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99화 (99/760)

099화

“……이게 설하 씨가 저한테 전달한 요구예요.”

홍규헌은 손안에서 담배를 굴렸다.

그 과정에서 담뱃잎을 감싼 종이가 구겨져 쭈글쭈글해졌다.

“백설하가?”

“네.”

암묵적이며 잠정적인 리더의 요청이다.

멤버들의 의견이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좋다.

심지어 장하양마저도 동의한 요청일 것이다.

무시할 수는 없다.

“난이도를 낮추거나 아예 파트를 빼달라…….”

개인의 개성을 강조할 수 있는 안무.

그 개성은 사람의 눈을 휘어잡는 안무와 표현의 난이도로부터 나온다.

백설하는 첫날 연습하곤 허벅지에 알이 배었다고도 한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녀조차 피로감을 느낄 정도란 것이다.

비록 장하양의 파트는 다른 멤버들보다 하향 조정되긴 했어도, 그게 어렵지 않단 뜻은 아니다.

“개개인이 드러난다는 게 약점이 됐네. 어중간한 수준으로 난이도를 낮추면, 아예 다른 애들의 방석이 될 거야.”

조아라는 수월하게 익힐 수 있는 수준.

백설하는 조금 어려운 수준.

그게 ‘아니’의 난이도였다.

춤이란 건 단순히 따라 하는 게 전부라면 동네의 평범한 중학생이라도 이삼일 내에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느낌을 살리는 것이다.

말 그대로 아이돌의 아우라가 드러나야 한다.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게 목적인 안무인데, 장하양을 묻어버릴 거라고? 다른 애들이랑 비교돼서? 그러니까 백설하의 요청은…….”

“난이도를 낮춰달란 게 아니라, 하양이의 파트를 아예 줄여달라는 거죠.”

“그래, 그렇지.”

홍규헌은 참지 못하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성필이 불을 붙여주었다.

“남은 시간은 40일이야. 그 안에 장하양이 환골탈태할 가능성은 없나?”

“없지 않죠. 무려 40일이잖아요.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다른 애들도 더 능숙해질 테니까요.”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장하양이 현재의 백설하 수준만 되어도 더는 바랄 게 없겠다만, 지금으로선 힘들어 보인다.

홍규헌은 저번 주 멤버들의 주간 평가 영상을 돌려 보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여기지? 댄스 브레이크. 서로서로 비교하라고 만들어 놓다시피 한 부분이잖아. 이게 사실상 이 안무의 정체성이자 하이라이트인데, 여기서 장하양의 춤 난이도를 낮추는 건…….”

힘들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유일한 답이라곤 장하양의 성장, 혹은 그녀를 배제하는 것이다.

“안무의 전체적인 난이도를 낮추는 건?”

“애들은 충분히 다시 외울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반발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지. 지금까지 외운 거에 애착이 있겠지. 나도 지금이 제일 좋아. 장하양만 따라온다면.”

홍규헌이 담배를 길게 빨았다.

남은 1/3이 순식간에 타들어 가 필터까지 드러났다.

“박 이사 생각은 어때?”

“저는 믿고 싶습니다.”

“장하양이 잘할 거라고?”

“네.”

“믿음만으로 되진 않을 거 같은데.”

“그러니까 물어보겠습니다.”

“뭐 어쩌게. 애들한테 투표라도 시키게? 장하양이 잘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뭐 그렇게? 분열만 유도할 텐데.”

“아뇨. 본인한테 물어보려고요.”

“……장하양 본인한테?”

본인한테 본인이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라.

“이미 장하양도 동의해서 백설하가 이런 요청을 한 거 아니야?”

“하양이가 눈치를 봤겠죠. 나날이 애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점점 분위기도 이상해지고, 그러니 뭐라도 해야겠고.”

“그러게. 그냥 믿어달라고만 해서 불안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원래 자기 일은 자기가 제일 잘 알잖아요. 하양이한테 말해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걔가 너한테 거짓말할 거 같진 않으니까. 잘 말해봐. 만약 수락이 떨어지면…….”

에휴.

홍규헌은 짙은 한숨을 뱉곤 담배를 거칠게 비벼 껐다.

“나도 모르겠다. 처음 장하양을 들일 때 이런 사태까지 감안하긴 했지만, 정작 눈앞에 닥치니까 숨이 턱 막히네.”

“믿어주세요. 하양이.”

홍규헌이 피식 웃었다.

“박 이사. 난 애들 믿는다거나 안 해.”

“……네?”

“저번 그룹에서 데인 게 있잖냐. 지금에서야 말하는데, 난 그렇거든.”

그녀가 집요하게 멤버들의 이름에 성을 붙여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일종의 방어기제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기에, 아예 멤버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게 드러나지 않도록 적절히 친근감을 유지하는 게 전부고, 그 이상으로 나가진 않는다.

“그게 뭔…….”

성필은 화가 나려 했다.

사장이 연습생을 안 믿으면 대체 사업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럼 지금까지 홍규헌이 보여줬던 모습은 전부 가식인 건가?

목구멍 끝까지 화가 들어찼을 때, 홍규헌이 성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믿는 건 박 이사야. 한 이사고. 너희 둘이 애들을 믿으니까 나도 믿는 거야. 너야 매일 애들이랑 부대껴 사니까 내 말에 빡칠지 몰라도, 난 걔들이랑 하루에 말도 거의 안 섞거든?”

성필의 목구멍에서 화가 쑥 내려갔다.

“네가 믿으라면 믿어. 그러니까 잘 좀 해줘, 박 이사.”

“……하아.”

“어? 왜 한숨이야? 내가 한숨 쉴 말을 했어?”

“아뇨. 사람 정말 잘 다루신단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또 늪 같은 사람이지. 빠지면 못 나가. 한 이사 나한테 잡혀 있는 거 봐.”

“그러게요.”

* * *

“한 이사님.”

장하양이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을 열었다.

장부를 작성하고 있던 한구인이 그쪽을 보았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한구인은 장부와 장하양을 번갈아 보더니 죄송스럽단 듯 쓰게 웃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네.”

멤버들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오늘은 한구인이 귀가 담당이기에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

장하양은 한구인의 옆에 앉았다. 그의 손은 계산기와 키보드를 바쁘게 움직였다.

“와, 전문가 같아요.”

“하하, 그렇습니까. 그냥 지출 내역만 정리하는 겁니다.”

가로 엔터에는 수입이 없으니까.

“간단한 업무입니다.”

간단하다기엔, 모니터에는 숫자와 글자가 어지럽게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한 이사님은 뭐든 잘하시니까요. 간단하겠죠.”

“저도 옛날에는 수학을 잘 못 했습니다. 간단한 나눗셈과 곱셈도 틀리곤 했죠.”

“초등학생 때요?”

“아니요.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생 때까지겠군요.”

“한 이사님이 그렇다니까 안 믿기네요. 그런데 그 대학 나오셨지 않아요? 거기, 관악에.”

한구인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의 출신 학교를 말하길 꺼렸다.

이름만으로도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던가.

“대단하시네요. 고등학생 때부터 공부 시작하시고도 거길 가다뇨. 천재? 그런 거예요?”

“하양 씨. 세상 모든 건 재능이 아니라 노력의 문제입니다. 환경의 영향이 크긴 하지만, 재능으로 성공을 재단하는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하하.”

평소라면 한구인의 말에 쉽게 수긍했겠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장하양은 낮아진 어조로 답했다.

“다른 멤버들 보니까 그런 거 같진 않은데요 뭘.”

한구인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장하양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넌 타고 나서 공부도 잘한 거잖아.’라고 들렸을 수도 있다.

“아, 그런 뜻이 아니라요…….”

“하양 씨. 멤버분들이 하양 씨보다 노래랑 춤을 잘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네?”

같은 것을 같은 기간 동안 연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장하양 자신이 뒤떨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하양 씨가 다른 분들만큼 하는 게 더 불평등한 겁니다.”

“네……?”

“아라 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춤을 추셨습니다. 설하 씨는 마찬가지로 초등학생 때부터 연습생이셨습니다. 리카 씨는 대형 기획사에서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았고, 아름 씨도 연습생 생활만 4년이 넘으셨습니다. 어떻게 하양 씨가 그분들과 같은 결과를 내겠습니까?”

장하양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같은 과제’라는 틀에 갇혀, 그저 장하양 본인의 재능이 부족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랬기에 더 노력한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애초부터 밟고 선 노력의 양이 다르다.

장하양이 아무리 죽도록 노력해도, 다른 네 사람이 평생에 걸쳐 쌓은 연습량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선천적으로 지닌 재능을 탓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네요…….”

“물론 하양 씨가 끔찍하게도 습득하는 속도가 느리긴 합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장하양은 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 말로 얻어맞았다.

알긴 알아도, 누군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처음이다.

“하지만, 그게 하양 씨가 멍청하다거나 재능이 없단 뜻은 아닙니다.”

“……아, 아하하. 나쁜 말은 다 해놓으시구서 뒤늦게 수습하시는 거예요? 이미 사과할 타이밍 지났거든요?”

“하양 씨.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빠르게 배우는 사람과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결국에는 같은 선에 도달할 겁니다. 조금씩이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잖습니까. 그러니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켜봐 온 하양 씨라면, 분명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 말한 한구인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장하양은 가만히 그의 옆에 앉아있기만 했다.

어째선지 말은 없었다.

* * *

일요일, 장하양은 현관 앞에 섰다.

“하양이 어디 가?”

“아, 그게.”

백설하의 물음에 장하양은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서툴게 답했다.

“박 이사님이랑, 거기, 그…….”

“박 이사님? 박 이사님 보러 가?”

“네. 그, 얘기하러요.”

“……아아.”

장하양의 파트 축소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백설하는 왜 성필이 굳이 일요일에 따로 만나 대화하기로 했는지 짐작이 갔다.

회사에서 하면 너무 업무적인 느낌이 들 테니, 성필 나름대로 배려해준 것이리라.

회사 밖이라면 이사와 연습생의 관계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할 수 있으니까.

“잘 다녀와.”

백설하는 장하양을 안아주었다. 그 외에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언니 어디 가요?”

그때 신아름도 본인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리카, 조아라와 같은 방을 썼다.

“응. 박 이사님 만나러 가.”

“흐응, 그래요? 정류장까지 가는 거면 같이 가요. 저도 나가거든요.”

신아름은 상당히 신경 써서 꾸몄다.

‘친구 만나러 가나? 서, 설마 남자친구?’

백설하는 캐묻는 느낌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물었다.

“어디 가는데?”

“놀러요.”

쿠궁!

추상적이고 막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단 뜻이다.

리더로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남자랑?’이라고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선 백설하의 추측이 사실이더라도 아니란 대답만이 돌아오리라.

“으, 응. 잘 갔다 와…….”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겠다.

장하양과 신아름은 백설하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를 나섰다.

둘은 걸어가면서도 말이 그다지 없었다.

애초에 친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거북한 사이에 가까웠다.

장하양은 신아름이 성필을 팀장님이라고 부르게 두질 않았다. 그 때문인지 신아름이 장하양을 꺼렸다.

“어디에 놀러 가?”

그래서 둘의 대화는 보통 장하양이 시작했다.

신아름은 언뜻 귀찮은 투로 답했다.

“그냥요.”

“그냥 어디?”

“팀장…… 박 이사님 선물 사러 가는 김에 옛날 기획사 친구도 만나고 그러려고요.”

옛날 기획사라면 석세스 엔터일 것이다.

하지만 장하양은 그보다 박 이사의 선물이란 말에 신경이 쏠렸다.

“무슨 선물?”

“네? 곧 박 이사님 생일이잖아요. 몰랐어요?”

몰랐다.

성필이 생일을 이야기해준 적이 없으니까.

알 필요도 없었다. 가로 엔터는 기념일에 선물을 공개적으로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는 문화가 있었으니까.

멤버들의 생일 때는 회사 차원에서 케이크를 주긴 해도, 멤버들이 직원들에게 선물을 주지는 않았다.

장하양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마지막 단체 선물이었다.

“어, 언제인데?”

조급한 장하양의 질문에 신아름은 간단히 답하려다가, 입꼬리를 휘며 반문했다.

“와, 진짜 모르셨어요?”

“어, 응. 이사님이 말씀 안 해주셨어.”

“보통 자기 생일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없긴 하죠. 친해지면 자연스레 아는 거지. 말씀 안 해줬으니까 알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

“선물 받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알아서 말씀해주시겠죠. 아, 저는 여기 건너가서 타거든요. 가볼게요. 잘 놀다 오세요.”

끝끝내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장하양은 버스를 타고 가는 와중에도 성필의 생일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언제일까? 아름이는 뭘 사줄까? 4년이나 보고 살았으니까 뭘 좋아하는지 알겠지? 오늘 돌아오면…….’

고민하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의도 한강공원이다.

장하양이 가로 엔터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후, 그녀는 성필을 차를 타고 가며 언뜻 말했었다.

‘나중에 저기 산책 가요. 가보고 싶어요.’

성필은 그것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었다.

따로 같이 다닐 일이 없었기에, 그 약속은 계속해서 미뤄졌으나 마침내 때가 온 것이다.

장하양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한강의 모습은 뒷전이고 성필만 찾았다.

돗자리에 앉은 사람 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아서 성필만 찾기가 힘들었다.

“하양아.”

“아, 이사님.”

그런데도 성필은 한눈에 장하양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빨리 왔네.”

“네. 이사님은 차 타고 오셨어요?”

“여기 주말에 차 가지고 오면 큰일나. 지하철 타고 왔어.”

“아, 그렇구나.”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네?”

성필은 그녀와 함께 편의점으로 가서 캔맥주를 샀다.

“술을 마실 수 있단 뜻이지!”

“아하하, 술 좋아하세요?”

“아니. 그냥 술자리 있으면 먹는 거지. 그런데 로망 있잖아. 한강에 돗자리 펴두고 간단하게 술 마시는 거. 안 그래?”

“아하하.”

“없구나.”

장하양은 도수가 매우 낮은 술을 골랐다.

“너 술 엄청 안 받지 않아? 아예 못 먹으면 그냥 음료수 먹을래?”

“아뇨. 그땐 너무 피곤해서 쓰러졌던 거예요.”

가로 엔터 최초의 월말 평가가 끝나고 다 같이 회식했을 때였다.

장하양은 맥주 한 모금을 먹은 후 곧장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었다.

둘은 잠시 산책한 뒤, 그다지 볼 게 없단 것을 깨닫곤 돗자리를 대여했다.

수많은 인파 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술을 홀짝였다.

“이거 그냥 음료수 같네요.”

“너 옛날에도 똑같이 말해서 조금 무섭네. 맥주 먹고도 맛없는 콜라라고 한 뒤에 바로 쓰러졌잖아.”

“아하하, 그러게요. 혹시라도 쓰러지면 두고 가시면 안 돼요?”

“내가 왜 그래. 혹시 배고프면 말해. 배달시킬게.”

“이제 곧 데뷔인데 그런 거 먹어도 돼요?”

“넌 될 거 같아. 말하기 무서우면 PT쌤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 넣어줄게.”

성필은 오늘 장하양을 왜 불렀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장하양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무 파트 배분 때문일 게 당연하다.

이렇게 웃으면서 대화하고 있으나, 얼마 안 있어 무거운 주제가 나올 것이다.

술도 그때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맨정신으로는 말하기 힘든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저 이렇게 놀러 온 적이 진짜 없거든요. 저번에 놀이동산 간 거 빼고요.”

“그래? 의외네.”

“왜요?”

“아니. 주말만 되면 남자들이 연락 와서 여기 가자, 저기 가자 이랬을 줄 알았지. 골라서 가기만 하면 됐을 테니까 많이 놀러 다녔을 거라고 생각했어.”

“뭐야아 진짜. 옛날에 제 핸드폰 연락처 보고도 그런 말씀 하시는 거예요? 저 정말로 꿈만 보고 직진하는 사람이라구요.”

“놀러 좀 다니지 그랬냐.”

“에휴, 이사님 말씀이 맞네요. 연습생 돼서 이렇게 살 줄 알았으면 진작 놀면서 살 걸 그랬네요.”

“응?”

“앞으론 연락 오는 남자들 번호도 차단 안 하고 주말마다…….”

“야, 야. 어디서 연락이 오는데?”

“옛날에 학원 다녔을 때 만났던 사람들이요.”

성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장하양은 공원이 떠나가라 웃었다.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술기운 때문에 마음껏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었다.

“안 그래요, 안 그래. 걱정 붙들어 매세요. 꽉!”

“으, 응. 저기, 계약서에 연애 금지 있거든……. 지켜주면 고맙겠다…….”

“안 그런다니까요! 암튼 놀러 가는 게 저한테는 설레고 그런 거란 말예요. 오늘도 막 꾸미고 싶었는데, 저는 옷도 별로 없고 화장법도 잘 몰라서. 설하 쌤한테 화장이라도 배울까 싶었는데, 부끄러워서 결국 말 못 했어요. 저 지금도 거의 기초만 하고 있는데, 티 나죠?”

“넌 어떤 모습이어도 예쁘지.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알아요.”

성필은 그녀의 자신감에 감명받았는지 쉴 새 없이 웃었다. 장하양도 돗자리에 드러눕기까지 하며 웃었다.

정말, 정말 재밌었다.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길 바랄 정도로.

“배고프네. 시켜 먹을까 식당에 갈까?”

“시켜 먹어요.”

저녁이 되니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성필은 사진사가 빙의해서 장하양의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이어서 한강을 바라보며 또 캔맥주를 마셨다.

“예쁘네.”

“저요?”

“아니. 강이 예쁘다고.”

“그렇게 예쁘면 들어가서 사세요.”

“야, 야! 위험해! 밀지 마!”

어느새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성필은 장하양을 바래다주었다. 정류장까지 가는 것을 넘어 아예 같이 버스를 탔다.

장하양은 술 때문에 피로가 쏟아지는지, 닭처럼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다가 성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성필이 그녀의 머리를 똑바로 세워주었다.

“아…… 편했는데…….”

“숙취해소제 사줄까?”

“아뇨…… 많이 안 취했어요…….”

“내일 괜찮겠어?”

“네! 멀쩡함다!”

전혀 안 멀쩡했다.

“너 그 책은 다 읽었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나는 네가 준 만화책 요전번에 다 읽었잖아.”

“다 안 읽었어요.”

“어지간히 재미없었나 보네. 그냥 돌려줘도 돼.”

“아뇨, 재미없던 게 아니라…….”

“나 신경 써서 괜한 말 안 해도 돼.”

“아하하, 결말 보기 무서워서요.”

“왜?”

“그거 마지막에 시몽이랑 클라라랑 헤어지죠? 불쌍하잖아요. 서로 사랑하는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단 이유만으로 헤어진다뇨. 배드엔딩 확정인데, 마지막을 볼 용기가 안 나요.”

“하양이는 어리구나.”

“어린가요, 저는…….”

“나중에 다 읽으면 말해줘. 한 이사님처럼 독서 토론이라도 해보자.”

성필은 그녀와 함께 정류장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턴 혼자 걸어갈게요.”

“위험하잖아.”

“아녜요. 가까운데요 뭐. 가세요. 아니, 제가 버스 기다려드릴게요.”

장하양이 그리 말하자마자 버스가 도착했다.

성필은 불안하게 그녀를 보았으나, 장하양은 얼른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내일 봐.”

“넵! 안녕히가십셔!”

장하양이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성필은 못내 불안했지만, 장하양을 믿기로 했다. 대신 백설하의 폰으로 연락을 넣었다.

장하양이 가까우니 데리러 나왔으면 좋겠다고.

“빨리 들어가!”

“창문 밖으로 머리 내밀지 마세여!”

그렇게 성필이 떠나가고, 장하양도 등을 돌렸다.

“아하하…….”

오늘 있던 일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끊기지 않는다.

장하양은 발그레한 볼을 문지르며 계속 픽픽 웃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숙소를 향해 나아갔다. 시간이 지나고, 가로등의 빛을 받은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수십 걸음 뒤면 숙소 앞이다.

“하아.”

장하양은 만족스런 한숨을 쉰 후, 가면을 쓰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풀어져 있던 표정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장하양은 멀쩡해진 걸음으로 곧게 나아갔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

성필이 진짜 놀기 위해서만 자신을 불러냈을 리가 없다.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댄스 파트를 줄이는 내용이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성필은 끝까지 아무런 말도 안 했다.

말하는 게 미안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

‘나를 믿기로 하신 거야.’

성필은 습관처럼 장하양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 말을, 성필은 지키고 싶던 것이다.

장하양의 파트를 줄이자는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필이 옛날부터 해왔던 ‘믿는다’는 말은 전부 거짓이 되어버린다.

‘마음도 약하시지. 사람이 얼마나 여리면.’

성필은 여태껏 장하양에게 주었던 신뢰가 무너지길 바라지 않았다.

아니, 진심으로 장하양을 믿고 있는 것이다.

성필의 침묵은 그 어느 격려보다도 장하양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다.

“하양아!”

숙소 근처, 수면 바지를 입은 백설하가 핸드폰을 꼭 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장하양은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술 많이 마셨어?”

“아니요. 맥주? 같은 거 두 캔 마셨어요.”

“이사님이 너 많이 취한 거 같다고 하셨는데.”

얼굴도 붉지 않다.

“걱정이 많으신 분이잖아요. 들어가요. 요즘 밤에 추워요.”

“응.”

장하양은 백설하와 함께 숙소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조아라와 리카가 튀어나왔다.

“데이트는 어땠나요!”

“빨리빨리!”

둘은 장하양이 풀어주는 썰을 기대하며 계속 재촉했다.

장하양은 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발을 벗었다.

“언니 왔어요?”

신아름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샤워실에서 나왔다.

“응, 왔어.”

장하양이 맨발로 복도를 밟았다.

“얘들아. 나 파트 난이도 안 낮춰. 내 파트도 안 넘길 거야. 이대로 갈 거야. 그렇게 결정했어.”

복도가 침묵에 잠겼다.

“난 할 수 있어.”

“……허.”

신아름이 헛웃음을 내뱉고, 지금까지 참고 있던 날카로운 기세를 흩뿌렸다.

“이사님이 그러래요?”

“아니. 내 판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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