고 하다니?
잘만 얘기했구만.
복도에서 물어볼 것도 아니라, 성필은 그저 발걸음을 재촉했다.
방송국 건물을 나오니 실감이 났다.
‘정말로 우리 애들이 데뷔했구나.’
들어올 때는 사방이 다 어두웠는데, 지금은 아침 햇볕이 쨍하다.
“경섭아, 애들 숙소에 데려다주고 와. 나는 먼저 회사에 가 있을게.”
“네. 얘들아, 가자.”
“아.”
백설하가 성필을 보며 무엇을 말하려 했다.
작은 제스처였으나, 성필은 귀신같이 알아보았다.
“설하 왜?”
“아, 아니에요. 별거 아녜요.”
* * *
멤버들은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조아라와 신아름은 점심도 안 먹고 숙면에 빠졌고, 남은 세 사람만이 조촐하게 식사했다.
“리카. 아까 왜 그렇게 운 거야?”
백설하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우는 거야 이해되지만, 리카는 정도가 심했다.
거의 수십 분을 눈물만 흘려댔으니 말이다.
성필의 가슴에 얼굴을 박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사람이 그토록 길게 울 수는 없다.
“음…… 원래 아타시(저)의 철칙은 말을 짧게 끊는 거였지만요. 이번에는 길게 말해야겠네요!”
아직도 눈이 퉁퉁 부어있는 리카가 활기차게 답했다.
“무대에 내려오고서요, 눈물이 나올 거 같더라구요. 쌤이랑 언니도 아시죠 그 느낌?”
“알지.”
“나도 울 뻔했어.”
“에에 하양 언니가요?!”
“응.”
“젠젠(전혀) 티 안 났어요!”
장하양은 무대에 올라 팬에게 말을 걸 때도,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얘는 철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마아(뭐), 어쨌든 저는 울려고 했죠.”
“우는 것도 아니고 울려고 한 건 뭐야. 리카는 우는 것도 계획하고 울어?”
“아뇨 아뇨! 눈물이 나오기 직전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이돌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3년을 훌쩍 넘었다.
그 인고의 시간 동안, 무대 위에 선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버텨왔다.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쉬고 싶은 것도 안 쉬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달려 나갔다.
그 결과를 처음 보여준 순간이었다.
기념비적인 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이 눈물은 제 인생에서 한 번뿐인 눈물이겠구나, 그 생각이 팍 드니까! 정말 있는 힘껏 울어 보자! 이게 아타시(저)의 마지막 데뷔 눈물이니까!”
그래서 있는 힘껏 울었다.
그게 전부였다.
“마지막에 가선 억지로 울었지만요, 헤헤. 이대로 가다간 기네스 갱신 아닌가! 그래서 오기로 계속 울었어요!”
“박 이사님 옷은 어쩔 거야.”
“정산받으면 사드릴 거예요!”
“아하하, 영원히 못 사드릴 수도 있겠네.”
“하양 언니 웃으면서 무서운 말 하지 마세요?!”
리카가 섬뜩한 미래를 떠올리며 공포에 떨었다. 그녀는 장하양에게 ‘나빠 나빠!’라고 말하며 애교 섞인 공격을 퍼부었다.
‘마지막 눈물?’
백설하는 리카의 말을 듣고 충격받았다.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방송국 앞에서, 백설하는 성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모두의 앞에서 하긴 부끄러운 이야기여서, 따로 잠깐 그의 시간을 얻고자 했다.
예를 들어 숙소 앞에서.
그런데 숙소로 데려다준 건 민경섭이었고, 성필은 회사로 갔다.
‘내일 말씀드려야겠네.’
그렇게 생각했지만, 리카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어떤 말이든, 그 말을 하고 싶은 기분과 순간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무뎌져, 당시에 떠올렸던 말이 퇴색되곤 한다.
백설하는 그게 무서웠다.
내일이면, 백설하가 성필에게 하고자 했던 말이 원래의 색을 잃어버릴까 봐.
* * *
한구인은 커피를 열 잔째 마시고 있다.
손혜빈은 억지로 영양가도 없는 아이튜브 영상만 보고 있다.
민경섭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홍규헌은 바닥에 누워 천장의 점을 세고 있…….
“이 인간들 또 이러고 있네!”
성필은 주말에 방에서만 뒹구는 아이를 채근하듯 소리쳤다.
이번에는 이런 꼴을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다.
성필은 홍규헌을 억지로 일으켰다.
홍규헌은 성필에게 끌려 일어나자마자 다시 바닥에 몸을 뉘였다.
“그냥 냅둬. 난 바닥에 누워 있는 게 제일 편해.”
“음원 공개되려면 4시간도 더 남았는데 그때까지 누워 계시게요?”
“나도 몰라.”
다들 긴장될 것이다.
멤버들의 첫 무대도 충분히 긴장될 것이지만, 곧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벤트가 찾아온다.
음원 정식 공개.
뮤비 정식 공개.
앨범 정식 발매.
성필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사장인 홍규헌은 어떻겠는가.
본인의 돈을 수십억 들인 결과물이 나오잖는가.
정상적인 상태면 그게 더 이상하다.
‘나도 13억 꽂긴 했는데…….’
원래 자기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별다른 감흥이 없다.
아니면 멤버들을 너무도 믿기 때문일까.
그때 성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신경질적인 시선 세 개가 쏟아졌다.
성필은 황급히 사무실을 탈출했다.
“어, 설하야 왜.”
[이사님 지금 회사에 계신 거죠?]
“응.”
[잠깐 회사 앞으로 나와주실 수 있으세요? 할 말이 있어서요.]
백설하가 성필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하는 경우는 업무가 있을 때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직접 불러내어 허튼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팽팽히 당겨진 고무줄처럼 긴장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일까.
“전화 줬으면 내가 숙소까지 갔을 텐데. 무슨 일이야?”
백설하는 숙소에서 입는 간편한 옷차림이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이사님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
방송국에서 했으면서 굳이 찾아와서 또 하다니, 마음이 참 깊다.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기쁜 마음이 훨씬 컸다.
“어, 그래. 나도 고맙…….”
“저 있잖아요. 사람들이 가끔 ‘옛날에 이랬으면 이렇게 됐을 텐데.’하고 말하는 것들 말이에요. 저는 그런 말 들으면 ‘이 사람이 아직도 어리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응?”
감사 인사인가 했는데, 백설하가 전조도 없이 긴 이야기를 이어갔다.
“왜냐면요, 과거란 건 후회해도 바뀌는 게 없잖아요. 헤헤, 이런 말 하는 저도 가끔 입 밖으로 후회를 내긴 하는데. 암튼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 그러게. 그렇네. 그런 게 있지. ‘내가 옛날에 이랬으면 이렇게 됐을 거야!’란 말은, 뭔가 좀 허세 부리는 거 같기도 하지.”
성필은 백설하가 하는 말의 맥락을 몰랐으나, 진심을 다해 맞받아주었다.
회사까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의미가 없을 리 없으니까.
“네. 지금의 자신을 안 좋게 보는 거 같잖아요. 본인이 선택한 길을 모은 게 현재의 본인인데. 그랬는데…… 선택하지 않은 길을 떠올리면서…… 그런…….”
백설하가 심호흡했다.
“저요, 이사님한테 너무 고마워요. 그때, 카페에서 만났을 때 저를 잡아주셔서요. 아이돌 하자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저요, 무대에 올라서고요. 너무 기뻤어요. 행복해서, 정말, 이제 죽어도 괜찮겠다 같은 생각도 들어서…… 너무 행복했어요…… 고마워요 이사님…….”
백설하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갔다.
성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
성필은 입을 틀어막고, 백설하보다 더 큰 울음을 참았다.
“저, 저는, 저는, 그때 이사님이 저를 안 잡아줬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너무 무섭고, 또 그래서 지금이 너무 좋고, 그래요, 고마워요. 그냥, 그거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그리고 이사님은…….”
“…….”
“이사님은 오늘 저희 무대 보고,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해서…….”
* * *
무대에 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출 때.
백설하는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영상으로 확인했기에 그게 현실이란 건 알았다. 그래도 떠올려보면, 구체적인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건 가슴을 가득 채우는 행복뿐이었다.
‘내가 다시 아이돌이 됐구나.’
다시 꿈속에서 살게 됐구나.
행복하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자신의 감정이다. 아이돌로서의 감정이다.
과연 무대를 봤던 프로듀서는 어떤 생각을 할까. 자신처럼 행복했을까?
백설하는 그게 궁금했다.
프로듀서가, 자신을 찾아준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백설하의 행복도 반쪽일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사님은 어떻…… 이사님?”
성필은 거친 숨소리와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거센 울먹임을 밀어 넣고 있었다.
자꾸만 시선을 피하고 크게 숨을 뱉어내는 모습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울음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설하야, 아까도 그랬지만. 너희 무대 봤을 때도 그랬지만. 나 지금 너무 행복해…….”
그 뒤로 나오는 비유는 백설하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장성한 자식이 배우자를 데려와 절을 하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는데…….
전혀 모르겠다, 그런 기분.
“네가 나한테 고마워하는 것처럼, 나도 너한테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때 나를 따라와 줘서. 널 만난 건 진짜 내 인생에 둘도 없는 행운일 거야. 고맙다.”
성필은 백설하의 감사만큼이나 감정적이고 오글거리는 말을 되돌려주었다.
마치 성필이 백설하를 붙잡고 길거리에서 고백을 했을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백설하가 느끼는 감정은 그때와 비교가 안 됐다.
이번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는 감정이 일치했으니까.
백설하는 한동안 침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폐로부터 목소리를 뽑아낼 수 있었다.
“아, 네…….”
이 순간, 백설하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몸이 심장을 구속하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뛴다.
더 크게, 더 거칠게, 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몸이 그것을 막는다.
늑골과 피부, 근육이 심장을 억누른다.
이것만 없다면 더 크게 뛸 수 있을 텐데.
지금 자신의 귀를 때리는, 고막을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고동을 들려줄 수 있을 텐데.
“감사…….”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인간에게는 성대와 혀가 있으니까.
심장의 목소리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백설하는 입을 열었다. 심장의 목소리를 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물론, 그건 심장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전부는 아니었다.
“온 김에 다른 분들한테 인사나 하고 가자. 너 보면 질리도록 칭찬해줄 거야.”
백설하는 다시금 생각했다.
자신의 몸이 감옥이라고.
* * *
성필과 백설하는 2층의 사무실로 향했다.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ark(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오히려 나를 강하게 할 뿐이다).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ark.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ark…….”
한구인이 고향의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기독교도인 홍규헌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꺄하하핰! 여기 와서 이것 좀 봐요! 개웃김 리얼.”
손혜빈은 아이튜브에 올라오는 옛날 예능 영상에 꽂혀서 자꾸 보라고 강요했다.
반응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민경섭은 일찍이 이 광기를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피신했었다.
성필은 조용히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다들 바쁘네. 다음에 인사드려야겠는데.”
“아, 죄송하네요. 이사님도 바쁘신데 제가 괜히 불러낸 거 아니죠?”
“아냐. 나는 멀쩡해.”
“네?”
“말이 헛나왔네. 나가자. 숙소까지 데려다줄게.”
성필은 백설하를 숙소에 데려다준 뒤, 회사로 돌아와서 광기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6시.
때가 왔다.
“판매 사이트에 앨범 뜬 거 확인했어요.”
손혜빈은 언제 정신이 나갔었냐는 듯 보고를 시작했다.
홍규헌과 한구인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컴퓨터 앞에 자리 잡았다.
“아이튜브는 아직 안 떴습니다.”
“원래 거긴 예정 시간 맞춰놔도 제시간에 안 떠요. 음원 사이트는요?”
“1분 지났는데도 안 뜹니다.”
유통사가 실수라도 했나?
조마조마하게 새로고침만 반복하고 있자, 6시 2분에 최신앨범 소개 소(小)배너가 변했다.
소녀연맹의 데뷔 앨범 재킷이 보인다.
유통사에 말해서 소소하게 음원 사이트에 광고도 걸었는데, 운 좋게도 바로 떠준 것이다.
“떴다!”
손혜빈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는 즉시 음원을 재생했다.
제대로 흘러나온다.
수백 번도 더 들었던 곡이지만, 음원 사이트에서 직접 재생되는 것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다른 음원 사이트는?”
“전부 무사히 떴습니다.”
“오케이…….”
“아이튜브에도 뮤비 올라왔어요.”
조회 수 1.
다들 한 모니터에 붙어서 뮤비를 감상했다.
뮤비가 재생되는 동안 숨 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새삼스럽지만, 진짜 잘 만들었어요.”
민경섭의 말마따나, ‘아니’의 뮤비는 걸작이다.
돈을 바른 티가 났다.
특히 성필과 한구인의 눈에 이 뮤비는 더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직접 촬영 현장을 보았으니 어련할까.
“이제 실감이 나네. 우리가 또 아이돌을 내놨어.”
홍규헌이 한구인과 주먹을 맞부딪쳤다.
성필은 그것을 보자 살짝 질투가 났다.
“둘만 아는 추억, 둘만 아는 사인, 둘만 아는 행동……. 초창기 멤버 아닌 사람은 서럽습니다.”
“박 이사도 하자.”
홍규헌이 성필의 어깨에 주먹을 맞부딪쳤다.
“진짜 나빠…….”
“하하.”
드디어 소녀연맹이 사람들의 앞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 시간이 지난 7시, 다시 음원 차트를 확인했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규모도 큰 워터멜론의 실시간 차트.
“있어요! 98위요!”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아!”
“끼에에에엣!”
다들 힘차게 만세를 부르며,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서로를 껴안았다.
“다른 음원 사이트에서도 차트에 들었어요!”
“미친, 미친, 미친, 미친, 된다. 이거 된다. 데뷔부터 흥할 거야!”
1시간 뒤.
“워터멜론 실시간 차트에서 광탈이요.”
“…….”
“다, 다른 음원 차트에서는 오히려 좀 올라갔어요. 네, 뭐…… 워터멜론이 젤 중요하긴 하지만…….”
홍규헌이 다시 바닥에 드러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