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뭔 말이냐 그게.”
전혀 예상치 못한 요청에, 성필은 이해했음에도 굳이 되물었다.
장하양의 파트를 빼달…….
“하양 언니 파트 좀 줄여달라구요.”
이유는 짐작이 됐다.
매주 평가를 통해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점검하고 있으니, 가로 엔터의 직원들은 멤버들의 숙련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즉, 장하양이 익히는 게 가장 느리단 사실은 모두가 알았다.
‘아름이는 우리 회사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
그러니 장하양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만도 하다. 그녀의 귀신 같은 노력과 끈기를 전해 듣긴 했어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불안하겠지.
‘이대로면 무대를 망칠 게 분명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아.’
만약 이런 요청을 해온 게 신아름만이었다면, 성필이 잘 구슬려서 되돌려 보냈을 것이다.
문제는 신아름의 옆, 죄짓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조아라였다.
누구보다 춤에 진심인 조아라까지 와버렸다.
‘하양이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봐왔던 애인데…….’
이러니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성필은 두 사람을 데리고 응접실로 갔다.
“자세히 말해봐.”
“하양 언니가…….”
“아름이 너 말고. 아라가 말해줘.”
지적받은 조아라는 흠칫 몸을 떨더니 어렵사리 성필과 눈을 맞췄다.
아마도 조아라는 신아름에게 끌려 온 듯했다.
‘아라도 하양이에게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낼 수 없었겠지.’
초창기부터 함께 노력해온 동료가 아니던가.
“아라 네가 보기에도 하양이 파트를 줄일 필요가 있을 거 같아?”
“…….”
신아름이 조아라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성필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한 것이지만, 조아라가 크게 움찔했던 터라 들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아.”
결국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왔음을 깨달은 조아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양 언니는 노력하고 있어요. ……언제나처럼요.”
“그런데? 아직 한 달밖에 안 지났잖아. 아직 시간은 더 남았어. 하양이가 게으름 피우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옛날부터 장하양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변명만 하다 보니, 이제는 장하양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와서 쉽게 흥분하게 된다.
‘하양이는 할 수 있으니까 제발 좀 그냥 믿어줘!’라는 마음의 발현일까.
“아…….”
조아라는 성필의 기분이 안 좋아진 것을 감지하곤 말을 끌었다.
성필은 급히 불쾌한 기색을 주워 담았다.
“다그치는 거 아니야. 듣고 싶어서 그래. 아라가 춤에 관해서는 우리 중에서 제일 전문가잖아. 네 생각이면 들을 가치가 있어. 편하게 말해줘.”
“……언니한테 안무 난이도가 너무 높은 거 같아요. 그냥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표현력이 문제예요.”
그건 익히 알고 있다.
애초에 신아름이 안무 시안이 나왔을 때 좋아했던 이유도, 개인의 기량을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하양이 실력 점점 올라가고 있잖아.”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안무라도 한 달 넘게 연습하다 보면 자연스레 몸에 익는다.
장하양도 그러했다.
성필은 그 모습을 보며 남몰래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데 조아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은 것이다.
“곡 2분 50초에 댄스 브레이크 있잖아요. 서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면서 춤추는 거요. 어딘지 알아요?”
“응.”
눈 감고도 음악만 들려주면 춤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쉽게 그 부분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일단 그 파트가 하양 언니한테 너무 어렵고요. ……전체적으로 다 그렇긴 한데 거기가 제일 문제예요.”
소수 그룹이 태생적으로 가지는 문제점.
퍼포먼스의 공간감이 불충분하다는 제약이다.
대부분의 아이돌은 그 문제를 보조 댄서로 해결한다. 하지만 이번 곡의 퍼포먼스에는 보조 댄서를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전체적으로 중앙을 띄워주는 식으로 구성된 안무니까.”
안무가 백민정은 퍼포먼스의 공간감을 아예 버렸다. 대신 시야를 중앙으로 모으길 택했다.
군무(群舞)이긴 하지만, 매 파트마다 주인공을 두는 형식으로 말이다.
그로써 무대를 채우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집중시키길 택했다.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한, 영리한 방법이었다.
“하양 언니가 중앙으로 들어올 때마다 너무…… 그래요.”
개인의 기량이 집중된단 건, 역으로 말하면 개인의 문제점이 더 잘 드러날 수도 있단 뜻이다.
장하양 혼자와 보조 댄서뿐이라면 괜찮으리라.
하지만 동격인 다른 멤버들과 함께 무대에 서니 비교될 수밖에 없다. 장하양의 부족함이 더 눈에 띈다.
그리고 성필은 그 문제의 답을 안다.
‘시간.’
지금은 부족하더라도, 장하양은 결국에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 믿고 있다.
믿어야만 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닐 것이기에.
앞으로도 장하양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무대 구석에 수납해두고 싶진 않기에.
가로 엔터는 장하양을 믿고, 장하양도 본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그 믿음에 보답해야만 한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양이의 능력이 부족하다. 그게 문제야? 하양이의 파트를 깎아야 하는 문제?”
조아라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부족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시간을 두면 하양이도…….”
“시간을 둬도 안 돼요.”
답한 건 신아름이었다.
“이건 노력이나 연습의 문제가 아니에요. 하양 언니가 가진 기량의 문제라구요. 언니가 연습할 때 저희는 안 해요? 저희도 연습하면 할수록 잘하게 될 거예요.”
“아니. 하양이도 연습하면 너희랑 조화될 수 있을…….”
“팀장님 착각하고 있어요.”
신아름이 성필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 말을 끊었다.
이건 신아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화가 나도 성필의 말은 끊지 않는다. 그게 신아름이 익힌 예의였고, 당연한 대화의 방법이니까.
“춤의 완성도에는 한계가 없어요. 완성이라고 불릴 순간이 없다고요. 하면 할수록 올라가기만 할 뿐, 천장에 닿지 않아요.”
그런 신아름이 성필의 말을 끊은 건, 무엇보다도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정도의 수준을 바라시는 거예요 이사님은?”
“…….”
“‘아니’는 저희 곡이잖아요. 저희가 세상 누구보다 잘 부르고 세상 누구보다 잘 춰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할 거예요. 어쭙잖게 조화를 맞추겠답시고 대충 추진 않을 거라고요. 저 말고 아라도.”
시선을 받은 조아라는 어깨를 더욱 늘어뜨렸다. 직접적으로 신아름에게 동감해주진 않았으나, 침묵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됐다.
아마 방금 신아름이 한 말이 조아라를 설득할 수 있던 주요한 이유이리라.
“리카랑 설하 쌤도 같은 마음일 거예요.”
“아름아…….”
“이사님이 저희한테 기대하는 수준이 고작 티 안 나게 어우러지는 정도면요, 지금 말하세요. 저는 딱 그 정도로만 할게요. 그 정도의 마음가짐으로만 데뷔 무대에 설 거예요.”
“…….”
연습생이 회사의 이사에게 하기에는 굉장히 강압적인 말이었다.
그만큼 신아름의 의지가 굳단 뜻이겠지.
성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앞으로 그림자가 지자 신아름은 조금 겁먹은 듯 입술을 꾹 물었으나, 눈은 피하지 않았다.
“연습실에 가보자. 다들 퍼포먼스 하는 거 보여줘.”
신아름과 조아라를 데리고 연습실로 갔다.
두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연습은 쉬는 중이었다.
리카가 이야기꾼처럼 백설하와 장하양을 둘러앉혀 놓고 있었다.
“권리장전이란 게 있는데요. 이게 영국에서…… 아, 이사님이다!”
이야기하다 말고, 리카는 성필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오하요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
“그래, 안녕하다.”
“아침부터 웬일이신가요!”
“너희 연습하는 거 보려고 왔어. 보여줄 수 있어?”
“네네! 저기 앉으세요!”
리카가 벽면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직접 데려다주려고 성필의 소매를 잡으려는 순간, 신아름이 성필과 팔짱을 꼈다.
“저기에 앉으면 돼요.”
그 모습을 본 리카가 숨을 헉 삼켰다.
어, 어떻게 저런 파렴치한 짓을!
“너무 잘 대해주는 거 아냐? 내가 애도 아니고 굳이 의자까지 데려다줘야 해?”
“아침부터 저희 보러 오신 거잖아요. 계속 신경 써주셔서 고맙단 의미에서. 자자, 부끄러워하지 말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성필을 보고 리카가 2차 충격을 받았다.
‘왜, 왜 아무 말도 안 하시지?’
리카도 성필을 뒤에서 안거나 어깨를 대기도 하지만, 그건 전부 장난의 연장선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몸을 부대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신아름의 행동은 그냥 노골적인 스킨십 아닌가!
“여기요. 뭐 물이라도 갖다 드려요?”
“아니.”
성필을 의자까지 안내한 신아름이 등을 돌려 리카를 보았다. 그리고 화사한 미소를 보였다.
마치 ‘봤어?’라고 묻는 듯했다.
리카가 움찔했다.
‘아름이랑 이사님은 4년 넘게 봤으니까…… 4년 동안 계속 봐 왔으니까…….’
리카 자신과는 쌓아온 인연의 급이 다를 터다.
그러니 저런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겠지.
서로에게 절친인 줄 알았던 친구가, 다른 아이와 하하호호 즐겁게 대화하는 것을 본 기분이다.
심지어 주말에 자신 모르게 놀러 갔다는 것도 알아버린 기분이다.
“리카,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준비하자.”
“아, 응.”
신아름이 리카를 놀리는 것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번 놀림은 리카에게 주는 느낌이 남달랐다.
그런 리카의 심경 변화는 알지도 못하고, 성필은 의자에 앉은 뒤부터 장하양을 주시했다.
“시작할게요.”
중앙에 선 백설하가 선언하고 데뷔곡, ‘아니’가 흘러나왔다.
안무 최종본이 나오고 연습을 시작한 지 한 달하고도 10일 정도.
멤버들은 동작을 전부 외웠다.
디테일을 점검하고 각자의 위치를 신경 쓰는 단계까지 와 있다.
그렇기에 성필은 각자의 숙련도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
같은 춤이라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리카는 절도 있게 끊어 추네.’
움직임에 조금의 낭비도 없었다.
힘과 가벼움을 동시에 가진 듯했다.
난이도가 있는 동작에서도 여유 있게 표정 연기를 이어간다.
가장 놀라운 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름에도 숨을 헐떡이거나 가사가 끊기는 부분이 없단 것이다.
마치 AR을 튼 것처럼 완벽하다.
‘아라는 파워가 있어.’
빠르다.
박자를 무시하고 빠르단 게 아니다.
‘어, 이거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조금 느린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어느새 조아라의 손과 발은 다음 지점으로 넘어가 있었다.
손혜빈이 옛날에 말했던 것이지만, 조아라는 하나의 박자를 수십 개로 쪼개서 들을 수 있다.
박자의 초반이 아닌 후반에 움직이기에 가득 찬 느낌과 함께 파워를 느낄 수 있다던가.
그에 따른 순발력과 근력이 필요하기에 피로도가 만만찮게 쌓일 테지만, 조아라의 체력은 정평이 나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할 정도의 힘이, 조아라의 춤에는 있다.
‘설하 씨는 봄바람처럼 가볍네.’
백설하는 키가 크다.
팔다리가 길다.
그 때문에 다른 멤버들보다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동시에 둔해 보이기도 한다.
특히 동작이 느린 곳에서 그러하다.
백설하는 자신의 강점을 부각하고 단점을 없애기 위한 전략으로 가벼움을 골랐다.
동작마다 발을 가볍게 띄우며 선을 부드럽게, 바람이 흐르는 듯한 산뜻함을 시각적으로 선사했다.
‘아름이는 기계 같아.’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녀의 동작은 안무가인 백민정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춤은 원작자를 절대 뛰어넘지 못한다.
원작자의 느낌을 다른 사람이 100%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커버 댄스는 개인의 스타일을 살리는 쪽으로 가지만, 신아름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원작자인 백민정의 느낌을 그대로 살릴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아니’에 맞춰진 춤을 완벽히 구현할 수 있었다.
‘하양이는…….’
이제 알겠다.
신아름이 왜 걱정했는지.
장하양은 춤을 잘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단순하게 춤을 베껴내고 있을 뿐, 다른 멤버들처럼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다.
개인 기량이 가장 중요한 안무에서, 개인의 특성이 없단 건 얼마나 큰 단점인가.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겠지.’
장하양은 훌륭하다.
그녀도 몇 개월에 이르는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기량을 쌓아왔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보다는 못한 게 사실이다.
레시피를 보고 따라 만드는 게 고작인 초보 요리사에게, 일류 쉐프처럼 자신만의 강점을 추가하라는 요구는 할 수 없다.
만약 이게 길거리 버스킹을 위한 연습이었다면, 장하양이 도달한 수준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건 버스킹 따위를 위한 게 아니야.’
춤이 이어질수록 그 차이가 뚜렷해진다.
화룡점정은 댄스 브레이크 때였다.
멤버들이 톱니바퀴처럼 위치를 회전하며 바꾸는 부분, 각자가 잠시 중앙에 서서 춤을 춘다.
쉽게 말해서 개인 매력 어필 타임이다.
각자를 드러낼 수 있도록 서로의 매력에 최적화된 안무를 소화하는 부분이다.
‘하양이한테 이건 매력 어필 타임 같은 게 아니야.’
스스로의 부족함을 드러내어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할 뿐이다.
신아름이 했던 말 때문인지, 유독 성필은 이번 퍼포먼스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하양이는 잘하겠지.’란 희망의 콩깍지를 벗어내고 본 현실은 참담했다.
곡이 끝났다.
“어떠셨어요?”
백설하가 엔딩포즈를 풀며 묻는다.
“잘하네.”
성필은 말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한 달 반 뒤, 하양이는 나아질까?’
리카, 백설하, 조아라, 신아름과의 기량 차이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성필은 확신하기 힘들었다.
신아름과 마찬가지로.
* * *
그로부터 또 2주가 지났다.
성필은 장하양의 문제를 회사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굳이 장하양을 화제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 믿고 있었다.
믿고 싶었다.
“이사님. 하양이 댄스 파트 난이도를 조금 낮추는 게 어떨까요? 백민정 트레이너님이랑도 얘기를 해봤는데…….”
뮤비 촬영 한 달 전, 결국 암묵적인 리더인 백설하까지 이 사안을 성필에게 꺼냈다.
성필은 눈두덩을 문지르며 말했다.
“일단은 제가 하양이랑 말 좀 나눠볼게요.”
“네…….”
백설하도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까. 그녀의 심적 부담감도 상당했을 것이다.
장하양을 믿고 싶고, 그녀를 지지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는 믿음에 전혀 따라오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멤버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히 이런 이야기가 떠돌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백설하마저 이러진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장하양도 본인의 문제를 알고 있을…….
어?
“설하 씨.”
“네?”
“혹시 그 말, 하양이가 먼저 꺼냈나요?”
백설하는 답이 없었다.
답이 없는 게 답이었다.
“누가, 하양이한테 그런 식으로 말했나요?”
“…….”
또 답이 없었다.
누군가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장하양에게 말한 게 분명하다.
‘언니, 파트를 줄이는 게 좋겠어요.’
이유는 아마도.
‘팀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그런 말에 장하양이 ‘난 해낼 수 있어.’라고 할 수 있었을까.
‘그럴 리 없겠지.’
장하양은 굴복한 것이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대신 현실적인 대안을 취했다.
그녀는 스스로 수납되길 택했다.
팀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 * *
연습에 들어간 시간이 두 달에 가까워졌을 때.
장하양은 멤버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들은 티를 내지 않는 줄 알지만, 장하양의 특기가 무엇이던가.
장하양은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루는 것만큼 타인의 감정을 잘 느꼈다.
‘걱정하고 있어.’
멤버들의 걱정은 아이돌의 근본적인 특성으로부터 나왔다.
아이돌은 그룹이다.
한 명의 개인이 아닌 전체로서 평가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자기 혼자만 잘해선 안 된다.
장하양의 실력을 의심하고, 필요하다면 수정을 요청해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팀을 위해서.
‘내가 뮤비 촬영 시작일까지 만족스러운 수준에 도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매일 회사에서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를 준비하는 도중까지도.
멤버들 사이에서는 그런 불안이 느껴졌다.
그랬기에 장하양이 먼저 말했다.
“박 이사님한테 부탁드려보자. 내 파트를 줄이거나 난이도를 낮춰달라고 하는 거야.”
당연히 반대가 나왔다.
백설하와 리카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장하양의 결심을 뒤로 돌리려고 했다.
“하양아 그럴 필요 없어. 넌 할 수 있어.”
“맞아요 언니! 언니는 항상 해냈잖아요!”
조아라는 거짓말을 잘 못 하는 아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언니 그건 아니죠…….’라고 하긴 하는데, 장하양뿐 아니라 모두 그게 빈말이란 걸 알아챘다.
신아름은 솔직담백했다.
“언니가 먼저 말해주셔서 다행이에요.”
백설하가 눈총을 보내도 신아름은 싱글벙글 미소 짓기만 했다.
몇 번에 걸친 장하양의 설득 끝에, 백설하가 성필에게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이건 회사 내부 평가나 버스킹이랑 아예 다른 문제니까.’
아예 데뷔부터 실패할 수는 없다.
장하양 자신이 수납되는 한이 있더라도, 퍼포먼스의 조화와 완성도는 유지되어야 한다.
백설하가 성필에게 그 안건을 말한 날 밤, 장하양은 잠들기 전 물었다.
“박 이사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으응? 아, 정해지면 연락 주신대…….”
성필도 제안을 고려하기로 했구나.
당연하지.
자신의 꼴을 봤을 테니까.
게다가 리더인 백설하의 부탁이니 마냥 좌시할 수만도 없으리라.
장하양은 그런 성필을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아쉬움마저 누를 순 없었다.
‘믿어준다고 했으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단 건 알지만, 성필에게 섭섭함이 생겼다.
언제까지고 믿어준다고 했으면서…… 백설하의 제안을 바로 쳐내지 않고 고려하는 건가…….
장하양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필이 부모나 선생님도 아닌데, 언제까지고 장하양의 사정만 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양아 잘자.”
백설하가 미안한 투로 말했다.
“네, 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밤이 찾아왔다.
장하양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몇 번 뒤척이다 한숨을 쉬고 상체를 일으켰다.
물이라도 마실 셈이었는데, 핸드폰 액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연락이 왔다.
[하양아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괜찮아? 너 옛날에 한강에 놀러 가고 싶다고 했잖아. 같이 갈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