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11화 (111/760)

111화

[해볼래?]

“음.”

뮤직 스테이지 메인 PD, 구상준의 권유에 성필은 말을 끄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고작 데뷔를 4일 앞두고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사녹을…… 저희가…….”

[그래, 너희가.]

음악 방송은 기본적으로 생방송이다.

하지만 사전 녹화라 하여, 생방송 전에 무대를 녹화하고 생방송 시간에 틀어주기도 한다.

주로 인지도가 쌓인 그룹이 스케줄 소화를 위해 사녹을 따거나, 임팩트 있는 무대를 꾸미기 위해 사녹을 요청하기도 한다.

만약 몇 주 전에 사녹 제안이 왔다면, 성필은 침을 질질 흘리며 당장에 하겠다고 답했을 것이다.

“정말 감사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바로 답변하기 힘들겠네요.”

[부담가지지 마. 시간 비어서 연락한 거니까.]

성필의 꾸준한 대인관계 관리가 만들어낸 쾌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녹으로 얻는 메리트는 크지 않다. 물론 시간 안에 여러 번 녹화하여, 가장 잘한 부분을 내보낼 수 있단 건 큰 장점이다.

‘근데 그러려면 무대를 꾸며야 할 거 아니야.’

무대를 꾸민다는 건 곧 돈이 든단 것이다.

아마도 기한에 쫓겨서 볼품없는 무대가 튀어나올 것이다.

차라리 벽 스크린에 배경 영상이나 틀어주는 게 나을 텐데.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안 좋아하겠지?

[내가 부담가지지 말라고 했잖아. 무대 구성은 그냥 생방 때랑 똑같이 가도 돼.]

“어, 그래도 돼요?”

[나도 데뷔 4일 전에 연락하는 거면 양심이 있지. 이건 순전히 너에 대한 호의라고. 어때, 고마워 죽겠지?]

“그럼 할게요!”

[판단 빠르네.]

고마워 죽겠냐고? 고마워 죽겠다!

안 그래도 멤버들은 데뷔 무대라서 긴장돼서 죽으려 할 텐데, 사전 녹화라니!

게다가 뮤직 스테이지는 첫 음방 무대다.

방송 무대에 적응하는 기회로도 유용하겠지.

“뮤직 스테이지에서 사녹을 해준다고?”

과연, 홍규헌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너 뭐 우리가 모르는 거래라도 했어? 대접이 상당한데. 뇌물 바친 건 아니지?”

“집 지붕 팔아서 마련한 기회입니다. 유용하게 써주세요.”

“박 이사네 집 지붕 팔아서 사녹 뜰 수 있으면, 내가 앞으로 남은 음방은 전부 다 사녹으로 해줄 수 있겠다.”

부자는 농담도 굉장히 임팩트있구만!

부럽다.

“사녹인데 무대가 생방이랑 같은 건 아쉽네. 4일 만에 무대 디자인해줄 업체 없나?”

“적당히 꾸미는 건 되겠죠. 근데 그다지 효과가 있을 거 같진 않아요.”

“진짜 아쉽네.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울 게 뭐 있어요. 이미 큰 행운을 잡은 거잖아요.”

성필의 긍정적인 답에 홍규헌도 감화되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기회지. 그럼 시간은?”

“아침이요.”

“어?”

“아침 6시 40분이요.”

“드라이 리허설도 전이야?”

“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다른 아이돌의 구멍 난 자리를 메우는 거라고 했던가.

“애들 수면 패턴부터 걱정이네.”

하지만 사녹의 장점은 명확하다.

“진행시켜.”

“넵!”

* * *

사회초년생 유용태의 삶은 힘들다.

아니, 졸업하자마자 일자리가 생긴 건 고맙지만. 그래도 힘들긴 하다.

‘오늘은 칼퇴해야지.’

과장님이 출장 때문에 회사에 없거든!

6시 54분.

유용태는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소녀연맹 SNS를 탐방했다.

습관이었다.

돌아다니다 보면 작은 떡밥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해서.

‘어?’

정말 떡밥이 있었다.

소녀연맹 공식 스타그래프 계정에 글이 올라온 것이다.

티저나 포토인가?

들어가 봤더니 장문의 글이 있었다.

“사전 녹화 방청 신청……?”

방청이면 그거지?

음악 방송에 관객으로 참여하는 거?

‘어, 언제야. 아니. 어디서 하는 거야?’

가로 엔터 홈페이지다.

사실상 소녀연맹 공식 홈페이지 같은 곳으로, 멤버들의 일상을 입사(入社)부터 시작해서 그녀들의 긴 여정을 타임라인으로 정리해둔다.

덕분에 처음 소녀연맹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멤버들의 연습생 생활을 시간순으로 볼 수 있었다.

유용태도 처음 이 사이트를 발견했을 때, 밤을 새워가면서 멤버들의 여정을 전부 읽었다.

‘어디 보자. 신청은 추첨식?’

인원은 200명으로 제한된다.

‘앨범 사전 구매 내역이랑 신분 증명만 하면 된다, 라…….’

공식 팬카페가 없고, 데뷔를 하지 않았기에 방청 신청도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추후에는 신청 방식을 바꿀 것이란 추가 내용과 함께, 공지 사항이 끝났다.

‘가고 싶다.’

정말 가고 싶다.

신아름과 멤버들의 실물을 볼 수 있다.

이런 기회가 살면서 얼마나 있을까?

‘근데 평일이네. 연차 쓸 수 있을까? 아니, 반차라도 쓸 수 있나? 너무 갑자기잖아!’

“유 사원. 퇴근 안 해?”

“네?”

옆 팀의 대리가 말을 걸어왔다.

“윤 과장님이 일거리 산더미처럼 주기라도 했어? 벌써 30분 오바인데 일어나지도 않네.”

“아, 아닙니다. 이제 갈 겁니다. 대리님도 퇴근하십니까?”

“아니. 난 야식 사서 오게.”

“앗…….”

유용태는 집으로 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돌들의 사녹 신청 후기 등을 찾아보며, 그 피 튀기는 현장의 열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흰 화면이 계속 떠도 절대 새로고침을 누르면 안 되고……. 근데 추첨식이면 랜덤으로 돌린단 뜻이지? 왜 순서대로 안 할까?’

늦어도 괜찮으니 앨범을 사전 구매하고 사녹 신청하란 뜻인가.

이 집 장사 잘하네.

메모를 계속하던 유용태는 갑자기 키보드에 머리를 박았다.

“성공해도 뭐하냐고. 연차 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유용태는 한숨을 쉬고 신아름 마이너 갤러리에 접속했다.

개념글을 쭉 둘러보던 그는 순간 의문이 생겼다.

‘왜 뮤비 티저 해석 글을 올려둔 사람이 이렇게 적지?’

컨셉에 온갖 궁예질(예측)이 넘치고 있으나, 정작 유용태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소수였다.

유용태는 고민하다가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다들 진짜 모르는 건가?’

지금까지 나온 컨셉 사진과 멤버별 뮤비 티저를 보면 명확하지 않나?

[이번 곡의 컨셉은 혁명이다. 먼저 조아라의 뮤비 티저를 보겠다. 이 구도, 이 사진과 비슷하지 않은가?]

유용태는 레닌의 사진을 가져와 글에 붙였다.

그는 심심풀이로 글을 쓴다는 게, 어느새 1시간 동안 글을 붙잡고 있었다.

게시글을 올렸다.

조회 수가 높아지는 것을 보다가, 그는 그냥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사녹 가고 싶다…….’

부모님이 아프다고 거짓말이라도 할까, 그런 패륜적인 망상마저 해버렸다.

* * *

“언니 이거 보세요.”

장하양이 백설하의 곁에 붙어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저희 뮤비 컨셉 완전히 맞추신 분이 계세요.”

신아름 마이너 갤러리의 개념글이었다.

리카의 명예혁명부터 시작해서 멤버별로 주어진 혁명의 이름을 전부 맞추었다.

커뮤니티 최초 업적이었다.

“와, 대단하다. 티저만 보고도 이게 되는구나.”

“그쵸? 저도 아름이가 알려줘서 봤는데 팬분들이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두 사람 그대로 스탑.”

백설하와 장하양이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앞을 보았다.

성필이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었다. 그는 핸드폰 안에 담긴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보였다.

“잘 찍혔네.”

백설하와 장하양이 어깨를 딱 붙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친밀함이 돋보인다.

연출한 느낌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이사님 사진사로 이직하는 거 어떠세요?”

“내가 무슨 사진사야.”

“저희 사진 찍는 거 보면 잘하실 거 같아요.”

“너희들 찍을 때만 그렇지.”

성필의 핸드폰은 용량초과 메시지를 밥 먹듯이 띄웠다.

매일 새로운 사진이 채워지니 수백 기가의 용량마저도 부족했다.

‘며칠 안 지났는데 또 용량 다 찼어?’

성필의 덕질 꿀팁.

까톡으로 ‘내게 톡 보내기’를 해두면 된다.

이러면 용량 제한 없이 사진을 저장하고 볼 수 있다.

성필의 덕질 꿀팁 끝.

“둘이 뭐 보고 있었어?”

“뮤비 티저 해석글이요.”

“아, 그거. 저도 봤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성필은 팬들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일장 연설을 늘어두다가,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숙소 안 가세요? 내일 사녹이잖아요.”

저녁 6시.

백설하와 장하양은 휴식 중이다. 휴식이 끝나면 또 연습을 하러 갈 심산이다.

“연습도 중요하지만, 잠을 충분히 못 자서 내일 실력을 제대로 못 내면 그것도 문제잖아요.”

멤버들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내일이 데뷔야?

그럼 잠을 충분히 자야지!

컨디션 조절해야 하잖아!

그런데 연습 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떡하지!

같은 느낌으로.

성필은 자율에 맡겨둔다고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멤버들이 쉬었으면 좋겠다.

쉬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적어도 몸은 편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더 연습하고 싶어요.”

백설하의 답이었다.

“제가 전에 있던 그룹 데뷔 때도요. 무대 전날에 잠을 못 잤어요. 컨디션 조절하려고 다 같이 연습 일찍 마치고 숙소로 갔는데, 결국 한숨도 못 잔 거예요. 그리고 무대에 섰는데…….”

실수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지도 못할 애매한 실수지만, 백설하는 무대가 끝나자마자 오열했었다.

“더 연습할걸. 누워 있을 시간에 노래라도 한 번 더 불러보고, 춤이라도 한 번 더 출걸. 계속 후회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연습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성필은 더는 말하지 않고 두 사람의 앞을 떠났다.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모두 모여있다.

한구인은 커피를 열 잔째 마시고 있다.

손혜빈은 억지로 영양가도 없는 아이튜브 영상만 보고 있다.

민경섭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홍규헌은 바닥에 누워 천장의 점을 세고 있다.

……바닥?

“사장님 왜 바닥에 누워 계세요! 더러우니까 빨리 일어나요!”

“아냐. 이게 제일 진정돼.”

전체적으로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내일이 멤버들 첫 음방 무대이기 때문이다.

더해서, 뮤비 공개일이자 음원 발매일이기도 하다. 또한 앨범 판매 시작일이다.

전쟁으로 비유하면, 내일이 드디어 선전포고하는 날인 것이다.

“그래도요. 바닥에 병균 같은 게 있으면…….”

“한 이사가 직접 손걸레로 다섯 번도 넘게 닦았으니까 괜찮아.”

“어째서…….”

“한 이사는 불안하면 청소하거든.”

한구인은 본인의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마시는 커피가 열한 잔을 넘어갔다.

성필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다들 새벽까지 기다릴 거예요?”

멤버들은 새벽 12시 30분 무렵부터 샵에 가서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을 받는다.

동행하는 건 성필과 민경섭뿐이다.

나머지는 떠나는 멤버들을 응원해주기 위해 모여있는 것이었다.

“기다려야지.”

홍규헌, 손혜빈, 한구인은 멤버들이 회사를 나가는 순간에만 얼굴을 보이기로 했다.

그 전부터 얼굴을 보면 있는 말 없는 말 다 떠들어댈 것 같다는 이유였다.

괜히 멤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애들은 집에, 아니. 숙소에 안 간대? 조금이라도 등 붙이고 자야 할 텐데.”

“연습하겠대요.”

회사 사람들이 불안한 만큼, 멤버들도 불안할 테니까.

그 불안 속에서 시간을 떠나보냈다.

사무실을 감싼 둔중한 적막.

문밖에서 흐릿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

가끔 복도를 걷는 발소리와 소녀들의 웃음, 희미한 대화 등 모든 게 성필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시간이란 호수에 잠긴 느낌이다.

나가고 싶은데도, 시간은 성필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수 시간은 너무도 깊고 무거웠다.

“됐다.”

습관처럼 시계를 보던 홍규헌이 말했다.

12시 10분.

다들 사무실을 나섰다.

짜기라도 한 듯 멤버들도 연습실에서 나왔다.

백설하와 홍규헌이 각 무리의 앞에서 서로를 보았다.

“다들.”

홍규헌은 멋진 말을 하고 싶었다.

아까 바닥에 누워 있을 때는 온갖 말이 다 떠올랐는데, 긴장에 가득 찬 다섯 쌍의 눈을 보니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홍규헌은 자신이 가장 많이 들어왔고, 가장 마음을 울렸던 말을 읊었다.

“믿고 있어.”

“잘하고 와!”

“평소에 하시던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손혜빈과 한구인이 경쟁적으로 외쳤다.

이어서 성필과 민경섭이 멤버들의 앞으로 나왔다.

“가자.”

멤버들은 1층으로 내려갔다.

백설하는 나가는 문 앞에서 뒤로 돌아보았다.

2층 난간에 세 사람이 있었다.

사장, 홍규헌.

어릴 적의 우상, 손혜빈.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준 한구인.

세 사람의 기대를 받으며, 백설하는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문을 넘으면…….’

데뷔다.

데뷔로 향하는 길의 초입에 서게 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달리기 시작한 기차처럼 목적지까지 멈출 수 없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른다.

두려움과 기대가 범벅된 마음이 백설하의 발을 끈적하게 잡아끌었다.

“설하야.”

물속에 잠긴 것만 같던 분위기가 변했다.

“아……?”

백설하는 누가 불렀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지만 익숙하지 않은 부름이다.

곧 백설하의 눈이 한곳에 머물렀다.

성필이 있었다.

“그래, 설하 너.”

“……네?”

놀란 건 백설하만이 아니었다.

멤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필을 보고 있다.

평소에 항상 ‘설하 씨’라고 꼬박꼬박 존칭을 붙이던 성필이, 그저 ‘설하’라고 부른다.

“뭘 놀라고 그래. 데뷔하면 말 놓는다고 했잖아.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와.”

“…….”

백설하는 아까와 다른 기묘한 느낌에,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네.”

백설하가 문을 넘어 밖으로 향했다.

소녀연맹, 데뷔 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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