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뮤비를 맡길 감독이 정해졌다.
동시에 스타일리스트 팀도 결정됐다.
일단 스타일리스트 팀의 의견을 들어본 뒤, 뮤비 감독과 함께 협의를 거칠 예정이었다.
“팀에서 우리가 스타일링 맡길 분은 김형선 실장님이야. 내 옛날 회사 아이돌들도 맡으신 적 있어. 잘해주실 거야.”
스타일리스트들은 회사에 소속된 경우가 드물었다.
회사 자체가 고작 몇 개에 불과한 데다가, 회사라 해도 스타일리스트는 10명 이하로 소속되어 있다.
대부분의 스타일리스트는 소수 팀으로 활동한다. 대한민국 전체 스타일리스트라고 해 봐야 1,000명 조금 넘을 것이다.
“누나가 찾은 사람인데 믿을 만하겠지. 그래서 사장님도 별말 없으신 거고.”
“당연하지!”
오늘은 김형선 실장과 그 어시스턴트가 가로 엔터로 찾아온다.
회의에 참여하는 가로 엔터 측 인원은 성필과 손혜빈이었다.
“내가 마중 나갈게.”
“아냐. 내가 갈게. 넌 여기 있어.”
“왜?”
“네 직함이 이사잖아.”
성필은 가로 엔터에서 사장인 홍규헌 바로 아래의 위치에 있었다.
그런 성필이 마중을 나가고 손혜빈이 회의실에 기다리고 있으면, 회사의 위계가 잡히지 않은 것처럼 보일 터다.
회의실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자, 손혜빈이 김형선 실장과 어시스턴트를 데리고 왔다.
성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박성필 이사입니다. 같이 일하게 돼서 기쁩니다. 잘해봅시다.”
“안녕하세요, 김형선 실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손혜빈은 위엄을 갖춘 성필의 말투에 쿡쿡 웃었다. 김형선은 그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성필은 이어서 어시스턴트에게로 눈을 돌렸다.
“안녕하…….”
“아.”
그녀가 성필을 알아보았고, 성필도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여가 시간’ 촬영이 끝난 뒤 봤던, 울고 있던 스타일리스트였다.
성필은 당황을 접어두고 자연스레 미소를 만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유이 어시입니다.”
김형선과 이유이는 노트북을 펼치고 성필과 손혜빈의 설명을 들었다.
곡을 들은 뒤 안무 시안까지 보고, 어떤 컨셉인지에 관한 설명을 천천히 풀어갔다.
“음, 저항. 자유. 의상은 제작으로?”
“기성복도 컨셉만 맞추면 괜찮습니다.”
손혜빈은 의상 레퍼런스 파일을 김형선에게 넘겼다.
김형선은 그것을 찬찬히 보곤 감을 잡은 듯 고개를 주억였다.
“완전히 이런 식으로 맞춰달란 건 아니고요. 차별점이 있으면 해요.”
“네, 그거야 아이돌이면 다 그렇죠.”
“그리고 멤버들 의견을 들어주셨으면 해요.”
“예?”
이야기를 잘 듣던 김형선이 처음으로 의문을 표했다.
“어떤 의견을요?”
“멤버들이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지. 그런 것들요.”
“아…… 이미 회사에서 뚜렷한 컨셉을 잡지 않았나요?”
“그 컨셉이란 게 멤버들 머리에서 나왔거든요. 직접 작사, 작곡, 안무 창작은 아니지만요. 멤버들 의견이 크게 반영됐어요. 그러니까 옷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 네. 그런데 이만큼 지침이랑 레퍼런스 주셨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아이돌들의 복장은 회사와 스타일리스트가 정하는 게 당연하다.
회사는 아이돌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스타일리스트는 패션의 전문가니까.
아이돌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패션에 대해서 잘 알까?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계절 유행에 맞는 옷을 SNS에서 보고 옷가게에서 쇼핑이나 한 게 스타일링 경험의 전부일 테니까.
“멤버들 의견을 들으면 그걸 전부 반영해야 하나요?”
그래서 김형선은 성필의 제안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데뷔하는 아이돌이 의견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냐 싶은 것이고, 괜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두 다는 아니죠. 어디까지나 멤버들의 생각이 어떤지 알아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흠…….”
아리송해하는 김형선에게, 성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패션이란 건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거잖아요. 인간의 자아를 드러내는 수단이고요.”
“그렇죠.”
“다른 사람이 보고 싶은 모습의 옷이거나, 자신이 아니게 보이려고 입는 건 패션이 아니잖아요. 코스튬이지. 가로 엔터는 멤버들의 옷이 코스튬이 아니라 패션이길 바랍니다.”
너무도 거창하고 꿈이 담긴 이야기였다.
김형선 실장은 특이한 사람을 봤다는 듯 작게 웃기만 했다.
“알겠어요. 그럼 멤버분들과는 언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괜찮으시면 지금 바로라도 가능합니다.”
“예. 지금 할게요.”
김형선 실장이 회의실을 나섰다.
이유이 어시도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가, 성필을 향해 슬쩍 시선을 주었다.
그러다가 성필과 눈이 마주치자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움찔하더니, 급히 문을 나섰다.
“너한테 할 말 있는 거 같은데.”
“그러게. 뭘까?”
“번호 따려는 거 아니야?”
“이야. 드디어 나한테도 봄이 오네.”
성필은 유하음의 대타를 뛰러 갔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입 스타일리스트였나 보네. 아이돌 애들이 짓궂게 굴었구나.”
“빵을 던지는 게 그냥 짓궂은 수준은 아닌 거 같긴 한데……. 더 말하려다가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그냥 왔어.”
“이유이 어시님도 많이 서러웠겠다. 나이도 이제 20대 초반인데 그런 일을 당하고. 그 아이돌 애들이랑 나이 차도 얼마 안 날 텐데.”
“그렇겠지.”
스타일리스트라는 꿈을 안고 업계로 들어왔으나, 받는 대접이라곤 동년배 아이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라니.
성필이라도 눈물이 날 것이다.
안 그래도 스타일리스트의 처우는 좋지 않다.
2, 3년 차가 되기까지는 대부분 월급이 100만 원 아래다.
100만 원만 되어도 감지덕지다.
20만, 30만 원을 받고 일하는 스타일리스트도 널리고 널렸다.
‘최저시급 절반의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착취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열정 때문에.’
꼬우면 버텨서 경력을 쌓아라, 라고 선배들이 말하곤 한다.
하고 싶은 사람은 많고 자리는 없는 업계니까.
실제로 연차가 쌓이면 본인 능력에 따라 4, 500만 원을 버는 스타일리스트들도 많다.
하지만 지금 당장 착취당하는 신입 스타일리스트들에게, 단순히 ‘버텨라’라는 말이 얼마나 매정하게 들릴 것인가.
“그 순간에 왕자님처럼 네가 나타난 거 아니야? 보통 연예인한테 갑질 당해도 일거리 줄어들까 봐 쉬쉬하잖아. 그런데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웠을까.”
“뭔 왕자님이야. 소름 돋네.”
“아니, 나 같으면 그렇겠다고. 보통은 그냥 보고 지나가겠지. 누가 그런 데 끼어들겠어.”
“고작 말 몇 마디 가지고 뭔…….”
“너 여소 받을래?”
갑자기?
“내 친구 중에 연애 고프단 애 있거든. 너도 여친 없잖아.”
“그렇긴 한데…….”
“뭐야. 왜 고민해? 얼마 전엔 사람만 있으면 결혼하고 싶다며.”
“뭔데. 그거 어떻게 아는데.”
“아름이한테 들었는데?”
어이가 없네.
입이 이렇게 싼 애였다니.
“그래서 넌 어떠냐고.”
“그분 나이는 몇인데?”
“서른.”
“그런데 어떻게 누나랑 친구…….”
손혜빈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친구일 수도 있지. 몇 살 차이 안 나잖아?”
“그래. 우정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너도 리카랑 친구잖아.”
“그건 리카한테 들었어?”
“응.”
리카와 낙성 공원에 놀러 갔을 때, 밤 감성에 취해서 ‘난 너를 친구라고 생각해.’라고 했었다.
설마 리카가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줄이야.
이러다가 흑역사 모음집이라도 만들겠다.
“너도 연애 오래 쉬었잖아.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하루 놀다 온다고 생각해.”
“아니, 나도 나이가 나이니까. 이 시점에 만나는 사람이면 끝까지 가야 하지 않을까…….”
“고작 서른하나가 말도 잘하네.”
“음…….”
“하아, 결혼 상대 고르냐? 사진 보여줘? 아예 성격이랑 집안 사정까지 다 알아서 보고해줄까?”
“아니, 요즘 바쁠 때잖아. 지금 연애 시작하면 피곤할 거 같아서 그래.”
손혜빈은 허허 웃었다.
“넌 평생 결혼 못 하겠다.”
심장에 대못이 박힌 기분이다.
전생에서는 정말 일만 하느라 결혼은 꿈도 못 꿨다.
연애를 하면 상대는 성필이 일에 미쳤다며 질려 떠나가곤 했다.
“그러게…….”
“어? 농담으로 한 말인데 상처받은 거야?”
“아니, 그냥, 맞는 말인 거 같네.”
“이거 왜 이래.”
손혜빈이 성필에게 어깨동무했다.
“걱정 마. 누구든 너 안 데려가겠어? 마흔까지 상대 없으면 내가 너 데려갈게.”
“그럼 누나 나이는 마흔…….”
손혜빈이 성필의 목을 졸랐다.
잠시 후, 김형선 실장과 이유이가 돌아왔다. 김형선은 멤버들에게 들은 내용을 요약했다.
“패션 지식은 별로 없으시더라고요. 제가 이게 좋겠다, 저거 좋겠다 하고 사진 보여주니까 다들 고개만 끄덕이셨어요.”
예상했던 결과였다.
하지만 김형선이 멤버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단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저희 쪽에서 전체적인 샘플 잡아서 보내드릴게요. 그거 보시고 피드백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작 의상은 샘플 피팅하고 일러스트레이션으로도 보내드릴게요.”
그렇게 첫 번째 회의가 막을 내렸다.
손혜빈이 두 사람을 바래다주러 나갔고, 성필은 회의실에 남아서 김형선이 보여줬던 예시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했다.
‘좀 부족한데. 뮤비 감독님이랑 전체적인 스토리보드 짠 뒤에 다시 회의 잡아야겠어.’
곡, 안무, 의상, 뮤비는 4위일체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 헤어와 메이크업이 끼면 5위일체다.
모든 분야가 합쳐져서 최대한의 시너지를 끌어내야만 한다.
‘곡에 담긴 메시지로는 부족해. 뮤직비디오의 서사가 있어야 의상이 더 잘 나올 거야.’
뮤비 감독과의 미팅도 며칠 뒤로 잡혀 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더 빨리 했으면 좋겠다.
점점 데뷔가 가까워지자 성필도 몸이 달아올랐다. 빨리 완성된 멤버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리카, 설하 씨, 아라, 하양이, 아름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떤 아우라를 보여줄까.
상상만으로도 천국에 가 있는 듯했다.
‘애들 연습하는 거나 한 번 더 보자.’
성필은 룰루랄라 연습실로 향했다.
그러다가 2층 난간 아래로 쉬고 있는 백설하와 장하양이 눈에 잡혔다.
잠깐 고민하던 성필은 연습실 대신 1층을 택했다.
“설하 씨, 쉬시는 거예요?”
“아, 네. 방금 연습 한 타임 끝났어요.”
“고생하셨어요. 하양이도 연습 열심히 했어?”
“네. 엄청 열심히 했어요. 게으름 부리는 거 아니니까 때리지만 마세요.”
“……?”
장하양이 하하 웃으면서 손을 펼쳤다.
“농담!”
“…….”
“아하하…… 재미없나요?”
어떡하지.
웃으면서 바닥을 뒹굴까.
무슨 농담을 이렇게 맥락 없이 하지……?
“재밌었어. 엄청 재밌었어. 그러니까 날 떠나지만 말아주라.”
농담을 받아주자 장하양이 웃었다.
백설하는 어색하게 둘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 괴상한 대화에 도저히 끼어들 용기가 없는 듯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안무 얘기요. 어제 아름이랑 아라랑 댄스 배틀 했거든요. 시안 전부 외워서요.”
“그렇게 재밌는 걸 했는데 나를 안 불렀어?!”
“지금도 연습실에 가서 해달라고 하면 해줄 거예요.”
인생 절반 손해 본 기분이다.
당장이라도 올라가서 보고 싶었다.
“저희도 지금 연습실로 돌아갈 거였는데, 같이 가실래요?”
“네 네네 네네네!”
“아…… 네. 그럼 같이 가요.”
백설하는 성필이 리카와 점점 비슷해진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이 계단을 올라가려던 차, 회사 문이 열리며 손혜빈과 이유이가 들어왔다.
“어시님이 두고 간 거 있대서 같이 왔어. 회의실에 두셨다고요?”
“네, 네에, 아, 네.”
이유이는 왠지 모르게 매우 당황한 듯했다.
두 손을 가슴께에 꼭 모으고 시선을 어디 둘지 모른 채 방황하고 있었다.
“같이 가요.”
손혜빈은 이유이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성필과 백설하, 장하양의 뒤를 따라오는 모양새였다.
계단의 끝에서 성필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이유이에게 인사했다.
이제 각자 회의실과 연습실 방향으로 찢어질 것이다.
“아, 아…….”
이유이는 갈팡질팡 성필과 손혜빈을 번갈아 보았다.
이미 성필은 멤버들과 연습실로 가는 중이었다.
“이, 이이이, 이, 이사님!”
이유이가 크게 소리치자, 놀란 성필과 멤버들이 뒤로 돌아보았다.
이유이는 핸드폰을 소중히 쥐고 성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발걸음이 이리저리 꼬이는 것이, 마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그녀는 부끄러움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잔뜩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이유이가 핸드폰을 공손히 내밀었다.
“두, 두고 간 게 있는 게 아니라…….”
“네?”
“버, 버버, 번호 좀…….”
성필 포함, 다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손혜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짜 쟤한테 봄이 왔네.”