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멤버들이 자유와 저항이라는 키워드를 듣고 줄줄이 혁명의 이름을 말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신아름을 제외한 네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한구인이었다.
“영국엔 헌법이 없다는 게 사실인가요?”
리카가 인터넷에서 봤던 믿지 못할 정보에 대해 질문을 하면.
“헌법이 없는 게 아니라 단일 헌법이 없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헌법이 여러 문서에 여러 조각으로 흩어져 있다고 아시면 됩니다.”
“드래곤볼이군요!”
“드래곤볼…… 예, 그렇군요.”
한구인은 멤버들의 지적 역량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돌로서의 자질도 중요하지만, 한구인은 그녀들이 사회인으로서 기본적인 교양을 갖길 바랐다.
멤버들의 삶은 아이돌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영국 헌법의 역사는 명예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습니다. 그 후부터 헌법의 근간이 무엇인지 정의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한구인은 적절한 틈을 보아, 멤버들에게 여러 지식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문학, 역사, 과학, 사회학 등.
그녀들의 교양을 길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설하 씨,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을 아십니까?”
학원에 데려다주는 아주 작은 짬에도, 한구인은 자신의 목적을 충실히 이행했다.
“아니요.”
“검색해보시면 알 겁니다.”
“음, 아! 이거 알아요. 교과서나 티비에서도 몇 번 본 거 같아요. 프랑스 혁명…… 이었나? 그거 그림 아니에요?”
“흔히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지만, 그 그림은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겁니다.”
“7월 혁명이요?”
“7월 혁명이 뭐냐면…….”
멤버들은 처음엔 한구인의 잡학 강의를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마땅한 대화 주제가 없으니 별걸 다 말하는구나, 그런 식으로 말이다.
“아라 씨. 이해하시겠습니까? 러시아 혁명은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자, 산업화되지 못한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근대화 경로를 제시했단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네, 대충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멤버들은 한구인에게 적응해 갔고, 어느새 그의 이야기를 꽤 재밌어하기도 했다.
“하양 씨. 어느 역사가가 평가하길 진정으로 세계를 바꾼 혁명은 단 두 개뿐이라고 합니다. 2월 혁명과 68혁명입니다.”
“2월 혁명은 저번에 말씀해주셨죠?”
“기억하고 계셨군요. 감사합니다.”
“아하하, 아니에요. 한 이사님이 재밌게 이야기해주셔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68혁명은 뭐예요?”
이외에도 책이나 교양 방송, 다큐멘터리를 추천해주는 등.
한구인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일까, 멤버들은 파편적이나마 여러 방면의 지식을 가지게 됐다.
조정훈 감독이 자유와 저항이란 키워드에 떠오르는 것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 멤버들이 일관되게 혁명의 이름을 댔던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 * *
“멤버분들 의견을 들어봤습니다.”
조정훈의 손에는 그 의견이 적힌 수첩이 들려 있었다.
가로 엔터의 모든 직원들을 마주한 그는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전문적인 식견을 어필해야 할 때이지만, 정작 본인의 생각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다들 자유와 저항이라고 하니까 혁명 이름을 대더라고요.”
조정훈은 구체적으로 멤버들이 어떤 장면을 연출하고 싶은지,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았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으나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계획 초기 단계면 으레 그렇듯이 추상적인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사장님이랑 회사 측도 그쪽으로 연출…… 그러니까 좀 혁명적인 분위기로 연출하고 싶으신지…….”
‘혁명적인’이라고 말하니 북쪽에 있는 나라가 떠올랐기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조정훈은 최소한의 질문만 던지고 직원들의 안색을 살폈다.
‘멤버들의 의견을 받겠단 생각은 가상하지만, 결과가 이러니 뭐라 할 말이 없겠지.’
아마도 멤버들의 의견은 씹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애들이 원하는 거라면 저희도 OK입니다.”
그래서 홍규헌이 그리 말했을 때, 조정훈은 적잖이 놀랐다.
‘정말요?’라고 묻는 무례한 짓은 하지 않았다.
사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조정훈은 뮤비를 구성할 원칙들을 질문하고 또 그 답을 들었다.
“서사와 안무가 섞인 걸 바라신다는 거죠.”
아이돌 뮤직비디오도 다 같은 게 아니다.
안무를 중시할 수도 있고, 뮤직비디오에 담긴 스토리를 중시할 수도 있다.
스토리라 해도 직관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저 코스튬 플레이 정도나 캐릭터성을 드러내는 정도가 일반적이다.
‘뮤비에 서사를 담으려면 아예 명확한 컨셉이 있거나 세계관이 필요하니까.’
세계관.
아이돌 그룹 자체의 정체성이 되거나, 앨범마다 담긴 이야기를 뜻한다.
예를 들어 멤버들이 각자 초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거나, 사실은 이세계에서 현실로 와서 어떤 목적을 위해 서로 뭉쳤다거나.
여러 세계관이 있으나 팬이 아니라면 알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다지 관심도 없다.
“서사면 어떤…….”
“저희가 드린 곡의 키워드에 맞춰주시면 됩니다. 멤버들의 의견도 반영되고요. 스토리보드는 감독님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이런 요청이 가장 어렵다.
아예 조정훈의 팀이 서사를 짜야 한단 이야기니까.
‘적어도 회사가 명확히 정해둔 그룹의 세계관은 없단 거네. 그럼 내가 중시해야 할 건 자유와 저항이라는 키워드. 그리고 혁명들인데…….’
시대극 세트장이라도 빌려야 하나?
아니, 아예 전부 만들어야 할 것이다.
돈이 만만찮게 깨질 텐데.
‘중소에서 낼 수 있을 규모가 아닐 거야.’
이제 초기 컨셉 협의는 대충 마쳤다.
가장 중요한 질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예산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커트라인이 주어져야 세트를 만들든 빌리든 모든 것을 계획할 수 있다.
조정훈은 많아봤자 천만, 이천만 수준으로 예상했다. 여태껏 같이 일했던 중소 기획사들은 뮤비에 큰돈을 투자하길 꺼려했으니까.
아예 극한으로 아끼면 천만 원 아래로도 작업할 수 있다.
“2억입니다.”
“……네?”
“2억이요.”
조정훈의 정신이 다시금 아득해졌다.
* * *
조정훈을 만나기 한참 전.
“가장 돈을 많이 써야 하는 건 뮤직비디오입니다.”
성필은 회사 사람 모두를 설득했다.
설득되진 않더라도 납득까진 시키려고 노력했다.
“아이돌을 만나는 가장 첫 번째 통로가 어디일까요? 물론 곡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뮤직비디오입니다. 곡을 들어보고 관심이 생기면 가장 먼저 뮤직비디오를 보겠죠. 거기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야 합니다.”
뮤직비디오에는 돈을 아무리 많이 들여도 아깝지 않다.
국내 팬뿐 아니라 해외 팬도 끌어들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창구가 뮤직비디오다.
물론 해외 팬을 고려해서 돈을 쏟는 건 아니다.
“우리 애들의 얼굴, 댄스, 곡, 생각을 가장 빠르고 지속적으로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뮤직비디오니까요.”
고작 한 번 정도 보고 끌 수준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두고두고 돌려 봐도 재밌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영상미다. 일단 보기가 좋아야 한다.
영상미는 대충 돈을 들여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감각적이고 화려하고 사람의 시선을 빼앗는, 그런 작품은 돈에서 나온다.
아주 많은 돈에서!
“시선을 빼앗을 수 있는 영상미! 다음으로는 서사입니다.”
뮤직비디오를 본 사람들이 곱씹을 게 필요하다.
퍼포먼스가 넘사벽이라 수십 번 돌려보는 종류의 뮤직비디오도 있으나, 이번에 멤버들이 받은 안무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기에 이끌립니다. 영상에 숨겨진 상징, 흐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당연하게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도 돈이 듭니다.”
단순히 시나리오를 뽑아내는 데 돈이 많이 든단 뜻이 아니었다.
그 시나리오를 구현하는 데 돈이 든다.
오직 뮤직비디오를 위해 지어진 세트장,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간 인건비, 필요하다면 해외 로케이션도 있어야 한다.
“이 뮤직비디오는 팬을 만들어내는 자판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잘 뽑히기만 한다면요. 그러니까…….”
성필이 조심스레 홍규헌을 보았다.
“적어도 투자되는 돈이 1억은 넘어야…….”
“2억.”
홍규헌은 너무도 당당하게, 일말의 고민도 없이 돈을 올렸다.
“상한선은 2억으로 하자. 나도 박 이사 의견에 동의하니까.”
2억이면 대형 기획사에도 꿇리지 않는다.
성필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음에 당황하면서도, 입가에서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홍규헌도 그와 맞춰 미소를 보였다.
“일 한번 내보자.”
* * *
조정훈은 혼자만의 방 안에 가만히 앉아 벽과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벽과 천장에는 사진이 가득했다.
‘자유’와 ‘저항’, ‘혁명’을 검색해서 나온 이미지를 전부 프린트해서 붙여둔 것이었다.
조정훈은 며칠째 가만히 방 안에 틀어박혀 사진들만 보고 있었다.
“자유, 저항, 혁명…….”
어떻게 서사를 붙이고 미쟝센을 줄까.
너무도 추상적이고 어려운 주제다.
단순히 ‘멋지게!’, ‘예쁘게!’, ‘당당하게!’ 같은 요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안무가 돋보이게 해주세요.’, ‘멤버들 얼굴 클로즈업을 자주 해주세요.’ 같은 것과도 달랐다.
이건 조정훈에게도 도전이었다.
“…….”
일주일에 걸친 묵상 끝에, 조정훈은 마침내 결론을 냈다.
그는 오랜만에 의자에서 일어나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사진을 하나 떼어냈다.
‘명예혁명.’
고풍스런 옷을 입은 귀족들이 ‘자유’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어서 조정훈은 천장에서 다른 사진도 떼어냈다.
‘프랑스 혁명.’
실은 프랑스 혁명이 아닌 7월 혁명을 나타낸 그림이었으나, 조정훈은 거기까진 몰랐다.
삼색기를 든 채 민중을 이끌는 자유의 여신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여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용기와 분노가 엿보인다.
조정훈은 연달아 두 개의 사진을 뗐다.
‘러시아 혁명.’
검은 정장을 입은 채 단상에 서서 연설하는 레닌의 사진이었다.
단상 아래로는 미소를 머금고 환호하는 러시아의 인민들이 보인다.
‘68혁명.’
살벌하게 총검을 겨눈 군인들을 향해, 어느 여성이 꽃을 들고 다가가는 사진이었다.
여성은 총구와 칼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군인들에게 꽃을 내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4.19혁명.’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이 탱크 위에 올라가 어깨동무를 하는 사진이었다.
가장 위의 학생은 태극기를 들며 무어라 외치는 중이었다.
“이거다.”
조정훈은 가로 엔터가 섭외한 스타일리스트 팀에게 연락했다.
“제가 그림이랑 사진들을 보내드릴 건데, 이거에 맞춘 의상을 제작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과거의 옷을 현대적 감성에 맞게, 아이돌다운 옷으로요.”
전화로 간단한 협의를 끝낸 조정훈은 한 건 했다는 표정으로 다섯 개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2억이야.”
그래, 해주마.
자유? 저항? 혁명?
얼마든지 표현해주마.
이 돈이면 못할 수가 없다.
조정훈은 드디어 펜을 들고 콘티를 짜기 시작했다.
그의 펜 아래서, 혁명이 그려졌다.
* * *
뮤비 콘티가 나왔다.
가로 엔터에서 여러 번의 회의와 반려, 수정을 거쳐 콘티도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멋지네. 빨리 영상으로 보고 싶다.”
아쉽게도 홍규헌의 바람은 즉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뮤비에는 멤버들의 안무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일단 안무를 전부 익혀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저 익히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완벽해지는 것이었다.
“안무 최종본 완성!”
백민정도 멤버들과 여러 번 시험 삼아 안무 시안을 점검한 뒤, 최종본을 가로 엔터로 전달했다.
남은 건 오로지 멤버들의 연습뿐이었다.
“얘들아, 드디어 시작이다.”
성필의 말에 멤버들이 긴장했다.
몇 개월 후면 그녀들도 더는 연습생이 아니다.
아이돌이란 이름을 받고 세상에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다.
오늘은 그 험난한 여정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들의 안무가 완성되면 뮤비 촬영에 바로 들어갈 거야. 빠르면 좋겠지만, 너무 조급한 마음은 가지지 마. 자, 그럼 잘 부탁한다.”
성필이 허리를 숙이자 멤버들도 마주 인사했다.
안무를 가르치는 건 백민정이었다. 그녀는 직접 가로 엔터로 와서 멤버들을 지도했다.
성필도 첫날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음.’
역시나, 예상했던 문제가 터져 나왔다.
“하양아! 거기서는 반대쪽으로 무릎을 굽혀야 한다니까!”
장하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